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는 문가에 멈춰 섰다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어색하지 않게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태하 이사 도와주고 왔어요.” 그녀는 외투를 문가의 바구니에 벗어 던지며 말했다. “오늘 밤에는 내가 소파에서 잘 테니, 당신이 침대에서 자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그녀는 화장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몇 발짝 걷기도 전에,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와 함께 은하는 순식간에 벽으로 밀쳐졌다. 코끝을 스치는 은은한 나무 향, 그 안에 달콤하면서도 끈적한 과일 향이 은근히 섞여 있었다. 미묘하지만 뚜렷한 그 향기는 임수아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것이었다.“심은하, 우리 아직 이혼하지 않았어.” 제현은 은하의 얼굴에 나타난 미세한 변화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들어 그녀의 턱을 움켜잡았다. 그는 짙은 어둠을 띤 눈과 이가 갈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는 날 죽은 사람 취급하는 거야?” 조금 전 수아가 보여준 사진이 머릿속을 스치자, 제현은 눈앞에 서 있는 여자를 당장이라도 목 조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심은하, 당신 정말로 나에 대해 눈곱만큼도 신경 안 쓰는 거야?’은하는 그의 말에 황당함과 분노가 솟구쳤다. 제현의 손을 단호히 뿌리치며 차가운 목소리로 제현에게 말했다. “우리 이혼은 이미 정해진 결말이잖아요! 지금 와서 또 왜 이러는 건데요?!” “할아버지도 신경 쓰지 않는 거야?” 제현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조 선생이 한 말 잊었어? 만약 할아버지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당신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어?” 그의 말은 노골적인 도덕적 압력이었다. 진강산의 건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제현은 은하가 한발 물러서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당신과 함께 여기에서 지내겠다고 했잖아요!!” 은하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제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 “오늘 부모님 앞에서 이혼 얘기를 꺼내지 않은 이유도 할아버지 때문이었
은하는 아무런 표정 없이 옷을 갈아입고, 씻고 나와 문을 나서기 직전 입을 열었다. “오늘 밤에도 내가 잠결에 침대로 올라오면, 나를 침대에서 발로 차서 떨어뜨려 주세요. 그래도 싸니까요.” 그녀는 ‘그래도 싸’다는 말에 힘을 주어 말한 뒤, 바로 자리를 떠났다. 아래층에서는 장예정이 아침 식사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 은하는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섰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다른 직원들이 자신을 보는 눈빛이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무슨 일 있어요?” 은하는 자신의 자리로 가 앉으면서, 출장에서 돌아온 강유리가 옆자리에 앉아 있는 걸 보고 물었다. “오늘 모두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아서... 혹시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유리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다들 네가 부러워서 그러는 거야.” “내가 뭐가 부러울 게 있나?” 은하는 그녀가 농담하는 줄 알고 가볍게 받아쳤다. “설마 내가 상사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게 부러운 건가?” 그 말을 하자마자 주변이 조용해졌고, 은하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대체 무슨 일이야?” 그녀는 표정을 굳히며 목소리를 낮췄다. “이상한 짓을 한 것도 없는데.” “이상한 짓 한 건 네가 아니지.” 유리는 고개를 저으며 은하에게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PF 그룹의 부세준 대표님은 알지? 그분이 최근에 독점 인터뷰를 한다는데, 원래 우리 쪽에는 기회조차 없었어. 그런데 편집장이 네 이름을 언급했더니 그쪽에서 우리를 선택했어.” 은하의 눈에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PF 그룹 부 대표님이라면... 부세준?!’ 더 물어볼 새도 없이, 편집장에게서 호출이 왔고, 은하는 편집장실로 가야 했다. 편집장이 말한 내용은 바로 부세준의 인터뷰에 관한 것이었고, 그 자리에서 시간까지 확정되었다. 편집장실에서 나온 은하는 부세준의 인터뷰를 맡기로 했다. 인제야 마침내 다른 직원들이 자신을 보는 시선이 이해되었다.
