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재도 고은서가 왜 자신을 그토록 차갑게 대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분명 자신에 대한 감정이 남아있는데 마음속의 응어리를 내려놓지 못하는 것 같았다.“형, 형수님이 여전히 이혼하겠대?”곽승재의 대답을 듣지 못하자 육현석은 또 조심스럽게 물었다.육현석은 방금 병실 문을 두드리기 전에 마침 고은서가 이혼을 하루도 미루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육현석은 고은서가 목숨을 걸고 곽승재를 지켜줬으면서 또 그의 화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곽승재는 육현석의 말을 듣더니 얼굴색이 더 어두워졌다.“난 은서에게 목매지 않아. 은서가 이혼을 견지한다면 나도 억지로 잡아둘 생각 없어.”“그래?”육현석은 곽승재의 말을 믿지 않았다.“형 지금 홧김에 한 말 아니지? 형수님이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똑 부러진 데다가 드럼도 잘 치잖아. 형이 놓아주기 싫은 건 인지상정이야. 그리고 며칠 전에 내가 말했던 거 어떻게 됐어? 형수님이랑 밖에서 바람 좀 쐬는 거.”이 말을 듣자 곽승재는 기분이 더 우울해졌다.“회사에서 이틀 뒤에 운호로 단체워크숍을 간다고 말해줬어. 근데 은서가 친구와 약속이 있다고 안 가겠대.”육현석은 단번에 핑계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말했다.“형, 형수님이 가기 싫다고 하면 형수님의 친구를 설득해 봐. 부부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야 정이 빨리 들 거 아니야.”곽승재는 냉랭한 눈빛으로 육현석을 쳐다보며 말했다.“이런 말로 내가 너의 잘못을 추궁하지 않을 거로 생각하지 마. 너도 그 클럽에 있었으면서 은서한테 문제 생겼을 때 왜 제때 나타나서 처리하지 않았어!”이 일은 확실히 육현석의 책임이 있었다.그는 곽승재를 놀리기 위해 클럽의 위치를 가르쳐주지 않았고, 또 고은서를 제대로 신경 쓰지 않아 다른 사람이 그녀에게 시비를 거는 것을 제때 발견하지 못했다.육현석은 눈치껏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난 그저 형이랑 장난을 좀 치고 싶었던 것뿐이었어. 다행히도 형이 히어로처럼 딱 나타나서 제때 그 양아치들을 물
곽승재도 예전에 자신을 몇 번 보호해준 적이 있고 어젯밤에도 자신을 도와주려다가 습격당할 뻔했다.그리고 곽승재가 진짜 다쳐서 그것을 빌미로 삼고 이혼을 미룬다면 고은서는 더 난처한 상황에 부닥쳤을 것이었다.이렇게 생각하니 고은서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육현석이 병실에 들어왔다.“형수님, 형이 검사를 다 받았어요. 형수님을 온밤 간호하느라 한숨도 자지 못해서 저의 병실에서 좀 쉬라고 했어요.”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형이 허리 근육을 심하게 다쳤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병원에 며칠 동안 입원해서 휴식을 취하는 게 좋다고 하셨는데 형이 입원할 시간이 안 나서 어혈을 완화하는데 좋은 약만 조금 처방받았어요. 매일 잊지 않고 발라야 한대요.”고은서는 육현석이 자기더러 곽승재에게 약을 발라주라고 부탁하는 것인 줄 알았다.그녀는 피식 웃더니 자신의 어깨를 가리키며 말했다.“이를 어쩜 좋아요? 안타깝게도 저는 어깨를 다쳐서 힘을 쓰지 못해요. 약 바르는 일은 제가 어떻게 도와줄 방법이 없네요.”전생에 고은서는 곽승재에게 밀려서 척추를 다친 적이 있는데 보름이나 입원했었다.그에 비하면 지금 곽승재의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육현석은 말길을 돌렸다.“형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는 아니에요. 형의 상처는 허리에 있어서 형이 스스로 약을 바를 수 있어요. 근데 형수님의 상처는 어깨에 있어서 약을 바르기 힘들지 않으세요? 형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은데...”고은서는 단칼에 거절했다.“아니요. 내일 아줌마가 오기로 했어요. 저는 아줌마한테 부탁하면 돼요.”육현석은 멈칫하더니 갑자기 고은서에게 사과했다.“제가 전에 형수님에게 했던 막말은 다 제가 입이 가벼워서 헛소리를 제친 거니까 절대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고은서는 육현석의 말을 마음에 담아둘 여지가 없었다.육현석이 고은서를 무시했던 것은 곽승재가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곽승재의 형제나 친구들이 자신을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고은서
