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박지연 씨를 만나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곽승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근데 지연 씨 이미 결혼하셨어.”속셈을 들켜버린 육현석은 화를 내지 않았지만 풀이 조금 죽었다.“왜 한창 젊은 나이에 다들 일찍 결혼하는 거지? 형수님은 예외지만, 형수님은 형을 너무 사랑해서 결혼했을 거야.”육현석이 얼른 말을 덧붙이자 곽승재는 또 웃었다.“박지연 씨의 남편은 큰 병원의 주치의이야. 그럼 박지연 씨는 사업에 성공하고 듬직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거 아니겠어. 너에게 기회가 있었다 해도 박지연 씨는 널 좋아하지 않았을 거니까 꿈 깨.”육현석은 어이가 없었다.‘형도 뒤끝이 장난 아니네. 역시 두 사람 부부 아니라 할까 봐. 뒤끝이 긴 것도 똑같아.’육현석은 두 사람에게서 이중으로 상처를 받았다.이튿날 아침, 박지연은 고은서를 위해 준비한 죽을 들고 병원에 도착했다.“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너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큰 술병을 몸으로 막은 거야!”고은서를 보자마자 박지연은 투덜거렸다.“네 목숨을 걸고 승재 씨를 구했으면서 승재 씨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았다는 말이 나와? 누가 믿냐?”고은서는 한숨을 쉬었다. 누구라도 이 소식을 알고 나면 박지연처럼 더는 자신을 믿지 않을 게 분명했다.‘사람은 역시나 바보 같은 짓을 벌이면 안 돼. 아니면 이렇게 문제가 끊이질 않아.’“다친 걸 봐서 그만 말하면 안 돼? 나도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고 있어.”고은서가 용서를 빌었다.박지연은 고은서의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네가 그토록 위험을 무릅쓰고 곽승재 씨를 지켰다는 것은 아직도 그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거 아니야? 내가 볼 때 차라리 이혼을 관둬. 승재 씨는 몸매 좋지, 얼굴도 잘생겼지, 게다가 유명한 GS 그룹의 대표잖아. 어디 가서 이렇게 돈 많고 잘생긴 남편을 찾아. 그리고 싸움할 때도 아주 멋있더라. 지금 곽승재 씨도 너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던데, 그냥 그렇게 같이 지내.”“너에게 중재인의 소질이 있는 건 처음 알았네.”고은서는 박지연을
박지연의 이름을 들어서인지 온 닥터는 고개를 들어 고은서가 아닌 박지연을 한번 쳐다보았다.박지연의 눈동자는 순간 초롱초롱해지더니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그러나 온닥터는 박지연과 인사하지 않고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는 시선을 돌려 두 사람을 지나쳐 의사들과 앞으로 걸어갔다.박지연의 미소는 선명하게 사그라들었다.고은서는 의아해서 물었다.“네 남편 왜 너와 인사 안 해? 어젯밤에 클럽 간 것 때문에 화났어?”박지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우리 남편 어젯밤에 수술이 잡혀 있어서 집에 돌아오지 않았어. 내가 나간 걸 모를 거야.”“그럼 왜 너를 모르는 사람 취급하는데?”박지연이 말했다.“오늘, 이 병원에 교류하러 온다고 했어. 주변에 그렇게 많은 동료가 있는데 나랑 인사하면 또 한바탕 자기소개해야 할 거 아니야. 시간을 낭비하기 싫었나 보지.”“널 쭉 이렇게 대했던 거야?”고은서가 묻자 박지연은 웃으며 말했다.“그런 건 아니야. 그 사람도 자기가 해야 할 일은 다 하고 있고 날 충분히 존중해줘. 난 이 잘생긴 얼굴을 매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해.”고은서는 어이가 없었다.‘이런 게 바로 유유상종이라는 건가...’사랑에 눈이 먼 고은서 옆에 똑같이 사랑에 눈이 먼 박지연이 있었다.두 사람이 정원에서 한참 산책하고 있을 때 간호사가 와서 고은서에게 재검사받을 시간이 되었다고 귀띔했다.병실에 돌아가자 고은서를 찾으러 온 육현석은 박지연을 보더니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지연 씨, 안녕하세요.”박지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마의 상처는 괜찮으시죠?”육현석이 대답했다.“네. 제가 항상 건강한데 어제는 단순한 사고였어요.”두 사람이 편하게 대화하는 것을 보고, 고은서가 입을 열었다.“지연아, 현석 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 검사받고 올게.”“형수님, 형이 회사에 처리해야 할 일이 좀 있어서 이른 아침에 회사에 갔어요. 좀 있다가 와서 형수님을 데리고 퇴원할 거예요.”육현석이 대신 전달했다.“이것 봐. 승
