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곽승재는 조금 전 민시후가 고은서를 가로막은 장면을 본 것 같았다.고은서는 곽승재에게 설명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찌 됐든 곽승재와 백유미의 관계는 그들보다 더 친했다.‘승재도 설명을 안 하는데 내가 왜 그에게 설명해야 해?’“출발해 주세요.”고은서가 기사에게 말했다.기사는 고개를 돌려 곽승재를 보면서 그의 뜻을 기다렸다.곽승재는 눈길을 거두고는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눈짓했다.그러고는 고은서에게 물었다.“당신 또 민시후 만나러 왔어?”“왜 말을 그렇게 시큰거리게 해?”고은서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당신이 민시후랑 사이가 안 좋은 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내가 그 사람을 만나면 안 돼?”곽승재는 한 소리를 먹었다.“고은서, 당신 나랑 좋은 말로 얘기하면 안 돼?”“미안한데 난 뒤끝이 좀 긴 편이라 당신한테 좋은 말로 못 하겠는 걸 어떡해.”역시 전화에서 들은 그런 애교는 다시 나타날 수 없었다.곽승재는 이 일로 더는 고은서와 싸우지 않았다. 그는 말길을 돌려 물었다.“방금 무슨 일이 있었어? 민시후가 당신을 난처하게 했어?”어찌 됐든 방금 곽승재가 때맞춰 고은서를 곤경에서 구해준 건 사실이었다.고은서는 더는 곽승재에게 원망스러운 말투로 말하지 않았다.“아주 작은 일이야. 난처하게 군 것까지는 아니야.”민시후가 꿍꿍이를 갖고 고의로 고은서를 불러낸 것은 맞았지만, 그의 손에는 아직 고은서가 원하는 물건이 있었기에 그녀는 이 일로 민시후랑 뒤틀어지면 안 되었다.“당신이 나한테 전화한 건 무슨 일이야?”고은서는 이제 생각이 나서 되물었다.곽승재는 고은서가 사실을 얘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챘다.그는 고은서가 말하고 싶지 않으면 아무리 자기가 캐묻는다고 해도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곽승재는 마음이 조금 거북한 것을 뒤로하고 고은서에게 물었다.“당신 어깨는 어때? 조금 전에 힘을 세게 쓰지는 않았지?”“괜찮아.”고은서는 차조차도 몰지 않았다.지금 그녀는 목숨을 엄청나게 아꼈기에 의사의 말
고은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 일도 걱정할 필요 없어. 아버님 앞에선 절대 이혼 얘기를 하지 않을 거야. 이혼 증서가 있어도 되도록 남들 모르게 숨기고 있을게.”곽승재는 고은서의 배려에 전혀 기쁘지 않았다.“지금 저택으로 가.”곽승재는 명령하듯이 말했다.“뭐라는 거야? 내가 안 가겠다고 했잖아.”고은서는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아직 이혼한 건 아니니까 내 아내의 의무는 다해야 하지 않겠어?”그가 대답했다.고은서가 아무렇지 않게 민시후를 만나러 오면서도 자신과 함께 저택으로 가는 걸 싫다고 하는 점이 정말 그를 빡치게 했다.고은서는 그의 강경한 태도를 보고 더 이상 그와 따지고 싶지 않았다.호원 저택은 이 구역 황금 지대에 위치한 규모가 꽤 큰 3층 고딕 스타일의 건물로 무려 앞뒤로 정원과 잔디 마당이 있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엔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곽승재는 대학 졸업 후 이곳을 떠나 자기 집에서 혼자 살았고, 결혼 후에는 예원 별장을 사들여 자기 새 거처로 정했다.지금 그의 부모님도 저택에 계시지 않고 할머니도 본가에 살고 있어 고은서는 이곳에 올 필요가 없었다.그러나 그의 부모님의 거처가 너무 궁금해 곽승재에게 한번 부탁한 적이 있다.“오빠, 나랑 함께 저택으로 가지 않을래? 오빠의 아내로서 부모님 댁에 한 번쯤은 인사하러 가봐야 하지 않겠어?”곽승재는 그녀의 말을 듣더니 차갑게 대답했다.“내 부모님은 국내에 안 계셔. 갈 필요 없어.”고은서는 매우 실망했지만 괜히 그를 불쾌하게 한 것 같아 그 후부터 이 일을 다시 꺼내지 않았다.하지만 이혼을 앞두고 곽승재가 직접 그녀를 데리고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운전사가 차를 대자 대문 앞에 있던 하인이 공손하게 마중했다.“오셨습니까, 도련님.”하지만 그의 뒤에 서 있는 금시 초면인 고은서를 보고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그러자 곽승재는 자연스럽게 고은서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고은서야.”이 이름을 듣자 하인은 곧바로 인
