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우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이미 조사를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왜? 왜 나한테 말하지 않는 거야?” 나는 다급하게 물으며 그의 의자에 손을 올려서 내리쳤다.끽!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차가 멈췄다. 그는 운전대를 꽉 쥐었고 그러자 손목에서 핏줄이 튀었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숨이 멎을 듯했다.“돈 때문이야.” 나는 진정우의 대답을 듣고 그를 멍하니 바라봤지만 그는 내게 등을 돌린 채 운전하고 있어 나는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그때 진소영의 병이 떠올랐다. “그게... 소영이 치료비 때문에 그런 거야?”진정우는 차 안의 수납함을 열어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고 몇 번이나 라이터를 눌러야 겨우 불이 붙었다. 그리고 그는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지원아, 우리 아버지가 네 부모님을 죽인 범인이야. 이건 운명의 빚이야. 부모의 빚은 자식이 갚아야 하니 앞으로 내 목숨은 네 거야.”진정우는 내 물음에 직접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며 물었다. “그럼, 너는 이 빚을 어떻게 갚을 거야?”담배를 쥔 그의 손이 살짝 떨렸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용진표는 너한테 뭐라고 했어?”그는 이런 이야기를 피하려는 듯했고 나는 그런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용진표가 한 말을 그에게 그대로 전했다.진정우는 내가 말을 마친 뒤, 짧게 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해?”나는 차 밖을 바라보며 내가 몇 시간 동안 갇혔던 폐공장을 보았다. “용진표가 나를 이용해서 남을 죽이게 하려는 거 같아.”“응?” 진정우가 백미러를 통해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용진표가 나를 여기로 끌고 오더니, 그 많은 말들을 다 해놓고선 겉으로는 나를 죽이려 한다면서, 결국에는 나를 보내주었어. 이건 분명히 나에게 사실을 알게 하려는 거고 내가 강씨 가문을 원망하게 만들려는 의도야.”나는 진정우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를 보지 않고 계속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용진표는 내가 강씨 가문을 원망하길 원해. 설령 그가 네
거실의 불빛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이전과는 달리, 아줌마는 나를 보자 예전처럼 반갑게 맞이하지 않았고 오히려 당황한 모습이었다.삼촌은 그 자리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병이 심각해진 이후로, 몸이 많이 쇠약해졌고 머리카락도 예전보다 훨씬 더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는 나와 진정우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그리고 아줌마는 매우 불편해 보이며 서서 인사를 했다.“지원아, 정우야, 왔구나.”“아줌마, 삼촌.” 나는 예전처럼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삼촌은 손짓으로 앉으라고 했고 곧 집사가 차를 가져왔다.“다쳤어?” 삼촌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손목이 아직도 많이 아팠다. 그곳은 몇 시간 동안 묶여 있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아줌마도 그것을 보고 손을 내밀 듯했지만 결국 손을 내밀지 않았다.그녀는 마치 무언가에 겁을 먹은 듯한 모습이었다. 예전처럼 나를 친딸처럼 대해주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이따가 아줌마가 약 발라줄게.” 삼촌의 말투는 예전과 같았고 나는 목이 꽉 막힌 채로 괜찮다고 대답했다.“지원아.” 이때 아줌마가 낮게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녀가 말을 이어가기 전에 삼촌이 손을 들어 아줌마에게 눈치를 줬고 오히려 삼촌이 나에게 물었다.“지원아, 궁금한 거 있으면 묻고 싶은 대로 물어.”나는 고통스럽게 침을 삼키며 물었다.“용진표가 말한 것들이 다 사실인가요?”20년 넘게 아버지처럼 여겨온 사람을 마주하고 있자니 갑자기 두려움이 밀려왔다.삼촌이 내게 대답하는 그 한마디가 그동안 쌓아온 믿음을 모두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말이다. 그러나 내가 두려워했던 말은 그대로 그의 입에서 나왔다.“그래.” 그 한마디가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며 숨이 멎을 것 같았고 눈앞이 아찔했다.삼촌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지원아, 네 부모님의 죽음은 내가... 시킨 거야.”쿵! 하늘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 느낌이었다. 비록 예전부터 의심은 했고 용진표가 말해주긴 했지만
