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현석의 말을 듣자, 곽승재는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그는 이혼이든 재혼이든 모두 저촉했다.한 달 전, 고은서가 이혼을 제기하던 그 날 밤, 곽승재는 분명 아무 느낌도 없었다.이혼하면 그만이고 걱정거리 하나가 줄어들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왜 한 달 만에 마음이 이렇게 이상하게 변한 거지?’“형?”반나절 동안 대답을 듣지 못하자 육현석은 곽승재를 귀띔했다.“아쉬울 게 뭐 있어.”곽승재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냥 결혼한 지 1년이 넘어서 나도 익숙해졌고 할머니도 은서를 마음에 들어 하니 굳이 이혼까지 갈 필요가 없다는 거지.”‘알겠다. 이 형 이혼하기 싫은 거 맞네.’“이혼해도 다른 사람이랑 재혼할 생각 안 해봤다는 거지?”육현석이 묻자 곽승재는 언짢은 태도로 말했다.“한번 다녀왔으면 됐지, 결혼해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다시 하겠어!”‘다행이다. 형이 형수님에 대한 감정을 잘 모르지만, 마음속에 다른 여자를 품고 있는 건 아니네.’육현석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형, 이혼하기 싫으면 형수님의 마음을 어떻게 되돌릴지 생각 좀 해 봐. 여자들은 아주 감성적이어서, 한 가지 일로 한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지만, 마찬가지로 한 가지 일로 실망해서 한 사람에 대한 마음을 바로 접을 수도 있어.”“실망할 게 뭐가 있어!”곽승재는 육현석의 자만한 말투에 기분이 언짢아졌다.어제까지만 해도 고은서는 곽승재를 생각해서 단은숙에게 그가 매운 걸 안 먹는다고 일깨워 주었다.그리고 고은서가 고은혜와 화장실에 말다툼할 때도 그녀는 곽승재가 다른 남자와 비교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한입 말했었다.곽승재는 무심코 자신의 옷깃과 넥타이를 정리하는 척하면서 아주 정교한 넥타이핀을 보였다.“이 핀은 은서가 어제 나에게 선물한 거야. 나한테 감정이 없는데 왜 이런 걸 선물해줘?”육현석은 넥타이핀을 관찰하더니 의혹을 제기했다.“이 핀, 형수님의 취향이 아닌 것 같은데?”“네가 은서한테서 선물을 받아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은서의 취향을 알아
“은서가 기분 나쁠 게 뭐 있어?”곽승재가 화를 내며 말했다.“은서가 곽씨 사모님의 신분으로 명운의 책임자를 들여보내서 그렇게 심각한 사고를 냈는데도 아무런 수습도 하지 않고 계속 술을 마시고 뉴스를 만들어 자기 소주를 광고했잖아. 내가 이 일로 은서를 탓하지도 않았고, 은서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뒀는데 여기서 뭘 더 해명해야 하는데!”육현석은 중점을 콕 집어냈다.“형수님이 뭘 했든 형이 상관하지 않고 다른 여자를 안고 나간 건 사실이지?”곽승재는 육현석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시급한 상황이라 은서를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건 사실이야. 근데 은서는 다친 곳도 없었잖아. 그런 사람을 알아서 집 가게 내버려 둔 게 뭐가 잘못됐다는 거야?”“...”육현석은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형의 이런 사고방식으로 어떻게 형수님의 마음을 되돌릴 건지... 갈 길이 너무 멀다.’“형, 형수님도 여자잖아. 연회에서 뜻밖의 사고가 생겼는데 아무리 다치지 않았다 해도 마음속으로 두려워했을 거야. 홀로 연회장에 남겨진 형수님의 기분이 어땠을지 생각해 본 적 있어? 당시 연회장에 얼마나 많은 GS 그룹 직원과 사업상의 파트너가 있었는데, 그들이 홀로 남겨진 곽씨 사모님을 비웃을 거란 생각은 안 해봤어?”이 말을 듣자 곽승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그는 곽씨 사모님의 술주정이라는 인기 검색어에서 고은서가 댄스 플로어에 서 있던 사진이 떠올랐다. 고은서의 작은 얼굴에는 쓸쓸함이 가득했고, 커다란 눈동자는 빛을 잃은 채 사람들 속에 홀로 덩그러니 서 있었다.게시물의 내용도 많이 지나쳤다. 무슨 외면당했네, 결혼은 억지로 끼워 맞춘 거네, 혼인에 금이 갔네 등이었다.그 당시 곽승재는 명운과 관련된 인기 검색어가 잇따라 올라오는 것을 보고 앞의 기사도 고은서가 계획한 내용이라고 생각했었다.근데 만약 그 술주정이라는 검색어가 고은서의 작품이 아니었다면, 그때 그녀는 정말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비웃음을 받았을 거라는 것을 곽승재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이렇게