곽승재는 고은서의 갑자기 변한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그녀의 눈엔 눈물이 고여 있었고 차가운 표정으로 그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곽승재는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해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막을 수 없었다.“고은서, 꼭 이렇게 피곤하게 굴어야 해?”고은서는 그를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피곤하게 구는 사람은 너겠지? 예전에는 내가 부탁해도 저택에 데려가려고 하지 않았잖아. 이제는 내가 싫다는 데 왜 이렇게 집착해서 나를 데려오려고 해?”“최근 내가 너에게 관심을 덜 가지니까 소유욕 때문에 이런 짓을 하는 거야?”“내가 너에게 대한 감정이 소유욕뿐이라고 생각해?”곽승재가 되물었다.“그게 아니면 뭔데?”고은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만약 내가 예전처럼 매일 네 곁에 붙어있고 너밖에 없었으면 너는 꼭 나의 존재와 감정을 전부 무시했을 거야. 그런 네가 나를 이런 데 데려오겠어?”곽승재는 순간 대답을 잃었다.예전의 고은서는 집착이 너무 심했고 언제나 그의 곁에서 그를 지켜보려 했다.그에게 주목받으려는 수단도 다양했다. 예쁜 화장과 섹시한 옷차림으로 그의 회사에 우유를 주러 오는 것 등은 전부 소소한 것들이었다.백유미가 회사에 들어오면서부터 그녀는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그에게 쉼 없이 고자질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백유미를 협박하고 괴롭혔다. 그래서 백유미는 원 없이 많은 고초를 겪게 되었다. 고은서의 끈질긴 고문과 유치한 행동들을 떠올릴 때마다 곽승재는 머리가 아파 났다. 그래서 그녀를 저택으로 데려오는 것은 물론 집에 함께 돌아가는 것조차 꺼려졌다.“절대 안 그럴 거라는 걸 알아.”고은서는 곽승재의 대답을 대신해서 말해주었다.“넌 나를 멀리하고 싶어 하잖아. 하지만 이제 내가 네 바람대로 멀어지니까 또 그 웃긴 자존심 때문에 기분이 상한 거지?”“난 널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난 네가 갖고 노는 부속품이 아니야. 나도 감정이 있고 나도 아프다고!”고은서는 눈에 눈물이 가득한 채로 말을 마치고 곧바로 계단을 내
“그럼 다행이네요.” 고은서는 이미숙이 준 국을 한 입 마셨다. 그러자 이미숙이 그녀에게 물었다.“사모님, 도련님과 싸우셨나요?” 고은서는 국을 한 모금 더 마시며 대답했다.“괜찮아요, 싸운 게 아니에요.” 그저 그녀가 일방적으로 화풀이했을 뿐 곽승재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사모님, 저는 도련님이 지금 사모님에게 신경을 엄청 많이 쓰는 것 같아요. 이 보양국도 도련님께서 특별히 저더러 끓이게 하신 거거든요. 사모님이 오시면 드시라고 하셨어요.”이미숙이 말했다.말을 들은 고은서는 갑자기 입맛이 떨어졌다. 곽승재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분명 속셈이 전부 자신에게 까발렸는데도 왜 이런 일에 신경을 써주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식사 후, 고은서는 방으로 돌아갔고 민시후가 보낸 문자를 읽었다. “은서 씨, 오늘 너무했네요. 아직 저에게 밥 한 끼 사줘야 하는 거 기억하고 있죠?” ‘이 사람, 오히려 탓하고 있네?’“민 도련님, 할 말 다 했어요? 한 번도 아니고 계속 저를 방패막이로 이용하면서, 나중에 밥까지 얻어먹으려고요?”민시후가 문자를 읽고 바로 전화를 걸어왔다. “왜요? 싸우려고요?”고은서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아니, 왜 이렇게 화를 내요? 목소리에 깜짝 놀랐네.”민시후가 귀를 만지면서 말했다.“혹시 평소에 승재 씨 전화를 받을 때도 이러나요? 그래서 버림받은 거 맞죠?” 고은서는 어이가 없었지만 답장하지 않기로 했다.“민 도련님, 대체 무슨 일인데요? 혹시 저와 승재 씨 사이가 궁금해서 그런 건 아니죠? 만약 진짜라면 그쪽이 승재 씨를 비밀리에 좋아하는 게 아닐까 의심스럽네요.” “우엑!”민시후가 매우 불쾌해하며 말했다.“나는 너처럼 사람 보는 눈이 구리지 않아!” 두 사람은 티격태격 몇 마디를 주고받다가 고은서가 짜증에 전화를 끊으려고 하자, 민시후는 비로소 본론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제인의 약품을 홍보하고 싶다면서요, 내가 초기 계획서를 작성해 놨으니 한 번 확인해 보세요.