고은서는 곽승재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어젯밤에 허리를 다친 게 아니라 머리를 다친 거 아니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고은서는 이토록 지루한 문제를 상대하기 귀찮아서 곽승재를 무시하고 병실로 들어갔다.곽승재도 뒤늦게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은서가 별생각 없이 뱉은 말이었는데, 곽승재가 그렇게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두었을 줄이야?곽승재는 자신의 이 행위를 어젯밤에 제대로 휴식하지 못한 탓으로 돌렸다.병실 안에서, 박지연과 육현석은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고은서가 병실에 들어갈 때 두 사람은 마침 카톡을 추가하고 있었다.“검사 다 받았어?”고은서를 보자마자 박지연은 부리나케 그녀를 병실 화장실로 끌고 가서 문까지 잠갔다.“왜 이렇게 비밀스럽게 행동해?”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나지막한 소리로 흥분하며 물었다.“현석 씨한테 들었어. 승재 씨 입술의 상처 네가 물어서 생긴 거라며?”박지연이 묻지 않았더라면 고은서는 이 일을 벌써 잊었을 것이었다.오늘 곽승재의 입술은 많이 좋아진 것 같았다.‘현석 씨도 참 세심해. 그걸 다 발견하다니.’“사실 나도 어젯밤에 승재 씨의 입술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깊이 파고들 겨를이 없었어. 근데 현석 씨도 나와 같은 의문이 들어서 어젯밤 병실에서 승재 씨를 떠봤다고 하더라고.”박지연은 말하면서 감탄을 자아냈다.“너의 목 뒤에 승재 씨가 남긴 키스 자국이 있고, 넌 승재 씨의 입술을 깨물었고. 보아하니 두 사람 엄청 치열하게 사네.”치열하기는 개뿔.고은서는 박지연을 반박하려다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다.“내 목 뒤에 키스 자국이 있다는 거, 너 설마 현석 씨한테 말했어?”이 말이 육현석의 귀에 들어갔다면 아마 곽승재의 귀에도 곧 전해질 것이었다.만약 그 키스 자국이 곽승재가 남긴 게 아니었다면, 그에게 빌미 잡힐 게 뻔했다.“가십은 다른 사람이랑 공유해야 제맛이지. 아니면 무슨 재미로 그걸 수집해.”박지연은 당당하게 말했다.“두 사람 서로 안 지 몇 시간이나 되었
곽승재는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은서의 커다란 두 눈에서 가십거리에 대한 갈망의 눈빛이 초롱초롱한 것을 보더니, 그는 덤덤하게 대답했다.“현석이도 알고 있어. 너무 지나친 행동은 하지 않을 거야. 현석이는 자신의 감정을 스스럼없이 표현할 뿐이야.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걔도 어려움을 알고 물러서게 될 거야.”이 말을 들은 후, 고은서는 의외로 실망에 찬 표정을 지었다.“현석 씨더러 며칠 더 견지하라고 하면 안 될까?”곽승재는 수상쩍은 눈으로 고은서를 바라보았다.육현석이 며칠 더 견지하다 보면 박지연의 남편이 이 일을 알아차려 긴장감이 생겨 박지연에게 관심을 더 줄지도 모른다.하지만 고은서는 이 사실을 곽승재에게 알려줄 수 없었다.이에 고은서는 말했다.“당신과는 제대로 얘기할 수 없어.”“...”기사는 고은서를 예원 별장에 데려다주었다.고은서가 차에서 내리기 전, 곽승재는 담담하게 얘기했다.“저녁에 내가 돌아와서 당신 어깨에 약 발라줄게. 아주머니한테 부탁드리지 마.”어젯밤에 육현석도 한번 얘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고은서는 여전히 거절하였다.“괜찮아. 아줌마한테 부탁하면 돼.”곽승재는 희로애락을 드러내지 않고 말했다.“내 허리도 다쳐서 어혈을 풀어줘야 하잖아. 먼저 당신 갖고 연습 좀 해보려고.”이에 고은서는 대답했다.“차라리 당신 입을 꿰매면 우리 두 사람의 상처가 더 빨리 났는데 도움이 될 거야.”말을 마친 뒤, 고은서는 고개도 안 돌리고 가버렸다.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렸다.‘왜 은서의 반응은 내가 예상했던 거랑 다르지?’곽승재는 육현석처럼 불쌍해 보이는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말이 되는 다른 이유를 둘러댔지만, 고은서는 조금도 고맙게 여기지 않았다.‘여자란 참말로 귀찮고 속을 알기 어려운 존재야.’오후, 고은서가 마침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민시후의 메시지를 받았다.[물고기가 미끼를 물었어.]고은서는 정신이 바짝 들었다.[낚을 수 있겠어?][조급해하지
말을 마친 뒤, 고은서가 떠나려고 할 때, 뒤에서 민시후의 사악한 소리가 울렸다.“미끼는 이미 내다 던졌는데 그물을 걷지 않을 거야?”고은서는 발걸음을 멈칫하더니 이를 악물며 말했다.“민시후, 너 나한테 메시지를 보낼 때부터 이미 함정을 파 둔 거지?”민시후는 무심한 듯 대답했다.“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지. 우리는 서로 원하는 이득을 취하는 거지.”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송민아는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사람처럼, 일어서서 그들한테 다가왔다.“시후 오빠, 저쪽으로 가서 앉아줄 수 있어요? 저 은서 씨랑 단둘이 얘기 좀 하고 싶어요.”이 말을 들은 민시후는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물었다.“너 은서한테 무슨 말을 하려고? 