“어젯밤, 곽승재 씨가 누나를 데리고 나가서 난감하게 하지는 않았죠?”주인혁이 물었다.고은서는 어젯밤에 곽승재가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을 안고 나갔다는 것을 생각하니 조금 머쓱해서 말했다.“네, 아무 일 없었어요.”“그럼 다행이네요.”이렇게 말하고서 주인혁은 더 말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주인혁이 곧 다가올 첫 시합을 앞두고 긴장하는 줄 알고 웃는 얼굴로 격려의 말을 몇 마디 전했다.그러나 뜻밖에도 주인혁은 아주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누나, 비록 제가 지금은 누나에게 도움이 될 수 없지만, 누나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다 지지해요.”고은서는 주인혁이 자신을 관심하고 있다는 걸 알고 마음이 따뜻해졌다.“인혁 씨, 걱정하지 마세요. 저의 일은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할 수 있으니까, 인혁 씨는 시합에만 집중하세요.”전화를 끊고 고은서는 복싱관에 도착하여 복싱 훈련과 주인혁이 가르쳐준 호신술을 한동안 연습했다.지금 고은서의 주먹은 더는 예전처럼 나른하지 않고 힘이 좀 강해졌다. 코치도 고은서의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칭찬할 정도로 그녀의 변화는 눈에 띄게 컸다.요즘 고은서는 잘 먹고 잘 자니까 체질이 많이 좋아진 게 확 느껴졌다. 그러나 몸무게는 여전히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고 겨우 두세 근밖에 늘어나지 않았다.‘기운이 좋아지고 얼굴색이 좋아지는 것만으로도 만족해. 조금 말라도 괜찮아.’연습을 마치고 고은서는 간단히 샤워한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녀가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복싱관 밖으로 나가려고 하던 찰나, 마침 복싱관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원지훈과 딱 마주쳤다.원지훈은 트리닝 복을 입지 않은 걸 보아하니, 고은서를 찾으러 전문 이곳에 온 모양이었다.“훈련하러 왔어?”고은서가 일부러 떠본 말에 원지훈이 대답했다.“오늘 훈련 없는 날이에요. 저는 누나와 옆 카페에 가서 커피 한잔하고 싶어서 온 거예요.”고은서는 웃으며 말했다.“커피는 됐고 볼 일이 있어서 날 찾으러 온 거라면 그냥 여기서 얘기하자.”원지훈은 휴게실을 가리키며
원지훈은 고은서의 미소를 보고 마음속으로 살짝 기뻐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누나, 저는 은혜 씨를 진심으로 좋아해요. 누나도 동생인 은혜 씨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거 아닌가요?”고은서는 원지훈의 번지르르한 말에 토할 것 같았지만, 그의 두꺼운 낯가죽을 비웃지도 않고, 그더러 자기 신세를 제대로 알라고 충고하지도 않고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지훈 씨, 이미 나의 혼인 상황을 잘 알고 있다면 내가 남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알겠네?”‘이럴 때는 어쩔 수 없이 곽승재를 방패막이로 써야 하네.’“그 누구도 남편에 대한 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어.”고은서가 덧붙여 말했다.원지훈은 이 말을 듣고 더 말하지 않았다.비록 백유미는 원지훈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고, 그더러 캐묻지 말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지훈이 스스로 검색해보지 않는다는 것은 장담할 수 없었다.원지훈은 곽승재가 고은서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은서가 자신을 이용해 곽승재에게 복수하는 동시에 고은혜에게도 상처 주려는 줄 알았다.어쨌든 원지훈은 자신이 그럴 조건이 된다고 여겼다.고은서가 또 입을 열었다.“맞는 말도 있긴 해. 나는 확실히 네가 은혜와 함께 있는 걸 보고 싶지 않아. 넌 은혜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못 돼.”이 말을 듣더니 원지훈은 얼굴색이 조금 변했다.“제가 어디가 못났는데요?”“해성에 사업하러 왔다는 사람이 일하려는 기색이 조금도 안 보이거든. 넌 그저 종일 먹고 놀기만 하면서 은혜의 주위를 맴돌고 있잖아.”고은서가 말했다.“지난번 주차장에서 너도 은혜가 승재 형부를 얼마나 숭배하는지 봤잖아. 그래서 난 은혜가 사업에 성공한 남자를 진정으로 좋아한다고 생각해.”고은서는 고의로 이 말을 꺼냈다.왜냐하면, 그녀는 전생에 단은숙에게서 고은혜의 남자친구는 집안도 좋고 사람도 잘나서 해성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약품의 대리를 맡고 투자도 받았다고 자랑하던 것이 어슴푸레 떠올랐다.이번 생에, 백유미는 아직 이