현기증이 잠시 몰려왔다가 사라진 뒤, 은하는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얼굴이 창백한 그녀는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세준을 향해 말했다. “부 대표님, 죄송합니다. 제가 처리해야 할 가정사가 생겨서 오늘은 인터뷰를 진행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오늘 일은 사과드리겠습니다.” 세준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인터뷰 취소가 방금 통화 때문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그는 은하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고, 문쪽으로 걸어가던 중 은하가 거의 넘어질 뻔했지만 남자는 재빨리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세준은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상태로는 운전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목적지를 말씀하시면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부 대표님.” 은하는 세준의 호의를 거절하려 했지만, 유리창에 비친 자기 얼굴이 너무 창백한 것을 보고는 말을 삼켰다. 또 한 번 마음의 빚을 지게 된 그녀는 그 빚을 언제 갚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태하의 담임이 보낸 병원의 주소를 받은 두 사람은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병실 문 앞에 도착하자 안에서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몰라!” 임수아의 어머니인 유미수는 명품 옷을 입고 있었으나, 이전에 은하가 봤던 세련된 모습과는 달리 지금은 꽤 초라해 보였다. 유미수는 아들 임재욱을 자신의 뒤로 감추며 억지로 목소리를 높였다. “내 아들은 아무 짓도 안 했어! 이미 말했잖아, 그 애가 스스로 화장실에 갇혔고, 멋대로 2층에서 뛰어내린 거라고! 우리 아들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 은하의 검은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붉은 입술을 굳게 다문 그녀는 강렬한 분노를 뿜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모님, 제 동생은 경솔하게 행동하는 아이가 아닙니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기 전까지, 일단 말을 아끼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내가 왜 그래야 하죠?” 유미수는 은하를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수아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냉
“이번 일은 제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현은 유미수 편을 들지 않고 냉담하게 말했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결국 밝혀질 겁니다.” 유미수의 웃음은 순간 입가에서 굳어버렸다. 수아의 눈가가 붉어지더니 이내 은하 앞에 다가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은하 씨, 정말 죄송합니다.” 가냘픈 수아의 몸은 머리를 숙이는 순간 하얀 목덜미가 드러나 더욱 연약하고 안쓰럽게 보였다. 그리고 수아의 목소리는 살짝 떨렸다. “제 동생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신고만 하지 말아 주세요. 무슨 일이든 저를 상대로 해결하시면 됩니다. 제가 뭐든...” “당신이 뭘 할 수 있죠?” 세준이 옆에서 가볍게 혀를 찼다. 지금까지 침묵하던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당신 동생은 이 일이 자기 짓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고, 당신 어머니는 자기 아들을 두둔하기만 하죠. 그런데 당신은 와서 부탁도 아니고, 도덕적으로 압박을 가하네요.” “당신들 가족은 그렇게 자기들만을 위해 남을 짓밟나요?” 제현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냉정하게 세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 대표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임수아 씨가 당신 아내인 줄 알겠군요.” 세준은 제현을 빼놓지 않고 지적했다. “처남이 이렇게 당했는데도 편을 들어주지 않고 남을 돕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제현은 세준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며 낮고 차갑게 말했다. “이건 제 집안 문제입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당신이 처리할 필요 없어요.” 은하는 제현을 보지 않고, 오히려 유미수 뒤에 숨어 있는 임재욱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신고했어요. 경찰이 곧 도착할 거예요. 여기서 말다툼할 시간에, 경찰에게 뭐라고 설명할지 생각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은하는 태하를 믿었다. 자기 동생이 사고를 당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감히 내 아들을 신고해?” 유미수는 지금까지 은하 같은 사람을 만난 적이 없어서 당장이라도