“너 박지연 씨를 만나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곽승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근데 지연 씨 이미 결혼하셨어.”속셈을 들켜버린 육현석은 화를 내지 않았지만 풀이 조금 죽었다.“왜 한창 젊은 나이에 다들 일찍 결혼하는 거지? 형수님은 예외지만, 형수님은 형을 너무 사랑해서 결혼했을 거야.”육현석이 얼른 말을 덧붙이자 곽승재는 또 웃었다.“박지연 씨의 남편은 큰 병원의 주치의이야. 그럼 박지연 씨는 사업에 성공하고 듬직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거 아니겠어. 너에게 기회가 있었다 해도 박지연 씨는 널 좋아하지 않았을 거니까 꿈 깨.”육현석은 어이가 없었다.‘형도 뒤끝이 장난 아니네. 역시 두 사람 부부 아니라 할까 봐. 뒤끝이 긴 것도 똑같아.’육현석은 두 사람에게서 이중으로 상처를 받았다.이튿날 아침, 박지연은 고은서를 위해 준비한 죽을 들고 병원에 도착했다.“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너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큰 술병을 몸으로 막은 거야!”고은서를 보자마자 박지연은 투덜거렸다.“네 목숨을 걸고 승재 씨를 구했으면서 승재 씨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았다는 말이 나와? 누가 믿냐?”고은서는 한숨을 쉬었다. 누구라도 이 소식을 알고 나면 박지연처럼 더는 자신을 믿지 않을 게 분명했다.‘사람은 역시나 바보 같은 짓을 벌이면 안 돼. 아니면 이렇게 문제가 끊이질 않아.’“다친 걸 봐서 그만 말하면 안 돼? 나도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고 있어.”고은서가 용서를 빌었다.박지연은 고은서의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네가 그토록 위험을 무릅쓰고 곽승재 씨를 지켰다는 것은 아직도 그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거 아니야? 내가 볼 때 차라리 이혼을 관둬. 승재 씨는 몸매 좋지, 얼굴도 잘생겼지, 게다가 유명한 GS 그룹의 대표잖아. 어디 가서 이렇게 돈 많고 잘생긴 남편을 찾아. 그리고 싸움할 때도 아주 멋있더라. 지금 곽승재 씨도 너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던데, 그냥 그렇게 같이 지내.”“너에게 중재인의 소질이 있는 건 처음 알았네.”고은서는 박지연을
박지연의 이름을 들어서인지 온 닥터는 고개를 들어 고은서가 아닌 박지연을 한번 쳐다보았다.박지연의 눈동자는 순간 초롱초롱해지더니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그러나 온닥터는 박지연과 인사하지 않고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는 시선을 돌려 두 사람을 지나쳐 의사들과 앞으로 걸어갔다.박지연의 미소는 선명하게 사그라들었다.고은서는 의아해서 물었다.“네 남편 왜 너와 인사 안 해? 어젯밤에 클럽 간 것 때문에 화났어?”박지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우리 남편 어젯밤에 수술이 잡혀 있어서 집에 돌아오지 않았어. 내가 나간 걸 모를 거야.”“그럼 왜 너를 모르는 사람 취급하는데?”박지연이 말했다.“오늘, 이 병원에 교류하러 온다고 했어. 주변에 그렇게 많은 동료가 있는데 나랑 인사하면 또 한바탕 자기소개해야 할 거 아니야. 시간을 낭비하기 싫었나 보지.”“널 쭉 이렇게 대했던 거야?”고은서가 묻자 박지연은 웃으며 말했다.“그런 건 아니야. 그 사람도 자기가 해야 할 일은 다 하고 있고 날 충분히 존중해줘. 난 이 잘생긴 얼굴을 매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해.”고은서는 어이가 없었다.‘이런 게 바로 유유상종이라는 건가...’사랑에 눈이 먼 고은서 옆에 똑같이 사랑에 눈이 먼 박지연이 있었다.두 사람이 정원에서 한참 산책하고 있을 때 간호사가 와서 고은서에게 재검사받을 시간이 되었다고 귀띔했다.병실에 돌아가자 고은서를 찾으러 온 육현석은 박지연을 보더니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지연 씨, 안녕하세요.”박지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마의 상처는 괜찮으시죠?”육현석이 대답했다.“네. 제가 항상 건강한데 어제는 단순한 사고였어요.”두 사람이 편하게 대화하는 것을 보고, 고은서가 입을 열었다.“지연아, 현석 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 검사받고 올게.”“형수님, 형이 회사에 처리해야 할 일이 좀 있어서 이른 아침에 회사에 갔어요. 좀 있다가 와서 형수님을 데리고 퇴원할 거예요.”육현석이 대신 전달했다.“이것 봐. 승
