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쉽게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특히, 여자 앞에서는 더더욱.하지만 지금, 나는 허진호가 내 앞에서 눈가가 붉어지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내는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그가 그렇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먹먹했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그의 사무실을 나와, 그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충분히 진정우를 기릴 수 있도록 공간을 내어주었다.이 회사가 진정우의 것이라고 했지만 공식적인 사장은 허진호였다.그만큼 두 사람 사이의 신뢰가 깊었고 진정우는 그를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겼다.그런데 이제, 진정우가 사라졌다. 그를 기다리던 허진호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의 슬픔도, 나 못지않을 것이다.나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진정우의 연구실로 향했다. 그는 연구개발을 했기에 직접 실험을 진행하는 일이 많았고 책상 위에는 각종 실험 도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하지만 그 많은 장비에도 불구하고 연구실은 전혀 어수선하지 않았다.나는 천천히 다가가 책상 위에 놓인 실험 기록 노트를 집어 들었다. 빼곡하게 적힌 숫자들, 그리고 그가 직접 쓴 강직한 글씨들. 손끝으로 글자를 따라가다가, 다시 가슴이 아려왔다.모든 것이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그는 더 이상 여기에 없었다.그가 남긴 것들은 내 손에 닿지만 정작 그는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 그가 있었던 흔적이 이렇게나 선명한데 그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나는 자리로 앉아 그의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평소 그가 쓰던 펜, USB, 블루투스 이어폰, 그리고 기록 노트가 있었다.그리고 눈에 띄는 투명한 상자 하나가 있어 나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꺼내 열어보았더니 안에는 묘하게 낯선 질감을 가진 가느다란 팔찌가 들어 있었다.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금속이나 은이 아니라,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재질이었고 잠금장치가 없었다. 혹시 빠진 걸까 싶어 상자 안을 뒤적이다가 몇 개의 미완성 부품과 함께 접혀 있는
“솔직히 말해봐, 너 윤지원이랑 해봤어?”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와 막 들어가려던 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문틈 사이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강유형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지원이가 먼저 다가왔지만 난 관심 없었어.”“강유형, 그렇게 사람 깎아내리지 마. 윤지원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 미인이야. 꽤 많은 사람들이 윤지원을 노리고 있다고.”말하는 사람은 강유형의 친구 신지태였다. 그는 나와 강유형의 10년 감정을 지켜본 증인이기도 했다.“너무 익숙해서 그래.” 강유형이 눈썹을 찌푸렸다.내가 14살 때 강씨 집안으로 보내졌고 그때 처음으로 강유형을 만났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 말했다. 앞으로 강유형과 결혼할 거라고.그 후로 우리는 함께 살았고 어느새 10년이 흘렀다.“그렇지. 너희 둘은 낮에는 한 회사에서 일하면서 얼굴 보고 밤에는 집에 와서 같은 식탁에서 밥 먹고. 아마 상대방이 하루에 몇 번 화장실 가는지까지 다 알겠어.”신지태가 농담을 던지고는 혀를 찼다. “지금은 오래 보면 정든다는 시대가 아니야. 남녀 사이엔 그래도 신선함이 있어야 하지.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그런 느낌, 그래야 감정이 생기고 자극적인 법이야.”강유형은 침묵했고 신지태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듯했다.“그래서 너 윤지원과 결혼할 거야?” 신지태의 질문에 내 숨이 멎는 것 같았다.강유형의 부모님은 우리에게 혼인신고를 하라고 하셨다. 그는 좋다고도, 싫다고도 하지 않았고 나도 그에게 묻지 않았다. 그러니 신지태가 나 대신 물어본 셈이다.강유형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신지태가 웃었다. “결혼하기 싫어?”“...그건 아니야.”“그럼 결혼은 하고 싶은데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는 거지?” 신지태와 강유형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사이라 서로의 마음을 잘 알았다.“지태야, 이런 말 들어봤어?” 강유형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뭔데?”“먹자니 맛없고 버리자니 아깝고.” 강유형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강유형은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고 그의 시선이 내 얼굴에 머물렀다. 