“태하는 내 동생이에요. 이번 일은 내가 반드시 끝까지 조사할 거예요.” 은하는 고개를 들어 제현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진 대표님은 그렇게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보호하고 싶다면, 이후에 어떻게 처리할지부터 고민하는 게 좋겠네요. 어쨌든 저는 기자거든요.” 만약 그녀가 이 일을 외부로 흘리고 싶다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윤씨 가문 쪽에는 내가 따로 얘기할 테니.” 제현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정말로 재욱이 그런 일을 저질렀다면, 그쪽 사람들이 사과하러 올 거야. 하지만...” 그는 무심코 시선을 태하 쪽으로 흘리더니, 이내 한 발 앞으로 나아가 태하의 시선을 가로막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지금 자기 신분을 잘 기억해. 어떤 사람과 어울릴지는 신중해야 하지 않겠어?” 그의 말은 은근히 세준을 겨냥하고 있었다. 은하는 제현에게서 익숙한 향수 냄새를 맡았다. 그 순간, 그녀의 눈에는 더 깊은 냉소가 떠올랐다. ‘유부남이면서 딴 여자를 만나고도 나에게 충성을 요구해? 세상에 이런 뻔뻔한 일이 또 어디 있어?’제현이 은하와의 사이에 거리를 두려는 듯 몸을 돌리려는 순간, 은하는 그의 넥타이를 붙잡았다. 그녀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진제현 씨, 나와 부 대표님의 사이는 당신이 상상하는 것처럼 추잡하지 않아요. 그리고 난 당신처럼 역겨운 짓을 저지르지도 않을 겁니다.” 은하는 말을 끝내자마자 그의 넥타이를 놓고 차갑게 밀어내며 지나갔다. 그녀가 떠난 뒤, 제현의 표정은 어두워졌고, 눈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얽혀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서늘하고 냉랭한 기운이 감돌며 침묵만이 남았다.“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제현은 무심하게 한마디를 남기고 병실을 나섰다. 제현이 떠난 뒤 태하는 조심스럽게 은하를 쳐다보며 말했다. “누나, 매형이...” “곧 이혼할 거야. 이제 그 사람은 네 매형 아니야.” 은하는 단호히 태하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곧
유리의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모르겠어. 은하야, 네 동생도 이 일에 연루된 것 같아.] 은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는 방금 세준에게서 들은 정보에 이어, 유리에게서 또 다른 소식을 들은 것이다. “지금 어디 있어? 지금 너 있는 데로 내가 갈게.” 유리가 알려준 주소를 듣고, 은하는 사람을 불러 태하를 돌봐달라고 부탁한 후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카페에 도착하니, 유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은하야, 대체 무슨 일이야?” 은하는 가방을 옆에 놓고 유리 맞은편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리고 유리가 건넨 사진을 받아 들었다. 사진 속 소녀는 단아한 이목구비를 지녔으나, 목 아래는 온통 멍 자국투성이였다. 은하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한 장씩 사진을 넘길수록, 소녀의 상처는 점점 심해졌다. “이거 어디서 난 거야?” 손가락이 사진 위에서 떨리는 것을 느끼며, 은하는 나지막이 물었다. “이 여학생의 정체가 뭐야?” “태하와 같은 반 친구였어. 학교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하더라.” 유리는 복잡한 눈빛으로 은하를 바라보았는데, 자신의 선택이 과연 옳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진은 이 여학생의 오빠가 준 거야. 태하가 예전에 이 여학생 집에 경고했었다고 하더라고. 하지만 그때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고, 이후에 우연한 교통사고가 일어났대.” 은하는 사진을 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녀는 자기 일과 제현에게 모든 신경을 쏟았다. 태하에 대해서는 동생의 인품을 믿었기에 별로 간섭하지 않았다. “태하에게 직접 물어볼게.” 은하는 사진을 다시 유리에게 건네며 조용히 말했다. “나는 우리 동생을 믿어. 태하가 나를 실망시킬만한 일을 하진 않았을 거야. 그리고 이 사건에는 분명히 다른 내막이 있을 거야.” 유리는 은하의 취재 방향과는 전혀 다른 분야를 다루고 있어 이런 정보
