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에 용진표는 미소를 지었다.“똑똑한 여자네. 다음 생에선 좋은 집안에 태어나기를...”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일어섰고 나는 몸이 갑자기 앞으로 기울며 그가 신발을 신고 있는 곳으로 거의 쓰러질 뻔했다.용진표의 경호원이 바로 다가와 나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이를 막았고 대신 나를 매섭게 쳐다보며 말했다.“이제 사실을 다 알았으니 뭘 더 하고 싶어? 내가 널 풀어줄까?”나는 그가 날 풀어주길 원했고 나는 아직 죽을 수 없었다. 이렇게 죽으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대표님이 말한 내용이 믿기지 않아요. 내가 원하는 건 대표님이랑 저랑 삼촌과 셋이서 마주하게 해주세요. 아니면 삼촌에게 전화라도 해서 제가 듣고 싶은 말을 하게 해주세요”이 말은 진심이었고 또한 나는 사실 시간을 끌고 싶었다. 시간을 끌어서 누군가가 나를 구하러 오게 하고 싶었다.하지만 누가 나를 구하러 올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용진표를 계속해서 바라보며 그를 붙잡고 있었다.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나를 무시하고 경호원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 순간 나는 끌려 나갔다.용진표가 떠난 뒤 나는 다시 손발이 묶인 채로 갇혔고 그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내가 그동안 삼촌과 아줌마한테 받은 친절이 정말 진심이 아니었던 걸까? 그들이 나를 잘 대해준 이유는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 때문일 뿐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내가 강유형을 살릴 수 있는 피가 있어서?’나는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내게 십 년 동안 변함없이 잘해줬고 그게 가짜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긴 시간이었다.그러니 아마 용진표가 나를 속이고 있을지도 몰랐다.‘그런데 왜 나를 속여야 하는 걸까? 내가 삼촌과 아줌마를 미워하도록 만들기 위해서?’하지만 용진표는 지금 날 죽이겠다고 했으니 내가 그들을 아무리 미워한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그렇게 나는 앉아서 고민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밖의 빛이 점점 어두워지는 게 느껴졌다. 심지어 나를 지키는 사람도 없어진 것 같았다.‘용진표가 나를 굶겨 죽일
딱딱한 가슴과 익숙한 냄새에 나는 잠시 멈칫했고 고개를 들자 눈앞에 진정우가 있었다.그는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나를 간절하게 응시하고 있었다.그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를 보고 나는 그동안 느꼈던 두려움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와 헤어졌던 기억은 이제 가물가물해졌고 그의 옷깃을 움켜잡으니 마치 구명줄이라도 잡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는 손으로 내 허리를 감으며 물었다.“다쳤어?”“아니.”내가 대답하자 밖에서부터 거칠고 더러운 욕을 하는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다음 순간, 진정우는 나를 끌어안자 나는 공중으로 떠오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들려오는 발차기와 주먹 소리만이 나를 감쌌다.이건 마치 TV에서나 볼 수 있는 액션 장면이 지금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비록 진정우가 다른 사람과 싸우는 걸 처음 보는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여러 명을 상대로 혼자서 모든 적을 쳐부수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진정우는 역시 군인 출신답게 정말 대단했다.이 순간 이전에 강유형이 말했던 Q 클럽의 보스가 위험에 처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때는 진정우일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그가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는 모습을 보니 사실 진정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정말 그렇다면 진정우의 앞날도 순탄치 않을 것이다.’내가 계속 생각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덮쳤던 사람이 진정우의 손에 의해 넘어졌고 그는 나를 안고 서 있었다.그는 땅에 널브러져 있는 사람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훑으며 말했다.“보스에게 전해. 나 진정우의 사람한테 손을 대지 말라고.”그는 말을 끝내고 나는 문 앞에서 얼어붙은 채로 서 있는 함소은을 보았다. 그녀는 놀란 듯 몸을 움찔하며 고개를 저었다.“저는 지원 씨를 해치려던 게 아니었어요. 저는... 지원 씨를 풀어주러 온 거예요.”사실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함소은 때문이었지만 지금 함소은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고 나는 진정우의 손끝을 잡고 더 꽉 움켜잡았다.“여기서