고은서는 곽승재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어젯밤에 허리를 다친 게 아니라 머리를 다친 거 아니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고은서는 이토록 지루한 문제를 상대하기 귀찮아서 곽승재를 무시하고 병실로 들어갔다.곽승재도 뒤늦게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은서가 별생각 없이 뱉은 말이었는데, 곽승재가 그렇게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두었을 줄이야?곽승재는 자신의 이 행위를 어젯밤에 제대로 휴식하지 못한 탓으로 돌렸다.병실 안에서, 박지연과 육현석은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고은서가 병실에 들어갈 때 두 사람은 마침 카톡을 추가하고 있었다.“검사 다 받았어?”고은서를 보자마자 박지연은 부리나케 그녀를 병실 화장실로 끌고 가서 문까지 잠갔다.“왜 이렇게 비밀스럽게 행동해?”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나지막한 소리로 흥분하며 물었다.“현석 씨한테 들었어. 승재 씨 입술의 상처 네가 물어서 생긴 거라며?”박지연이 묻지 않았더라면 고은서는 이 일을 벌써 잊었을 것이었다.오늘 곽승재의 입술은 많이 좋아진 것 같았다.‘현석 씨도 참 세심해. 그걸 다 발견하다니.’“사실 나도 어젯밤에 승재 씨의 입술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깊이 파고들 겨를이 없었어. 근데 현석 씨도 나와 같은 의문이 들어서 어젯밤 병실에서 승재 씨를 떠봤다고 하더라고.”박지연은 말하면서 감탄을 자아냈다.“너의 목 뒤에 승재 씨가 남긴 키스 자국이 있고, 넌 승재 씨의 입술을 깨물었고. 보아하니 두 사람 엄청 치열하게 사네.”치열하기는 개뿔.고은서는 박지연을 반박하려다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다.“내 목 뒤에 키스 자국이 있다는 거, 너 설마 현석 씨한테 말했어?”이 말이 육현석의 귀에 들어갔다면 아마 곽승재의 귀에도 곧 전해질 것이었다.만약 그 키스 자국이 곽승재가 남긴 게 아니었다면, 그에게 빌미 잡힐 게 뻔했다.“가십은 다른 사람이랑 공유해야 제맛이지. 아니면 무슨 재미로 그걸 수집해.”박지연은 당당하게 말했다.“두 사람 서로 안 지 몇 시간이나 되었
곽승재는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은서의 커다란 두 눈에서 가십거리에 대한 갈망의 눈빛이 초롱초롱한 것을 보더니, 그는 덤덤하게 대답했다.“현석이도 알고 있어. 너무 지나친 행동은 하지 않을 거야. 현석이는 자신의 감정을 스스럼없이 표현할 뿐이야.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걔도 어려움을 알고 물러서게 될 거야.”이 말을 들은 후, 고은서는 의외로 실망에 찬 표정을 지었다.“현석 씨더러 며칠 더 견지하라고 하면 안 될까?”곽승재는 수상쩍은 눈으로 고은서를 바라보았다.육현석이 며칠 더 견지하다 보면 박지연의 남편이 이 일을 알아차려 긴장감이 생겨 박지연에게 관심을 더 줄지도 모른다.하지만 고은서는 이 사실을 곽승재에게 알려줄 수 없었다.이에 고은서는 말했다.“당신과는 제대로 얘기할 수 없어.”“...”기사는 고은서를 예원 별장에 데려다주었다.고은서가 차에서 내리기 전, 곽승재는 담담하게 얘기했다.“저녁에 내가 돌아와서 당신 어깨에 약 발라줄게. 아주머니한테 부탁드리지 마.”어젯밤에 육현석도 한번 얘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고은서는 여전히 거절하였다.“괜찮아. 아줌마한테 부탁하면 돼.”곽승재는 희로애락을 드러내지 않고 말했다.“내 허리도 다쳐서 어혈을 풀어줘야 하잖아. 먼저 당신 갖고 연습 좀 해보려고.”이에 고은서는 대답했다.“차라리 당신 입을 꿰매면 우리 두 사람의 상처가 더 빨리 났는데 도움이 될 거야.”말을 마친 뒤, 고은서는 고개도 안 돌리고 가버렸다.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렸다.‘왜 은서의 반응은 내가 예상했던 거랑 다르지?’곽승재는 육현석처럼 불쌍해 보이는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말이 되는 다른 이유를 둘러댔지만, 고은서는 조금도 고맙게 여기지 않았다.‘여자란 참말로 귀찮고 속을 알기 어려운 존재야.’오후, 고은서가 마침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민시후의 메시지를 받았다.[물고기가 미끼를 물었어.]고은서는 정신이 바짝 들었다.[낚을 수 있겠어?][조급해하지
말을 마친 뒤, 고은서가 떠나려고 할 때, 뒤에서 민시후의 사악한 소리가 울렸다.“미끼는 이미 내다 던졌는데 그물을 걷지 않을 거야?”고은서는 발걸음을 멈칫하더니 이를 악물며 말했다.“민시후, 너 나한테 메시지를 보낼 때부터 이미 함정을 파 둔 거지?”민시후는 무심한 듯 대답했다.“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지. 우리는 서로 원하는 이득을 취하는 거지.”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송민아는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사람처럼, 일어서서 그들한테 다가왔다.“시후 오빠, 저쪽으로 가서 앉아줄 수 있어요? 저 은서 씨랑 단둘이 얘기 좀 하고 싶어요.”이 말을 들은 민시후는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물었다.“너 은서한테 무슨 말을 하려고? 경고하는데 네가 은서를 괴롭히면 아무리 네 오빠가 나선다고 해도 난 절대로 널 가만 두지 않을 거야.”송민아의 정교한 얼굴에는 일말의 슬픔이 서렸다.“걱정하지 마세요. 오빠가 여기에 있는데 제가 어떻게 감히 은서 씨를 괴롭히겠어요.”“아마 해라고 해도 못 할 거야.”민시후는 콧방귀를 뀌고는 표정이 확 변하더니 다정하게 고은서를 보면서 말했다.“무서워하지 마. 