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재는 자신을 경계하는 고은서를 보면서 입술을 달싹이다가 끝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퀸을 안고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고은서는 어이없어졌다.‘대체 왜 저러는 거야? 정말 머리에 문제라도 생긴 건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마재경과 알콩달콩하더니 동거할 집을 따로 구한 거 아니었어? 왜 계속 여기에 있는 건데? 정 안되면 예원 별장으로 가면 될 것을 왜 굳이 여기에 있는 거냐고?’고은서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집으로 들어갔다.그러나 차마 퀸이 굶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고은서는 이미숙한테 우유를 대신 가져다주라고 말할 예정이었는데 마침 그녀가 집에 없었다.전화해 물어보니 장보고 잃어버리고 안 가져온 채소가 있어서 다시 가지고 가는 길이니 배고프면 국을 먼저 먹고 있으라고 그녀에게 말했다.고은서는 고민 끝에 우유를 들고 곽승재의 집 문을 두드렸다.곽승재는 퀸을 집 안에 두고 혼자 문을 열었다.“무슨 일이야?”고은서가 안을 들여다보니 퀸이 배고픈 탓인지 계속 물을 할짝거리고 있었다.“우유 달라며!”그녀가 우유를 건네주며 말했다.그러나 곽승재는 아주 단호하게 거절했다.“필요 없어. 이미 사람 시켜 사료랑 우유를 가져오게 했어. 아마 곧 도착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일부러 이런다는 걸 알고 있었다.‘내가 방금 전에 거절했다고 본인도 나를 거절한다는 거야?’“싫으면 말고.”‘좋은 마음으로 우유를 가져다줬더니 찬물이나 끼얹고 난리야.’고은서는 씩씩거리며 뒤돌아 가려고 했다.그러나 곽승재가 갑자기 그녀를 붙잡고 집으로 끌고 들어가더니 벽에 밀어붙였다.그의 따뜻한 체온이 피부를 통해 느껴졌다.고은서가 벗어나려고 발버둥 쳐보았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탁하는 소리와 함께 우유도 땅에 떨어졌다.“곽...”고은서가 화를 내려고 하던 찰나 곽승재가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그는 미리 계획이라도 한 것처럼 한 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잡고 깍지를 끼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뒤통수를 잡고 진한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서로 숨결이
고은서는 그 일로 곽승재의 뺨까지 내리쳤었다.‘그러니까 내가 마재경을 해치려 할까 봐 다른 곳으로 옮겨준 게 아니라 내 말을 듣고 정말 라이트문에서 쫓아냈단 말이야?’곽승재는 고은서의 표정 변화를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기억났으면 계속해도 되지?”그는 고은서에게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고 또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곽승재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둘러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목을 부축한 채 방금전보다 훨씬 부드러운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또다시 숨이 막혀온 고은서는 부득이하게 고개를 들고 그의 키스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키스가 끝난 후, 고은서는 곧 질식할 것만 같았다.곽승재의 몸은 점점 더 뜨거워 났고 그곳도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이를 발견한 고은서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곽승재, 당신 정말 변태야?”그녀의 발그스름한 얼굴과 촉촉한 입술을 바라보고 있던 곽승재는 욕구가 억누를 수 없을 만큼 거세져 가는 것 같았다.“은서야, 난 그저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정말 곧 터질 정도로 네가 그리웠어...”곽승재는 말하면서 또 그녀에게 입을 맞추려 했다.그러나 고은서는 더는 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던지라 이내 고개를 홱 돌렸다.“잊지 마. 우리 이미 이혼한 사이야. 게다가 당신도 새로운 여자가 생겼잖아. 선 넘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고은서는 애써 덤덤한 척하면서 말했다.곽승재는 그녀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고은서의 말에 자극을 받았는지 아니면 무언갈 떠올렸는지 그는 이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눈빛도 점점 어두워졌다.마침 퀸이 뒤에서 야옹거리는 바람에 고은서는 그 틈을 타 곽승재를 밀어냈다.“얼른 놔.”그는 고은서를 잡고 있던 손의 힘을 풀면서 뒤로 한발 물러서더니 끝내는 그녀를 놓아주었다.고은서가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할 때 뒤에서 곽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 이건 네가 나한테 진 빚이야. 난 그저 마땅하게 돌려받을 뿐이고. 절대 집착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어.”고은서는 그의 말에 응