진정우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이미 조사를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왜? 왜 나한테 말하지 않는 거야?” 나는 다급하게 물으며 그의 의자에 손을 올려서 내리쳤다.끽!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차가 멈췄다. 그는 운전대를 꽉 쥐었고 그러자 손목에서 핏줄이 튀었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숨이 멎을 듯했다.“돈 때문이야.” 나는 진정우의 대답을 듣고 그를 멍하니 바라봤지만 그는 내게 등을 돌린 채 운전하고 있어 나는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그때 진소영의 병이 떠올랐다. “그게... 소영이 치료비 때문에 그런 거야?”진정우는 차 안의 수납함을 열어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고 몇 번이나 라이터를 눌러야 겨우 불이 붙었다. 그리고 그는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지원아, 우리 아버지가 네 부모님을 죽인 범인이야. 이건 운명의 빚이야. 부모의 빚은 자식이 갚아야 하니 앞으로 내 목숨은 네 거야.”진정우는 내 물음에 직접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며 물었다. “그럼, 너는 이 빚을 어떻게 갚을 거야?”담배를 쥔 그의 손이 살짝 떨렸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용진표는 너한테 뭐라고 했어?”그는 이런 이야기를 피하려는 듯했고 나는 그런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용진표가 한 말을 그에게 그대로 전했다.진정우는 내가 말을 마친 뒤, 짧게 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해?”나는 차 밖을 바라보며 내가 몇 시간 동안 갇혔던 폐공장을 보았다. “용진표가 나를 이용해서 남을 죽이게 하려는 거 같아.”“응?” 진정우가 백미러를 통해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용진표가 나를 여기로 끌고 오더니, 그 많은 말들을 다 해놓고선 겉으로는 나를 죽이려 한다면서, 결국에는 나를 보내주었어. 이건 분명히 나에게 사실을 알게 하려는 거고 내가 강씨 가문을 원망하게 만들려는 의도야.”나는 진정우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를 보지 않고 계속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용진표는 내가 강씨 가문을 원망하길 원해. 설령 그가 네
거실의 불빛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이전과는 달리, 아줌마는 나를 보자 예전처럼 반갑게 맞이하지 않았고 오히려 당황한 모습이었다.삼촌은 그 자리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병이 심각해진 이후로, 몸이 많이 쇠약해졌고 머리카락도 예전보다 훨씬 더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는 나와 진정우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그리고 아줌마는 매우 불편해 보이며 서서 인사를 했다.“지원아, 정우야, 왔구나.”“아줌마, 삼촌.” 나는 예전처럼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삼촌은 손짓으로 앉으라고 했고 곧 집사가 차를 가져왔다.“다쳤어?” 삼촌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손목이 아직도 많이 아팠다. 그곳은 몇 시간 동안 묶여 있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아줌마도 그것을 보고 손을 내밀 듯했지만 결국 손을 내밀지 않았다.그녀는 마치 무언가에 겁을 먹은 듯한 모습이었다. 예전처럼 나를 친딸처럼 대해주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이따가 아줌마가 약 발라줄게.” 삼촌의 말투는 예전과 같았고 나는 목이 꽉 막힌 채로 괜찮다고 대답했다.“지원아.” 이때 아줌마가 낮게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녀가 말을 이어가기 전에 삼촌이 손을 들어 아줌마에게 눈치를 줬고 오히려 삼촌이 나에게 물었다.“지원아, 궁금한 거 있으면 묻고 싶은 대로 물어.”나는 고통스럽게 침을 삼키며 물었다.“용진표가 말한 것들이 다 사실인가요?”20년 넘게 아버지처럼 여겨온 사람을 마주하고 있자니 갑자기 두려움이 밀려왔다.삼촌이 내게 대답하는 그 한마디가 그동안 쌓아온 믿음을 모두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말이다. 그러나 내가 두려워했던 말은 그대로 그의 입에서 나왔다.“그래.” 그 한마디가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며 숨이 멎을 것 같았고 눈앞이 아찔했다.삼촌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지원아, 네 부모님의 죽음은 내가... 시킨 거야.”쿵! 하늘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 느낌이었다. 비록 예전부터 의심은 했고 용진표가 말해주긴 했지만
