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는 곽승재가 지난번에 한 말이 떠올랐다.서인수가 사람을 파견하여 그녀를 협박한 일은 우선 아무런 증거가 없고, 설사 그와 관련된 것이 밝혀지더라도 그가 스스로 한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이 일로 경찰에게 체포된 거라면 기록 몇 장과 몇 마디 경고로 끝날 가능성이 컸다.그래서 주민기는 서인수의 배경을 조사하여 그가 비정상적인 수단을 사용한 이유로 개업 당일에 조사를 받도록 했다.‘몇 년 동안 감옥에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나오다니...’“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는 약한 사람에게는 강하게 나오고 강한 사람에게는 겁을 내는 타입이에요. 이번에 대표님이 은서 씨를 위해 그를 처리한 걸 알았으니 다시는 함부로 행동하지 않을걸요.” 도아름은 그녀를 안심시켜 주었다.“그가 나올 때 내가 직접 가서 경고할 거예요. 다시 은서 씨를 괴롭히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요.” 고은서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알겠어요. 요즘은 그래도 법이 최고니까 그가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겠죠.” 이 일에 대해 조금 더 얘기를 나눈 후 도아름이 말했다.“지연 씨도 해외에서 돌아온 지 며칠 됐죠? 우리끼리 점심시간에 함께 식사하러 가지 않을래요?” “좋아요. 지금 지연 씨에게 연락해 볼게요.” 고은서가 핸드폰을 꺼내려던 찰나, 마침 박지연의 번호가 화면에 떴다. “어머, 통했네? 방금 너에게 전화하려던 참이었어.”고은서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잠깐만, 나 먼저 얘기할래!”박지연이 말했다.“우리 팀원들이 단체워크숍을 가기로 했는데 가족도 함께 갈 수 있대. 온 닥터는 시간이 안 되어서 네가 나랑 함께 가줘!” 고은서가 물었다.“어제는 왜 얘기 안 했어? 이렇게 갑자기?” “어제는 너를 데려갈 계획이 없었어. 오늘 온 닥터가 마침 시간이 안 되니까 네가 대신 가달라고 부탁하는 거야.”박지연이 대답했다.“우리 정말 오랜만에 함께 놀러 가는 거잖아. 지금 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 “아참, 네가 전화한 이유는 뭐야?”박지
곽승재가 그녀에게 회사 사람들이 토요일에 운호 산장에서 단체워크숍을 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었다. ‘이렇게 우연히 맞아떨어질 수는 없잖아. 박지연도 이곳을 선택했다고?’고은서는 박지연을 옆으로 끌어당기며 물었다.“솔직히 말해봐, 곽승재와 짜고 온 거야?”박지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뭘 짜?”“모르는 척하지 마.”고은서는 박지연을 노려보며 말했다.“너 언제 곽승재에게 매수된 거야?”며칠 전 병원에서 만났을 때 박지연은 워크숍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는데 오늘 갑자기 결정하고 이곳에 왔다. 게다가 고은서에게 구체적인 장소도 알려주지 않았던 것은 그녀의 의심을 피하려고 했던 것이다.고은서를 더 이상 속일 수 없다는 것을 보자 박지연은 그냥 헤헤 웃었다.“매수라고 하긴 그렇고, 우리 부서 몇 명끼리 정말로 놀러 오려고 했어. 마침 승재 씨가 이곳에 온다고 했거든. 또 워크숍 하는 김에 함께 하자고 초대해서 그냥 거절하지 않은 것뿐이야.”고은서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박지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원래 이런 작은 이득을 놓치지 않는 사람이었어?”“작은 이득이 아니지, 운호 산장은 소비가 엄청나. 게다가 최상급의 천연 온천이라 미네랄 성분이 풍부해서 피부 요양과 회복에도 좋대. 너에게 딱 맞잖아! 내 전 재산을 걸고 말할게. 진심으로 너를 생각해서 그런 거야.”박지연이 대답했다.“전 재산까지 건다고? 전 재산 안 아까워?”고은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뭐가 아까워.”박지연은 고은서를 안으로 밀며 말했다.“승재 씨도 그렇게 무서운 사람은 아니야. 네가 예전에 가장 사랑했던 남편이잖아!”고은서는 한 대 치고 싶은 생각을 겨우겨우 참았다.“박지연, 네가 말한 대로 그건 예전의 일이고, 지금 나는 그와 아무런 관계도 없어. 네가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뭐야?”“이혼하더라도 완전히 연락 끊고 지낼 필요는 없잖아?”박지연은 그녀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게다가 너희는 아직 부부잖아. 어차피 여기서 그를 안 만나도 집에 가서 만날
