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깜짝 놀랐다.“정말 절에 가는 거야?”“당연하지. 마침 육현석도 시간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 같이 절에 가서 간절하게 빌고 주변에서 놀다 돌아오자. 일도 쉬면서 해야지.”박지연이 답했다.‘육현석도 같이 가는 거구나. 쉬는 게 아니라 그냥 데이트하러 가는 거겠지.’“난 굳이 두 사람 사이에 끼고 싶지 않은데.”“괜찮아. 너도 이젠 습관 될 때가 되지 않았니?”박지연이 웃으면서 말했다.“...”고은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녀는 박지연과 시간을 정한 후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그러나 뜻밖으로 곽승연과 마주치게 되었다.품에 퀸을 안고 있는 걸 봐서는 아마 곽승재 집에서 나온 듯했다.“언니! 언니도 여기 살아요?”곽승연은 그녀를 보자마자 무척 기뻐했다.‘따지고 보면 승연이를 못 만나지도 꽤 됐네.’곽승연의 상태는 전보다 훨씬 좋아졌는데 그녀를 보자마자 눈에 띄게 좋아하며 총총 달려왔다.“응. 승연이는 여기에 왜 온 거야?”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엄마가 오늘 바빠서 같이 못 있어 준다고 나갔는데 마침 오빠를 너무 오래 못 본 것 같아서 기사님 차에 오빠 찾으러 온 거예요.”곽승연의 말하는 속도도 전과 달리 많이 빨라졌다.마침 곽승재가 집에서 걸어 나왔다.그는 고은서를 보고 입술을 달싹이더니 끝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틀 전의 키스를 떠올린 고은서도 그한테 별로 인사하고 싶지 않았다.“승연아, 언니는 볼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그러자 곽승연이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언니, 어디 가는 거예요? 저도 따라가면 안 돼요?”고은서는 전에 편한 시간에 그녀를 데리고 놀러 가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다.‘아무튼 박지연이랑 육현석 두 사람과 나가는데 승연이를 데리고 가도 괜찮겠지?’“승연이 데리고 어디 갈 생각이었어?”고은서가 곽승재를 향해 물었다.“판주에 처리할 일이 생겨서 사무실에 데려가려고.”곽승재가 덤덤하게 답했다.‘굳이 휴식일에 동생을 데리고
고은서는 곽승재의 표정 변화를 눈치챘지만 그에게 더 설명해줄 생각은 없었다.고은서는 곽승연의 손을 잡아당기면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곽승재도 고은서에게 있어서 곽승연이 본인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쯤은 잘 알고 있었다.아마 누가 곽승연을 데리러 올지 물어도 고은서는 대답해주지 않을 것이다.곽승재는 그저 퀸을 품에 안은 채 우두커니 서서 고은서와 곽승연이 엘리베이터에 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언니, 오빠도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엘리베이터에 오르자 곽승연이 소곤대며 말했다.“아니야, 너희 오빠는 일이 바빠서 안 가고 싶을 거야.”이윽고 곽승연이 또 물었다.“언니랑 오빠는 다시 화해할 거예요?”곽승연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작게 웃고는 곽승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대답했다.“승연아, 언니가 말했지? 언니랑 승연이 오빠의 관계가 어떻든지 우리 둘 사이의 우정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다고 말이야.”곽승연은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어느새 엘리베이터는 1층에 도착했고 고은서는 곽승연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고은서는 데리러 온다던 박지연이 도착했는지 몰라 연락을 하려고 핸드폰을 꺼낸 찰나에 마침 검은색 차 한 대가 천천히 접근하는 것을 발견하였다.운전석에 앉아있는 사람은 송민준이었고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송민아였다.“짜잔! 놀랐지?”송민아는 냉큼 조수석에서 내려 고은서를 놀래줬고 덕분에 고은서는 어리둥절한 채 송민아에게 물었다.“여긴 어떻게 온 거야?”“어떻게 오긴, 당연히 너 데리러 왔지!”송민아가 해석을 덧붙였다.“지연 언니가 같이 참배하러 가자고 연락이 왔었는데 오빠도 시간이 빈다길래 같이 왔어!”알고 보니 박지연이 송민아도 함께 부른 것이었다. 고은서에게 한 가지 의문이 있다면 박지연이 남자친구를 챙기느라 자신을 챙기지 못할까 봐 송민아를 부른 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여긴 누구야?”송민아는 얌전하고 순한 곽승연을 보고 물었다.고은서는 웃으며 곽승연을 그들에게 소개해주었다.“승연이라고 해. 곽승재 여동생이야.”
