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아는 전화를 끊고 나서도 화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 모습은 마치 털을 잔뜩 세운 작은 짐승 같았다.소남은 그녀의 얼굴을 붙잡고 웃으며 뽀뽀했다.“얼마나 화가 났길래 이 모양이 되었지? 여보, 사람은 감정을 잘 통제해야 해. 다른 사람의 일로 너무 화 내지 마. 정말 쓸 데 없는 에너지 소비야.”원아는 고개를 힘껏 끄덕이며 가슴속의 분노를 가라앉히려 애썼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나는 그동안 동 비서가 빈틈없이 일처리를 잘하는 것을 보고 좋은 사람인 줄로만 알았지, 정말 이런 사람인 줄 몰랐어요! 어떻게 이렇게
이연은 소은의 차가운 손을 잡더니 무언가 말하려다 멈추었다.“언니…….”소은은 대답이 없었다. 백문희가 쌍둥이 딸을 빼앗으려 했던 일이 생각나 손끝이 떨렸다. 이연은 소은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위로했다.“앞으로 언니 두 아이와 함께 나하고 여기에서 같이 살아요. 여기는 보안도 다른 동네보다 훨씬 좋고, 혼자서 이렇게 큰 집에 살면서 너무 허전했는데, 마침 잘됐어요. 언니와 아이들이 여기 같이 있으면 외롭지 않고 정말 좋을 것 같아요.”“고마워, 그런데 미안해서 어떻게 그렇게 해. 너도 불
주소은은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이미 남녀 간의 정사를 겪은 그녀는 그런 신음소리가 낯설지 않았다.분명히 여자가 침대 위 정사에 빠져드는 소리였다.여자의 목소리, 소리를 애써 억누르고 은연중에 고통스러워하는 그 여자의 목소리는 당연히 이연의 신음 소리였다.그렇다면, 남자는 누구지?지금 이연과 한 침대에 있는 그 남자가 바로 남자친구 송현욱인가?설마 둘이 지금 뜨거운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일까?소은은 눈살을 찌푸리며 문을 두드리려던 손을 거두었다.그녀가 살금살금 왔던 길을 되돌아 가려는 순간, 이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튿날, 아침.가느다란 햇빛이 거대한 유리를 뚫고 흰 레이스 커튼을 통과해 비쳤다.햇빛은 로즈 골드 빛 카펫 위에 부드럽게 내려 앉았다.원아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 습관적으로 베갯머리를 만졌지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이렇게 큰 침실에 자기 혼자 뿐이었다.그녀는 나른하게 하품을 하고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는데, 바늘이 8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원아는 조금 괴로웠다. 오랫동안 집에서 빈둥거리다 보니 습관이 돼서 생체 리듬이 무뎌 진 것 같아서였다. 전에 그녀는 보통 6시에 일어났는데, 소남이 돌아온 후부터 출근을
하지윤의 비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이연 씨, 놀라지 마세요. 당신이 고X군에 가서 일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에요. 비록 그 곳 지사가 A시와는 조금 멀지만 급여도 두 배로 올랐고 이연 씨의 직위도 어느 정도 올랐으니, 개인적으로 더 이득을 많이 보는 거죠.”이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하지만, 인사이동 전에 우선 당사자인 저한테 의견을 물어봐야 하는 것이 먼저 아닌가요? T그룹은 인사이동 시 늘 공평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인사이동 원칙상 우선 직원들이 원하는 지사로 보내주고, 정 안되면 직원이 원하는 지역과 가까운 지
하지윤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이연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리고는 빨간 매니큐어를 바른 손으로 탁자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당신, 방금 떨어져 있는 사진 봤어요? 못 봤어요?”하지윤의 말투는 평소의 냉혹함과 달리 협박에 가까웠다. 이연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대답했다.“하 부장님, 저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참, 저는 인사이동에 대해 여쭤보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저는 계속 A시에 있고 싶고, 고X군으로 옮기고 싶지는 않아요. 제 아버지가 몸이 안 좋으셔서 제가 여기 남아서 돌봐 드려야 하기 때문이에요. 하 부장님,
원아는 임영은이 주희진의 품에서 통곡하며 울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임영은의 모습은 마치 엄청나게 억울한 일을 당한 듯 보여 원아는 웃음이 날 것 같았다. 원아는 또 그녀의 손목에 감긴 흰 거즈 위로 새어 나온 핏자국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이렇게 전략을 바꿀 줄은 몰랐다. 마약재활센터에서 나오기 위해 자해를 하다니! 원아는 임영은이 아픈 것을 유독 무서워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평소에 주사도 못 맞던 그녀가 자신의 손목을 베는 용기를 내다니, 결코 얕볼 수 없는 여자였다. 원아는 일부러 소매
“영은아, 너는 엄마, 아빠 딸이야. 비록 우리는 혈연관계는 없지만, 엄마는 이미 너를 친딸로 생각하고 있었어. 지금 무슨 바보 같은 말을 하고 있니? 당연히 너를 계속 집에 머물게 할 거야. 누가 너를 쫓아낼 수 있겠어?”그러자 영은은 쭈뼛쭈뼛 원아를 바라보았다.“언니, 언니가…… 저를 임씨 집안에 들이고 싶어할까요?”원아는 그녀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다들 강산은 쉽게 변하고 본성은 변하기 어렵다고 했다. 임영은은 본성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원아는 그녀가 아무리 마약재활센터에서 2달 동안 머물렀다고 해도 갑자기 성격이 좋
소남의 앞에서 원아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없었다.“출근하기 싫은 거예요?”소남은 그녀의 말을 겉으로는 믿는 척하며 물었다. 하지만 그는 속으로 원아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전날부터 출근 준비를 했던 그녀가, 단순히 출근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그런 표정을 지을 리 없었다.‘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것 같아. 하지만 아침부터 무슨 일이 생긴 거지?’소남은 속으로 궁금해하면서도 원아를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원아는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굳이 진실을 캐