이곳 객실의 인테이러는 한옥의 독특한 분위기를 창출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전통과 현대적인 요소를 혼합한 한옥 스타일로, 가구와 소품들이 현대적임에도 원목으로 나름의 톤을 맞추어 잘 어울렸다.고은서의 방은 박지연과 같은 층이 아니었다.그녀가 방문을 열어보니 넓고 큰 침대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정갈하고 흰 이불 위에 붉은 장미꽃이 놓여 있었고, 꽃잎도 많이 뿌려져 있어 분위기를 한 층 더 살려 주었다. 또 여러 가지 쌍으로 된 장식품들이 분위기를 은근히 애매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작은 여행 가방이 옷장 옆에 놓여 있었고 고은서는 가방을 열어보았다. 안에는 그녀의 수영복, 잠옷, 기타 갈아입을 옷들 등이 있었고, 스킨케어 제품과 화장품도 있었다. 확실히 이미숙의 손길이 느껴졌다. ‘다들 내 일정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모르는 건가?’고은서는 수영복을 꺼내 입었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며 약간 어색하게 느꼈다. 가슴 부분이 너무 많이 드러나지 않나 싶어서였다. 이 수영복은 원래 곽승재와 함께 온천에 가려고 사왔던 것이다. 곽승재가 냉정하게 거절한 뒤 그녀는 수영복을 넣어두었고 단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었다. 그냥 보기엔 꽤 평범한 스타일이었지만 막상 입어보니 너무 섹시한 핏이었다. 그때 외부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고은서는 박지연이라고 생각되어 문을 열며 물었다.“지연아, 이 수영복 좀 너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고은서는 멈췄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박지연이 아니라 훤칠하고 잘생긴 곽승재였다. 그는 오늘 캐주얼하게 흰색 폴로 셔츠와 검은색 슬랙스 바지를 입고 있어서 평소의 딱딱함은 사라지고 한결 느긋하고 편해진 느낌이었다. ‘이 시간에 GS그룹 직원들과 온천에 가거나 차를 마시고 있어야 하는데 왜 여기에 있는 거지?’곽승재의 검은 눈동자는 고은서를 응시하고 있었다. 몸에 타이트하게 달라붙는 수영복 디자인이 그녀의 허리를 한 손으로 잡을 수 있을 만큼 감싸고 있었다. 검은 천 아래 그녀의 가는
전처럼 다시 차가워진 곽승재의 목소리가 들렸다.“이곳 웨이터분더러 다른 수영복을 가져오라고 했어. 지금 문 열고 가져갈래? 아니면 그냥 문 옆에 놔줘?” “그냥 문 옆에 두고 넌 나가!”고은서가 대답했다.곽승재가 떠나려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복도에서 기다릴게.”그는 이렇게 말한 후 수영복이 들어있는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고은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새 수영복을 꺼내 갈아입었다. 이번 수영복은 비교적 보수적인 디자인이었고, 어깨가 별로 드러나지 않은 상의에 하의는 반 길이 스커트였다. 입어보니 훨씬 자연스럽고 편했다. 그녀는 가운을 걸치고 휴대폰을 들고 방을 나섰다. 곽승재는 복도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나오는 것을 보고 곽승재의 검은 눈동자는 그녀의 몸에 잠깐 머물렀다. 가운 밑으로 드러난 길고 흰 다리를 보며 그는 입술을 살짝 움직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자, 박지연 씨도 지금 온천 구역에 있어.”고은서는 여전히 말 못 할 어색함을 느끼며 대답했다.“내가 혼자 내려갈 테니 데려다 줄 필요는 없어.”“오늘 여기는 우리들만 이용할 수 있게 예약된 곳이야. 대부분이 GS그룹 회사 사람들인데 넌 내 아내로서 내가 신경을 안 쓸 수는 없지.”곽승재가 말했다.‘나에게 언제 신경 써준 적이 있다고 그래?’고은서는 속으로 불평했다.곽승재는 그녀의 속마음을 읽은 듯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예전엔 내가 소홀했어. 그때 못 해준 것들 지금 보충해 줄께.”“...”그의 상냥한 말투와 태도는 마치 어제 저택에서 싸웠던 일이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고은서는 더 신경 쓰지 않았고, 어차피 이 며칠만 참으면 끝날 것으로 생각했다.그의 말대로 이 산장에는 GS그룹 사람들로 가득했다. 온천 구역으로 가는 길에 그녀는 이미 여러 사람을 만나 인사를 나눴다. 그녀와 곽승재를 보며 그들은 매우 예의 바르게 불렀다.“대표님, 사모님.”또 많은 여성
그의 몸이 반응을 일으킨 것 같았다.두 사람은 아직도 안고 있었고 아래의 온천탕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있었다. 심지어 몇몇 사람들은 휴대폰을 꺼내 몰래 찍고 있었다. 아주 그냥 개망신 현장이었다.곽승재가 무슨 짓을 할까 봐 두려워서 고은서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 있지?’고은서는 곽승재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화난 표정을 보면서 곽승재는 팔에 살짝 더 힘주어 그녀를 높이 안아 올렸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그녀의 엉덩이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는 허리를 감싸며 가장 가까운 온천탕으로 걸어갔다. 걸으면서 두 사람의 몸은 매우 밀착되어 있었다. ‘오늘 이곳에 오지 말아야 했어. 왔어도 바로 가야 했어...’ 곽승재를 없는 사람으로 여기고 그냥 즐기라고 했던 박지연의 말을 들은 자신의 실수였다. 그건 다 헛소리였다. 곽승재는 절대 없을 수 없었고 그녀는 단 한 순간도 마음 놓고 즐길 수 없었다. 지금 그녀가 가장 원하는 건 쥐구멍에 숨는 것이었다. 