민시후는 건들건들한 말투로 대답했다.“왜? 곽승재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으니까 나에게 관심이 생기기 시작해?”고은서는 어이가 없어 허공에 대고 눈을 희번덕거렸다.‘방금 뻔뻔한 남자를 한 명 보냈는데, 여기에도 그런 사람 한 명 더 있네.’“걱정하지 마. 나 남자한테 관심 끊었어. 특히 너처럼 뻔뻔하고 자신감 넘치는 남자는 딱 질색이야.”“어구. 말투가 살벌한데?”“너랑 말장난할 시간 없어. 볼일이 있어서 전화한 거야.”“내 사무실로 와.”고은서는 익숙한 길로 민시후의 사무실에 도착했다.민시후는 여전히 껄렁껄렁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긴 다리를 책상 위에 얹은 채 핸드폰을 들고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익숙한 노랫소리가 들려 고은서는 민시후의 곁으로 걸어가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민시후는 고은서의 드럼 치는 동영상을 보고 있었다.고은서는 고의로 조금 전에 민시후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줬다.“민 도련님, 사무실에서 혼자 내 동영상을 보고 있었어? 설마 나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지?”이 말을 듣자 민시후는 조금도 화내지 않고 심지어 흥미진진하게 말했다.“사실 난 네가 곽 대표와 이혼하고 나랑 같이 있겠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있어. 어쨌든 넌 지금 무력도 좀 있잖아.”고은서가 말했다.“고맙긴 한데 난 널 받아들일 수 없어.”민시후가 물었다.“내가 곽 대표보다 못한 게 뭐가 있는데?”고은서가 대답했다.“너무 뻔뻔해서 싫어.”“나중에 너도 깨닫게 될 거야. 이게 내 장점이라는 것을.”민시후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말했다.“말해 봐. 무슨 일로 이렇게 급하게 날 찾아온 건데?”고은서는 핸드폰을 꺼내 그 안에서 자료 하나를 찾아냈다.“이 자료 한번 봐. 눈에 익지 않아?”민시후는 자료를 힐끗 보고 말했다.“이건 곽 대표가 투자하던 그 약물 연구소 아니야?”고은서가 물었다.“너 예전에 일부러 날 데리고 승재 씨와 관계자가 밥 먹는 자리에 나가서 난동을 부렸던 건 이 프로젝트에 관심 있어서 그랬던 거 아니야
민시후는 고은서의 계획을 듣고 반대하지 않았다.“왜 이유 없이 이런 계획을 세웠는데? 그 사람에게 원한이라도 있어?”고은서는 대답하지 않고 도리어 물었다.“아무 이유 없이 한 사람이 싫으면 안 돼?”민시후는 고은서를 잠깐 주시하더니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당연히 되지. 게다가 이 계획이 아주 마음에 들어. 네가 밑밥을 깔지 않고 나에게 도움을 청했어도 대답했을 거야.”고은서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그럼 민 도련님의 관대한 마음에 감사드리며, 저는 이만 기획안을 작성하러 들어가 볼게...”“잠깐만, 나 요구할 게 하나 있어.”민시후가 고은서를 불러 세우자 고은서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무슨 요구?”민시후는 살짝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반응이 왜 그래? 내가 설마 진짜로 너에게 관심이 있겠어! 일이 끝나면 드럼 치는 거 한번 보여줘.”“거절해도 돼?”“안 돼.”민시후는 퉁명스럽게 말했다.“고은서 씨, 나 바보 아니거든. 당신은 나에게 두 가지 일을 부탁했으면서, 내 작은 부탁 하나도 못 들어줘?”“...”지금 민시후의 처지에서 볼 때 허 교수의 프로젝트는 확실히 안전한 투자 항목이 아니고, 고은서도 당분간은 제대로 설명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그러자.”‘드럼을 한 토막 치는 게 뭐 큰 대수라고. 한다면 하는 거지.’...곽승재는 특별히 저녁 시간을 골라 집에 돌아왔지만, 집안에서 고은서의 그림자를 보지 못했다.이미숙은 곽승재에게 알렸다.“도련님, 사모님께서 점심을 드시고 나간 후로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곽승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고은서는 요즘 밖에 나가는 날이 점점 많아진 것 같았다.예전에 곽승재가 언제 집에 돌아오든 고은서는 음식을 갖추고 그를 기다렸다.그러나 지금 고은서는 곽승재보다 더 늦게 들어왔다.“도련님, 오늘 사모님께서 일어나셔서 저에게 잠옷에 관해 물었습니다.”이미숙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곽승재는 안색이 변하지 않은 채 말했다.“알겠어요.”그는 머릿속
‘이 사람 문제 있는 거 아니야? 예전에 내가 일부러 민소매를 입고 그의 앞에서 얼쩡거릴 때는 쳐다보지도 않더니, 지금 내 허리를 살짝 부추기였다고 이렇게 뜨거운 눈빛을 발사하다니.’고은서는 생각할수록 화가 나서 곽승재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곽승재는 그녀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품속의 사람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너 뭐 하는 거야!”고은서가 화를 내자, 곽승재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말했다.“지난번 GS 그룹의 파티에서 내가 먼저 떠나가서 네가 기분이 안 좋았어?”지금 두 사람의 자세는 아주 애매하고 이상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손을 애써 치우며 말했다.“먼저 날 놔줘!”곽승재는 여전히 그녀를 끌어안고서 말했다.“내가 묻는 말에 먼저 대답해.”