고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아마 그럴 일 없을 거야. 곽승재 말로는 회사에 급히 볼 일이 있다고 그랬거든.”박지연은 흥하고 작게 콧방귀를 뀌었다.“제일 좋기는 오지 말았으면 해. 최근에 그 인플루언서랑은 아직도 안 헤어졌지? 오기만 해, 뭐가 됐든 내가 그 사람을 보고도 욕을 참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고은서는 작게 웃고 대답했다.“가자, 현석 씨가 표를 샀대.”육현석은 표를 손에 쥐고 다가왔고 송민준은 일행들에게 줄 물과 기도할 때 사용하게 될 향을 사 들고 다가왔다.“송민준 씨가 너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야?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귀한 쉬는 날에 우리랑 같이 절에 오는 고생을 찾아서 한다는 게 말이 돼?”박지연은 또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고은서는 박지연을 한번 흘기고는 대답했다.“그래, 네 말대로 지금 나한테 눈이 멀어서 다른 건 다 안중에도 없어서 내가 어딜 가든 다 따라오나 봐. 어떻게 좀 만족스러운 대답인가, 박지연 씨?”“...”박지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때마침 육현석이 다가온 덕분에 둘의 대화는 그쯤에서 마무리될 수 있었다.절은 엄숙하고 고요했으며 종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절에 들어서니 거대한 고목 몇 그루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들은 바에 의하면 이 절은 당나라 때부터 존재해왔다고 한다. 몇 번의 격변을 겪으며 예전만큼 성대하지는 못하나 여전히 그 명성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로 발길이 끊기지 않는 곳이었다.박지연과 육현석이 앞장섰다.송민아와 곽승연은 생각보다도 더 성격이 잘 맞는 것 같았다. 모든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고 심지어는 땅에 떨어진 은행나무 잎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둘이 딱 붙어 관찰하고 다시 걸어가곤 했다.그리고 고은서와 송민준이 제일 뒤에서 함께 그들을 따라갔다.고은서는 가장 영험하고 중생을 두루 보살핀다는 X신전에 도착해서 평안등 하나를 띄웠다.그러면서 타국에 있는 민시후가 무탈하게 수술을 마치고 얼른 몸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랐다.신전에서 나왔을 때 송민준이 고은
고개를 들어 곽승재의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과 아무런 감정도 없는 눈동자를 확인한 고은서는 그의 알 수 없는 어색함과 조금은 강압적인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고은서는 굳이 곽승재와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았다.“민준 씨가 말한 그대로야. 승연이가 민아랑 노는 걸 좋아해서 내가 내내 승연이 옆에 있을 필요가 없어진 것뿐이야.”곽승재는 묘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고은서의 말에 트집을 잡았다.“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말았어야지.”갑작스러운 곽승재의 태도에 고은서는 어이가 없다 못해 그가 일부러 시비를 거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고은서는 곽승재를 상대해주기도 귀찮아 퉁명스럽게 말했다.“미안, 내 잘못이야. 지금 당장 승연이를 찾으러 갈게.”말을 마친 고은서는 곧장 옆에 있는 사찰로 들어갔다.여시은은 눈을 두어 번 끔뻑거리고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곽승재에게 물었다.“곽 대표님, 왜 은서 화를 돋우고 그러세요!”곽승재는 고은서가 향한 곳을 바라보며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했다.“내가 승연이를 보러 가야겠어요.”곽승재까지 자리를 뜨자 사찰 앞에는 여시은과 송민준 둘만 남게 되었다.여시은은 송민준을 향해 웃어 보이며 물었다.“송 대표님, 아까 은서 머리카락에 붙은 나뭇잎을 떼주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은서의 마음을 사려는 노력이라고 봐도 되는 부분인가요?”송민준은 여전히 온화한 태도로 여시은의 말에 대답했다.“마침 눈에 보여서 도와준 것뿐이에요.”“듣자 하니 며칠 전에 송 대표님한테 작은 사고가 생겼다고 그러던데요, 게다가 상처도 입으셨다고요?”여시은이 계속해서 물었다.“제 부상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아요. 큰일이라면 저한테 무작정 시비를 걸다가 경찰에게 잡혀간 사람들에게나 생겼겠네요.”여시은은 작게 웃었다.“일부러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라면 골치가 아파도 싸죠.”여시은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송민아와 곽승연이 둘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승연아, 오빠가 지금 승연이 찾고 있는데 나랑 같이 오빠 찾으러 갈래?”여시은은 산뜻한 미