굳이 보지 않아도 내 안색이 얼마나 좋지 않은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어디 아파?”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나는 말없이 그의 책상 앞으로 걸어가 목구멍에 맺힌 쓴맛을 삼키며 말했다. “나랑 결혼하고 싶지 않다면 내가 아주머니한테 말씀드릴게.”강유형의 미간 주름이 더 깊어졌다. 그는 내가 그와 신지태의 대화를 들었다는 걸 알아챘다.난 목이 메어 말을 잇기 힘들었다. “난 내가 먹자니 맛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존재가 될 줄은 몰랐어, 강유형...”“모든 사람들 눈에는 우린 이미 부부야.” 강유형이 내 말을 끊었다.‘그래서 뭐? 그 사람들 때문에 나랑 결혼하려는 건가?’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가 나를 사랑해서, 나와 평생을 함께 보내고 싶어서 결혼하는 거였다.‘탁’하는 소리와 함께 강유형의 손에 든 펜이 닫혔고 그의 시선이 내 손에 든 혼인 신고서에 머물렀다. “다음 주 수요일에 혼인신고 하러 가자.”이 말은 내가 듣고 싶었 거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가슴이 아팠다. 그것도 아주...난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강유형, 억지로 할 필요 없어. 나도 그럴 필요 없고.”“윤지원!” 그가 날카롭게 내 이름을 불렀다.나는 움찔했고 고개를 들어 그의 짜증 난 듯한 눈과 마주쳤다.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고 혼인 신고서를 쥔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그의 턱이 굳어졌다. “이리 줘.”나는 움직이지 않았고 분위기는 더욱 팽팽해졌다.몇 초 후, 그가 일어나 내게로 왔고 내 앞에 서더니 한숨을 살짝 내쉬며 말했다. “지태랑 한 얘기는 그냥 농담이었어. 넌 왜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거야?”정말 농담이었을까?“너도 알잖아. 남자들에게 체면이 얼마나 중요한 거.” 그의 손이 내 팔을 잡더니 천천히 내려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혼인 신고서를 빼앗아 갔다.“앞으로는 남의 말 함부로 믿지 마.” 그가 돌아서서 혼인 신고서를 서랍에 넣고 옆에 있
하루 종일 이 문제를 고민했지만 오후에 그가 나를 부를 때까지도 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도 난 그를 따라나섰다.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10년이란 시간 동안 나는 그에게, 그리고 퇴근 후 강씨 집안으로 돌아가는 일에 익숙해져 버렸다.“왜 말이 없어?”돌아가는 길에 강유형이 내 기분이 좋지 않음을 눈치챘는지 먼저 물었다.나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강유형, 우리 그냥...”뒷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의 휴대폰이 울리면서 차량 디스플레이에 이름 없는 번호가 떴고 강유형의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그가 긴장했다.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다.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는 이미 재빨리 차량 스피커를 끄고 블루투스로 전환했다. “여보세요... 네, 지금 가고 있습니다.”통화 시간은 짧았다. 그는 전화를 끊고 나를 보며 말했다. “지원아, 급한 일이 생겨서 집에 데려다줄 수가 없겠어.”사실 그가 말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나를 내버려두고 갈 거라는 걸. 이미 처음이 아니었으니까.그래도 그가 말하기 전까지는 나를 먼저 데려다줄 거라고 기대했었다.가슴 한구석이 갑자기 텅 비어 아파왔고 나는 서운함을 억누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강유형의 턱이 굳어졌다. 그는 대답 대신 밖을 보며 말했다. “저기서 내려줄게. 택시 타고 돌아가.”설명조차 해주지 않고 이미 다 결정해 놓은 듯했다. 그러니 내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더 묻고 떼를 쓰는 건 스스로 망신당하는 일일 뿐이다.“집에 도착하면 전화... 메시지 보내.” 강유형이 당부하는 사이 핸들은 이미 돌아가 도로변 임시 주차장에 멈춰 섰다.나는 가방을 꼭 쥐고 차에서 내렸다.내가 예민한 게 아니다. 그가 발신번호를 본 후의 이상한 반응부터 차량 스피커로 통화하지 않으려 한 것까지, 이미 예감이 왔다.다만 묻지도 말하지도 않았을 뿐이다.어떤 일들은 묻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그대로 두고 자기 위안을 할 수 있으니.“조심해서 가!” 서두르는 와중에