곽승재가 자기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걸 보고, 고은서는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런 적 없어. 이제 됐어?” 고은서의 말투는 매우 차가웠고 눈빛에는 귀찮은 기색이 분명했다.분명 집 문을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활짝 웃고 있었다.곽승재는 짜증이 치밀어올라 고은서를 놓아주고 냉랭하게 말했다.“고은서, 다시 생각해 봐. 네가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면 지금 이런 반응을 보였을까?”“내가 기분이 나빴든 말든, 그게 너에게 중요하기나 해?”고은서는 호통치며 말했다.“너 요새 너무 한가해서 병났어? 그게 언제 일인데 왜 인제 와서 갑자기 내 기분을 묻고 난리야? 날 곤란하게 하는 게 그렇게 재밌어?”시간이 아무리 오래 지났다 해도 설명하고 넘어가야 할 건 설명해야 한다. 이는 곽승재가 육현석에서 받은 충고였다.곽승재는 얇은 입술을 살짝 오므리고는 차가운 말투를 조금 줄이고 말했다.“그날 밤, 이런저런 일을 급하게 처리하느라 널 미처 돌보지 못했어. 내가 생각이 짧았던 거 같아. 할머니께서 네가 줄곧 운호에 가서 온천욕을 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이번 주 토요일 우리 회사에서 마침 그곳에서 단체워크숍을 진행해. 같이 가지 않을래?”이건 곽승재가 처음으로 성실한 태도로 고은서에게
고은서는 이미숙에게 설명해 주기 귀찮았다.“저는 바빠서 이만 올라가 볼게요.”말을 마친 뒤 고은서는 위층으로 올라갔다.곽승재와 마주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은서는 노트북을 들고 옆에 있는 객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최대한 빨리 기획안을 만들어내고 싶었다.몇 시간 동안 바쁘게 정리했지만, 고은서는 아무래도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어찌 됐든 직접 가서 상황을 알아보지 않았으니 구체적인 수치를 들 수 없었으며 만들어낸 기획안도 어딘가 이상했다.내일 허 교수의 연구소에 찾아가 봐야 하나 생각하던 때, 고은서는 갑자기 머리 위에 그림자가 지는 것을 느꼈다.고개를 들어보니 곽승재가 그녀의 곁에 서 있었다.고은서는 노트북을 닫으려고 했지만, 곽승재는 이미 내용을 내다보고 입을 열었다.“너 왜 허 교수 연구소의 자료를 정리하고 있어?”곽승재가 이미 본 이상 이 일은 어차피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안 고은서는 자기 생각을 말했다.“나는 이들의 약품이 아주 시장성이 있다고 봐. 그래서 약품 대리권을 나한테 넘겨주기를 바라는 중이야.”“너한테?”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왜 갑자기 이런 것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거야?”고은서가 대답했다.“당신이 투자했다는 건 이들이 연구해 낸 약품이 전망이 있다고 믿는다는 소리잖아. 그러니 내가 관심을 두는 것도 이상하지 않잖아.”곽승재는 고은서를 힐끔 보고는 말했다.“허 교수 쪽의 상황은 네가 생각한 것처럼 간단하지 않아. 넌 뭘 보든, 한 발 끼어들려고 하지 좀 마.”고은서는 곽승재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는 고은서가 일부러 자기를 화나게 하려고 그의 프로젝트에 끼어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아무튼, 난 이 대리권을 꼭 손에 넣어야겠어.”고은서는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었다.“내 돈줄 막을 생각하지 마!”곽승재는 조금 참으며 말했다.“새로운 약품이 아직 시장에 나오지도 않았어. 미래가 어떻게 될지 누구도 장담 못 해. 만약 돈줄이 아니면 넌 어떻게 할 거야?”“괜찮아. 만약 돈줄이 아니라도
전화기 너머의 원지훈은 이전의 가식적인 태도를 버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뭘 원하는 건데요?”고은서는 원지훈의 회사가 파산 직전에 놓여 며칠 사이 끊임없이 악재가 퍼져나가며 파장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백유미도 그 사실을 알고 원지훈을 추궁해서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있었겠지. 아니면 원지훈이 이렇게 빨리 결정을 내릴 리 없어.’어차피 협력할 사이라면 더 이상 목적을 숨길 필요도 없었다.고은서가 태연하게 말했다.“간단해. 어머니를 백유미 집 가정부로 보내서 그쪽 상황을 언제든지 보고하게 해. 너는 백씨 가문 회사로 출근하며 내가 원하는 대로 협조해 주면 돼.”지난 생에서 백유미는 고은서를 정신병원에 보내 위암에 걸리게 했을 뿐만 아니라 원지훈을 시켜 고은혜의 인생을 망가뜨리고 조씨 가문을 파산시켰다.이번 생에서 고은서는 백유미가 같은 대가를 치르도록 할 작정이었다.원지훈이 백씨 가문 회사에 들어가면 그녀와 내외로 힘을 합칠 수 있을 것이다.범가온이 백유미의 가정부가 되면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백유미의 풍족한 생활을 지켜보며 분노와 질투심이 일것이다.