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곽승재 씨가 누나를 데리고 나가서 난감하게 하지는 않았죠?”주인혁이 물었다.고은서는 어젯밤에 곽승재가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을 안고 나갔다는 것을 생각하니 조금 머쓱해서 말했다.“네, 아무 일 없었어요.”“그럼 다행이네요.”이렇게 말하고서 주인혁은 더 말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주인혁이 곧 다가올 첫 시합을 앞두고 긴장하는 줄 알고 웃는 얼굴로 격려의 말을 몇 마디 전했다.그러나 뜻밖에도 주인혁은 아주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누나, 비록 제가 지금은 누나에게 도움이 될 수 없지만, 누나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다 지지해요.”고은서는 주인혁이 자신을 관심하고 있다는 걸 알고 마음이 따뜻해졌다.“인혁 씨, 걱정하지 마세요. 저의 일은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할 수 있으니까, 인혁 씨는 시합에만 집중하세요.”전화를 끊고 고은서는 복싱관에 도착하여 복싱 훈련과 주인혁이 가르쳐준 호신술을 한동안 연습했다.지금 고은서의 주먹은 더는 예전처럼 나른하지 않고 힘이 좀 강해졌다. 코치도 고은서의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칭찬할 정도로 그녀의 변화는 눈에 띄게 컸다.요즘 고은서는 잘 먹고 잘 자니까 체질이 많이 좋아진 게 확 느껴졌다. 그러나 몸무게는 여전히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고 겨우 두세 근밖에 늘어나지 않았다.‘기운이 좋아지고 얼굴색이 좋아지는 것만으로도 만족해. 조금 말라도 괜찮아.’연습을 마치고 고은서는 간단히 샤워한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녀가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복싱관 밖으로 나가려고 하던 찰나, 마침 복싱관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원지훈과 딱 마주쳤다.원지훈은 트리닝 복을 입지 않은 걸 보아하니, 고은서를 찾으러 전문 이곳에 온 모양이었다.“훈련하러 왔어?”고은서가 일부러 떠본 말에 원지훈이 대답했다.“오늘 훈련 없는 날이에요. 저는 누나와 옆 카페에 가서 커피 한잔하고 싶어서 온 거예요.”고은서는 웃으며 말했다.“커피는 됐고 볼 일이 있어서 날 찾으러 온 거라면 그냥 여기서 얘기하자.”원지훈은 휴게실을 가리키며
원지훈은 고은서의 미소를 보고 마음속으로 살짝 기뻐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누나, 저는 은혜 씨를 진심으로 좋아해요. 누나도 동생인 은혜 씨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거 아닌가요?”고은서는 원지훈의 번지르르한 말에 토할 것 같았지만, 그의 두꺼운 낯가죽을 비웃지도 않고, 그더러 자기 신세를 제대로 알라고 충고하지도 않고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지훈 씨, 이미 나의 혼인 상황을 잘 알고 있다면 내가 남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알겠네?”‘이럴 때는 어쩔 수 없이 곽승재를 방패막이로 써야 하네.’“그 누구도 남편에 대한 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어.”고은서가 덧붙여 말했다.원지훈은 이 말을 듣고 더 말하지 않았다.비록 백유미는 원지훈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고, 그더러 캐묻지 말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지훈이 스스로 검색해보지 않는다는 것은 장담할 수 없었다.원지훈은 곽승재가 고은서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은서가 자신을 이용해 곽승재에게 복수하는 동시에 고은혜에게도 상처 주려는 줄 알았다.어쨌든 원지훈은 자신이 그럴 조건이 된다고 여겼다.고은서가 또 입을 열었다.“맞는 말도 있긴 해. 나는 확실히 네가 은혜와 함께 있는 걸 보고 싶지 않아. 넌 은혜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못 돼.”이 말을 듣더니 원지훈은 얼굴색이 조금 변했다.“제가 어디가 못났는데요?”“해성에 사업하러 왔다는 사람이 일하려는 기색이 조금도 안 보이거든. 넌 그저 종일 먹고 놀기만 하면서 은혜의 주위를 맴돌고 있잖아.”고은서가 말했다.“지난번 주차장에서 너도 은혜가 승재 형부를 얼마나 숭배하는지 봤잖아. 그래서 난 은혜가 사업에 성공한 남자를 진정으로 좋아한다고 생각해.”고은서는 고의로 이 말을 꺼냈다.왜냐하면, 그녀는 전생에 단은숙에게서 고은혜의 남자친구는 집안도 좋고 사람도 잘나서 해성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약품의 대리를 맡고 투자도 받았다고 자랑하던 것이 어슴푸레 떠올랐다.이번 생에, 백유미는 아직 이
