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는 민시후가 그녀의 팔을 잡고 호텔 로비로 함께 들어가는 사진을 접수했다.발송인은 원지훈이었다. 이어서 그는 문자까지 보내왔다.[누나, 이 사진을 누나 남편이 본다면 어떨 거 같아요?]송민아의 경고가 먼저일 줄 알았는데 생각 밖으로 원지훈이 앞섰다.고은서는 차갑게 웃고 답장을 보냈다.[그래서 어쩌자는 건데?][누나, 걱정하지 말아요, 난 원래부터 입이 무거운 데다가 또 누나가 은혜 씨의 사촌 언니인데 함부로 터뜨리지 않을 테니깐. 사진을 보내는 의도는 보는 눈도 많은데 드나들 때 특히 조심 좀 하시라고 귀띔 드리는 겁니다.][시간 나면 같이 커피나 한잔해.]원지훈의 속셈을 그녀가 모를 리가 없다. 그는 고은서가 곽승재한테 냉대를 받아 이런 방식으로 보복하는 거로 알고 이참에 돈을 뜯으려 하는 것이다. 그는 그녀가 돈 많고 호락호락 한 여자로만 보였기 때문이다.원지훈이 그녀의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차라리 이참에 그를 접근하면 나중에 일이 많이 쉬워질 것 같아서 친한 척했다.[좋아요. 지금은 제가 회사 일로 정신없으니, 며칠 후에 누나에게 연락할게요.]원지훈은 예상한 대로 시원하게 대답했다.원지훈을 대처하고 나서 이내 도아름에게 연락하여 계약서에 관련한 자기의 걱정을 말해주었다. 도아름은 잠깐 생각을 하고 나서 그녀에게 분석해 주었다.“상대방이 진짜 함정을 파려고 한다면, 설령 협의서에 문제가 없더라도 화물접수 등등의 방면에서 명예에 훼손하는 수단은 많고도 많아요.”“물론 품질과 납기를 엄격하게 지키고 도중에 오차가 발생하지 않으면 별문제 없을 거 같은데요.”“너무 걱정하지 말고 좋게 생각해요. 어쨌든 큰 오던데 잘되면 이름도 날리고 돈도 벌 수 있고 좋은 일이지요.”도아름은 괜찮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었다.일이 이렇게 된 이상, 별다른 방법은 없었다.외삼촌은 원래부터 듬직하지 못하기에 하루라도 빨리 믿음직한 부사장감을 물색하여 옆에서 그를 보조해줘야 한다고 생각한 고은서는 이 일을 도아름에게 부탁했다
두 사람은 몇 마디 더 주고받고 통화를 끝냈다.전화를 끊고 난 고은서는 눈살을 찌푸렸다.만약 납치사건이 진짜 누군가가 뒤에서 부추긴 거라면 아마도 백유미가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고은서한테 제일 큰 원한이 있는 사람은 백유미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하마터면 능욕을 당할 뻔했다고 생각한 그녀는 화가 나서 두 주먹을 발끈 쥐었다.그녀는 받은 이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씩 배유미에게 돌려주기로 맹세했다.그녀는 애써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객실에 들어갔다.“은서야, 네가 좋아하는 과일 접시와 과일 샐러드를 만들어봤어, 어서 와서 먹어봐.”성아연이 과일 접시를 내오면서 인사했다.“성아연, 분명히 충고했다, 여기에서 헛수고하지 말라고. 이제는 너의 가식에 넘어갈 내가 아니거든!”그녀가 쌀쌀맞게 말하면서 내쫓았다.“부인하지도 말고 억울한 척도 하지 마.”고은서는 성아연의 연기를 중단시키면서 말했다.“내가 이 정도까지 말한 이상 네가 부린 수작을 다 알아버렸다는 뜻이니 그만 연기하고 꺼져줄래?”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성아연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있었다.“고은서! 나한테 고작 옷 몇 벌 사주고, 밥 몇 번 샀다고 유세 떠는 거니? 넌 우리의 우정을 헌 걸레짝 취급하는구나!”“앞으로 네가 시키는 대로만 하고 네가 쓴 돈도 다 돌려주겠다고 했잖아, 근데 무슨 불만이야!”이런 말들은 ‘쓰남어록에’만 있는가 했더니 가식녀들도 쓰네.고은서는 싸늘하게 웃으면서 약 올렸다.“돈은 돌려주면 받겠는데 우정은 관두자. 난 너 같은 가식녀는 딱 질색이니깐.”“너! 그만 나대!”성아연은 끝내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너야말로 강을 건너 다리를 헐든 가식녀야! 너네 고씨 가문은 방금 우리 아버지를 통해 계약했는데 벌써 얼굴을 바꾸니깐.”고은서의 말투는 더한층 차가워졌다.“난 너더러 이 다리 놓아달라 한 적 없어. 네가 기어이 이 다리를 놓아주는 척하면서 기회를 노려 또 그것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건 아니고?” 고은서의 침착한 표정을 보고 성아연은 왠지
어제 오전에 그는 화가 나서 전화를 끊었었다. 돌아오면 이혼하겠다면서 그녀에게 후회하지 말라고 경고까지 했다.이 상황에 그가 돌아오기 전까지 그들은 다시 연락할 일이 없을 텐데, 왜 갑자기 전화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갔지만,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하지만 전화기 너머는 조용했다.“승재씨?”고은서는 의아한 듯 한 번 더 불렀다.상대방은 여전히 응답하지 않는다.“신호가 없나? 대답하지 않으면 끊는다?”“콜록콜록...”귓가에 곽승재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은서야, 나 배고파.”뒤이어 곽승재의 쉰 듯한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곽승재가 올린 모멘트를 머릿속에 떠올린 그녀는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배가 고프면 먹을 걸 사러 가야지 왜 나한테 전화하는 건데?”