평생 이런 일을 겪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성추행 혐의로 경찰서에 끌려올 줄이야.그날 내가 부딪힌 건 고작 열일곱 살의 미성년자였다. 그 녀석은 내가 자기를 더럽게 만졌다고 우겼고 내가 아무리 부인해도 소용없었다.“어디를 만졌다는 거죠?” 경찰이 꼼꼼하게 물었다.조태혁이라는 소년은 나를 노려보며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더니 허리 아래를 가리켰다. “여기요, 여기... 이 여자가 다 만졌어요.”‘개소리하지 마, 이 자식아!’나는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강유형 같은 미남도 못 만져본 내가 겨우 털도 다 안 난 꼬맹이를 만진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경찰이 다시 나를 쳐다보자 난 그가 묻기도 전에 먼저 부인했다. “전 그 애를 만지지 않았어요. 그저 실수로 부딪쳤을 뿐이에요.”“술 드셨나요?” 경찰의 눈빛이 의미심장했다.이 사회에서 남자가 술에 찌들어 사는 건 정상이지만 여자가 술을 마시면 대부분 품행이 의심받게 된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셨어요.”“얼마나 드셨죠?” 경찰의 이 질문이 지금 상황과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맥주 한 병이요.”경찰은 믿지 않는 눈빛을 보였다. 난 즉시 내 친구 안리영이 증인이 돼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 꼬맹이와 내가 다투고 있을 때 안리영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출혈 중인 산모를 구하러 병원으로 긴급 소환됐다고.난 경찰의 의도를 이해하고 다시 한번 설명했다. “전 취하지 않았어요. 술 핑계로 이 꼬맹이를 건드릴 이유도 없고요.”경찰은 내 말을 기록하고 조태혁을 바라봤다. “저 여성분께서 만졌다고 확신해요? 거짓말이나 무고는 법적 책임을 져야 합니다.”“당연히 확실하죠” 조태혁은 정말 고집불통이었다. 나는 화가 나서 일어나 그를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그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조태혁의 눈이 갑자기 반짝였다. “누나, 왔어?”그가 미성년자니 당연히 보호자를 불렀을 거다. 나는 그의 가족에게 설명하려고 고개를
내 손이 아플 정도로 꽉 잡혔다. 분명 그가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이게 질투인 걸까?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이 스치는 순간 강유형은 내 손을 놓았고 그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윤지원, 내가 한마디 했다고 이렇게 복수하려는 거야?”나는 순간 당황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으니까.“아니 난...” 설명하려는 내 말은 도중에 끊겼다.“너 정말로 그 녀석을 만졌어? 정말로 그곳을?” 강유형의 턱이 굳어졌고 그의 눈에는 사람을 잡아먹을 것 같은 무서운 빛이 서렸다.이런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는데 역시 질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순간 내 마음속의 불편함이 많이 사라졌다. 그가 나를 여전히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만약 그가 나를 단순히 여동생이나 친구로만 여겼다면 내가 다른 남자를 만졌다고 해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아니야.” 나는 다시 한번 부인했다.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조태혁이 안에서 나왔고, 나를 향해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변태 아줌마, 또 우리 매형 꼬시려고?”사람 성격 쉽게 안 변한다더니 정말 그랬다.조태혁이 나를 바라보는 그 비열한 표정은 전생에 무슨 원수라도 졌나 싶을 정도였다.이쪽으로 걸어오는 남매를 보면서, 특히 조나연의 그 순수한 모습과 그녀가 강유형을 만졌던 장면을 떠올리며 나는 손을 들어 강유형의 팔을 감쌌다.하지만 그의 근육이 순간 굳어지는 걸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또 거짓말이지.” 조나연이 조태혁의 귀를 꼬집으며 다가왔다.그녀는 우리 앞에 서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유형 씨, 지원 씨, 정말 미안해요.”“네 잘못 아니야.” 강유형이 조태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음에 또 이런 짓 하면 아무도 널 구해주지 않을 거야.”“흥.” 조태혁이 불만스럽게 강유형을 흘겨보았다. “당신이 누군데요? 뭔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해요? 당신이 우리 새 매형이 되겠다면 말 들을게요.”“조태혁!”조나연이 꾸짖으며 그를 한 번 더 때렸고 조태혁은 피하며 말했다. “누나, 저 사람
조나연은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아이는 무사했고 그녀는 병실로 돌아왔다. 창백한 얼굴에 붉어진 눈, 거기에 하얀 달빛까지 더해져 정말 애처롭고 가련해 보였다.“너무 걱정하지 마. 아이는 괜찮아.” 강유형이 위로했다.“유형 씨, 나 너무 무서웠어.” 조나연이 울음을 터뜨렸다. 강유형이 휴지를 건네자 조나연은 그것을 받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그의 손등에 기댔다.비록 가엾긴 하지만 그렇다고 남의 약혼자를 자기 남자처럼 대해도 되는 걸까?나는 다가가 말했다. “나연 씨,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가 흥분하면 태아에게 좋지 않대요. 겨우 아이를 지키셨는데 이렇게 울다가 또 문제가 생기면 곤란해질 거예요.”말하면서 난 그녀를 부축하며 강유형과 살짝 떼어놓았다. 하지만 강유형의 손등에 남은 눈물자국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내 것이 다른 사람에 의해 더럽혀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깨끗한 걸 좋아한다. 일상에서도 그렇고 감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조나연은 내가 이렇게 말한 것에 놀란 듯했다. 