“...”그제야 고은서는 다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승연이가 아까까지 여기 있었는데 아마 민아랑 다른 곳에 갔나 봐. 내가 전화해서 물어보면 될 일이야!”말을 마친 고은서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을 때, 곽승재가 조롱하듯 말했다.“민시후가 가니까 이젠 송민준이야?”그 말에 고은서는 행동을 멈추고 곽승재를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그러는 넌 지금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그딴 걸 묻는 거지?”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낀 곽승재는 차분하게 대꾸했다.“고은서, 넌 정말 독한 사람이야. 사람을 다루는데 무서우리만치 인정사정없을 뿐만 아니라 손에 쥐고 있는 게 누구의 감정이든지 참 쉽게 휘둘러. 네가 놓고 싶을 때 놔버리면 그만이지.”“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고은서가 바로 반박했다.“너야말로 어제는 마재경을 옆에 끼고 다니더니 오늘은 시은이랑 보란 듯이 이곳에 찾아왔잖아. 네가 그러고도 나한테 뭐라 할 자격이 있냐고!”“은서야 넌 지금 곽 대표님을 오해하고 있어.”곽승재가 말문이 막혀 어버버 거리고 있을 때 여시은이 갑자기 튀어나왔다.여시은이 고은서에게 설명했다.“오늘 곽 회장님께서도 판주 투자은행에 가셨는데 곽 대표님께서 나갔다 올 거라는 걸 알게 되셨고 내가 심심해할까 봐 나랑 같이 나갔다 오라고 하신 거였어. 절대 은서 네가 생각하는 그렇고 그런 게 아니야!”고은서는 원래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는데 여시은을 보니 기분이 더할 나위 잡쳤다.고은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시은아, 마침 곽승재도 함께 있으니 이번 기회에 제대로 짚고 넘어갈게. 난 곽승재에게 일말의 감정도 남아 있지 않고 다시 결혼할 생각은 더더욱 없으니까 날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로 생각하지 않아도 돼!”그 말을 들은 여시은은 단 한 번도 둘 사이에 본인이 껴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해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은서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그렇구나. 그럼 시은이 너도 곽승재와 거리를 좀 두는 게 좋겠어. 나랑 곽승
여시은은 솔직하고도 재치있게 곽승재의 말을 받아쳤다. 그런 여시은의 태도에 곽승재의 미간이 묘하게 찌푸려졌다.“시은 씨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당분간은 결혼 생각이 없고 시은 씨가 시간을 낭비하게 되는 것도 원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시은 씨도 저한테 너무 많은 감정을 기대하지 말아요.”곽승재의 말에 여시은의 얼굴에 드물게 상실감이 드리웠다. 하지만 여시은은 화를 내지 않았고 그저 입술을 삐죽이고는 투덜거릴 뿐이었다.“곽 대표님, 이렇게나 무뚝뚝해서야 되겠어요? 저도 제가 잠깐 뭐에 홀린 건 아닌지 반성 좀 해봐야겠어요!”곽승재는 여시은의 농담을 받아주지 않았다.“승연이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얼른 가봐야겠어요.”여시은은 굳이 곽승재를 따라가지 않았다.“곽 대표님, 은서도 절 반기지 않는 것 같고 대표님도 저랑 같이 있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으니 전 먼저 돌아갈게요.”곽승재는 여시은을 말리지 않았다.“기사님은 밖에 있어요. 제가 기사님한테 시은 씨 모셔다드리라고 말해둘게요.”여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리고 곽 대표님, 나중에 은서한테 제가 은서 향수 완성품을 엄청나게 기대하고 있다고 좀 전해주실래요? 항상 기다리고 있다고도 말이에요!”여시은은 가려다 말고 상냥한 목소리로 곽승재에게 말했다.곽승재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은행나무 잎이 여시은의 팔에 떨어졌다. 팔에 붙은 나뭇잎을 떼서 본 여시은은 웃으며 나뭇잎을 부스러기로 만들어버리고는 털어버렸다.사람들이 소원을 비는 이른바 소원 나무는 엄청나게 거대했다. 나무 기둥은 여러 사람이 둘러싸야만 안아지는 정도였고 나무뿌리는 화단에 둘러싸여 있었다.나무에는 목재로 된 소원패가 가득 걸려 있었고 바람이 불면 딸랑거리며 듣기 좋은 소리를 냈는데 그것도 나름대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곽승재가 도착했을 때, 송민아는 송민준을 안으로 끌어당기고 있었고 고은서는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으며 그 옆에는 일찌감치 다 쓴 곽승연이 있었다.곽승연은