그녀의 질문을 듣고 곽승재는 무언가가 생각난 듯 표정이 더 굳어졌다. “이렇게 약 바르는 시간을 질질 끄는 이유는 할머니께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시게 하려는 거야?” 고은서는 말이 없었다. 더 이상 거절하는 것은 오히려 그녀의 몸에 무리가 되었다. 곽승재에게서도 약 냄새가 났고 아마 약을 발랐던 것으로 봐서 그의 경험이 확실히 이미숙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생각을 마친 고은서는 다시 의자에 앉으면서 잠옷을 조금 뒤로 당겼다.“앉아서 바르면 돼.” 그가 아무리 자신의 몸에 관심 없어 보일지라도 갑자기 생각이 바뀔 수도 있으니 지금 이 자세가 제일 안전할 것으로 생각했다. 곽승재는 순순히 그녀의 뒤로 가서 약 오일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덥힌 후 그녀의 어깨에 대었다. 따뜻한 손이 상처에 닿자, 고은서는 약간 따끔하면서도 따스한 느낌을 받았고 자연스레 눈을 질끈 감았다. 곽승재는 그녀의 반응을 보고도 여전히 같은 힘으로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조금 아프긴 했지만 오일의 시원함과 그의 손바닥 온도가 피부에 닿으니 미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곽승재는 대략 30분 정도 문질러 주었다. 고은서는 코끝에 땀이 나기 시작했고 곽승재는 그녀보다 더할 것으로 추측되었다. 이미숙이 했더라면 곽승재만큼 잘 해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고은서는 잠시 곽승재에 대한 편견을 내려놓기로 했다. 마사지가 끝난 후 곽승재는 더 머물지 않고 말도 없이 바로 방을 나갔다. 고은서는 오히려 그의 행동에 놀랐다. ‘뭐야, 그렇게 손해 볼 줄 모르던 사람이 아무 조건도 없이 그냥 가버렸다고?’ 밤이 되어 고은서가 흐릿하게 잠들었을 때 침대 옆에서 약간의 움직임을 느껴졌다. 곽승재가 침대에 올라왔다. 아마도 이혼 날짜와 며칠밖에 남지 않았으니 잠자리 이동도 귀찮아했을 것이다. 고은서는 그리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잠을 잤다. 다음 날은 토요일이었다. 고은서가 일어나 보니 곽승재의 모습은 이미 사라졌었다.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아침을
고은서는 곽승재가 지난번에 한 말이 떠올랐다.서인수가 사람을 파견하여 그녀를 협박한 일은 우선 아무런 증거가 없고, 설사 그와 관련된 것이 밝혀지더라도 그가 스스로 한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이 일로 경찰에게 체포된 거라면 기록 몇 장과 몇 마디 경고로 끝날 가능성이 컸다.그래서 주민기는 서인수의 배경을 조사하여 그가 비정상적인 수단을 사용한 이유로 개업 당일에 조사를 받도록 했다.‘몇 년 동안 감옥에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나오다니...’“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는 약한 사람에게는 강하게 나오고 강한 사람에게는 겁을 내는 타입이에요. 이번에 대표님이 은서 씨를 위해 그를 처리한 걸 알았으니 다시는 함부로 행동하지 않을걸요.” 도아름은 그녀를 안심시켜 주었다.“그가 나올 때 내가 직접 가서 경고할 거예요. 다시 은서 씨를 괴롭히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요.” 고은서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알겠어요. 요즘은 그래도 법이 최고니까 그가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겠죠.” 이 일에 대해 조금 더 얘기를 나눈 후 도아름이 말했다.“지연 씨도 해외에서 돌아온 지 며칠 됐죠? 우리끼리 점심시간에 함께 식사하러 가지 않을래요?” “좋아요. 지금 지연 씨에게 연락해 볼게요.” 고은서가 핸드폰을 꺼내려던 찰나, 마침 박지연의 번호가 화면에 떴다. “어머, 통했네? 방금 너에게 전화하려던 참이었어.”고은서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잠깐만, 나 먼저 얘기할래!”박지연이 말했다.“우리 팀원들이 단체워크숍을 가기로 했는데 가족도 함께 갈 수 있대. 온 닥터는 시간이 안 되어서 네가 나랑 함께 가줘!” 고은서가 물었다.“어제는 왜 얘기 안 했어? 이렇게 갑자기?” “어제는 너를 데려갈 계획이 없었어. 오늘 온 닥터가 마침 시간이 안 되니까 네가 대신 가달라고 부탁하는 거야.”박지연이 대답했다.“우리 정말 오랜만에 함께 놀러 가는 거잖아. 지금 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 “아참, 네가 전화한 이유는 뭐야?”박지
곽승재가 그녀에게 회사 사람들이 토요일에 운호 산장에서 단체워크숍을 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었다. ‘이렇게 우연히 맞아떨어질 수는 없잖아. 박지연도 이곳을 선택했다고?’고은서는 박지연을 옆으로 끌어당기며 물었다.“솔직히 말해봐, 곽승재와 짜고 온 거야?”박지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뭘 짜?”“모르는 척하지 마.”고은서는 박지연을 노려보며 말했다.“너 언제 곽승재에게 매수된 거야?”며칠 전 병원에서 만났을 때 박지연은 워크숍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는데 오늘 갑자기 결정하고 이곳에 왔다. 게다가 고은서에게 구체적인 장소도 알려주지 않았던 것은 그녀의 의심을 피하려고 했던 것이다.고은서를 더 이상 속일 수 없다는 것을 보자 박지연은 그냥 헤헤 웃었다.