곽승재는 또 연달아 기침을 둬 번 하고 나서 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예전부터 가문 위에서부터 전해 내려온 죽 쑤는 비법이 있는데, 그 비법대로 하면 끓인 죽이 찰지고 걸쭉해서 맛있다고 나한테 자랑했잖아.”‘자랑은 무슨, 그렇다고 알려주는 건데.’ 하지만 반박은 하지 않았다.“그래서?”“그 비방을 좀 전수해달라고, 내가 지금 막 당겨서.”‘내가 따끈따끈하게 쒀서 가져다 바칠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지금은 왜 비굴하게 굴어?' 그러나 곽승재의 목소리는 허약하고 맥없이 들려오기에 배가 매우 고파서 전화한 것이 분명하다.곽승재는 입이 몹시 까다롭다. 자기가 손수 만들어 먹으려는 정도면 그쪽 음식이 얼마나 그의 입맛에 안 맞는지 알 수가 있다.그녀는 과거의 일로 그와 옴니암니 따지기 싫었다.“알았어, 죽 끓이는 방법을 편집하여 문자로 넣어줄게.”곽승재는 또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은서는 그가 죽 끓이는 일이 번거로워 하는가 싶어서 말했다.“걱정 마, 아주 쉬워, 손만 있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어.”“은서야.”그녀가 재차 전화를 끊으려 할 무렵, 그가 또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또 무슨 일 있어?”전화기 건너에서 대답 대신 평소보다 더 무거운 숨소리만
나중에 바빠지면 다시 갈 시간도 없을 것 같으니 집에서 주인혁이 가르쳐준 호신술만 많이 연습하면 된다.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고, 고은서가 훈련관에 도착하기도 전에 주인혁으로부터 음성메시지를 받았다.[누나, 우린 1차 대회를 무사히 통과했고, 또 2차 선발을 진행하여 이미 50위 안에 들었어요.]주인혁의 즐거운 목소리를 들은 그녀도 기뻐했다.[진도를 앞당기길 위해 우린 아직 돌아갈 수 없어요. 곧 50대 30 시합을 진행하게 돼요. 잘 되면 감독님이 우리에게 CF 촬영기회를 주신다고 하셨어요.]주인혁은 계속하여 자신의 기쁨을 그녀와 공유했다.[비록 돈은 안 주지만, 노출 기회만 있다면 다른 광고를 받을 걱정은 안 해도 될 겁니다. 그때 가서 누나의 돈을 갚을 수 있어요.]주인혁의 말에 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한테 전화를 걸었다.“그러니깐 민혁 씨는 내 빚을 빨리 갚기 위해 이렇게 열심히 돈 벌고 있다는 거예요?”“당연히 아니지요!”주인혁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난 단지...”말을 얼버무린 주인혁은 아예 화제를 돌려버렸다.“누나, 제작진의 말에 의하면 30강에 오르면 술자리가 마련되는데 친구들을 초대할 수 있다고 해요. 만일 내가 순조롭게 통과되면 누나가 와줄 수 있나요?”“당근 문제없지요.”고은서가 호호 웃으면서 대답했다.평범한 사람이 서서히 스타로 변하는 것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도 특별한 체험인 것 같았다....다음 날 아침, 고은서가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나 앉아 휴대폰을 보니 부재중 전화 두 통이 들어와 있었는데, 장순이 아줌마와 할머니의 전화였다.엊저녁 자기 전에 마나모드를 눌러서 전화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었다.그녀는 이내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할머니, 절 찾으셨어요?”할머니는 약간 조급한 어투로 그녀더러 옛 주택으로 다녀오라고 했다.무슨 급한 일이 있나 싶어서 고은서는 바삐 달려갔다.할머니는 그녀를 보자마자 다급히 손을 잡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은서야, 아침에 승재의 비서가 나
10여 시간 후, 고은서는 드디어 M 국의 공항에 도착했다.주민기는 할머니한테서 소식을 들었는지 그녀가 짐을 들고 나갔을 때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사모님,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주민기가 예절 바르게 인사했다.“대표님이 호텔에서 쉬고 있는데, 사모님의 스케쥴이 바뀔까 봐 걱정되어 오신다는 얘기를 아직 해드리지 않았습니다.”‘스케쥴은 개뿔, 내가 후회해서 안 올까 봐 걱정되는 거겠지.'“승재씨 지금 어때요? 의사 선생은 만나봤나요?”“아직 열도 나고 기침도 합니다. 약만 드시고 의사는 아직 안 봤습니다.”주민기가 계속해서 말했다.“주요하게 이쪽 날씨는 추운데 대표님께서 옷을 너무 얇게 입은 탓에 감기 걸리셨습니다. 그런데도 쉬지도 않고 일만 하셨어요. 게다가 식사도 한 끼 제대로 하신 적 없지 해서 이렇게 심각해졌습니다.” 자신의 몸이 불편한 걸 알면서도 일밖에 모르니 참말로 모범적이라고 고은서는 속으로 비꼬았다.“대표님은 제 말을 안 들으셔요, 의사 만나러도 안 가시지. 제가 대표님 신체가 견뎌내지 못할까 봐 어쩔 수 없이 어르신님께 전화했습니다.”주민기가 다급히 해석했다.고은서는 웃으면서 아무 말도 안 했다.주민기는 그녀와 곽승재가 곧 이혼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그녀한테 직접 전화하기는 좀 그렇고 해서 할머니를 찾은 것이다. 손자를 아끼는 할머니가 반드시 그녀를 찾아올 테니까 말이다. 역시 곽승재의 유력한 조수답게 모든 방면을 면밀하게 안배했다.기사가 운전했고 주민기는 그녀를 대신하여 트렁크를 뒷좌석에 놓았고, 그는 조수석에 앉았다.길에서 주민기가 업무 전화를 몇 통 받았는데, 아마도 곽승재가 병이 나서 일부 업무가 그에게로 돌려진 것 같았다.이 순간, 그녀는 주민기를 이해했다. 그는 지금 곽승재 대신 업무도 처리해야 하고, 시중들기 어려운 상사까지 챙겨야 하니 분신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상황이었으니깐 말이다.몇십 분 후에 드디어 그들은 곽승재가 묵고 있는 호텔에 도착했다.주민기가 그녀의 짐을 들고 함께 엘리베