민시후는 건들건들한 말투로 대답했다.“왜? 곽승재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으니까 나에게 관심이 생기기 시작해?”고은서는 어이가 없어 허공에 대고 눈을 희번덕거렸다.‘방금 뻔뻔한 남자를 한 명 보냈는데, 여기에도 그런 사람 한 명 더 있네.’“걱정하지 마. 나 남자한테 관심 끊었어. 특히 너처럼 뻔뻔하고 자신감 넘치는 남자는 딱 질색이야.”“어구. 말투가 살벌한데?”“너랑 말장난할 시간 없어. 볼일이 있어서 전화한 거야.”“내 사무실로 와.”고은서는 익숙한 길로 민시후의 사무실에 도착했다.민시후는 여전히 껄렁껄렁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긴 다리를 책상 위에 얹은 채 핸드폰을 들고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익숙한 노랫소리가 들려 고은서는 민시후의 곁으로 걸어가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민시후는 고은서의 드럼 치는 동영상을 보고 있었다.고은서는 고의로 조금 전에 민시후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줬다.“민 도련님, 사무실에서 혼자 내 동영상을 보고 있었어? 설마 나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지?”이 말을 듣자 민시후는 조금도 화내지 않고 심지어 흥미진진하게 말했다.“사실 난 네가 곽 대표와 이혼하고 나랑 같이 있겠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있어. 어쨌든 넌 지금 무력도 좀 있잖아.”고은서가 말했다.“고맙긴 한데 난 널 받아들일 수 없어.”민시후가 물었다.“내가 곽 대표보다 못한 게 뭐가 있는데?”고은서가 대답했다.“너무 뻔뻔해서 싫어.”“나중에 너도 깨닫게 될 거야. 이게 내 장점이라는 것을.”민시후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말했다.“말해 봐. 무슨 일로 이렇게 급하게 날 찾아온 건데?”고은서는 핸드폰을 꺼내 그 안에서 자료 하나를 찾아냈다.“이 자료 한번 봐. 눈에 익지 않아?”민시후는 자료를 힐끗 보고 말했다.“이건 곽 대표가 투자하던 그 약물 연구소 아니야?”고은서가 물었다.“너 예전에 일부러 날 데리고 승재 씨와 관계자가 밥 먹는 자리에 나가서 난동을 부렸던 건 이 프로젝트에 관심 있어서 그랬던 거 아니야
민시후는 고은서의 계획을 듣고 반대하지 않았다.“왜 이유 없이 이런 계획을 세웠는데? 그 사람에게 원한이라도 있어?”고은서는 대답하지 않고 도리어 물었다.“아무 이유 없이 한 사람이 싫으면 안 돼?”민시후는 고은서를 잠깐 주시하더니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당연히 되지. 게다가 이 계획이 아주 마음에 들어. 네가 밑밥을 깔지 않고 나에게 도움을 청했어도 대답했을 거야.”고은서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그럼 민 도련님의 관대한 마음에 감사드리며, 저는 이만 기획안을 작성하러 들어가 볼게...”“잠깐만, 나 요구할 게 하나 있어.”민시후가 고은서를 불러 세우자 고은서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무슨 요구?”민시후는 살짝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반응이 왜 그래? 내가 설마 진짜로 너에게 관심이 있겠어! 일이 끝나면 드럼 치는 거 한번 보여줘.”“거절해도 돼?”“안 돼.”민시후는 퉁명스럽게 말했다.“고은서 씨, 나 바보 아니거든. 당신은 나에게 두 가지 일을 부탁했으면서, 내 작은 부탁 하나도 못 들어줘?”“...”지금 민시후의 처지에서 볼 때 허 교수의 프로젝트는 확실히 안전한 투자 항목이 아니고, 고은서도 당분간은 제대로 설명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그러자.”‘드럼을 한 토막 치는 게 뭐 큰 대수라고. 한다면 하는 거지.’...곽승재는 특별히 저녁 시간을 골라 집에 돌아왔지만, 집안에서 고은서의 그림자를 보지 못했다.이미숙은 곽승재에게 알렸다.“도련님, 사모님께서 점심을 드시고 나간 후로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곽승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고은서는 요즘 밖에 나가는 날이 점점 많아진 것 같았다.예전에 곽승재가 언제 집에 돌아오든 고은서는 음식을 갖추고 그를 기다렸다.그러나 지금 고은서는 곽승재보다 더 늦게 들어왔다.“도련님, 오늘 사모님께서 일어나셔서 저에게 잠옷에 관해 물었습니다.”이미숙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곽승재는 안색이 변하지 않은 채 말했다.“알겠어요.”그는 머릿속