“매수라고 하긴 그렇고, 우리 부서 몇 명끼리 정말로 놀러 오려고 했어. 마침 승재 씨가 이곳에 온다고 했거든. 또 워크숍 하는 김에 함께 하자고 초대해서 그냥 거절하지 않은 것뿐이야.”고은서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박지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원래 이런 작은 이득을 놓치지 않는 사람이었어?”“작은 이득이 아니지, 운호 산장은 소비가 엄청나. 게다가 최상급의 천연 온천이라 미네랄 성분이 풍부해서 피부 요양과 회복에도 좋대. 너에게 딱 맞잖아! 내 전 재산을 걸고 말할게. 진심으로 너를 생각해서 그런 거야.”박지연이 대답했다.“전 재산까지 건다고? 전 재산 안 아까워?”고은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뭐가 아까워.”박지연은 고은서를 안으로 밀며 말했다.“승재 씨도 그렇게 무서운 사람은 아니야. 네가 예전에 가장 사랑했던 남편이잖아!”고은서는 한 대 치고 싶은 생각을 겨우겨우 참았다.“박지연, 네가 말한 대로 그건 예전의 일이고, 지금 나는 그와 아무런 관계도 없어. 네가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뭐야?”“이혼하더라도 완전히 연락 끊고 지낼 필요는 없잖아?”박지연은 그녀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게다가 너희는 아직 부부잖아. 어차피 여기서 그를 안 만나도 집에 가서 만날
이곳 객실의 인테이러는 한옥의 독특한 분위기를 창출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전통과 현대적인 요소를 혼합한 한옥 스타일로, 가구와 소품들이 현대적임에도 원목으로 나름의 톤을 맞추어 잘 어울렸다.고은서의 방은 박지연과 같은 층이 아니었다.그녀가 방문을 열어보니 넓고 큰 침대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정갈하고 흰 이불 위에 붉은 장미꽃이 놓여 있었고, 꽃잎도 많이 뿌려져 있어 분위기를 한 층 더 살려 주었다. 또 여러 가지 쌍으로 된 장식품들이 분위기를 은근히 애매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작은 여행 가방이 옷장 옆에 놓여 있었고 고은서는 가방을 열어보았다. 안에는 그녀의 수영복, 잠옷, 기타 갈아입을 옷들 등이 있었고, 스킨케어 제품과 화장품도 있었다. 확실히 이미숙의 손길이 느껴졌다. ‘다들 내 일정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모르는 건가?’고은서는 수영복을 꺼내 입었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며 약간 어색하게 느꼈다. 가슴 부분이 너무 많이 드러나지 않나 싶어서였다. 이 수영복은 원래 곽승재와 함께 온천에 가려고 사왔던 것이다. 곽승재가 냉정하게 거절한 뒤 그녀는 수영복을 넣어두었고 단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었다. 그냥 보기엔 꽤 평범한 스타일이었지만 막상 입어보니 너무 섹시한 핏이었다. 그때 외부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고은서는 박지연이라고 생각되어 문을 열며 물었다.“지연아, 이 수영복 좀 너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고은서는 멈췄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박지연이 아니라 훤칠하고 잘생긴 곽승재였다. 그는 오늘 캐주얼하게 흰색 폴로 셔츠와 검은색 슬랙스 바지를 입고 있어서 평소의 딱딱함은 사라지고 한결 느긋하고 편해진 느낌이었다. ‘이 시간에 GS그룹 직원들과 온천에 가거나 차를 마시고 있어야 하는데 왜 여기에 있는 거지?’곽승재의 검은 눈동자는 고은서를 응시하고 있었다. 몸에 타이트하게 달라붙는 수영복 디자인이 그녀의 허리를 한 손으로 잡을 수 있을 만큼 감싸고 있었다. 검은 천 아래 그녀의 가는
곽승재의 행동을 보고 오해를 한 듯 엘리베이터 밖에 서 있던 커플이 그를 향해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여자친구분을 미처 보지 못하는 바람에...”“여자친구 아니에요. 그냥 낯선 사람일 뿐이에요.”곽승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상대방의 말을 끊었다.커플은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고은서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고는 이내 자신의 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고은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곽승재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대표님, 화내지 마세요. 아까 그 여자...”여자가 말하면서 다정하게 그의 팔짱을 끼려고 할 때, 곽승재가 한기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여자가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몇 마디 더 보태려고 할 때 곽승재는 이미 뒤도 돌아보지 않고 룸으로 향했다.그러나 두 사람이 예약한 룸은 다름 아닌 고은서의 맞은편 룸이었다.이를 발견한 여자는 또다시 멈칫했다. 그녀는 두 사람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하지만 그녀가 곽승재한테 빌붙으려 하는 데는 별 상관이 없었다.