“진 대표님은 정말 대단하네요.” 은하는 차 밖에 서서 무표정하게 제현의 시선을 마주했다. 짙은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 읽기 어려웠고, 목소리는 평온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사람을 잘못 봤어요. 진 대표님의 체면 따윈 필요 없고, 이 일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제현의 시선은 날카롭게 가라앉았고, 얇은 입술이 느리게 비틀렸다. “마음대로 해. 하지만 스스로 화를 자초한 거라면, 우리 집안을 끌어들이지 마.” “안심해요. 나랑 이혼만 해주면, 이 일은 절대 진씨 가문과 아무 상관도 없을 거니까요.” 은하는 지지 않고 맞섰다. “우선 이혼 서류부터 정리하고, 할아버지께는 건강이 나아지신 후에 말씀드리면 되겠네요. 아무 문제도 없을 겁니다.” “참 성급하네.” 제현은 무릎 위에 얹었던 손가락을 꽉 쥐었다. 너무 강하게 힘을 준 나머지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변할 정도였다.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착각하고 있나 본데, 할아버지가 뒤로 물러나셨다고 해서 모든 걸 모르시는 게 아니야. 이혼은 꿈도 꾸지 마.” 은하는 눈을 굴리며 대꾸하지 않았다. “어쨌든 내가 알아서 돌아갈 테니, 당신은 신경 안 써도 돼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다른 쪽으로 가서 택시를 잡았다. 병원의 주소를 말한 후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태하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할 시간이 필요해.’ ...은하가 다시 병원에 도착했을 때, 태하는 이미 침대에 기대어 있었다. 누나가 들어오자 태하의 눈이 환하게 빛났다. “누나, 돌아왔어?” 태하는 몸을 곧게 세우며 앞으로 몸을 기울였고, 살짝 아첨하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 몸이 별로 안 아파. 이제 집에 가서 쉬면 안 될까? 병원 냄새는 정말 견디기 힘들어.” “집에 갈 수 있어. 하지만 의사 선생님 허락부터 받아야지.” 은하는 냉정한 시선으로
은하는 핸드폰 앱으로 택시를 부르려 했으나, 한참을 기다려도 택시가 잡히지 않았다.결국 은하는 이를 악물고 근처 지하철역까지 뛰어가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두 걸음도 채 뛰지 못해, 그녀의 시야에 제현이 들어왔다. 병원 정문 바로 앞, 익숙한 검은색 마이바흐가 서 있었다. 창문이 반쯤 내려져 있었고, 그 사이로 드러난 제현의 냉정하고 고고한 얼굴이 보였다. 약간의 조소가 담긴 그의 시선이 스쳐 갔다. 마치 조금 전 은하의 자존심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 은하는 이를 악물었다. ‘분명 방금 이 남자를 내쫓았는데, 지금 또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설마 나를 비웃으려고 온 건 아니겠지?’가느다란 비가 내리는 가운데, 두 사람의 시선이 엇갈렸다. 서로의 눈빛 속에 담긴 감정은 알 수 없었다. 은하는 추위에 온몸이 떨렸지만, 여전히 등을 곧게 펴고 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비가 그녀를 적시며 마이바흐 옆을 스쳐 지나갔다. 제현은 은하가 지나가고 나서야 더 차가워진 눈빛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몇 초 후, 그가 냉소적으로 웃음을 흘렸다. “대표님, 사모님을 막아야 할까요?” 기동빈은 백미러로 상사의 표정을 조심스레 살피며 물었다. ‘분명히 비가 올 것 같아 사모님을 태우러 온 건데,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꼬여버린 거지?’제현은 방금 본 은하의 모습을 떠올렸다. ‘여전히 같은 사람이었지만, 왜 나에게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었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제현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임재욱과 그 여학생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철저히 조사해. 그리고 윤씨 가문 쪽에 연락해서 내 아내가 실수한 게 있다면, 양해를 부탁드린다고 전해.” 동빈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여 몇 통의 문자를 보냈다. “대표님, 모두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까요?” 어두운 조명 속에서, 붉은 담뱃불이 제현의 손끝에서 보였다. 그는 뒷좌석에 기대어 창밖을 응시하며, 한층