‘이 사람 문제 있는 거 아니야? 예전에 내가 일부러 민소매를 입고 그의 앞에서 얼쩡거릴 때는 쳐다보지도 않더니, 지금 내 허리를 살짝 부추기였다고 이렇게 뜨거운 눈빛을 발사하다니.’고은서는 생각할수록 화가 나서 곽승재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곽승재는 그녀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품속의 사람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너 뭐 하는 거야!”고은서가 화를 내자, 곽승재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말했다.“지난번 GS 그룹의 파티에서 내가 먼저 떠나가서 네가 기분이 안 좋았어?”지금 두 사람의 자세는 아주 애매하고 이상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손을 애써 치우며 말했다.“먼저 날 놔줘!”곽승재는 여전히 그녀를 끌어안고서 말했다.“내가 묻는 말에 먼저 대답해.”곽승재가 자기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걸 보고, 고은서는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런 적 없어. 이제 됐어?” 고은서의 말투는 매우 차가웠고 눈빛에는 귀찮은 기색이 분명했다.분명 집 문을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활짝 웃고 있었다.곽승재는 짜증이 치밀어올라 고은서를 놓아주고 냉랭하게 말했다.“고은서, 다시 생각해 봐. 네가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면 지금 이런 반응을 보였을까?”“내가 기분이 나빴든 말든, 그게 너에게 중요하기나 해?”고은서는 호통치며 말했다.“너 요새 너무 한가해서 병났어? 그게 언제 일인데 왜 인제 와서 갑자기 내 기분을 묻고 난리야? 날 곤란하게 하는 게 그렇게 재밌어?”시간이 아무리 오래 지났다 해도 설명하고 넘어가야 할 건 설명해야 한다. 이는 곽승재가 육현석에서 받은 충고였다.곽승재는 얇은 입술을 살짝 오므리고는 차가운 말투를 조금 줄이고 말했다.“그날 밤, 이런저런 일을 급하게 처리하느라 널 미처 돌보지 못했어. 내가 생각이 짧았던 거 같아. 할머니께서 네가 줄곧 운호에 가서 온천욕을 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이번 주 토요일 우리 회사에서 마침 그곳에서 단체워크숍을 진행해. 같이 가지 않을래?”이건 곽승재가 처음으로 성실한 태도로 고은서에게
고은서는 이미숙에게 설명해 주기 귀찮았다.“저는 바빠서 이만 올라가 볼게요.”말을 마친 뒤 고은서는 위층으로 올라갔다.곽승재와 마주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은서는 노트북을 들고 옆에 있는 객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최대한 빨리 기획안을 만들어내고 싶었다.몇 시간 동안 바쁘게 정리했지만, 고은서는 아무래도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어찌 됐든 직접 가서 상황을 알아보지 않았으니 구체적인 수치를 들 수 없었으며 만들어낸 기획안도 어딘가 이상했다.내일 허 교수의 연구소에 찾아가 봐야 하나 생각하던 때, 고은서는 갑자기 머리 위에 그림자가 지는 것을 느꼈다.고개를 들어보니 곽승재가 그녀의 곁에 서 있었다.고은서는 노트북을 닫으려고 했지만, 곽승재는 이미 내용을 내다보고 입을 열었다.“너 왜 허 교수 연구소의 자료를 정리하고 있어?”곽승재가 이미 본 이상 이 일은 어차피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안 고은서는 자기 생각을 말했다.“나는 이들의 약품이 아주 시장성이 있다고 봐. 그래서 약품 대리권을 나한테 넘겨주기를 바라는 중이야.”“너한테?”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왜 갑자기 이런 것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거야?”고은서가 대답했다.“당신이 투자했다는 건 이들이 연구해 낸 약품이 전망이 있다고 믿는다는 소리잖아. 그러니 내가 관심을 두는 것도 이상하지 않잖아.”곽승재는 고은서를 힐끔 보고는 말했다.“허 교수 쪽의 상황은 네가 생각한 것처럼 간단하지 않아. 넌 뭘 보든, 한 발 끼어들려고 하지 좀 마.”고은서는 곽승재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는 고은서가 일부러 자기를 화나게 하려고 그의 프로젝트에 끼어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아무튼, 난 이 대리권을 꼭 손에 넣어야겠어.”고은서는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었다.“내 돈줄 막을 생각하지 마!”곽승재는 조금 참으며 말했다.“새로운 약품이 아직 시장에 나오지도 않았어. 미래가 어떻게 될지 누구도 장담 못 해. 만약 돈줄이 아니면 넌 어떻게 할 거야?”“괜찮아. 만약 돈줄이 아니라도