고은서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머리카락 향기가 코에 스며들며 곽승재는 자신이 곧 못 참을 것 같다고 느꼈다. “너 또...”품에 있던 고은서는 그곳의 변화를 느끼고 바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잔뜩 붉어진 얼굴과 분노가 들끓는 눈길로 그를 노려보았다. 부끄러움과 화가 뒤섞여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곽승재는 온몸이 근질근질 해났고 그는 가까스로 참으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조금만 참아, 온천탕까지 몇 걸음 안 남았어.” 이 말이 지금 이 상황에서 너무 어색하게 들려왔다. “이 나쁜 XX...”고은서는 살기 어린 눈빛으로 그를 째려보았고 당장이라도 그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너 자꾸 이런 표정을 지으면, 우리 다시 방으로 돌아갈까?”곽승재의 낮은 목소리에는 위협뿐만 아니라 욕망으로 가득했다. 고은서는 지금 더 이상 그를 자극하면 그때는 말로만 위협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실행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부끄럽고 화가 나면서
고은서의 분노와 발버둥을 느낀 곽승재는 결국 그녀를 놓아주었다.수건이 곳곳에 걸려 있었고 고은서는 화가 난 것도 잊고 수건 하나를 던져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수건을 둘러매고는 수영장 주변의 작은 길을 따라 박지연을 찾으러 도망치듯 떠났다.곽승재는 물에 흠뻑 젖은 고은서를 지켜보았다. 보수적인 수영복은 여전히 그녀의 가는 다리와 곡선미를 가릴 수 없었고 그는 그녀를 놓아준 것이 조금 후회되었다.“형, 듣고 있어?”육현석이 또 한 번 부르며 말했다.곽승재는 그제야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고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무슨 일이야?”“왜 이렇게 화가 났어? 욕구불만이야?”육현석이 장난치며 말했다.육현석은 자신이 무심코 한 농담이 마침 곽승재의 신경을 건드렸다는 것을 몰랐다.“앞으로는 일이 있으면 주민기에게 직접 전화해. 나한테 전화하지 말고!” 상황 파악이 안 된 육현석을 혼자 남겨둔 채 곽승재는 버럭 화를 내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육현석은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고 왜 갑자기 연락도 못 하는 처지가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은서는 박지연을 찾아왔다.박지연은 그녀가 올 거라고 미리 알고 있었는지 동료들더러 다 나가보라고 했다. 그리고 손에 휴대폰을 들고 로즈꽃 온천에 앉아 그녀에게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웃어? 지금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망할 뻔했다고!”고은서는 온천에 들어가며 화를 냈다.“내가 뭘 했는데? 그냥 너를 온천에 데려온 것뿐이야. 난 너와 승재 씨가 달콤하게 안고 있으라고 시키진 않았어.” 박지연은 장난스럽게 말했다.“그냥 딱 한 번 가볍게 안을 줄 알았는데 떨어지기 아쉬웠나 봐? 네 주변 사람들은 곧 이혼할 거라는 걸 알고 있겠지만, 모르는 사람은 아직 신혼부부인 줄 알겠네.”방금 일어난 일을 생각하며 고은서의 얼굴이 다시 뜨거워 났다.사실은 박지연이 생각하는 로맨틱한 것과는 달랐다. 하지만 그녀는 곽승재의 몸이 반응을 일으켜 그에게 맞춰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이건 GS 그룹의 내부 직원 단톡방 아니야? 네가 왜 거기 있어?”고은서가 박지연을 바라보며 물었다.박지연은 떳떳하게 휴대폰을 돌려받고 댓글을 계속 읽으며 말했다.“이건 업무 단톡방이 아니고 그들이 따로 만든 뒷담화용 단톡방이야. 현석 씨가 나를 초대했어.”고은서는 그녀의 말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너 인맥 꽤 넓어졌다? 현석 씨와 친해진 것도 모자라 이렇게 빨리 GS 그룹 내부에까지 들어갔어?”박지연이 말했다.“그냥 그들의 뒷담화가 궁금해서 들어간 거야. 걱정하지 마, 우리 둘 사이는 아무도 몰라. 그래서 여기 사람들은 다 진심으로 얘기하는 거야.”고은서는 말이 없었다.산장의 객실에서, 백유미는 문서들을 검토하고 있었고 단톡방의 메시지 소음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그녀는 상처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물을 다칠 수 없었다. 습식 사우나도 당연히 금지되어 있어 그녀는 놀이에 참여하지 않고 원지훈에게 줄 프로젝트를 연구하고 있었다.단톡방에서 이렇게 시끄럽길래 백유미는 휴대폰을 들고 무슨 재밌는 가십거리가 있는지 확인했다. 하지만 사진을 보자 그녀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사진은 여러 장이었고 모든 사진 속 곽승재와 고은서는 친밀하게 안고 있었으며, 곽승재의 눈빛에는 고은서를 향한 무의식적인 부드러움이 묻어 있었다.백유미는 휴대폰을 꽉 쥐며 부수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오기 전에 그녀는 분명히 비서에게 확인했었고 곽승재가 혼자라고 했다. 그런데 왜 고은서가 이곳에 나타나 곽승재와 공개적으로 애정 표현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백유미는 자신을 진정시키며 성아연에게 문자를 보냈다.“아연 씨, 고은서랑 관계를 어떻게 좀 해보라고 했잖아요, 왜 아직도 소식이 없죠?”아무도 그녀에게 소식을 전해주지 않아 그녀는 항상 일을 수동적으로 해야 했다.성아연은 바로 전화를 걸어왔다.“백유미씨, 고은서는 저를 매우 경계하고 있어서 제가 뭐라고 해도 듣지 않아요. 그래서 서두를 수 없어요.”“그럼 계속 이렇게 기다리고만 있을 건가요?”