경고하는데 네가 은서를 괴롭히면 아무리 네 오빠가 나선다고 해도 난 절대로 널 가만 두지 않을 거야.”송민아의 정교한 얼굴에는 일말의 슬픔이 서렸다.“걱정하지 마세요. 오빠가 여기에 있는데 제가 어떻게 감히 은서 씨를 괴롭히겠어요.”“아마 해라고 해도 못 할 거야.”민시후는 콧방귀를 뀌고는 표정이 확 변하더니 다정하게 고은서를 보면서 말했다.“무서워하지 마. 난 저쪽에 있을 테니 무슨 일이 생기면 얼마든지 날 불러.”고은서는 민시후를 한 눈 노려보고는 상대하기도 귀찮았다.민시후가 연신 뒤돌아보며 자리를 뜬 후, 송민아는 크게 숨을 한 모금 들이마시고 말했다.“은서 씨, 또 보네요.”송미아의 눈빛은 전보다 많이 굳건해졌다. 마치 무슨 사실을 받아들이기라도 한 것처럼.고은서는 도저히 어린 아가씨가 상심하고 슬퍼하는 꼴을 못 봐주겠기에 직설적으로 얘기했다.“민아 씨, 조금 전 민시후가 헛소리한 거예요.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그리고 지난번에 제가 민아 씨한테 거짓말했어요. 민시후는 저를 하나도 안 좋아해요. 오늘도 저는 저 사람의 협박을 받고 온 거예요. 민아 씨가 민시후를 좋아하는 거면 걱정하지 말고 대담하게 추구하세요. 저는 절대로 두 사람 사랑의 걸림돌이 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민아
다급하면서 애교가 섞인 ‘여보’라는 두 글자가 귀에 전해질 때, 곽승재는 자기가 전화를 잘못 건 줄 알았다.그는 핸드폰을 들어 통화 상대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보았는데 고은서가 맞았다.하지만 요새 고은서는 줄곧 그에게 소외와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었다. 이렇게 갑자기 열정적으로 나오는 건 아마도 빠져나가기 어려운 골칫거리에 엮인 것 같았다.“당신 지금 어디야?”곽승재는 바로 확실하게 물었다.고은서는 곽승재에게 식당의 위치를 알려주었다.그는 고은서가 지금 누구랑 같이 있는지, 왜 그곳에 갔는지는 묻지도 않고 바로 말했다.“내가 데리러 갈게.”전화를 끊은 뒤 고은서는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송민아는 너무 귀찮게 굴고 민시후는 뒤통수 때리기 전문이었다.고은서는 그들의 사랑싸움에 엮이고 싶지 않았다.바로 그때 곽승재의 전화가 아주 타이밍 좋게 걸려 온 것이었다.“민아 씨, 저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줄 수 없어요.”고은서는 정색하며 말했다.“제가 한 말들은 다 사실이에요. 민시후는 저를 좋아하지도 않고 저를 좋아할 리도 없어요. 민아 씨는 아직 어리고 예쁜 데다가 집안도 꽤 좋아 보이는데 민시후라는 나무에 목을 매 죽을 필요는 없잖아요.”환생하고 난 뒤로부터 고은서는 사람들에게 너무 사랑에 목을 매지 말라고 설득했다.인생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나도 많았기에 온종일 남자의 주위만 맴도는 건 아주 어리석은 짓이었다.게다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남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하지만 고은서가 좋은 마음으로 건넨 충고는 송민아의 고마움을 받지 못했을뿐더러 그녀의 얼굴에는 ‘역시’라는 표정이 역력했다.“은서 씨,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요. 제가 당신의 설교를 들을 필요까지는 없어요.”송민아는 조금 화가 났다.“제가 진심으로 은서 씨한테 가르침을 청하는데 은서 씨는 어떻게 빈말로 저를 대충 얼버무릴 수가 있어요? 제가 말했었잖아요. 저는 시후 오빠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요. 이번에 제가 돌아갔을 때, 오빠 아버님도 명
아마도 곽승재는 조금 전 민시후가 고은서를 가로막은 장면을 본 것 같았다.고은서는 곽승재에게 설명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찌 됐든 곽승재와 백유미의 관계는 그들보다 더 친했다.‘승재도 설명을 안 하는데 내가 왜 그에게 설명해야 해?’“출발해 주세요.”고은서가 기사에게 말했다.기사는 고개를 돌려 곽승재를 보면서 그의 뜻을 기다렸다.곽승재는 눈길을 거두고는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눈짓했다.그러고는 고은서에게 물었다.“당신 또 민시후 만나러 왔어?”“왜 말을 그렇게 시큰거리게 해?”고은서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당신이 민시후랑 사이가 안 좋은 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내가 그 사람을 만나면 안 돼?”곽승재는 한 소리를 먹었다.“고은서, 당신 나랑 좋은 말로 얘기하면 안 돼?”“미안한데 난 뒤끝이 좀 긴 편이라 당신한테 좋은 말로 못 하겠는 걸 어떡해.”역시 전화에서 들은 그런 애교는 다시 나타날 수 없었다.곽승재는 이 일로 더는 고은서와 싸우지 않았다. 그는 말길을 돌려 물었다.“방금 무슨 일이 있었어? 민시후가 당신을 난처하게 했어?”어찌 됐든 방금 곽승재가 때맞춰 고은서를 곤경에서 구해준 건 사실이었다.고은서는 더는 곽승재에게 원망스러운 말투로 말하지 않았다.“아주 작은 일이야. 난처하게 군 것까지는 아니야.”민시후가 꿍꿍이를 갖고 고의로 고은서를 불러낸 것은 맞았지만, 그의 손에는 아직 고은서가 원하는 물건이 있었기에 그녀는 이 일로 민시후랑 뒤틀어지면 안 되었다.“당신이 나한테 전화한 건 무슨 일이야?”고은서는 이제 생각이 나서 되물었다.곽승재는 고은서가 사실을 얘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챘다.그는 고은서가 말하고 싶지 않으면 아무리 자기가 캐묻는다고 해도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곽승재는 마음이 조금 거북한 것을 뒤로하고 고은서에게 물었다.“당신 어깨는 어때? 조금 전에 힘을 세게 쓰지는 않았지?”“괜찮아.”고은서는 차조차도 몰지 않았다.지금 그녀는 목숨을 엄청나게 아꼈기에 의사의 말