잠자리를 팔백 개까지 셌을 때, 고은서는 마침내 졸리기 시작했고 천천히 잠이 들었다.얼마나 잤는지 모르지만, 고은서는 자기가 아주 따뜻한 곳에 웅크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온몸이 따뜻함에 감싼 것만 같았다.에어컨이 조금 쌀쌀했기에 이런 따뜻함은 그녀를 아주 편안하게 했으며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다가갔다.그러자 의지하던 곳이 갑자기 딱딱해지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목 뒤에 갑자기 따뜻한 촉감이 느껴졌으며 무언가가 그녀를 빨고 있는 듯했다.고은서는 움직이고 싶었지만, 몸은 꽉 갇힌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그녀는 미친 듯이 발버둥 치다가 갑자기 확 일어나 앉았다.주변을 살펴보았지만, 그녀를 가두고 있는 것은 없었다.방안은 어두컴컴했으며 오직 토끼 모양의 스탠드만 연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그 순간, 그녀는 침대 한복판에 앉아있었으며 곽승재가 그녀의 옆에 누워있었다.그녀의 소동에 깨기라도 한 것처럼 곽승재는 눈을 뜨며 조금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래?”고은서는 잠시 멍을 때리더니 드디어 이상한 곳을 발견하고는 수상하다는 듯이 곽승재를 보며 물었다.“내가 왜 당신이랑 한 이불을 덮고 있어?”잠들기 전, 그녀는 분명 자기 이불을 덮고 있었다.곽승재의 목소리는 여전히 잠겨있었다.“네가 춥다고 스스로 기어들어 왔나 보지.”말을 마친 뒤, 곽승재는 눈을 감았다.고은서는 한참 동안 곽승재를 쳐다보았다. 그의 잘생긴 미간은 한데 찌푸려져 있었으며 방해받아 짜증이 난 듯한 표정이었다.‘정말로 내가 스스로 곽승재의 이불 안으로 기어들어 간 거야? 에어컨이 평상시보다 춥긴 하네.’사람은 잘 때 무의식적으로 행동을 하기도 하니, 그녀가 추위 때문에 따뜻한 곳으로 간 것일 수도 있었다.고은서는 더는 고민하지 않고 에어컨 온도를 좀 올리고는 다시 자신의 이불을 덮었다.곽승재에게 다가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녀는 담요 하나를 더 덮었으며 침대의 끝쪽에 누웠다.다시 누운 지 몇 분 안
‘대 아침부터 무슨 일로 전화한 거지?’아마도 고은서더러 허 교수를 만나지 말라는 얘기거나 아니면 그녀더러 GS 그룹의 활동에 참석하라는 얘기일 것이었다.이 두 일에 대해, 고은서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그래서 고은서는 곽승재의 전화를 무시하기로 했다. 예전에 곽승재가 습관적으로 그녀의 전화를 씹었기에 이번에 고은서는 그에게 전화 안 받는 기분이 어떤지 느껴보게 하기로 했다.핸드폰을 무음 상태로 바꾼 뒤, 고은서는 집 문을 나섰다.그녀가 허 교수의 연구소에 도착했을 때, 의외로 눈에 익은 사람을 보았다. 바로 백유미였다.GS 그룹의 파티에서 다친 뒤부터, 고은서는 그동안 줄곧 백유미를 보지 못했다.하지만 이렇게 이곳에서 만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백유미는 여성스러운 치마를 입고 있었고 위에는 슬림한 작은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세련하면서도 부드러움이 깃들어있었다.아마도 이마의 상처를 가리기 위해서인지 백유미는 앞머리를 내렸으며 얼굴은 화장한 상태였지만 여전히 허약해 보였다.‘유미도 참 필사적이네. 조명기구에 그렇게 한 대를 맞았는데도 며칠만 입원해 있다가 바로 일하러 나오다니.’전생의 백유미는 이 정도로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그래도 병원에서 보름 정도 휴양했었다.당연히 곽승재도 그녀의 옆에서 보름 동안 같이 지냈다.이에 고은서는 질투가 나고 눈이 시뻘게져서 곽승재에게 메시지 폭탄을 날렸다. 고은서는 자기 허리가 너무나도 아파 입원해서 물리치료를 받고 있는데 곽승재가 와서 돌봐줬으면 한다고 보냈었다.하지만 곽승재는 마치 못 본 것처럼 메시지를 한 개도 답장하지 않았다.이에 화가 난 고은서는 허리 통증을 참으며 성아연과 함께 병원으로 가서 한바탕 난리를 피웠었다. 결국, 곽승재가 짜증을 내면서 그들을 밖으로 내쫓았다.곽승재는 심지어 고은서더러 가만히 있으라고 경고까지 했다. 안 그러면 고은서가 백유미를 다치게 한 죄까지 물을 거라고 하면서...“은서 씨가 여기에는 웬일로 왔어?”백유미의 목소리에 고은서는 정신을 기억에서 되찾았다
“아니요, 은서 정말 능력 있어요.”“할아버지.”곽승재는 더 이상 듣지 않고 고준석을 부르며 고국성 부부에게 인사를 건넸다.“삼촌, 생신 축하합니다. 제가 준비한 작은 선물인데 받아 ㅜ세요.”곽승재는 고국성에게 자수정 상자를 건넸다.단은숙이 고국성을 대신해 선물을 받아 열어보았고 그것은 고국성이 좋아하는 고급 담배통이었다.고국성도 선물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고맙다. 승재야. 마음 많이 써주었구나.”“삼촌이 좋아하실 것 같아 지난번 경매에서 보고 괜찮은 것 같아 바로 사 왔어요.”곽승재도 담담히 웃으며 답했다.“은서야, 너는 무슨 선물 준비했어?”곽승재가 자연스럽게 고은서에게 물었다.고은서는 그를 째려보았다.‘일부러 이러는 거야!’그녀가 준비한 선물도 담배통이었는데 백화점에서 산 것이어서 곽승재의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곽승재가 먼저 선수를 친 상황에서 그녀는 준비한 선물을 자신 있게 꺼내 보일 수 없었다.“저희가 준비한 선물은 너무 커서 들고 다니기 어려워요.”민시후가 고은서의 기분을 눈치채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었다.