고은서는 민망하긴 했지만 곽승재가 이미 이렇게나 높게 들어 올렸겠다, 기회를 틈타 더 망설이지 않고 소원패를 제일 높은 나뭇가지에 걸었다.“언니 소원패는 엄청 높은 곳에 걸었으니까 소원이 꼭 이뤄질 거야!”곽승연은 꺄르르 웃으며 손뼉까지 쳤다.때마침 송민아와 송민준도 안에서 나와 그 둘을 향해 다가왔다.고은서는 정말 민망하기 짝이 없어 곽승재한테 어서 내려달라고 사인을 보냈다.멀지 않은 곳에서 박지연과 육현석도 둘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둘이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본 육현석은 당연하게도 기뻤지만 박지연은 불쾌하다는 듯 곽승재의 손을 내치고는 고은서를 자신의 뒤로 끌어당겼다.그리고는 곽승재에게 그 인플루언서와의 관계를 언급하며 여자친구가 있는 사람이 고은서에게 찝쩍대서야 되겠냐며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박지연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별다른 변명을 하지 않았고 그저 담담하게 대답했다.“전 그냥 은서가 키가 작아 높은 곳까지 닿지 않는 것 같아서 도와준 것뿐이지 찝쩍거린 게 아니에요.”박지연은 곽승재의 말을 믿지 않았다.“그러시구나, 참 마음씨도 좋네요? 그러면 여기서 인간 사다리나 하시면 되겠어요. 높은 곳에 닿지 않는 사람은 다 도와주시지 그래요?”숨도 안 쉬고 몰아붙이는 박지연에 곽승재는 찍소리도 할 수 없었지만 육현석도 그를 달리 도와줄 수 없었다.육현석은 몰래 곽승재를 부른 것만으로도 이미 크나큰 모험을 한 격인데 박지연의 심기를 더 건드렸다간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결국 송민준이 와서야 상황이 일단락되었다.“곽 대표님도 도와주려고 그런 거잖아요.”“곽 대표님, 여시은 씨는 함께 오지 않은 건가요?”송민준이 무심결에 곽승재에게 물었다.이에 곽승재가 고은서를 한번 보고는 대답했다.“시은 씨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갔어요.”곽승재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본능적으로 어딘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곽승재를 따라 굳이 이곳까지 함께 온 여시은이 얼마 있지도 않고 바로 이렇게
사실 육현석도 운전기사를 자처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고은서와 곽승연을 데려다주는 일이 아니라면 육현석도 충분히 박지연과 함께 차를 타고 오붓하게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다.하지만 육현석은 고은서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때 고은서가 말해주길 송민준이 자신에게 푹 빠져 어딜 가나 따라다닌다고 그랬었다.게다가 육현석이 보기에도 송민준은 고은서에게 호감이 있는 것 같았다.육현석은 곽승재를 위해서라도 그 두 사람을 사이를 가로막는 게 응당 본인의 몫이라고 생각했다.육현석의 속셈을 모를 리 없는 박지연도 이번만큼은 육현석을 굳이 말리지 않았다.“민준 씨, 피곤하실 텐데 은서와 승연이는 현석이가 데려다주게 내버려 두세요.”박지연은 아예 한술 더 떠서 육현석을 도와 말을 해주기도 했다.송민준은 작게 미소를 지었고 굳이 본인이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차에 앉자 박지연은 그제야 육현석의 정곡을 찔렀다.“왜, 민준 씨가 은서 마음을 얻을까 봐 걱정이라도 되나 보지?”육현석은 어색하게 목을 가다듬고는 말했다.“그런 거 아니야. 난 단지 어머님을 뵌 지도 오래됐고 오늘 마침 시간이 있으니까 어머님을 뵈러 가고 싶어서 그런 거야.”박지연은 일부러 육현석의 속셈을 모르는 척했다.“그래, 나도 아니었으면 좋겠어. 어쨌든 난 은서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해. 민준 씨도 꽤 괜찮은 사람이고.”하지만 육현석의 생각은 달랐다.“송민준 그 사람은 곧 서른이잖아. 은서랑 나이 차이도 크게 나니까 분명 세대 차이가 있을 거야.”박지연이 다시 반박했다.“세대 차이 같은 소리 좋아하네. 성숙한 남자야말로 진정으로 자기 사람한테 잘한다고!”육현석은 급히 말을 바꿨다.“승재 형도 스물일곱 살이니까 형도 자기 사람한테 잘할 거야. 게다가 송민준보다 세대 차이도 덜 나잖아.”“얼씨구, 육현석 씨 계산이 빠르시네요?’박지연은 비아냥댔다.“근데 곽승재한테 여자친구가 있다는 건 까먹었고?”육현석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작아졌다.“지연아, 승재 형은 절대 그
구경꾼들은 그다지 좋지 않은 시선으로 고은서를 쏘아보기 시작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옆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이쁘게 생겨서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다른 사람 고양이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벤치까지 발로 차고 이 정도면 공공시설 훼손 아니야?”“그러니까 말이야. 요즘 여자애들이 너무 오냐오냐하게 자라서 하나둘씩 공주병이라니까.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저러는 거지.”“언니는 아무 잘못 없어요! 그리고 공주병도 아니에요!”곽승연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언니는 다른 고양이를 뺏는 나쁜 사람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함부로 발로 차는 사람도 아니에요!”“뒤로 넘어진 걸 우리가 다 봤는데 뭐가 아니라는 거야.”구경꾼 중의 누군가가 피식 웃으면서 비아냥거렸다.곽승연은 급한 마음에 눈시울이 빨개졌다.