발신자는 다름 아닌 송민준이었다.“민준 씨, 무슨 일이죠?”“민아한테서 들었는데 새 폰을 거절했다면서요?”고은서는 이내 웃으면서 답했다.“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돼요. 그저 폰일 뿐인데 여분으로 둔 폰이 하나 더 있어서 그냥 그 폰을 쓰면 돼요.”“제가 폰에 손이라도 댔을까 봐 걱정되어서 그러는 건가요?”송민준이 갑자기 예상치 못한 질문을 투척했다.고은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확실히 걱정되긴 했지.’그녀는 지금까지도 송민준이 어떤 사람인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어떨 땐 위험하게 느껴지다가도 간혹 젠틀한 면을 보일 때도 있었다.그러나 폰만은 마음 놓고 받을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그런데 이렇게 직설적으로 물어보면 나더러 어떻게 대답하라는 거지?’“장난이에요.”고은서가 한참 고민하고 있을 때 송민준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폰은 거절했으니 다른 선물로 골라볼게요. 어떻게서든 제 고마움을 전달하고 싶어서요.”“민아를 봐서 도와준 건데 괜찮아요. 민아 오빠만 아니었더라면 아마 상관하지도 않았을 거예요.”고은서가 사실대로 말했다.“제가 민아 덕분에 살았네요. 시간 편할 때 민아도 불러서 같이 밥 한 끼 먹죠.”고은서는 흔쾌히 승낙했다.송민준은 이어 어젯밤에 도주한 세 사람이 이미 경찰에 잡혔는데 응당한 벌을 받게 될 거라면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고은서에게 전해주었다.전화를 끊은 후 텔레파시라도 통한 건지 이내 박지연한테서 영상통화가 걸려왔다.“누구랑 통화하고 있었어? 계속 부재중이라고 뜨던데.”고은서는 송민준이랑 통화하고 있었다면서 어젯밤에 있었던 일까지 다 그녀에게 알려주었다.박지연은 이내 걱정하면서 다친 곳은 없냐고 물었다.그녀는 괜찮다는 답을 듣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 진짜 절에라도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왜 자꾸 재수 없는 일만 생기는 거야?”“시도 때도 없이 이런 사고가 자꾸 생기는데 나도 왜 이렇게 재수 없는지 모르겠어. 보살님한테 빌어서 해결될 일이라면 네가 대신
고은서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깜짝 놀랐다.“정말 절에 가는 거야?”“당연하지. 마침 육현석도 시간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 같이 절에 가서 간절하게 빌고 주변에서 놀다 돌아오자. 일도 쉬면서 해야지.”박지연이 답했다.‘육현석도 같이 가는 거구나. 쉬는 게 아니라 그냥 데이트하러 가는 거겠지.’“난 굳이 두 사람 사이에 끼고 싶지 않은데.”“괜찮아. 너도 이젠 습관 될 때가 되지 않았니?”박지연이 웃으면서 말했다.“...”고은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녀는 박지연과 시간을 정한 후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그러나 뜻밖으로 곽승연과 마주치게 되었다.품에 퀸을 안고 있는 걸 봐서는 아마 곽승재 집에서 나온 듯했다.“언니! 언니도 여기 살아요?”곽승연은 그녀를 보자마자 무척 기뻐했다.‘따지고 보면 승연이를 못 만나지도 꽤 됐네.’곽승연의 상태는 전보다 훨씬 좋아졌는데 그녀를 보자마자 눈에 띄게 좋아하며 총총 달려왔다.“응. 승연이는 여기에 왜 온 거야?”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엄마가 오늘 바빠서 같이 못 있어 준다고 나갔는데 마침 오빠를 너무 오래 못 본 것 같아서 기사님 차에 오빠 찾으러 온 거예요.”곽승연의 말하는 속도도 전과 달리 많이 빨라졌다.마침 곽승재가 집에서 걸어 나왔다.그는 고은서를 보고 입술을 달싹이더니 끝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틀 전의 키스를 떠올린 고은서도 그한테 별로 인사하고 싶지 않았다.“승연아, 언니는 볼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그러자 곽승연이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언니, 어디 가는 거예요? 저도 따라가면 안 돼요?”고은서는 전에 편한 시간에 그녀를 데리고 놀러 가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다.‘아무튼 박지연이랑 육현석 두 사람과 나가는데 승연이를 데리고 가도 괜찮겠지?’“승연이 데리고 어디 갈 생각이었어?”고은서가 곽승재를 향해 물었다.“판주에 처리할 일이 생겨서 사무실에 데려가려고.”곽승재가 덤덤하게 답했다.‘굳이 휴식일에 동생을 데리고