그녀는 얼굴색이 확 변했다가 순식간에 표정을 바로 잡았다.“유형 씨, 미안해. 내가 이렇게...”그녀가 휴지를 집어 강유형의 손을 닦으려 하자 내가 가로막았다. “나연 씨, 지금은 함부로 움직이면 안 돼요.”조나연의 표정이 굳었다. 눈물 고인 눈으로 강유형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분명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병실을 나오자마자 나는 강유형에게 물었다. “나연 씨가 널 좋아하나 봐?”“아니야!”강유형이 부인했다.“그럼 넌? 나연 씨를 좋아해?”한 번에 확실히 물어보고 싶었다. 애매하게 끌려다니고 싶지 않았으니까.강유형의 표정이 굳어졌다. 몇 초 후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그저 친구일 뿐이야...”정말 그저 친구일까?“석진이가 세상을 떠날 때 내 손을 잡고 나연이를 돌봐달라고 했어...” 강유형의 목소리가 떨렸고 늘어뜨린 손도 마찬가지였다.임석진의 죽음을 언급할 때마다 그는 항상 이렇게 격앙되
지금은 내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흥분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이 순간 그가 전화를 받거나 나가버린다면 나로서는 모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강유형의 목젖이 움직였다. 그는 휴대폰을 집어 들어 바로 끊어버리고는 다시 내 목과 쇄골에 입 맞추기 시작했다...하지만 휴대폰이 곧바로 다시 울렸다. 이 전화를 받지 않으면 우리 둘 다 평온할 수 없을 것 같았다.나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받아.”강유형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스쳤다. 그는 옆에 있던 이불을 끌어다 나를 덮어주고는 휴대폰을 들고 발코니로 나갔다.그가 발코니 문을 닫긴 했지만 그의 낮은 목소리가 여전히 들려왔다.“지금 안 돼. 간병인을 부르는 게 어때?”“돌보지 않겠다고 한 적 없어... 내 잘못인 걸 알아... 알았어, 울지 마. 갈게, 지금 갈게...”그 후로는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다만 라이터 켜는 소리만 들렸다.강유형이 담배를 피웠다.처음으로 집에서 담배를 피웠다.약 10분 후 강유형이 돌아왔고 공기 중에 담배 냄새가 섞여 있었다.그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불안함이 묻어났다. “저기... 잠깐 나가봐야 할 것 같아. 나연이가 병원에 있는데 돌볼 사람이 없어서...”드물게도 그가 나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숨기지 않았다.하지만 이불 속 내 몸이 차가워졌다. “남자인 네가 나연 씨를 돌보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해?”“난, 난 나연이한테 간병인을 구해주러 가는 거야.” 강유형은 말하면서 이미 내가 흐트러뜨린 그의 옷을 정리하고 있었다.그를 붙잡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난처함과 서운함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코끝까지 올라왔다. “강유형.”“응?”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는데 그의 눈 밑에는 불안함이 가득했다.아마도 내가 그를 붙잡고 가지 못하게 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유명한 사업가인 강유형이 언제 이렇게 두려워했던가. 지금 내 앞에서 그는 긴장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이 순간 내 목구멍에 걸린 말을 더 이상 꺼낼 수 없었다. 나는 쓴
남자는 쉽게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특히, 여자 앞에서는 더더욱.하지만 지금, 나는 허진호가 내 앞에서 눈가가 붉어지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내는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그가 그렇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먹먹했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그의 사무실을 나와, 그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충분히 진정우를 기릴 수 있도록 공간을 내어주었다.이 회사가 진정우의 것이라고 했지만 공식적인 사장은 허진호였다.그만큼 두 사람 사이의 신뢰가 깊었고 진정우는 그를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겼다.그런데 이제, 진정우가 사라졌다. 그를 기다리던 허진호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의 슬픔도, 나 못지않을 것이다.나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진정우의 연구실로 향했다. 그는 연구개발을 했기에 직접 실험을 진행하는 일이 많았고 책상 위에는 각종 실험 도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하지만 그 많은 장비에도 불구하고 연구실은 전혀 어수선하지 않았다.나는 천천히 다가가 책상 위에 놓인 실험 기록 노트를 집어 들었다. 빼곡하게 적힌 숫자들, 그리고 그가 직접 쓴 강직한 글씨들. 손끝으로 글자를 따라가다가, 다시 가슴이 아려왔다.모든 것이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그는 더 이상 여기에 없었다.