“지원아, 너무 흥분하지 말고 먼저 삼촌 말씀 다 듣고 나서 말해.”아줌마가 나를 진정시키려 했다.삼촌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지원아, 만약 내가 네 아버지의 목숨을 원하지 않았다고 하면 넌 믿을 수 있겠니?”용진표가 이미 분명히 말했는데 이제 와서 뒤집을 수 있을까?나는 삼촌이 어떻게 말할지 궁금했다.“네 아버지는 경영 쪽에서 내가 없는 재능을 가졌어. 하지만 그는 파트너가 되기를 거부하고 혼자서 하려고 했지. 네 아버지의 실력으로 언젠간 해동은 전체를 손에 넣을 거란 걸 나는 이미 알았어.” 삼촌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존재야. 그건 본능이니까. 그래서 그때 네 아버지에 대해 질투만큼이나 원망도 생겼어. 나로서는 그가 나랑 함께하지 않으려고 하는 게 나를 무시하는 거였고 혼자서 돈을 벌겠다고 생각했어. 나와 협력하지 않아서 화가 날 때, 그는 또 용진표와의 계약을 따냈어. 사실 그 계약을 내가 따려고 했는데 그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너의 아버지였을까? 나는 그걸 보고 다시 한번 그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걸 확신했지. 그 계약은 정말 중요한 기회였어. 그걸 따낸 사람이 성공할 거라는 걸 알았지. 그래서 질투와 승부욕에 휘둘려, 그 프로젝트를 빼앗으려 했어.”삼촌은 안경을 벗고 고개를 저었다.“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 네 부모님을 협박하게 했어. 그들에게 용진표와의 계약을 넘기라고. 그런데 그 일을 맡긴 사람이 내 화를 풀어줄 거라며 네 부모님을 사라지게 하고 싶다고 직설적으로 말했어.”나는 순간 숨이 막혀왔다. 삼촌은 분명히 책임을 떠넘기고 있었다.“지원아, 내가 네 아버지의 목숨을 원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그렇게 생각했기에, 결국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나는 책임을 피하지 않아. 내가 네 부모님을 죽게 한 사람이고 그동안 성공했다고 해도 내 마음속에는 항상 죄책감이 있었어...”나는 삼촌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말했다.“그럼 그 죄책감을 나에 대한 관심과 보살핌으로 바꾼 거예요?”삼촌의 표정이 잠시
그가 입을 열지 않았다면 나는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잊을 뻔했다.진정우의 얼굴에 감정은 없었고 다만 그의 눈빛은 깊고 짙었으며 그가 언급한 사람은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하지만 용진표가 말했듯 진정우의 아버지는 내 부모에게 해를 끼친 이유가 전혀 다른 이유였고 오늘 오는 길에 진정우도 그것을 인정했다. 진정우 아버지의 행동은 모두 돈 때문이었다.그렇다면 이제 그가 나에게 이렇게 묻는 이유는 무엇일까?내 머릿속은 혼란스럽고 점점 아파지기 시작했고 마치 전기 드릴이 머리를 파고드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나는 다시 한번 삼촌을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침착하고 차분한 모습이었으나 반면 아줌마는 굉장히 긴장한 듯 삼촌의 팔을 꼭 쥐고 있었다.진정우와 삼촌이 몇 초간 눈을 마주친 후 삼촌이 입을 열었다.“네 아버지가 돈에 끌려서 그런 짓을 한 것과 나는 전혀 관계없어.”“정말로 관계가 없나요?”진정우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진정우, 네 아버지가 저지른 일을 네가 이미 다 말했잖아. 만약 네 아버지가 뭔가 했다면 나도 더 숨길 이유도 없잖아.”아줌마는 여전히 삼촌을 옹호하며 말했고 진정우는 얼굴을 더욱 단단히 굳혔다.“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용진표가 제 아버지를 매수한 이유가 분명히 다른 사람의 지시 때문이었어요.”삼촌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고 진정우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내 추측이 맞다면 당신들은 아마 지원의 앞길을 막으려고 했을 거예요. 지원의 부모가 죽으면 다른 사람도 지원이를 입양할 기회가 없겠죠.”나는 순간 놀라서 고개를 돌려 진정우를 바라봤고 이번엔 진정우도 나를 바라보았다.“왜냐하면 지원의 피는 특별했고 당신 아들의 예비 혈액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지원이를 잘 키우면 그동안 당신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 속죄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에요.”진정우는 말을 마친 후 삼촌을 향해 다시 말을 이었다.“지원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의 도구였어요.”아줌마는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그 순간 나는 그를 밀어낼 수 없었다. 내가 필요한 건 구원이었으니까.비록 잠시라도 나는 그게 필요했다.내 몸이 가벼워지자 진정우는 나를 안아 일으켰고 아줌마가 또 나와 진정우를 부르며 말했다.“지원아, 진정우... 너희들...”“먼저 지원이를 집에 데려가겠어요. 지원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나중에 얘기하죠.”진정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안고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그가 나를 차에 태운 후 나는 그의 옷깃을 움켜잡고 얼굴을 그의 목에 대고 크게 울기 시작했다.