허약하고 무기력한 그의 상태를 지켜보던 그녀는 더는 붙는 불에 키질하지 않았다.“불편하면 뭘 하러 일어나, 그냥 누워 있어.”“이리 와서 부축 좀 해주지.”곽승재는 불편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핑계를 대지 않고 다가가서 곽승재를 부축하여 다시 침대로 돌아가 눕게 했다.침대 옆에 놓여있는 컴퓨터가 켜져 있는 것으로 봐서는 그가 틈틈이 일을 처리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목말라.”곽승재가 입을 열었다.고은서는 그가 환자라는 점을 봐서 더운물 받으러 밖으로 나갔다.한데 냉장고에 있는 생수를 제외하곤 뜨거운 물은커녕, 상온의 물도 없었다.그녀는 하는 수 없이 주전자에 물을 받아 끓이러 주방으로 갔다.스위트룸에는 간이 부엌이 딸려 있었지만, 새것처럼 깨끗하여 한눈에 봐도 아무도 건드린 흔적조차 없었다.그러니깐 곽승재가 전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죽 끓이는 방법을 물었지만, 전혀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뜨거운 물이 다 끓어 오르자 고은서는 곽승재에게 주려고 주전자를 기울여 컵에 따라 놓았다.그녀가 물을 받쳐 들고 방으로 들어가 보니 곽승재가 한창 컴퓨터 앞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이에 그녀는 한소리 했다.“일이란 한꺼번에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좀 제대로 쉬면 안 돼?”곽승재는 그녀를 힐끗 보고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고은서는 귀찮아 더는 말리지 않고 휴대폰으로 주위의 맛집을 찾아보기 시작했다.‘이왕 온 김에 현지 맛있는 음식은 먹어줘야지.'곽승재는 이것저것 가리는 음식이 많지만, 그녀는 뭐든지 잘 먹는다.“이쪽 음식은 다 맛이 없어 못 먹어, 당신이 직접 만들어 줘.”한창 음식집을 찾고 있는데 곽승재가 그녀에게 요구해왔다.“난 죽이 당겨.”고은서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 그는 컴퓨터를 접고 손에 물컵을 든 채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피식 웃고 말았다.“여봐요, 곽 도련님! 곽 대표님! 저는 할머니께 당신의 상황을 보러 오겠다고 약속했을 뿐, 당신을 시중들러 온 것은 아니거든. 먹고
워낙 아세아인은 본토인보다 몸체가 작은 데다가 고은서는 또한 동안이어서 금방 제법 잘생기고 자신감이 넘치는 사나이가 다가와서 그녀의 전화번호를 얻으려고 하면서 이쪽에서 학교 다니냐고 물었다.“죄송하지만, 이쪽은 제 아내라서 연락처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고은서가 대답하기도 전에 곽승재는 유창하고 정통한 영어로 그 남자가 걸어오는 작업을 막아버렸다.외국인 총각의 이목구비가 입체적이면서 멋있어도 훤칠하고 우뚝한 몸매를 가진 곽승재 앞에서는 오히려 평범해 보이기만 했다.특히 곽승재의 태고 난 귀티는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쉽게 주눅이 들게 한다.상대방도 더는 집적거리지 않고 ‘sorry’라는 말만 한마디 남기고 가버렸다.곽승재는 긴 팔을 내밀어 거절할 나위도 없이 고은서의 허리를 감쌌다.고은서가 몸부림치려고 하자, 곽승재가 검은 눈동자로 그녀를 지켜보면서 말했다.“당신 또 외간남자한테 작업 걸리고 싶어?”“승재 씨, 당신은 방에서 푹 쉬면 안 되겠어? 왜 계속 날 따라 다니려고 해?” 그녀는 화가 나서 투덜거렸다.그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그녀를 무지막지하게 감싸안고 밖에 있는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프렌치 레스토랑의 분위기는 아주 좋았고, 음식의 맛도 정통이지만, 음식을 만드는 데부터 식탁에 올릴 때까지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그들이 식사를 끝내고 나니 이미 몇 시간이 지났고 밖은 이미 어두워졌다.고은서는 비행기를 오래 탔고, 또 이렇게 몇 시간 동안 실랑이를 벌이다가 호텔로 들어가는 차에 오르니, 배불리 먹고 마신 그녀는 견디지 못하고 잠들었다.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잠결에 자신의 뒤에서 따스한 것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포근하고 따뜻한 이불이 그녀를 감싸주고 있어, 그녀는 차마 눈을 뜨기 아까울 정도로 편안했다.이어 그녀의 목덜미는 촉촉한 무엇인가에 덮인 듯한 약간 불편한 느낌이 들어 본능적으로 목을 움츠렸다.상대방이 멈추자 목덜미의 불편감이 사라지면서 그녀의 몸은 옮겨져 넓은 품으로 안기였고, 머리는 약간