“거짓말 아니에요. 언닌 좋은 사람이에요.”고은서는 애써 두려움을 참고 자신을 위해 나서주는 곽승연을 보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여시은 때문에 치밀어 올랐던 화도 조금이나마 가라앉는 듯했다.“승연아, 언니는 괜찮으니까 저 사람들이랑 시간 낭비하지 않아도 돼.”고은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언니는 처리할 일이 있으니까 기사한테 너를 민아 언니한테 데려다주라고 말해 둘게.”곽승연은 고은서가 조금 전에 신고한 걸 알고 있었다.그리고 자신이 도울 수 있는 게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고은서를 차마 혼자 두고 갈 수 없었기에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언니, 나도 같이 갈래요.”“언니 정말 괜찮아.”고은서는 말하면서 주차장에서 대기 중인 기사에게 연락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가 도착했다.동시에 경찰들도 신고를 받고 현장으로 왔다.곽승연은 용기 내 여시은을 가리키면서 경찰들을 향해 말했다.“경찰 아저씨, 저 여자 나쁜 사람이에요. 우리 언닌 그저 저 여자가 고양이를 학대하는 걸 막으려다가 실수로 밀친 것뿐이에요. 얼른 저 여자를 잡아요.”여시은 순간
“그만해!”쿠아의 비명과 함께 고은서는 여시은 손에 있는 캣스틱을 빼앗아 땅에 내팽개쳤다.“당신 정말 머리에 문제 있는 거 아니에요? 이건 명백한 학대라고요.”쿠아의 입가에는 빨간 핏자국이 생겼고 그는 앓는 소리를 내며 발버둥을 치면서 여시은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다.그러나 여시은은 쿠아를 꼭 잡고 억울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럴 리가요. 저는 그냥 간식을 주다가 부주의로 살짝 찍은 것뿐이데요.”고은서는 발버둥 치는 쿠아를 보면서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동물병원 의사가 전에 쿠아의 상태를 검사하면서 학대받은 것 같다고 했었는데 정말 당신이었어.”여시은은 고은서의 화난 모습에 더 환하게 웃어 보이며 쿠아의 털을 쓰다듬었다.“은서 씨, 전에도 말했잖아요. 저를 기분 나쁘게 만든 사람은 꼭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고요.”마침 쿠아가 전에 심하게 다쳤던 날에 유일 투자 은행이 개업했다.여시은은 후에 돌아가자마자 쿠아가 심하게 다친 채 땅에 누워 있었다면서 사진까지 보여줬었는데 사진 속의 쿠아는 초점을 잃은 동공에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이발도 다 빠져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고은서는 그 사진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멎는 듯했다.‘그때 그 사진을 보여준 것도 나 기분 나빠 하라고 보여준 거였어. 그런데 개업식 날에 난 여시은이랑 여재훈을 건드린 적이 없는데. 곽승재랑도 간단히 인사만 나누었을 뿐 아무 일도 없었어. 그런데 왜 기분 나쁘다고 뒤돌아 쿠아를 괴롭히는 거지?’“여시은 씨, 저한테 화가 난 거라면 직접 저를 찾아와 말했어야죠. 왜 쿠아한테 화풀이하는 거예요?”고은서는 여시은의 행위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쿠아는 당신 애완묘잖아요. 어떻게 이리 약하고 가여운 생명한테 손을 댈 수가 있어요?”여시은은 무지 기쁘다는 듯 소리 내 웃으면서 답했다.“누가 쿠아 보고 은서 씨를 좋아하래요? 지금 은서 씨의 반응을 보니 저도 틀린 판단을 한 건 아니네요.”“변태!”더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
송민아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민시후 하나로도 충분하거든. 더는 어느 남자 뒤를 쫓아다니고 싶지 않아. 주인혁처럼 인기 있는 사람과 연애하려거든 내가 더 피곤해질걸.”감정이란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정말 생각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주인혁한테 말해볼게.”“아니. 필요 없어. 지금 상태가 제일 좋거든. 쓸데없는 감정에 얽히고 싶지 않아.”송민아가 단호하게 거절했다.고은서도 더는 강요하지 않고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 주겠다고 말했다.그날 오후.고은서가 처리할 일들을 다 처리하고 곽승연의 요구대로 비둘기한테 먹이 주러 공원으로 향했다.공원은 널찍한 데다가 환경도 깨끗하고 좋았다.광장에 도착한 후 고은서는 비둘기 먹이를 사서 곽승연한테 쥐여주고는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예전부터 비둘기를 좋아했던 곽승연은 인내심 있게 천천히 그들에게 먹이를 뿌려주었다.이곳의 비둘기 또한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곽승연의 손에 날아오르기까지 했는데 그녀는 거부하는 대신 환한 미소를 드러냈다.고은서는 이 장면을 촬영해 서연정한테 보내주었다.서연정은 연신 고은서한테 고맙다고 인사했다.두 사람이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고은서는 아주 익숙한 향기를 맡았다.이는 고은서가 여시은을 위해 제작한 우드향 퍼퓸 향이 분명했다.