여자는 연회에서 곽승재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녀는 여러 업계를 오가면서 사람 보는 눈이 꽤 높았는데 대부분 남자들은 잘난 체를 하지 않으면 또 다른 여러 가지 일로 맘에 안 드는 일이 일쑤였다. 그러나 곽승재처럼 뼛속으로부터 우러져 나오는 고귀한 기품을 가진 남자는 어디 가나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그녀 또한 그에게 푹 빠진 것이다.처음에는 자신을 냉대하는 곽승재를 보면서 낙심하긴 했으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매력을 어필했다. 끝내 연회가 끝나기 전에 곽승재는 무언갈 떠올렸는지 그녀에게 눈길을 주었다.수많은 남자를 만나본 그녀는 이내 그의 뜻을 깨닫고 그에게 대신 운전해서 데려다주겠다고 먼저 건의했다.아니나 다를까, 곽승재는 그녀에게 호텔 이름을 댔다.여자는 애써 흥분을 억누르고 곽승재와 함께 호텔로 향했다.하지만 곽승재는 프런트 데스크에서 룸만 예약하고 로비에 앉아 부하들과 온라인미팅을 했다.얼마나 지났을까, 여자가 농락을 당했다고 생각하려는 찰나 그
곽승재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의외네. 내 이름을 다 기억하다니.”‘머리에 문제 있는 거 아니야?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면서 왜 비아냥거리며 난리야?’엘리베이터는 문이 너무 오래 열려있은 탓에 경보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곽승재가 길을 비켜줄 생각이 없어 보이자 고은서도 더는 그와 다투기 싫어 엘리베이터 버튼이 있는 구석에 서 있었다.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데 일이 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기에 그저 참을 생각이었다.이내 곽승재가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면서 경보 소리가 멈추고 문이 닫히면서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몇 층으로 가세요?”고은서가 곽승재랑 함께 온 여자에게 물었다.여자는 그녀를 아래 우로 훑어보더니 자랑이라도 하는 듯 턱을 받쳐 들고 말했다.“그쪽이랑 같은 층이에요.”‘나랑 같은 층이라고? 진짜 엿 먹이려고 작정한 거야?’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엘리베이터 각 면에 거울이 있었기에 그녀는 곽승재와 여자의 행동을 엿볼 수 있었다.여자는 곽승재 곁에 꼭 붙어서 물었다.“대표님, 저분과 아는 사이세요?”자신의 얘기가 나오자 고은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 못 들은 척했다.곽승재는 콧방귀를 뀌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자도 눈치 있게 더는 캐묻지 않고 그에게 애교부리기 시작했다.“대표님, 이 호텔 레스토랑 음식이 엄청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오늘 저녁에 아무것도 드시지 않은 것 같으신데 웨이터한테 우리 룸으로 가져다 달라고 할까요?”곽승재는 아주 덤덤하게 답했다.“하고 싶은 대로 해.”“그럼 저 와인도 같이 주문해도 될까요?”여자는 곽승재의 대답에 점점 더 담이 커졌다.“오늘 대표님 대신 운전하느라고 연회 때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단 말이에요. 보상은 해줄 거죠?”곽승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응.”그의 대답을 얻은 여자의 목소리가 방금전보다 더 애교스러워졌다.“고마워요, 대표님.”‘우웩, 토할 것 같아.’고은서는 그녀의 목소리에 속이 울렁거린 탓에 저도 모르게 그녀를 힐끗 쏘아보았다.“왜, 의견이라도 있
민시후는 성가시다는 듯 그녀를 째려보면서 말했다.“자기애가 너무 넘치는 거 아니야? 내가 이혼까지 했던 너를 왜 좋아해?”고은서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녀와 함께 연기하면서 이미 귀찮은 일들을 많이 겪었는데 진짜 그녀를 좋아하게 된다면 성가신 일이 지금보다 더 많을 것이다.게다가 고은서는 더는 사랑이란 단어에 속박당하고 싶지 않았다.호텔 앞에 도착했을 때 고은서는 민시후한테 내리지 말라고 말했다.“나 혼자 들어가면 돼.”“확실해?”“응.”민시후는 그녀를 힐끗 보더니 이내 아무 말 없이 떠났다.고은서는 호텔 로비로 들어가면서 박지연에게 연락했다.그러나 전화가 통하기도 전에 프런트 데스크 앞에 서 있는 익숙한 모습을 발견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곽승재였다.그의 옆에는 화려한 옷차림을 한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이십 대 좌우로 보였는데 손에는 명품백을 들고 있었고 아주 화려한 옷차림에 몸매도 우월했다.함께 서 있는 두 사람은 마치 선남선녀 같았다.이를 본 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뭐 하자는 거지? 내가 이 호텔에 있는 걸 알면서도 굳이 여자를 데리고 여기로 온다고? 해성에 다른 호텔이 없는 것도 아닌데.’“은서야, 괜찮아?”전화 너머로 박지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이내 시선을 돌리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으며 답했다.“응. 너 온 닥터랑 얘기 나눠봤어? 왜 그 여자랑 함께 카페로 갔는지는 물어봤고?”“물어봤지. 다른 친구가 유혜린이 귀국한 거 알고 같이 밥 먹자고 했대. 그런데 종일 수술하면서 피곤해서 그저 같이 커피 사러 간 거라고 했어.”“그게 다야?”고은서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면서 말했다.“응.”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고은서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물었다.“다친 손이 괜찮은지는 안 물어보고?”“연고 가져다줬어. 병원으로 새로 개발한 건데 흉터 없애는 데 좋다면서 주던데.”“그 외에는 아무 말도 없었어?”고은서가 닫힘 버튼을 누르면서 캐물었다.“잠시만요.”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고 할 때