진정우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나는 그에게 눈물과 코를 묻히며 계속 울었다.이번엔 눈물이 너무 쏟아져서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진정우는 나를 병원으로 데려갔다.병원 침대에 누워 있을 때 나는 겨우 감정을 진정시킬 수 있었으나 머릿속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도통 알 수 없었다.경찰에 신고해서 삼촌을 잡아 부모님을 대신해 복수를 해야 할까?하지만 그건 복수가 아니라 그저 악한 사람들을 법의 심판을 받게 하는 것뿐이다.그런데 그것조차 내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내가 잃은 모든 것은 돌아오지 않으니까.그 생각을 하자 마음속에서 분노가 밀려오고 나 자신이 너무도 무력하게 느껴졌다.삼촌과 용진표를 잡아넣고 그들이 죽는다 해도 내 인생의 결핍은 채워지지 않을 거란 걸 알았다.마치 홀로 떠 있는 외로운 배처럼 내가 이렇게 무력한 건 처음이었다.“물 마실래?”진정우가 내가 깨어나자 물었고 그러자 나는 눈을 깜빡였다.“나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줘.”그는 긴 팔을 뻗어 나를 안아 일으킨 후 물컵을 내게 건넸다.“물 먼저 마셔.”나는 물컵을 받지 않고 그저 그를 바라봤고 그는 나의 유일한 구원자인 것 같았다.그는 물컵을 내 입 근처에 대고 말했다.“목소리가 안 나오잖아.”안 나오는 건가?난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나의 그런 모습을 보자 그는 얼굴에 피식 웃음 대신 어쩔 수 없
이렇게 하면 더 이상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내가 겪는 아픔에서 그가 준 부분이 조금이라도 덜어지겠지.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나는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그만 돌아가.”우리가 함께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나는 그가 준 이 작은 위로마저도 이제는 나에게 독이 될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러자 진정우의 어두운 눈빛이 더 깊어졌고 그는 턱을 움켜잡고 목덜미를 움찔거리며 말했다.“잘 지냈으면 좋겠어.”그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고 계속 울려대는 전화도 자동으로 끊겼다.나는 눈을 감았고 눈 주위가 아프게 부풀어 있었다.그때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마치 내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계속 울릴 것 같았다.나는 눈을 뜨고 전화를 보았지만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다시 눈을 감았다.강유형의 전화였다.하지만 지금 나는 그의 전화를 받기 싫었다.만약 내가 부모님이 죽은 원인을 추적한다면 그 끝에는 결국 강유형이 있을 것이다.그의 특이한 혈액형 때문에 이렇게 얽히고설킨 사랑과 증오 그리고 인생의 빚이 생겨난 것이다.나는 전화를 끊어버리고 그의 연락처를 차단했고 메시지도 카톡도 모두 차단했다.이제 내 세상은 잠시 조용해졌지만 나는 또다시 혼란스러웠다.나는 이런 혼란스러운 느낌이 너무 두려웠기에 전화를 걸어 안리영에게 도움을 청했다.반 시간 뒤에 안리영은 병실에 나타났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껴안았다.그녀는 나를 집으로 데려가서 따뜻한 목욕을 시키고 잠을 자라고 했다.“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내일 기분이 괜찮아지면 다시 생각해.”하지만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고 결국에 안리영이 준 물 한 잔을 마신 뒤 잠이 들었다.안리영은 의사였기에 나를 잠들게 하는 건 어렵지 않았고 나는 그녀가 참 고마웠다.그렇지 않으면 내가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을지도 몰랐다.다음 날, 내가 깨어났을 때 안리영은 아침을 준비해 놓았고 아무 말 없이 나에게 먹으라고 했다.하지만 나는 먹고 싶지 않았다. 정말 먹을 수 없었지만 안리영이 걱정할까 봐 억지로 하나의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이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법운사로 향하는 길에 나는 강유형에게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기나긴 연결음 끝의 자동응답뿐이었다.가슴이 점점 무겁게 내려앉았다. 요즘 그가 법운사에 머물고 있었기에 더더욱 불안했다. 연락도 되지 않으니 머릿속은 온통 나쁜 상상으로 가득 찼다.그에게 전화를 건 건 단순히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부상자나 사망자가 있는지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었다.하지만 그에게 건 전화는 끝내 연결되지 못했다.나는 액셀을 밟으며 용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그의 어머니가 바로 그 절에 계셨으니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 역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이번엔 아예 거절당했다. 불안은 더 깊어졌다.‘혹시 김지영까지 무슨 일이 생긴 걸까?’