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유골함을 어디에 안치했어?”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얼굴이 창백한 진정우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다른 뜻 없으니 긴장할 필요 없어.”그가 힘을 주어 몸을 일으키는 모습을 본 나는 그가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말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옆으로 다가가 귀를 대자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것만 기억해. 그 유골함에 증거 수집기가 있는데 나의 핸드폰 속 많은 정보가 그 수집기에 동시에 업데이트되어 있어. 만약 어느 날 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 수집기를 들고 경찰에 신고해.”나는 그 유골함 속에 큰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나에게 유골함을 준 용설아도 이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일까?’용설아를 생각하니 질투가 났다.“왜 설아 씨한테 시키지 않아?”진정우는 웃으면서 말했다.“질투하고 있는 거야?”뽀로통한 나의 모습을 본 진정우는 설명했다.“설아와 나는 전우 관계일뿐 그 외의 사적인 감정이 하나도 없어. 그리고...”말을 멈춘 그는 숨을 가다듬었다“유골함 속 잿더미는 설아가 넣은 것이지만 그 속에 뭐가 있는지는 몰라.”그의 말을 들은 나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그럼 수집기를 어떻게 유골함 속에 넣은 거야?”“맞춰봐 봐.”그는 되려 나에게 물었다.나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쉽게 대답했다.“유골함에 뭘 했나 보지.”진정우는 가볍게 웃었다.“역시 내 여자는 똑똑해.”그는 직접 자신이 진정우라고 정체를 인정했다...그가 진정우라고 승인하기를 오랜 시간 기다려왔던 나는 벌이라도 주는 듯 그를 물었다. 그러자 피비린내가 났고 입술을 그의 얼굴에 대고 나는 말을 하지 않았다.구급차가 도착했다. 구급차에 실려 가기 전 진정우는 나에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아무 일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마.”그의 말을 듣고 여전히 불안했던 나는 강진혁에게 전화를 걸었다.“지원아...”나는 직접적으로 물으며 그에게 죄를 인정할 기회를 주었다.“진혁 오빠가 시켰지?”“뭘?”그는 여전히 시치
이 광경을 본 나는 목이 멨다.그가 나를 미리 안심시켰지만 말이다.“의사 선생님, 어떻게 되었습니까?”나는 앞으로 다가가서 불안하다는 듯 물었다.“상황이 심각합니다. 머릿속에 핏덩어리가 신경을 눌러서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나는 의사의 말대로 진정우가 정말로 심하게 다친 건지 아니면 그를 도와 함께 연기 하는 것인지 헷갈렸다.용준호와 강진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심지어 용준호는 거침없이 말했다.“몇 대를 맞았을 뿐인데 혼수상태라고?”“바로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머릿속에 피덩어리가 있어요.”의사의 표정은 엄숙했다.용준호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할 때 강진혁이 끼어들었다.“전문가를 찾아 성재를 치료하도록 하겠어. 성재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나는 영원히 혐의를 벗을 수 없을 것 같아.”이 말은 나에게 들려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가 진정우를 떠보기 위해 보낸 사람들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다.“네, 그러셔도 돼요.”세상의 그 누구도 자신의 능력을 의심받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기에 의사는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그들의 속내를 알고 있는 나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서 간호사를 따라 병실로 향했다. 그러자 용준호도 따라왔다.“성재를 죽은 남자 친구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 지원 씨?”“제 마음이에요? 안 돼요?”나는 그에게 예민하게 대답했다.그는 진정우를 해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드래곤킹에 불러들 인 데는 의도가 있을 것이다.“돼, 안될 게 뭐가 있겠어? 누구를 사랑하는 건 지원 씨의 자유야?”용준호는 조롱하며 말했다.나는 병실 앞에 도착하자 껌딱지처럼 졸졸 따라온 용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준호 씨, 돌아가세요.”용준호는 병실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웃거리며 말했다.“병실 안에 위험한 물건이라도 있는지 알아? 한번 둘러봐야 시름이 놓이거든.”그는 강진혁처럼 진정우가 많이 다친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그들 중 좋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그들을 위해 함정을 판 진정우를 도와 모르는 척 연기를
