두 사람은 몇 마디 더 주고받고 통화를 끝냈다.전화를 끊고 난 고은서는 눈살을 찌푸렸다.만약 납치사건이 진짜 누군가가 뒤에서 부추긴 거라면 아마도 백유미가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고은서한테 제일 큰 원한이 있는 사람은 백유미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하마터면 능욕을 당할 뻔했다고 생각한 그녀는 화가 나서 두 주먹을 발끈 쥐었다.그녀는 받은 이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씩 배유미에게 돌려주기로 맹세했다.그녀는 애써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객실에 들어갔다.“은서야, 네가 좋아하는 과일 접시와 과일 샐러드를 만들어봤어, 어서 와서 먹어봐.”성아연이 과일 접시를 내오면서 인사했다.“성아연, 분명히 충고했다, 여기에서 헛수고하지 말라고. 이제는 너의 가식에 넘어갈 내가 아니거든!”그녀가 쌀쌀맞게 말하면서 내쫓았다.“부인하지도 말고 억울한 척도 하지 마.”고은서는 성아연의 연기를 중단시키면서 말했다.“내가 이 정도까지 말한 이상 네가 부린 수작을 다 알아버렸다는 뜻이니 그만 연기하고 꺼져줄래?”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성아연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있었다.“고은서! 나한테 고작 옷 몇 벌 사주고, 밥 몇 번 샀다고 유세 떠는 거니? 넌 우리의 우정을 헌 걸레짝 취급하는구나!”“앞으로 네가 시키는 대로만 하고 네가 쓴 돈도 다 돌려주겠다고 했잖아, 근데 무슨 불만이야!”이런 말들은 ‘쓰남어록에’만 있는가 했더니 가식녀들도 쓰네.고은서는 싸늘하게 웃으면서 약 올렸다.“돈은 돌려주면 받겠는데 우정은 관두자. 난 너 같은 가식녀는 딱 질색이니깐.”“너! 그만 나대!”성아연은 끝내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너야말로 강을 건너 다리를 헐든 가식녀야! 너네 고씨 가문은 방금 우리 아버지를 통해 계약했는데 벌써 얼굴을 바꾸니깐.”고은서의 말투는 더한층 차가워졌다.“난 너더러 이 다리 놓아달라 한 적 없어. 네가 기어이 이 다리를 놓아주는 척하면서 기회를 노려 또 그것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건 아니고?” 고은서의 침착한 표정을 보고 성아연은 왠지
어제 오전에 그는 화가 나서 전화를 끊었었다. 돌아오면 이혼하겠다면서 그녀에게 후회하지 말라고 경고까지 했다.이 상황에 그가 돌아오기 전까지 그들은 다시 연락할 일이 없을 텐데, 왜 갑자기 전화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갔지만,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하지만 전화기 너머는 조용했다.“승재씨?”고은서는 의아한 듯 한 번 더 불렀다.상대방은 여전히 응답하지 않는다.“신호가 없나? 대답하지 않으면 끊는다?”“콜록콜록...”귓가에 곽승재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은서야, 나 배고파.”뒤이어 곽승재의 쉰 듯한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곽승재가 올린 모멘트를 머릿속에 떠올린 그녀는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배가 고프면 먹을 걸 사러 가야지 왜 나한테 전화하는 건데?”곽승재는 또 연달아 기침을 둬 번 하고 나서 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예전부터 가문 위에서부터 전해 내려온 죽 쑤는 비법이 있는데, 그 비법대로 하면 끓인 죽이 찰지고 걸쭉해서 맛있다고 나한테 자랑했잖아.”‘자랑은 무슨, 그렇다고 알려주는 건데.’ 하지만 반박은 하지 않았다.“그래서?”“그 비방을 좀 전수해달라고, 내가 지금 막 당겨서.”‘내가 따끈따끈하게 쒀서 가져다 바칠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지금은 왜 비굴하게 굴어?' 그러나 곽승재의 목소리는 허약하고 맥없이 들려오기에 배가 매우 고파서 전화한 것이 분명하다.곽승재는 입이 몹시 까다롭다. 자기가 손수 만들어 먹으려는 정도면 그쪽 음식이 얼마나 그의 입맛에 안 맞는지 알 수가 있다.그녀는 과거의 일로 그와 옴니암니 따지기 싫었다.“알았어, 죽 끓이는 방법을 편집하여 문자로 넣어줄게.”곽승재는 또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은서는 그가 죽 끓이는 일이 번거로워 하는가 싶어서 말했다.“걱정 마, 아주 쉬워, 손만 있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어.”“은서야.”그녀가 재차 전화를 끊으려 할 무렵, 그가 또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또 무슨 일 있어?”전화기 건너에서 대답 대신 평소보다 더 무거운 숨소리만