“할 말 다 했어? 그럼 가도 돼.”곽승재가 사람을 쫓아내며 말했다.그러자 육현석은 당당하게 대답했다.“형, 아직 시간도 남았고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이 최상급 천연 온천에 안 들어가면 좀 아깝잖아, 그치?”곽승재는 그의 말을 예상했지만 전혀 신경 쓸 에너지가 없어서 그냥 명령했다.“나에게서 떨어져 있어.”그가 너무 눈에 띄어서 창피했다.“형, 형수님은 어디에 있어?”육현석은 곽승재의 태도에 신경 쓰지 않고 장난스럽게 물었다.“방금 형과 형수님이 공개적으로 애정 표현을 했다는 소문이 진짜야?”“너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형, 어떻게 사람 마음이 이렇게 쉽게 바뀔 수 있어? 형수님이 있으면 나는 버리는 거야?”육현석은 서운하고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먼저 박지연 씨를 설득해 형수님을 데려오게 했는데 형은 벌써 은혜를 잊었어? 이렇게 기쁜 일도 나와 공유하지 않으려 하면 어떡해!”“좀 조용히 해.”곽승재는 육현석이 시끄럽다고 느끼며 앞을 바라보았다.고은서와 박지연은 온천에서 나와 식사 구역으로 가고 있었다. 곽승재의 시선은 고은서의 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의 머리는 약간 젖어 있었고 매끈한 몸매에 우유처럼 흰 피부는 햇볕에 더욱 투명하게 빛났다.마치 물에서 막 나온 인어처럼 보였다.이전에 곽승재는 고은서가 이렇게 놀라운 미모인 줄 몰랐는데 왜 지금은 훨씬 더 예뻐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다른 남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 때도 곽승재는 매우 불쾌했다.육현석도 곽승재의 시선을 따라 고은서와 박지연을 보았다.두 사람은 가운을 두르고 무언가를 이야기하며 밝게 웃고 있었다.“형, 아직도 앉아서 뭐 해? 배 안 고파? 뭐라도 먹고 싶은 거 없어?”육현석이 일부러 묻자 곽승재는 검은 눈을 들며 되물었다.“너 배고프냐?”육현석은 형이 자존심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고개를 끄덕였다.“배고파, 형. 나 아직 형이 아끼는 동생 맞지? 같이 식사 좀 해줘.”곽승재는 마지못해 일어났다.“가자.”“...”육현
곽승재의 행동을 보고 오해를 한 듯 엘리베이터 밖에 서 있던 커플이 그를 향해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여자친구분을 미처 보지 못하는 바람에...”“여자친구 아니에요. 그냥 낯선 사람일 뿐이에요.”곽승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상대방의 말을 끊었다.커플은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고은서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고는 이내 자신의 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고은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곽승재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대표님, 화내지 마세요. 아까 그 여자...”여자가 말하면서 다정하게 그의 팔짱을 끼려고 할 때, 곽승재가 한기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여자가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몇 마디 더 보태려고 할 때 곽승재는 이미 뒤도 돌아보지 않고 룸으로 향했다.그러나 두 사람이 예약한 룸은 다름 아닌 고은서의 맞은편 룸이었다.이를 발견한 여자는 또다시 멈칫했다. 그녀는 두 사람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하지만 그녀가 곽승재한테 빌붙으려 하는 데는 별 상관이 없었다.여자는 연회에서 곽승재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녀는 여러 업계를 오가면서 사람 보는 눈이 꽤 높았는데 대부분 남자들은 잘난 체를 하지 않으면 또 다른 여러 가지 일로 맘에 안 드는 일이 일쑤였다. 그러나 곽승재처럼 뼛속으로부터 우러져 나오는 고귀한 기품을 가진 남자는 어디 가나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그녀 또한 그에게 푹 빠진 것이다.처음에는 자신을 냉대하는 곽승재를 보면서 낙심하긴 했으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매력을 어필했다. 끝내 연회가 끝나기 전에 곽승재는 무언갈 떠올렸는지 그녀에게 눈길을 주었다.수많은 남자를 만나본 그녀는 이내 그의 뜻을 깨닫고 그에게 대신 운전해서 데려다주겠다고 먼저 건의했다.아니나 다를까, 곽승재는 그녀에게 호텔 이름을 댔다.여자는 애써 흥분을 억누르고 곽승재와 함께 호텔로 향했다.하지만 곽승재는 프런트 데스크에서 룸만 예약하고 로비에 앉아 부하들과 온라인미팅을 했다.얼마나 지났을까, 여자가 농락을 당했다고 생각하려는 찰나 그