“이건 장기적인 투자예요.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거고, 게다가 당신이 진행 중인 연구도 이제 상용화될 때가 됐어요.” 소남은 원아의 귀에 대고 속삭이며, 살짝 감정이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원아가 진행한 연구는 몇 차례의 임상 실험을 통해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었다. 그 후 회사의 마케팅팀이 시장 조사를 했고, 적절한 가격 조건만 맞으면 대부분의 의료 기관이 그 약품을 대량으로 구입하여 환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의사를 밝혔다. 시장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원아는 소남의 가까운 존재감에 살짝 혼란스러워하며 나지막이
소남은 설계 도면을 디스크에 저장한 후, 모든 자료를 서류 봉투에 넣었다. 모든 작업을 마친 그는 원아도 샤워를 끝냈을 것이라고 짐작하며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그는 문을 열고 들어갔고, 원아는 이미 샤워를 마치고 화장대 앞에서 꼼꼼하게 스킨케어를 하고 있었다.원아가 고개를 돌려 소남을 보며 말했다. “다 출력했어요?”“다 출력했어요.” 소남이 대답하며 다가 갔고 원아가 일어서자 그녀를 안으며 말했다. “아까 에런한테서 전화가 왔어요.”“무슨 일이죠...” 원아는 갑작스러운 불안감을 느꼈다. 이런 시간에 에런이 전화를
원아는 설계도를 꼼꼼히 살펴보았다.ML그룹의 입찰 이후, 소남이 이렇게 공들여 건축 설계도를 완성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설계도의 세부 사항 하나하나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대표님, 이 설계도 정말 멋져요!” 원아는 감탄하며 말했다. 그런데 이 말을 하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원아는 생물제약 분야에서 일하고 있지만, 지금은 소남의 건축 설계도에 감탄하고 있는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소남 씨가 방금 내가 한 말을 듣고, 내가 그냥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텐데. 안 그러면
눈이 녹으면서 날씨는 평소보다 더 쌀쌀해졌지만, 이연의 마음은 따뜻했다.예전에는 이연이 감히 송씨 가문 사람들을 마주할 용기도 없었고, 이런 일들을 처리할 결심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현욱의 사랑이 이연의 결심을 굳건하게 해주었다. 즉, 이제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다.“현욱 씨...” 이연이 나지막이 말했다.“난 항상 여기 있어.” 현욱은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혹시 내가 도울 일이 생기면 꼭 말해줘요.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똑똑하지 않지만, 최선을 다해 당신을 도울 거예요.” 이연은 결심하
현욱이 그런 표정을 짓는 일은 드물었다. 그래서 원아는 그가 무언가 중요한 일에 직면해 있음을 직감했다.“그렇겠죠.” 비비안도 원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2층.현욱은 소남을 찾아가 상황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소남은 현욱의 계획을 듣고 나서 얼굴이 굳어졌다.“알겠어. 앞으로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이번에는 형님의 도움이 정말 필요해요. 저도 이번만큼은 절대로 사양하지 않을 거예요. 형님은 제 편에 단단히 서주기만 하면 돼요.” 현욱은 말했다.소남의 지지가 있다면, SJ그룹은 쉽게 무너지지 않
막 앉았을 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는 윤수정에게서 온 것이었다. 재훈은 전화를 받지 않고, 대신 윤수정에게 톡으로 메시지를 보냈다.[형이 확실히 모든 개인 서류들을 전부 다시 발급한 것 같아요. 그 시기가 꽤 이른 편이었는데, 그때는 우리가 이연을 경계하지 않았을 때였죠.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할아버지가 이 문제를 잘 처리하실 거예요.]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재훈은 핸드폰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소파에 몸을 던졌다.‘송현욱과 이연... 너희 둘이 결혼을 했다고 해도, 내가 너희들을 행복하게 내버려 둘 것 같아!’‘
“할아버지, 지금 금고에 있는 형의 모든 개인 서류를 가지고 한 번 확인해 보세요. 아마 지금은 사용할 수 없는 서류들뿐일 거예요. 할아버지께서 형한테 정략결혼을 추진하실 때, 형은 이미 그때 모든 개인 서류를 다시 재발급 신청을 해서 새롭게 발급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재훈은 마음속의 분노를 억누르며, 최대한 차분하게 송상철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송상철의 얼굴은 화가 난 나머지 핏발이 부풀어 올랐고, 유 집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현욱이 이 녀석 당장 데려와.”“예, 어르신.” 유 집사는 이번 일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재훈이 지난번 T그룹의 입찰사업계획서를 훔치려다 실패한 일이 있었고, 그는 그 책임을 부하에게 돌렸지만, 송상철은 여전히 그 일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재훈은 지금 자신이 직접 모든 것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럼 네 엄마는 깨어나긴 한 거야?” 송상철이 다시 물었다.“예, 깨어나셨어요.” 재훈은 거실에서 최대한 인내심을 갖고 서 있었다. 송상철이 모든 질문을 끝내야만 재훈이 서재로 가서 금고를 열 수 있기 때문이었다.송재훈은 송상철의 모든 질문이 끝날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며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