그간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강유형과 김지영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다치거나 희생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복잡한 심경 속에서 차를 운전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멀쩡하던 절에 왜 불이 난 걸까? 단순한 사고였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의도한 일이었을까? 혹시 나를 노린 불은 아니었을까?’만약 안리영이 나를 데리고 조경태의 생신 잔치에 가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그 절에 있었을 것이다. 죽었을 수도, 심하게 다쳤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내 손에 누군가가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걸 얻지 못하면 나를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그들이 저지른 일이라면 그건 너무 비인간적이었다. 죄 없는 사람들까지 희생시켜서는 안 됐다.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이 나는 어느덧 산기슭에 도착했다. 들이마시는 공기 속엔 타버린 재 냄새가 가득했고 멀리 보이는 산 위엔 아직도 연기가 자욱했다.산을 절반쯤 오르자 경찰이 차량을 막아섰다. 나는 차에서 내리며 이
난처한 상황이었다. 도무지 어찌할지 몰라 법까지 들먹이고 말았다.“법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서른이 넘도록 연애도 안 하고 결혼도 안 하는 건 정상이 아니야. 어느 날 갑자기 남자 며느리라도 데려오면 내가 무슨 낯으로 사람들을 보겠냐?”조경태는 누가 뭐라 해도 듣지 않겠다는 태도였다.“그럼 제가 하나 약속드릴게요. 절대 남자를 며느리로 데려오는 일은 없을 거예요.”조시언은 능청스럽게 받아쳤다.조경태는 씩씩 대며 화를 냈다. 그러자 안리영이 급히 나서며 말했다.“할아버지, 삼촌 좀 그만 괴롭히세요. 안 좋아하는데 억지로 떠민다고 행복해지겠어요?”“이 계집애는 왜 또 얘 편을 드는 거야?”할아버지는 안리영을 흘겨보았다.내가 얼른 말을 이었다.“오늘 온 아가씨들, 저랑 리영이 다 지켜봤어요. 삼촌이랑 어울릴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더라고요.”지금 이 순간 나도 안리영을 따라 조시언을 삼촌이라 부르고 있었다.“난 못 믿겠는걸.”조경태는 콧방귀를 뀌었다.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정말이에요, 할아버지. 그 여자들, 남 얘기하길 좋아해서 뒤에서 험담이나 하는 사람들이에요. 아까도 삼촌 뒷담 까고 있었어요.”조시언은 그녀를 바라보았고 조경태도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그래? 뭐라고 험담하던?”“삼촌이 나이가 꽤 됐는데도 아직 결혼 안 한 걸 말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삼촌을 차지해서 조씨 가문 며느리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수작 부릴 생각들만 하고 있었어요.”안리영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오늘 그 여자들이 조시언을 노리고 온 건 분명했으니 말이다.“그건 좋은 일이잖니.”조경태는 오히려 기뻐하며 말했다.“할아버지는 수작 부리는 여자가 좋으세요?”안리영은 조경태가 싫어하는 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조경태는 말이 없었다. 속이 시커먼 여자한테 크게 당할 뻔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안리영은 나를 향해 눈짓을 보냈고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삼촌 짝 찾는 일은 저랑 리영이에게 맡겨주세요.”내 말에 안리영이 눈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안리영과 나는 방 안의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서로 마주 본 채 각자의 소파에 앉은 모습이었다. 한 사람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젊고 준수한 청년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나이 차가 너무나 뚜렷해 그들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분명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일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부자 관계였다.안리영은 조시언이 입양된 아들이라고 내게 말해준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의아했다. 당시 나이로 치면 조경태는 조시언을 손자처럼 키워도 이상할 게 없었을 텐데 왜 굳이 아들로 삼은 건지 궁금했다.“시언아, 너 이제 나이도 어린 게 아니잖니. 결혼 안 하겠다는 건 그렇다 쳐도 여자 친구조차 없다니. 밖에서 사람들이 너를 두고 뭐라고 수군대는지 너도 알지?”조경태는 수군대다 같은 말도 자연스럽게 썼다.하지만 조시언은 묵묵히 앉아 있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조명이 그의 얼굴과 콧대를 선명하게 나누듯 비췄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면서 그의 이목구비는 더욱 또렷하게 도드라졌다. 