말을 마친 나는 용준호를 힐끗 쳐다보았다.“누가 당신을 해치려고 하는지 꼭 알아낼 거예요.”용준호는 가볍게 웃었다,“지원 씨는 거짓말도 잘하네.”나는 그를 노려보았다.“거짓인지 아닌지는 앞으로 두고 보면 알아요. 그리고... 이만 나가주세요.”실컷 지껄인 용준호는 진정우가 반응이 없자 나에게 말하고 떠나 버렸다.“지원 씨, 성재는 진정우가 아니야. 너무 깊게 빠져들지 마.”용준호의 말을 무시한 나는 그가 떠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진정우를 바라보았다.시간이 한참 흐른 후 진정우에게 다가가 말했다.“정우 씨, 그들이 떠났어. 눈 떠도 돼.”그러나 아무 반응도 없었다. 나는 그가 장난한다고 생각하고 손을 이불속으로 넣어 그를 꼬집었다.“나 말곤외에 그이제 아무 누구도 없어.”여전히 반응이 없는 그를 본 나는 슬슬 마음이 불안해졌다마음이 불안하기 시작했다...“정우 씨, 정...”그의 이름을 부르던 중 그에게 입술을 물렸다.나의 아랫입술을 문 진정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더 부르다간 모든 것이 폭로되겠어.”나는 그를 꼬집으며 말했다.“누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말래.”그는 애틋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그냥 단지 나를 걱정해 주는 너의 모습이 좋아서 더 보려고 그랬어.”‘이 나쁜자식... 내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 것일까?’“미안해.”그는 또 사과했다.“내가 저번에 죽은 척했을 때 지금보다 더 당황하고 무서웠어?”용설아가 유골함을 나에게 건네주면서 함 속에 든 유골이 진정우라고 했을 때 나의 세상은 마치 12급 대지진을 겪은 듯 한순간 무너지고 말았다.그 당시 고통을 말로 형용할 수 없었기에 나는 그를 세게 꼬집었다.그는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지원아, 아파...”내가 겪었던 아픔은 그가 준 것이었기에 그도 겪어봐야 했다.하지만 머리에 거즈를 두르고 피로 가득한 배액관을 꽂은 그를 본 나는 더 이상 괴롭힐 수가 없었기에 이내그를 놓아주면서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의사가 한 말은 진실이야? 이 배액관
“소희 씨, 소희 씨...”차에서 내린 나는 그녀를 끌어안고 다급하게 불렀다.얼굴을 똑바로 돌려 그녀의 모습을 똑똑히 본 나는 목이 멨다.그녀의 얼굴과 눈은 부어있었고 얼굴에는 상처로 가득했으며 심지어 입술은...피투성이인 그녀는 부어서...그녀의 모습만 보아도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 수 있었다.진정욱의 말처럼 내가 한발 늦었다.“지금 바로 경찰에 신고할게.”그녀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던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안...돼...”이소희는 허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녀의 말을 듣고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자 그녀는 오히려 나를 향해 웃었다. 처참한 얼굴로 웃고 있는 그녀를 본 나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왜?”나는 울먹이며 말했다.“아직도 증거를 더 수집해야 해요.”이소희의 말을 들은 나는 놀랐다.돌아오기를 원하지 않았던 그녀가 다른 사람을 통해 드래곤킹에 들어간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녀는 겁쟁이처럼 숨어서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녀는 진정우처럼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범죄 증거를 수집해 지옥 같은 그곳을 망가뜨리려 했다.나는 말없이 이소희를 꽉 끌어안았다.“병원에 데려다줄게.”그녀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를 차에 앉힌 후 운전하러 가려던 순간 나는 이소희가 방금 서 있던 곳에 피가 흥건히 고여있는 것을 보았다.떨리는 손으로 차 문을 연 나는 이소희를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누워 있는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변태새끼들...’나는 그들이 사람 목숨을 가지고 마음대로 더럽게 논다고 들었으나 이소희의 다친 모습을 보니 너무 놀라웠다.이소희의 상황이 위급하기에 나는 병원 가는 길에 안리영에게 전화를 걸었다.병원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리영은 이소희를 구급차로 옮기라고 했다.나는 또 응급실 문 앞에서 오랜 시간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세 시간쯤 지났을때 응급실 불이 꺼지더니 안리영이 걸어 나왔다.마스크를 벗고 피곤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본 그녀는 처음 보는 표정을