곽승재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의외네. 내 이름을 다 기억하다니.”‘머리에 문제 있는 거 아니야?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면서 왜 비아냥거리며 난리야?’엘리베이터는 문이 너무 오래 열려있은 탓에 경보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곽승재가 길을 비켜줄 생각이 없어 보이자 고은서도 더는 그와 다투기 싫어 엘리베이터 버튼이 있는 구석에 서 있었다.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데 일이 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기에 그저 참을 생각이었다.이내 곽승재가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면서 경보 소리가 멈추고 문이 닫히면서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몇 층으로 가세요?”고은서가 곽승재랑 함께 온 여자에게 물었다.여자는 그녀를 아래 우로 훑어보더니 자랑이라도 하는 듯 턱을 받쳐 들고 말했다.“그쪽이랑 같은 층이에요.”‘나랑 같은 층이라고? 진짜 엿 먹이려고 작정한 거야?’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엘리베이터 각 면에 거울이 있었기에 그녀는 곽승재와 여자의 행동을 엿볼 수 있었다.여자는 곽승재 곁에 꼭 붙어서 물었다.“대표님, 저분과 아는 사이세요?”자신의 얘기가 나오자 고은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 못 들은 척했다.곽승재는 콧방귀를 뀌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자도 눈치 있게 더는 캐묻지 않고 그에게 애교부리기 시작했다.“대표님, 이 호텔 레스토랑 음식이 엄청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오늘 저녁에 아무것도 드시지 않은 것 같으신데 웨이터한테 우리 룸으로 가져다 달라고 할까요?”곽승재는 아주 덤덤하게 답했다.“하고 싶은 대로 해.”“그럼 저 와인도 같이 주문해도 될까요?”여자는 곽승재의 대답에 점점 더 담이 커졌다.“오늘 대표님 대신 운전하느라고 연회 때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단 말이에요. 보상은 해줄 거죠?”곽승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응.”그의 대답을 얻은 여자의 목소리가 방금전보다 더 애교스러워졌다.“고마워요, 대표님.”‘우웩, 토할 것 같아.’고은서는 그녀의 목소리에 속이 울렁거린 탓에 저도 모르게 그녀를 힐끗 쏘아보았다.“왜, 의견이라도 있
민시후는 성가시다는 듯 그녀를 째려보면서 말했다.“자기애가 너무 넘치는 거 아니야? 내가 이혼까지 했던 너를 왜 좋아해?”고은서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녀와 함께 연기하면서 이미 귀찮은 일들을 많이 겪었는데 진짜 그녀를 좋아하게 된다면 성가신 일이 지금보다 더 많을 것이다.게다가 고은서는 더는 사랑이란 단어에 속박당하고 싶지 않았다.호텔 앞에 도착했을 때 고은서는 민시후한테 내리지 말라고 말했다.“나 혼자 들어가면 돼.”“확실해?”“응.”민시후는 그녀를 힐끗 보더니 이내 아무 말 없이 떠났다.고은서는 호텔 로비로 들어가면서 박지연에게 연락했다.그러나 전화가 통하기도 전에 프런트 데스크 앞에 서 있는 익숙한 모습을 발견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곽승재였다.그의 옆에는 화려한 옷차림을 한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이십 대 좌우로 보였는데 손에는 명품백을 들고 있었고 아주 화려한 옷차림에 몸매도 우월했다.함께 서 있는 두 사람은 마치 선남선녀 같았다.이를 본 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뭐 하자는 거지? 내가 이 호텔에 있는 걸 알면서도 굳이 여자를 데리고 여기로 온다고? 해성에 다른 호텔이 없는 것도 아닌데.’“은서야, 괜찮아?”전화 너머로 박지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이내 시선을 돌리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으며 답했다.“응. 너 온 닥터랑 얘기 나눠봤어? 왜 그 여자랑 함께 카페로 갔는지는 물어봤고?”“물어봤지. 다른 친구가 유혜린이 귀국한 거 알고 같이 밥 먹자고 했대. 그런데 종일 수술하면서 피곤해서 그저 같이 커피 사러 간 거라고 했어.”“그게 다야?”고은서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면서 말했다.“응.”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고은서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물었다.“다친 손이 괜찮은지는 안 물어보고?”“연고 가져다줬어. 병원으로 새로 개발한 건데 흉터 없애는 데 좋다면서 주던데.”“그 외에는 아무 말도 없었어?”고은서가 닫힘 버튼을 누르면서 캐물었다.“잠시만요.”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고 할 때