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유미수의 얼굴에는 거의 주름이나 기미 하나 없었다. 다만, 말 할 때마다 가끔 드러나는 그 음흉함은 숨길 수 없었다. 은하는 유미수의 위협을 충분히 이해했지만, 감정을 억누른 채 의연하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곧은 자세는 마치 꺾이지 않는 소나무처럼 강인해 보였다. “사모님, 이런 말씀은 다른 사람에게나 통하겠죠. 하지만 저는 여전히 제 동생이 잘못한 게 없다고 믿습니다. 반대로 아드님은 어땠나요? 반복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며 학교 내에서 폭력을 저질렀죠. 사모님께서 아드님을 제대로 교육하지 못한다면, 우리 시에도 소년 보호시설은 있습니다.” 은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유미수의 평온했던 표정이 일순간 깨지는 것을 보자, 은하는 차분히 차에서 내렸다. 이번 대화는 겉으로 보기에 은하가 이긴 듯했다. 그로부터 30분 후 태하가 나오자, 은하는 동생과 함께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요즘 학교에서 누가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어?” 태하는 책가방을 옆으로 던지고 웃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요즘 완전 평화롭다니까. 지난번 대회는 놓쳤지만, 선생님이 다른 시에서 열리는 대회에 나가라고 추천해 주셨어. 요즘 그거 준비하느라 바빠.” 태하의 성적은 늘 우수했으니, 은하도 동생에 대해 별다른 걱정은 필요 없었다. 게다가 얼마 전 태하가 학교에서 뛰어내린 일이 있었던 탓에, 선생님들은 혹시 또 다른 불상사가 생기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태하를 각별히 신경 쓰고 있었다. 그 덕분에 임재욱 역시 함부로 태하를 건드릴 틈을 찾지 못했다. 태하의 최근 학교생활을 전해 들으며, 은하는 잠시나마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하지만 유미수의 경고는 여전히 은하의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설령 자신이 협박과 위협에 시달린다 해도 상관없지만, 태하만큼은 결코 잃을 수 없는 존재였다. 태하는 은하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었으니까.“태하야, 물리 공부에 그렇게 관심 많으면, J 시에 있는 전문 학원에 다녀
일에 대한 걱정 외에도, 은하의 머릿속에는 또 다른 일이 떠올랐다. 카메라 앞에서는 오늘 수아가 일부러 넘어진 상황이 수아의 자작극이고 자신은 결백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었다. 지금은 회사 직원들만 오늘의 일을 알고 있지만, 만약 그 영상이 유출된다면 은하의 커리어는 이대로 끝나버릴지도 모른다. 은하는 바로 광수에게 물었다. “카메라 메모리 카드 좀 볼 수 있을까요? 안에 유용한 자료가 있는지 확인해 보려고요.” 광수는 그녀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고 즉시 장비를 찾아 메모리 카드를 가져오려고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광수가 가져간 여러 대의 카메라를 모두 확인했지만, 오전에 녹화된 영상이 들어 있는 메모리 카드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은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간 편집장이 자신을 배제하고 해당 칼럼 작업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려 한다는 점이었다. 중요한 프로젝트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는 것은 그 어떤 일보다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퇴근 후, 은하는 기운이 없었다. 그때 동생 태하의 전화가 걸려 왔다. [누나, 오늘 저녁에 집에 와서 나 밥 좀 해줄 수 있어?] 며칠간 정신없이 바빠 동생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탓에, 태하는 주로 밖에서 끼니를 때우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태하의 외로운 모습을 상상하자 은하는 동생에게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 스며들었다. 어차피 지금 회사에 남아 있어봐야 할 일은커녕, 밤낮없이 준비한 자료가 다른 이의 공로로 돌아갈 게 뻔한 상황이었다. 그런 판에 굳이 붙잡혀 있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은하는 시계를 확인했다. 마침 태하가 아직 학교에 있을 시간대라는 걸 깨닫자, 그녀는 망설임 없이 동생을 데리러 직접 나서기로 마음먹었다.학교 앞에는 이미 많은 학부모가 차를 세우고 자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고급 차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은하는 조용히 길가 한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차창이 반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은하의 가슴은 여전히 미어지는 듯한 고통으로 가득했다. ‘수년간의 내 진심이 진제현에게는 그저 한낱 거품이었구나.’ 현장 분위기가 점점 심상치 않게 흐르자, 한 직원이 다가와 은하를 조심스레 붙잡으며 설득했다. “은하 씨, 오늘 우리 여기 일로 온 거잖아요. 절대 감정적으로 행동하면 안 돼요.” 그 말에 은하는 속으로 씁쓸히 동의했다. ‘그래. 틀린 말은 아니지. 일을 하면서 억울한 일이 생겨도, 결국 이를 악물고 참아내야 하는 게 현실이니까.’ 깊은 한숨을 내쉰 은하는 이 모든 감정을 꾹 눌러 담으며, 차분히 참아내기로 결심했다.