고은서는 곽승재의 표정 변화를 눈치챘지만 그에게 더 설명해줄 생각은 없었다.고은서는 곽승연의 손을 잡아당기면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곽승재도 고은서에게 있어서 곽승연이 본인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쯤은 잘 알고 있었다.아마 누가 곽승연을 데리러 올지 물어도 고은서는 대답해주지 않을 것이다.곽승재는 그저 퀸을 품에 안은 채 우두커니 서서 고은서와 곽승연이 엘리베이터에 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언니, 오빠도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엘리베이터에 오르자 곽승연이 소곤대며 말했다.“아니야, 너희 오빠는 일이 바빠서 안 가고 싶을 거야.”이윽고 곽승연이 또 물었다.“언니랑 오빠는 다시 화해할 거예요?”곽승연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작게 웃고는 곽승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대답했다.“승연아, 언니가 말했지? 언니랑 승연이 오빠의 관계가 어떻든지 우리 둘 사이의 우정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다고 말이야.”곽승연은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어느새 엘리베이터는 1층에 도착했고 고은서는 곽승연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고은서는 데리러 온다던 박지연이 도착했는지 몰라 연락을 하려고 핸드폰을 꺼낸 찰나에 마침 검은색 차 한 대가 천천히 접근하는 것을 발견하였다.운전석에 앉아있는 사람은 송민준이었고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송민아였다.“짜잔! 놀랐지?”송민아는 냉큼 조수석에서 내려 고은서를 놀래줬고 덕분에 고은서는 어리둥절한 채 송민아에게 물었다.“여긴 어떻게 온 거야?”“어떻게 오긴, 당연히 너 데리러 왔지!”송민아가 해석을 덧붙였다.“지연 언니가 같이 참배하러 가자고 연락이 왔었는데 오빠도 시간이 빈다길래 같이 왔어!”알고 보니 박지연이 송민아도 함께 부른 것이었다. 고은서에게 한 가지 의문이 있다면 박지연이 남자친구를 챙기느라 자신을 챙기지 못할까 봐 송민아를 부른 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여긴 누구야?”송민아는 얌전하고 순한 곽승연을 보고 물었다.고은서는 웃으며 곽승연을 그들에게 소개해주었다.“승연이라고 해. 곽승재 여동생이야.”
고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아마 그럴 일 없을 거야. 곽승재 말로는 회사에 급히 볼 일이 있다고 그랬거든.”박지연은 흥하고 작게 콧방귀를 뀌었다.“제일 좋기는 오지 말았으면 해. 최근에 그 인플루언서랑은 아직도 안 헤어졌지? 오기만 해, 뭐가 됐든 내가 그 사람을 보고도 욕을 참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고은서는 작게 웃고 대답했다.“가자, 현석 씨가 표를 샀대.”육현석은 표를 손에 쥐고 다가왔고 송민준은 일행들에게 줄 물과 기도할 때 사용하게 될 향을 사 들고 다가왔다.“송민준 씨가 너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야?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귀한 쉬는 날에 우리랑 같이 절에 오는 고생을 찾아서 한다는 게 말이 돼?”박지연은 또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고은서는 박지연을 한번 흘기고는 대답했다.“그래, 네 말대로 지금 나한테 눈이 멀어서 다른 건 다 안중에도 없어서 내가 어딜 가든 다 따라오나 봐. 어떻게 좀 만족스러운 대답인가, 박지연 씨?”“...”박지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때마침 육현석이 다가온 덕분에 둘의 대화는 그쯤에서 마무리될 수 있었다.절은 엄숙하고 고요했으며 종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절에 들어서니 거대한 고목 몇 그루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들은 바에 의하면 이 절은 당나라 때부터 존재해왔다고 한다. 몇 번의 격변을 겪으며 예전만큼 성대하지는 못하나 여전히 그 명성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로 발길이 끊기지 않는 곳이었다.박지연과 육현석이 앞장섰다.송민아와 곽승연은 생각보다도 더 성격이 잘 맞는 것 같았다. 모든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고 심지어는 땅에 떨어진 은행나무 잎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둘이 딱 붙어 관찰하고 다시 걸어가곤 했다.그리고 고은서와 송민준이 제일 뒤에서 함께 그들을 따라갔다.고은서는 가장 영험하고 중생을 두루 보살핀다는 X신전에 도착해서 평안등 하나를 띄웠다.그러면서 타국에 있는 민시후가 무탈하게 수술을 마치고 얼른 몸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랐다.신전에서 나왔을 때 송민준이 고은
고개를 들어 곽승재의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과 아무런 감정도 없는 눈동자를 확인한 고은서는 그의 알 수 없는 어색함과 조금은 강압적인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고은서는 굳이 곽승재와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았다.“민준 씨가 말한 그대로야. 승연이가 민아랑 노는 걸 좋아해서 내가 내내 승연이 옆에 있을 필요가 없어진 것뿐이야.”곽승재는 묘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고은서의 말에 트집을 잡았다.“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말았어야지.”