범가온은 같은 고향 출신인데 왜 백씨 가문은 그렇게 잘나가고 자신은 하찮은 가정부 노릇을 하는가에 대한 불만을 품을 것이다.고은서는 자신을 2년 넘게 괴롭혀 온 범가온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원지훈에게 일정한 힘이 있으면 범가온은 어떻게든 원지훈을 통해 백유미가 누리던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할 것이다.전생에 범가온 모자가 괴롭히던 수단을 생각해 보면 백유미가 그들의 손에 떨어지는 순간 생지옥을 맛보게 될 것이 분명했다.고은서는 단지 받은 대로 돌려주는 것뿐이었다.고은서의 요구를 들은 원지훈은 냉소를 띠며 말했다.“당신과 협력하면 백유미와 틀어질 텐데 이런 상황에서 백씨 가문 회사에 들어가는 게 가능할 것 같아요?”고은서도 웃으며 답했다.“그건 지훈 씨가 해결해야 할 문제지. 이렇게 작은 일
“하지만 아주머니가 상황을 아시고 나서 성씨 일가에 찾아가 크게 소란을 피웠어. 성씨 일가 사람들도 화가 나서 경찰을 부를 뻔했어.”유성준이 말하자 고은서가 웃었다.단은숙의 집안 형편은 좋지 않았다. 그녀는 자녀가 많은 집안에서 자라 어린 시절부터 친가에서 사랑받지 못했다. 고국성과 결혼하면서 인생이 조금 나아졌지만 이기적이고 인색한 면은 변하지 않아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면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었다.이제 성아연에게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어쩌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말이 이 상황에 어울릴지도 몰랐다.세무 문제로 속이 답답했지만 단은숙이 성아연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는 것은 큰 수확이었다.“회사에서 모든 세무 자료를 자진 제출했으니 며칠 후 구체적인 결론이 나올 거야. 우리는 결과가 나온 후 사건의 전말을 외부에 설명하며 영향을 최소화할 생각이야.”유성준이 말했다.“고마워요, 오빠.”고은서는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고은서의 미소를 보며 유성준도 미소를 지었다.“MQ에 들어왔으니 나도 MQ 일원이야. 이런 걸로 고마워할 필요 없어.”“그래도 고생 많으셨잖아요. 오빠, 주스로 건배해요.”고은서가 유리잔을 들었다.유성준도 잔을 들고 그녀와 가볍게 부딪쳤다.고은서는 음료를 마실 때 어디선가 자신을 보고 있는 시선을 느꼈다.고개를 돌려봤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식사 후, 고은서는 유성준과 MQ의 현재 상황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성준 오빠, 지난 번에 MQ에 문제가 많다고 하셨잖아요. 해결 방안 있을까요?”유성준이 논리정연하게 답했다.“MQ는 향수를 주력으로 하는 만큼 이 방향을 계속 유지하면서 새로운 향수를 개발해야 시장에서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야.”좋은 조향사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시장에서는 제품에 대한 품질 요구가 높아졌고 수많은 브랜드들이 쏟아져 나오며 경쟁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았다.“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조제한 향수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정원의 따뜻한 조명 아래 곽승재의 검은 눈동자는 깊고 차분했으며 마치 겨울밤의 바다처럼 차갑고 알 수 없는 느낌을 주었다.곽승재는 고은서를 한 번 들여다보고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발걸음도 멈추지 않고 식당으로 들어갔다.“사모님, 정말 우연이네요. 저도 대표님이랑 함께 식하라러 온 건데 여기서 다 뵙네요.”주민기는 바로 곽승재를 따라 들어가는 대신 고은서에게 말을 건넸다.고은서는 주민기가 그녀의 이혼 소식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여전히 나한테 예의 갖추는 건 아마 체면 때문이겠지.’“그러게요. 우연이네요. 다만 앞으로는 주 비서님께서 저를 이름으로 불러 주셨으면 좋겠네요.”고은서가 말했다.주민기는 시선을 내리며 대화를 잇지 않았다.“죄송합니다.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주민기가 자리를 뜨자 유성준은 고은서를 배려하며 물었다.“장소를 바꿀까?”고은서가 고개를 저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저 사람은 저 사람끼리 우리는 우리끼리 먹으면 되죠. 곽승재가 있는 자리를 매번 피할 수는 없잖아요.”유성준은 고은서의 결정을 존중했다.“그럼 연못가의 자리에서 먹자. 풍경 보며 먹으면 좋잖아. 곽승재 씨 일행은 비즈니스 이야기를 룸에서 할 테니 마주칠 일은 없을 거야.”“좋아요.”연못가의 풍경은 매우 아름다웠다. 넓은 연못에 다양한 색상의 연꽃과 수련이 자라며 조명 아래 그림처럼 드리웠다.유성준은 고은서의 의견을 묻지 않고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주문했고 신선한 과일 주스도 함께 주문했다.“오빠, 제가 좋아하는 음식을 어떻게 잘 아세요?”고은서가 놀라며 물었다.유성준이 웃으며 답했다.“네 인스타에서 봤어.”고은서는 가끔 인스타에 일상 사진을 올리곤 했는데 유성준이 그녀를 계속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놀라웠다.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민시후가 오이 만찬으로 곽승재를 골탕 먹인 사건이 생각났다.그녀와 곽승재가 룸으로 향하는 중, 곽승재는 그녀에게 뭘 좋아하는지 물었었다.선물하기 전 먼저 취향 조사를
