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은하는 장예정이 수아을 호되게 꾸짖는 모습을 보자 그동안 꽉 막혔던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제현은 옆에서 희희낙락 구경만 하는 은하를 힐끗 보고, 입가를 살짝 비틀며 속으로 은하의 표정을 기억해 두었다.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장예정을 부축하며 설명했다.

“어머니, 너무 과하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수아는 자기 어머니께 드릴 원피스를 고르러 온 것뿐이에요. 저희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어요.”

은하는 고개를 숙였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냉소가 서서히 피어올랐다.

‘나와 어머니를 위해선 단 한 번도 쇼핑하러 나선 적이 없으면서...’

“그래, 네 말대로 정말 아무 일도 없어야지.”

장예정은 아들에게 한 마디 타박을 하며 옆에 서 있는 은하를 슬쩍 보았다.

그녀는 속으로 결심했다.

‘기회가 되면 이 녀석에게 알아듣게 말해야겠어. 은하가 임수아 같은 여자보다 훨씬 나은데, 어째서 수아에게 더 끌리는 거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인지 장예정은 은하에게 가방과 옷을 몇 가지 골라주었고, 제현이 계산했다.

그 틈에 장예정은 느긋하게 은하에게 말했다.

“남자가 돈을 버는 이유는 아내를 위해 쓰기 위해서야. 네가 안 쓰면, 밖에 떠도는 고양이나 개들이 그 돈을 쓰게 되는 거라고.”

은하는 말없이 간단히 미소만 지어보였다.

도중에 제현은 업무가 있어 자리를 떠났다.

장예정은 은하에게 저녁에 본가로 와서 함께 식사하자고 권했지만, 은하는 저녁에 일이 있다며 부드럽게 거절했다.

은하가 떠난 뒤, 장예정은 아연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곧 제현에게 명령조로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밤, 당장 본가로 와.]

...

저녁.

제현은 장예정에게 불려 본가로 갔다.

장예정은 아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화가 잔뜩 난 얼굴로 테이블을 세게 내리쳤다.

“너, 설마 은하랑 이혼할 생각이야?!”

제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음울한 눈빛으로 물었다.

“은하가 그렇게 말했나요?”

장예정은 화가 치밀어 아들의 말을 듣지도 않고 날카롭게 몰아붙였다.

“은하가 말할 필요도 없어! 아연이에게 물어봤더니, 네가 임수아와 얼렁뚱땅 엮인 일이 이미 소문이 파다하더라!”

“은하가 너 때문에 화가 나서 술에 취해 클럽에 갔다는 얘기 들었니? 은하 성격에 그런 임수아 같은 존재를 어떻게 참겠어!”

“너는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은하가 그동안 너에게 어떻게 했는데, 임수아는 또 어떻게 했는데?”

“아들, 그때 네가 교통사고 났을 때 은하가 거의 목숨을 걸고 너를 구했잖아! 그런데 임수아는? 네가 장애인이 될 수도 있다는 소문을 듣고 바로 다른 남자랑 눈 맞아서 떠나지 않았어?”

장예정은 일부러 진강산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조심스럽게 아들을 다그쳤다.

그때 그 교통사고는, 은하가 비록 급한 마음에 구하려 했던 일이긴 했지만, 결국 자신의 생명을 걸고 제현을 지켜낸 사건이었다.

하지만 수아는 제현이 장애인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주저 없이 다른 남자를 만났다.

장예정은 속 시원하게 아들에게 바른 소리를 한바탕 쏟아내고, 제현의 음울한 표정을 보고 나니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더 이상 잔소리를 늘어놓고 싶지 않은 장예정은 단호하게 말했다.

“만약 네가 정말 은하와 살고 싶지 않다면, 얼른 이혼해. 은하도 너 말고 다른 똑똑하고 좋은 남자 만나게 해줘야 할 거 아냐.”

제현은 속이 더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내가 원해서 이혼하자고 한 거야? 심은하가 날 만날 때마다 이혼하자는 말부터 꺼내는 걸 누가 모른다고!’

