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어져 가면서 클럽은 점점 더 시끌벅적해졌다. 형형색색의 조명이 번쩍이고, 술과 음악이 난무하는 공간이었다.송주혁은 고객과 함께 VIP룸으로 향하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뒤에 따라오던 비서에게 동행한 고객을 먼저 룸으로 안내하라고 지시한 후, 옆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그는 심사언을 바라보며 물었다. “형, 오늘이 한민숙 어르신 칠순 아니었어?” ‘오늘 같은 날, 형님이 왜 생일연회에 안 가고 여기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거야?’ 심사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테이블 위
VIP룸 안에는 여전히 죽음 같은 침묵만이 감돌았다.송주혁은 심사언이 ‘이설 형수’ 때문에 화가 난 김에 결국 고씨 저택으로 가서 한민숙 어르신의 칠순 잔치에 참석할 줄 알았다. 하지만 심사언이 다시 자리에 앉아 계속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며, 송주혁은 입을 떼려다 말았다.결국 몇 마디 더 가벼운 대화를 나눈 후, 송주혁은 먼저 자리를 떴다. 심사언은 계속해서 술을 마시고 있었지만, 실상은 술잔을 한 모금 들이켤 때마다 핸드폰을 확인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확인해도, 화면은 그대로였다. 그가 보고 싶은 부재중
나는 분명 죽을 만큼 괴로워하며, 심사언에게 미친 듯이 전화를 걸었을 터였다. 심사언이 와 주기만 한다면, 뭐든지 하겠다고, 어떤 말이든 들어주겠다고, 제발 와 달라고 애원했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나는 미련 없이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다행이야. 이제는 그런 내가 아니라서.’...“사모님, 오늘은 왜 심 대표님이 안 보이세요? 설마, 무릎 꿇고 빌어도 모셔 오지 못 한 건가요?” “아휴, 장 여사님도 참, 왜 그런 걸 꼭 집어서 물어봐요? 사모님은 이미 충분히 속상하실 텐데요.”
예전의 나는 심사언의 무관심과 냉대 때문에 점점 위축되고 소극적으로 변했다. 하지만 내가 저 사모님들의 터무니없는 말을 반박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여자가 왜 같은 여자를 힘들게 하나’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 걸음 물러선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돌아온 건 배려가 아니라, 끝없는 조롱과 모욕뿐이었다.‘그렇다면, 더 이상 참을 이유가 없지. 좋아, 해보자고.’ 나는 저들의 공격을 참지 않고 반격하기로 결심했다.장 여사와 지 여사는 심사언의 이모와 같은 사교계 모임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이주현은 내 반
그렇게 ‘고이설이 심사언 때문에 정신이 나갔다’는 소문이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처음엔 단순한 헛소문이었지만, 돌고 돌다 보니 이상한 방향으로 변질되었다. [심사언이 집에 안 들어오는 바람에, 고이설이 혼자 할머니의 칠순 연회에 참석했대. 결국 사람들한테 조롱당하다가 정신력이 바닥나서 대성통곡했다지?] 이런 소문이 재벌 2세들 단톡방에 퍼지면서, 결국 심사언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는 핸드폰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이 여자, 그동안 내가 너무 편하게 해 준 모양이네.’ ‘사람들한테 조롱당해서 미쳐버릴지언정, 끝
하지만, 이제 그런 생각은 순진한 망상에 불과하다. 나는 그저 그 모든 말을 가만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주변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 귀에까지 전해질 정도이니, 내 옆에 계신 할머니 역시 들으셨을 터였다.할머니는 심사언이 이런 자리에 소아연과 나란히 등장한 것 자체로 이미 기분이 상하신 상태였다.그런데 사람들이 내가 납치당했던 일까지 끄집어내며 조롱하는 걸 듣자, 할머니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나는 재빨리 할머니를 달랬다.“할머니, 저는 괜찮아요. 납치당한 건 맞지만, 하룻밤만 있다가 제가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그것도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서 모욕당하니, 부모님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부모님이 소중한 보물로 여기고 애지중지하는 소아연이 이 광경을 보고는 다급하게 나섰다. 그녀는 여린 목소리로 애원하듯 말했다. “할머니, 화내지 마세요!” “오해예요, 오해하셨어요! 사언 오빠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사언 오빠는 제가 다리를 다쳐서 부축해 준 것뿐이에요!” 옆에서 심사언은 굳은 얼굴로 덧붙였다. “맞아요, 할머니. 오해하신 겁니다. 저는 아연이랑 같이 온 게 아니라, 입구에서 우연히 마주
소아연이 우리 집에 온 뒤로, 이렇게 반박할 수도 없고, 반격할 수도 없는 상황이 너무나 많았다. 나는 할머니의 지금 감정을 너무나도 잘 이해했다. 소아연은 정말이지, 내가 따라갈 수 없는 능력을 갖췄다. “할머니, 이건 제가 정성껏 기도해서 받아온 평안부(평안 기도 부적)예요. 할머니께서 남산보다 더 오래 굳건하시고, 동해에 흐르는 물보다 복이 넘쳐나시길 바랍니다.” 소아연은 두 손으로 공손하게 부적을 받쳐 들며, 진심을 담아 축원을 올렸다. 그녀는 원래부터 순수하고 청초한 이미지였다. 그저 보기만 해도, 사람
심사언은 원래 미안함과 부드러움이 섞인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내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굳어졌다.“당신, 또 일부러 묻는 거잖아.”‘내가 뭘 일부러 묻는 건데? 알았으면 묻지도 않았겠지?’‘내가 ‘남편’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얼마나 말을 섞고 싶지 않은지 정말 모르는 거야?’ 나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차분히 말했다.“심사언,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 난 정말로 절벽에서 떨어진 후 일부 기억을 잃었어.”심사언은 비웃듯이 헛웃음을 지었다.“이젠 기억상실 설정까지?”“다른 건 다 기억하면서 딱 한 가지만 잊었다