난 저쪽에 있을 테니 무슨 일이 생기면 얼마든지 날 불러.”고은서는 민시후를 한 눈 노려보고는 상대하기도 귀찮았다.민시후가 연신 뒤돌아보며 자리를 뜬 후, 송민아는 크게 숨을 한 모금 들이마시고 말했다.“은서 씨, 또 보네요.”송미아의 눈빛은 전보다 많이 굳건해졌다. 마치 무슨 사실을 받아들이기라도 한 것처럼.고은서는 도저히 어린 아가씨가 상심하고 슬퍼하는 꼴을 못 봐주겠기에 직설적으로 얘기했다.“민아 씨, 조금 전 민시후가 헛소리한 거예요.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그리고 지난번에 제가 민아 씨한테 거짓말했어요. 민시후는 저를 하나도 안 좋아해요. 오늘도 저는 저 사람의 협박을 받고 온 거예요. 민아 씨가 민시후를 좋아하는 거면 걱정하지 말고 대담하게 추구하세요. 저는 절대로 두 사람 사랑의 걸림돌이 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민아
다급하면서 애교가 섞인 ‘여보’라는 두 글자가 귀에 전해질 때, 곽승재는 자기가 전화를 잘못 건 줄 알았다.그는 핸드폰을 들어 통화 상대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보았는데 고은서가 맞았다.하지만 요새 고은서는 줄곧 그에게 소외와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었다. 이렇게 갑자기 열정적으로 나오는 건 아마도 빠져나가기 어려운 골칫거리에 엮인 것 같았다.“당신 지금 어디야?”곽승재는 바로 확실하게 물었다.고은서는 곽승재에게 식당의 위치를 알려주었다.그는 고은서가 지금 누구랑 같이 있는지, 왜 그곳에 갔는지는 묻지도 않고 바로 말했다.“내가 데리러 갈게.”전화를 끊은 뒤 고은서는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송민아는 너무 귀찮게 굴고 민시후는 뒤통수 때리기 전문이었다.고은서는 그들의 사랑싸움에 엮이고 싶지 않았다.바로 그때 곽승재의 전화가 아주 타이밍 좋게 걸려 온 것이었다.“민아 씨, 저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줄 수 없어요.”고은서는 정색하며 말했다.“제가 한 말들은 다 사실이에요. 민시후는 저를 좋아하지도 않고 저를 좋아할 리도 없어요. 민아 씨는 아직 어리고 예쁜 데다가 집안도 꽤 좋아 보이는데 민시후라는 나무에 목을 매 죽을 필요는 없잖아요.”환생하고 난 뒤로부터 고은서는 사람들에게 너무 사랑에 목을 매지 말라고 설득했다.인생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나도 많았기에 온종일 남자의 주위만 맴도는 건 아주 어리석은 짓이었다.게다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남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하지만 고은서가 좋은 마음으로 건넨 충고는 송민아의 고마움을 받지 못했을뿐더러 그녀의 얼굴에는 ‘역시’라는 표정이 역력했다.“은서 씨,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요. 제가 당신의 설교를 들을 필요까지는 없어요.”송민아는 조금 화가 났다.“제가 진심으로 은서 씨한테 가르침을 청하는데 은서 씨는 어떻게 빈말로 저를 대충 얼버무릴 수가 있어요? 제가 말했었잖아요. 저는 시후 오빠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요. 이번에 제가 돌아갔을 때, 오빠 아버님도 명
박지연은 고은서의 질문에 놀라고 있었다.‘고은서가 깨어나자마자 민시후에 관해 묻는다고?’박지연은 그녀의 얼굴에 드러난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고 농담을 하는 대신 진지하게 답했다.“민시후는 검사를 받고 있을 거야. 정확한 상태는 모르겠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어.”그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만약 민시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그녀는 평생 자책했을 것이다.“얼른 약 먹어. 조금 있다 병실에서 만날 수 있을 거야.”박지연은 고은서를 침대에 눕히고 약을 먹이며 이전에 계성진이 먹였던 약은 의식이없을 정도로 깊은 잠에 빠지게 하는 강한 수면제였고 이미 열 몇 시간 자고 깨난 뒤라고 설명을 덧붙였다.“중간에 몇 번 깨긴 했지만 의식은 없었어.”“약에 의존성은 없겠지?”고은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의존성은 없지만 약간의 후유증은 있을 거야. 한동안은 불편함을 느낄 수 있어.”박지연이 고은서를 걱정하며 말했다.“그리고 다친 어깨도 회복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야.”마른하늘에 닥친 날벼락에 억울함을 느끼기는 했지만 고은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그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유린당하고 유흥가에 팔려 가는 것보다는 나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지연아, 우리 지금 어디 있는 거야?”갑자기 생각난 고은서가 물었다.