나중에 바빠지면 다시 갈 시간도 없을 것 같으니 집에서 주인혁이 가르쳐준 호신술만 많이 연습하면 된다.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고, 고은서가 훈련관에 도착하기도 전에 주인혁으로부터 음성메시지를 받았다.[누나, 우린 1차 대회를 무사히 통과했고, 또 2차 선발을 진행하여 이미 50위 안에 들었어요.]주인혁의 즐거운 목소리를 들은 그녀도 기뻐했다.[진도를 앞당기길 위해 우린 아직 돌아갈 수 없어요. 곧 50대 30 시합을 진행하게 돼요. 잘 되면 감독님이 우리에게 CF 촬영기회를 주신다고 하셨어요.]주인혁은 계속하여 자신의 기쁨을 그녀와 공유했다.[비록 돈은 안 주지만, 노출 기회만 있다면 다른 광고를 받을 걱정은 안 해도 될 겁니다. 그때 가서 누나의 돈을 갚을 수 있어요.]주인혁의 말에 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한테 전화를 걸었다.“그러니깐 민혁 씨는 내 빚을 빨리 갚기 위해 이렇게 열심히 돈 벌고 있다는 거예요?”“당연히 아니지요!”주인혁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난 단지...”말을 얼버무린 주인혁은 아예 화제를 돌려버렸다.“누나, 제작진의 말에 의하면 30강에 오르면 술자리가 마련되는데 친구들을 초대할 수 있다고 해요. 만일 내가 순조롭게 통과되면 누나가 와줄 수 있나요?”“당근 문제없지요.”고은서가 호호 웃으면서 대답했다.평범한 사람이 서서히 스타로 변하는 것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도 특별한 체험인 것 같았다....다음 날 아침, 고은서가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나 앉아 휴대폰을 보니 부재중 전화 두 통이 들어와 있었는데, 장순이 아줌마와 할머니의 전화였다.엊저녁 자기 전에 마나모드를 눌러서 전화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었다.그녀는 이내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할머니, 절 찾으셨어요?”할머니는 약간 조급한 어투로 그녀더러 옛 주택으로 다녀오라고 했다.무슨 급한 일이 있나 싶어서 고은서는 바삐 달려갔다.할머니는 그녀를 보자마자 다급히 손을 잡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은서야, 아침에 승재의 비서가 나
10여 시간 후, 고은서는 드디어 M 국의 공항에 도착했다.주민기는 할머니한테서 소식을 들었는지 그녀가 짐을 들고 나갔을 때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사모님,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주민기가 예절 바르게 인사했다.“대표님이 호텔에서 쉬고 있는데, 사모님의 스케쥴이 바뀔까 봐 걱정되어 오신다는 얘기를 아직 해드리지 않았습니다.”‘스케쥴은 개뿔, 내가 후회해서 안 올까 봐 걱정되는 거겠지.'“승재씨 지금 어때요? 의사 선생은 만나봤나요?”“아직 열도 나고 기침도 합니다. 약만 드시고 의사는 아직 안 봤습니다.”주민기가 계속해서 말했다.“주요하게 이쪽 날씨는 추운데 대표님께서 옷을 너무 얇게 입은 탓에 감기 걸리셨습니다. 그런데도 쉬지도 않고 일만 하셨어요. 게다가 식사도 한 끼 제대로 하신 적 없지 해서 이렇게 심각해졌습니다.” 자신의 몸이 불편한 걸 알면서도 일밖에 모르니 참말로 모범적이라고 고은서는 속으로 비꼬았다.“대표님은 제 말을 안 들으셔요, 의사 만나러도 안 가시지. 제가 대표님 신체가 견뎌내지 못할까 봐 어쩔 수 없이 어르신님께 전화했습니다.”주민기가 다급히 해석했다.고은서는 웃으면서 아무 말도 안 했다.주민기는 그녀와 곽승재가 곧 이혼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그녀한테 직접 전화하기는 좀 그렇고 해서 할머니를 찾은 것이다. 손자를 아끼는 할머니가 반드시 그녀를 찾아올 테니까 말이다. 역시 곽승재의 유력한 조수답게 모든 방면을 면밀하게 안배했다.기사가 운전했고 주민기는 그녀를 대신하여 트렁크를 뒷좌석에 놓았고, 그는 조수석에 앉았다.길에서 주민기가 업무 전화를 몇 통 받았는데, 아마도 곽승재가 병이 나서 일부 업무가 그에게로 돌려진 것 같았다.이 순간, 그녀는 주민기를 이해했다. 그는 지금 곽승재 대신 업무도 처리해야 하고, 시중들기 어려운 상사까지 챙겨야 하니 분신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상황이었으니깐 말이다.몇십 분 후에 드디어 그들은 곽승재가 묵고 있는 호텔에 도착했다.주민기가 그녀의 짐을 들고 함께 엘리베
허약하고 무기력한 그의 상태를 지켜보던 그녀는 더는 붙는 불에 키질하지 않았다.“불편하면 뭘 하러 일어나, 그냥 누워 있어.”“이리 와서 부축 좀 해주지.”곽승재는 불편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핑계를 대지 않고 다가가서 곽승재를 부축하여 다시 침대로 돌아가 눕게 했다.침대 옆에 놓여있는 컴퓨터가 켜져 있는 것으로 봐서는 그가 틈틈이 일을 처리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목말라.”곽승재가 입을 열었다.고은서는 그가 환자라는 점을 봐서 더운물 받으러 밖으로 나갔다.한데 냉장고에 있는 생수를 제외하곤 뜨거운 물은커녕, 상온의 물도 없었다.그녀는 하는 수 없이 주전자에 물을 받아 끓이러 주방으로 갔다.스위트룸에는 간이 부엌이 딸려 있었지만, 새것처럼 깨끗하여 한눈에 봐도 아무도 건드린 흔적조차 없었다.그러니깐 곽승재가 전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죽 끓이는 방법을 물었지만, 전혀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뜨거운 물이 다 끓어 오르자 고은서는 곽승재에게 주려고 주전자를 기울여 컵에 따라 놓았다.