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시후는 건들건들한 말투로 대답했다.“왜? 곽승재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으니까 나에게 관심이 생기기 시작해?”고은서는 어이가 없어 허공에 대고 눈을 희번덕거렸다.‘방금 뻔뻔한 남자를 한 명 보냈는데, 여기에도 그런 사람 한 명 더 있네.’“걱정하지 마. 나 남자한테 관심 끊었어. 특히 너처럼 뻔뻔하고 자신감 넘치는 남자는 딱 질색이야.”“어구. 말투가 살벌한데?”“너랑 말장난할 시간 없어. 볼일이 있어서 전화한 거야.”“내 사무실로 와.”고은서는 익숙한 길로 민시후의 사무실에 도착했다.민시후는 여전히 껄렁껄렁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긴 다리를 책상 위에 얹은 채 핸드폰을 들고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익숙한 노랫소리가 들려 고은서는 민시후의 곁으로 걸어가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민시후는 고은서의 드럼 치는 동영상을 보고 있었다.고은서는 고의로 조금 전에 민시후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줬다.“민 도련님, 사무실에서 혼자 내 동영상을 보고 있었어? 설마 나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지?”이 말을 듣자 민시후는 조금도 화내지 않고 심지어 흥미진진하게 말했다.“사실 난 네가 곽 대표와 이혼하고 나랑 같이 있겠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있어. 어쨌든 넌 지금 무력도 좀 있잖아.”고은서가 말했다.“고맙긴 한데 난 널 받아들일 수 없어.”민시후가 물었다.“내가 곽 대표보다 못한 게 뭐가 있는데?”고은서가 대답했다.“너무 뻔뻔해서 싫어.”“나중에 너도 깨닫게 될 거야. 이게 내 장점이라는 것을.”민시후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말했다.“말해 봐. 무슨 일로 이렇게 급하게 날 찾아온 건데?”고은서는 핸드폰을 꺼내 그 안에서 자료 하나를 찾아냈다.“이 자료 한번 봐. 눈에 익지 않아?”민시후는 자료를 힐끗 보고 말했다.“이건 곽 대표가 투자하던 그 약물 연구소 아니야?”고은서가 물었다.“너 예전에 일부러 날 데리고 승재 씨와 관계자가 밥 먹는 자리에 나가서 난동을 부렸던 건 이 프로젝트에 관심 있어서 그랬던 거 아니야
민시후는 고은서의 계획을 듣고 반대하지 않았다.“왜 이유 없이 이런 계획을 세웠는데? 그 사람에게 원한이라도 있어?”고은서는 대답하지 않고 도리어 물었다.“아무 이유 없이 한 사람이 싫으면 안 돼?”민시후는 고은서를 잠깐 주시하더니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당연히 되지. 게다가 이 계획이 아주 마음에 들어. 네가 밑밥을 깔지 않고 나에게 도움을 청했어도 대답했을 거야.”고은서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그럼 민 도련님의 관대한 마음에 감사드리며, 저는 이만 기획안을 작성하러 들어가 볼게...”“잠깐만, 나 요구할 게 하나 있어.”민시후가 고은서를 불러 세우자 고은서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무슨 요구?”민시후는 살짝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반응이 왜 그래? 내가 설마 진짜로 너에게 관심이 있겠어! 일이 끝나면 드럼 치는 거 한번 보여줘.”“거절해도 돼?”“안 돼.”민시후는 퉁명스럽게 말했다.“고은서 씨, 나 바보 아니거든. 당신은 나에게 두 가지 일을 부탁했으면서, 내 작은 부탁 하나도 못 들어줘?”“...”지금 민시후의 처지에서 볼 때 허 교수의 프로젝트는 확실히 안전한 투자 항목이 아니고, 고은서도 당분간은 제대로 설명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그러자.”‘드럼을 한 토막 치는 게 뭐 큰 대수라고. 한다면 하는 거지.’...곽승재는 특별히 저녁 시간을 골라 집에 돌아왔지만, 집안에서 고은서의 그림자를 보지 못했다.이미숙은 곽승재에게 알렸다.“도련님, 사모님께서 점심을 드시고 나간 후로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곽승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고은서는 요즘 밖에 나가는 날이 점점 많아진 것 같았다.예전에 곽승재가 언제 집에 돌아오든 고은서는 음식을 갖추고 그를 기다렸다.그러나 지금 고은서는 곽승재보다 더 늦게 들어왔다.“도련님, 오늘 사모님께서 일어나셔서 저에게 잠옷에 관해 물었습니다.”이미숙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곽승재는 안색이 변하지 않은 채 말했다.“알겠어요.”그는 머릿속