“T 국 병원이야. 경찰이 사건을 조사 중이라 며칠 동안은 귀국하기 어려울 거야.”아무리 치안이 안 좋은 나라라고 해도 이렇게 큰 일이 벌어진 이상 그냥 넘어가기는 어려웠다.“너는 여기 어떻게 온 거야?”“너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말에 부랴부랴 달려왔지. 어제 너 하루 종일 연락도 안 돼서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비행기에서 내리면 연락하겠다고 해놓고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도 없고 먼저 연락해도 받지 않으니 속이 타들어 갔어. 곽승재한테는 내가 연락한 거야. 너도 연락 안 되고 민시후도 연락이 안 되니 걱정스러운 마음에 곽승재한테 한 거야. 은서야,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곽
계성진은 곽승재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너희 나라 사람들 말은 믿을 수 없잖아. 내가 이 여자를 놓아주면 너희는 바로 나를 잡으려고 할 거야. 오늘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이 여자를 방패로 삼아야겠어.”곽승재는 재빨리 답했다.“그럼 나랑 바꿔. 내가 인질이 될게.”계성진은 비웃으며 말했다.“넌 키도 키고 보니까 몸도 좋더라. 이 여자 대신 널 쓸 필요는 없지. 내가 멍청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막지 않겠다. 밖에 있는 차 아무거나 타고 가. 은서를 다치게 하지만 않는다면 놔주겠다.”곽승재가 이내 다른 방안을 제시했다.말을 마친 곽승재는 주변 사람들에게 물러서라고 손짓하며 계성진과 그의 동료들이 지나갈 길을 열어주었다.계성진은 고은서를 끌고 천천히 창고 밖까지 나갔다.경찰들이 총을 들고 있었지만 계성진이 인질을 잡고 있어 누구도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다.목이 꽉 조였던 고은서는 숨쉬기가 힘들었지만 머리에는 여전히 총이 겨눠져 있었다.오늘 하루 너무 많은 공포를 겪은 탓인지 고은서는 더 이상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그녀는 질식사가 더 괴로운지 아니면 총알에 의해 생을 마감하는 게 더 괴로운지 생각하고 있었다.이내 계성진은 고은서를 데리고 차 앞까지 왔다.“악! 악! 아악!”그때 창고 안에서 백유미의 비명이 들렸다.무언가 끔찍한 일이라도 일어난 것인지 그녀의 비명이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릴 뿐 안쪽 상황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그의 시선은 오로지 계성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외곽에 배치되어 있던 사람들은 곽승재가 데려온 사람들에 의해 모두 제압당했다.상황을 눈치챈 계성진의 얼굴에는 살기가 더 짙게 피어올랐다.그는 고은서의 입에 무언가를 집어넣고 그녀의 턱을 쥐고 강제로 삼키게 했다. 그러면서 옆의 동료에게 차 문을 열라고 명하며 고은서를 차에 밀어 넣으려고 했다.“고은서!”그때 앞쪽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바로 고은서가 기다리던 민시후였다.그는 지친 모습으로 뒤에 총을 든 현지 경찰들을 대동하고
거칠게 다가오는 두 남자의 모습에 고은서는 놀라서 옆으로 몇 걸음 피했다.벽 끝에 닿은 그녀에게 더 이상 피할 곳은 없었다.고은서는 맞더라도 가만히 있을 생각이 없었다.남자들이 경찰봉을 휘두르는 순간 고은서는 눈을 꼭 감고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남은 방어용 스프레이를 그들에게 향해 필사적으로 뿌렸다.“악!”“멈춰!”거의 동시에 두 남자의 비명이 들렸고 다른 한편으로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곽승재의 목소리였다.비록 경찰봉은 빗나갔지만 여전히 어깨를 맞은 고은서는 고통스럽게 눈을 떴다.문 앞에는 아니나 다를까 곽승재가 서 있었다.정장을 입고 급히 어디서 달려온 듯한 모습을 한 곽승재의 얼굴에는 급박함이 드러났다.그의 곁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몇 명의 근육질 남자들과 몇 명의 현지 경찰들이 함께 있었다.경찰들이 오자 고은서를 공격했던 두 남자는 눈을 가리며 피하기에 바빴고 백유미에게 올라타 있던 남자들도 상황을 눈치채고 일어나 무기를 집어 들며 반격하려고 했다.“은서야!”곽승재는 고은서가 다친 걸 보고 급히 그녀에게 달려갔다.그때 백유미는 누구의 옷가지에서 칼을 빼낸 건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자기 가슴을 향해 찌르려고 했다.“멈춰!”곽승재의 머릿속에 갑자기 익숙한 장면들이 스치며 강한 불안과 혼란이 밀려왔다.그는 몇 걸음 달려가 칼을 걷어찼다.팅하는 소리와 함께 백유미의 손목에서 힘이 빠지며 칼이 떨어졌다.백유미가 처량하게 울부짖으며 외쳤다.“왜 막았어! 왜! 죽게 놔두지 왜 막은 거야! 승재야...”백유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고 몸은 온통 멍 자국과 붉은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으며 머리카락은 여기저기 흩어진 채 몸은 사정없이 떨고 있었다.곽승재도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백유미가 자살하려 한 순간 곽승재는 강한 공포감을 느꼈다.마치 이전에 누군가가 그 앞에서 자살하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지금 이 상황을 막지 않으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잃을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