다정한 민시후의 모습에 고은서는 등에서 땀이 났다.“나가서 밥 먹어.”“좋네. 같이 가자. 배고파 죽겠어.”민시후가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다.고은서가 살짝 피하며 말했다.“미안, 약속 있어.”민시후의 눈에는 실망이 가득했다.“누구랑? 하루 종일 못 봤는데 같이 있어 주면 안 돼?”민시후가 이러는 게 하루 이틀은 아니었다.가끔은 민시후가 두 얼굴의 사나이 같았다.옆에 있던 송민아의 쓸쓸한 모습을 힐끔 본 고은서는 전생의 자신이 떠올라 마음이 약해졌다.고은서가 민시후에게 말했다.“민아 씨는 시간 있대. 민아 씨랑 같이 밥 먹으면 되겠네.”민시후가 발끈했다.“고은서! 그게 무슨 소리야? 아직도 내가 송민아와 파혼하지 않을 거로 생각하는 거야? 지금 투정 부리는 거야?”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나 진짜 약속 있어. 먼저 갈게.”고은서가 자리를 뜨려 하자 민시후가 다시 한번 그녀를 불러세웠다.“아직 집 보러 안 갔지? 내일 같이 가서 보자.”송민아의 어두워진 표정을 보자 고은서는 미안하면서도 난감했다.고은서는 민시후의 말에 답하지 않고 주차장으로 향했다.잠시 후, 고은서는 유성준과 약속한 식당에 도착했다.식당이라기보단 관광지 같았다.넓은 식당 정원에는 연못이 있었고 연못 옆에는 작은 다리와 정자들이 있어 편안하면서도 자연적인 느낌이 가득했다.얼마 가지 않아 고은서는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유성준을 발견했다.유성준은 캐주얼한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훤칠한 모습은 시크함과 더불어 온화함도 느껴졌다.“성준 오빠, 오래 기다렸죠?”고은서가 미안한 표정으로 물었다.“아니야. 나도 금방 도착했어.”유성준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답했다.“회사에 데리러 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빠듯하더라고.”“괜찮아요. 운전하면 금방이던데요.”“이거 받아.”유성준은 마술처럼 뒤에서 귀엽고 아기자기한 판다 인형을 내밀었다.고은서는 귀여운 인형을 건네받으면서도 정신이 멍해졌다.유성준이 웃으며 말했다.“할아버지한테서 들었어. 어릴
송민아가 헛기침하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이전에 병원에서 영양사 붙여주겠다고 약속했었는데 병원을 나가버리셔서 그럴 겨를이 없었잖아요. 그래서 그 비용을 현금으로 준비했어요.”봉투를 만져본 고은서는 안에 돈이 두툼하게 차 있는 것을 확인했다.천만 원은 족히 될 법했다.송민아는 고은서가 돈이 적다고 생각하는 줄 알고 조금 당황한 듯 말했다.“최근 오빠가 카드를 다 막아버려서 현금으로 준비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에요. 적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카드가 풀리면 나중에 더 줄게요.”고은서가 봉투를 돌려주며 단호하게 말했다.“괜찮아요. 민아 씨가 저지른 일도 아니니 굳이 보상해 줄 필요 없어요.”송민아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라며 물었다.“정말 절 믿으시는 거예요? 제가 한 건 아니지만 진숙희는 제 가정부이기도 하고 그 사람이 은서 씨를 해친 건 저 때문이잖아요. 혹시 제가 뒤에서 시킨 거라고 의심하지는 않아요?”고은서가 웃으며 답했다.“민시후가 그러더라고요. 민아 씨는 그럴 머리도 그럴 용기도 없다고요.”송민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댔다.“시후 오빠가 말하는 건 다 믿는 거예요?”송민아의 모습에 고은서는 자신과 민시후가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설명은 생략하고 말을 이었다.“어쨌든 민아 씨와 무관하다고 믿어요. 더 이상 할 말 없으면 돈은 챙기고 나가보세요.”하지만 송민아는 고은서에게 돈을 밀어주며 말했다.“받으세요. 은서 씨가 받아야 빚진 기분이 덜할 것 같아요.”고은서는 더 이상 거절하지 않고 봉투를 집어 들며 무심히 물었다.“가정부는 북성에서 민아 씨 따라 해성에 온 거예요?”송민아는 고은서가 왜 묻는지 모르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전부터 절 돌봐주시던 분이에요. 제가 해성에 온다고 하니 따라온 거죠.”“그럼 민아 씨 오빠도 가정부랑 꽤 친하겠네요?”고은서가 다시 물었다.“그건 아닌 것 같아요. 오빠는 따로 살고 있어서 제 집에는 거의 오지 않거든요. 근데 그건 왜 물어요?”송민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그냥 궁금