민시후가 눈빛을 보내자 운전기사가 선물을 들고 들어왔다.고급 영양제뿐만 아니라 술, 담배 그리고 유명한 화가의 그림도 들어 있었다.고국성은 예술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우아함을 자랑하고 싶어 했고 특히 이런 고급스럽고 보기 드문 그림을 좋아했다.“시후, 안목이 좋네. 이 그림 정말 마음에 들어.”고국성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호칭마저 바꾸며 기쁜 마음을 가감 없이 표현했다.고국성이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좋은 선물이구나. 이제 외삼촌한테 효도할 줄도 아네.”고은서는 민시후의 도움에 감사했다.하지만 곽승재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그는 고은서가 이런 자리에 민시후를 데려올 줄도 몰랐고 민시후가 이렇게까지 철저히 준비할 줄도 몰랐다.선물 경쟁에서 민시후는 완벽히 승리한 셈이었다.민시후는 고국성에게 그림을 선물했을 뿐만 아니라 단은숙에게 피부에 좋은 영양제를 고준석에게는 고급 옥돌
갑작스러운 힘에 고은서는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그녀는 갑작스럽게 넓은 품에 안기게 되었다.익숙한 향기가 풍겨오자 고개를 돌린 고은서는 곽승재임을 확인했다.엘리베이터에서 막 내린 것인지 곽승재는 어두운 표정을 한 채 싸늘한 눈빛으로 민시후를 응시하고 있었다.“누구 허락받고 만지는 거야?”곽승재가 낮은 목소리로 묻자 민시후도 싸늘한 표정으로 답했다.“무슨 상관인데? 너는 왜 고은서를 당기는데.”그 상황을 본 고은서는 곽승재의 품에서 벗어나 민시후 옆으로 서서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여기 있어?”고은서의 물음에 곽승재가 그녀를 바라보았다.세심하게 꾸민 고은서는 평소보다 더 빛났다.심플하면서도 정교한 디자인에 몸에 맞는 흰색 드레스는 그녀를 완벽하게 감쌌다.드레스는 무릎까지 내려왔고 그녀의 가냘프고 흰 작은 다리가 드러났다. 그런 고은서의 모습은 마치 요정 같았다.흰색 정장을 입은 민시후와 함께 서 있으니 두 사람은 잘 어울리며 보기 좋았다.하지만 곽승재는 가슴 한편에서 묘한 답답함과 불편함을 느꼈다.“삼촌 생일이라 초대받아서 왔는데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어?”곽승재가 차갑게 말하자 고은서는 콧방귀를 뀌었다.작년에 아직 이혼하지 않았을 때 그녀는 곽승재와 함께 외삼촌 생일 파티에 참석하려 했으나 곽승재는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했었다.그런데 이혼하고 나서 곽승재는 이제 더 이상 오지 않아도 되는 곳에 와있었다.정말 한심하고 우스꽝스러웠다.“고은서, 왔으면서 왜 들어오지 않고 여기 서 있어?”그때 고은혜가 연회장에서 나와 고은서에게 인사를 건넸다.동시에 고은혜는 민시후와 곽승재를 발견했다.민시후는 흰색 정장을 입고 굉장히 잘생기고 매혹적인 모습이었고 곽승재는 전형적인 검은색 고급 정장을 입고 차가우면서도 잘 생겼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다.고은혜는 두 사람을 보고 상황을 짐작하고는 조심스럽게 고은서에게 물었다.“둘이 어떻게 같이 온 거야? 싸우기라도 할까 봐 걱정되네.”고은서는 고은혜를 흘깃 쳐다
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고은서, 함정 파려고 하지 마. 내가 사기꾼도 아니고 어떻게 널 가르쳐?”두 사람이 말다툼하는 동안 한 직원이 부러워하며 말했다.“대표님, 여자 친구분과 사이가 정말 좋아 보이네요.”“저는...”“말 잘하네. 전부 다 살게.”기분 좋아진 민시후가 큰손다운 기질을 발휘했다. 그 말에 직원들은 하나같이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은서는 해명하려 했지만 끼어들 수 없어서 그냥 포기했다.민시후는 그런 고은서를 보며 더욱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옷을 갈아입고 액세서리와 메이크업을 하자 두세 시간이 지나갔다.고은서는 거울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전문적인 손길이 그녀의 모든 장점을 부각해 놓았다.민시후는 흰색 정장을 입고 머리를 뒤로 빗어 올린 채 나타났다.다른 사람이 입는다면 소화하기 힘든 스타일을 민시후가 입으니 타고난 고급스러움과 매혹적인 느낌을 발산했다.두 사람은 출발 시간이 되어갈 즘 준비를 끝마쳤다.민시후의 비서는 여러 개의 선물을 들고 그들을 따라 주차장으로 향했다.고국성의 생일 파티는 오성급 호텔에서 열릴 예정이었다.운전기사가 호텔 정문에 차를 세우자 곧 호텔 직원들이 다가와서 차 문을 열어줬다.차에서 내린 민시후가 고은서를 향해 팔을 내밀며 팔짱을 끼라는 신호를 보냈다.비록 파티에 걸맞은 행동일 뿐이지만 오늘 파티는 고씨 집안 모든 사람과 친분이 있는 친구들과 고객들이 모이는 자리였다.고은서가 민시후와 팔짱을 끼고 들어가면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될 것은 뻔했다.“민시후, 오늘 외삼촌 생일이니 그분이 주인공이야. 우리가 주목받는 건 좀 아닌 것 같아.”고은서는 어제 박지연이 흥분하며 했던 말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그리고 말조심해 줘.”자신이 한 말들이 민시후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이라는 걸 안 고은서가 덧붙였다.“오해하지 마. 네가 예의를 모른다고 강조하는 게 아니라 그저 어색한 상황이 되는 걸 원하지 않아서 그래. 너를 향한 내 마음에 확신이 생긴다면