드래곤 킹의 추악한 진실을 폭로하기 위해 예전의 진정우는 죽은척하였고 지금은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맞기까지 했다. 게다가 평생을 망친 대가로 증거를 수집해 온 이소희였다. 지금 경찰에 신고한다면 그들의 노력이 헛될 것이다.만약 경찰에 신고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었다면 드래곤킹도 이렇게 날뛰지 못했을것이다.나도 이런 일은 참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여자의 수호자였던 안리영은 여자가 모욕당하고 학대당하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리영아, 소희 씨 어때? 혹시 의식이 돌아왔어? 면회할 수 있어?”안리영은 말없이 나를 이소희의 병실로 데리고 갔다. 관을 꽂고 산소호흡기를 한 그녀의 모습을 본 나는 안리영이 말한 그녀의 상처가 떠올라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나 괜찮아.”마음이 아파 슬퍼하는 나를 본 이소희는 위로를 건넸다.그녀의 손을 잡은 나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소희 씨, 내가 대신 복수할게. 약속해...”그녀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예전부터 잘 웃는 그녀였기에 나는 그녀가 웃는 모습이 제일 좋았다.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온 세상이 밝아지는 것만 같았다.그러나 현재 그녀의 웃음은 마치 칼처럼 나의 가슴을 찌르고 있었다.“소희 씨, 경찰에 신고해요.”안리영이 말했다.이소희는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안, 안 돼요...”“이건 멍청한 짓이에요.”마음이 아팠던 안리영은 거침없이 이소희에게 말했다.“알아요. 그러나 나는...후회하지 않아요.”분명히 아프고 두려울 것인데 이소희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그녀는 멍하니 한 곳만 바라보았다.“저는 꼭...그들을 처벌받게 할 거예요...”나의 설명을 들었던 안리영은 이소희의 결정을 듣고 놀라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안리영은 그녀를 더 이상 설득하지 않고 위로를 해줬다.“소희 씨의 상처는 제가 최선을 다해 후유증이 남지 않도록 치료해 드릴게요.”이소희는 눈을 감았다.병실에서 나온 안리영은 눈물을 흘리는 나를 보고 휴지를 건넸다.나는 눈물을 닦
이 일에 연루된 사람이 많았다. 게다가 이소희는 심하게 다쳤는데도 위험을 무릅쓰고 조사를 계속하려고 했다.나는 그녀가 다시 같은 일을 겪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다른 피해자가 나서서 증거를 함께 제시하면 이 지옥 같은 드래곤킹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어. 그러나 시도는 해볼 거야. 그리고...”안리영은 머뭇거리며 말했다.“너도 알겠지만, 그 당시 이런 일을 겪고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걸 보면 주저하는 원인이 있을 거야. 지금 찾는다고 해도 협조하지 않을 수도 있어.”그녀는 너무 큰 기대를 하는 내가 걱정되어 한 말이었기에 일리가 있었다.“괜찮아, 최선을 다해 그녀들을 설득해 보자. 만약 그들이 도와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고 도와주지 않는다고 하여도 손해 보는 것은 없으니까.”잠시 흥분했던 나는 마음이 아팠다그녀들이 강박으로 피해를 당했다는 생각을 한 나는 등골이 오싹했다.“내가 빠른 시일 내에 그 환자들의 정보를 정리해 낼게.”안리영은 나를 항상 지지했다.사실 이미 병원 규정을 어긴 셈이었지만 흉악한 그들을 처벌하기 위해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리영아, 조심해야 해.”나는 그에게 말했다.나는 안리영이 그녀들을 찾아가면 그들 중 누군가가 용준호에게 소식을 전해 안리영도 위험해질까 봐 두려웠다.그러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녀가 이 일에 연루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나도 알아. 걱정하지 마!”안리영이 대답했다.그녀 앞에서 자신을 숨길 필요가 없었던 나는 그녀를 끌어안았다.그러자 그녀는 오히려 나를 밀며 말했다.“저리가, 내 몸에 피가 있어.”나는 손을 놓지 않았다.“괜찮아.”안리영에게 잠깐의 치유를 받고 병실로 돌아가자 이소희는 자고 있었다.안리영은 이소희의 몸에 있는 마취약이 풀려서 아주 아플 거라고 했기에 나는 그녀가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의 손을 잡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떠서 나를 바라보았다.“아프면 울어