“지원아, 너무 흥분하지 말고 먼저 삼촌 말씀 다 듣고 나서 말해.”아줌마가 나를 진정시키려 했다.삼촌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지원아, 만약 내가 네 아버지의 목숨을 원하지 않았다고 하면 넌 믿을 수 있겠니?”용진표가 이미 분명히 말했는데 이제 와서 뒤집을 수 있을까?나는 삼촌이 어떻게 말할지 궁금했다.“네 아버지는 경영 쪽에서 내가 없는 재능을 가졌어. 하지만 그는 파트너가 되기를 거부하고 혼자서 하려고 했지. 네 아버지의 실력으로 언젠간 해동은 전체를 손에 넣을 거란 걸 나는 이미 알았어.” 삼촌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존재야. 그건 본능이니까. 그래서 그때 네 아버지에 대해 질투만큼이나 원망도 생겼어. 나로서는 그가 나랑 함께하지 않으려고 하는 게 나를 무시하는 거였고 혼자서 돈을 벌겠다고 생각했어. 나와 협력하지 않아서 화가 날 때, 그는 또 용진표와의 계약을 따냈어. 사실 그 계약을 내가 따려고 했는데 그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너의 아버지였을까? 나는 그걸 보고 다시 한번 그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걸 확신했지. 그 계약은 정말 중요한 기회였어. 그걸 따낸 사람이 성공할 거라는 걸 알았지. 그래서 질투와 승부욕에 휘둘려, 그 프로젝트를 빼앗으려 했어.”삼촌은 안경을 벗고 고개를 저었다.“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 네 부모님을 협박하게 했어. 그들에게 용진표와의 계약을 넘기라고. 그런데 그 일을 맡긴 사람이 내 화를 풀어줄 거라며 네 부모님을 사라지게 하고 싶다고 직설적으로 말했어.”나는 순간 숨이 막혀왔다. 삼촌은 분명히 책임을 떠넘기고 있었다.“지원아, 내가 네 아버지의 목숨을 원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그렇게 생각했기에, 결국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나는 책임을 피하지 않아. 내가 네 부모님을 죽게 한 사람이고 그동안 성공했다고 해도 내 마음속에는 항상 죄책감이 있었어...”나는 삼촌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말했다.“그럼 그 죄책감을 나에 대한 관심과 보살핌으로 바꾼 거예요?”삼촌의 표정이 잠시
그가 입을 열지 않았다면 나는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잊을 뻔했다.진정우의 얼굴에 감정은 없었고 다만 그의 눈빛은 깊고 짙었으며 그가 언급한 사람은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하지만 용진표가 말했듯 진정우의 아버지는 내 부모에게 해를 끼친 이유가 전혀 다른 이유였고 오늘 오는 길에 진정우도 그것을 인정했다. 진정우 아버지의 행동은 모두 돈 때문이었다.그렇다면 이제 그가 나에게 이렇게 묻는 이유는 무엇일까?내 머릿속은 혼란스럽고 점점 아파지기 시작했고 마치 전기 드릴이 머리를 파고드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나는 다시 한번 삼촌을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침착하고 차분한 모습이었으나 반면 아줌마는 굉장히 긴장한 듯 삼촌의 팔을 꼭 쥐고 있었다.진정우와 삼촌이 몇 초간 눈을 마주친 후 삼촌이 입을 열었다.“네 아버지가 돈에 끌려서 그런 짓을 한 것과 나는 전혀 관계없어.”“정말로 관계가 없나요?”진정우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진정우, 네 아버지가 저지른 일을 네가 이미 다 말했잖아. 만약 네 아버지가 뭔가 했다면 나도 더 숨길 이유도 없잖아.”아줌마는 여전히 삼촌을 옹호하며 말했고 진정우는 얼굴을 더욱 단단히 굳혔다.“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용진표가 제 아버지를 매수한 이유가 분명히 다른 사람의 지시 때문이었어요.”삼촌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고 진정우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내 추측이 맞다면 당신들은 아마 지원의 앞길을 막으려고 했을 거예요. 지원의 부모가 죽으면 다른 사람도 지원이를 입양할 기회가 없겠죠.”나는 순간 놀라서 고개를 돌려 진정우를 바라봤고 이번엔 진정우도 나를 바라보았다.“왜냐하면 지원의 피는 특별했고 당신 아들의 예비 혈액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지원이를 잘 키우면 그동안 당신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 속죄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에요.”진정우는 말을 마친 후 삼촌을 향해 다시 말을 이었다.“지원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의 도구였어요.”아줌마는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그 순간 나는 그를 밀어낼 수 없었다. 내가 필요한 건 구원이었으니까.비록 잠시라도 나는 그게 필요했다.내 몸이 가벼워지자 진정우는 나를 안아 일으켰고 아줌마가 또 나와 진정우를 부르며 말했다.“지원아, 진정우... 너희들...”“먼저 지원이를 집에 데려가겠어요. 지원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나중에 얘기하죠.”진정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안고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그가 나를 차에 태운 후 나는 그의 옷깃을 움켜잡고 얼굴을 그의 목에 대고 크게 울기 시작했다.