그가 남긴 것들은 내 손에 닿지만 정작 그는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 그가 있었던 흔적이 이렇게나 선명한데 그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나는 자리로 앉아 그의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평소 그가 쓰던 펜, USB, 블루투스 이어폰, 그리고 기록 노트가 있었다.그리고 눈에 띄는 투명한 상자 하나가 있어 나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꺼내 열어보았더니 안에는 묘하게 낯선 질감을 가진 가느다란 팔찌가 들어 있었다.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금속이나 은이 아니라,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재질이었고 잠금장치가 없었다. 혹시 빠진 걸까 싶어 상자 안을 뒤적이다가 몇 개의 미완성 부품과 함께 접혀 있는
신입 사원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씩씩하게 대답했다.“그럼요! 윤 부장님, 밥 사주세요.”그 직설적인 대답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좋아, 그럼 오늘 저녁에 다 같이 ‘성해 반점’에서 모이자. 내가 쏠게.”“정말이죠?”“당연하지.”“와! 윤 부장님 최고!”신입 사원은 신나서 뛰어나갔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별것 아닌 대화였지만 회사 분위기가 한결 밝아진 것 같았다.가방을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본 후, 나는 허진호가 있는 사무실로 향했다.“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는 책상 가득 쌓인 서류에 파묻혀 있었다. 누가 들어왔는지도 모른 채 바쁘게 사인을 하고 있었다.나는 그의 책상을 흘끗 바라봤다. 거기에는 내가 맡았던 부서의 서류들도 섞여 있었다.‘역시, 내가 아무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건 이 사람이 뒤에서 버텨주고 있었기 때문이구나.'내가 없는 동안, 모든 업무를 그가 대신 처리했을 것이다.“허 대표님, 이렇게 혼자서 모든 걸 떠안고 일할 거면 차라리 사람을 더 뽑는 게 낫지 않아요?”내 말을 들은 허진호는 순간 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그는 나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세상에, 윤 부장님! 드디어 돌아오셨네요! 저 정말...”그는 말을 멈췄지만 나는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내가 회사로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하지만 만약 내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왜 새로운 직원을 뽑지 않았던 걸까? 혹시 내 퇴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허 대표님, 저 복직할 수 있는 거죠?” 나는 직설적으로 물었다.“당연하죠! 무조건! 그런데 복직 안 하면 설마 퇴사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절대 안 돼요. 회사 규정상 최소 1년은 근무해야 사직이 가능하다고요!”그의 말에 나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계약서에 그런 조항이 있었어? 나 왜 몰랐지?’“이건 말도 안 되는 규정이에요.”나는 장난을 치며 말했다.“서명했으면 끝난 거예요. 이제 와서 불평하
나는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강유형을 바라봤다.“네가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난 이미 알고 있으니까.”강현우의 눈빛이 깊어졌다.“누구라고 생각하는데?”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몸을 일으키며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다.“지원아, 설마 형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형이랑 만나려는 것도 결국 진정우의 복수를 위해서야?”오랫동안 나를 사랑했던 사람답게, 내 속마음을 읽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진혁 오빠 아니야? 그렇다면 진짜 배후가 누구인지 알려줘.”내 질문에 그는 잠시 말을 삼켰다가 조용히 대답했다.“지원아, 형은 아니야. 사실 나도 정확한 배후가 누군지는 몰라. 그때 네게 말했던 건 그저 추측이었어.”나는 조급해하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아니라면 더 좋지. 그렇다면 내가 진혁 오빠를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겠네.”강현우의 표정이 굳어졌다.“지원아…“나는 깊은숨을 내쉬며 담담하게 말했다.“우린 10년을 알고 지냈고 4년 동안 사랑했어. 그리고 나는 진정우를 사랑하게 됐지. 나는 여러 가지 사랑을 경험했어. 짝사랑이 이루어지는 설렘도, 운명처럼 빠져드는 감정도. 하지만 결국 사랑이란 건 너무 피곤한 감정이더라. 이제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선택하고 싶어.”“좋아, 네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건 이해하지만 형은 절대 안 돼.”강현우는 강하게 반대했고 나는 미소 지으며 되물었다.“왜 안 되는데? 이유를 말해봐.”그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지원아, 이유 모를 리 없잖아. 꼭 내가 말해야 해? 내 형이잖아. 너는 한때 내 약혼녀였고. 둘이 같이 있으면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볼 것 같아? 우리 가족은 또 어떻게 보겠어? 나더러 어떻게 널 마주하라는 거야?”나는 잠시 침묵했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그럼 네 체면과 감정을 위해, 난 내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는 거야?”그는 내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마음의 준비