눈물을 흘리던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언니,나 배고파. 죽 좀 사다 줘”“알았어, 지금 사다 줄게. 고기도 먹을래?”나는 그녀에게 말했다.고기를 좋아하던 그녀는 매번 고기를 먹을 때마다 다이어트해야 한다고 중얼거렸다.“고기를 먹어야 살이 오르는 거죠, 그럼 조금 먹을게요.”이소희는 예전처럼 장난했다.아파도 참으며 웃고 있는 그녀를 보고 마음이 아팠지만 나는 그녀를 따라 웃었다.“그래 네가 제일 좋아하는 고기볶음으로 사 올게.”“나는 비계와 살코기가 골고루 섞인 고기를 원해요.”그는 전처럼 음식에 대한 요구가 높았다.“알았어. 제일 크고 제일 좋은 거로 선택해 올게.”말을 마친 나는 일어서서 병실 문을 나섰다.병실 문을 나선 나는 문 앞에 한참 서 있었다. 얼마 후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벽에 기댄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한참 후 음식을 사러 가던 중 강유형을 만났다.그가 피를 토하던 모습이 섬뜩했던 나는 그를 보는 순간 그의 입에서 피가 분출되던 모습이 생각났다.그는 나와 눈이 마주쳤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유형은 나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그와 나는 마치 낯선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0년을 알고 지냈던 그와 나는 4년을 연애했지만 결국엔 각자의 길을 선택하며 헤어졌다.하지만 오랜 세월이 흘렀기에 그와 나는 평범한 낯선 사람이다.“야채죽 1인분이랑 고기볶음 1인분하고 김치 주세요.”나는 이소희가 좋아하는 메뉴를 주문했다.나는 그녀가 이것저것 먹고 싶어 해도 얼마 먹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래도 나는 그녀가 좋아하는 메뉴 몇 가지를 주문하고 디저트도 샀다.음식을 포장해 돌아가려는 순간 차에 기대어 서있는 강유형을 보았다.방금 비록 말하지 않았던 그였지만 분명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먼저 말을 건네지 않았다.“병원엔 웬일로 온 거야? 어디 아픈 거야?”강유형이 먼저 말을 했다.여기는 병원 식당이었기에 그는 당연히 의문스러웠을 것이다.이소희를 절대로
도시락통을 뒤로 숨기는 나의 모습을 본 두 남자는 웃으면서 엘리베이터에 탔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나는 이소희의 병실로 향했다. 잠시 후 나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고개를 돌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 것을 보고 나는 이소희의 병실로 달려갔다.“소희 씨.”문을 열며 나는 그녀를 불렀다.거친 숨을 쉬는 나를 본 이소희는 물었다.“왜 그래요? 언니?”나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 아닌지 걱정되었다.그녀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병실로 걸어 들어갔다.음식을 침대 옆에 놓으려던 순간 나는 돈뭉치를 발견했고 그것이 그들이 이소희의 입을 막으려고 보낸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아까 그 두 남자는 이소희를 찾아온 것이다. 그녀에게 학대를 당한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입단속하러 온 것이었다.“언니, 이 돈 치워주세요.”그녀의 말을 들은 나는 우두커니 서서 그 돈뭉치를 바라보았다.“이걸 왜 받았어?”이소희는 초점 없는 눈빛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이 돈을 받아야 그들이 안심할 수 있어요. 또 한 저도 다시 돌아갈 수 있고요.”사색이 된 그녀의 얼굴을 본 나는 마음이 아팠다.“소희 씨, 그들의 죄를 밝히려면 또 다른 방법도 있을 거야, 다시 그곳으로 가면 소희 씨가 죽을 수도 있어.”그녀가 겪은 고통을 알 수가 없기에 나는 그녀더러 포기하라고 설득할 수는 없었다.그녀는 평생을 그들에게 짓밟혔기에 그들을 망가뜨릴 이유가 있다.침대 옆에 음식을 놓은 지 한참이나 지났지만 그녀는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그녀는 음식을 먹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스스로 상처를 치유할 공간을 주고 싶었다.나는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고 진정우의 병실로 갔다.바로 전에 검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이소희를 매수하듯이 누군가 진정우를 찾아오는것이 두려웠던 나는 경계를 하였다. 그러나 누구도 오지 않았다.아마도 진정우가 의식이 없는 줄로 알고 있는 그들이기에 찾아와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그리고 진정우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