그런데도 제현의 눈빛은 그녀에게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은하가 더 이상 경찰에 신고할 기색이 없자, 제현은 그녀의 핸드폰을 돌려주며 수아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남겨진 회사 직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머뭇거렸다. “그냥 우리도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라이브로 예정되었던 인터뷰가 모두 녹화로 바뀌어 있었고, 회사로 돌아온 뒤에는 편집장이 모든 팀원을 편집장실로 소집했다. 편집장실에는 사람들이 빼곡히 모여 있었고, 이번 인터뷰 실패에 대한 편집장의 분노는 가라앉을 기미가 없었다. “심은하 씨!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일을 이렇게 만든 거예요? 잘 진행되던 인터뷰를 엉망으로 만들다니!” 편집장은 두꺼운 기획서를 책상 위에 내던지며 큰소리 쳤다. 주변 직원들은 고개를 숙이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꾸중을 듣는 분위기였다. 촬영을 맡은 광수도 꾸중을 면치 못했다. 그가 라이브를 녹화로 전환했던 사실이 밝혀졌고, 연말 보너스 절반이 삭감되는 징계까지 받았다. 큰 사건을 수습한 후, 주간 편집장의 사무실을 나오는 직원들의 분위기는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은하는 맨 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며 진광수를 불렀다. 은하는 오늘 다른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제안 때문에 징계를 받게 된 진광수에게만큼은 사과하고 싶었다. “광수 씨, 오늘 일
은하는 이런 비난과 지적에 냉담한 표정으로 응수했다. “임수아 씨, 참 대단한 연기네요. 아카데미상에 도전하지 않는 게 아쉬울 정도예요.” 상황을 자작극으로 해결하려는 수아의 의도는 완전히 빗나갔다. 아무리 누명을 씌우려 해도, 은하는 절대 이런 수아에게 사과하지 않을 것이었다. 은하는 주위에서 구경하는 동료들을 신경 쓰지 않고, 위에서 바닥에 넘어져 있는 수아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아까 본인이 일부러 넘어진 것도, 커피를 자신에게 부은 것도 모두 당신이 한 일이잖아요. 저에게 덮어씌우려면 확실한 증거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수아는 억울한 척하며 말했다. “방금 그 장면 다 촬영됐어요. 라이브로 본 관객들이 다 지켜보고 있었을 거예요.” 그 말이 힌트라도 된 듯, 주변 사람들이 놀라며 말했다. “우리 장비 아직 켜져 있었던 거 아니야?” 이런 일이 라이브로 나갔다면 큰 문제가 될 것이 분명했다. 스태프들이 급히 촬영 장비를 점검했다. 수아는 그런 상황을 보고 입꼬리를 올리며 은하를 바라봤다. 그러나 이내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라이브 장비가 꺼져 있잖아?” “이건 라이브가 아니라 녹화였어!” 수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이미 라이브 형식 인터뷰가 수아의 제안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은하는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 함께 일하며 친분이 있는 카메라 감독 진광에게 부탁해, 라이브를 녹화로 전환해 놓았다. 은하는 담담하게 말했다. “방금 촬영된 화면은 임수아 씨가 넘어지는 장면만 찍혔을 텐데, 그게 제가 당신을 밀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까요?” 그 순간, 카페 직원 한 명이 나서며 은하를 겨냥했다. “촬영이 안 됐다는 것이 당신이 안 했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잖아요. 우리 사장님을 질투해서 이런 짓을 벌였다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라고 보는데요?” 그때, 전화를 끝내고 돌아오던 제현이 이 상황을 목격했다. “무
“죄, 죄송합니다. 방금 한 말은 그냥 농담이었어요.” ‘다분히 고의적인 악담이 이런 사과 한마디로 끝나는 거야?’ 은하는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여러분이 오늘 처음 배치돼서 제 업무 스타일에 익숙하지 않은 거 알아요. 하지만 괜찮아요. 앞으로 함께 일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익숙해질 겁니다.” 그 말에 험담하던 직원들은 은하가 정말 화해를 뜻하는 건지, 아니면 속으로 가만두지 않겠다는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했다. 수아는 그런 상황을 오히려 속으로 즐기며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단순한 오해였던 것 같네요. 심 기자님, 절대 화내지 마세요.” 은하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수아가 건넨 커피를 받아 들며 말했다. “그럼 감사히 마실게요. 고맙습니다, 임수아 씨.” 그녀는 커피를 들고 촬영 장비가 있는 자리로 걸어갔다. 하지만 수아가 이렇게 쉽게 물러설 리 없었다. 그녀는 은하의 뒤를 따라오며 한마디 던지려고 했다. 수아는 녹화 장비의 빨간불이 깜박이는 것을 힐끗 보더니, 눈빛이 살짝 변했다. “심 기자님, 방금 동료들의 말이 저는 아주 그럴듯하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예쁘게 하고 다니니 남자들이 마음을 뺏기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요?” 