고은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 일도 걱정할 필요 없어. 아버님 앞에선 절대 이혼 얘기를 하지 않을 거야. 이혼 증서가 있어도 되도록 남들 모르게 숨기고 있을게.”곽승재는 고은서의 배려에 전혀 기쁘지 않았다.“지금 저택으로 가.”곽승재는 명령하듯이 말했다.“뭐라는 거야? 내가 안 가겠다고 했잖아.”고은서는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아직 이혼한 건 아니니까 내 아내의 의무는 다해야 하지 않겠어?”그가 대답했다.고은서가 아무렇지 않게 민시후를 만나러 오면서도 자신과 함께 저택으로 가는 걸 싫다고 하는 점이 정말 그를 빡치게 했다.고은서는 그의 강경한 태도를 보고 더 이상 그와 따지고 싶지 않았다.호원 저택은 이 구역 황금 지대에 위치한 규모가 꽤 큰 3층 고딕 스타일의 건물로 무려 앞뒤로 정원과 잔디 마당이 있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엔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곽승재는 대학 졸업 후 이곳을 떠나 자기 집에서 혼자 살았고, 결혼 후에는 예원 별장을 사들여 자기 새 거처로 정했다.지금 그의 부모님도 저택에 계시지 않고 할머니도 본가에 살고 있어 고은서는 이곳에 올 필요가 없었다.그러나 그의 부모님의 거처가 너무 궁금해 곽승재에게 한번 부탁한 적이 있다.“오빠, 나랑 함께 저택으로 가지 않을래? 오빠의 아내로서 부모님 댁에 한 번쯤은 인사하러 가봐야 하지 않겠어?”곽승재는 그녀의 말을 듣더니 차갑게 대답했다.“내 부모님은 국내에 안 계셔. 갈 필요 없어.”고은서는 매우 실망했지만 괜히 그를 불쾌하게 한 것 같아 그 후부터 이 일을 다시 꺼내지 않았다.하지만 이혼을 앞두고 곽승재가 직접 그녀를 데리고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운전사가 차를 대자 대문 앞에 있던 하인이 공손하게 마중했다.“오셨습니까, 도련님.”하지만 그의 뒤에 서 있는 금시 초면인 고은서를 보고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그러자 곽승재는 자연스럽게 고은서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고은서야.”이 이름을 듣자 하인은 곧바로 인
고은서가 계속해서 뒤를 보고 있자 민시후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매번 여시은이 나타나면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 같아.”고은서가 민시후를 바라봤다. 설마 그렇겠냐고 말하다 곧 그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처음 여시은을 만난 건 고양이 쿠아를 구할 때였다. 그 후 서운에서 여시은의 방에서 불이 났고, 이사 파티에서는 민시후가 함정에 빠졌다.유일 투자은행 개업식에서 페인트가 뿌려졌고 지난번 골프장에서는 곽현수와 골프를 치던 장우현도 다쳤었다.모든 사건이 여시은이 직접 일으킨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이렇게 많은 우연이 있을까?’‘하지만 만약 우연이 아니었다면 여시은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고은서는 더 이상 추측하지 않기로 했다. “고객을 만나러 간다며? 나를 병원 앞에 내려주면 돼.”민시후는 약간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그깟 고객 때문에 다친 너를 그냥 두고 가는 사람 같아 보여?”고은서는 헛기침을 한 번 하며 말했다.“중요한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민시후가 고은서를 바라보며 감정을 억누른 채 물었다.“왜 혼자 이런 곳에 왔어? 비서도 기사도 없이?”“새 프로젝트 때문에 온 거야. 그 회사의 작업실이 근처에 있거든.”고은서는 사실대로 말했다.“운전기사 부를 시간이 없었고 송민아는 다른 프로젝트로 바빠서 이번엔 그냥 혼자 왔어.”민시후는 다시 한번 말없이 고은서를 바라보았다. 다만 조금 더 차분해 보였고 무언가 애써 참는 것처럼 보였다.고은서의 요청대로 민시후는 그녀를 근처의 한 동네 병원에 데려갔다.동네 병원은 예약이 필요 없었고 진료도 비교적 간편했다.다행히 고은서의 팔에 난 상처는 깊지 않았다. 하지만 약 10cm 정도 되는 길이의 상처였고 지금은 더 이상 피가 나지 않았지만 주변이 이미 검붉게 부어 있어 보기에 꽤 충격적이었다.