진정우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나는 그에게 눈물과 코를 묻히며 계속 울었다.이번엔 눈물이 너무 쏟아져서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진정우는 나를 병원으로 데려갔다.병원 침대에 누워 있을 때 나는 겨우 감정을 진정시킬 수 있었으나 머릿속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도통 알 수 없었다.경찰에 신고해서 삼촌을 잡아 부모님을 대신해 복수를 해야 할까?하지만 그건 복수가 아니라 그저 악한 사람들을 법의 심판을 받게 하는 것뿐이다.그런데 그것조차 내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내가 잃은 모든 것은 돌아오지 않으니까.그 생각을 하자 마음속에서 분노가 밀려오고 나 자신이 너무도 무력하게 느껴졌다.삼촌과 용진표를 잡아넣고 그들이 죽는다 해도 내 인생의 결핍은 채워지지 않을 거란 걸 알았다.마치 홀로 떠 있는 외로운 배처럼 내가 이렇게 무력한 건 처음이었다.“물 마실래?”진정우가 내가 깨어나자 물었고 그러자 나는 눈을 깜빡였다.“나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줘.”그는 긴 팔을 뻗어 나를 안아 일으킨 후 물컵을 내게 건넸다.“물 먼저 마셔.”나는 물컵을 받지 않고 그저 그를 바라봤고 그는 나의 유일한 구원자인 것 같았다.그는 물컵을 내 입 근처에 대고 말했다.“목소리가 안 나오잖아.”안 나오는 건가?난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나의 그런 모습을 보자 그는 얼굴에 피식 웃음 대신 어쩔 수 없
이렇게 하면 더 이상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내가 겪는 아픔에서 그가 준 부분이 조금이라도 덜어지겠지.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나는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그만 돌아가.”우리가 함께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나는 그가 준 이 작은 위로마저도 이제는 나에게 독이 될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러자 진정우의 어두운 눈빛이 더 깊어졌고 그는 턱을 움켜잡고 목덜미를 움찔거리며 말했다.“잘 지냈으면 좋겠어.”그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고 계속 울려대는 전화도 자동으로 끊겼다.나는 눈을 감았고 눈 주위가 아프게 부풀어 있었다.그때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마치 내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계속 울릴 것 같았다.나는 눈을 뜨고 전화를 보았지만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다시 눈을 감았다.강유형의 전화였다.하지만 지금 나는 그의 전화를 받기 싫었다.만약 내가 부모님이 죽은 원인을 추적한다면 그 끝에는 결국 강유형이 있을 것이다.그의 특이한 혈액형 때문에 이렇게 얽히고설킨 사랑과 증오 그리고 인생의 빚이 생겨난 것이다.나는 전화를 끊어버리고 그의 연락처를 차단했고 메시지도 카톡도 모두 차단했다.이제 내 세상은 잠시 조용해졌지만 나는 또다시 혼란스러웠다.나는 이런 혼란스러운 느낌이 너무 두려웠기에 전화를 걸어 안리영에게 도움을 청했다.반 시간 뒤에 안리영은 병실에 나타났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껴안았다.그녀는 나를 집으로 데려가서 따뜻한 목욕을 시키고 잠을 자라고 했다.“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내일 기분이 괜찮아지면 다시 생각해.”하지만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고 결국에 안리영이 준 물 한 잔을 마신 뒤 잠이 들었다.안리영은 의사였기에 나를 잠들게 하는 건 어렵지 않았고 나는 그녀가 참 고마웠다.그렇지 않으면 내가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을지도 몰랐다.다음 날, 내가 깨어났을 때 안리영은 아침을 준비해 놓았고 아무 말 없이 나에게 먹으라고 했다.하지만 나는 먹고 싶지 않았다. 정말 먹을 수 없었지만 안리영이 걱정할까 봐 억지로 하나의
강유형은 안색이 여전히 좋지 않았고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으며 턱에는 면도하지 않은 수염이 자라 있었다. 나는 그의 이런 모습을 처음 봤다. 이 한밤중에 그도 좋은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아마도 강유형은 삼촌이 저지른 일을 알게 된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내게 계속 전화를 하지 않았을 테니까. 비록 내가 그를 미워하고 그가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를 보니 미운 감정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보고 나니 이전보다 훨씬 차분해졌다. 아마 모든 감정이 무뎌져서 그런 것 같았다.그는 문 앞에서 서 있기엔 불편해 보여서 나는 그에게 차분히 말했다.“들어와서 이야기해.”그가 들어와서 내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엄마가 모든 걸 나에게 말했어... 지원아, 미안해...”