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말씀하시면서, 할머니는 나를 품에 꼭 안고 볼에 연신 뽀뽀해 주셨다. 나도 할머니를 꼭 안았다. ‘부모님께 오만 정이 다 떨어졌어도 내가 자꾸 집에 오는 이유는... 할머니 때문이야.’ ‘할머니는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해 주는 사람이니까.’ 체면을 구긴 오빠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지만, 그는 곧 다시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알죠, 알죠. 그냥 이설이 좀 놀려본 거예요.” “그런데 할머니, 너무 편애하시는 거 아니에요? 저는 이설이 친오빠라고요. 오빠가 좀 놀리는 것
밤이 깊어져 가면서 클럽은 점점 더 시끌벅적해졌다. 형형색색의 조명이 번쩍이고, 술과 음악이 난무하는 공간이었다.송주혁은 고객과 함께 VIP룸으로 향하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뒤에 따라오던 비서에게 동행한 고객을 먼저 룸으로 안내하라고 지시한 후, 옆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그는 심사언을 바라보며 물었다. “형, 오늘이 한민숙 어르신 칠순 아니었어?” ‘오늘 같은 날, 형님이 왜 생일연회에 안 가고 여기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거야?’ 심사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테이블 위
VIP룸 안에는 여전히 죽음 같은 침묵만이 감돌았다.송주혁은 심사언이 ‘이설 형수’ 때문에 화가 난 김에 결국 고씨 저택으로 가서 한민숙 어르신의 칠순 잔치에 참석할 줄 알았다. 하지만 심사언이 다시 자리에 앉아 계속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며, 송주혁은 입을 떼려다 말았다.결국 몇 마디 더 가벼운 대화를 나눈 후, 송주혁은 먼저 자리를 떴다. 심사언은 계속해서 술을 마시고 있었지만, 실상은 술잔을 한 모금 들이켤 때마다 핸드폰을 확인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확인해도, 화면은 그대로였다. 그가 보고 싶은 부재중
나는 분명 죽을 만큼 괴로워하며, 심사언에게 미친 듯이 전화를 걸었을 터였다. 심사언이 와 주기만 한다면, 뭐든지 하겠다고, 어떤 말이든 들어주겠다고, 제발 와 달라고 애원했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나는 미련 없이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다행이야. 이제는 그런 내가 아니라서.’...“사모님, 오늘은 왜 심 대표님이 안 보이세요? 설마, 무릎 꿇고 빌어도 모셔 오지 못 한 건가요?” “아휴, 장 여사님도 참, 왜 그런 걸 꼭 집어서 물어봐요? 사모님은 이미 충분히 속상하실 텐데요.”
예전의 나는 심사언의 무관심과 냉대 때문에 점점 위축되고 소극적으로 변했다. 하지만 내가 저 사모님들의 터무니없는 말을 반박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여자가 왜 같은 여자를 힘들게 하나’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 걸음 물러선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돌아온 건 배려가 아니라, 끝없는 조롱과 모욕뿐이었다.‘그렇다면, 더 이상 참을 이유가 없지. 좋아, 해보자고.’ 나는 저들의 공격을 참지 않고 반격하기로 결심했다.장 여사와 지 여사는 심사언의 이모와 같은 사교계 모임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이주현은 내 반
그렇게 ‘고이설이 심사언 때문에 정신이 나갔다’는 소문이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처음엔 단순한 헛소문이었지만, 돌고 돌다 보니 이상한 방향으로 변질되었다. [심사언이 집에 안 들어오는 바람에, 고이설이 혼자 할머니의 칠순 연회에 참석했대. 결국 사람들한테 조롱당하다가 정신력이 바닥나서 대성통곡했다지?] 이런 소문이 재벌 2세들 단톡방에 퍼지면서, 결국 심사언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는 핸드폰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이 여자, 그동안 내가 너무 편하게 해 준 모양이네.’ ‘사람들한테 조롱당해서 미쳐버릴지언정, 끝
하지만, 이제 그런 생각은 순진한 망상에 불과하다. 나는 그저 그 모든 말을 가만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주변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 귀에까지 전해질 정도이니, 내 옆에 계신 할머니 역시 들으셨을 터였다.할머니는 심사언이 이런 자리에 소아연과 나란히 등장한 것 자체로 이미 기분이 상하신 상태였다.그런데 사람들이 내가 납치당했던 일까지 끄집어내며 조롱하는 걸 듣자, 할머니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나는 재빨리 할머니를 달랬다.“할머니, 저는 괜찮아요. 납치당한 건 맞지만, 하룻밤만 있다가 제가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그것도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서 모욕당하니, 부모님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부모님이 소중한 보물로 여기고 애지중지하는 소아연이 이 광경을 보고는 다급하게 나섰다. 그녀는 여린 목소리로 애원하듯 말했다. “할머니, 화내지 마세요!” “오해예요, 오해하셨어요! 사언 오빠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사언 오빠는 제가 다리를 다쳐서 부축해 준 것뿐이에요!” 옆에서 심사언은 굳은 얼굴로 덧붙였다. “맞아요, 할머니. 오해하신 겁니다. 저는 아연이랑 같이 온 게 아니라, 입구에서 우연히 마주