나는 오직 그녀만을 믿었다.“괜찮아. 초음파 사진 봤어. 아기는 아주 건강해.”안리영의 곱고 단정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저 그렇게 미묘하게 번진 웃음 하나가 내겐 믿음을 주는 보약처럼 느껴졌다.“리영아, 제발 이 아이만은 꼭 지킬 수 있게 도와줘.”나는 긴장과 초조함 속에서 그녀에게 매달리듯 말했다.“당연하지. 이건 너랑 정우 씨의 사랑의 결실이잖아.”안리영이 장난스럽게 받아쳤다.강유형은 고개를 돌렸다. 감춰지지 못한 외로움이 스쳐 지나갔다.그와의 관계에서 나는 이미 완전히 빠져나왔다. 그 역시 이별을 받아들였다고 하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듯했다.안리영 덕분에 나는 병실에, 그것도 VIP 병실에 입원할 수 있었다. 그녀의 당직실이 아니라 정식 병실이었다.아랫배의 통증도 가라앉았고 출혈도 점점 잦아들었다. 마음이 조금 놓이자 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그 강 선생님이라는 사람, 갑자기 부임한 거라면서? 어떻게 된 일이야?”안리영은 반 박자쯤 쉬었다가 입을 열었다.“소희연의 고모인가 이모인가 그래.”이 말을 듣고 나는 바로 눈치를 챘다. 슬쩍 그녀의 표정을 살폈지만 전과 다를 건 없었다. 다만 얼굴이 조금 더 야위어 보였다.그녀는 구안석과 헤어졌다. 게다가 먼저 끝내자고 한 것도 그녀였다. 실망이 극에 달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그래도 구안석은 그녀가 오랜 세월 마음을 품었던 사람이었다. 그 오랜 감정을 끊어낸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나는 그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그런 감정은 그 누구도 위로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위로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저 무심히 말했다.“강유형이 병원장한테 얘기할 것 같아.”“고자질할 만하면 해야지.”안리영은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가만히 당해줄 호구도 아니었다.나는 웃음이 터졌다.“의사 선생님답네. 칼 쥐고 돈 받는 직업이라 그런가 마음도 차갑기 그지없군.”“남한테 괜히 마음 써봤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셈이나
“유산 조짐이 있습니다.”그 말을 듣자 나는 마치 환청이라도 들은 듯 얼이 빠졌다.‘유산이라니?’“의사 선생님, 저 임신한 거예요?”놀라움과 기쁨이 한꺼번에 몰려와 나는 의사의 가운을 붙잡았다.“몰랐어요?”의사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러고는 곧 못마땅하다는 듯 한마디 덧붙였다.“요즘 젊은이들은 쾌락만 즐기고 책임질 생각을 전혀 안 한다니까요.”의사는 나와 강유형을 연인으로 착각하고는 설교를 퍼부었다.하지만 지금은 그걸 해명할 정신도, 그의 핀잔에 대응할 여유도 없었다. 나는 재차 물었다.“선생님, 저 정말 임신한 거 맞죠?”“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유산 조짐이 보여요. 아이를 지킬 수 있을지는 아직 몰라요.”의사의 말에 나는 그의 가운을 더 꽉 움켜쥐었다.“제발 부탁드릴게요. 아이를 지켜 주세요.”흥분에 겨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요즘 들어 이유 없이 아이가 갖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는데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선물처럼 안겨 오다니 꿈만 같은 소식이었다.그런데도 나는 멍청하게 지금까지 아무것도 몰랐었고 그로 인해 아이를 놀라게 하고 말았다.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왔다.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아가야, 아무 일 없어야 해. 꼭...’“우선은 보태부터 시작할게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화장실을 가는 것과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무조건 누워 있어야 해요. 일주일 정도 상태를 지켜본 후에 다시 판단할 겁니다. 계속 출혈이 있으면 아이는 지키기 힘들지도 몰라요.”의사는 이미 키보드를 두드리며 처방전을 작성하고 있었다.“선생님, 여기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받을 수 있을까요?”나는 지금 몸을 함부로 움직이기 두려웠고 그저 병원 안에 머무르고 싶었다.이 병원엔 안리영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산부인과 과장이기도 하다.지금은 또 수술에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내가 안정을 취할 수 있게 도와줬을 것이 분명했다.“지금은 남는 병상이 없어요. 일단 집에서 안정을