은하는 수아가 숨긴 의도를 바로 알아채고, 손에 든 커피를 한쪽에 내려놓으며 비웃었다. “혹시 임수아 씨는 자기 외모에 별로 자신감이 없어서 남자의 마음을 붙잡지 못하는 건가요?” 수아는 외모에 대한 지적을 듣고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그녀는 원래 자기 외모에 대해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자, 수아도 더 이상 온화한 척하지 않고 본색을 드러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나와 제현이는 오랜 시간 알고 지냈어. 당신 말 몇 마디로 뺏을 수 있는 사이가 아니라는 뜻이야. 당신도 남자들의 관심이 부족하진 않을 텐데, 왜 꼭 진제현이어야 해? 지난번에 날 죽음으로 몰아넣지 못해 아쉬웠나?” 수아는 눈물까지 글썽이
은하의 반응에 오히려 제현은 은근한 즐거움을 느끼는 듯했다. 그의 입가에 비뚤어진 웃음기가 살짝 번지며, 눈가에 희미한 장난기가 어렸다. “물론이죠. 나도 심 기자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까.”테라스는 습지 공원에 자리 잡고 있었고, 은하 팀의 팀원들이 목재 산책로 위에 유럽풍의 심플한 테이블과 의자를 배치해 마주 앉았다. 은하는 카메라를 잡고 있는 동료에게 손짓을 보냈고,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일할 때 은하는 프로답게 누구보다도 집중력이 뛰어났다. 그녀는 최근 제현이 진행한 여러 사업을 중심으로 꼼꼼히 질문하며 제현의 답변을 끌어냈다. 초반에 제현은 성실히 질문에 대답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제현의 대답은 묘하게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서구 상권 개발과 관련해서는, 앞으로 살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는 방향으로 추진할 계획입니다. 다양한 시설이 통합된 쇼핑몰을 갖출 예정이니, 그때 심 기자도 한 번 체험해 보시면 좋을 겁니다.” 은하는 순간 미세하게 멈칫했지만, 제현의 말 뒤에 덧붙여진 문장은 무시한 채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인터뷰 내내 제현은 질문에 성실히 답하는 듯했으나, 끝에는 꼭 대화를 은하와 연결하려 했다. 그런 제현의 모습은 수아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멀찍이 서서 대기하던 수아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은하도 승자의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결국 자신은 결혼 생활에서도 승자가 아니었다. 촬영 담당 스텝이 손짓을 보내며 중간 휴식 시간을 알렸다. 수아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다가와 직원들에게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희 카페에서 준비한 커피와 디저트 드시러 카페로 가세요. 편히 쉬면서 마음껏 드시면 좋겠습니다.” 무료로 다과를 대접받은 직원들은 고마워하며 카페로 이동했다. 누군가 은하에게 함께 가자고 권했으나, 그녀는 부드럽게 거절했다. “인터뷰 내용을 다시 한번 점검해야 해서요.” 제현은 인터뷰를 마치자
은하는 죽 그릇을 건네기 전에 고개를 들어 제현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는 은은한 빛이 번졌다. “왜 갑자기 라이브 형식의 인터뷰를 하겠다는 거야? 평소 당신 스타일과는 전혀 안 어울리는데.” 제현은 오랜만에 맡는 죽의 익숙한 향기에 약간 안정감을 느꼈다. 그러나 죽을 먹기도 전에 그는 은하의 말을 듣고 이마를 찌푸렸다. “남편으로서, 네 인터뷰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면 안 돼?” 은하는 냉소를 지으며, 뜨거운 죽이 담긴 그릇을 제현의 손에 직접 쥐여주었다. “임수아가 시킨 게 아니라면, 당신이 이런 형식을 생각해 낼 리 없지. 또 무슨 의도가 있는 거야?” 제현은 죽의 뜨거운 온도에 손을 뎄지만, 은하가 일부러 그러는 것을 알면서도 무덤덤하게 반응했다. 제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이미 경고했잖아. 윤씨 가문은 네가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고. 왜 말을 안 들어?” ‘이 남자는 늘 이런 식이야!’또다시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제현의 태도에 은하의 눈빛이 점차 어두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됐어. 더 할 얘기 없어.” 은하는 말을 마치자마자 제현을 지나쳐 주방을 나섰다. 밤은 점점 깊어져 갔고, 주방의 적막함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제현은 식은 죽을 바라보며 손도 대지 않았다. ...은하는 항상 일에서는 고집이 센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 제현의 인터뷰가 예정된 날, 은하의 팀 스텝들은 제현과 사전 조율을 마치고 인터뷰 장소를 카페의 뒤편 테라스로 정했다. 적당한 온도와 날씨에 녹음이 가득한 카페의 테라스는 원래 딱딱한 경제 인터뷰를 보다 부드럽고 흥미롭게 만들어줄 수 있는 배경이었다. 은하는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사전에 현장을 직접 둘러보았다. 하지만 조사를 마친 뒤, 그 카페의 투자자 목록 중 한 사람이 임수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은하는 이번 인터뷰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임수아가 무언가 음흉한 계획을 세우고