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여시은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여시은은 명품 브랜드 원피스를 입고 고양이 가방을 멘 채 쿠아를 안고 있었다.그녀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쿠아가 전보다 훨씬 약해진 데다가 털도 윤기를 잃은 것 같았다. 심지어 눈빛도 전과 달리 흐리멍덩해 보였다.“하인한테 투약 당한 후로부터 기죽어 있는데 제대로 먹지도 않아서 걱정이에요.”고은서의 시선을 느낀 여시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다 여시은이 혼자 꾸민 일이잖아. 그러니까 하인이 쿠아한테 투약한 것도 여시은의 지시를 받은 거겠네.’고은서는 몰래 녹음 버튼을 누르고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여시은 씨, 쿠아는 여리고 작은 동물일 뿐이
고은서와 곽승재는 동시에 곽승연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녀는 아주 긴장된 상태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방금 부모님의 싸움 현장을 겪은 곽승연은 아직도 긴장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애썼고 그도 눈치 있게 그녀를 놓아주었다.그녀는 곽승연 곁으로 다가가 웃어 보이며 그녀를 위안했다.“승연아, 우린 괜찮아.”“정말이에요?”곽승연이 곽승재를 보며 물었다.곽승재는 표정 관리를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오빠가 언니한테 장난 좀 친 것뿐이야.”곽승연은 그제야 시름을 놓고 고은서 따라 부엌을 나왔다.“언니, 아까 오빠랑 뽀뽀 유희를 한 거예요?”곽승연이 갑자기 천진한 목소리로 물음을 제기했다.“...”고은서는 순간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그러니까 아까 곽승재가 나한테 키스하는 모습을 봤단 말이지? 곽승재는 정말 머리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니야? 전엔 화내며 가더니만 왜 갑자기 또 나한테 키스하고 난리야.’고은서는 이내 곽승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인했다.“승연이가 잘못 본 거야. 아무 일도 없었어.”곽승연은 더는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고은서가 부끄러워서 답을 피할 뿐 절대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라고 굳게 믿었다.고은서가 곽승연을 욕실로 들여보낸 뒤 곽승재도 부엌에서 나왔다.옷이 덜 마른 탓에 그는 옷소매를 위로 거두면서 굵은 팔뚝을 드러냈다.“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돌아가서 쉬어. 승연이는 내가 돌볼게.”“승연이 잘 부탁해.”곽승재는 머뭇거리다가 한 마디 남기고는 캐리어를 들고 떠났다.고은서는 부엌을 힐끗 들여다보았는데 그릇은 이미 다 씻겨 있었지만 싱크대와 바닥은 물과 거품으로 가득했다.‘아줌마가 보면 곽승재 설거지했다고 감동할지 아니면 이 아수라장이 된 부엌을 보고 환장할지 은근히 기대되네.’...이튿날, 고은서가 눈을 떴을 때 곽승연은 이미 깨어 있었다.어제보다 상태가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집으로 돌아가는 걸 거부했다.“언니,
면을 먹은 후 곽승연은 방금전보다 상태가 훨씬 나아진 듯했다.고은서는 그녀와 함께 소파에 앉아 아이패드를 보면서 화젯거리를 찾았다.단 한 번도 부엌에 들어가 본 적이 없던 곽승재는 그릇을 거두더니 자연스레 설거지까지 해놓을 생각이었다.쨍그랑!고은서와 곽승연이 한창 재미나게 패드를 보고 있을 때 부엌에서 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곽승연한테 소파에 가만히 있으라고 당부한 뒤 부엌으로 걸어갔다.아니나 다를까, 그릇 조각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는 데다가 세제 덮개는 열려 있었고 싱크대와 곽승재의 손은 거품투성이였다.“세제를 물로 쓰는 거야?”곽승재는 평소에 당당하고 오만하기 짝이 없던 모습과 달리 약간 주춤하더니 어색한 듯 헛기침을 한 번 했다.“처음 해보는 거라서 많이 따랐나 봐.”“더 따르지 그랬어? 그럼 안에 들어가서 수영해도 될 텐데.”“...”곽승재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이 작은 구멍이 무슨 용도로 쓰이는지 한 번도 생각 안 해 봤어? 딱 봐도 세제를 짜는 데 쓰이는 거잖아.”고은서는 덮개를 들고 곽승재를 비난하기 시작했다.부엌에 단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던 곽승재는 생활 지식이 결핍했던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그가 땅에 있는 그릇 조각들을 주우려고 할 때 고은서가 황급히 제지했다.“잠시만! 빗자루로 쓸면 돼. 손으로 줍다가 상할 수도 있으니까. 또 손을 다쳤다고 이런저런 요구를 제기하면 그땐 정말 쫓아낼 거야.”곽승재는 반박하지 않고 빗자루를 들고 평소에 사인만 하던 손으로 로봇처럼 삐걱거리며 땅을 쓸기 시작했다.“당신이 청소할 줄 안다고 생각한 내가 바보지.”그 모습을 본 고은서는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육현석은 각양각색의 음식을 다 할 줄 알던데 당신은 왜 이런 거야? 세제도 쓸 줄 모르고 아무리 집안 배경이 좋고 잘생겼다고 한들 이러고 누가 당신한테 시집을 가겠어.”고은서는 투덜거리면서 곽승재 손에 있는 빗자루를 빼앗으려 했다.그러나 곽승재가 그