“심사언이 나를 악독하다고 생각하게 하고 싶다면, 네 몸을 희생하도록 해.”“하지만 나한테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짓, 예를 들어 나를 밀어 물에 빠뜨리는 일 따위는 두 번 다시 하지 마.”“만약 그런 일이 또 발생하면, 참고만 있진 않을 거야. 이 영상을 바로 공개해서 네가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만들 테니까 두고 보라고.” 나는 소아연이 이혼을 빠르게 성사시키도록 돕게 하고 싶지만, 내 몸을 다쳐가면서까지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다. 내 몸은 지금 너무나도 소중했다. 무엇을 위해서든, 더 이상 상처받아선 안 됐다.이 말을
왕여정은 화가 나서 나를 향해 거칠게 욕을 퍼부었다.“고이설, 이 천박한 것! 넌 머리가 다친 게 아니라 심보가 시커멓게 썩은 거야!”“너는 우리 오빠가 아연 언니랑 절대 사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는 거라고!”“세상에 너처럼 악독한 사람이 또 어디 있겠어?!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 높은 절벽에서 떨어지고도 안 죽다니!”‘뭐? 내가 뭐가 악독하다는 거야? 난 분명 비운의 연인을 도와주려는 마음이었는데?’‘그리고 심사언이랑 소아연이 절대 함께할 수 없다고? 아니, 그럼 그날 VIP 룸에서 거의 입 맞추려던 건
뭔가 더 말하려던 심사언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그는 입을 열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어리광 부리는 아이를 대하는 듯한, 무력하면서도 묵인하는 시선으로 나를 한 번 바라보고는 자리를 떴다.그 눈빛이 나는 극도로 역겨웠다.사람들이 모두 떠난 것을 확인하자, 소아연이 제일 먼저 손을 뻗으며 말했다.“보자.”그녀는 내가 정말 녹화했는지 확인하고 싶어 했다.나는 아주 대범하게 어젯밤의 영상을 틀어 보여주었다.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연회장에서 소아연을 그토록 난처하게 만들었으니, 그녀가
병실의 분위기가 미묘해질 즈음, 왕여정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소아연이 눈을 들어 왕여정을 바라봤다.단 한 번의 눈맞춤으로 왕여정은 즉시 상황을 파악하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아연 언니, 걱정하지 마! 내가 경찰에 신고했어!! 곧 경찰이 와서 고이설을 잡아갈 거야!”심사언이 얼굴을 찌푸리며 한층 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여정아, 또 무슨 짓이야? 누가 너한테 신고하라고 했어? 그리고 다시는 새언니 모욕하는 말 하지 마.”‘심사언도 참 이상하지. 나한테 그렇게 행동하면서, 때로는 나를 걱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잖아.’
아빠가 가장 먼저 그 일을 떠올리고는,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나에게 소아연을 위한 지분을 요구했다.‘그 10%의 지분이 수천억 원이 아니라 단돈 만 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가져가려 하네.’‘도대체 언제부터 내가 가진 돈을 쉽게 빼앗을 수 있다고 착각한 거지?’소아연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그녀의 손이 이불을 꽉 움켜쥐는 걸 놓치지 않았다.‘소아연이 단순히 화가 나서 충동적으로 나를 물에 밀어 빠뜨린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었어. 내가 너무 순진했구나.’‘소아연은 처음부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표정으로 말했다.“나는 그저 동생 얼굴이 좋아 보여서 칭찬한 건데요?”“칭찬도 못 해요?”부모님은 내 태도에 더욱 격분했다.“양설아,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변한 거야!”“아연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하는데! 방금도 우리한테 신고하지 말라고, 너를 용서해달라고 부탁하더라. 그런데 너는 그런 동생을 이런 식으로 비꼬아야겠어?”“양심이라는 게 있긴 하니? 왜 그렇게 아연이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엄마는 화가 나서 그릇을 내려놓고 당장이라도 나를 때릴 기세였다.“너는 아연이를 위험에 빠뜨리고도 사
나는 심사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그가 너무 손에 힘을 주고 있어서 함부로 뿌리칠 수 없었다. 그래서 차갑게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놔. 난 사과 안 해.”심사언이 눈썹을 찌푸렸다.“사과하지 않겠다니? 감옥 갈 각오라도 한 거야?” 그는 이번 사건을 단순한 사고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여정이 경찰을 부르겠다고 떠들어대는 걸 듣고는 내가 소아연을 물에 빠뜨렸다고 믿게 되었다.“당신이 이번에도 아연이를 거의 죽게 할 뻔한 거 알고 있어?”“내가 그렇게까지 당신한테 아연이와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약속했는데, 왜
“고이설, 이 천박한 X! 감히 네가 여기 나타나다니!”여자가 소리치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젠장!’나는 급히 몸을 피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한 커다란 몸이 나와 그녀 사이를 가로막으며 그녀의 공격을 대신 받아냈다.나를 구해준 사람은 구은호였다.그는 강한 충격에 눈살을 찌푸렸고, 그 모습을 본 내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았다.‘감히 내 앞에서 사람을 때리다니?’나를 때리지 못한 여자, 왕여정은 더욱 화가 난 듯 구은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넌 누구야? 왜 고이설처럼 천박한 X을 감싸? 혹시 내연남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