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고 그가 내게 온 이유가 단순히 사과하려는 게 아니란 걸 알았다.“지원아, 내가 미안하다고 말해도 아무 소용 없다는 걸 알아. 그래서 오늘 내가 너한테 묻고 싶은 건... 아니, 사실은 부탁이야...”그는 잠시 망설였다.“부탁이라고?”나는 그 단어가 입에서 나온 걸 듣고 놀랐다. 평소 그의 태도와는 다르게 참으로 드문 일이었다. 그는 늘 대충 살아가던 사람이었지만 분명히 부모에게는 효자였다.“지원아, 이건 너무 무리한 부탁이라는 건 알아. 아버지는 이제 네 부모님에 대한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지금 당장이라도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을 거야. 하지만 내가 부탁할 수 있는 건 제발 아버지를 살려달라는 거야. 내가 대신 그 빚을 갚을게.”“너는 그게 무슨 빚인지 아냐?”내가 그의 말을 끊으며 차갑게 물었다.“그건 목숨이 달린 빚이야.”그러자 그의 시선이 잠시 땅에 닿았다.“알아. 그래서 네가 아버지를 용서해 준다면 네가 원하는 모든 걸 할게.”하지만 나는 그들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고 그게 바로 내게 주는 고통이었다.“그럼 네가 뭘 하면 내 부모님을 살릴 수 있겠어?”나는 그의 말을 더욱 날
강유형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건 두 시간 뒤였다. 강진혁이 나한테 전화를 걸어왔다.“지원아, 유형이 교통사고를 당했어. 지금 응급처치 중인데 좀 와줄 수 있겠어?”강진혁의 목소리는 매우 급했다.나는 그가 말하는 걸 듣고 나서 손이 떨렸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와 싸웠던 기억이 떠올라 핸드폰이 떨어져 버렸다.강진혁 쪽에서 아마도 그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지원아, 괜찮아? 너 괜찮은 거 맞아?”부엌에서 요리하고 있던 안리영이 급히 달려 나왔고 내 얼굴을 보고는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지원아, 오해하지 마. 네가 와야 하는 이유는 유형이 지금 치료 중이라서 네가 혈액을 공급해 달라고 그런 게 아니야. 그냥 네가 와서 유형이를 한 번만 봐달라는 거야. 유형이 구급차에 실려 가면서 계속 네 이름만 부르더라.”안리영은 내가 말한 대로 핸드폰을 주워서 강진혁에게 대신 대답했다.“강유형과 지원이는 이제 아무 관계도 없어요. 그런 소식은 필요 없습니다.”강진혁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안리영은 전화를 끊고 나를 옆에 앉히며 어깨를 감싸안았다.“이 강유형 집안은 정말 끝까지 사람을 이렇게 몰아붙이나?”“다 내 잘못이야...”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다 내 잘못이라고...”안리영은 내가 강유형과 싸운 사실을 모르지만 내 감정을 헤아려서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대신 나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지원아... 이러지 마. 뭐든지 혼자서 다 짊어지려 하지 마. 네 잘못이 아니야.”나는 병원에 가지 않았지만 마음은 계속해서 불안하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는 강유형을 미워했고 그의 집안 사람들을 증오했지만 그런데도 그의 생사에 무관심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그가 죽는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그를 미워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가 죽으면 나의 분노도 함께 사라질지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강유형의 집안이 내 부모님의 죽음을 밝히고 난 뒤 나는 계속해서 혼란스러웠고 나아갈 길을 알 수 없었다. 심지어 내 머리는 터질 것처
헤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좋아. 사랑에 눈이 먼 여자는 아닌가 봐.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 왜 하필 신지태를 구하려고 한 거야? 그 사람이 그렇게 중요해?”겉으로는 친절해 보이는 헤르나지만 그는 계속해서 나를 떠보며 내 약점을 찾으려 했고 내 가치를 최대한 활용하려는 속셈이 분명했다.“중요하지 않아요.”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헤르나는 미소를 지었지만 나를 믿지 않는 눈빛이었다.“하지만 유일한 기회를 그를 위해 썼잖아.”“내가 스누커를 배운 건 지태 오빠 덕분이에요. 그래서 오늘 이 기회는 그의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내 말에 헤르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왜 너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어? 나를 설득해서 너를 놓아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었잖아.”“어차피 당신은 날 여기 가두고 경기를 보게 하려고 했잖아요. 날 풀어준다 해도 공항까지 무사히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나는 지태 오빠의 경기를 보러 왔기에 굳이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내가 말하며 그의 팔에 난 상처를 힐끔 쳐다보자, 헤르나는 내 시선을 눈치채고는 여유롭게 웃으며 소매를 걷었다.