고은서가 담담하게 말했다.“설령 곽승재가 직접 이 프로젝트를 담당한다고 해도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야. 난 이미 아무 감정도 없거든.”민시후는 여전히 불안해하며 말했다.“우리 다른 프로젝트로 바꾸자. 신재생에너지 쪽도 괜찮아 보이잖아.”“신재생에너지도 좋지. 하지만 왜 제인 제약을 포기해야 해?”고은서가 말을 이었다.“네 말대로 곽승재가 나 때문에 이 프로젝트에 끼어든 거라면 내가 신재생에너지를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끼어들지 않을까? 그럼 우린 매번 다 된 프로젝트를 포기하게?”민시후가 태연하게 답했다.“너를 양보하는 것만 아니라면 프로젝트는 상관없어.”고은서가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세상에 소문난 난봉꾼인 민 도련님이 이런 순진한 연애 바보였다니.”민시후가 고은서에게 다가가 중점만 잡아내며 말했다.“고은서, 네 말은 우리 사이가 연인 관계라는 거지?”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장난하지 말고 인제 제약 프로젝트는 포기할 수 없어.”고은서가 결정을 내리며 말했다.“송민아한테 계약서와 계획서를 수정하게 하고 내일 투자부 직원들을 모아 회의를 열 거야.”판주 투자은행과 공동투자를 하더라도 제인 제약은 매우 좋은 프로젝트였다. 고은서는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민시후는 고은서를 바라보며 다소 아쉬운 듯 말했다.“그렇다면 내일 회의는 내가 주재할게. 나도 직접 참여해야겠어.”고은서가 어이없다는 듯 답했다.“민시후, 최근에 다쳐서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을 텐데 이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그건 안 돼. 곽승재는 교활한 사람이야. 방심하고 있을 수는 없지.”민시후는 단호히 거절했다.그 말을 들은 고은서는 웃기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좋아. 네 말대로 하자. 그럼 난 먼저 사무실로 돌아갈게.”고은서가 돌아가려고 하자 민시후가 그녀를 불러세웠다.“잠깐만.”“왜?”고은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이따 네 외삼촌 생일 파티에 가야 하잖아. 옷 좀 골라줘.”민시후는 말을 마치고 전화를 걸
“비록 이혼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지연이뿐이야.”온승준이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유혜린도 자존심이 있었기에 온승준에게 여러 차례 거절당하자 입을 틀어막으며 자리를 떴다.온승준은 그녀를 쫓지도 않고 신경 쓰지도 않은 채 피곤한 모습으로 복도에 앉았다....고은서는 박지연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녀에게 이후의 상황을 물었다.육현석이 박지연에게 고백했다는 말을 듣고 고은서는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내가 뭐랬어! 너를 좋아하는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요즘 아무것도 안 하고 일에만 집중했을까?”박지연은 육현석이 했던 말을 고은서에게 전했다.고은서도 육현석의 행동에 감동하며 말했다.“정말 대단하다. 모든 걸 다 생각해 놓았잖아. 지연아, 너도 받아들여. 비록 곽승재의 친구이긴 하지만 곽승재보다 훨씬 믿음직스러워. 나는 두 사람이 잘되길 응원해.”박지연이 소파에 누우며 답했다.“나는 육현석과 이어질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어. 오늘 그 사람 말 듣고 정말 놀랐어. 바로 결정 내리기는 힘들 것 같아.”“왜? 아직 온 선생님께 미련이라도 남았어?”고은서가 묻자 박지연은 고개를 저으며 오늘 온승준과 있었던 일들도 고은서에게 얘기해 주었다.“생각해 보니 참 슬프더라. 결혼해서 2년 넘게 살았는데 내 억울함을 전혀 몰랐다는 게 말이야. 애먼 사람한테 괜한 기대를 했어.”“지연아, 지금까지 너무 힘들고 고된 시간을 보냈잖아. 이제 놓아버리고 새 삶을 맞이해.”고은서가 안타까워하며 격려했다.박지연도 미소 지으며 말했다.“응. 노력할게.”“맞다. 외삼촌 선물은 뭐 샀어? 내일 민시후랑 같이 집에 갈 거라며? 어떻게 소개하려고?”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묻자 고은서가 답했다.“친구라고 평범하게 소개하려고.”“집안 모임에 데려가는데 친구라도 해도 평범한 친구는 아니지 않아?”박지연이 갑자기 기대에 찬 듯 말했다.“민시후가 이 기회에 또 고백하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시간 좀 달라고 했으니 함부로 행동하지는 않을 거야.”...다음날은