깊은 눈썹뼈는 날카로운 선을 연출해 냈다.“사람들이 네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더라!”조경태는 말을 끝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런 이상한 소문이 퍼지는 건 우리 조씨 가문의 체면을 망치는 일이다. 우린 그런 망신 못 당한다!”조시언은 그 말에도 여전히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평온한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고요했다.“남의 입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떠들어대는 건 그들 사정일 뿐, 우린 신경 쓰지 않으면 됩니다.”“넌 신경 안 쓴다지만, 이 늙은이는 창피해서 못 살겠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지금 당장 사람 하나 데리고 오든가, 아니면 내가 직접 찾아줄 거다. 결혼 안 해도 좋다. 그냥 네 옆에 여자 하나 세워놔라. 사람들이 널 정상으로 보게 말이다!”그 말에 안리영과 나는 동시에 서로의 팔을 꼬집었다. 안 그러면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이 노
“넌 안 그럴 거야, 맞지?”안리영은 계속 나를 놀리면서도 언제나 내 편이었다.우리는 함께 연회장으로 들어섰다.조경태는 자줏빛과 금색이 어우러진 긴 도포를 입고 활짝 웃으며 손님들의 축하 선물을 받고 있었다.그는 내가 가져온 선물을 보곤 눈을 반짝였다.“특별한 선물이구나. 아주 마음에 들어.”그 말에 나는 괜히 민망해졌다.강유형의 어머니도 비슷한 걸 선물했는데 어째서 내 것을 특별하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역시 세상을 오래 산 사람은 달랐다. 누구보다도 말솜씨가 뛰어났다. 받는 사람도 기쁘고 주는 사람도 흐뭇하게 만드는 한마디였다.“리영아, 구 교수는 어디 갔니? 오늘은 왜 같이 안 왔어?”조경태가 슬며시 물었다.안리영은 내 옆구리를 몰래 콕 찔렀다.“그냥 따로 말 안 했어요. 오늘은 그냥 제가 단순히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온 거거든요.”그러나 이 정도 지긋한 나이가 되면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오늘 같은 잔칫날에 인원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고 왔다 해서 구안석이 못 오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는 안리영을 힐끔 바라보다 두어 번 웃고는 더 묻지 않았다.“할아버지, 그럼 선물마저 받으시고요. 저는 지원이랑 가서 뭐 좀 먹고 올게요.”안리영은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려 했다. 또 무슨 질문이 나올까 봐 걱정된 눈치였다.“그래, 다녀오거라. 다만 너무 멀리 가지는 마. 좀 있다 너희 둘 도움 좀 받아야겠구나.”그 말에 우리 둘은 눈빛을 주고받았다.“혹시 케이크 자르실 때 저희한테 맡기시려는 거 아니에요?”안리영이 농담처럼 물었다.조경태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콕 찔렀다.“이놈의 계집애, 지금 누굴 놀리는 거냐. 케이크 칼 정도는 들 수 있다고! 그게 아니고, 너희 둘한테 자문 좀 구하고 싶어서 그래.”“자문이요? 혹시 애인이라도 골라달라는 거예요?”안리영은 정말 무서울 정도로 겁 없이 농을 던졌다. 외할머니가 들으면 바로 이마 한 대는 맞았을 거다.“점점 대담해지는구나.”조경태가 다시 한번 그녀를 가리키며
안리영과 조시언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성준수는 그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안리영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하긴 이렇게나 예쁜데 조시언이 마음 줄 만도 하지... 아야, 아파! 조시언, 너 왜 그래?!”성준수는 조시언에게 뒷덜미를 잡힌 채 끌려 나갔고 안리영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정신 나갔네.”“조시언네 리영이?”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난스럽게 되물었다.안리영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너까지 말썽이야, 얼른 가자. 외할아버지께 선물 드려야지.”그녀는 내 손을 잡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빨갛게 물든 귓바퀴가 그녀의 부끄러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아까 조시언과의 어색한 분위기를 떠올리다 나도 모르게 장난을 쳤다.“리영아, 너랑 외삼촌 피가 섞인 것도 아니잖아. 내가 보기엔 한번 고려해 볼 만도 해. 잘생겼지, 돈 많지, 만약 네가 저 사람 잡으면 적어도 밖으로 새는 물은 없을 거 아니야.”안리영은 눈을 부릅떴다.“윤지원, 너 또 그런 소리 하면 진짜 절교할 거야.”“어머, 발끈하네?”나는 계속해서 놀렸다.“그만하라고 했지!”안리영은 나를 쫓아와 때리려 했다.나는 그녀를 피해 도망치다가 무언가에 부딪혔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익숙한 향이 먼저 스며들었다.고개를 들자 강유형이 서 있었다.요즘 그와 자주 마주쳤다. 절에서도 마주쳤고 조씨 가문에서도 마주쳤으니 말이다.“강 대표님, 이제 가시려고요?”안리영의 말투엔 노골적으로 쫓아내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나는 이미 다 털어냈다 하더라도 안리영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네.”강유형은 나를 살짝 놓아주며 내 발을 내려다봤다. 다친 데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했다.“조경태 씨 생신 축하하러 왔어요.”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는 볼 거 다 보고 별일 다 겪은 사이였다. 나는 담담하게 물었다.“저녁 식사는 안 하고 가?”“응, 그게...”그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집에 가봐야 해서.”그 말에 문득 김희연이 내게 건넨 말과