의사는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발라준 후, 파상풍 예방주사도 맞혔다.고은서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시은 씨, 전 괜찮아요.”고은서는 팔이 조금 아팠지만 상처를 보니 긁혔을 뿐 살까지 깊게 파고들지 않아 구급차를 부를 정도는 아니었다.“약국에 가서 씻고 약만 바르면 돼요. 경찰이 올 때까지 기다릴게요.”“그래도 병원에 가는 게 좋겠어요!” 여시은이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혹시라도 감염되면 큰일이에요! 제 기사님이 앞에 있어요. 그분이 병원에 데려다 줄 거예요. 저가 대신 여기서 경찰을 기다릴게요!”말을 마친 여시은은 고은서가 거절할 새도 없이 자기 사를 부르러 갔다.“은서 씨?”도로 옆에서 깜짝 놀란 듯 급하게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고은서가 고개를 돌리니 하얀색 캐주얼 슈트를 입고 차에서 뛰어 내려오는 민시후의 모습이 보였다.개업식 때 민시후가 고은서를 도와 성동욱 일을 처리해 준 후, 그녀와는 거의 연락 하지 않았다. 그의 비서가 두 번 전화를 걸어 도와줄 일이 있는지 물어왔으며 민시후가 최근 업무 때문에 너무 바빠서 살도 빠졌다는 얘기를 했었다.눈앞에서 다가오는 민시후를 보고 고은서는 갑자기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왜 여기에 있어? 손은 왜 그래?” 민시후는 고은서의 손을 잡고 긴장하며 물었다.“별거 아니 야.” 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노숙자들과 싸우다 철판에 긁혔어. 다행히 살까지 파고들지 않은 것 같아. 시후 씨는 어떻게 여기 있어?”“고객과 약속이 있어서 지나가던 길이야!”그때 여시은의 운전기사가 다가왔다. “지금 병원에 모셔다드릴까요?”여시은이 웃으며 말했다. “민시후 씨가 계시니 저는 빠져도 될 것 같아요. 빨리 은서 씨를 병원에 데려다주세요!”“시은 씨는 어떻게 여기에 계세요?” 민시후가 물었다.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이 여시은과는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그녀의 가정부가 관련되었기 때문에 민시후는 그녀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지 않았다. 그의 태도는 어쩔 수 없이 차가워졌다.여시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지만 여전히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 “여기 유명한 동물
게임 회사의 작업실은 다소 오래된 작은 아파트 단지에 위치해 있었고 단지에는 경비나 순찰을 하는 경비원도 없었다.골목에는 가로등이 있었지만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 비해 꽤 외진 곳이었다.차는 골목에 주차되어 있었고 고은서는 핸드폰에 집중하느라 주변 상황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두 남자를 알아챘을 때는 이미 그들이 바로 눈앞까지 다가왔다.두 남자는 하나는 마르고 키가 컸고 다른 하나는 까무잡잡했다. 그들은 헤진 옷을 입고 있었고 손에 든 짐 꾸러미에는 많은 쓰레기가 담겨 있었다. 아마도 근처에서 쓰레기를 주워 생계를 잇는 사람들인 듯했고 몸에서는 고약한 악취가 났다.고은서는 속으로 구역질을 참으며 본능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섰다.하지만 그녀는 차 옆에 서 있었기 때문에 한발 물러서자 차에 기대게 되었다.이제 차 문을 열고 들어가기는 이미 늦었고 두 남자가 점점 다가오고 있어 도망칠 수도 없었다.두 남자의 눈가는 이상하리만치 붉었고 고은서를 발견하자 점점 더 흥분된 듯 보였다. 그들은 입에서 지저분한 욕설을 뱉으며 다가왔다.“젠장, 오늘 운이 정말 좋아! 이 근처 쓰레기통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울 수 있을 줄 몰랐네. 게다가 이렇게 예쁜 여자도 만날 줄은!”“그렇지, 도시의 여자는 역시 다르네. 이 피부를 보라고. 아주 보드라워! 하하하, 집으로 끌고 가서 잘 놀아보자고!”그때, 악취 나는 마르고 키 큰 남자가 더럽게 손을 뻗으려 했고 고은서는 눈살을 찌푸리며 남자의 아랫배를 향해 강하게 발길질했다!갑작스러운 공격에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아랫배를 움켜잡고 무릎을 꿇었다.까무잡잡한 남자는 그제야 반응해 고은서를 잡으려 했고 고은서는 틈을 타 재빨리 몸을 틀어 그에게 발차기를 날렸다!하지만 남자는 상대적으로 더 강한 체격을 가졌고 고은서는 서 있는 자세 때문에 힘을 제대로 실을 수 없어 그를 넘어뜨리지 못했다.그러자 남자는 화가 난 듯 욕설을 퍼부으며 팔을 휘둘러 고은서를 향해 달려왔다.고은서는 민첩하게 몸을 낮추며 땅에 떨어진