갑작스러운 곽승재의 태도에 고은서는 어이가 없다 못해 그가 일부러 시비를 거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고은서는 곽승재를 상대해주기도 귀찮아 퉁명스럽게 말했다.“미안, 내 잘못이야. 지금 당장 승연이를 찾으러 갈게.”말을 마친 고은서는 곧장 옆에 있는 사찰로 들어갔다.여시은은 눈을 두어 번 끔뻑거리고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곽승재에게 물었다.“곽 대표님, 왜 은서 화를 돋우고 그러세요!”곽승재는 고은서가 향한 곳을 바라보며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했다.“내가 승연이를 보러 가야겠어요.”곽승재까지 자리를 뜨자 사찰 앞에는 여시은과 송민준 둘만 남게 되었다.여시은은 송민준을 향해 웃어 보이며 물었다.“송 대표님, 아까 은서 머리카락에 붙은 나뭇잎을 떼주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은서의 마음을 사려는 노력이라고 봐도 되는 부분인가요?”송민준은 여전히 온화한 태도로 여시은의 말에 대답했다.“마침 눈에 보여서 도와준 것뿐이에요.”“듣자 하니 며칠 전에 송 대표님한테 작은 사고가 생겼다고 그러던데요, 게다가 상처도 입으셨다고요?”여시은이 계속해서 물었다.“제 부상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아요. 큰일이라면 저한테 무작정 시비를 걸다가 경찰에게 잡혀간 사람들에게나 생겼겠네요.”여시은은 작게 웃었다.“일부러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라면 골치가 아파도 싸죠.”여시은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송민아와 곽승연이 둘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승연아, 오빠가 지금 승연이 찾고 있는데 나랑 같이 오빠 찾으러 갈래?”여시은은 산뜻한 미
“...”그제야 고은서는 다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승연이가 아까까지 여기 있었는데 아마 민아랑 다른 곳에 갔나 봐. 내가 전화해서 물어보면 될 일이야!”말을 마친 고은서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을 때, 곽승재가 조롱하듯 말했다.“민시후가 가니까 이젠 송민준이야?”그 말에 고은서는 행동을 멈추고 곽승재를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그러는 넌 지금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그딴 걸 묻는 거지?”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낀 곽승재는 차분하게 대꾸했다.“고은서, 넌 정말 독한 사람이야. 사람을 다루는데 무서우리만치 인정사정없을 뿐만 아니라 손에 쥐고 있는 게 누구의 감정이든지 참 쉽게 휘둘러. 네가 놓고 싶을 때 놔버리면 그만이지.”“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고은서가 바로 반박했다.“너야말로 어제는 마재경을 옆에 끼고 다니더니 오늘은 시은이랑 보란 듯이 이곳에 찾아왔잖아. 네가 그러고도 나한테 뭐라 할 자격이 있냐고!”“은서야 넌 지금 곽 대표님을 오해하고 있어.”곽승재가 말문이 막혀 어버버 거리고 있을 때 여시은이 갑자기 튀어나왔다.여시은이 고은서에게 설명했다.“오늘 곽 회장님께서도 판주 투자은행에 가셨는데 곽 대표님께서 나갔다 올 거라는 걸 알게 되셨고 내가 심심해할까 봐 나랑 같이 나갔다 오라고 하신 거였어. 절대 은서 네가 생각하는 그렇고 그런 게 아니야!”고은서는 원래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는데 여시은을 보니 기분이 더할 나위 잡쳤다.고은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시은아, 마침 곽승재도 함께 있으니 이번 기회에 제대로 짚고 넘어갈게. 난 곽승재에게 일말의 감정도 남아 있지 않고 다시 결혼할 생각은 더더욱 없으니까 날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로 생각하지 않아도 돼!”그 말을 들은 여시은은 단 한 번도 둘 사이에 본인이 껴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해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은서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그렇구나. 그럼 시은이 너도 곽승재와 거리를 좀 두는 게 좋겠어. 나랑 곽승
곽승재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놀라움에 눈이 휘둥그레졌다.고은서는 백유미가 그동안 자신을 상대로 저질렀던 만행들이 모두 누군가의 지시하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백유미가 고은서는 이미 누군가의 표적이 됐다고 그토록 확신에 차서 말하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백유미는 겉으로는 내 아버지의 지시를 받고 우리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했지만 사실 또 다른 누군가의 지시를 받았어. 너와 너희 가문을 상대하라고 말이야.”곽승재가 말을 덧붙였다.고은서는 계속해서 곽승재에게 물었다.“이 모든 것도 다 백유미가 너한테 알려준 거야? 그래서 내가 진짜 위험해질까 봐 사람을 보내서 날 지켜보게 한 거고?”“말하자면 그렇지.”곽승재의 수심으로 가득 찬 눈동자에는 죄책감마저 엿보였다.