아픔이 온몸으로 전해지자 고은서는 화가 상투 밑까지 올라왔다.비록 지금 곽승재가 병에 걸렸지만, 그의 힘은 고은서가 감당할 수 없었다.게다가 곽승재는 지금 무슨 충격을 받은 듯 점점 더 거치게 그녀에게 몰두했다. 그녀의 몸은 그에게 꽉 안겨서 뼈마저 부서질 것 같았고, 입술도 그에게 빨려서 얼얼해 나기 시작했다.고은서는 더이상 몸부림을 쳐봤자, 그 어떤 좋은 수도 없을 것 같아 아예 반항을 포기하고 곽승재가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바로 놓아주리라 생각했지만, 곽승재는 일부러 혼내주려는 듯 그녀의 입술은 물론 혀끝까지 거칠게 빨아당기었다. “음!”그녀는 아파서 못 견디는 소리를 내었고, 눈물도 생리통으로 인해 눈가로 흘러내렸다.견디기 힘든 그녀가 두 손을 내밀어 곽승재의 가슴팍을 두드리자, 그는 끝내 그녀의 입술을 놓아주었다.고은서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예쁜 눈을 동그랗게 치뜨고 그를 노려보았다.곽승재도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뜨겁게 달아오르는 눈으로 그녀를 지켜보면서 쉰 목소리로 물었다.“왜? 아파?”그가 다시 덮치기라도 할까 봐 그녀는 솟구치는 분노를 간신히 참으며 감히 욕도 비난도 못 하고 눈시울을 붉힌 채 쌕쌕 숨을 몰아쉬면서 되물었다.“그럼 안 아파?”“아파하라고 그런 거야.”곽승재는 손가락으로 그녀 눈가의 눈물 자국을 닦아 주면서 쉰 목소리로 말했다.“그러게 왜 고슴도치처럼 사람을 마구 찔러대?”말하면서 그의 손가락은 또다시 감각을 잃은 입술로 옮겨졌고 까만 눈동자는 마치 죽어가는 어린 짐승을 쳐다보듯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감히 반항하기라도 하면 당장 그녀를 다시 덮칠 것 같았다.고은서는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고 말았다.‘도대체 누가 누굴 막 찌른 건데?’자기가 그녀를 침대로 안고 가서 제멋대로 재미를 보았으면서, 그녀가 경찰에 신고 안 한 거만해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에 도리어 그녀를 탓하다니.고은서는 곽승재를 한 발로 차서 침대 밑으로 떨어뜨리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고 얼굴을 한쪽으로 홱
“곽 대표님은 제가 그렇게 싫으세요? 병뚜껑 열어주는 것조차 꺼릴 만큼?”여시은의 말투에는 약간의 유감과 억지로 짜낸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곽승재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시은 씨가 원하는 건 물을 마시는 결과가 아닌가요? 물을 마실 수 있으면 되지, 누가 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잖아요.”“왜 중요하지 않아요?”여시은은 눈을 깜박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저는 곽 대표님이 열어준 병의 물만 마시고 싶은데요.”노골적인 애정 공세에 곽승재는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여시은은 전혀 민망한 기색이 없이 여전히 공세를 이어갔다.“솔직히 말할게요.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두 집안 어른의 뜻대로 조금씩 알아가면 안 될까요?”곽승재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우리 집안에서 할머니와 어머니는 정략결혼을 반대하세요. 아버지의 일방적인 희망 사항일 뿐이죠.”“그리고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는 재혼 계획이 없습니다.”여시은은 여전히 달콤한 미소를 유지했다.“당장 결혼하자는 뜻은 아니에요. 어쩌면 만나다가 전혀 안 맞는다는 걸 깨달을 수도 있잖아요?”“그럴 필요 없어요. 저는 시은 씨와 맞지 않아요.”곽승재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고은서는 원래 활발하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저와 결혼한 후 시들어버렸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방법을 다해 저한테서 도망쳤어요. 이혼한 후 그 여자는 다시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됐죠. 그러니 저는 남편으로 자격 미달이에요.”“시은 씨는 여 회장님께서 애지중지하는 따님이고 조건이 우월하니 더 나은 남자를 만나셔야죠.”여시은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저는 고은서와 달라요. 고은서는 완전한 사랑을 원했지만 저는 조건이 맞는 파트너면 돼요.”“사랑이 있으면 금상첨화이고 없어도 상관없어요.”그녀는 돌직구를 날렸다.“제가 고은서보다 승재 씨에게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고은서 만큼 똑똑하거나 유능하지는 않지만, 이게 남자들에게는 장