세상에는 친딸에게도 아랑곳하지 않는 엄마도 있지만, 딸을 위해서라면 뭐든 감수할 수 있는 엄마도 있었다.나는 박만화처럼 솔직한 엄마가 좋았다. 그리고 박만화 같은 엄마를 둔 딸이 부러웠다.“언니, 걱정 마세요. 제가 여기서 나가든 못 나가든, 언니가 딸과 평생 편하게 살 수 있게 도와드릴게요.”내 말이 끝나자, 박만화의 눈가가 붉어지며 울컥한 감정을 애써 참는 듯했다.박만화는 정말 좋은 엄마였다. 간신히 지켜낸 딸과 함께 정말 평범하고, 조용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그래서 나에게 한가지 약속했다.“사모님, 여
엄기준 변호사가 보석 절차를 처리하러 나간 후, 나는 다시 구치소 안의 생활실로 돌아왔다. 챙길 것도 딱히 없었고, 정신적으로 지쳐 있었던 터라 그냥 자리에서 눈이라도 붙이려는 순간, 누군가 내 쪽으로 달려들었다.내 뒤엔 금속으로 된 수납장이 있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도 부딪치면 그 충격에 크게 다칠 수밖에 없는 거리. 하물며 온몸에 철심이 박힌 내 몸은, 한 번만 잘못 넘어져도 반신불수는 각오해야 했다.‘이대로 밀리면 끝이야.’나는 전혀 방심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 나는 생각에 잠겨
심사언은 내가 갑자기 그와 소아연을 이어주려는 듯한 말을 하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불쾌하게 말했다.“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나랑 아연이는 그런 사이 아니라고. 앞으로도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왜 자꾸 나랑 아연이를 엮는 건데?”‘왜냐하면, 당신이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그 애니까.’‘그렇게까지 아끼고 지키는 모습이, 도대체 사랑이 아니면 뭔데?’‘우리 엄마 말대로, 사랑에 ‘과거’가 그렇게 중요하면, 이 세상에 다시 시작할 사랑은 하나도 없지. 옛날 황제도 새어머니랑 결혼했다는데, 너는 왜 못 해?’‘나더러
내가 그렇게 물었을 때, 심사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럴 수밖에 없었다.심사언이 말한 내가 소아연을 해친 ‘그 일’ 말고는, 나는 단 한 번도 누굴 해치거나, 도덕적으로 선을 넘은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내가 계속 물었다. “심사언, 우리는 8년이나 알고 지냈어. 사귄 건 7년이고. 그런데 당신은... 단 한 번도 내 됨됨이를 믿어주지 않았어.” “누가 영상 하나 들이밀자, 아무 확인도 없이, 그게 사실이라고 생각했지. 그걸 보고 ‘이설이가 그랬을 거야’라고 확신했잖아.”“그렇게 쉽게, 나를 믿는 대신 의심을 택
다음 날 아침, 구치소 직원이 와서 내 이름을 불렀다. 면회가 있다는 말에 나는 당연히 엄기준 변호사가 보석 절차를 준비해서 왔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면회실 유리창 너머로 나타난 사람은... 심사언이었다.심사언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눈가엔 온통 핏줄이 터져 있었고, 밤새 단 한숨도 못 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런 상태는 오히려 구치소에서 불안과 두려움 속에 밤을 보낸 나보다도 더 초라해 보였다.그는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잠시 망설이더니 곧 익숙한 목소리로 말했다.“하룻밤 지났으니까, 이제 생각 좀 정리됐
엄마의 눈빛은 잠시나마 흔들렸다. 그제야 문득 떠올린 듯했다. 내가 엄마가 열 달 동안 품에 안고 세상에 낳은, 그 누구보다 가까운 ‘친딸’이라는 사실을.오빠의 시선은 그보다 훨씬 복잡했지만, 그 복잡함 속에 가장 도드라진 건 묘한 안도감이었다. 내가 구속되어 수년간 살아야 한다면, 그 순간부터 나는 그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인생이 된다. 완전히 다른 길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오빠는 그 사실에... 속으로 안심하고 있었다.결국, 나를 감옥에 넣은 건 내 친부모, 피 한 방울 다르지 않은 오빠, 그리고... 함
아까까지만 해도 나를 감싸며 ‘공식 사과만 하면 된다’고 말하던 심사언조차 더는 그런 태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남자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지금이 마지막이야. 이 기회마저 놓치면, 감옥에서 나올 수 없을지도 몰라.”심사언이 그렇게 말했을 때는 이미 마음을 정한 듯했다. 내가 계속 버티고, 끝내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는 결국 나를 직접 법정에 세울 것이다. 소아연이 심사언의 아버지에게 끔찍한 일을 당했을 때의 나이는 겨우 열아홉이었다. 한참 아름다워야 할 나이에, 인생이 무너졌다. 그 뒤로도 소아연
“당신, 진짜 감옥 가고 싶어?!”나는 더 또박또박 말했다. “감옥에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는 그런 짓을 한 적이 없어. 나는 법이 가장 공정한 판단을 해줄 거라고 믿어.”심사언은 내 말에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당신 정말 대단해. 증거가 눈앞에 이렇게 뻔히 있는데도, 아직도 아니라고 잡아떼?” 나는 냉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리고 당신... 혹시... 내가 한 짓이 아닐 가능성은 생각해 봤어?” “안 했다고? 그럼 영상 속 여자는 뭐야? 그게 본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영상 속 사람
정말 모두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심사언과 나 사이의 상황이 한순간에 완전히 뒤집혀 버렸다.예전의 심사언은 성공한 뒤 백마 탄 공주 같은 첫사랑에게 잘해주고, 그와 함께 바닥부터 올라온 조강지처인 나를 무시하던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가진 거 다 내던지며 심사언을 도왔는데, 결국 돌아온 건 냉대와 외면이었다.그런데 지금? 심사언은 나를 미친 듯이 사랑하고, 내가 뭘 하든 무조건 감싸주고, 보호하는 남편이 되었다. 그렇게까지 망가뜨린 소꿉친구 여동생을 두고도, 나를 감싸겠다며 날 감옥에 안 보내려고 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