비록 고은서가 한 말을 이해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경계심과 불신으로 가득 차 그녀를 향해 경찰봉을 휘두르며 움직이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고은서도 이를 잘 이해하고 움직이지 않으며 자신에게 돈이 있으니 그들에게 두 배의 돈을 줄 수 있다고 했다.“네가 돈이 있다고 하면 있는 거야?”그때 기름지게 다듬은 머리를 한 중년의 남자가 주차장에서 걸어왔다.경찰봉을 쥔 두 남자는 즉시 그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보스라고 불렀다.기름진 머리를 한 남자는 고은서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한국어로 말했다.“너희처럼 예쁜 여자의 말은 믿을 수 없어.”그는 날카로운 눈을 한 채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장 몇천억 내놓을 수 있으면 믿을지도 모르지.”남자는 말도 안 되는 금액을 불렀다.그만한 금액은 당연히 내놓을 수 없었다.카드가 있다고 해도 유동 자금이 부족해 그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웁!”백유미도 안에서 남자의 목소리를 들은 건지 구조 신호를 보냈다.기름진 머리를 한 계성진은 잠시 안을 훔쳐보고 다시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역시 예쁜 여자일수록 수단이 범상치 않아. 이렇게 쉽게 남자들을 자기편으로 돌리잖아. 그냥 사람 하나 데려가는 간단한 일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재미있는 광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어.”고은서가 눈썹을 찡그렸다.‘백유미가 원지훈에게 30분을 준다고 한 게 이 남자 때문인가? 이 남자를 통해 나를 유흥가로 팔려고 한 건가?’“당신 목적도 결국 돈이죠? 몇천억은 줄 수 없지만 100억 정도는 가족들에게 연락해서 보내드릴 수 있어요. 사람을 원하신다면 저 안에 있는 여자도 그냥 덤으로 드릴게요.”고은서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하하하.”고은서의 말에 계성진은 큰 웃음을 터뜨렸다.“예쁜 아가씨, 내가 너를 데려가면 모든 남자가 당신한테 푹 빠질 거야. 내가 어떻게 그런 사람을 놓치겠어? 돈도 사람도 다 가질 거야. 국내에서 유명한 곽씨 가문 대표 전 부인인데 그 타이틀이 사람들에게 더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겠어?”고은서
옆에서 손을 거들던 장정들도 그 모습에 자극이라도 받은 듯 백유미를 희롱하는 행렬에 끼어들었다.이내 백유미의 입에 물려있던 수건이 떨어졌지만 그녀가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다른 것으로 입이 가득 차 버렸다.남자들의 음탕한 신음과 여자의 흐느낌 소리가 순식간에 창고를 채웠다.모든 일든 불과 일이 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고은서는 구석에 숨어서 원지훈이 차버린 쇠막대기와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떨리는 심장은 평온을 되찾을 수 없었다.몇 명의 남자들이 각 방향에서 백유미를 희롱하고 있었다.고은서는 모든 장면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내가 원지훈을 회유하지 않았더라면 저기에 누워있는 건 나였겠지.’백유미는 동정받을 처지가 아니었다.고은서는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비록 돈으로 매수했다고는 하나 약에 취해 있는 사람들이 시선을 그녀에게 돌리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또한 밖에 백유미가 데려온 사람들이 있었기에 뭔가 이상함이라도 눈치채고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고은서는 자신의 안전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고은서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백유미의 핸드폰을 켜려고 했지만 땅에 부딪히며 떨어질 때 전원이 나가버렸다.그녀는 몇 번이나 시도한 끝에 겨우 핸드폰을 켤 수 있었지만 비밀번호에 막혀 뭔가를 할 수가 없었다.고은서는 백유미의 생일, 곽승재의 생일을 입력했지만 비밀번호는 맞지 않았다.