고은서가 되물었다.“왜 그렇게 묻는 거야?”민시후는 콧방귀를 뀌면서 답했다.“백씨 집안 프로젝트를 산통 깨는 거 왜 나한테 부탁하지 않고 송민준한테 부탁한 거야? 목적이 분명하잖아.”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반박했다.“그냥 너한테 빚지기 싫어서 그런 건데.”“우리 둘 사이에 무슨 빚 같은 소리를 하고 그래. 나한테 널 깊이 사랑하는 캐릭터를 유지하라고 한 사람은 너잖아.”민시후가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그럼 송민준도 내 속셈을 알아차렸다는 거네.”“알아차리라지 뭐. 게다가 송민준 집안 도우미가 그런 짓을 했는데 네가 의심하는 것도 아주 당연한 일이지 않아? 걔도 자신이 무고하다는 걸 증명할 의무가 있잖아.”민시후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고은서는 민시후가 자신을 이 정도로 지지할 줄은 전혀 생각 못 했다.“그런데 그 도우미가 수상하긴 해. 처음부터 모든 걸 혼자 안고 갈 생각이었으면 숨을 필요가 없잖아. 게다가 왜 송민아 전화는 받지 않으면서 송민준한테는 저렇게 쉽게 걸려든 거지?”민시후는 그녀가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고 비아냥거리는 대신 그녀에게 주의를 주었다.“이번에는 너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그냥 넘어가 줄 거야. 그런데 다시는 송민준 앞에서 꼼수 부릴 생각하지 마.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나도 감히 못 건드리는 존재라고.”고은서는 민시후의 말을 들으면서 처음에는 고개를 끄덕였는데 마지막 한마디를 듣자마자 참지 못하고 반박했다.“제발 총명한 척 그만해줄래?”민시후는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너보다는 총명하지. 게다가 내가 멍청하다고 생각했으면 날 찾아와서 협력을 제안하지 않았을 거잖아.”고은서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민 도련님, 겸손한 것도 일종 미덕이에요.”“이미 충분히 우수해서 그 어떤 미덕도 나에겐 금상첨화일 뿐이야. 딱히 너무 중요하진 않다는 생각이 드네.”...두 사람은 곧장 ZY 그룹으로 돌아갔다.고은서도 정식으로 회사 직원들에게 인사했다.전에 입사 활동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데다가 그
투약한 간호사도 전에 이미 곽승재에 의해 경찰서로 넘겨졌는데 그녀의 증언에도 진희숙만 언급되었다.고은서는 이 모든 결과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그녀는 속으로 백유미의 신중함을 탄복했다. 그녀가 경각심을 낮추지 않고 제때 녹음하면서 증거를 남겼더라면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당사자로서 고은서는 경찰 조사에 협조한 후 나머지 일을 변호사에게 맡겼다.“걱정하지 마세요. 증거가 확실하니까 상응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송민준이 말했다.고은서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진정으로 대가를 치르길 바라는 사람은 백유미이지 대신 누명을 쓴 진희숙과 간호사가 아니었다.“우리 민아도 잘못한 곳이 있으니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원하는 보상이라도 있으시면 얼마든지 말하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보상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송민준이 말을 이어갔다.“보상은 필요 없어요. 괜찮다면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시죠.”고은서가 말했다.“무슨 부탁이요?”“백씨 집안에서 요즘 여러 프로젝트를 도맡아 하고 있다던데, 그 프로젝트들을 저 대신 산통 깨주세요.”고은서도 민시후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곽수혁이 GS그룹 일에 끼어들면서 백씨 집안에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그녀의 말을 들은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송민아 보고 나한테도 그만 집적거리고 해. 나도 스트레스 그만 받고 싶어.”옆에 있던 민시후가 갑자기 말을 보태었다.송민준은 민시후를 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시후야, 민아가 어릴 적부터 널 좋아한 걸 너도 알고 있잖아. 민아가 포기하지 않는 이상 우리도 곁에서 어쩔 수 없어.”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성가시다는 듯 직설적으로 말했다.“난 어릴 적부터 송민아가 싫었다고.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데는 진짜 짝이 없다니까.”송민준은 그의 말에 답하지 않고 시선을 고은서에게로 돌리며 물었다.“이혼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시후랑 함께 있을 생각이신가요?”‘소식이 빠르네.’이혼한 지 며칠 되지도 않