“아니, 유일 투자은행 개업식에서 여재훈 씨가 테이프 커팅에 참석했었잖아. 그때 외할아버지와 삼촌도 있었는데 서로 아는 눈치가 아니었어.”고은서는 말을 이어갔다.“당신도 우리 삼촌을 알잖아. 조금이라도 연줄이 될 만한 사람이라면 절대 놓치지 않지. 여재훈 씨와 단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었다면 당장 달려가서 인사하고 관계를 맺으려고 했을 거야.”사실 그날 삼촌은 여재훈과 안면을 트려고 했지만, 여재훈 주변에 중요 인물들이 너무 많아 접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외할아버지가 말리는 바람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여시은이 오직 당신 때문에 나를 저격하는 거라고 생각해.”“당신들 둘이 Y국에서 만난 적 있잖아. 여시은은 그때 당신에게 첫눈에 반했을 거야.”고은서의 분석이 정확할 수도 있다.곽승재는 이전에 곽현수에게 왜 백유미를 귀국시켜 그와 고은서의 결혼 생활을 망쳤냐고 따진 적이 있었다.그때 곽현수는 고씨 가문이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여시은이 적합한 상대라고 말했었다.곽현수는 단지 할머니 때문에, 그리고 여씨 가문이 입방아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아서 이혼을 강요하지 않았을 뿐이다.여시은도 Y국의 파티에서 만난 두 집안 어른들이 둘을 만나게 하려 했고, 그녀도 그와의 정략결혼에 긍정적인 태도였다고 인정한 바 있다.고은서의 분석이 맞았지만 곽승재는 마음이 전혀 홀가분하지 않았다.그녀의 말투가 너무나 차분했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말하는 것처럼.곽승재는 고은서의 태도에서 자신을 향한 감정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가슴 속에서 둔탁한 통증이 밀려왔다.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입을 열려는 순간, 회의실 방향에서 여시은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곽승재는 일이 있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그 사이 눈앞까지 다가온 여시은이 배려심 있게 말했다.“곽 대표님, 일이 있으면 먼저 처리하세요. 10분 쉬고 회의를 계속한다고 전할게요.”여시은은 말하면서 생수 한 병을 곽승재에게 건넸다.곽승재는 거절의 뜻으로 고개를 저
“외할아버지, 숙모 말로는 엄마가 북성에 있을 때 가슴 아픈 연애사가 있었던 것 같대요. 제 생부는 아닐 거라고 하는데, 외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고은서는 돌직구를 날렸다.“그럴 리 없어. 네 엄마는 활발하고 낭만적인 성격이었지만 고집스러운 면도 있었어. 쉽게 마음을 주지 않지만 한번 주면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어.”고준석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점에서는 네가 엄마를 똑 닮았어. 그래서 그때 곽승재와의 결혼을 허락했던 건데...”‘왜 갑자기 내 얘기로 넘어간 거지?’“북성에 연인이 없었거나, 있었다면 제 생부란 말씀인가요?”고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생부일 가능성이 낮아. 북성에서 돌아왔을 때 다른 곳에서 돌아왔을 때와 별다른 정서 변화가 없었거든.”고준석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엄마가 유부남과 엮였을 리 없어. 송민준 부모의 이혼이 엄마와 상관없을 거야.’“오히려 해외에 머물던 어느 날 전화가 와서 깜짝선물을 준비했다며 신난 목소리로 말한 적이 있어.”말을 이어가던 고준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연애하는 줄 알고 기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될 줄은...”“은서야, 네 엄마가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네 생부 때문에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알아.”고준석은 외손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때 네 엄마는 치료가 안 되는 불치병을 앓은 것도 아니었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가슴에 품고 너무 지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지...”목이 멘 듯한 외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은서도 코끝이 찡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노인의 아픔을 다시 건드린 자신이 미웠다.고은서는 고준석의 손을 꼭 잡았다.“외할아버지,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엄마는 외할아버지같이 이해심이 넘치는 분을 아버지로 두어 너무 행복했을 거예요.”하지만 고준석은 더 슬퍼 보였다.“가끔은 내가 너무 자유를 준 것은 아닌지 생각할 때도 있어. 조금 구속했으면 사랑 때문에 큰 상처를 받을 일도 없지 않았을까?”
고은서는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엄마가 미혼모 신분으로 나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북성에 첫사랑까지 있었다고? 이렇게 복잡한 연애사가 있었다니.’“내가 그냥 제멋대로 추측한 거야. 연인 관계가 아니라 형님 마음을 아프게 한 친구일 수도 있지.”단은숙은 가방을 손에 들고 고은서에게 주의를 주었다.“이 얘기를 외할아버지나 삼촌한테 절대 하지 마. 내가 또 쓸데없는 소리 했다고 나무랄 거야.”외할아버지는 고은서의 엄마를 각별히 아꼈다. 미혼모가 됐어도 한 마디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슴 아파하며 그녀의 과거를 캐묻지 않았다.외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집은 따뜻한 피난처였고, 엄마는 그 안에서 조용히 상처를 치유했다. 