“아이참, 엄마!”안리영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오늘은 외할아버지 생신 잔치잖아, 내 맞선 자리가 아니고.”“뭐 어때?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셈이잖니. 좀 있다가 잘 둘러보렴. 우리 딸처럼 예쁘고 똑똑한 애가 남자 친구 하나 못 찾겠어? 눈만 마주치면 끝이지.”조민영은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안리영은 체념한 듯 말했다.“알겠어. 엄마는 먼저 가서 볼일 봐. 난 지원이 찾으러 갈게. 외할아버지께 드릴 선물도 걔가 챙겨왔거든.”안리영은 그렇게 핑계를 대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난 그녀와 어머니의 대화를 이미 들은 터라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아주머니 꽤 개방적이시네. 근데 나도 그 말 일리 있다고 봐. 예전에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라고.”“좋아. 마음에 드는 사람 있으면 바로 들이댈게.”그 순간 나는 조시언을 발견했다.그는 어두운 톤의 정장에 검은 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다. 셔츠 단추는 몇 개 풀려있었고 그로 인해 허연 목덜미가 살짝 드러나 있었다. 그 하얀 피부와 검은 셔츠가 만들어내는 대비는 그를 더욱 차가워 보이게 만들었다. 어쩐지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도 자아냈다.“네 외삼촌, 진짜 잘생겼다.”나는 감탄했다.안리영도 내 시선을 따라가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여자들한테 인기 많았어. 예전에 내가 저 사람한테 온 러브레터를 얼마나 많이 대신 받아줬는지 몰라.”하긴 조시언 같은 사람이 인기가 없을 리가 없었다.“그럼 연애는 해봤대?”안리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아니, 못 해봤을걸.”“그렇다면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있다는 말이겠지.”내 말에 안리영이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내 가슴을 콕 찌르는 말을 꺼냈다.“아, 맞네. 너 연애 경험 많았지.”“나 약 올리는 거야? 그렇게 나오면 나도 너 도와줄 마음 싹 사라지는데?”우리가 대화를 나눌 동안 조시언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안리영은 어느새 자세를 바짝 고쳐
안리영은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초 후 그냥 끊어버렸다.그토록 단호하고 주저 없는 태도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마 정말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다.이런 부분에선 그녀가 나보다 훨씬 강했다. 질질 끌지도 않았고 미련도 없었다.사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강유형과 헤어진 건 헤어진 거고 가끔 연락을 하긴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을 때뿐이었다.안리영과 구안석이 여기까지 온 게 아쉽긴 해도 딱히 뭐라고 말할 순 없었다.감정의 온도는 결국 그 당사자만이 아는 법이니 말이다.우리가 함께 차를 마시며 점원의 포장 작업을 기다리는 동안 안리영의 휴대폰 화면이 다시 한번 반짝였다.새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구안석에게서 온 메시지였다.‘리영아, 나 이제 갈게.’나는 슬쩍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이따가 차단할 거야.”“직접 못 하겠으면 내가 대신 해줄까?”내가 농담처럼 말했다.안리영은 나에게 절친만이 보낼 수 있는 눈빛을 건넸다. 점원이 포장해 준 작품을 들고 매장을 나설 때까지 그녀는 끝내 구안석에게 답장하지 않았다.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이 구안석의 메신저 대화창에서 멈춘 걸 발견했다. 그녀는 그들이 나눈 대화를 처음부터 다시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나는 의아해 물었다.“왜 웃어?”안리영은 내게 휴대폰을 내밀며 말했다.“선배님이랑 나눈 대화 좀 봐봐.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합쳐도 겨우 몇십 개밖에 안 돼. 우리 과 단톡방에서 일주일에 올라오는 공지보다도 적어.”나는 보지도 않고 다시 그녀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이미 헤어지기로 한 거잖아. 그런 거 봐서 뭐 하려고.”“지원아, 나 진짜로 연애한 게 맞긴 한 걸까?”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구안석을 차단했다.“공적인 일 있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럴 때도 연락 안 하게?”나는 애써 분위기를 풀어보려 장난을 던졌다.“그 사람은 흉부외과고 나는 산부인과야. 서로