“원래는 내가 먼저 그 사람을 찾아내서 네가 더는 위험하지 않게 해주고 싶었는데 너무 철저하게 숨은 탓에 현재로서는 그 사람에 대한 유리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지 않아.”고은서는 언제 이 모든 것들을 알게 되었냐고 곽승재에게 물었다.곽승재는 백유미가 L국에서 납치를 계획할 때부터 백유미의 뒤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고 말했다.이후에 백유미는 C선생이라는 사람이 계속 자신에게 모든 것을 지시해왔다고 순순히 인정했다.C선생이라는 말에 고은서는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고은서는 한참을 생각해낸 끝에 그때 백유미가 원지훈 무리에게 폭행을 당하고 있을 때 백유미에게 전화가 온 사람이 C선생이었다는 것이 떠올랐다.고은서는 그때 전화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C선생이라는 사람에게 도와달라고도 했다.하지만 상대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설마 그때 전화가 온 것도 백유미한테 일의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나 물어보려고 그런 건가? 근데 백유미가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하는 것 같아서 백유미를 버리려고 한 거고?”고은서는 이 일을 곽승재에게 말해주었다.곽승재는 고은서가 C선생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곽
“난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서, 좋은 성과를 따내기 위해서 남자들한테 개보다도 못한 장난감 취급을 받았어!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상관이야!”백유미는 또 넋을 놓고 미친 사람처럼 웃어댔다.“난 그저 성공하고 싶었어. 내가 모든 사람의 꼭대기에서 군림하면 곽 회장님도 날 무시하지 않으실 거고 그렇게 되면 내가 곽씨 가문의 사모님이 될 수 있는 거야! 하하하!”고은서는 눈앞의 백유미가 미친 척하던 지난번과 달리 확실히 정말 정신이 나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백유미는 소리를 질러대며 울다가도 다시 웃기를 반복했고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백유미에게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곽승재인지 아닌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백유미는 그저 미친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자신을 과시하는 동시에 처절하게 절망하기도 했다.아무래도 백유미가 미쳐버린 건 확실해보였다.하지만 왜 이렇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고은서는 백유미가 얼마나 멘탈이 강하고 독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그렇기에 더더욱 갑자기 미쳐버린 백유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난 곽씨 가문의 사모님이 될 사람인데 내 이미지에 금이 가서야 되겠어! 나쁜 건 그 사람이야, 그 사람이 먼저 나한테 눈독을 들이고 날 위협했다고...”뭐가 생각난 모양인지 미친 사람처럼 웃던 백유미는 또 갑자기 몸을 덜덜 떨며 곽승재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승재야, 나 좀 살려줘. 난 버리는 카드가 아니야, 나 아직 쓸모 있다고. 나 죽기 싫단 말이야! 아악, 당신들 누구도 날 해할 생각 하지만! 다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라고!”백유미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난동을 피웠다. 백유미는 병원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대며 철제 난간을 입으로 물어뜯기 시작했다.워낙에 요란한 소리에 직원들이 급히 달려왔다.직원들은 일사불란하게 백유미를 난간에서 떼어놓고 그녀에게 진정제를 투입했다. 일련의 과정은 꽤 소란스러웠다.복잡한 과정에 고은서가 부딪치기라도 할라 곽승재는 고은서를 데리고 정신병원에서 나왔다.“
곽승재는 냉큼 반대편으로 달려와 고은서의 어깨를 부축하며 말했다.“의사가 한 말 잊은 거 아니지? 잘 쉬고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의사는 애초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을뿐더러 그저 곽승재의 개인적인 해석에 불과했다.고은서는 곽승재와 말다툼을 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기에 그저 그런대로 곽승재가 자신의 어깨를 부축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병원 로비에 들어서니 병원 원장이 곽승재를 맞아주었다.간단하게 인사를 주고받은 뒤, 병원 측의 관계자가 둘을 백유미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백유미가 있는 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고은서는 한 비서를 발견했다.한 비서는 간병인 복장을 하고 있었고 손에는 쟁반이 들려있었는데 아마 금방 식사를 챙겨주고 나온 것 같았다.