말할 수 있는 건 스스로 털어놓을 것이고, 입을 다물고 있다면 아픈 기억일 테니 가족들이 상처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고은서의 엄마는 조향사로서 천재적 재능을 보였다. MQ의 베스트셀러 향수가 바로 그녀의 작품이었고, 이는 MQ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래서 삼촌 부부도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가족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니 주변 사람들도 무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은서는 지금까지 아버지가 없는 것이 큰 결핍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씨 가문을 노리는 세력이 나타나서 진상을 파헤쳐야 하는 상황이 되지 않았다면, 평생 엄마의 과거를 캐지 않았을 것이다.단은숙은 가방을 부인들 단톡방에서 자랑하기 위해 급히 방으로 들어갔다.고은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엄마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엄마는 북성에서 무슨 일을 겪었을까? 정말 첫사랑이 있을까? 혹시 송씨 집안 사람?’문득 송민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송민준과 송민아는 이복남매였다.‘그렇다면 송민준의 친모가 아버지와 이혼하셨다는 건데, 설마 엄마가 두 분 사이에 끼어든 건 아니겠지?’이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고은서는 등골이 오싹해졌다.만약 송민준이 정말 C선생이라면, 그가 고씨 가문을 증오하는 이유는 충분하다.하지만 고은서는 엄마
“네 엄마는 아는 사람이 많지만 송씨 집안 사람과 안면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고준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은서야, 왜 갑자기 송씨 집안 사람을 아는지 묻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아직 모든 게 오리무중이라 고은서는 외할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그 집안 따님이랑 친한 친구이고 아드님과도 아는 사이라 인연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어른끼리 아는 사이가 아닌지 여쭤본 거예요.”“집안 어른까지 알아보면서 결혼 생각이 없다고?”단은숙이 다시 흥분했다.“은서야, 솔직히 말해봐. 그 송민준이라는 청년이 너를 좋아하지? 너를 쫓아다니지?”고은서는 황당해하며 부인했다.“아니에요. 절대 그럴 일이 없어요. 저와 송민준은 그냥 친구예요. 그리고 제가 만약 결혼할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숙모께 첫 번째로 말씀드릴게요.”“여보, 자꾸 결혼 얘기로 애를 못살게 굴지 마. 우리 은서는 능력도 뛰어난데 시집가지 않아도 괜찮아.”고국성이 뜻밖에 그녀 편을 들어주었다. 영악하고 연줄을 대기 좋아하는 삼촌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것은, 숙모가 화내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당장 결혼하라고 닦달한 것도 아니잖아요. 곽승재와 비슷한 조건의 남자가 있다면 놓치지 말아야죠...”“괜찮아요. 숙모도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고은서는 적당히 무마한 후 넉살스럽게 단은숙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숙모, 제가 최근에 G브랜드 핸드백을 샀는데 디자인이 예뻐요. 한번 보실래요? 마음에 드시면 드릴게요.”이렇게 좋은 일을 마다할 리 없는 단은숙은 급히 일어섰다.“아이고, 은서가 숙모 생각도 해주고! 은혜 그 계집애보다 백배 낫네.”“엄마, 다 들려!”멀지 않은 곳에 있던 고은혜가 기분 상한 듯 소리쳤다.“들리든 말든. 내가 틀린 말 했나?”단은숙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은서와 함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고은서는 차에서 포장
고준석과 고국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해성의 곽씨 일가, 북성의 송씨 가문, 민씨 가문은 모두 명문가였다.“당연히 알지.”남편과 시아버지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단은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송씨 집안의 가주가 훈훈한 외모를 가진, 유명한 독신남이라는 것도 알아.”“은서야, 송씨 가문은 왜 물어?”단은숙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너 설마 송씨 가문에 시집가려고?”“맞네! 송씨 가문이 해성에 지사를 세웠다더니 너와 사업 거래가 있었구나.”단은숙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 집안 아드님이 우리 은서 얼굴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어.”“...”