조수연의 불쾌한 표정을 마주하고도 온승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혜린이 적절한 타이밍에 작별을 고하며 말했다.“어머님, 시간이 꽤 늦었네요.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내일은 굳이 오지 않아도 돼. 어머니를 위해 간병인 구할 거야.”온승준이 바로 말했다.유혜린은 잠시 멈칫했지만 아무 말 없이 가방을 들고 병실을 나섰다.조수연은 몹시 불쾌해하며 말했다.“승준아, 너 도대체 뭐 하는 거니! 혜린이 또 뭘 잘못했다고 그래!”온승준이 싸늘하게 답했다.“예전에 지연이가 밤낮으로 어머니를 돌봤을 때는 한 번도 고맙다는 말 하지 않으셨잖아요.”“뭘 고마워해야 해? 아픈 시어머니를 돌보는 건 당연한 일 아니야?”조수연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손에 든 건 뭐야? 어디서 났어?”말을 마친 조수연은 온승준 손에 들려있는 선물 상자를 보고 불현듯 깨달았다.“박지연이 다녀갔니? 뭐야, 겨우 볼품없는 물건 가져와 놓고 오늘 일은 없었던 일로 하겠다는 거야? 얼굴 한 번 비추지 않고 가버린 건 양심에 찔려서 그런 거 아니야?”“제가 들어오지 말라고 했어요.”“왜? 내가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너 정말 그 애를 지나치게 감싸고 도는구나.”조수연이 화를 냈다.온승준은 조수연과 다투지 않고 화장실에서 나오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아버지, 어머니. 오늘 밤 일은 이대로 끝낼 거예요. 저는 누구의 책임도 묻지 않을 거고 경찰서에 가서 사건을 철회할 생각이에요.”온승준은 두 사람에게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그리고 다시는 집 비밀번호 타인에게 알려주는 일 없도록 하세요. 집 비밀번호 교체하겠습니다. 제 허락 없이는 누구도 함부로 드나들 수 없을 겁니다.”“너... 너... 지금 내가 혜린이에게 비밀번호 알려준 거에 불만을 품고 이러는 거야?”화가 난 조수연은 상처가 아파졌다.“박지연 때문에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술을 마신 너를 혜린이가 착하게도 집에 데려다준 건데 비밀번호도 알려주지 않으면 집은 어떻게 들어가? 그리고 혜린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던 박지연이 말했다.“더 할 말 없으면 먼저 가볼게.”“아직 할 말 있어!”온승준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그날 내가 술에 취했던 날 밤, 차 안에서 잠들어 버렸어. 유 닥터가 운전기사에게 날 부축해 집으로 올려보내라고 했어. 나는 유 닥터가 돌아가지 않은 줄도 몰랐어. 그저 침대 옆에 앉아 밤을 보냈을 뿐 우린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온승준이 드물게 상황을 설명했다.박지연은 지금 이 상황이 우스웠다.“왜 나한테 설명하는 거야? 우리 지금 아무 사이도 아니야.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나랑 무슨 상관이야?”온승준은 박지연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끝까지 하고 싶던 말을 이어갔다.“지연아, 네가 우리 관계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 혹시라도 널 찾으러 가면 폐를 끼칠까 봐 요즘 너를 찾지 않았어. 하지만 이 일은 꼭 말해주고 싶었어.”온승준은 평소 잘 하지 않던 긴말을 이어가며 다소 급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려 애쓰는 것이 눈에 보였다.박지연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온승준, 이미 이혼한 사이에 무슨 해명이야? 이혼 하기 전에는 이런 얘기 하지도 않았잖아. 그때는 내가 오해할지 걱정도 하지 않았지?”온승준이 솔직히 답했다.“내가 그런 부분에 소홀했어. 난 우리가 꽤 잘 지낸다고 생각했어. 네가 그렇게 많은 걸 참고 있었는지는 몰랐어.”“몰랐다고?”박지연은 결국 참지 못하고 따지듯 말했다.“당신 어머니가 유혜린을 집에 부르고 날 불러 요리시켰던 날 내가 손을 데었을 때 당신은 날 병원에 데려다주지도 않고 내 상태를 물어보지도 않았어. 그런데 우리 사이가 원만했다고? 내가 정말 서운하지 않았을 거로 생각한 거야? 온승준, 모든 걸 둔감했던 탓이라고 돌리지 마. 넌 내가 알아서 나을 거로 생각했겠지. 그래서 나에게 시간 쓰는 걸 낭비라고 여긴 거야.”온승준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지연아, 그런 게 아니라 그때 내가 병원에 같이 가겠다고 고집