은하는 집 안에서 걷기 힘든 태하가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도록 필요한 것들을 챙기고 정리한 뒤, 그를 방에 두고 나왔다. 거실에 나와 보니 제현과 세준 둘 다 보이지 않았다. 대신 핸드폰에 메시지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 [아래층 주차장에서 기다릴게.] 제현 특유의 간결한 문장이었다. 오늘 은하는 몇 차례 제현을 도발했고, 결국 태운 갈치를 억지로 먹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은하에게 이렇게 호락호락 넘어갈 리 없을 것이다. 은하는 메시지를 무시한 채 1층으로 내려가, 단지 입구에서 택시를 잡으려 했다. 시간이 늦어서인지, 근처에서는 택시를 잡기 쉽지 않았다. 은하가 한참 동안 기다렸지만, 호출 앱에서도 택시를 찾지 못했다. 잠시 후, 검은색 차 한 대가 그녀 앞에 멈춰 섰다. 창문이 내려가더니, 제현의 옆모습이 드러났다. 날카롭고 단정한 그의 이목구비는 지금 약간 느긋해 보였다. “내가 보낸 메시지 못 봤어?” 그의 목소리는 평온해 보였지만, 그 속에는 은하만 느낄 수 있는 불만이 감춰져 있었다. 은하는 남자의 기색을 읽고 경계심을 품었고, 마치 전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메시지? 못 봤네.” 제현은 냉소를 지으며, 그녀의 변명을 굳이 따지려 들지 않았다. “타.” 은하는 차에 올라탔다. 그녀는 가까이서 보니, 제현의 얼굴이 창백했다. 은하는 방금 제현이가 억지로 먹었던 그 갈치를 떠올리며, 속으로 짐작했다. ‘설마 그 갈치구이 때문에 속이 안 좋아진 건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는 지키는 마음으로, 은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병원에 가는 게 어때? 상태가 안 좋아 보여.” 제현은 사실 속이 몹시 불편했다. 몇 년간 힘들게 회복된 위장에 다시 탈이 난 것 같았다. 아까 그는 은하 집에서 음식을 거의 먹지 못했고, 지금도 통증을 참느라 이마에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제현은 단호하게 말했다. “병원에 갈 필요 없어.
태하는 방에서 나와 이어폰을 귀에서 빼며 거실로 향했다. 그리고 거실에 앉아 있는 제현을 발견하자마자, 본능적으로 누나를 찾았다. 태하는 제현이 집에 온 것이 몹시 불쾌했다. ‘매형이 여기 웬일이지?’ 은하는 태하에게 제현이 온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동생과 시선을 잠시 마주치며 안심시키려 했다. ‘신경 쓰지 마.’ 은하는 제현이 가장 좋아하는 갈치구이를 그의 앞에 놓았다. 그러나 그녀의 태도는 평소에 비해 지나치게 온화하고, 깍듯하게 예의를 차렸다. “이거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갈치 요리예요. 근데 주방에서 다른 요리에 정신이 팔려 깜빡하는 바람에 조금 오래 구워졌어요. 그래도 괜찮죠?” 모두의 시선이 그 새까맣게 탄 요리에 쏠렸다. ‘이게 갈치야?’ 그녀가 말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제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웃는 듯 말했다. 은하의 이런 반항적인 행동은 처음이 아니었다. 제현은 곧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괜찮아. 네가 만든 요리는 뭐든 좋으니까.” 그의 대답에 말을 잘 하지 않던 태하조차 경외의 눈빛을 보냈다. ‘저걸 먹고도 탈이 안 나면 이상한 거지.’ 네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갈치구이를 제외한 다른 요리는 모두 맛있어 보였고, 향도 좋았다. 은하는 일부러 제현에게 갈치 한 조각을 집어주며 말했다. “한번 먹어봐요. 생각보다 맛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제현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은하의 겉모습은 부드럽고 온화했지만, 그 눈빛 속에는 교묘한 장난기가 숨어 있었다. 제현은 잠시 주저하더니 결국 그 갈치를 입에 넣었다. 모두가 놀란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제현은 옆에 놓인 물 한 컵을 들어 천천히 반쯤 마셨다. 그러나 입안에 퍼지는 짠맛에 그만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도저히 입에 넣고 삼킬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짠맛이었다. 그는 속으로 확신했다. ‘이건 분명 날 위해 ‘특별히 준비한 요리’군.’ 순간 떠오른 생각에 제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