육현석은 박지연의 말을 듣고 눈이 반짝였다.“방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줘!”박지연은 눈에 눈물이 고인 채로 그를 바라보며 더 분명하게 말했다.“말했잖아, 현석 씨가 너무 보고 싶다고. 만약 빨리 돌아올 수 없다면 내가 당장 현석 씨를 찾아갈 거야!”육현석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듯, 바로 대답했다.“정말? 그럼 내가 비행기 표 예약해 줄게! 짐 싸고 있어, 내가 기사 불러서 병원으로 데리러 갈게!”“응!”박지연은 행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미처 멀리서 혼자 서 있는 온승준을 보지 못했다.박지연이 남자 친구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온승준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졌다. 예전에, 그녀도 그렇게 그를 바라봤었고 그를 볼 때마다 눈이 반짝였었다.그는 그를 위해 L 국까지 갔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다른 남자에게로 돌아갔고 박지연의 마음속에 그의 자리는 더 이상 없었다.그 순간, 온승준은 박지연을 완전히 잃었다는 절망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얼마나 그녀에게 차가웠고 무관심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박지연이 원한 것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는데, 그는 그것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전화를 끊은 박지연은 복도에 서 있는 온승준을 발견했다. 그는 마치 서리 맞은 배추처럼 기운이 빠져서 문을 붙잡고 있었다.“괜찮아? 의사 불러줄까?”박지연은 그가 몸이 불편해 보여 물었다.온승준은 그녀의 촉촉한 눈과 입가의 미소를 보며 가슴이 더 아파졌다.“지연아, 미안해.”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박지연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았지만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우리 사이는 이제 끝났어. 그러니 더 이상 나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지금의 아내를 소중히 여기길 바라.”그 말을 끝으로 박지연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급히 떠났다.저녁 무렵, 게임 회사에서 나온 고은서는 박지연의 전화를 받았다.그리고 해주시로 간 박지연이 육현석과 이모와 함께 셋이서 식사를 했다는 말을 듣고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이제 양가 부모님을 만나는 단
박지연은 온승준이 휴대폰을 꺼내 드는 모습을 무심코 바라봤다. 화면에 나타난 발신자는 온승준의 어머니였고 박지연은 유혜린과 관련된 일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온승준은 휴대폰을 무음으로 바꾸고 말을 이어갔다.“지연아, 우리 부모님이 약속하셨어. 내가 유 닥터랑 결혼만 하면 더 이상 너한테 연락하지 않겠다고.”그는 간절히 부탁했다.“나도 이제 곧 이 병원을 떠날 거고, 그러면 우리는 만날 기회가 없을 거야. 그냥 마지막으로 선물을 하나 주고 싶은데, 정말 안 받을 거야?”“응, 받을 수 없어.”박지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결혼을 결심한 이유가 무엇이든, 결혼을 하기로 했으면 그 약속을 지키고 잘 살아. 나에게 상처를 줬으니 이제 다른 여자에게는 더 이상 상처 주지 말았으면 해.”온승준은 무슨 말을 더 하려고 했지만 사실 그가 할 말은 더 이상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한 건 그 자신이었다. 박지연과 재혼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결국 부모님의 뜻에 따라 타협했던 것이었다.그때, 안소희가 사무실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지연 언니, 잠깐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아요.”안소희의 얼굴에 떠오른 흥분을 본 박지연은 의아해하며 물었다.“무슨 일이야?”안소희는 온승준을 한 번 쳐다본 뒤 박지연을 문밖으로 끌고 가며 말했다.“저쪽이요. 배달원이 본인 사인이 필요하다 해서요. 전화가 무음이라서 연결이 안 되길래 제가 배달원 데리고 왔어요!”“여기요! 여기로 가져다주세요!”안소희가 말을 마치자 배달원이 큰 꽃다발을 들고 다가왔다.“박지연 씨, 본인 맞으시죠? 육 대표님께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여기다 사인해 주세요.”박지연은 서명을 마친 후 꽃다발을 받았다. 그 안에는 푸른 장미가 들어 있었고, 그 속에 길고 정교한 보석 상자가 들어 있었다.“빨리 열어보세요! 안에 뭐가 있을지 궁금해요!”안소희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그녀는 육현석과 박지연의 연애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달콤한 순간을 보는 걸 좋아했다.박지연은 천천히 상자를 열