‘이 사람 문제 있는 거 아니야? 예전에 내가 일부러 민소매를 입고 그의 앞에서 얼쩡거릴 때는 쳐다보지도 않더니, 지금 내 허리를 살짝 부추기였다고 이렇게 뜨거운 눈빛을 발사하다니.’고은서는 생각할수록 화가 나서 곽승재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곽승재는 그녀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품속의 사람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너 뭐 하는 거야!”고은서가 화를 내자, 곽승재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말했다.“지난번 GS 그룹의 파티에서 내가 먼저 떠나가서 네가 기분이 안 좋았어?”지금 두 사람의 자세는 아주 애매하고 이상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손을 애써 치우며 말했다.“먼저 날 놔줘!”곽승재는 여전히 그녀를 끌어안고서 말했다.“내가 묻는 말에 먼저 대답해.”곽승재가 자기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걸 보고, 고은서는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런 적 없어. 이제 됐어?” 고은서의 말투는 매우 차가웠고 눈빛에는 귀찮은 기색이 분명했다.분명 집 문을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활짝 웃고 있었다.곽승재는 짜증이 치밀어올라 고은서를 놓아주고 냉랭하게 말했다.“고은서, 다시 생각해 봐. 네가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면 지금 이런 반응을 보였을까?”“내가 기분이 나빴든 말든, 그게 너에게 중요하기나 해?”고은서는 호통치며 말했다.“너 요새 너무 한가해서 병났어? 그게 언제 일인데 왜 인제 와서 갑자기 내 기분을 묻고 난리야? 날 곤란하게 하는 게 그렇게 재밌어?”시간이 아무리 오래 지났다 해도 설명하고 넘어가야 할 건 설명해야 한다. 이는 곽승재가 육현석에서 받은 충고였다.곽승재는 얇은 입술을 살짝 오므리고는 차가운 말투를 조금 줄이고 말했다.“그날 밤, 이런저런 일을 급하게 처리하느라 널 미처 돌보지 못했어. 내가 생각이 짧았던 거 같아. 할머니께서 네가 줄곧 운호에 가서 온천욕을 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이번 주 토요일 우리 회사에서 마침 그곳에서 단체워크숍을 진행해. 같이 가지 않을래?”이건 곽승재가 처음으로 성실한 태도로 고은서에게
고은서는 이미숙에게 설명해 주기 귀찮았다.“저는 바빠서 이만 올라가 볼게요.”말을 마친 뒤 고은서는 위층으로 올라갔다.곽승재와 마주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은서는 노트북을 들고 옆에 있는 객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최대한 빨리 기획안을 만들어내고 싶었다.몇 시간 동안 바쁘게 정리했지만, 고은서는 아무래도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어찌 됐든 직접 가서 상황을 알아보지 않았으니 구체적인 수치를 들 수 없었으며 만들어낸 기획안도 어딘가 이상했다.내일 허 교수의 연구소에 찾아가 봐야 하나 생각하던 때, 고은서는 갑자기 머리 위에 그림자가 지는 것을 느꼈다.고개를 들어보니 곽승재가 그녀의 곁에 서 있었다.고은서는 노트북을 닫으려고 했지만, 곽승재는 이미 내용을 내다보고 입을 열었다.“너 왜 허 교수 연구소의 자료를 정리하고 있어?”곽승재가 이미 본 이상 이 일은 어차피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안 고은서는 자기 생각을 말했다.“나는 이들의 약품이 아주 시장성이 있다고 봐. 그래서 약품 대리권을 나한테 넘겨주기를 바라는 중이야.”“너한테?”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왜 갑자기 이런 것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거야?”고은서가 대답했다.“당신이 투자했다는 건 이들이 연구해 낸 약품이 전망이 있다고 믿는다는 소리잖아. 그러니 내가 관심을 두는 것도 이상하지 않잖아.”곽승재는 고은서를 힐끔 보고는 말했다.“허 교수 쪽의 상황은 네가 생각한 것처럼 간단하지 않아. 넌 뭘 보든, 한 발 끼어들려고 하지 좀 마.”고은서는 곽승재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는 고은서가 일부러 자기를 화나게 하려고 그의 프로젝트에 끼어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아무튼, 난 이 대리권을 꼭 손에 넣어야겠어.”고은서는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었다.“내 돈줄 막을 생각하지 마!”곽승재는 조금 참으며 말했다.“새로운 약품이 아직 시장에 나오지도 않았어. 미래가 어떻게 될지 누구도 장담 못 해. 만약 돈줄이 아니면 넌 어떻게 할 거야?”“괜찮아. 만약 돈줄이 아니라도