“이거? 아직 완전히 낫지는 않았어. 다 나으면 문신이라도 해서 보기 흉하지 않게 만들어야겠지.”“누가 그런 거예요?”나는 뻔히 알면서도 물었다.“모를 리가 있나?”헤르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가 이렇게 대놓고 말하니, 나도 더 숨길 필요가 없었다.“그래서 정우를 상대로 복수하려는 거군요.”헤르나는 소매를 내리며 말했다.“그게 전부는 아니야.”그리고 와인잔을 흔들며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우리 사이의 문제는 단순히 그가 날 다치게 해서 생긴 게 아니거든.”“진정우랑 이미 알고 지낸 사이였어요?”내가 묻자, 이번엔 헤르나가 미간을 찌푸렸다.“너희 사귀었다면서? 그런데도 자기 과거 이야기는 하나도 안 했어?”그의 말은 내 가슴을 찌르는 비수 같았다.“안 했어요.”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헤르나는 고개를 저으며 연민이
그러나 나는 그에게 바로 대답하지 않고 일부러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헤르나는 옆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와서 앉아서 천천히 생각해 봐.”사실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무엇을 요구할지 이미 마음속으로 정해놓았기 때문이다.헤르나는 자리에 앉아 흰색 캐주얼 팬츠 위로 긴 다리를 교차시킨 채 와인잔을 손에 들었다. 그의 태도는 한없이 여유롭고 느긋했다.조용히 와인을 홀짝이는 그의 모습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평화로웠고 이 모든 게 그에게는 전혀 급하지 않은 듯 보였다.솔직히 말해, 그의 외모는 정말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특히 깊고 또렷한 눈매는 마치 사람을 빨아들이는 심연 같아서 오랫동안 쳐다볼 수 없었다.나는 그의 눈을 의식적으로 피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당구대 모퉁이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경기가 끝나면 절대 지태 오빠에게 다시는 손대지 마세요.”현존 최고의 스누커 선수라면 단연 신지태였다.그들은 불법 도박 자본을 이용해 경기를 조작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한 번으로 끝날 리는 없었다.결국 신지태를 완전히 그들의 수중에 넣으려 할 것이고 내가 아는 신지태는 그런 상황에서 차라리 자신의 팔을 끊어버릴 만큼 단호한 사람이었다.헤르나는 내 말을 듣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 표정을 보자 나는 곧바로 말했다.“당신이 내가 이기면 어떤 요구든 들어준다고 하지 않았나요?”헤르나는 와인잔을 살짝 흔들며 답했다.“긴장하지 마. 약속을 깨겠다는 건 아니야. 다만 네가 알아야 할 게 있어서 그래.”“역시 이런 사람들은 말만 번지르르하지.”나는 비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큐대를 내던지고 뒤돌아섰다.그때, 헤르나의 목소리가 내 등 뒤에서 들려왔다.“널 여기 데려온 건 두 사람 때문이야.”그 말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누군데요? 당신, 브라운 때문에 날 납치한 거 아니었어요?”그가 내게 조건을 내걸라고 했지만 나는 브라운과 그의 팬들에게 나를 놔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신지태를 구
“세 판.”“좋아요.”나는 말하면서 천천히 큐를 골랐다.“보는 눈이 있는데?”내가 큐를 손에 쥐자마자, 헤르나가 웃으며 칭찬했고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그는 곧 이유를 덧붙였다.“네가 고른 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거야.”“그래요?”나는 살짝 비웃으며 큐를 살펴보다가 큐 위에 새겨진 글자를 발견했다.자세히 보니, 큐에 새겨진 건 ‘진’이라는 번체 글자였다.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이 나도 모르게 먼저 튀어나왔다.“이건 당신 게 아니라..”나는 이어서 진정우의 큐라고 말하려다 멈췄다.진정우와 헤르나는 완전히 대립 관계 아닌가. 그가 어떻게 진정우의 큐를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 게다가 이런 큐는 보통 프로 선수들만 사용하는 건데.이전에도 진정우에게 스누커를 잘 치냐고 물었을 때, 그는 그냥 보통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전문 큐를 가질 리 없었다.“이거 누구 거야?”헤르나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띠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마치 나에게 맞춰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당신 것은 아니예요. 큐에 다른 사람 이름이 적혀 있으니까.”나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는 내 대답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역시 스누커를 잘 아는 소녀답네. 이런 것도 알아보네.”‘스누커 소녀’라는 말에 순간적으로 얼굴이 굳었다. 브라운이 나를 처음 그렇게 불렀었다.“그렇게 저를 부르지 마세요. 듣기 싫어요.”나는 단호하게 말했다.“왜?”헤르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쓰레기 같은 인간이 저를 그렇게 부른 적이 있었거든요.”나는 헤르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꼬마야, 나를 욕하고 싶으면 그냥 대놓고 해.”나는 헤르나를 욕하려 한건 아니었지만 아무 말 없이 그의 웃음을 무시했고 이미 공이 배치된 테이블을 보며 말했다.“이제 시작하죠.”그는 손짓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해봐.”내가 먼저 시작하라는 조건이었으니,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큐를