한 비서는 고은서를 발견하고 기뻤지만 같이 온 곽승재를 발견하자 순식간에 불안과 두려움에 가득 차 표정이 얼어붙었다.“곽, 곽 대표님.”한 비서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곽승재는 냉랭한 태도로 한 비서를 무시하고는 고은서를 데리고 계속 앞으로 갔다.곧이어 둘은 백유미가 있는 집중 관찰실에 도착했다.이곳은 한눈에 봐도 일반 병실보다 안전성이 더 높아 보였고 문도 이중문으로 되어있었다.바깥의 철문을 여니 철제 난간이 나타났다.직원은 이렇게만 면회가 가능하다고 말해주었다.밖에서 본 백유미의 모습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백유미는 얇은 환자복을 입고 간이침대에 홀로 앉아있었다. 낯빛은 창백했고 머리카락은 버석했으며 눈빛은 퀭했다.지금의 백유미에게서 예전의 세련됨과 온화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고은서는 무의식적으로 곽승재를 살폈다.백유미는 곽승재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였고 한때 곽승재에게 은혜를 베풀기도 했었다.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진 백유미를 보는 곽승재의 마음이 어떨지 고은서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고은서의 시선을 느낀 곽승재는 주변의 사람들을 모두 물리고 담담하게 고은서에게 말했다.“이건 백유미가 자초한 일이야.”곽승재의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내내 멍하던 백유미가 반응
고은서의 물음에 곽승재는 여전히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일단 나랑 어디 좀 갈 데가 있어.”곽승재의 얼굴에 보기 드문 진지함이 서렸다. 아마도 한마디로 딱 잘라 설명할 수 없는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그런 곽승재의 모습을 보자 고은서는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아랫배의 고통도 아까보다 심해지는 것 같았다.곽승재의 운전석 칸막이에 노크하고는 말했다.“근처에 호텔을 찾아서 차를 세워줘요.”“호텔에는 왜 가는 건데, 또 뭘 하려고 그래?”고은서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곽승재를 한껏 경계하며 물었다.곽승재는 말없이 고은서에게 딱 붙어 앉더니 팔로 고은서의 허리를 감쌌다.“곽승재, 너...”경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은서가 느낀 건 포옹의 온기가 아닌 아랫배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감각이었다. 곽승재가 고은서를 대신해 아랫배를 살살 어루만져주고 있었던 것이다.곽승재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는 고은서의 옷을 뚫고 피부에도 전해졌고 너무 세지도 약하지도 않은 힘은 아랫배의 통증을 어느 정도 완화해주었다.“아까 무슨 생각 한 거야?”곽승재는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로 고은서에게 물었다.“지금 몸도 성하지 않은 사람한테 내가 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데?”살짝 민망해진 고은서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곽승재의 손을 떼어내려고 했으나 곽승재가 다른 한 손으로 고은서를 제지했다.“배 아프다며? 가만히 있어.”곽승재의 말투에는 다정함이 묻어있었다.“일단 호텔에 가서 네가 따뜻한 물에 처방받은 약을 먹고 몸이 괜찮아질 때까지 좀 쉬고 난 후에 내가 가려던 곳에 같이 가줘.”고은서는 곽승재의 다정한 말투가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그렇게까지 아프진 않으니까 좀 떨어져 줄래?”하지만 곽승재는 고은서의 말은 귓등으로 듣고 계속해서 아랫배를 어루만져주는 데 집중했다.“...”“곽 대표님, 호텔에 도착했습니다.”고은서가 더는 참지 못하고 뭐라고 하려던 찰나에 마침 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차를 세우고 나서 곽승재는 고은서를 데리고 호텔로 들
“그동안 마재경과의 스캔들은 내가 의도적으로 유포한 거고 다 거짓이야.”곽승재가 이어서 말했다.일부러 짜고 친 판일 것이라는 예측은 박지연도 진작에 했었다.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코웃음을 쳤다.“모두 다 거짓이라고 하기는 힘들 것 같던데. 마재경이 네 손을 잡고 너한테 애교를 부리는 모습을 봐서는 너에 대한 감정이 거짓이 아닌 것 같았거든.”고은서의 말을 들은 곽승재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안광이 돌았다.“은서야 너 지금 마재경이 신경 쓰이는 거야?”고은서가 반문했다.“네 생각엔 내가 신경 쓸 것 같아?”곽승재의 안광이 다시 어두워지더니 일부 행동들은 마재경에게 일부러 시킨 것이라고 털어놓았다.비록 곽승재는 눈치를 못 챘겠지만 고은서는 마재경이 곽승재에게 진짜로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마재경이 곽승재에게 애교를 부리고 살갑게 굴었던 것이 얼마나 진실한 것인지를 따지기 전에 마재경이 고은서를 볼 때마다 얼굴에 다 드러나던 질투와 원망만은 절대 꾸며낸 것이 아니었다.“곽승재 너 솔직히 말해봐. 마재경을 이 큰 판에 끌어들여서 연기하게 만든 게 오로지 나한테 당한 걸 갚아주기 위해서야?”