박지연은 순간 온승준이 술에 취했던 그날 밤을 떠올렸다. 그날 밤, 유혜린은 그를 집까지 데려다주었고 밤새 그를 돌봐주었다.‘그날 밤, 무언가 일이 생겼던 걸까?’“그날, 나는 유 닥터가 단순히 나를 돌봐준 거라고만 생각했어.”온승준은 마치 박지연의 생각을 읽은 듯 말했다.“근데 유 닥터 말로는 내가 유 닥터를 너로 착각했다고 하더라고. 집에 들어가자마자 자기를 방으로 끌고 갔다고...”“나는 술에 취해본 적이 없어서 술 취한 후 행동이 어떤지 몰라. 그런데 다음 날 출근했을 때 설민희 씨가 내가 술에 취해 너를 끌어안고 집에 데려가겠다고 하는 영상을 보여줬어. 그래서 내가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긴 해.”온승준은 이미 이 사실을 받아들인 듯했고 그의 목소리는 감정 없이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차분했다.“유 닥터는 원래 그 일을 없었던 걸로 하려고 했대. 나한테 말할 생각도 없었는데 며칠 전에 자기가 임신했다는 걸 알게 된 거야.”“유 닥터가 그 소식을 보냈을 때 나는 병원에서 어머니 퇴원 수속을 돕고 있었어. 그때 마침 어머니가 그 메시지를 봤고 그 후 나한테 유 닥터랑 결혼하라고 하셨어...”온승준은 박지연에게 설명하는 동안,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다. 박지연은 그가 반항하려 했을 수도 있었지만 손주를 원하는 부모님을 이기기엔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담담하게 말했다.“굳이 나한테 설명할 필요 없어. 우리는 이미 이혼했잖아. 결혼이든 재혼이든 그건 자유야. 게다가 나는 이미 남자 친구가 있어.”‘남자 친구’라는 말에 온승준의 표정이 잠시 흐려졌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박지연 앞에 놓았다.“이거 주고 싶었어.”박지연이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어제 악세서리 가게에서 봤던 그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목걸이에 박힌 다이아몬드는 하나하나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었고 조명 아래서 반짝이고 있었다.진열장에 전시된 다이아몬드 목걸이라는 건, 그 가격이 결코 저렴하지 않다는 걸 의미했다.
박지연은 온승준을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일이야?”온승준은 박지연의 얼굴을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음이 너무 불안해서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붙잡고 싶었지만 정작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박지연은 안절부절못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두 분 결혼 축하해요. 행복하시길 바랄게요.”예상치 못한 말에 온승준은 말문이 막혔고 유혜린은 그의 팔을 자연스럽게 감싸며 말했다.“지연 씨, 축하해 주셔서 고마워요.”박지연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고은서와 함께 가게를 떠났다.차에 타자 박지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하고 싶은 말 있으면 그냥 말해. 난 괜찮아.”고은서는 그제야 불만을 터뜨렸다.“온 닥터 뭐야? 해외로 나가겠다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 갑자기 유혜린이랑 결혼한다고 할 수 있지?”박지연은 차분히 대답했다.“아마 그 사람 부모님이 원해서 하는 결혼일 거야. 온 닥터도 번거로운 걸 싫어하는 사람이고 시부모와 관계 좋은 아내라면 그도 나쁘지 않으니까.”박지연은 자신의 전 시부모를 잘 알았다. 그들은 어떻게든 아들을 붙잡으려고 했고 그런 술책과 애처로운 연극은 계속될 거였다.온승준이 양보하는 건 그다운 행동이었다. 게다가 유혜린은 그의 첫사랑이었으니까. 고은서는 어느 정도 짐작했지만 여전히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전에 네가 상심해서 떠났을 때도 그 여자와 재혼하지 않았잖아. 그런데 이번에는 왜 이렇게 빨리 결혼한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돼.”“분명히 얼마 전에 너와 합치려 하다 거절당하자 그 길로 첫사랑과 결혼하게 틀림없어. 너무한 거 아니야?”박지연의 2년 넘은 연애와 헌신이 우스울 정도였다.하지만 박지연은 오히려 별다른 감정 없이 말했다.“그 두 사람 결혼하는 것도 잘된 일이지. 적어도 그 사람 부모님이 만족할 거고 그가 평온을 찾을 수 있으면 나도 더 편해질 거니까.”고은서는 이 부분에서는 동의했다.“그 집은 진짜 지옥이야. 일찍 빠져나오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냥 좀 화가 나서 그래. 온 닥터