잠자리를 팔백 개까지 셌을 때, 고은서는 마침내 졸리기 시작했고 천천히 잠이 들었다.얼마나 잤는지 모르지만, 고은서는 자기가 아주 따뜻한 곳에 웅크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온몸이 따뜻함에 감싼 것만 같았다.에어컨이 조금 쌀쌀했기에 이런 따뜻함은 그녀를 아주 편안하게 했으며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다가갔다.그러자 의지하던 곳이 갑자기 딱딱해지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목 뒤에 갑자기 따뜻한 촉감이 느껴졌으며 무언가가 그녀를 빨고 있는 듯했다.고은서는 움직이고 싶었지만, 몸은 꽉 갇힌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그녀는 미친 듯이 발버둥 치다가 갑자기 확 일어나 앉았다.주변을 살펴보았지만, 그녀를 가두고 있는 것은 없었다.방안은 어두컴컴했으며 오직 토끼 모양의 스탠드만 연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그 순간, 그녀는 침대 한복판에 앉아있었으며 곽승재가 그녀의 옆에 누워있었다.그녀의 소동에 깨기라도 한 것처럼 곽승재는 눈을 뜨며 조금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래?”고은서는 잠시 멍을 때리더니 드디어 이상한 곳을 발견하고는 수상하다는 듯이 곽승재를 보며 물었다.“내가 왜 당신이랑 한 이불을 덮고 있어?”잠들기 전, 그녀는 분명 자기 이불을 덮고 있었다.곽승재의 목소리는 여전히 잠겨있었다.“네가 춥다고 스스로 기어들어 왔나 보지.”말을 마친 뒤, 곽승재는 눈을 감았다.고은서는 한참 동안 곽승재를 쳐다보았다. 그의 잘생긴 미간은 한데 찌푸려져 있었으며 방해받아 짜증이 난 듯한 표정이었다.‘정말로 내가 스스로 곽승재의 이불 안으로 기어들어 간 거야? 에어컨이 평상시보다 춥긴 하네.’사람은 잘 때 무의식적으로 행동을 하기도 하니, 그녀가 추위 때문에 따뜻한 곳으로 간 것일 수도 있었다.고은서는 더는 고민하지 않고 에어컨 온도를 좀 올리고는 다시 자신의 이불을 덮었다.곽승재에게 다가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녀는 담요 하나를 더 덮었으며 침대의 끝쪽에 누웠다.다시 누운 지 몇 분 안
‘대 아침부터 무슨 일로 전화한 거지?’아마도 고은서더러 허 교수를 만나지 말라는 얘기거나 아니면 그녀더러 GS 그룹의 활동에 참석하라는 얘기일 것이었다.이 두 일에 대해, 고은서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그래서 고은서는 곽승재의 전화를 무시하기로 했다. 예전에 곽승재가 습관적으로 그녀의 전화를 씹었기에 이번에 고은서는 그에게 전화 안 받는 기분이 어떤지 느껴보게 하기로 했다.핸드폰을 무음 상태로 바꾼 뒤, 고은서는 집 문을 나섰다.그녀가 허 교수의 연구소에 도착했을 때, 의외로 눈에 익은 사람을 보았다. 바로 백유미였다.GS 그룹의 파티에서 다친 뒤부터, 고은서는 그동안 줄곧 백유미를 보지 못했다.하지만 이렇게 이곳에서 만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백유미는 여성스러운 치마를 입고 있었고 위에는 슬림한 작은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세련하면서도 부드러움이 깃들어있었다.아마도 이마의 상처를 가리기 위해서인지 백유미는 앞머리를 내렸으며 얼굴은 화장한 상태였지만 여전히 허약해 보였다.‘유미도 참 필사적이네. 조명기구에 그렇게 한 대를 맞았는데도 며칠만 입원해 있다가 바로 일하러 나오다니.’전생의 백유미는 이 정도로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그래도 병원에서 보름 정도 휴양했었다.당연히 곽승재도 그녀의 옆에서 보름 동안 같이 지냈다.이에 고은서는 질투가 나고 눈이 시뻘게져서 곽승재에게 메시지 폭탄을 날렸다. 고은서는 자기 허리가 너무나도 아파 입원해서 물리치료를 받고 있는데 곽승재가 와서 돌봐줬으면 한다고 보냈었다.하지만 곽승재는 마치 못 본 것처럼 메시지를 한 개도 답장하지 않았다.이에 화가 난 고은서는 허리 통증을 참으며 성아연과 함께 병원으로 가서 한바탕 난리를 피웠었다. 결국, 곽승재가 짜증을 내면서 그들을 밖으로 내쫓았다.곽승재는 심지어 고은서더러 가만히 있으라고 경고까지 했다. 안 그러면 고은서가 백유미를 다치게 한 죄까지 물을 거라고 하면서...“은서 씨가 여기에는 웬일로 왔어?”백유미의 목소리에 고은서는 정신을 기억에서 되찾았다
‘그래서 곽승재는 백유미한테 주려던 귀걸이를 나한테 준 것이 아니라 귀걸이를 2개 사사 나랑 백유미한테 각각 하나씩 준 거네?’이에 고은서는 가슴이 턱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유미 씨, 귀걸이가 참 이쁘네.”고은서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런가?”백유미는 귀걸이를 쓱 만지고는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선물 받은 건데 내가 꽃 중에서 난초를 제일 좋아한다는 것을 그 사람이 기억할 줄 몰랐어.”“이 꽃은 순결하고 고아한 것이 유미 씨와 너무 잘 어울려.”고은서는 칭찬을 한마디 하고는 말길을 돌렸다.“마침, 나한테도 비슷한 귀걸이가 있는데 가격대를 찾아보니 대략 4천만 원이었어.”“그래?”백유미는 생각지 못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승재도... 아니, 내 말은 은서 씨도 난초를 좋아해?”“내가 좋아하고 말고는 중요하지 않아. 조금 전 유미 씨의 말뜻은 승재 오빠가 이 귀걸이는 선물해줬다는 건가?”백유미는 여전히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었으며 승인하지도, 부인하지도 않았다.고은서가 입을 열었다.“만약 승재 오빠가 선물해 준 거라면 부디 이제는 돌려줬으면 해.”