그녀가 물을 받쳐 들고 방으로 들어가 보니 곽승재가 한창 컴퓨터 앞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이에 그녀는 한소리 했다.“일이란 한꺼번에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좀 제대로 쉬면 안 돼?”곽승재는 그녀를 힐끗 보고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고은서는 귀찮아 더는 말리지 않고 휴대폰으로 주위의 맛집을 찾아보기 시작했다.‘이왕 온 김에 현지 맛있는 음식은 먹어줘야지.'곽승재는 이것저것 가리는 음식이 많지만, 그녀는 뭐든지 잘 먹는다.“이쪽 음식은 다 맛이 없어 못 먹어, 당신이 직접 만들어 줘.”한창 음식집을 찾고 있는데 곽승재가 그녀에게 요구해왔다.“난 죽이 당겨.”고은서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 그는 컴퓨터를 접고 손에 물컵을 든 채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피식 웃고 말았다.“여봐요, 곽 도련님! 곽 대표님! 저는 할머니께 당신의 상황을 보러 오겠다고 약속했을 뿐, 당신을 시중들러 온 것은 아니거든. 먹고
워낙 아세아인은 본토인보다 몸체가 작은 데다가 고은서는 또한 동안이어서 금방 제법 잘생기고 자신감이 넘치는 사나이가 다가와서 그녀의 전화번호를 얻으려고 하면서 이쪽에서 학교 다니냐고 물었다.“죄송하지만, 이쪽은 제 아내라서 연락처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고은서가 대답하기도 전에 곽승재는 유창하고 정통한 영어로 그 남자가 걸어오는 작업을 막아버렸다.외국인 총각의 이목구비가 입체적이면서 멋있어도 훤칠하고 우뚝한 몸매를 가진 곽승재 앞에서는 오히려 평범해 보이기만 했다.특히 곽승재의 태고 난 귀티는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쉽게 주눅이 들게 한다.상대방도 더는 집적거리지 않고 ‘sorry’라는 말만 한마디 남기고 가버렸다.곽승재는 긴 팔을 내밀어 거절할 나위도 없이 고은서의 허리를 감쌌다.고은서가 몸부림치려고 하자, 곽승재가 검은 눈동자로 그녀를 지켜보면서 말했다.“당신 또 외간남자한테 작업 걸리고 싶어?”“승재 씨, 당신은 방에서 푹 쉬면 안 되겠어? 왜 계속 날 따라 다니려고 해?” 그녀는 화가 나서 투덜거렸다.그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그녀를 무지막지하게 감싸안고 밖에 있는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프렌치 레스토랑의 분위기는 아주 좋았고, 음식의 맛도 정통이지만, 음식을 만드는 데부터 식탁에 올릴 때까지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그들이 식사를 끝내고 나니 이미 몇 시간이 지났고 밖은 이미 어두워졌다.고은서는 비행기를 오래 탔고, 또 이렇게 몇 시간 동안 실랑이를 벌이다가 호텔로 들어가는 차에 오르니, 배불리 먹고 마신 그녀는 견디지 못하고 잠들었다.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잠결에 자신의 뒤에서 따스한 것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포근하고 따뜻한 이불이 그녀를 감싸주고 있어, 그녀는 차마 눈을 뜨기 아까울 정도로 편안했다.이어 그녀의 목덜미는 촉촉한 무엇인가에 덮인 듯한 약간 불편한 느낌이 들어 본능적으로 목을 움츠렸다.상대방이 멈추자 목덜미의 불편감이 사라지면서 그녀의 몸은 옮겨져 넓은 품으로 안기였고, 머리는 약간
아픔이 온몸으로 전해지자 고은서는 화가 상투 밑까지 올라왔다.비록 지금 곽승재가 병에 걸렸지만, 그의 힘은 고은서가 감당할 수 없었다.게다가 곽승재는 지금 무슨 충격을 받은 듯 점점 더 거치게 그녀에게 몰두했다. 그녀의 몸은 그에게 꽉 안겨서 뼈마저 부서질 것 같았고, 입술도 그에게 빨려서 얼얼해 나기 시작했다.고은서는 더이상 몸부림을 쳐봤자, 그 어떤 좋은 수도 없을 것 같아 아예 반항을 포기하고 곽승재가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바로 놓아주리라 생각했지만, 곽승재는 일부러 혼내주려는 듯 그녀의 입술은 물론 혀끝까지 거칠게 빨아당기었다. “음!”그녀는 아파서 못 견디는 소리를 내었고, 눈물도 생리통으로 인해 눈가로 흘러내렸다.견디기 힘든 그녀가 두 손을 내밀어 곽승재의 가슴팍을 두드리자, 그는 끝내 그녀의 입술을 놓아주었다.고은서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예쁜 눈을 동그랗게 치뜨고 그를 노려보았다.곽승재도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뜨겁게 달아오르는 눈으로 그녀를 지켜보면서 쉰 목소리로 물었다.“왜? 아파?”그가 다시 덮치기라도 할까 봐 그녀는 솟구치는 분노를 간신히 참으며 감히 욕도 비난도 못 하고 눈시울을 붉힌 채 쌕쌕 숨을 몰아쉬면서 되물었다.“그럼 안 아파?”“아파하라고 그런 거야.”곽승재는 손가락으로 그녀 눈가의 눈물 자국을 닦아 주면서 쉰 목소리로 말했다.“그러게 왜 고슴도치처럼 사람을 마구 찔러대?”말하면서 그의 손가락은 또다시 감각을 잃은 입술로 옮겨졌고 까만 눈동자는 마치 죽어가는 어린 짐승을 쳐다보듯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감히 반항하기라도 하면 당장 그녀를 다시 덮칠 것 같았다.고은서는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고 말았다.‘도대체 누가 누굴 막 찌른 건데?’자기가 그녀를 침대로 안고 가서 제멋대로 재미를 보았으면서, 그녀가 경찰에 신고 안 한 거만해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에 도리어 그녀를 탓하다니.고은서는 곽승재를 한 발로 차서 침대 밑으로 떨어뜨리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고 얼굴을 한쪽으로 홱