만약 강유형이 정말 이대로 다리를 잃게 된다면 내가 그에게 진 빚이 너무 클 것이다.하지만 그와 더 이상 복잡하게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저 할 수 있는 한 그를 설득해 제대로 치료를 받게 하려는 것뿐이었다.“그렇게 심각하지 않아. 몇 번 더 치료받으면 괜찮아질 거야.”그는 창백한 얼굴로 힘없이 말했고 목소리조차 기운이 없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그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그를 더 설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강유형이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네가 돌아왔으니, 내 상처도 금방 나을 거야.”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지만 그는 곧장 화제를 돌렸다.“신지태가 널 몇 번이나 찾았어. 내가 말리지 않았으면 실종 신고라도 했을걸?”나는 한동안 연락을 끊고 지냈다. 그동안 나를 걱정한 사람들이 많았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지태 오빠 오늘 와?”나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모르겠어. 네가 왔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뛰어올걸?”그는 핸드폰을 집어 들며 신지태에게 연락하려 했다.그러나 팔을 움직이는 순간, 상처에서 뻐근한 통증이 밀려온 듯 그는 순간적으로 멈췄다. 나는 그의 감싼 팔을 조심스레 붙잡으며 말했다.“굳이 전화할 필요 없어. 내가 돌아왔으니, 곧 만나겠지.”그는 통증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의사 불러줄까?”그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적셨다.“물 좀 줘.”나는 컵을 건네주었고 그는 두어 모금 마신 후에야 얼굴이 조금 나아 보였다.“형은 너 보러 왔어?”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번 왔었어.”“어제 돌아오면서 우연히 마주쳤어.”“어디서?”“샤부샤부 집에서.”강유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의 반응이 흥미로워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나랑 참 인연이 깊은 것 같아.”그는 내 말을 단숨에 이해했는지,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지원아,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돌려 말하지 말고 그냥 말해.”나는
“지원아, 돌아왔구나?”강진혁이 나를 보며 살짝 놀란 듯, 그리고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네, 오늘 막 도착했어요.”나는‘오늘’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대답했고 안리영도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오자마자 이렇게 마주치는 거 보면 진짜 우연인가 보네요.”강진혁은 그녀의 말에서 숨은 의미를 느꼈는지, 위층을 가리키며 덤덤하게 말했다.“고등학교 친구들이 며칠 전부터 약속 잡고 여기서 모이기로 했어.”마침 누군가 그를 불렀다.“진혁아, 우리 먼저 갈게.”그는 멀리 있는 친구들에게 손짓하며 배웅한 뒤, 다시 우리를 바라보며 물었다.“더 필요한 거 있어? 주문할 거 있으면 내가 계산할게.”그의 말투는 자연스러웠지만 분명 의도적으로 챙기려는 느낌이 들었다.“이미 결제했어요.”안리영이 대신 대답했다. 그러자 강진혁은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지원아, 좀 쉬고 나면 집에 와서 밥 한 끼 하자. 부모님이 네 걱정을 많이 하셔.”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조만간 먼저 연락할게요. 그리고... 휴링턴에서 신세 많이 졌어요.”굳이 ‘휴링턴’을 언급한 이유는, 그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서였지만 그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짧게 대답했다.“그래.”그는 안리영에게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 우리는 유리창 너머로 그가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그 순간, 안리영이 내 발을 슬쩍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물었다.“뭐야, 강진혁 아직도 너 못 잊은 거 아냐?”나는 시선을 다시 테이블로 돌리며 끓어오르는 국물 속에서 부글거리는 재료들을 바라보았다.“리영아, 나는 지금... 강진혁이 이 모든 일의 배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뭐라고?”그녀는 놀라서 젓가락을 들던 손을 멈췄다. 나는 휴링턴에서 발견한 것들에 대해 조용히 이야기했다.