이 말에 백유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이에 고은서는 우아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나랑 승재 오빠는 부부 사이잖아. 오빠가 쓴 돈도 다 우리 부부 공동재산에서 나간 건데 오빠가 내 허락도 없이 4천만 원짜리 선물을 유미 씨에게 줬다니. 그래서 지금 유미 씨가 그걸 나한테 다시 돌려주든지 아니면 내 몫만큼 절반 값 2천만 원을 돌려주든지 해.”백유미는 당장에서 굳어져 버렸다.백유미는 그 귀걸이를 산 사람이 자기라는 것을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말해줄 리 절대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그래서 백유미는 자기가 고은서와 비슷한 귀걸이를 차고 있는 것을 보면 고은서도 분명 자신의 귀걸이를 떠올릴 것으로 생각했다.만약 자기의 귀걸이가 곽승재에게서 선물 받았다는 것을 티 내면 고은서는 기필코 기쁨의 절정에서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백유미는 생각하였다.‘이렇게 되면
“...”백유미는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고은서가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백유미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고은서는 이제 더는 쉽게 자극받지 않았다. 과격한 행동을 하는 건 더욱 말할 것 없었다.‘승재가 요새 은서 씨한테 태도가 크게 바뀐 것도 이것 때문인가? 은서 씨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거지? 도대체 그녀에게 아이디어를 내주는 사람이 누구지?’백유미는 잠시 생각하더니 성아연에게 전화를 걸었다.“당신이 무슨 방법을 쓰든 반드시 고은서와 절친 관계를 다시 회복해야 해요.”백유미는 전에 자신이 고은서를 과소평가했기에 지금 이렇게 피동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백유미의 곁에 사람을 안배해 놓아 수시로 그녀의 움직임을 파악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은서는 아주 대범하게 2천만 원을 박지연에게 보내주었다.[네가 어제 병원에서 자선 단체를 만들려고 한다고 얼핏 말했었지? 내가 2천만 원 기부할게. 익명으로.][은서 미인님 고마워. 넌 어떻게 사람도 이쁜데 마음씨도 이쁘냐? 넌 꼭 복 받을 거야.][알랑방귀 그만 뀌고, 오늘 같이 밥 먹자면서. 몇 시에 볼까?][미안해, 미안해. 오늘 시어머니가 갑자기 친척 집에 같이 가자고 해서 시간이 안 될 거 같아. 다음에 보자.]박지연의 시가댁 난장판에 비하면 고은서의 시댁은 별로 근심할 것이 없었다.고은서는 박지연에게 몇 마디 빈정거리고는 허 교수의 사무실로 찾아가서 순조롭게 그를 만났다.고은서의 생각을 들은 허 교수는 오히려 조금 의외였다.“판수의 백 이사님이 방금 저한테 약품 사용 상황에 대해 알아봤는데 곽씨 사모님이 또 이렇게 대리권에 관심을 보이시네요. 혹시 곽 대표님이 두 사람을 따로 보낸 건가요?”“제가 대리권을 갖고 싶은 건 온전히 제 개인 뜻이에요. 곽 대표와 전혀 상관이 없어요.”고은서는 웃으며 말했다.허 교수는 고은서가 또 곽승재와 성질을 부리는 것인 줄 알고 그녀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곽씨 사모님, 솔직히 말해서 이건 어찌 됐든
고은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멀지 않은 곳에서 송민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송민아와 고은서는 깜짝 놀라며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송민준이 사무실 문 앞에 서서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고은서는 순간 어색함이 밀려왔다. 남의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함부로 만진 데다 지어는 내용까지 훔쳐보다가 주인에게 딱 걸렸으니 말이다.얼굴이 확 붉어진 고은서가 입을 열려는 순간, 송민아가 먼저 물었다.“오빠, 오빠 컴퓨터에 왜 지난번 은서와 여시은 씨가 물에 빠진 영상이 있는 거야?”송민준에게 사과하려는 고은서의 말을 끊은 채 송민아는 재차 추궁했다.“누구한테서 받은 거야? 왜 나한테는 말도 안 해줬어?”고은서 역시 궁금했기에 민망함을 뒤로 한 채 조용히 답을 기다렸다.송민준은 차분히 걸어와 영상을 끈 뒤 담담히 물었다.“민아야, 누가 내 컴퓨터를 함부로 만져도 된다고 허락했어?”송민아도 민망하긴 마찬가지였던지라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그냥 비밀번호가 맞나 확인해보려다가... 미안해. 이 일은 나중에 사과할게. 우선 이 영상 어디서 난 건지부터 말해봐.”송민준은 고은서를 보며 입을 열었다.“은서야, 지난번 곽 대표가 농장 사고를 수사한다는 말을 듣고 나도 사람을 시켜 조사해 봤어. 마침 그날 농장에 있던 관광객이 풍경 촬영 중 우연히 사고 장면을 찍어두었더라고.”송민준은 그 관광객이 급한 일로 고향에 내려갔다가 최근에서야 해성시로 돌아와 그날의 사고 수사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설명했다.“그럼 왜 나한테는 안 알려줬어?”송민아가 불만스럽게 묻자, 송민준은 오늘 아침에야 받은 결과라고 답했다.“안 그래도 은서에게 연락하려던 참이었는데, 너희가 먼저 발견해 버렸네.”이 말을 들은 고은서는 이내 사과했다.“정말 미안해. 민준 오빠....”“비밀번호 푼 것도, 영상 연 것도 나야. 뭐라 할 거면 나한테 해.”송민아가 의리 있게 나서자, 송민준은 의자에 앉아있는 여동생을 흘깃 보며 받아쳤다.“요즘 부모님께 칭찬만 듣다 보니