“이거 포장해 주세요. 선물할 거니까 선물 상자에 담아 주세요.”김희연은 점원에게 부탁을 마치고 돌아서다 나를 발견했다.“지원아!”그녀가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인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아줌마.”나는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김희연은 나를 바라보며 눈가를 붉혔고 눈동자까지 촉촉하게 물들였다.“지원아...”그녀는 내 이름만을 부를 뿐 다른 말은 쉽사리 꺼내지 못했다. 마음속에 수많은 말들이 맴돌고 있을 게 분명했지만 끝내 꺼낼 용기가 나지 않는 듯했다.나도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몇 달 만에 마주한 모습이었다. 흰머리가 부쩍 늘었고 수척해진 인상이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눈빛에서 생기가 보이지 않았다.그녀가 요즘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강두식은 병상에 계시고 두 아들 사이엔 균열이 생겨 서로 등을 돌린 상태다.말 그대로 집안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모든 시작은 나와 강유형이 끝을 맺으면서부터였던 것 같다.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들이 잘 풀린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잘 지내니?”그녀가 한참 만에 힘들게 물었다.“네,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거면 됐다. 그거면 좋아.”나는 그녀에게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시간을 견뎌냈는지 이미 보아냈으니 말이다.“너도 혹시 작품 보러 왔니? 선물하려고?”그녀는 어색함을 덜기 위해 다시 말을 건넸다.“오늘 저희 외할아버지 생신이라서요. 지원이가 저희 외할아버지 드리려고 보고 있었어요.”안리영이 대신 대답했다.“지원이도 조씨 댁에 가는구나. 잘 됐다, 그분도 지원이를 참 좋아하시잖니. 예전에도 자주 얘기하셨지.”그녀는 말을 잇다가 목이 메인 듯 얼굴을 살짝 돌렸다.나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그렇게 슬픔을 억누르는 모습이 안쓰러워 조용히 입을 열었다.“아줌마, 저 먼저 고르러 가볼게요.”“지원아.”그녀가 다시 나를 불러 세웠다.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어렵게 말을 이었다.
“네가 헤어지자고 했는데 구안석이 아무 말도 안 했다고?”안리영의 말을 듣고 나도 좀 놀랐다.안리영은 살짝 웃었다.“아마 그 사람도 지쳤겠지. 차라리 혼자일 때가 더 편했을 거야. 뭘 하든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간섭받을 일도 없고 신경 쓸 일도 없으니까.”딱 봐도 감정 섞인 말이었다.“너, 혹시 이별하자는 말도 일부러 한 거 아니야? 화나서?”내가 조심스레 물었다.안리영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난 정말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야.”내가 코웃음을 쳤다. 안리영이 웃으며 말했다.“진짜라니까. 지난번에 내가 선배한테 귀국할 수 없냐고 물었을 때부터 쭉 고민해 왔어.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뭘까, 생각하게 되더라고.”“사실 사랑이든 결혼이든 여자들이 바라는 건 결국 하나잖아. 안정감, 그리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 근데 그 사람이 그걸 못 준다면 나 혼자서도 충분한데 굳이 그런 사랑을 붙잡을 필요가 있을까?”안리영은 낮게 물었다.나는 장난스럽게 말해봤다.“그럼 생리적 욕구 해결은?”안리영은 다시 웃었다.“남자를 그 이유 하나로만 찾는 거면 얼마나 쉬워.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되잖아. 게다가 종류도 다양하고 취향 바꾸는 것도 가능하고.”“하하하.”나는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리영이, 네 취향 은근히 세네?”장난처럼 말했지만 사실 그녀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리영아, 네가 어떤 결정을 해도 난 응원할 거야. 하지만 말이지... 이별이라는 건, 특히 진심이었을 때는 헤어지는 순간도 진짜 아프잖아. 힘들면 꼭 나한테 말해. 같이 술이라도 마셔주지.”“응, 필요하면 연락할게.”안리영은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살짝 맞댔다.“그보다 지금 당장 네가 좀 도와줘야 하는 일이 하나 있어.”“뭔데?”“오늘 우리 외할아버지 생신이야. 이번엔 도저히 빠질 수가 없어.”안리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부모님도 몇 번이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보고 싶어 하신다고 했는데 그녀는 그때마다 핑계를 대고 빠졌단다. 이번까지 거절하면 그녀의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