‘무슨 경기를 본다는 거야. 이건 그냥 날 인질로 잡아 지태 오빠가 이기게 만들려는 거잖아.’경기가 끝나기 전까지 이곳을 떠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그렇다면... 여기 온 김에 차분히 적응하는 수밖에.’사실 이미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방금 핸드폰을 던지며 보였던 격앙된 행동은 모두 헤르나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기였을 뿐이었다.그는 이미 내 핸드폰을 만졌으니, 내 메시지나 통화를 모두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걸 막는 유일한 방법은 핸드폰을 아예 없애는 것이었다.더 이상 발버둥 쳐봐야 소용이 없었다. 헤르나도 이미 나에게 구체적으로 통보했고 이 상황에서 계속 소란을 피워봐야 무의미할 뿐이었다.그래서 방에서 나와 테라스로 향해 바람이라도 쐬려고 했다. 그런데 테라스에 나서자마자, 눈앞의 광경에 숨이 멎었다.엄청난 규모의 테라스 아래로는 거대한 정원이 펼쳐져 있었고 사방은 푸른 식물들로 둘러싸여 있었다.골프장, 야외 스누커 경기장, 커다란 수영장과 화려한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테라스에서 내려다보니, 그곳에서 헤르나가 한가롭게 당구를 치고 있었다고 그는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말했다.“꼬마야, 내려와서 나랑 한 판 치지 않을래?”순간, 나와 시합을 하겠다고 큰소리치던 브라운이 떠올랐다.브라운과 헤르나가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헤르나가 브라운을 압도할 만한 인물이라는 것이다.브라운 한 명은 대처할 수 있겠지만 그의 수많은 팬들은 이미 광기에 휩싸여 있고 언제든 극단적인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다.결국 이 팬들을 진정시키려면 브라운이 직접 나서야 하는데 그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헤르나뿐이었다.하지만 나는 그저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아무 말 없이 그를 내려다보기만 했다.“네가 당구를 잘 친다고 들었어. 만약 네가 나를 이기면 널 미리 돌려보내 줄 수도 있지.”헤르나가 유혹적인 제안을 던졌고 나는 어이가 없었다. 진정우나 신지태와 가끔 시합을 즐겼을 뿐인데 어쩌다 내 당구 실력이 이리 소문났는지.두 명의 외국 남자
“진정우, 정말 냉정하고 차가운 사람이군.”헤르나는 동정이 깃든 목소리로 말하며 나를 놓아주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억울함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옆에 있던 물건을 집어 들고 헤르나에게 내던지며 소리쳤다.“이제 알겠죠? 나는 그 사람 여자도 아니에요! 이 쓰레기 같은 인간아, 정말 더럽고 치사한 놈!”평생 이렇게까지 격한 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마지막엔 내가 누구를 향해 욕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그냥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 안에서 쌓여가는 슬픔과 억울함이 터질 것만 같았다.헤르나는 내가 그렇게 난리를 치는데도 피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었다.결국 내 손에 힘이 다 빠지고 온몸이 지쳐 움직일 수 없을 때, 나는 스스로 몸을 웅크리고 조용히 앉아 있었고 헤르나는 조용히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 문밖에서 누군가가 그에게 물었다.“저 여자가 진정우를 끌어낼 수 있을까요?”문이 닫히면서 나는 헤르나의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방 안에는 다시 나 혼자뿐이었다. 아까의 히스테리로 온 에너지가 소진돼 머릿속도 멍하고 공허했다.그저 텅 빈 시선으로 어딘가를 바라보며 멍하니 있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른 채, 문이 다시 열리고 필리핀 가정부가 들어왔다.그녀는 내 옷을 손에 들고 있었다.“지원 씨, 옷은 여기 있어요. 깨끗하게 세탁해 두었습니다.”나는 눈을 깜빡이며 멍하니 물었다.“왜 제 옷을 세탁했어요?”“헤르나 님께서는 결벽증이 있어서, 밖에서 입은 옷으로 그의 집에서 자는 걸 허락하지 않으세요.”그녀의 대답에 나는 내가 입고 있는 잠옷을 다시 한번 내려다보았다.“그럼, 제 옷은 당신이 갈아입힌 건가요?”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나는 그제야 마음 한구석이 놓였다. 가정부는 내 옆에 옷을 내려놓고 방 안에 흩어진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그녀가 떠나고 나서야 방은 다시 깨끗해졌고 나는 조금씩 정신을 가다듬기 시작했다.잠시 후, 나는 핸드폰을 들고