그녀가 한 마디 물었을 뿐인데, 숙모는 기관총 쏘듯 수십 마디를 내뱉었다. ‘첫눈에 반했다’, ‘결혼한다’, 이런 말까지 나오니 고은서는 어느 것부터 반박해야 할지 난감했다.“바쁜 애가 언제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 넘겨짚지 말고 은서 말을 들어보자꾸나.”단은숙은 화내지 않고 고은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정확한 소식을 기다렸다.명문가와의 혼인, 이에 대한 숙모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숙모, 너무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어떻게 아무 남자나 저를 좋아하고 저와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저는 그저 우리가 과거에 송씨 가문과 무슨 거래가 없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이 말을 듣고 순식간에 흥미를 잃은 단은숙은 모른다고 했다.고준석과 고국성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고씨 가문은 줄곧 북성에 있었던 송씨 가문과 거래할 기회가 없었다.“사업 거래도 없었어요? 송씨 가문에서 향료와 관련된 사업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고은서는 꼬치꼬치 캐물었다.“아니면 두 분이 사업차 북성에 갔다가 송씨 가문 사람과 마주친 적도 없으세요?”고국성이 입을 열었다.“송씨 가문은 줄곧 부동산 사업을 해왔고 송민준이 개척한 새로운 사업도 향료와는 무관한데, 우리와 무슨 사업 거래가 있었겠어?”고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예상했던 결과였다.‘하지만 두 가문이 아예 모르는 사이
건전복 상자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던 단은숙이 고은서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은서 왔어?”그녀가 고국성의 일을 도와준 뒤로 단은숙은 그녀를 훨씬 살갑게 대했다. 얼마나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를 존중하고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단은숙의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은서야, 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외할아버지 곁으로 와.”고준석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고은서는 미소 띤 얼굴로 모두에게 인사하면서 고준석 곁으로 갔다.아내의 부름을 받은 고국성은 식재료를 손질하러 주방에 갔고, 고은서는 외할아버지 곁에 앉았다.“은서야, 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요즘 밥은 잘 챙겨 먹니?”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일이 바빠도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지.”“할아버지 너무 해요.”고은혜가 입을 삐죽거리며 끼어들었다.“저한테는 살이 찐 게 아니냐고 하시더니 언니한테는 살이 빠졌다고 하시고. 언니만 일이 바쁜 게 아니라 저도 바쁘거든요.”고준석이 자애롭게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일이 바쁜지는 모르겠지만, 군턱이 진 것을 보니 끼니는 굶지 않은 것 같구나.”“할아버지, 저 군턱이 지지 않았어요.”오기가 생긴 고은혜는 증명해 보이려고 목을 쭉 빼 들었다.“보세요. 전혀 안... 콜록!”목을 너무 세게 빼든 탓에 말이 끝나기 전에 사레가 들렸다.그녀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연거푸 기침했다. 유성준이 어이없는 듯한 표정으로 물과 휴지를 건넸다.“회사에서 센 척하더니 집에서도 이러네.”“콜록콜록! 제가 언제 센 척했다고 그래요?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콜록!”고은혜는 기침하면서도 발끈했다.이 정겨운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문득 유성준과 고은혜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은 부드럽고 세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덜렁대는 성격이다.다만 숙모 단은숙이 동의할지 모르겠다. 고은혜가 명문가에 시집가 상류층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그녀였다.유성준도 집안이나 능력이 빠지지 않았지만,