“앞으로 내가 하는 일이 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해해 줘.”안리영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이상하게 보인다니, 도대체 뭘 하려고?”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나는 의료 서적을 넘기며 한 장 한 장 읽어 내려갔다. 문외한인 내가 이런 책을 본다는 게 쉽지 않았지만 지난 한 달 동안 고요한 시간을 보내면서 마음이 차분해져서인지 의외로 집중이 잘 됐다. 어쩌면 이제야 비로소 내 마음이 가라앉았다는 증거일지도 몰랐다.얼마 후, 안리영이 수술을 마치고 돌아왔다. 문 앞에서 나를 보던 그녀는 몇 초간 멈춰 서 있더니, 아무 말 없이 다가와 나를 꼭 안아 주었다.“돌아왔네.”진정우의 일을 나는 오직 안리영에게만 이야기했다. 진정우를 어디에 묻었는지 아는 사람도 그녀뿐이었다.나는 그녀의 어깨에 기대며 익숙한 소독약 냄새를 맡았다.“나, 갑자기 훠궈가 먹고 싶어.”“좋지! 당장 가자!”그녀의 대답에는 묘하게 들뜬 기운이 섞여 있었다. 어쩌면 그녀도 내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게 반가웠던 걸지도 몰랐다.그래, 나도 이제 다시 살아가야 했다. 진정우는 떠났지만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았다.식사를 하던 중, 문득 떠오른 듯 물었다.“강유형, 본 적 있어?”“그럼, 매일 보지. 악어한테 물린 이후로 계속 우리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어.”그녀의 말에 나는 젓가락을 멈췄다.“벌써 한 달이 넘었잖아? 아직도 치료 중이야?”“응. 상처가 아물질 않아서 계속 곪고 있대. 이미 몇 번이나 괴사한 살을 도려냈다더라.”그 말을 듣는 순간, 강유형이 악어에게 물렸던 장면이 눈앞을 스쳤다.“그 정도로 심각했어?”“직접 가서 볼래?”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나 때문이잖아.”안리영이 고기를 집어 내 그릇에 올려주며 말했다.“많이 먹어. 한 달 사이에 살이 너무 빠졌어.”“그래? 나 하루 세 끼 잘 챙겨 먹었는데.”나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진정우 곁을 지키는 동안에도 먹고 자는 것만큼은 철저히 지켰다.“그럼... 마음고생 때문인가 보네.”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나는 안리영을 보며 피식 웃었다.“넌 얼굴이 더 좋아진 것 같은데? 교수님이랑 잘 지내나 보네?”
나는 진정우를 고국으로, 그리고 우리가 함께 꿈꾸던 집으로 데려왔다.해가 지는 어느 저녁, 우리는 그가 노후를 함께 보내고 싶다던 그 땅에 그를 묻었다. 그렇게 하고도 쉽게 떠날 수 없어 나는 그의 곁에 꼬박 35일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다녀왔다.어릴 적 어머니가 이야기하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영혼은 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소중했던 사람 곁에서 머문다고. 흔히 말하는 35날이라는 기간 동안 말이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것을 믿고 싶었다. 그가 홀로 떠나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함께 있어 주고 싶었다. 그의 영혼이 완전히 떠난 후에야 나도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그동안 나는 세상과의 연락을 끊고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진소영이 그랬던 것처럼 책을 읽고 꽃을 따서 차를 우려 마시고 그림을 그렸고 그림 속에는 온통 진정우뿐이었다. 그를 그릴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강진혁의 방에 빼곡히 걸려 있던 내 초상화들이었다.아침과 저녁이면 그의 곁에서 혼잣말을 하듯 이야기를 나눴다.“진정우, 오늘 밤 꿈에라도 와서, 그때 못다 한 말을 마저 해줄래?”“진정우, 네가 너무 보고 싶어. 너를 안아보고 싶은데 이제는 만질 수도 없잖아. 그런 공허한 아픔이 날 미치게 할 것 같아.”“진정우, 오늘 길에서 다친 작은 새를 주웠어. 어미는 보이지 않더라. 내가 잘 키울 수 있을까?”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그의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가끔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마치 마지막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던 그의 손길처럼 느껴졌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침내 35번째 날, 나는 새로 딴 꽃을 들고 그의 곁을 찾았다.“진정우, 오늘이 네가 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날이야? 내일부터는 정말로 네가 없는 걸까? 나도 이제 돌아가야겠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마주해야 할 사람들을 만나야 해. 그리고...”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나는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널 함정에 빠뜨린 사람을 찾아야겠어.”그 순간, 바람