“걱정하지 않아도 돼. 민아 데리고 오지 않았으니까.”송민준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갔다.“혹시나 또 고집부리면서 기분 나쁘게 할까 봐 오늘 너희랑 만난다는고 얘기하지 않았어.”민시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제발 좀 북제로 데려가. 해성에 계속 있게 하지 말고.”송민준은 나긋한 미소를 보이면서 답했다.“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게다가 이미 ZY 그룹으로 출근하기로 했다던데.”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눈살을 더 세게 찌푸렸다.“우리 아버지가 송민아를 강제로 ZY 그룹에 밀어 넣은 건 나도 별다른 방법이 없는데 나중에 또 고은서를 해치려 하거든 가만두지 않을 거야! 또다시 너랑 우리 아버지 때문에 봐주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고은서는 민시후를 쏘아보았다.‘나랑 송민준을 원수 사이로 만들 생각인 거야?’“뭘 쏘아봐?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민시후는 점점 더 흥분해 하며 말했다.“전에도 몇 번이고 널 협박했잖아. 심지어 간호사를 교사하여 우리 아이까지 잃게 한 사람이야. 네가 날 막지만 않았으면 내가 송민아를 가만둘 거 같아?”“...”고은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전에 유산한 경과를 민시후에게 간단히 알려주면서 송민아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그걸 이렇게 이용할 줄은 미처 생각 못했다.씩씩거리는 민시후를 보면서 고은서는 그가 배우를 하지 않은 게 너무 아쉽다고 속으로 감탄했다.송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도 전문가에게 나가보라 하고 직접 민시후에게 차를 따라줬다.“전에 병원에서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해. 오늘 만나자고 한 것도 그 일 때문이야.”송민준이 말하기를 진희숙은 송민아를 친딸로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돌봐온 사람으로서 그녀가 두 사람 일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그런 모험을 했다고 한다.그리고 송민아가 간호사랑 만난 모습이 포착된 사진은 진희숙이 그녀를 불러내 우연하게 찍힌 사진이라고 한다.“민아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형, 형수님이 민시후한테 별다른 마음은 없어 보이는데 걱정하지마.”“내가 무슨 걱정을 한다고 그래?”곽승재가 약간 어색해하며 말했다.“이미 이혼한 사이인데 고은서가 누구한테 마음이 가든 누구랑 있든 나랑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야.”“아까 썩은 표정을 하고 경적을 울린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네.”육현석이 작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그러나 갑자기 차가운 시선이 느껴지면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애써 웃으면서 변명거리를 찾았다.“맞아, 맞아. 형 말이 맞아. 형수님이 누구랑 있든 형이랑 이젠 아무 상관없는 일이지. 역시 이혼 같은 작은 일 때문에 속상해하는 일은 전혀 없는 우리 형, 상남자답다니까.”곽승재의 얼굴빛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걸 발견한 육현석은 이내 입을 화제를 돌렸다.“형, 형수님이 형을 보기 싫어하는 것도 화나서 그러는 거잖아. 계속 이렇게 자존심 때문에 고집부려서는 안 된다니까. 형수님한테 문자도 하고 전화도 하면서 존재감을 나타내야 할 거 아니야.”그의 말을 들은 곽승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네가 말했다시피 날 싫어하잖아. 그런데 무슨 존재감을 나타내라는 거야?”“지금 상대방을 잊지 못하고 놓아주기 싫은 사람은 형이잖아.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고 형수님이 스스로 돌아올 것 같아? 형, 자존심 따위 버리지 않으면 형수님 영원히 돌아오지 않아.”육현석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전에 낯선 사람 사이로 지내도 되냐고 물었을 때 아주 흔쾌히 된다고 답하던 고은서의 모습이 떠올랐다.어제 점심, 그가 스케줄을 바꾸면서까지 병원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고은서가 이혼해서 무척 기쁘다고 하면서 자신의 뒤담화를 하는 걸 들었다.그러나 방금전 민시후와 다정하게 장난치면서 자신을 보고서도 모르는 척하는 그녀를 생각하면 이건 자존심을 내려놓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고은서가 이젠 진짜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곽승재는 눈살을 질끈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언제 고은서랑 다시 화해하고 싶다고 했어? 인제