“그럼 어떻게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데?”고은서가 의심스러운 눈길로 그를 쳐다보면서 물었다.곽승재는 그녀의 등을 감싸 안은 손바닥에 한층 더 힘을 주어 조르고, 그녀의 턱에 멎은 손을 그녀의 얼굴로 옮겨서 가볍게 어루만졌다.“한 여자가 남자를 가장 즐겁게 하는 방식은 무엇이라고 생각해?”고은서는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라 잽싸게 곽승재의 손을 뿌리치면서 소리쳤다.“생각도 하지 마!”지난번에는 그녀가 약에 중독되어 제정신을 잃어서 그런 일이 생긴 거지, 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는 곽승재와 그런 친밀한 관계를 맺을 리 없었다.그들 사이의 갈등이 깊어질수록 이혼의 어려움은 커질 수밖에 없으니깐.“곽승재, 당신은 그냥 잠시 우리 사이의 일을 처리할 시간상 여유가 없을 뿐이니, 품격 없는 사람처럼 이런 기회조차 이용하여 나한테서 재미 보려고는 하지 마!”곽승재는 그녀의 쌀쌀맞고 거부하는 얼굴을 바라보더니 찬웃음을 지으면서 그녀를 놀려댔다.“난 그냥 당신이 M 국에 머물러 있는 동안, 나한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몇 끼 만들어 달라는 것뿐인데... 그러면 내 몸도 빨리 좋아지고 기분도 좋아질 거 아니야? 그런 당신은 뭘 바라고 있었는데? ”“...”고은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렇다면 직접 밥 챙겨달라고 말하면 되지, 왜 그런 애매한 행동을 해서 오해하게 하는 말을 하게 만드냐 말이야.’“내가 널 안고 올라오느라 진땀을 뺐는데, 혹시 그런 일까지 바라는 건 아니겠지?”곽승재는 그녀를 곁눈질하며 약 올렸다.“당신은 내가 환자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 있어?” 곽승재는 보라는 듯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숨을 헐떡이며 불편함과 허약함을 드러냈다.고은서는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럼 당신이 방금 내가 잠든 사이에 나한테 한 짓은 뭔데!”“그건 아까 네가 계속 내 품속으로 파고드는데, 난들 어떻게 너의 의도를 알 수 있겠어.”곽승재가 쉰 목소리로 그럴 듯 둘러댔다.어쨌든 아까는 그녀가 잠들었으니 그가 제멋대로 꾸며대도 된다.고은서는 그의
민시후의 의문에 고은서는 솔직하게 답했다.“여시은을 떠볼 기회를 찾고 싶어서.”“뭘 떠보고 싶은데?”고은서가 차분히 설명했다.“예전에 여시은이 나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어. 그런데 해성에 온 지도 꽤 됐는데 그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어.”보통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예전의 그녀가 곽승재에게 그랬듯이 그리고 지금의 민시후가 그녀에게 그러하듯이 하루라도 빨리 상대를 보고 싶어 했다.하지만 여시은은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면서도 전혀 초조하거나 그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좋아하는 사람에 관하여 얘기할 때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상대방이 자신의 감정을 모르고 있다고 하기도 했다.“그래서 난 여시은이 곽승재와의 정략 결혼설을 막지 않는 이유가 두 가지일 거로 생각해.”고은서는 차분히 분석했다.“첫째, 여시은이 그 소문을 이용해 좋아하는 남자가 긴장하고 다가오도록 유도하는 것. 둘째는 여시은이 좋아하는 사람이 곽승재일 가능성이야.”처음 서운에서 만났을 때 여시은은 곽승재를 한눈에 알아봤다.여시은이 1년 전 어느 술자리에서 봤다고 했지만 곽승재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그에 반해 여시은은 술자리에서의 일을 너무나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어쩌면 그때부터 곽승재에게 마음이 있었을지도 몰랐다.민시후는 고은서의 추측을 부정하는 대신 물었다.“너는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는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만약 여시은이 처음부터 곽승재를 좋아했다면 나를 경쟁자로 생각했을 거야. 그렇다면 여시은이 지금껏 보인 호의도 진심이 아닐 확률이 높지. 그리고 어젯밤 일도 여시은이 했을 확률이 더 높아지는 거지.”민시후는 그녀의 말을 듣고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은서야, 너 말이야. 곽승재를 좋아할지도 모르는 여자에 관해 얘기하면서도 무척 덤덤해. 이제 정말 곽승재를 완전히 내려놓은 거야? 그렇다면 나한테도 기회가 있는 거잖아.”고은서는 민시후를 흘겨보며 말했다.“난 지금 사랑에는 관심이 없어. 돈 버는 데만 집중할