제현은 화로 붉어진 뺨을 숨길 새도 없이, 홱 돌아서며 방을 나섰다.

그는 기분이 좋지 않은 채로 그날 밤 열리는 비즈니스 초청 만찬에 참석했다.

그날 밤, 제현의 얼굴은 내내 어두운 먹구름이 낀 듯한 표정이었다. 살기를 띤 제현의 얼굴을 보고 아무도 그에게 말 한마디 건넬 엄두도 내지 못했다.

심지어 협력 업체의 사람들조차 벌벌 떨며 제현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문영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은하 형수님도 정말 불쌍하시네...’

그 와중에 제현과 친한 후배였던 문영진이 담배를 피우러 작은 정원으로 나왔다.

그는 제현의 곁으로 다가가 한숨을 쉬며 달래기 시작했다.

“진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으면, 그냥 임수아 무시해요. 형, 설마 아직도 임수아한테 미련 남아 있는 거 아니죠?”

제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대꾸했다.

“너 머리가 이상해진 거 아니야?”

영진은 입가를 삐죽이며, 마음속으로 불만을 삼키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누구더러 이상하대? 진짜 또라이가 누군지 스스로 잘 생각해보라지...’

‘대체 어떤 멀쩡한 남자가 아내를 내버려두고 딴 여자한테만 신경 쓰냐고!’

영진은 마음속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은하 형수님도 참 안됐네... 이런 남편 때문에.’

그때 마침 영진의 시선이 멀리 있는 한 사람에게 닿았다.

그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형, 저기 있는 분... 은하 형수님 아니에요?”

...

오늘 밤의 비즈니스 초청 만찬은 은하에게도 피할 수 없는 중요한 자리였다.

그녀가 몸담은 미디어 그룹에서 인맥을 넓히고 협력 관계를 다지기 위해 공들여 준비한 행사였기 때문이다.

미디어 그룹의 특성상 이런 비즈니스 자리에서 얼굴을 내비치는 건 흔한 일이었지만, 이번 자리는 좀 더 특별했다.

최근 은하가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인터뷰 덕분에, 편집장이 그녀를 회사를 대표하는 얼굴로 내세우기로 한 것이다.

은하는 몸에 꼭 맞는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가늘고 매끈한 허리선이 돋보였고, 자연스러운 화장은 옅었지만 오히려 그녀의 청초하고 단아한 매력을 극대화했다. 그 또렷한 이목구비는 연회장의 조명 아래 더욱 빛을 발했다.

연회장에 들어선 은하를 본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몇몇은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은하는 이 자리에서 제현을 마주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은하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참석한 인사들에게 명함을 건네고 있었다.

그 순간, 옆에 있던 한 남자가 은근슬쩍 은하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으면서 그녀의 온몸을 노골적으로 훑어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한쪽에서 길고 하얀 손이 뻗어 나와 그 남자의 손목을 꽉 잡았다.

“주 대표님이 제 아내에게 하실 말씀이 있나요?”

제현의 목소리는 차가웠고, 그의 표정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주시철은 금방 분위기를 파악하고는 깜짝 놀라며 은하를 잡았던 손을 황급히 놓았다.

그리고 억지 미소를 지으며 얼버무렸다.

“아, 그러셨군요. 진 대표님의 아내였다니... 정말 지혜롭고 아름다우시네요.”

주시철은 머리를 긁적이며 급하게 자리를 떠났다.

은하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옆에 서 있는 제현을 보자 그녀의 마음 한구석이 복잡한 감정으로 어지러워졌다.

결혼한 지 7년 만에, 제현이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아내’로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은하는 마음속 감정을 억누르며 제현의 시선을 맞추고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참 우연이네요. 진 대표님, 우리의 이혼 문제는 생각해 보셨나요?”

그녀의 표정은 가볍고 여유로웠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제현의 속을 더욱 애타게 했다.

“그렇게 이혼하고 싶어?”

“그럼요.”