고은서가 되물었다.“왜 그렇게 묻는 거야?”민시후는 콧방귀를 뀌면서 답했다.“백씨 집안 프로젝트를 산통 깨는 거 왜 나한테 부탁하지 않고 송민준한테 부탁한 거야? 목적이 분명하잖아.”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반박했다.“그냥 너한테 빚지기 싫어서 그런 건데.”“우리 둘 사이에 무슨 빚 같은 소리를 하고 그래. 나한테 널 깊이 사랑하는 캐릭터를 유지하라고 한 사람은 너잖아.”민시후가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그럼 송민준도 내 속셈을 알아차렸다는 거네.”“알아차리라지 뭐. 게다가 송민준 집안 도우미가 그런 짓을 했는데 네가 의심하는 것도 아주 당연한 일이지 않아? 걔도 자신이 무고하다는 걸 증명할 의무가 있잖아.”민시후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고은서는 민시후가 자신을 이 정도로 지지할 줄은 전혀 생각 못 했다.“그런데 그 도우미가 수상하긴 해. 처음부터 모든 걸 혼자 안고 갈 생각이었으면 숨을 필요가 없잖아. 게다가 왜 송민아 전화는 받지 않으면서 송민준한테는 저렇게 쉽게 걸려든 거지?”민시후는 그녀가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고 비아냥거리는 대신 그녀에게 주의를 주었다.“이번에는 너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그냥 넘어가 줄 거야. 그런데 다시는 송민준 앞에서 꼼수 부릴 생각하지 마.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나도 감히 못 건드리는 존재라고.”고은서는 민시후의 말을 들으면서 처음에는 고개를 끄덕였는데 마지막 한마디를 듣자마자 참지 못하고 반박했다.“제발 총명한 척 그만해줄래?”민시후는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너보다는 총명하지. 게다가 내가 멍청하다고 생각했으면 날 찾아와서 협력을 제안하지 않았을 거잖아.”고은서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민 도련님, 겸손한 것도 일종 미덕이에요.”“이미 충분히 우수해서 그 어떤 미덕도 나에겐 금상첨화일 뿐이야. 딱히 너무 중요하진 않다는 생각이 드네.”...두 사람은 곧장 ZY 그룹으로 돌아갔다.고은서도 정식으로 회사 직원들에게 인사했다.전에 입사 활동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데다가 그
투약한 간호사도 전에 이미 곽승재에 의해 경찰서로 넘겨졌는데 그녀의 증언에도 진희숙만 언급되었다.고은서는 이 모든 결과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그녀는 속으로 백유미의 신중함을 탄복했다. 그녀가 경각심을 낮추지 않고 제때 녹음하면서 증거를 남겼더라면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당사자로서 고은서는 경찰 조사에 협조한 후 나머지 일을 변호사에게 맡겼다.“걱정하지 마세요. 증거가 확실하니까 상응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송민준이 말했다.고은서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진정으로 대가를 치르길 바라는 사람은 백유미이지 대신 누명을 쓴 진희숙과 간호사가 아니었다.“우리 민아도 잘못한 곳이 있으니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원하는 보상이라도 있으시면 얼마든지 말하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보상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송민준이 말을 이어갔다.“보상은 필요 없어요. 괜찮다면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시죠.”고은서가 말했다.“무슨 부탁이요?”“백씨 집안에서 요즘 여러 프로젝트를 도맡아 하고 있다던데, 그 프로젝트들을 저 대신 산통 깨주세요.”고은서도 민시후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곽수혁이 GS그룹 일에 끼어들면서 백씨 집안에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그녀의 말을 들은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송민아 보고 나한테도 그만 집적거리고 해. 나도 스트레스 그만 받고 싶어.”옆에 있던 민시후가 갑자기 말을 보태었다.송민준은 민시후를 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시후야, 민아가 어릴 적부터 널 좋아한 걸 너도 알고 있잖아. 민아가 포기하지 않는 이상 우리도 곁에서 어쩔 수 없어.”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성가시다는 듯 직설적으로 말했다.“난 어릴 적부터 송민아가 싫었다고.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데는 진짜 짝이 없다니까.”송민준은 그의 말에 답하지 않고 시선을 고은서에게로 돌리며 물었다.“이혼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시후랑 함께 있을 생각이신가요?”‘소식이 빠르네.’이혼한 지 며칠 되지도 않