마음속으로는 불평을 내뱉었지만 잠시 생각하던 육현석은 이내 고은서의 번호를 눌렀다.“은서 씨, 주무실 준비 하고 계신가요?”육현석은 고은서가 자신을 차단할까 두려워 형수님이라 부르지 않았다.고은서는 답하는 대신 되물었다.“저한테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다소 차가운 고은서의 목소리를 들으며 육현석은 히죽 웃으며 말을 돌렸다.“별일은 없고 그냥 요즘 지연 씨가 어떻게 지내나 해서 궁금해서요.”아니나 다를까 인내심이 생긴 고은서가 되물었다.“지연이한테 무슨 일이 있을 게 뭐가 있나요.”육현석이 답했다.“며칠 전부터 연락했는데 받지 않더라고요. 오늘 연락해 보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던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지 궁금해서 여쭤보는 겁니다.”육현석은 온전히 고은서의 경계를 늦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박지연이 평소와 다른 듯하여 고은서에게서 상황을 알아보려 하는 이유도 있었다.“무슨 일이 있긴 한데 개인적인 일이라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하지만 지금은 거의 다 해결된 상태입니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육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속으로 어떻게 화제를 곽승재에게로 돌릴지 고민하고 있던 차에 고은서가 물었다.“지연이에게 관심을 가지는 걸 보니 혹시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예요?”“형수... 아니, 은서 씨. 지연 씨는 남편이 있는 사람입니다. 저희 사이에 그런 소문은 만들지 말죠.”육현석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저는 어차피 먹고 놀고 즐기기만 하는 사람이라 상관없지만 지연 씨에게 피해가 갈 까 두렵네요.”육현석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웃으며 말했다.“농담이에요.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 없어요.”“저는 심각한 사람이 아니에요.”육현석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자연스레 화제를 곽승재에게로 옮겼다.“형이랑은 다르죠. 형은 평소에도 도도하고 엄격하고 차가워서 사람들이 쉽게 다가가기 힘들다고 해요. 형 마음을 알 수 없다고도 하죠.”고은서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육현석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은서 씨, 조금 전 형한테서
육현석의 질문에 곽승재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곽승재는 비록 고은서와 이혼했지만, 언젠가는 그녀가 자신에게 돌아올 거라 믿고 있었다.‘은서는 날 많이 좋아했어. 오 년 동안의 감정을 어떻게 쉽게 잊겠어.’하여 곽승재는 그녀에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려 했다.그러나 이혼 후에도 곽승재에 대한 고은서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고 그를 볼 때마다 여전히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며 곽승재는 불안감이 밀려왔다.특히 유성준과 민시후가 그녀와 가까워지는 모습을 볼수록 마음이 조급해졌다.예전에 주려 했던 선물도 꺼내 들며 사과하고 앞으로 잘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고은서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화가 난 그는 고은서에게 자신도 다른 여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그래서 오늘 저녁 의도적으로 다른 여자를 데려와 그녀를 자극하려 한 것이었다.엘리베이터에서 고은서가 그에게 화낼 때 그는 화가 나기보다 오히려 그녀가 반응을 보인 것에 대해 미묘한 기쁨을 느꼈다.하지만 방에 들어선 후, 한참 동안 기다려도 고은서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곽승재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곽승재는 고은서가 이전처럼 이것저것 물어보고 그를 방에 들일 줄 알았지만 고은서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문을 열었다.곽승재는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그저 고은서가 체면 때문에 오지 못할 뿐 사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는 이미언을 위해 세면기기를 빌리러 왔다는 어색한 핑계를 댔다.곽승재는 여자의 이름조차 모르면서 고은서를 자극하기 위해 이미언이라는 이름조차 지어냈다.고은서는 화가 났지만 곽승재가 다른 여자를 끼고 있어서가 아니었다.또한 과일 서빙을 온 직원 덕분에 고은서가 문을 빨리 연 이유도 자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곽승재였다.다른 사람을 돌려보낸 뒤 고은서는 또다시 도망칠 기회를 엿보았다.곽승재는 고은서에게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었다.하지만 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안고 향기를 맡은 순간 그는 저도 모르