은하는 차분한 눈빛으로 고개를 살짝 들며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자리를 비워줘야 하지 않겠어요?”

속으로는 울분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당신이 임수아를 그렇게 보물처럼 떠받들고 있잖아!’

‘내가 이혼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진제현의 아내’가 될 수 있겠어?’

제현은 은하를 꿰뚫듯 노려보며 속에서 끝없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

‘심은하, 네 마음 깊숙이 자리한 그 남자가 정말 그렇게 중요한 거야? 심지어 나더러 자리를 비켜 달라고까지 해?’

하지만 은하의 맑고 평온한 눈빛은 오히려 제현의 내면에 불길을 지피듯 분노를 더욱 부추겼다.

더 이상 울분을 삼키지 못한 제현은 비릿한 냉소를 흘리며 단숨에 내뱉었다.

“좋아, 그럼 이혼하자!!!”

...

비즈니스 초청 만찬이 끝난 후, 은하는 자기 아파트로 돌아가지 않고 제현을 따라 집으로 향했다.

“이혼하고 싶다며? 잘됐네. 나랑 집에 가서 짐이나 싸.”

제현은 귀찮다는 듯 그녀를 재촉했다.

은하는 머릿속이 온통 이혼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제현과 말다툼할 기운조차 없어서 조용히 그의 차에 올랐다.

밤바람이 차갑게 불었다.

제현은 찌푸린 얼굴로 자기 외투를 벗어 은하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은하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제현은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 그냥 옷 한 벌일 뿐이니까.”

집에 도착하자마자 은하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녀는 의욕적으로 여기저기 자기 물건들을 정리했고, 제현은 무심하게 담배를 물고는 서재로 들어갔다.

그때, 진순미가 은하에게 다가와 물었다.

“사모님, 이건 무슨 일이세요?”

은하는 잠시 고민하다 대충 둘러댔다.

“당분간 출장 갈 일이 있어서요. 미리 짐을 챙겨두려고요.”

진순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은하는 대부분의 옷과 액세서리를 정리했지만, 시어머니가 몇 년 전에 선물한 공예품은 아직 선반 위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발뒤꿈치를 들고 손을 뻗었지만, 몸이 균형을 잃고 그만 선반에서 떨어진 상자들과 함께 의자에서 넘어졌다.

발목을 찌르는 듯한 통증에 은하는 얼굴을 찌푸렸다.

마침 제현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은하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발목을 삐었어?”

은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현은 몸을 숙여 그녀를 번쩍 들어 올리며 비꼬듯 말했다.

“너무 기뻐서 굳이 감추려다 그랬나 봐?”

은하는 제현의 터무니없는 조소에 반박하려다 문득 할 말을 잃었다. 그때, 남자의 몸에서 스며나오는 은은한 향기가 불현듯 코끝을 스치며, 속마음 어딘가를 찌르는 듯한 묘한 떨림을 안겨주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제현의 목을 감싸 안았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따스한 체온에 은하의 가슴은 저절로 두근거렸다.

그제야 은하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야... 곧 이혼하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마음에도 없는 남자를 사랑해야 했을 내 꼴이 얼마나 애처로웠을까...’

제현은 은하를 방으로 데려가 진순미에게 약을 가져오게 했다.

그는 은하의 발목이 심하게 부어 있는 것을 보고 직접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은하는 통증에 콧물을 훌쩍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야...”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애처로웠다.

제현의 손길이 잠시 멈췄다. 그의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였고, 까맣고 깊은 눈동자에 묘한 감정이 스쳤다.

은하는 고개를 들어 제현의 눈을 마주했다. 그의 눈빛 속에는 억눌린 욕망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순간, 은하의 얼굴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당황스럽고 분한 마음에 그녀는 제현의 다리를 슬쩍 밀면서 속으로는 씩씩거리며 욕했다.

‘정말 미쳤어? 아무 때나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우리가 곧 이혼할 사이라는 건 알고는 있는 거야?’

그러나 제현은 은하의 발목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겨 거침없이 은하의 입술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