“걱정하지 않아도 돼. 민아 데리고 오지 않았으니까.”송민준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갔다.“혹시나 또 고집부리면서 기분 나쁘게 할까 봐 오늘 너희랑 만난다는고 얘기하지 않았어.”민시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제발 좀 북제로 데려가. 해성에 계속 있게 하지 말고.”송민준은 나긋한 미소를 보이면서 답했다.“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게다가 이미 ZY 그룹으로 출근하기로 했다던데.”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눈살을 더 세게 찌푸렸다.“우리 아버지가 송민아를 강제로 ZY 그룹에 밀어 넣은 건 나도 별다른 방법이 없는데 나중에 또 고은서를 해치려 하거든 가만두지 않을 거야! 또다시 너랑 우리 아버지 때문에 봐주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고은서는 민시후를 쏘아보았다.‘나랑 송민준을 원수 사이로 만들 생각인 거야?’“뭘 쏘아봐?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민시후는 점점 더 흥분해 하며 말했다.“전에도 몇 번이고 널 협박했잖아. 심지어 간호사를 교사하여 우리 아이까지 잃게 한 사람이야. 네가 날 막지만 않았으면 내가 송민아를 가만둘 거 같아?”“...”고은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전에 유산한 경과를 민시후에게 간단히 알려주면서 송민아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그걸 이렇게 이용할 줄은 미처 생각 못했다.씩씩거리는 민시후를 보면서 고은서는 그가 배우를 하지 않은 게 너무 아쉽다고 속으로 감탄했다.송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도 전문가에게 나가보라 하고 직접 민시후에게 차를 따라줬다.“전에 병원에서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해. 오늘 만나자고 한 것도 그 일 때문이야.”송민준이 말하기를 진희숙은 송민아를 친딸로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돌봐온 사람으로서 그녀가 두 사람 일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그런 모험을 했다고 한다.그리고 송민아가 간호사랑 만난 모습이 포착된 사진은 진희숙이 그녀를 불러내 우연하게 찍힌 사진이라고 한다.“민아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형, 형수님이 민시후한테 별다른 마음은 없어 보이는데 걱정하지마.”“내가 무슨 걱정을 한다고 그래?”곽승재가 약간 어색해하며 말했다.“이미 이혼한 사이인데 고은서가 누구한테 마음이 가든 누구랑 있든 나랑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야.”“아까 썩은 표정을 하고 경적을 울린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네.”육현석이 작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그러나 갑자기 차가운 시선이 느껴지면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애써 웃으면서 변명거리를 찾았다.“맞아, 맞아. 형 말이 맞아. 형수님이 누구랑 있든 형이랑 이젠 아무 상관없는 일이지. 역시 이혼 같은 작은 일 때문에 속상해하는 일은 전혀 없는 우리 형, 상남자답다니까.”곽승재의 얼굴빛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걸 발견한 육현석은 이내 입을 화제를 돌렸다.“형, 형수님이 형을 보기 싫어하는 것도 화나서 그러는 거잖아. 계속 이렇게 자존심 때문에 고집부려서는 안 된다니까. 형수님한테 문자도 하고 전화도 하면서 존재감을 나타내야 할 거 아니야.”그의 말을 들은 곽승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네가 말했다시피 날 싫어하잖아. 그런데 무슨 존재감을 나타내라는 거야?”“지금 상대방을 잊지 못하고 놓아주기 싫은 사람은 형이잖아.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고 형수님이 스스로 돌아올 것 같아? 형, 자존심 따위 버리지 않으면 형수님 영원히 돌아오지 않아.”육현석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전에 낯선 사람 사이로 지내도 되냐고 물었을 때 아주 흔쾌히 된다고 답하던 고은서의 모습이 떠올랐다.어제 점심, 그가 스케줄을 바꾸면서까지 병원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고은서가 이혼해서 무척 기쁘다고 하면서 자신의 뒤담화를 하는 걸 들었다.그러나 방금전 민시후와 다정하게 장난치면서 자신을 보고서도 모르는 척하는 그녀를 생각하면 이건 자존심을 내려놓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고은서가 이젠 진짜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곽승재는 눈살을 질끈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언제 고은서랑 다시 화해하고 싶다고 했어? 인제