나는 무겁게 발을 떼며 앞으로 걸어갔다. 신지태가 나를 부축하며 문 앞까지 데려다주었지만 안으로 들어가기 전 이미 누군가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그 사람의 품에는 검은색 상자가 안겨 있었고 그의 얼굴에는 깊은 슬픔과 혼란이 서려 있었다. 나는 그 상자를 보는 순간, 숨이 멎었다.신지태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나를 더 단단히 부축했지만 그마저도 희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온몸의 감각이 무뎌졌다. 나는 다시 정신을 붙잡으려 애쓰며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다가 문 안쪽,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용설아를 한눈에 그녀를 보았다.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저 등 뒤로 느껴지는 깊은 절망과 슬픔만으로도 충분히 모든 걸 알 수 있었다.그 순간, 발이 땅에 박힌 듯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신지태도 함께 멈춰 섰고 우리 둘 다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잠시 후, 용설아는 천천히 몸을 돌렸고 그녀의 두 손 위에는 검은색 상자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대로 시야가 흐려지며 쓰러질 뻔했다.용설아는 내 앞까지 걸어와 조용히 말했다.“이건 진정우가 남긴 마지막 부탁이에요. 그가 원했던 대로, 지원 씨가 직접 그를 데려가 주세요. 두 분이 가장 좋아했던 그곳에 묻어달라고 했어요.”나는 그녀가 들고 있는 상자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지난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그와 함께 걸었던 들판, 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던 약속들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살자고 했던 말.그러나 그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나에게 마지막 부탁을 남겼다.그를 그곳에 묻어달라는 마지막 부탁 말이다.‘이건, 나보고 죽으라는 말이야?’나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상자를 노려보았다.“왜 나를 기다리지 않았어?”작은 상자 하나에 다 담길 리 없는 그를 떠올리며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왜... 기다려주지 않았어, 진정우?”“정우는 지원 씨가 그 순간을 직접 마주하지 않길 바랐거든요.”용설아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힘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정우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강유형과 신지태 오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고 그들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하게 물었다.“둘 다 몰라?”나는 머릿속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서도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그럼 내가 직접 찾아갈게...”그 순간, 신지태가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나를 붙잡았고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왜 그래?”“지원아, 이제 받아들여야 해. 진정우는... 더 이상 없어.”강유형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알아... 나도 알아.”그러면서도 어설프게 웃으며 덧붙였다.“그래서, 그를 보러 가려고 해. 조용히 곁에 있고 싶어서.”그 순간, 신지태의 손끝에 힘이 들어가면서 살짝 아프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내 팔을 더 강하게 움켜잡았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오빠, 너무 아파.”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지원아... 진정우는... 없어. 더 이상 볼 수 없어.”그 말에 나는 얼어붙은 듯 멈춰 섰고 눈앞이 흔들렸지만 나는 애써 강하게 말했다.“아니, 난 볼 수 있어. 그러니까 가게 해 줘.”“지원아!”신지태가 단호하게 나를 불렀지만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려 하며 애타게 말했다.“제발, 가게 해 줘.”그 순간, 강유형이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볼 수 없어. 그는 이미... 화장됐어.”그 순간, 내 손이 허공에서 멈춰 섰고 나는 서서히 강유형을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고 온몸이 얼어붙은 듯 머릿속이 텅 빈 느낌이었다.“강유형.”신지태 오빠가 낮게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여전히 내 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지원아... 진정해.”나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그 말이 거짓이길 바랐다.“그 말, 거짓말이지...? 진정우... 진짜 아니지?”신지태 오빠의 눈이 더 붉어졌다.“지원아, 울고 싶으면 울어.”나는 울고 싶지 않았다. 아니, 나는 믿고 싶지 않았다. 눈앞이 흐려지면서 몸이 떨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