고은서는 아무리 두 사람이 남매라고 해도 상대방의 사무실에 들어와서 컴퓨터를 다치는 게 무례한 행위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송민아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말했다.“그냥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뭘?”고은서는 약간 어리둥절해 났다.“오빠가 하도 경각심이 높은 사람이라 폰이랑 컴퓨터에 다 비밀번호가 걸려있거든. 그리고 평소엔 손도 못 대게 한다니까. 그런데 내가 전에 몰래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걸 훔쳐보고 있었다는 것까진 모를걸. 그래서 혹시 사무실 컴퓨터도 같은 비밀번호인지 확인해 보려고.”‘이건 또 뭔 호기심이래?’“민아야, 그냥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개인 프라이버시와 연관된 일이잖아.”고은서가 그녀에게 주의를 주었다.그러나 송민아는 그녀의 말을 별로 개의치 않았다.“괜찮아. 내가 기밀문서를 찾아보는 것도 아닌데. 그냥 비밀번호만 확인해 보는 거잖아. 우리 둘 다 비밀로 하면 오빠도 영원히 모를 거야.”“...”고은서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송민아는 이내 비밀번호를 입력하기 시작했다.한 글자, 두 글자, 세 글자...“열렸어!”송민아는 흥분해 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칭찬하기 시작했다.“이러고 보면 내 시력하고 기억력이 다 어마어마하네.”“네네네. 세상 제일로 가는 시력과 기억력을 가지셨어요.”고은서는 이 상황이 어이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오빠가 조금 이따 곧 올 건데 얼른 다시 잠가. 발각되어서 욕먹지 말고.”“알겠어.”송민아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마우스로 이리저리 눌러 보았다.그러나 마우스가 손에 익지 않은 탓에 실수로 동영상 파일 하나를 클릭하게 되었다.갑작스레 재생된 동영상에 깜짝 놀란 송민아는 인츰 꺼버리려고 했다.그러나 그녀는 저도 모르게 동영상 내용을 보게 되었고 이내 황급히 고은서를 불렀다.“고은서, 얼른 와서 봐봐. 이거 우리가 갔던 농장 아니야?”‘송민준의 컴퓨터에 농장 동영상이 저장되어 있다고?’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의를 따지던 고은서는 모든 걸
“좋은 소식 기다릴게요.”고은서가 담담하게 웃어 보이며 답했다.송민아는 WOR에서 나오자마자 여시은에 관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입으로만 계속 아버지 도움을 받지 않는다고 하면서 좋은 아버지를 뒀다는 핑계로 다른 사람을 괴롭히려 드는 사람이 누군데. 우리가 WOR을 투자했다는 걸 분명히 알면서 찾아오는 이유가 뻔하잖아. 우린 안중에도 없다는 거겠지.”“네 말처럼 능력 있는 아버지를 배후에 두고 있는데 우리가 뭘 어쩌겠어. 게다가 그냥 알아보러 온 거라고 말한 사람을 내쫓을 수도 없잖아.”고은서가 웃으면서 그녀를 달랬다.“다 우리 아빠 탓이야. 여시은한테 지다니 너무 분해.”송민아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고은서는 그녀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우리가 굳이 아버지한테 의지해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 자아 발전에 중심을 두면 되지. 게다가 넌 훌륭한 오빠를 뒀잖아. 북성에서 ST그룹 송민준이라면 아마 모르는 사람이 없을걸?”송민아는 그 말을 듣자마자 이내 기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하긴. 오빠가 능력이 뛰어나긴 하지. 그보다 고은서, 우리 오빠 찾으러 가자. 오빠가 전에 꽤 괜찮은 프로젝트가 있다고 해서 내가 며칠 동안 떼쓰며 빌었는데 어제 겨우 나한테 넘기겠다고 했거든. 오빠가 마음 바꾸기 전에 얼른 가자.”“이미 약속한 일인데 괜찮지 않을까?“그럴 리가. 오빠가 이런 면에서는 엄청 까다로운 사람이거든. 높은 이익만 거두어들일 수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사인한다니까. 나중에 핑계 대며 모른다고 하면 나만 손해잖아. 그러니까 잔말 말고 얼른 가자. 지금쯤 사무실에 있을 거야.”송민아는 재촉하면서 고은서를 끌고 차에 탔다. 그리고 이내 기사한테 ST그룹 해성 지사로 가달라고 부탁했다.“미리 전화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고은서가 물었다.“아니. 그냥 쳐들어갈 거야. 그리고 가는 김에 밥도 한 끼 얻어먹어야지.”“...”고은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날 백유미가 송민준을 의심하고 있다고 했는데 곽승재도 확실한 증거