박지연과 육현석은 병원에서 먼저 의사로부터 조수연의 상태를 확인했다.조수연은 이마에 타박상을 입었고 팔꿈치와 몸 여러 곳에 찰과상이 있었다. 가장 심각한 것은 허리와 다리로 다양한 정도의 골절을 입어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아야 했다.다행히 에스컬레이터 높이가 높지 않았고 조수연이 머리부터 떨어지지 않아 내상을 입지 않았다.상태를 확인한 후 병실로 병문안 가려던 박지연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온승준을 발견했다.캐주얼한 옷을 입은 온승준은 큰 키에 곧은 체형을 가지고 있었다. 늘 무표정하던 잘생긴 얼굴에는 약간의 피곤함마저 느껴졌다.육현석이 먼저 앞으로 나서며 부하가 준비한 선물 상자를 온승준에게 건넸다.“온승준 씨, 오늘 밤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어머님의 치료비와 관련 비용은 백화점에서 책임지겠습니다. 혹시 어머님께서 다른 요구가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세요.”“너무 무리한 요구는 하지 말아야지.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니 백화점 측에서도 즉각 대처하지 못한 것도 당연한 일이야.”박지연이 덧붙였다.조수연은 자신을 귀부인으로 여기는 사람이어서 돈을 뜯어낼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화풀이 삼아 끝까지 물고 늘어질 가능성은 있었다.박지연의 말을 듣고도 온승준의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육현석의 선물도 받지 않고 입을 열었다.“육현석 씨, 경찰을 통해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했습니다. 오늘 밤은 저희 어머니가 잘못한 일이니 여러분과는 무관합니다. 이 얘기를 하려고 나온 거예요. 그러니 그 어떤 배상도 책임도 필요 없습니다.”“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희가 져야 할 책임은 반드시 지겠습니다. 경찰 쪽은 제 변호사가 처리 중이고 이후 문제도 변호사를 통해 협의하도록 하시죠. 저희는 여사님을 방문하여 직접 사과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왔습니다.”온승준이 완곡히 거절했다.“괜찮습니다. 어머니는 주무시고 계십니다. 깨어나시면 다녀가셨다고 전해 드리겠습니다.”온승준의 말을 듣고 박지연은 조수연이 사실 잠들지 않았음을 바로 알아차렸다.‘오
그러나 박지연은 실패했다.그 후로 박지연은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두려워졌다.하지만 지금 육현석은 그녀의 옆에 앉아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고백하고 있었다.그는 그녀의 모든 걱정을 고려하고 해결책까지 내놓았다.심지어 그녀가 성공한 남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해 자신을 그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하기까지 했다.이런 진심 어린 마음에 어떤 여자가 감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박지연은 드물게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육현석, 나는 네가 이렇게까지 좋아해 줄 만한 사람이 아니야. 네가 실망할까 봐 두려워.”육현석이 낮게 웃으며 답했다.“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널 좋아한 건 내 선택이야. 넌 그 무엇도 두려워할 필요 없고 다른 사람이랑 널 비교할 필요도 없어. 지연아, 너는 이미 그 자체로도 훌륭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야.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 한 번의 실패한 결혼 때문에 너 자신을 의심하지 마.”육현석의 말에 박지연은 다시 마음이 따뜻해졌다.그녀는 지금껏 자신을 이렇게 감동하게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육현석이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아니면 여자를 많이 만나본 사람답게 능숙한 말솜씨로 현혹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박지연은 그저 그에게 감사했다.박지연도 진심을 담아 입을 열었다.“육현석, 고마워. 네 말처럼 나는 방금 실패한 결혼에서 벗어난 상태라 이렇게 빨리 새로운 감정을 시작할 용기가 없어. 네가 한 말들은 정말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나 때문에 너를 바꾸지는 마. 사업하기 싫으면 굳이 억지로 하지 않아도 돼. 성공적인 사업가라는 이미지가 남자의 매력을 더해주는 건 맞지만 내가 배우자를 선택하는 기준이 단지 그것만은 아니야. 네가 무리하면 오히려 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아.”육현석이 웃으며 답했다.“사실 꼭 너 때문에 변하려는 건 아니야. 우리 아버지도 이제 곧 환갑이잖아. 이미 오래전부터 내가 가업을 물려받길 바라셨어. 그동안은 좀 더 놀고 싶어서 미뤘던 건데 이제는 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