민시후는 사무실 문을 닫고 고은서에게 말했다.“어젯밤 우리가 떠난 후 타이어 수리 업체가 현장에 도착했어. 업체 사람들은 예비 타이어로 교체한 후 차를 정비소로 가져갔어. 그런데 오늘 아침 확인해 보니 네 타이어 단순히 못이나 돌을 밟아서 찢어진 게 아니었어. 누군가 일부러 찔러 손상한 거야. 게다가 꽤 깊이 베였더라.”그 말을 들은 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어젯밤 그 사건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의 계획적인 행동이었다는 뜻인가?’먼저 그녀의 타이어를 망가뜨리고 두 떠돌이 남성이 꼭 지나칠 쓰레기통에 약을 탄 술과 음식을 배치했다. 고은서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약기운이 돌기 시작한 떠돌이들이 딱 맞춰 반응하도록 말이다.‘도대체 누가 이렇게까지 해서 나를 해치려고 하는 거지?’“타이어를 망가뜨린 사람 찾을 방법 있을까?”민시후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그 골목에는 CCTV가 없어. 뒤편은 전부 주택가라서 범인을 추적하기가 쉽지 않아.”“여시은 한번 조사해 보는 건 어때?”고은서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비록 아무런 증거도 없었지만 어젯밤 여시은의 행동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민시후는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은서야, 우리 정말 통하나 봐. 나도 여시은이 등장이 의심스러워서 사람 시켜 조사하고 있거든.”고은서가 민시후의 말에 답하기도 전에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화면에 뜬 여시은의 이름을 확인한 고은서가 민시후에게 핸드폰을 보여주며 말했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더니 이게 딱 그런 경우인가?’민시후가 콧방귀를 뀌었다.“대단한 배포네. 밖에서는 곽승재와 곧 정략결혼할 거라는 소문이 퍼졌는데도 너랑은 또 이렇게 친하게 지내는 걸 보면 말이야.”사실 고은서도 그 점이 이해되지 않았다.여시은은 줄곧 그녀에게 다정하게 대해 왔고 심지어 그녀와 곽승재를 이어주려고까지 했다.그러면서 곽승재와의 결혼설은 부정한 적이 없었다.여시은이 정말 원하지 않았다면 소문을 잠재울 방법은 얼마든지
고은서뿐만 아니라 송민아와 송민준도 민시후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살짝 놀랐다.민시후는 그들의 시선을 느끼긴 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고은서에게 붉은 장미 꽃다발을 내밀었다.화려하고 싱싱한 장미를 보고 고은서는 어리둥절해졌다.“이게 뭐야?”민시후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당당하게 말했다.“나 결심했어. 다시 은서 씨를 쫓아다닐 거야!”“은서 씨도 말했잖아, 어차피 1년 후에도 우리 가족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그럼 굳이 1년을 헛되이 보낼 필요 없잖아!”고은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자신의 거절이 오히려 민시후를 더 자극할 줄은 몰랐다.그때, 송민준이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민아야, 차에 고객이 선물한 체리가 있던데 가져와서 다 같이 나눠 먹자.”송민아는 오빠의 의도를 금방 알아차렸다.굳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송민준은 동생이 이 자리에 있는 게 불편할까 봐 배려해 준 것이다. 사실 ZY그룹에 있을 때도 민시후는 고은서에게 꽃다발을 준 적이 있었기에 송민아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시후가 과거에 송민아와 약혼했던 사람이라서, 이 자리가 확실히 어색했다.“알겠어.”송민아는 더 말하지 않고 사무실을 나갔다.여전히 장미를 들고 서 있던 민시후는 송민준을 발견하고 불쾌한 목소리로 물었다.“뭐야, 송 가주가 왜 또 여기 있는 거지?”송민준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민아를 보러 왔다가 마침 은서 씨랑 밖에서 만났어.”민시후는 관심 없다는 듯 다시 고은서에게 장미를 내밀었다.“장미가 마음에 안 들면 밑에 다른 꽃들도 준비해 놨으니까,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볼래?”고은서는 피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됐어.”이 꽃 한 다발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과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주목받고 싶지 않아 조용히 꽃을 받아들였다.“고마워. 하지만 다음부터는 이렇게 부담스럽게 하지 마.”민시후는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좋아하는 여자한테 꽃 선물하는 건 당연한 거야. 익숙해져야지!”그때 송민준이 의미심장한 미