고은서는 소식을 듣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어제 금방 곽승재한테서 여시은도 게임 회사에 관심 있어 한다고 주의하라는 소릴 들었는데 오늘 바로 찾아온다고?’“여긴 무슨 일로 온 거래?”고은서의 물음에 송민아는 고개를 저었다.“잘 모르겠어. 비서랑 같이 온 것 같던데 보자마자 너한테 전하러 달려왔어.”“한번 나가 보자.”고은서는 송민아랑 책임자와 함께 여시은을 만나러 갔다.WOR 게임 회사 직원은 이미 그녀를 또 다른 접대실로 데려갔다.고은서가 들어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여시은과 비서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평소의 귀여운 옷차림 대신 여시은은 맞춤 정장을 입고 있었다.그러나 원래도 귀엽게 생긴 데다가 항상 천진하고 무구한 눈빛으로 사람을 대해서인지 정장이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어머, 은서 씨 아니에요. 여기에서 은서 씨를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여시은은 고은서를 보자마자 의외라는 듯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몰랐을 리가.’“여시은 씨는 여기에 무슨 일로 오신 거죠?”고은서가 직설적으로 물었다.그러자 여시은이 눈을 깜빡이면서 웃으며 입을 열었다.“요즘 WOR 게임 회사에서 개발하고 있는 게임에 흥취가 생겨서 더 자세히 알아보려고 찾아왔어요. 기회가 된다면 저도 사업 파트너 관계를 맺고 싶어서요.”여시은은 숨김없이 그대로 말했다.“WOR이 우리 유일에서 투자한 프로젝트라는 걸 알고 계실 텐데요.”옆에 있던 송민아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알고 있어요. 괜찮으시다면 유일과도 합작하면 되죠.”여시은이 미소를 유지하며 답했다.송민아는 화가 나긴 했지만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드러내고 반박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죄송하지만 우린 WOR 프로젝트에 관해서 아직 다른 회사와 합작할 생각이 없습니다.”고은서가 담담하게 말했다.WOR 책임자도 유일 투자 은행과 단독 계약을 체결한 터라 다른 회사와 합작할 의향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다.그러나 예상 밖으로 여시은은 전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고은서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아니.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아.”곽승재가 고개를 저으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고은서는 도리어 자기 아이디어가 인정받았다는 거에 내심 기뻐했다.곽승재는 GS그룹을 물려받을 때부터 엘리트라고 불리면서 많은 기사에 떴었는데 그의 인정을 받았다는 건 꽤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은서는 이어 곽승재와 여시은에 관해 더 자세히 토론한 후 시간이 늦어지자 먼저 가보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먼저 갈게. 나중에라도 일이 있으면 다시 연락해.”“은서야.”그러나 곽승재가 갑자기 그녀를 불러세웠다.“왜?”고은서가 머리를 갸우뚱하며 물었다.곽승재는 멈칫하더니 이내 말을 이어갔다.“배는 괜찮아?”“다 나았어. 전에 나한테 문자로 물어봤었잖아.”곽승재는 그녀가 조금 더 머물 수 있게끔 새로운 화젯거리를 찾고 싶었지만 차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잘 자.”“응.”‘이상하게 왜 저러는 거야?’고은서는 약간 의문이 들긴 했지만 더 머무르지 않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이튿날.고은서는 먼저 회사에서 긴급한 서류들을 처리한 후 송민아와 함께 WOR 게임 회사로 갔다.게임 회사는 전보다 더 밝고 넓은 곳으로 이사하였고 규모도 훨씬 더 커졌다.그러나 분위기만은 변함없이 활력이 넘쳤다.아무래도 젊은이끼리 자체로 팀을 묶어 제작한 게임이라 그들에게 있어서는 거의 자기 친자식과 다름없었는 존재였다.책임자는 고은서와 송민아를 보자마자 아주 열정적으로 맞이해 주면서 프로젝트가 잘 진행되고 있다면서 곧 테스팅을 진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테스팅이 순리롭게 진행된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출시도 가능했다.듣기만 해도 격동되는 순간이었다.책임자는 두 사람한테 얘기하면서 매우 흥분해 했다.송민아는 여러 가지 절차를 확인하러 가고 고은서는 책임자와 함께 접대실에 앉아 어제저녁 곽승재가 말했던 일에 관해 의논했다.“정말 이런 밑지는