고은서가 이미 생각을 정했다는 것을 확인한 곽승재는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고 단지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할 말을 다 한 고은서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늦었는데 일찍 들어가 쉬어.”곽승재는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억지로 머물 핑계를 찾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났다.때마침 영상전화가 걸려 오자, 고은서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영상전화를 받았다.문 쪽으로 걸어가던 곽승재가 무심결에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소파에 벌러덩 누워 한쪽 발을 다른쪽 무릎에 올리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진지하고 엄숙했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었다.곽승재는 이혼하기 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한번은 그가 외할아버지 댁에 같이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은서가 삐진 적이 있었다. 그녀가 며칠째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며 집에 돌아오지 않자, 이 일을 알게 된 할머니가 그를 고씨 가문으로 보냈다.그때의 고은서도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소파에 엎드려 두 발을 흔들거리며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곽승재는 그 순간 모든 불쾌감이 사라졌다. 원래 불만 가득했던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은서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도우미가 말을 걸어서야 정신을 차렸다.다시 모습을 드러낸 고은서는 흠 잡을 데 없이 단정한 차림에 화장도 완벽하게 끝낸 상태였다.그와 함께 마구 뛰던 곽승재의 심장도 평온을 찾았다.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서 잠깐 넋을 잃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것이 실은 설렘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고은서와 이야기하던 중, 고은혜가 문 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언니, 저기 혹시... 형부?”고은서가 몸을 뒤로 젖힌 채,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여전히 문어귀에 서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이 언뜻 보였다.‘갑자기 왜 저런 표정이지?’고은서가 자세히 보려고 일어났을 때는 그가
“당시 시은이가 부상당한 쿠아를 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시은이가 쿠아를 구해 준 그 따뜻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어. 시은이가 왜 거기에 있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고은서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고은서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두려워하지 마, 자책하지도 마.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곽승재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내가 민기 씨에게 송민준과 시은 씨사이의 관계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고은서는 살며시 손을 빼냈다. “그럼 부탁할게.”곽승재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은이가 당신과 결혼을 하려 하기에 날 싫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 하지만 송민준은 왜 나를 미워할까?” 고은서가 의문을 제기했다.비록 그녀가 예전에 민시후와 가까웠다고 해도 고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유미 씨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귀국한 것은 곽 회장님의 뜻뿐만 아니라 이 C 선생의 지시도 있었다고 했다. 그 시절 자신은 민시후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었다.‘고씨 가문이 송민준에게 크게 잘못한 거라도 있나?’고은서는 머리가 터질 정도로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곽승재도 이 일의 전후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추측일 뿐이야. 증거 없이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 서두르지 마.”고은서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숨은 검은 손을 잡아내지 못하면 그녀와 고씨 가문은 영원히 불안에 떨어야 했다.전생의 비극적 결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범인을 색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MQ에 관련된 일은 내가 사람을 시켜 주의 깊게 보고 있어. 무슨 움직임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보고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거실의 하얀 색 조명 아래서 그의 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