민시후는 그가 입을 열길 기다리고 있는 고은서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오글거려 죽겠네.”고은서는 끝내 참지 못하고 방금전 손을 닦던 물티슈를 그를 향해 던졌다.“누가 오글거린다는 거야! 사람 호기심 불러일으켜 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 짜증 나는 자식아!”“고은서!”물티슈에 얼굴을 맞은 민시후가 물티슈를 다시 주어 그녀를 향해 던지려고 할 때 뒤에서 갑자기 빵빵하는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와 민시후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보니 고급 SUV 한 대가 뒤에 세워져 있었는데 그 운전석에는 육현석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다름 아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곽승재였다.육현석은 조심스레 그녀를 향해 손을 저으며 옆에 있는 곽승재를 힐끔힐끔 보았다. 방금 경적 소리를 낸 게 그가 아니라 곽승재인 것이 분명했다.SUV 차량 높이가 꽤 있었기에 아마 방금전에 그녀와 민시후가 장난치는 걸 본 모양이다.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가운 얼굴빛을 한 채 앉아있는 곽승재를 보며 고은서는 성가시다는 듯 몸을 홱 돌리면서 민시후에게 말했다.“초록불이야. 안 가고 뭐 해?”민시후도 차 안에 앉아있는 육현석과 곽승재를 보았다. 그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하고 액셀을 밟기는커녕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백미러를 쳐다보았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여기에서 볼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전에 두 사람이 운전하면서 맞부딪친 일이 떠올랐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안전벨트를 꼭 쥐고 말했다.“민시후, 우리 약속 있는 거 잊은 거 아니지? 이상한 짓 하지마.”민시후는 불쾌하다는 듯 그녀를 보며 말했다.“이상한 짓이라니. 전에 내 차를 먼저 박은 사람은 곽승재거든.”‘네가 곽승재 차 앞에 막아서서 시비 걸지 않았으면 곽승재가 널 박을 리도 없었거든.’고은서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민시후가 조용히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이자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러면 나 먼저 차에서 내려도 돼?”“너 언제부터
민시후는 송민준과 찻집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맑은 하늘에 눈 부신 햇살, 날씨가 참 좋았다.민시후는 기사 대신 직접 하늘색 스포츠카를 운전했다.고은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띄는 스포츠카를 보며 말했다.“민 도련님, 패션 워크 보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레스토랑 가는 것뿐인데 굳이 이렇게 눈에 띄는 차를 운전해야 할까요?”“그냥 평범한 스포츠카일 뿐인데 어디가 눈에 띈다는 거야? 잔말 말고 얼른 타. 내가 직접 운전한다는데 영광으로 생각하라고.”민시후가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고은서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 탔다.스포츠카가 유독 눈에 띄기는 했지만 길에 차들이 적었던 탓에 다행히도 너무 큰 이목을 끌지는 않았다.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가는 도중에 ZY 그룹 근황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곽승재가 ZY 그룹을 타깃으로 삶고 짓누르려고 할 때 민시후가 제때 빠르게 대응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소홀히 넘길 수 없는 영향을 받았다.“허 교수님 쪽에 의약 프로젝트가 아주 순리롭게 진행되고 있어. 후기도 꽤 괜찮고. 연구소에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민시후는 회사 일을 얘기할 때만은 진지했다.“대리권도 네가 쟁취해 온 거니까 융자에 관한 일도 네가 책임지고 잘 해봐.”고은서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그녀는 전에 박지연한테서 곽승재가 융자에 관한 일을 백유미에게 맡길 예정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가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는지 의문스러웠다.그녀는 궁금증을 덜기 위해 민시후에게 물었다.“곽승재 아버지가 얼마 전에 귀국하셨는데 회사 일에 참여하려 했다가 곽승재한테 거절당했다고 하더라고. 아마 이번 일도 곽승재가 아버지 건의를 거절하고 직접 내린 결정일 거야.”‘그렇구나. 그런데 회장님이신 자기 아버지랑 맞붙는 거 보아서는 아마 두 사람도 사이가 별로인가 보네.’고은서는 이내 민시후 아버지가 전에 편찮다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아버지는 괜찮으셔?”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민시후는 피곤하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