곽승재는 고은서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다리에 덮을만한 담요 하나를 가져오면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해성이 기후가 좋기로 유명하긴 했지만 초겨울엔 날씨가 으스스했다.히터를 켜놓은 동시에 통풍을 위해 창문을 열어놓았기에 행여나 고은서가 추워할까 봐 걱정되었던 모양이다.“의사 선생님께서 따뜻하게 하고 다니랬잖아.”곽승재가 덤덤한 얼굴로 설명했다.‘그건 생리할 때 따뜻하게 하고 다니란 뜻이었는데.’고은서는 속으로만 중얼거릴 뿐 겉으론 티 내지 않고 담요를 다리에 덮었다.곽승재는 이내 그녀에게 따뜻한 물을 따라주었다.“좀 마셔.”그러나 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괜찮아. 목이 별로 마르지 않아서. 얼른 할 얘기나 해.”“그럼 따뜻하게 손에 쥐고 있어.”곽승재는 물잔을 강제로 그녀의 손에 쥐여주고서야 소파에 앉았다.“...”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담요를 덮고 따뜻한 물을 손에 쥔 채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손에 꽤 괜찮은 프로젝트 하나 있지?”고은서는 그의 물음을 듣자마자 표정이 엄숙해졌다.“응. 왜? 문제라도 있어?“여시은이 요즘 들어 유사한 프로젝트에 관심 있는지 연관 분야 사람들과 많이 접촉하고 있어.”고은서는 이미 여시은이 그럴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다.여시은이 회사를 설립한 목적 자체가 그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였기에 유일 투자 은행과 경쟁하려 드는 게 아주 정상적인 일이었다.“같은 업계에 있는 한 경쟁은 피할 수 없잖아. 예상했던 바야.”그러나 곽승재가 덤덤하게 설명을 보태었다.“투자한 게임 회사가 규모도 크지 않고 팀 내에 집안 배경이 뛰어난 사람도 없다며?”고은서는 멈칫하더니 이내 그의 뜻을 깨달았다.“지금 그 사람들이 여시은한테 수매 당해 우리 회사와의 계약을 해제하려고 할까 봐 걱정하는 거야?”곽승재는 고개를 끄덕였다.“투자 업계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 지 너도 알고 있잖아. 예상치 못한 일들이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어. 현재 게임 회사가 출시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
“은서야, 데려다줄게.”육현석이 차창 너머로 고은서를 향해 말했다.그러나 그녀는 사양했다.“고맙지만 커플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아서 사양할게요. 그리고 저도 차 가지고 왔어요.”그러자 육현석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그럼 운전 조심하고 집 들어가면 지연이한테 문자해.”“알겠어요. 절대 지연이 걱정시키는 일은 안 할 테니까 시름 놓으세요.”육현석과 박지연은 고은서의 재촉 하에 더는 머무르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고은서는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폰을 확인해 보았는데 곽승재가 얼마 전에 자신에게 전화한 걸 발견했다.마침 박지연과 함께 폰을 사물함에 넣은 채 한창 스파를 즐기고 있을 때라 전화벨 소리를 듣지 못했다.곽승재한테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바쁜지 한참이 지나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그녀는 더는 신경 쓰지 않고 라이트문으로 돌아갔다.마침 주차하고 차에서 내렸을 때 곽승재한테서 다시 연락이 왔다.“방금 화장실에 있어서 전화 못 받았어.”“무슨 일로 전화한 거야?”“여시은 투자 은행에 관해 얘기해줄 게 있어서 전화했어. 라이트문에 왔는데 네가 집에 없다고 해서 전화를 했던 거야.”“알겠어. 내가 당신 집으로 갈게.”고은서는 말하면서 엘리베이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엘리베이터는 이내 두 사람이 사는 층에 멈춰 섰고 고은서는 곽승재의 집 문을 두드렸다.이내 일상복을 입은 곽승재가 문을 열어주었다.금방 샤워했는지 그의 머리카락에는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돌아오는 길에 먼지가 좀 묻어서 샤워하고 옷 갈아입었어.”곽승재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자신의 현재 상황에 관해 설명했다.그는 전에도 약간의 결벽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원 별장에 있을 때도 몸에 먼지가 묻거나 이상한 냄새가 배면 꼭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거실로 걸어갔다.집 구조가 그녀의 집과 조금 달랐는데 거실이 좀 더 넓어 보였다.소파에 앉은 고은서는 갑자기 집에서 탄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부엌에서 요리라도 했어? 뭔가 탄 것 같은데.