“이 난장판에 끼어들 생각은 없어요. 대단하신 지원 양이 알아서 해봐요.”함소은은 그렇게 말하며 용은서의 손을 잡아당겼다. “가자. 준호 오빠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너랑 놀아줄 틈 없어”“싫어요! 나랑 안 놀아줄 거면 저 언니를 내려놓으라고 해요! 언니가 나랑 놀아주면 되잖아요!”이 아이는 참으로 귀엽고 사랑스러웠다.“그래, 그럼 여기서 계속 붙잡고 있어. 난 먼저 간다.”함소은은 아이의 손을 놓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용준호에게 한마디 던졌다.“이번엔 너한테 맡긴다. 제대로 잘 봐. 잃어버리기만 해봐, 아주 그냥.”그러고는 정말로 가버렸다. 그것도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아주 태연하게 말이다.이 여자는 정말 대단했다. 아이는 그렇게 내버려둔 채로 신경도 안 쓰고 가버렸다.하긴 자신의 딸을 납치까지 했던 사람이니 용준호한테 애를 맡기는 건 별일도 아닐 게 분명했다.하지만 그녀의 행동이 내게는 도움이 됐다. 용은서가 용준호를 붙잡고 있는 덕분에 날 업고 도망가기는 어렵게 됐으니 말이다.함소은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유형이 도착했다.코피는 이미 멈췄지만 낯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용준호, 윤지원 놓아줘. 아니면 오늘 나랑 끝을 보든지 해.”강유형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용준호랑 한패도 아니었고 평소에 저렇게 거칠게 말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코피도 아직 덜 닦았구먼 왜 또 여기서 영웅 행세야?”용준호가 빈정거리듯 말했다.“오빠 피도 아직 안 말랐거든.”용준호가 날 어깨에 짊어지고 있어 답답하긴 했지만 한마디는 해야겠다 싶었다.용준호는 내 말을 완전히 무시한 채 강유형을 바라보며 말했다.“강유형, 이 여자는 이미 딴 남자랑 잤어. 이제 너랑은 아무 관계 없는 여자라고.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남이 쓰던 걸 다시 쓰고 싶냐고.”‘이 자식이 지금 날 뭐라고 한 거야? 지금 붙잡혀 있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렸을 텐데.’“내려놓으라고 했어. 헛소리는 그만하지?”강유형은 더 이상 말다툼할 가치도 없다
사람들이 나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모두 의혹 가득한 눈으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멀찍이 서서 바라볼 뿐이었다.용준호는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어느 새끼가 감히 널 구하려는지 두고 보자고!”그는 너무나도 오만방자했다.“오빠!”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용준호가 걸음을 멈추었다. 뒤집힌 시야 속에서 만두 머리를 한 여자아이를 보았다.바로 용은서였다.내가 이 여자아이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전에 용준호는 콧방귀를 뀌었다.“저리 썩 꺼져.”살벌한 목소리에 평범한 아이였다면 벌써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하지만 용은서는 그의 혈육이었고 평소에도 늘 호통에 익숙했는지 전혀 겁내지 않고 당당하게 물었다.“왜 사람을 업고 있어? 강도 같아!”대담한 발언이었다.“꺼지라니까.”용준호는 음을 길게 끌며 말했다.“사람 말을 못 알아듣나? 집에서 안 가르쳐줬어?”용은서는 눈을 흘기며 받아쳤다.“오빤 맨날 이렇게 화내.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용준호가 다시 호통을 치려는 순간 용은서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오빠, 나 할 말 있어.”용은서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내가 제대로 서 있기만 했어도 당장 품에 안아서 볼에 뽀뽀를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하지만 용준호는 여전히 사나웠다.“꺼지라고 했지. 말 안 들으면 발로 차버린다.”혈육에게 말이 너무 지나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후려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하지만 용은서는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고 오히려 그의 바지 끝을 움켜잡으며 나를 바라보았다.“은서야, 언니 구해줘!”나는 목소리를 냈지만 어린아이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이 소꿉장난처럼 느껴져 부끄럽기 그지없었다.“윤지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애한테 도움을 청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냐?” 용준호는 나에게도 으르렁댔다.지금의 그는 미친개처럼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 중이었다.“오빠, 왜 언니를 업고 있어? 다쳐서 걷지 못해?”용은서의 질문은 철없는 아이다운 순수함이 묻어났다.용준호의 인내심은 바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