민시후는 코웃음을 치며 비꼬았다.“또 우리 형 들먹이네? 곽승재, 너도 이 수밖에 안 되냐? 설마 나만 쫓아내면 은서 씨가 널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민시후의 말은 곽승재의 정곡을 찔렀고 그는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고은서는 예전처럼 그를 밀어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반갑게 맞아주지도 않았다.곽승재는 가슴이 답답해졌고 숨은 쉴 수 있었지만 속이 꽉 막힌 기분이었다. 마침 손을 씻고 다가온 고은서는 싸늘한 분위기를 보고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그저 곽승재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여기서 안 먹을 거면 아주머니한테 국만 싸달라고 해서 가져가.”곽승재는 자연스럽게 식탁에 앉으며 대답했다.“먹고 갈 거야.”고은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이미숙은 주방에서 빠져나왔고 남은 세 사람은 어색하지 않지만 편안하지도 않은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쳤다.식사 후, 피곤한 모습의 고은서를 본 민시후는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는 나가기 전에 곽승재까지 데리고 떠났다.다음 날 오전, 고은서는 경찰서에서 연락을 받았다.어젯밤 쓰레기를 뒤지며 살아가던 두 노숙자의 혈액 검사 결과, 불법 약물 성분이 검출되었다는 것이다.그 약물은 뇌를 자극해 이성을 잃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고은서를 덮치려 한 것이었다.문제는 그 약물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였다. 조사 결과, 노숙자들이 먹은 음식과 술에서 검출되었고 누군가 일부러 약을 탄 술과 음식을 버린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발생한 것인지는 추가 조사가 필요했다.고은서가 사무실로 돌아갔을 때, 회의실에는 송민아가 있었고 접견실 소파에는 송민준이 앉아 있었다.그날 개업식 이후, 고은서는 송민준을 다시 만난 적이 없었다.개업식에서 송민준의 정장을 엉망으로 만든 일이 마음에 걸린 고은서는 송민아에게 그가 입고 있던 정장이 얼마였는지 물어봤었다. 그러나 송민아는 단칼에 보상을 거절했다.“겨우 정장 한 벌일 뿐인데 무슨 보상이야! 그럴 필요 없어. 우리 오빠도
“나 마침 라이트문 아파트에 가려던 참이야.”고은서가 거절할 틈도 없이 곽승재는 낮고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주머니가 국을 끓였다고 하더라. 나한테 와서 가져가라고 했어.”원래 기분이 좋지 않던 민시후는 곽승재가 고은서네 가정부를 핑계 삼아 온 것을 보고 더 답답해졌다.“그래도 곽 대표가 데려다줄 필요는 없어!”그리고 이어 고은서를 향해 투정 부렸다.“나도 배고픈데. 내가 집까지 데려다주고 나도 뜨끈한 국 한 그릇 먹어도 될까?”민시후가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고은서는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그렇게 해.”그리하여 곽승재의 복잡한 표정 속에서 고은서는 민시후의 차에 올랐다.민시후의 차가 점점 멀어져갔지만 곽승재는 여전히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주민기는 밤바람 속에서 쓸쓸해 보이는 곽승재를 바라보며 안쓰러워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애써 여기까지 찾아왔건만 아내가 다른 남자와 다정하게 함께 있는 걸 목격하고 말았으니...’곽승재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심지어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하아... 대표님의 아내 되찾기 여정은 끝도 없이 험난하구나.’주민기가 속으로 한탄하던 중, 갑자기 곽승재의 시선이 그를 스쳤다.주민기는 몸을 바로 세우며 물었다.“대표님, 그래도 가시겠습니까?”곽승재는 입술을 꾹 다물고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사고가 났던 골목에 CCTV 설치해요. 그리고 사모님한테는 실력 좋은 운전사를 붙이도록 하세요.”“네, 대표님.”주민기가 고개를 끄덕였다.민시후는 그 길로 차를 몰아 고은서의 집에 도착했다.차를 세우고 막 올라가려는데 저쪽에서 막 도착한 곽승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직접 운전해서 온 듯했고, 비서는 곁에 없었다.민시후는 그가 거슬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다행히 고은서는 곽승재를 기다릴 생각이 없어 보였고 결국 두 사람은 먼저 위층으로 올라갔다.집에 들어서자 이미숙은 같이 들어온 두 사람을 보고 살짝 놀랐다.“사모님, 곽 대표님도 오신다고 하셨는데 같이 안 오셨나요?”