“오빠요.”곽승연이 답했다.‘아마 어머니한테서 승연이가 내 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물어보려고 전화한 거겠지.’고은서는 더는 상관하지 않았다.“얼른 손 씻고 밥 먹자.”“네.”곽승연은 손 씻으러 가고 고은서는 물을 따르러 갔다. 그러나 바로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누구세요?”고은서가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오빠일 거예요. 방금 언니 집에 있다고 했는데 금방 오겠다고 했어요.”손 씻고 나온 곽승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언니, 나 혹시 뭐 잘못했어요?”곽승연은 두 사람이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고 또 전에 만날 때마다 서로 모순이 생겨 다툰 것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녀는 고은서가 자신을 탓하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다.곽승연의 생각을 알아차린 고은서는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아니. 승연이는 아무 잘못이 없어. 오빠도 승연이가 걱정되어서 보러 온 걸 거야. 먼저 먹고 있어. 언니가 문 열게.”“네.”곽승연은 이내 식탁 앞에 앉고 고은서는 문을 열어주러 갔다.아니나 다를까 곽승재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금방 출장을 마치고 온 그는 작은 캐리어를 끌고 외투를 팔에 걸치고 있었는데 약간 피곤해 보였다.“승연이 여기 있어?”“응. 들어와.”고은서는 이내 들어오라고 옆으로 비켜주면서 답했다.곽승연은 그를 보자마자 오빠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내 시선을 고은서한테로 돌리면서 기뻐하며 말했다.“언니, 쫄면 너무 맛있어요. 저 이렇게 맛있는 쫄면은 처음이에요.”“언니가 한 게 맛있는 게 아니라 승연이 네가 너무 배고파서 뭐 먹어도 맛있게 느껴지는 거야.”음식 냄새를 맡은 곽승재도 저도 모르게 배가 고파 났다.그러나 식탁 위에 놓인 면을 보면서 차마 자기도 먹고 싶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고은서는 면을 힐끔힐끔 바라보는 곽승재를 보면서 말했다.“마침 한 그릇 남았는데 배고프면 먹어.”원래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그는 이혼한 이후로 고은서가 해준 음식을 먹은 적이 없었다.전미자의 부탁으로 그를 보
호전된 곽승연이 또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걸 원치 않았던 서연정은 그녀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알겠어, 알겠어. 울지 마. 그럼 오늘은 돌아가지 말고 언니 집에 있자.”고은서는 곽승연의 어깨를 토닥여주면서 그녀를 달랬다.“그래그래. 오늘은 언니랑 같이 있자.”곽승연은 그제야 서서히 진정되는 듯했다.“은서야, 그럼 승연이를 부탁할게.”서연정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고은서는 서연정이 상처받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도 위안이 될 것 같지 않았다.“괜찮아요, 어머니. 승연이는 제가 잘 돌볼게요.”서연정은 곽승연을 안고 한참 동안 달래면서 그녀가 진심으로 집으로 돌아가길 원치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뒤돌아 떠났다.서연정이 배웅해 준 후 고은서는 곽승연 곁에 다시 앉았다.그녀는 잠이 깼는지 혼자 소파에 앉아 인형을 안고 멍때리고 있었다.“승연아, 배 안 고파? 언니가 밥해줄까?”“배 안 고파요.”곽승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그러나 이내 그녀의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뭐 먹고 싶어? 만두? 면? 아니면 죽?”“다 돼요.”곽승연은 어색한지 얼굴이 빨개졌다.고은서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말했다.“그럼 언니가 먹을 것 좀 해올게. 언니 집에서는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마음껏 돌아봐.”곽승연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고은서는 냉장고에서 여러 가지 채소와 계란을 꺼내 쫄면과 스크램블을 요리할 생각이었다.전에 곽승재의 관심을 얻기 위해 요리를 배우면서 시간 날 때마다 밥상을 푸짐하게 차리고 그가 돌아오길 기다렸었다.하지만 곽승재는 무심하게도 거의 집에 돌아오는 일이 없었다.가끔 그녀가 해준 밥을 먹으면서 단 한 번도 칭찬이라곤 해주지 않았다.그러나 예전의 고은서는 그가 자신이 해주는 밥을 먹어주기만 해도 흥분해 하며 좋아했다.‘전에는 정말 왜 그랬지? 곽승재가 없으면 못 사는 것도 아닌데 왜 자꾸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했는지 몰라. 그런