고은서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치솟던 욕망이 차갑게 식어버렸다.그는 고은서를 끌어안던 힘을 서서히 풀며 물었다.“고은서, 네 눈에 나는 그렇게 형편없는 존재야?”“내가 틀린 말 했어?”고은서는 곽승재의 품에서 벗어나며 몇 걸음 물러섰다.그녀는 그와 거리를 두려는 듯 뒷걸음질 쳤다.“유성준과 민시후가 나랑 친하게 지내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네 소유욕이 발동한 거잖아. 잊지 마. 우리는 이미 이혼했어. 네가 더 이상 나한테 간섭할 자격은 없어. 그리고 곽승재. 널 사랑한 적 있다고 해서 그게 내 죄는 아니야. 그걸 핑계로 날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으면 좋겠어.”싸늘한 고은서의 눈에는 분노로 가득했고 큰 눈망울에는 더 이상 그를 향한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마치 그가 그녀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이 순간, 곽승재는 처음으로 짙은 좌절감을 느꼈다.평생 모든 일이 순조로웠고 작은 장애물 정도는 쉽게 넘기곤 했는데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이제 네 발로 나갈 건지 경찰 불러서 끌려 나갈 건지 네가 선택해.”고은서가 문을 가리키며 단호히 말했다.그녀가 경찰을 부르는 것은 두렵지 않았지만 고은서의 질책 어린 말에 곽승재는 더 이상 그 자리에서 고집부릴 수는 없었다.곽승재는 입술을 깨어 물며 뒤돌아 나갔다.문가에 다다르자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곽승재의 마음속에는 잠시나마 기대가 떠올랐다.하지만 이내 등 뒤로 들려오는 건 고은서가 문을 잠그는 소리였다.곽승재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늦은 밤, 육현석은 곽승재의 연락을 받았다.“형,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육현석은 낮에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저녁에 연락 온 곽승재가 신경 쓰였다.전화기 너머에서 곽승재는 잠시 침묵했다.“형, 왜 아무 말도 없어?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육현석이 의아해하며 물었다.곽승재는 한숨을 내쉬며 저녁에 있었던 일을 간단히 설명했다.“뭐라고? 형수님을 자극하려고 다른 여자를 데리고 형수님이 있는 호텔에 간 거야?”육
고은서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래, 도련님. 안 그래도 짧고 귀한 밤, 어서 기다리고 있는 미녀한테 가. 여기서 괜히 애먼 사람 붙잡고 있지 말고.”“붙잡긴 누가 붙잡는다고 그래?”여자는 고은서의 말을 듣자마자 반말하며 말했다.“네가 일부러 승재 씨 유혹했으니 이쪽으로 온 거겠지. 순진한 척하지 마. 여우 같은 것.”고은서는 어이없어서 웃음이 나왔다.“거기 아가씨. 눈은 장식이 아니에요. 제발 눈 똑바로 떠서 보세요. 지금 누가 힘으로 제압하고 있는지.”“네 수작일 뿐이잖아! 신경 안 쓰는 척, 무관심한 척하면서 승재 씨 소유욕을 자극하는 거지. 변변치 않은 수준은 아니네.”“꺼져!”고은서가 다시 받아치려는 순간, 곽승재가 싸늘하게 내뱉었다.“승재 씨…”곽승재의 싸늘한 말투에 여자는 금방 눈물을 글썽였다.“네 물건 챙겨서 이 호텔에서 꺼져. 다시 내 눈에 띄지 마.”곽승재는 싸늘하게 말하고는 문을 닫았다.피처 피하지 못한 여자는 어디엔가 부딪혀 고통에 찬 신음을 냈다.곽승재가 눈살을 찌푸린 순간, 고은서는 재빨리 무릎을 들어 올렸다.하지만 아쉽게도 곽승재를 맞히지는 못했다.빠르게 반응한 그는 얼른 뒤로 물러나 고은서의 기습을 피했다.하지만 그 순간 곽승재가 그녀의 손목을 잡은 힘이 느슨해졌다.고은서는 얼른 힘주어 간신히 손을 뿌리쳤다.어깨를 돌볼 겨를도 없이 고은서는 곽승재를 밀치고 도망치려 했다.그러나 곽승재의 스피드를 과소평가한 그녀는 두 발자국도 도망치지 못해 다시 곽승재의 품에 잡혔다.“이거 놔!”화가 난 고은서가 팔꿈치로 그의 가슴을 쳤다.곽승재는 낮게 신음을 흘리면서도 그녀를 놓지 않았다.그는 오히려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고은서, 네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따뜻한 곽승재의 숨결이 목덜미에 닿자 고은서는 오싹함을 느끼며 거칠게 몸부림쳤다.“움직이지 마. 내가 무슨 짓 할지 장담 못 해.”곽승재가 거칠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고은서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저항하려 했지만 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