고은서가 곽승재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곽승재는 잠깐 난처해하더니 이내 대답했다.“네가 질투를 하고 화를 내길 바란 건 사실이야.”곽승재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라이트문 아파트에 집을 산 건 단지 고은서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지내고 싶어서 그런 것이었고 처음부터 마재경을 그 집에 들일 생각은 없었다고 말이다.곽승재는 그날 밤 마재경이 라이트문 아파트에 가서 자신을 기다린 것도 자기가 시킨 것이라고 했다.왜냐하면 곽승재는 고은서가 주인혁의 일 때문에 송민준을 찾아간 것을 알고 기분이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그 한마디를 입 밖으로 뱉어버렸다.“유치하긴.”“유치하고 웃긴 건 나도 인정해.”곽승재는 민망한 듯 자신의 유치함을 인정해버렸다.곽승재는 온갖 방법을 다 써가며 고은서의 마음속에 아직도 자신이 남아 있다는
말을 마친 고은서는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고은서가 도아름과 박지연을 요가원에서 만났을 때도, 레스토랑에서 송민준과 밥을 먹고 있을 때도, 팔에 화상을 입어서 주인혁이 함께 병원에 가줬을 때도, 지인들과 농장에 갔을 때도... 고은서는 모두 우연히 곽승재와 마재경을 만났었다.결국 그 모든 우연은 진짜 우연이 아니었고 곽승재가 고은서의 뒤를 밟아 우연으로 위장한 계획된 만남에 불과했다.고은서의 질문에도 경호원은 그저 침묵을 유지하며 운전에만 몰두했다. 그 와중에도 눈치가 빨라서 재빨리 뒷좌석의 칸막이 버튼을 눌러 둘만의 대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차갑기 그지없는 고은서의 얼굴을 발견한 곽승재는 팔을 뻗어 고은서를 자신의 다리 위에 앉혔다.“은서야, 난 일부러 사람을 시켜서 너의 뒤를 밟게 한 게 아니라 네 안전이 걱정돼서 그런 거야.”곽승재의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의 걱정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곽승재는 더는 억누르고 있기 싫었던 모양인지 고은서에게 이마를 맞대고는 작게 속삭였다.“네가 뒤풀이를 하던 날 밤, 내가 출장을 간 바람에 부하더러 널 지켜주라고 했는데 그것마저 제대로 못 해줘서 하마터면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날 뻔했잖아. 난 지금까지도 계속 그걸 후회하고 있어.”고은서는 그날 밤 송민준이 자신을 집에 데려다준 후에 이미숙에게서 곽승재가 자신에게 연락이 닿지 않아 미치기 일보 직전이라는 소리를 들었다.곽승재는 그날 밤 고은서에게 예상치 못할 사고가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고은서는 피부로 느껴지는 곽승재의 체온과 자신을 감싸 안은 단단한 팔이 묘하게 불편했다.결국 고은서는 고개를 옆으로 빼며 말했다.“이거 좀 놔줘. 할 말이 있으면 제대로 해야 할 거 아니야.”곽승재는 고은서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한참 동안 고은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결국에는 고은서를 놓아주었다.다시 좌석에 앉은 고은서가 말했다.“내 안전이 걱정돼서 그랬다고 했지. 그럼 내가 안전하지 못할 건 또 뭐가 있는데?”곽승재는 고
고은서는 곽승재를 힐끔 보고는 의사에게 물었다.“이 사람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이 사람은 제가 약을 먹었는지 모르거든요.”의사는 환자의 태도에 화가 나 다시 고은서를 꾸짖으려고 했으나 곽승재에 의해 제지당했다.“모두 제 잘못이니까 이 사람에게 뭐라고 하지 말아주세요.”“두 분 다 잘못이 있어요!”곽승재가 잘못을 승인한 것을 들은 의사는 여태 고은서가 곽승재를 감싸주고 있었던 거로 오해해 더 화가 났다.“아직 젊은 사람들이 오직 한순간의 쾌락을 위해서 아무런 조치도 없이 자기 몸을 함부로 굴린다는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요? 원래도 몸이 허약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그렇게 멋도 모르고 무작정 약을 먹었다간 언제 몸이 망가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요!”고은서도 자신이 너무 무지했다는 생각이 들어 재차 의사에게 이번 일을 계기로 다시는 그런 무모한 일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말했다.고은서의 현재 상황에 맞는 약효가 빠른 약이 없었기에 오로지 몸조리를 통해 천천히 컨디션을 회복하는 방법밖에 없었다.의사는 고은서에게 약을 처방해주었고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거듭 강조하고 나서야 진료가 끝났다.고은서는 의사에게 인사를 하고 의자에서 일어나는 순간 아랫배가 다시 아파져 왔지만 감히 티를 낼 수 없었다.고은서는 아픔을 참고 걸어 나갈 생각이었지만 곽승재가 그런 고은서를 순식간에 번쩍 안아 올렸다.“함부로 움직이지 마.”고은서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곽승재가 먼저 말을 가로챘다.문밖에는 아직 기웃거리며 상황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와 병원에서 다툴 여력도 남아 있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게 싫어서 아예 가방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고 곽승재의 팔에 얼굴을 묻었다.진료실에서부터 엘리베이터까지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기에 곽승재는 고은서를 안고 곧바로 엘리베이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은서는 엘리베이터에 타서 내려달라고 하려고 했으나 곽승재는 여전히 고은서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고 덤으로 작게 경고까지 했다.“엘리베이터