“헤르나!”진정우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나는 친근한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더 절박하게 도움을 요청하면 할수록 헤르나가 진정우를 더 쉽게 협박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헤르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고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런 뒤 여유롭게 와인잔을 들었다.“진, 너의 여자 친구는 정말 귀엽고 아름다워. 정말 매력적이야.”“걔는 이제 내 여자가 아니야.”진정우의 말은 마치 내 가슴을 칼로 베는 듯했다. 그가 사실을 말하는 건 알았지만 그 말이 여전히 날 아프게 했다.“아니라고? 내 정보가 아직 정확하지 않나 보네.”헤르나가 비웃었다.“할 말이 있으면 빨리해. 아니면 끊을 거야.” 진정우의 차가운 말투가 내 마음을 꽁꽁 얼어붙게 했다. 그가 나를 구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건 예상했지만 이렇게 차가운 목소리로 나를 내버려두는 건 상상도 못 했다.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것이 바로 이 순간이었다. 내가 헤르나에게 이용당할지 모르는 데도 진정우는 내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왜 그래?” 헤르나가 말하며 내 몸을 던지듯 당기더니 갑자기 자기 품으로 끌어당겼다.그는 자기 얼굴을 내 쪽으로 바싹 붙이며 진정우에게 그대로 보여주었다.진정우는 검은색 셔츠를 입고 있었고 금색 칼라 핀을 꽂고 있었다. 그는 화면 속에서 내게 무심히 시선을 보냈고 그 눈빛은 마치 내 존재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차갑고 냉정했다.“진, 이제 네 여자가 아니라면 내가 얘를 가져도 되겠지?”헤르나가 말하며 내 얼굴에 입술을 밀어붙이려고 했다.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물러났지만 그의 큰 손은 이미 내 목을 움켜잡고 있었다.그의 입술은 내게 닿지 않았지만 그 느낌은 마치 독사처럼 차가운 혓바닥이 내 몸을 스치는 듯했다.그는 이 모든 걸 진정우에게 보이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진정우가 정말 나를 도와주지 않고 모른 사람 취급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바로 그때 진정우가 말했다.“헤르나, 네 마
내가 말하려고 입을 열기 전에, 헤르나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꼬마야, 지금 그 남자를 들여보내면 인질 한 명 더 많아지는 건데.”그는 나를 협박하며 또 겁을 주고 있었다.“지원아?”강유형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고 목소리에서 급한 기색이 묻어났다.나는 헤르나가 나를 데려가도록 그냥 두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갑자기 그의 손을 물었다.헤르나는 깜짝 놀라며 손을 뺐고 그 틈을 타서 나는 몸을 일으켜 힘껏 문 쪽으로 달려갔다.“강유형, 구...”하지만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목뒤에서 차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나는 기억을 잃고 쓰러졌다.다시 눈을 떴을 때 주변은 어두운 상태였고 몇 개의 노란 불빛만이 희미하게 켜져 있었다. 나는 부드러운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흐릿한 기억이 떠오르면서 나는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나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내고 내 옷을 확인했다.그 순간, 내가 입고 있는 낯선 잠옷을 보고 머리가 멍해졌다.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같은 잠옷을 입은 헤르나가 들어왔다.나는 순간적으로 온몸이 얼어붙었고 두려움과 분노가 가득 찬 눈빛으로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이렇게 화를 내다니?”헤르나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는 그를 눈으로 죽어라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저 내 옷을 누가 바꿔 입혔는지 왜 잠옷을 입고 있는지 묻는 것조차 용기가 나지 않았다.헤르나는 와인잔을 손에 들고 침대에 앉았다. 그의 하얀 피부와 유럽식 미남의 외모가 어우러져 고요하면서도 묘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혹시 네 옷차림 때문에 화가 난 건가?”그는 내 몸에 입은 잠옷을 가리키며 웃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불을 더 꽉 움켜쥐었다.헤르나가 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묻고 싶었지만 너무 바보 같을 것 같았다.그가 나에게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간단했다. 그냥 몸을 조금만 움직이면 알 수 있을 테니까.“정말 순진한 여자애구나.”헤르나가 웃으며 와인 한 모금을 마셨다.“저를 여기 데려와서 도대체 뭘 하려고 하는 거예요?”나