고은서는 일부러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시후 씨,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재벌가 아들이라는 신분이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는 거야?”“시후 씨가 가족 앞에서 나에 대한 감정이 없다고 말하면 아버님과 형도 그냥 이성 친구라 생각하고 괴롭히지 않을 거야.”민시후는 그녀의 농담에 신경 쓰지 않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내가 포기하기를 원하는 거야?”고은서는 다소 수척해진 민시후의 얼굴을 보고 조용히 말했다.“사실 시후 씨도 잘 알잖아. 1년이 지나도 가족분들은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걸.”“민씨 가문에선 나와 곽 씨 집안의 혼인 관계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을 거야.”만약 고은서가 예전에 평범한 남자와 결혼했다면 민씨 가문에서도 그걸 덮을 수 있었겠지만 곽승재의 전처라는 신분은 그들에게 너무 민감하고 큰 문제였다.민씨 가문 같은 재벌 집안에서 가장 중요한 건 체면이기에 그녀가 며느리가 되는 걸 결코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고은서는 진지하게 말했다.“그러니 더 이상 고집부리지 말고 예전처럼 자유로운 삶을 살아.”“은서 씨, 아직도 내 마음을 믿지 못하는 거야?”민시후의 눈에 어두운 그늘이 깔렸다.“아니, 시후 씨 마음을 알아. 문제는 나야.”고은서가 계속해서 말했다.“만약 내가 정말 시후 씨를 사랑했다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함께할 수 있었을 거야. 시후 씨 가족의 태도나 외부의 시선도 개의치 않고 말이야. 하지만 내게는 그만큼 시후 씨에 대한 감정이 부족해. 그래서 시후 씨 가족분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다른 외부적인 이유도 나를 주저하게 만들지. 그래서 나는...”민시후가 갑자기 고은서를 끌어안으며 급하게 말했다.“그러지 마, 나에게 기회를 준다고 약속했잖아.”고은서는 마음속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그녀는 살며시 민시후를 밀어내며 말했다. “내가 한 말이 다 사실이라는걸 시후 씨도 알 거야. 그러니 그런 고집은 의미가 없어.”민시후는 여전히 고은서를 끌어안고 있었
고은서가 계속해서 뒤를 보고 있자 민시후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매번 여시은이 나타나면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 같아.”고은서가 민시후를 바라봤다. 설마 그렇겠냐고 말하다 곧 그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처음 여시은을 만난 건 고양이 쿠아를 구할 때였다. 그 후 서운에서 여시은의 방에서 불이 났고, 이사 파티에서는 민시후가 함정에 빠졌다.유일 투자은행 개업식에서 페인트가 뿌려졌고 지난번 골프장에서는 곽현수와 골프를 치던 장우현도 다쳤었다.모든 사건이 여시은이 직접 일으킨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이렇게 많은 우연이 있을까?’‘하지만 만약 우연이 아니었다면 여시은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고은서는 더 이상 추측하지 않기로 했다. “고객을 만나러 간다며? 나를 병원 앞에 내려주면 돼.”민시후는 약간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그깟 고객 때문에 다친 너를 그냥 두고 가는 사람 같아 보여?”고은서는 헛기침을 한 번 하며 말했다.“중요한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민시후가 고은서를 바라보며 감정을 억누른 채 물었다.“왜 혼자 이런 곳에 왔어? 비서도 기사도 없이?”“새 프로젝트 때문에 온 거야. 그 회사의 작업실이 근처에 있거든.”고은서는 사실대로 말했다.“운전기사 부를 시간이 없었고 송민아는 다른 프로젝트로 바빠서 이번엔 그냥 혼자 왔어.”민시후는 다시 한번 말없이 고은서를 바라보았다. 다만 조금 더 차분해 보였고 무언가 애써 참는 것처럼 보였다.고은서의 요청대로 민시후는 그녀를 근처의 한 동네 병원에 데려갔다.동네 병원은 예약이 필요 없었고 진료도 비교적 간편했다.다행히 고은서의 팔에 난 상처는 깊지 않았다. 하지만 약 10cm 정도 되는 길이의 상처였고 지금은 더 이상 피가 나지 않았지만 주변이 이미 검붉게 부어 있어 보기에 꽤 충격적이었다.의사는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발라준 후, 파상풍 예방주사도 맞혔다.