절정에 다다르고 있는 남자들이었기에 고은서는 소리를 내어 그들의 시선을 끌 수조차 없었고 백유미에게 비밀번호를 물을 수조차 없었다.고은서는 긴급버튼을 눌렀지만 백유미는 긴급 연락망을 따로 작성하지 않은 상태였고 국내의 비상 번호는 해외에서 사용할 수 없었다.‘어떡하지?’고은서가 원지훈을 불러 도박하려고 할 때 백유미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핸드폰에는 알파벳 C만 떠 있을 뿐이었다.잠시 생각한 고은서가 전화를 받았지만 상대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고은서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핸드폰을 움켜쥐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
“끈은 혼자서 칼로 푼 것 같아요. 제가 얼른 다시 묶을게요! 이번에는 절대 풀 수 없을 거예요.”말을 마친 원지훈이 밧줄을 챙겨 고은서에게 다가가려 했다.“됐어!”백유미가 원지훈을 제지했다.“누나, 왜 그래요?”백유미는 쇠막대기를 거두며 얼굴에 음험한 미소를 떠올렸다.“챙겨온 술은 다 마셨어?”원지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네, 고마워요. 누나.”“뭔가 치밀어 오르는 충동이거나 특별한 감각은 없고?”백유미가 물었다.그 말을 들은 원지훈은 바로 백유미가 술에 최음제를 탔음을 눈치챘고 달아오르는 몸을 느꼈다.“안 그래도 조금 덥네요.”“그렇다면 뭘 기다리고 있어? 저기 해소할 만한 사람 하나 있잖아?”원지훈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지만 그는 다시 한번 물었다.“누나, 후에 데려온 두 사람 먼저 들여보낼까요? 하지만 두 사람은 술을 마시지 않은 것 같던데요.”“그 사람들은 놔두고 먼저 온 사람들만 들여보내.”백유미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30분 줄게. 죽이지만 않으면 되니까 원하는 대로 해.”원지훈은 고은서와 시선을 마주치고는 부랴부랴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불렀다.백유미는 원망과 경멸 섞인 시선으로 칼을 손에 쥔 채 구석에서 떨고 있는 고은서를 바라보았다.“밖에 있는 남자들은 네가 유흥가로 가기 전에 적응하는 단계라고 생각해.”고은서가 경악하며 물었다.“백유미,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아니면?”백유미의 얼굴에 서린 경멸의 빛이 더욱 짙어졌다.“고은서, 어차피 곽승재랑도 많이 잤잖아. 유산까지 해본 사람이면 닳을 대로 닳은 여자잖아. 여기까지 와서 왜 성녀라도 되는 것처럼 하고 있어? 있는 대로 즐겨.”그때 밖에서 남자들이 걸어들어왔다.그들의 벨트는 이미 풀려있었고 흉한 뱃살과 속옷도 내놓고 있었다.원지훈은 밖에 있던 두 사람과 말을 나눈 후 이내 창고 문을 닫았다.“그래, 이참에 너도 잘 즐겨야지.”고은서는 작은 틈을 이용해 침대 위에 있던 낡은 수건을 재빨리 백유미의 입에 쑤셔넣었다.
백유미가 입을 열었다.“고은서, 여기서는 사람을 가축처럼 팔아버릴 수도 있다는 걸 몰랐어?”백유미는 마치 애완동물을 파는 이야기를 하듯 가볍게 말했다.“운이 좋으면 유흥가로 팔려 가겠지. 네 몸매와 얼굴로 부잣집 딸이라는 자존심만 내려놓으면 손님을 받기는 쉬울 거야. 운이 나쁘면 손발이 잘리고 신장이나 간이 적출되어 거지가 되거나 장난감 취급을 받을 수도 있겠지. 결과는 네 운명에 달렸어.”백유미의 부드러운 말투는 고은서에게 오히려 독을 품은 뱀이 주는 온기로 느껴졌다.그녀는 가식적인 백유미의 모습에 속이 울렁거리며 팔에 소름이 돋아났다.“미쳤어? 내가 무슨 일을 당하면 너라고 무사할 줄 알아?”백유미는 싸늘한 웃음을 흘리며 언제 가져왔는지 모를 쇠막대기를 손에 들고 있었다.그녀는 그것을 한 단씩 늘려 고정한 뒤 고은서의 가느다란 목에 겨눴다.“고은서, 곽승재를 언급했지? 그 사람이 널 구할 수 있을 것 같아?”차가운 쇠막대가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몸을 움찔했다.백유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곽승재가 소식을 들을 때쯤이면 넌 이미 팔려 가고 난 후일 거야. 설령 널 찾더라도 너는 이미 망가진 상태일 텐데 그 남자가 여전히 널 원하겠어?”고은서가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곽승재가 날 원하든 말든 상관없어. 하지만 네가 이런 짓을 한 걸 알게 되면 분명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내가 뭘 했는데?”백유미는 마치 작은 강아지를 놀리듯 쇠막대로 고은서의 목을 쿡 찌르며 물었다.“나는 T 국에 사업차 온 거야. 증인도 있고 증거도 있어. 네가 무슨 일을 당했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고은서는 목에서 통증이 느껴졌다.그녀는 쇠막대기를 뿌리치고 백유미를 제압할 수도 있었다.하지만 백유미가 새로 데려온 두 사람이 바로 문밖에 있었고 그들은 무기도 소지한 듯해 보였다.혹시라도 백유미를 단번에 제압하지 못한다면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다.다행히 백유미는 아직 고은서가 반격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뜨리지는 않았다.고은서는 고통