서로 다투던 광경이 떠올랐는지 평소엔 온화하고 담담해 보이던 서연정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면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승연이는 우리가 밥 먹을 때부터 정원에서 혼자 놀고 있었는데 아마 애 아빠가 상을 엎는 소리가 하도 커서 놀랐던 것 같아.”서연정은 말하면서 곽승연을 바라보았다.“내가 정신 차리고 승연을 찾으러 갔을 땐 이미 사라진 후였고.”하인들도 곽승연이 어디 갔는지 별로 신경 쓰지 않은 탓에 나중에 CCTV 동영상을 돌려보고서야 그녀가 뒷문으로 달려 나간 걸 발견했다고 한다.그리고 하인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 한참 동안 찾아보았지만 곽승연은 보이지 않았고 고은서가 전화했을 땐 마침 신고하려던 참이었다고 설명을 보탰다.그녀는 서연정이 얼마나 다급해하고 절망스러워했는지 상상이 갔다.“저도 오늘 평소보다 집에 늦게 들어오고 또 마침 도우미 아줌마가 휴가를 내는 바람에 집이 비어 있었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승연이를 더 빨리 만나서 어머니한테 연락드릴 수 있었을 텐데.”“아니야, 네 잘못은 하나도 없어. 내가 급한 마음에 승연이 해성에서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너 아니면 승재라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서연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고은서는 피곤해 보이는 서연정을 보며 물었다.“어머니, 곽 회장님과 사이가 그토록 좋지 않은데 왜 이혼하고 승연이를 혼자 데리고 살지 않는 건가요? 아무리 어르신들의 약속을 대신 지켜드리기 위해 이혼하지 않는 거라고 하지만 할머니께선 어머니가 행복하게 사는 게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이혼하신다고 해도 절대 반대하지 않으실 거예요.”자기보다 어른인 데다가 예전엔 시어머니였던 사람을 이혼하라고 달래는 게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고은서는 서연정이 이미 벼랑 끝에 맞닿은 결혼생활을 굳이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었다.그녀의 말을 들은 서연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지금까지 계속 이렇게 살아왔는데 이혼하든 말든 달라지는 건 없어. 그나마 이혼하지 않으면 GS그룹
“몰라요. 엄마 아빠가 싸워서 무서워서 오빠랑 언니 찾으러 온 건데 다 집에 없었어요...”곽승연의 목소리가 점점 더 낮아졌다.고은서는 아무 말도 없이 혼자 달아나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아냐고 그녀를 꾸짖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시간은 저녁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서연정은 아마 곽승연이 사라진 걸 발견하고 미친 듯이 찾고 있을 것이다.고은서가 전화를 걸자마자 서연정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서야, 승연이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아. 혹시 너한테 간 거니?”“어머니, 먼저 진정하세요. 승연이는 제가 데리고 있어요.”고은서가 그녀를 위안했다.서연정은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이야. 내가 지금 데리러 갈게.”고은서는 전화를 끊고 곽승연 곁에 앉아 물었다.“승연아,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차엔 어떻게 오른 거야?”곽승연은 인형 호주머니에 넣어둔 용돈으로 택시를 타고 온 거라고 사실대로 답했다.고은서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그녀를 교육했다.“다음부턴 무슨 일 있으면 먼저 언니한테 전화해. 이렇게 함부로 뛰쳐나왔다가 나쁜 사람이라도 만나면 어떡하려고 그래.”곽승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혼자 밖에서 오랫동안 앉아있은 탓인지 눈에 띄게 피곤해 보였고 아직 조금 전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고은서는 계속해 비난하는 대신 그녀를 꼭 껴안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달래주었다.덕분에 긴장이 풀린 곽승연은 스르르 잠에 들었다.반 시간 후, 밖에서 서연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조용히 일어나 문을 열어주었다.눈가가 빨개진 서연정은 소파에 누워 잠든 곽승연을 향해 다가가더니 그녀가 다친 곳은 없는지 자세히 살펴보았다.곽승연이 괜찮다는 걸 확인한 서연정은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옆에 있던 고은서는 그녀에게 종이를 건네주었다.“어머니, 승연이는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서연정은 종이로 눈물을 닦으면서 연시 고맙다고 인사했다.“은서야, 정말 고마워.”고은서는 서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