곽승재가 요 며칠 바쁜 건 사실이었다.여시은의 투자은행이 곧 개업할 거라 준비할 일이 산더미였기 때문이었다.여재훈이 믿음직한 비서를 붙여줬지만, 사업에 생소했던 여시은은 여전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라 했다.곽현수는 이 틈을 타 곽승재에게 당분간 여시은의 회사에 가서 자리를 지켜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부탁대로만 해주면 GS 그룹 본사 복귀도 고려해 보겠다고 덧붙였다. 말은 부탁이었지만, 실상은 협박이었다.GS그룹으로 급히 돌아갈 필요는 없었지만 고은서와 함께 C선생을 잡아내고 여시은에 관해 조사하려거든 많은 시간과 수단이 필요했기에 곽현수와 다투면서 필요 없는 손해를 보는 걸 최대한 피면 하는 게 좋았다.곽현수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곽승재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게다가 여시은을 도우면서 가까이에서 그녀를 관찰하고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에 나쁠 것도 없었다.고은서는 곽승재한테서 미리 소식을 접한 덕분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그러나 고은서는 이 모든 내막을 그대로 박지연한테 알려줄 수 없었다.곽승재가 제안을 수락한 건 혹시 곽현수가 또 고씨 가문에 무슨 일을 꾸밀까 우려해서일지도 모른다고만 했다.“또라니? 고씨 가문에 해가 되는 조짐이 보였어?”박지연이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고은서는 지금까지 고국성 일을 꾸민 사람이 곽현수라는 사실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하지만 앞으로 곽승재와 자주 연락할 일이 생길 테고, 괜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이번엔 솔직히 털어놓았다.“곽승재의 아버지가 우리 둘이 재결합하는 걸 막으려고 일부러 우리 삼촌을 해친 거야.”“그럼 곽승재가 너랑 거리를 둔 것도 네 삼촌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였겠네?”비록 박지연 말처럼 쉽게 해결된 건 아니었지만 굳이 부인할 필요가 없었다.“그렇게 보면 돼.”박지연은 이내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럼 그 스캔들도 아버지의 눈을 피하려고 일부러 수습하지 않은 거야?”‘눈치 백단이네.’고은서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맞아. 모든 스
룸에서 유혜린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주 보기 싫으면 얼마든지 더 소란 피워 봐요. 좋기든 온 해성 사람들이 다 알게끔 일을 크게 만드세요. 저야 아이를 없애고 이혼하면 그만이에요.”조수연은 이내 흠 잡힌 사람처럼 조용해졌다.“아무튼 당신 아들도 전처만 좋아하잖아요. 출국한 지 이렇게 오래되도록 나한텐 전화 한 통도 없잖아요!”조수연은 기세만 수그러들었을 뿐 입으로는 전혀 지려고 하지 않았다.“지연이를 더 좋아하는 게 정상이 아니야? 효녀인 데다가 말도 곧잘 들어. 너와 달리 승준이도 잘 보살펴줬거든. 넌 집안일도 하지 않고 사람을 돌볼 줄도 모르잖아. 심지어 나와서...”유혜린이 안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조수연은 이내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바로 이때, 레스토랑 웨이터가 경찰을 데리고 룸 앞으로 다가왔다.고은서와 박지연도 더는 머물지 않고 자신의 룸으로 돌아갔다.“이곳에서 막장 드라마 한 편을 보게 되다니. 한때 유혜린을 그렇게 좋아하더니만 당하고 나니 또 네가 좋아 보이나 봐.”조수연이 조금 전에 했던 말이 떠오른 고은서가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반면 박지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그렇게까지 참고 견뎠는데, 그 정도 소리도 못 들으면 허무하지.”“정말 이혼하고 나와서 다행이야. 계속 참다가 활발하던 애가 우울증을 앓겠어.”고은서가 계속해서 투덜거렸다.“그런데 유혜린도 정말 만만하지 않던데. 똑같이 되갚는 거 봤어? 아무리 그래도 시어머니인데 서슴없이 내려치던데?”전에 주차장에서 만났을 땐 그저 기사에게 차로 데려가라고 했을 뿐이지 오늘처럼 직접 손을 대지는 않았다.유혜린은 조수연의 체면을 단 한 번도 고려해 준 적이 없었고 또한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해서도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정말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니까. 전생에 지연이가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어.’“다 조수연 업보지.”박지연이 차를 따르면서 말했다.“자기 아들이 뭐 왕이라도 되는 줄 알고, 아무 여자나 마음대로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