그날 밤의 기억을 떠올린 고은서는 부끄러움과 짜증이 동시에 밀려와 이를 꽉 깨물고 곽승재에게 말했다.“곽승재, 넌 진짜 나쁜 놈이야!”고은서는 곽승재 몰래 계략을 꾸민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지만 곽승재는 애초에 고은서가 놓은 덫에 걸린 적이 없었다.곽승재가 찾아간 방은 고은서의 방이었기 때문이다.사실 고은서는 깼을 때 곽승재이진 않았을까에 대해 의심을 했었다.하지만 곽승재가 고은서가 놓은 덫에 걸려 잔뜩 분해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모자라 가시 돋친 말을 퍼붓고 그대로 돌아섰기에 고은서도 더는 의심을 하지 않았었다.그 이후에도 마음속에 이 일을 더 담아두지 않았고 굳이 곽승재를 찾아가 사실확인을 하지도 않았다.그렇게 고은서는 그저 꿈이라고 여겼다.반면 곽승재는 고은서의 태도에서 부끄러움과 짜증만 보아냈을 뿐, 아이를 지우는 것에 대한 슬픈 기색은 눈곱만큼도 보아내지 못했다.곽승재는 여전히 의심이 채 가시지 않은 말투로 고은서에게 물었다.“아이를 지우러 병원에 온 게 아니야?”고은서는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치다가 막 곽승재에게 말하려던 참에 밖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드디어 고은서의 진료 순서가 온 것이었다.고은서는 곽승재를 무시하고 비상계단 출입구의 문을 열었다.곽승재를 따라온 남자들이 문을 지키고 있었고 잔뜩 진지한 태도로 궁금해서 기웃대는 사람들을 제지하고 있었다.그리고 고은서를 발견하자 재빨리 그중 한 사람이 곽승재와 눈빛을 주고받는 걸로 보아 곽승재의 지시를 받은 것 같았다. 지시를 확인한 남자는 공손하게 고은서에게 길을 내주었다.고은서는 본의 아니게 모든 사람의 추측과 호기심으로 가득 찬 시선을 한몸에 받았지만 아무런 표정의 동요도 없이 진료실로 들어갔다.의사가 고은서의 개인 정보를 확인하는 동안 곽승재도 따라 들어왔다.워낙 별 상황을 다 겪어본 의사는 갑자기 문을 박차고 들어온 곽승재에도 딱히 곽승재의 외모에 감탄하는 기색은 없었고 그저 한번 흘기고 말았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고은서에게 물었다.“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늘 규칙적이던 생리가 이번 달은 불규칙해졌다. 일주일이나 늦춰진 건 둘째치고 여태 한 번도 아픈 적 없었던 아랫배가 아프기 시작했다.몸에 이상이 있는 걸 눈치챈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고은서는 죽다 살아난 경험을 한 뒤로 자연스레 건강을 더 중시하게 되었다.결국 고은서는 가방을 챙겨 나와 차에 타서 기사에게 근처의 산부인과로 가달라고 말했다.아랫배가 자꾸 은근하게 아파 고은서는 가는 내내 손으로 아랫배를 어루만졌다.차에서 내렸을 때 코를 쿡 찌르는 과일 썩은 냄새에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고은서는 병원에 들어가서 재빨리 진료 접수를 하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산부인과 층이라 그런지 역시 여성들이 줄을 길게 서 있었다.진료 접수도 했겠다, 고은서는 그저 복도에 앉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생각처럼 빠르지 않은 진료 속도에 조금 답답해진 고은서는 사람이 적은 앞쪽으로 가서야 조금이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은서는 복도에 소음이 아까보다 커진 것을 느꼈고 그 속에서 여자들의 “잘생겼다”, “키 엄청 크네”와 같은 감탄 소리도 들었다.산부인과에도 남자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같이 온 가족들이었다.‘남자도 같이 온 가족이 있을 텐데 저렇게 대놓고 감상을 해도 되는 거야?’고은서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대체 남자가 얼마나 잘생겼길래 산부인과에서 여자들의 환호 소리가 들려오는지 보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고은서가 금방 몸을 돌렸을 때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가 고은서의 앞에 나타났다.그 남자는 다름 아닌 곽승재였다.곽승재의 뒤를 따른 건 사복을 입은 체격이 우람한 남자 두 명이었다.고은서는 잠깐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잔뜩 어리둥절해 있었다. 고은서의 환각이 아니라면 곽승재가 정말 산부인과에 나타난 것이다.“따라와!”곽승재는 고은서가 반응할 시간도 주지 않고 그 많은 사람의 시선 속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고은서를 비상계단으로 데려갔다.“왜 이러는 거야, 곽승재. 왜 또 멋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