고은서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시은 씨, 전 괜찮아요.”고은서는 팔이 조금 아팠지만 상처를 보니 긁혔을 뿐 살까지 깊게 파고들지 않아 구급차를 부를 정도는 아니었다.“약국에 가서 씻고 약만 바르면 돼요. 경찰이 올 때까지 기다릴게요.”“그래도 병원에 가는 게 좋겠어요!” 여시은이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혹시라도 감염되면 큰일이에요! 제 기사님이 앞에 있어요. 그분이 병원에 데려다 줄 거예요. 저가 대신 여기서 경찰을 기다릴게요!”말을 마친 여시은은 고은서가 거절할 새도 없이 자기 사를 부르러 갔다.“은서 씨?”도로 옆에서 깜짝 놀란 듯 급하게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고은서가 고개를 돌리니 하얀색 캐주얼 슈트를 입고 차에서 뛰어 내려오는 민시후의 모습이 보였다.개업식 때 민시후가 고은서를 도와 성동욱 일을 처리해 준 후, 그녀와는 거의 연락 하지 않았다. 그의 비서가 두 번 전화를 걸어 도와줄 일이 있는지 물어왔으며 민시후가 최근 업무 때문에 너무 바빠서 살도 빠졌다는 얘기를 했었다.눈앞에서 다가오는 민시후를 보고 고은서는 갑자기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왜 여기에 있어? 손은 왜 그래?” 민시후는 고은서의 손을 잡고 긴장하며 물었다.“별거 아니 야.” 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노숙자들과 싸우다 철판에 긁혔어. 다행히 살까지 파고들지 않은 것 같아. 시후 씨는 어떻게 여기 있어?”“고객과 약속이 있어서 지나가던 길이야!”그때 여시은의 운전기사가 다가왔다. “지금 병원에 모셔다드릴까요?”여시은이 웃으며 말했다. “민시후 씨가 계시니 저는 빠져도 될 것 같아요. 빨리 은서 씨를 병원에 데려다주세요!”“시은 씨는 어떻게 여기에 계세요?” 민시후가 물었다.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이 여시은과는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그녀의 가정부가 관련되었기 때문에 민시후는 그녀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지 않았다. 그의 태도는 어쩔 수 없이 차가워졌다.여시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지만 여전히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 “여기 유명한 동물
게임 회사의 작업실은 다소 오래된 작은 아파트 단지에 위치해 있었고 단지에는 경비나 순찰을 하는 경비원도 없었다.골목에는 가로등이 있었지만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 비해 꽤 외진 곳이었다.차는 골목에 주차되어 있었고 고은서는 핸드폰에 집중하느라 주변 상황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두 남자를 알아챘을 때는 이미 그들이 바로 눈앞까지 다가왔다.두 남자는 하나는 마르고 키가 컸고 다른 하나는 까무잡잡했다. 그들은 헤진 옷을 입고 있었고 손에 든 짐 꾸러미에는 많은 쓰레기가 담겨 있었다. 아마도 근처에서 쓰레기를 주워 생계를 잇는 사람들인 듯했고 몸에서는 고약한 악취가 났다.고은서는 속으로 구역질을 참으며 본능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섰다.하지만 그녀는 차 옆에 서 있었기 때문에 한발 물러서자 차에 기대게 되었다.이제 차 문을 열고 들어가기는 이미 늦었고 두 남자가 점점 다가오고 있어 도망칠 수도 없었다.두 남자의 눈가는 이상하리만치 붉었고 고은서를 발견하자 점점 더 흥분된 듯 보였다. 그들은 입에서 지저분한 욕설을 뱉으며 다가왔다.“젠장, 오늘 운이 정말 좋아! 이 근처 쓰레기통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울 수 있을 줄 몰랐네. 게다가 이렇게 예쁜 여자도 만날 줄은!”“그렇지, 도시의 여자는 역시 다르네. 이 피부를 보라고. 아주 보드라워! 하하하, 집으로 끌고 가서 잘 놀아보자고!”그때, 악취 나는 마르고 키 큰 남자가 더럽게 손을 뻗으려 했고 고은서는 눈살을 찌푸리며 남자의 아랫배를 향해 강하게 발길질했다!갑작스러운 공격에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아랫배를 움켜잡고 무릎을 꿇었다.까무잡잡한 남자는 그제야 반응해 고은서를 잡으려 했고 고은서는 틈을 타 재빨리 몸을 틀어 그에게 발차기를 날렸다!하지만 남자는 상대적으로 더 강한 체격을 가졌고 고은서는 서 있는 자세 때문에 힘을 제대로 실을 수 없어 그를 넘어뜨리지 못했다.그러자 남자는 화가 난 듯 욕설을 퍼부으며 팔을 휘둘러 고은서를 향해 달려왔다.고은서는 민첩하게 몸을 낮추며 땅에 떨어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