원지훈도 백유미를 증오하고 있었기에 고은서의 제안을 듣자마자 바로 동의했다.“알았어. 그때는 내가 제일 먼저 나설게.”‘역시 원지훈은 믿지 못할 놈이야. 백유미가 먼 친척 누나라는 자각은 있나? 이런 생각을 품는다는 게 놀랍네. 아니지. 지금은 이럴 생각할 시간이 없어.’고은서는 속에서 올라오는 혐오감을 참으며 말했다.“시간 없어. 얼른 내 가방에 들어있는 호신용 무기 가져와 줘.”백유미가 다른 사람을 더 데리고 올지, 앞으로 어떤 계획으로 움직일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그래서 밖에 있는 몇몇 사람들을 매수했다고 해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원지훈도 곧 도착할 백유미를 두려워하며 고은서의 손에 묶인 밧줄을 풀어주고 그녀에게 호신용 도구를 건넸다.밖으로 나가기 전 원지훈은 고은서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다.“너도 알아서 살아남아. 상황이 안 좋으면 약속했던 건 나도 못 지켜.”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었다.고은서도 단지 원지훈을 이용해 백유미의 시간을 더 끌어보려 했을 뿐이었다.그렇게 하면 민시후가 더 많은 시간을 확보해 사람을 데리고 그녀를 구하러 올 수 있을 것으로 믿었으니 말이다.돈으로 귀신도 부릴 수 있다고 했던가, 돈의 힘으로 원지훈은 손쉽게 밖에 있던 사람들을 다시 매수했다.바로 그때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백유미가 도착했나 보네.’손에 묶인 밧줄은 느슨하게 풀어졌지만 고은서는 여전히 손발이 묶인 척하며 침대 한구석에서 긴장한 모습으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누나, 드디어 오셨네요! 고은서도 이제 깨어났어요. 방금 들어가서 살짝 경고 줬는데 정말 입에 독침이라도 품었는지 험한 말을 서슴지 않더라고요.”원지훈은 아첨하는 듯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누나 기분 상하게 하면 언제든지 부르세요. 제가 대신 혼내줄게요!”“수고했어. 차에 먹을 것과 마실 것 준비해 놓았으니 가서 가져와. 조금 있다 너희 도움이 필요할 거야.”“고마워요, 누나.”곧 창고 문이 열리고 백유미가 하이힐을 신은 채
고은서의 말에 원지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핵심을 찔렀다는 것을 눈치챈 고은서는 계속 차분한 말로 설득했다.“같이 해외로 나왔으니 같은 사건에 휘말렸다는 게 더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겠어? 우리 둘을 같이 제거하면 백유미는 아무런 손해도 입지 않고 여전히 평온한 나날들을 보낼 수 있을 거야. 백유미에게는 아버지가 있고 백씨 가문 산업이 있지만 너는 애꿎은 목숨 하나 날리는 거지.”고은서가 말을 이었다.“정말 백 보 물러나서 백유미가 너를 살려준다고 해도 너는 평생 숨어지내야 할 텐데 어머니는 어떻게 할 거야? 너도 그런 생활에 만족할 수 있겠어?”원지훈은 사색에 잠겼다.전에 내비치던 우월감과 경멸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고은서는 속으로 초조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여유로운 척하며 말했다.“백유미가 곧 도착할 거야. 그러니 얼른 결정을 내려야 해.”마침내 고개를 든 원지훈이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물었다.“내가 백유미 말을 따르지 않고도 살아남을 길이 있다고? 내가 너를 이런 곳에 데려왔는데 네가 날 용서해 줄 리가 있겠어?”고은서가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네가 나를 배신한 건 정말 화가 나. 앞으로도 널 신뢰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네가 어쩔 수 없이 이런 일을 했다는 건 이해해. 그리고 나는 뻔뻔하게 널 괴롭힐 생각은 없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큰돈을 줄게. 그 돈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가. 비록 영광스러운 귀향은 아니겠지만 풍족하고 걱정 없는 삶을 살 수 있을 테니 지금 상황보다는 훨씬 나을 거야.”고은서는 이어 원지훈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고향은 너에게 익숙한 곳이고 백씨 가문과는 어쨌든 친척 관계잖아. 해성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백유미도 굳이 너희를 어떻게 하진 않을 거야.”고은서의 말에 원지훈의 마음은 기울기 시작했다.백유미의 잔혹함으로 보건대 고은서가 말한 일들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이번에 백유미를 배신한다면 죽을 길밖에 없겠지만 배신하지 않아도 좋은 날을 없을 거야. 어차피 죽을 거라면 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