민시후는 그가 입을 열길 기다리고 있는 고은서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오글거려 죽겠네.”고은서는 끝내 참지 못하고 방금전 손을 닦던 물티슈를 그를 향해 던졌다.“누가 오글거린다는 거야! 사람 호기심 불러일으켜 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 짜증 나는 자식아!”“고은서!”물티슈에 얼굴을 맞은 민시후가 물티슈를 다시 주어 그녀를 향해 던지려고 할 때 뒤에서 갑자기 빵빵하는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와 민시후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보니 고급 SUV 한 대가 뒤에 세워져 있었는데 그 운전석에는 육현석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다름 아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곽승재였다.육현석은 조심스레 그녀를 향해 손을 저으며 옆에 있는 곽승재를 힐끔힐끔 보았다. 방금 경적 소리를 낸 게 그가 아니라 곽승재인 것이 분명했다.SUV 차량 높이가 꽤 있었기에 아마 방금전에 그녀와 민시후가 장난치는 걸 본 모양이다.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가운 얼굴빛을 한 채 앉아있는 곽승재를 보며 고은서는 성가시다는 듯 몸을 홱 돌리면서 민시후에게 말했다.“초록불이야. 안 가고 뭐 해?”민시후도 차 안에 앉아있는 육현석과 곽승재를 보았다. 그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하고 액셀을 밟기는커녕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백미러를 쳐다보았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여기에서 볼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전에 두 사람이 운전하면서 맞부딪친 일이 떠올랐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안전벨트를 꼭 쥐고 말했다.“민시후, 우리 약속 있는 거 잊은 거 아니지? 이상한 짓 하지마.”민시후는 불쾌하다는 듯 그녀를 보며 말했다.“이상한 짓이라니. 전에 내 차를 먼저 박은 사람은 곽승재거든.”‘네가 곽승재 차 앞에 막아서서 시비 걸지 않았으면 곽승재가 널 박을 리도 없었거든.’고은서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민시후가 조용히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이자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러면 나 먼저 차에서 내려도 돼?”“너 언제부터
민시후는 송민준과 찻집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맑은 하늘에 눈 부신 햇살, 날씨가 참 좋았다.민시후는 기사 대신 직접 하늘색 스포츠카를 운전했다.고은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띄는 스포츠카를 보며 말했다.“민 도련님, 패션 워크 보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레스토랑 가는 것뿐인데 굳이 이렇게 눈에 띄는 차를 운전해야 할까요?”“그냥 평범한 스포츠카일 뿐인데 어디가 눈에 띈다는 거야? 잔말 말고 얼른 타. 내가 직접 운전한다는데 영광으로 생각하라고.”민시후가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고은서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 탔다.스포츠카가 유독 눈에 띄기는 했지만 길에 차들이 적었던 탓에 다행히도 너무 큰 이목을 끌지는 않았다.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가는 도중에 ZY 그룹 근황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곽승재가 ZY 그룹을 타깃으로 삶고 짓누르려고 할 때 민시후가 제때 빠르게 대응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소홀히 넘길 수 없는 영향을 받았다.“허 교수님 쪽에 의약 프로젝트가 아주 순리롭게 진행되고 있어. 후기도 꽤 괜찮고. 연구소에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민시후는 회사 일을 얘기할 때만은 진지했다.“대리권도 네가 쟁취해 온 거니까 융자에 관한 일도 네가 책임지고 잘 해봐.”고은서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그녀는 전에 박지연한테서 곽승재가 융자에 관한 일을 백유미에게 맡길 예정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가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는지 의문스러웠다.그녀는 궁금증을 덜기 위해 민시후에게 물었다.“곽승재 아버지가 얼마 전에 귀국하셨는데 회사 일에 참여하려 했다가 곽승재한테 거절당했다고 하더라고. 아마 이번 일도 곽승재가 아버지 건의를 거절하고 직접 내린 결정일 거야.”‘그렇구나. 그런데 회장님이신 자기 아버지랑 맞붙는 거 보아서는 아마 두 사람도 사이가 별로인가 보네.’고은서는 이내 민시후 아버지가 전에 편찮다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아버지는 괜찮으셔?”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민시후는 피곤하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