박지연은 육현석이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충분한 안전감을 주겠다고 다짐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말을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고은서가 기분 좋은 박지연을 보며 물었다.“너 이모가 해주시에 계신다고 하지 않았어? 현석 씨랑 같이 가서 이모에게 소개해 주지 그래?”박지연이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조금 더 지켜보려고. 급한 건 아니니까.”고은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아직 온 닥터를 잊지 못한 거야?”“그럴 리가!”박지연이 단호하게 말했다.“현석 씨랑 함께하기로 결심했으니까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않으려고. 다만 현석 씨가 너무 완벽해서 가끔은 지금의 행복이 다시 사라지지 않을까 불안해서 그래.”고은서가 박지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그런 생각은 그만! 그 사람 정말 괜찮지만 너도 꿀리지 않아!”“응, 알겠어!”두 사람은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먼저 쇼핑몰에 도착한 두 사람은 잠시 쇼핑을 즐기다가, 박지연의 시선은 보석 가게 진열창에 놓인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목걸이에 고정되었다.“한번 들어가서 볼까?”고은서가 물었다.“좋아!”박지연이 흔쾌히 대답했다.예전의 박지연은 이런 비싼 물건을 사는 걸 아까워하며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지만 이제는 자신을 더 아끼고 싶었고 사지 않더라도 한번 시도해 보자고 마음을 먹었다.판매 직원이 목걸이를 꺼내자 박지연은 주저하지 않고 착용해 보았다. 고은서에게 어울리는지 물어보려던 찰나,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승준 씨, 이 반지 정말 예쁘지 않아? 우리 들어가서 보자.”박지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유혜린이었고 그 옆에는 온승준이 서 있었다.오랜만에 본 유혜린은 조금 더 풍만해진 모습이었고 다정하게 온승준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유혜린은 박지연을 발견하자 더욱 밝게 웃으며 말했다.“지연 씨, 정말 우연이네요. 친구분과 같이 악세서리 보러 오셨나 봐요?”그리고 박지연이 착용한 목걸이를 보고 덧붙였다.“이 다이아몬드 목걸이 정말
그 말을 들은 곽승재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은서를 쳐다보았다.고은서가 담담하게 말했다.“아직 중요한 회의가 남아 있다고 하지 않았어? 얼른 가봐.”곽승재는 고은서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이 남자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죄송합니다. 다음에 다시 뵙죠.”남자는 웃으며 괜찮다고 말하고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곽승재가 떠난 후, 남자는 이전의 고압적인 태도를 버리고 고은서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왔다.식사 중에도 그녀에게 끊임없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협력 제안을 적극적으로 했다.고은서는 그가 태도를 바꾼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연 대표님의 신뢰에 감사드립니다. 저희는 최대한 빠르게 실행 가능한 투자 계획서를 준비해 귀사에 전달하겠습니다. 그 내용을 보시고 저희의 능력과 실력에 확신이 생기시면 그때 확답을 주셔도 됩니다.”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덧붙였다.“하지만 만약 연 대표님께서 단지 곽 대표님의 체면을 봐서 협력을 고려하셨다면 저희와의 협력은 성사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와 곽 대표님은 그다지 특별한 관계가 아니거든요. 오히려 실망을 드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고은서의 직설적인 말에 연중서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는 처음에 고은서를 단지 외모만 반반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회사를 운영하는 것도 자신의 가치를 높여 재벌 가문에 시집가기 위한 수단일 거라고 여겼다.그리고 방금 곽승재가 그녀에게 보여준 배려를 보며 연중서는 자기 생각을 굳혔다.그는 곽승재에게도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고 그래서 고은서와의 협력을 진행하기로 결심했다.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고은서가 그 모든 것을 직접 언급하며 대놓고 말했다.“고 대표님도 정말 농담을 잘하시네요. 방금 곽 대표님의 태도를 보세요. 고 대표님 말씀대로 고분고분 회의하러 가시던데요? 그런데 관계가 별로라니요?”연중서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저는 그냥 곽 대표님과 친구가 되고 싶은 것뿐이에요. 고 대표님께서 그렇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고은서는 미소를 지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