사람은 정말로 의식이 끊어지는 순간이 있다. 지금 내가 바로 그런 상태였다.그렇지 않았다면 첫 반응으로 소리를 지르거나 문을 열고 도망쳤을 텐데 나는 그냥 그 자리에 앉아 멍하니 그 남자에게 물었다.“누구세요?”“왜 이렇게 슬픈 표정이야? 사랑의 아픔을 겪고 있는 거야?”그 남자는 전형적인 외국인이었다. 깊은 눈두덩, 높은 콧날, 입체적인 이목구비를 가진 모습이었지만 한국어는 정말 유창하게 했다.그가 정말 대단한 사람인 게 내가 왜 슬픈지 한 번에 알아차린 것 같았다.“누구세요?”나는 여전히 멍하니 그에게 물었다.그 순간,잠깐 끊겼던 의식이 돌아오면서 나는 Q 클럽의 회장이 떠올랐다.하지만 그가 정말 그 사람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나는 Q 클럽 회장이라면 거칠고 강한 남자일 거라 생각했는데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단정하고 우아하며 나이에 비해 매우 세련된 멋있는 남자였다.길거리에서 만났다면 모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문득 강유형이 말했던 Q 클럽 회장이 다쳤다는 말을 기억했다. 그래서 나는 그 남자를 다시 유심히 살펴봤지만 그냥 이 남자가 점점 더 잘생기고 멋있어 보였다.“난 헤르나 톨스크라고 해.”그 남자가 몸을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그제야 나는 우리가 매우 가까운 거리라는 것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그는 내 얼굴을 만지려는 듯 다가왔지만 나는 고개를 돌려 그 손을 피했다.그럼에도 그는 손을 내 머리에 얹고 마치 애완견을 쓰다듬듯 가볍게 톡톡 쳤다.“날 ‘헤르나’나 ‘톨스크’라고 불러도 돼.”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의 손길을 피했다. 마치 궁지에 몰린 고양이가 꼬리를 감싸듯이 말이다.“뭐 하는 거죠?”나는 소리 지르지 않았다. 만약 지금 소리라도 질렀다면 강유형이 달려와도 나는 그 남자의 손안에 갇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맞춰봐.”헤르나는 늘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기에 나는 그다지 무섭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대답했다.“나 잡으러 왔겠죠.”“하하...”헤르나는 껄
목 속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가슴 속 깊이까지 퍼져 나갔고 나는 침묵 속에서 겨우 입을 열었다.“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게. 반지 고르느라 바쁜 것 같네. 그럼, 이만!”나는 마지막까지 정신을 붙잡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끊어지는 순간 내 마음도 그 자리에서 무겁게 내려앉았고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나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한 채 그렇게 서 있었다. 그리고 그때, 강유형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강유형이 점점 가까워지자 나는 급히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잠깐만 기다려. 짐 정리하고 올게.”강유형은 나를 따라오며 말했다.“내가 같이 올라갈게.”“괜찮아, 혼자 올라갈게.”나는 큰 소리로 거절하며 더 빠르게 걸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강유형은 나를 계속 따라왔다.“무슨 일이야?”그는 내 불안한 모습을 눈치챘다. 나는 마음속에서 치솟는 감정을 억누르며 그를 바라봤다.“괜찮아. 그냥... 혼자 정리하고 싶어서.”하지만 내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내 마음은 점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강유형의 그 질문에 난 거의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그러나 나는 그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다. 진정우와 함께할 때 나는 강유형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때는 정말 자신만만했었지만 지금은 그 아픔이 배로 되어 나를 덮치는 것 같았다.나는 마음속에서 넘쳐나려는 슬픔을 억누르며 억지로 강한 척 그를 바라봤다.“너랑 함께 올라가는 건 좀...”나는 담담하게 말했다.“다른 뜻은 없어. 네가 걱정돼서 그래. 그럼 문 앞에서 기다릴게.”그가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나는 강유형이 문밖에 있는 것조차 싫었다. 지금 나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나는 진정우를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방금 그 여자의 한마디가 나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나는 진정우를 완전히 잊지 못했고 여전히 신경 쓰고 있었다.“무슨 일이 생기겠어? 너무 걱정하는 거 아니야?”결국 나는 공격적인 어조로 대답했다. 강유형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