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입을 열지 않았다면 나는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잊을 뻔했다.진정우의 얼굴에 감정은 없었고 다만 그의 눈빛은 깊고 짙었으며 그가 언급한 사람은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하지만 용진표가 말했듯 진정우의 아버지는 내 부모에게 해를 끼친 이유가 전혀 다른 이유였고 오늘 오는 길에 진정우도 그것을 인정했다. 진정우 아버지의 행동은 모두 돈 때문이었다.그렇다면 이제 그가 나에게 이렇게 묻는 이유는 무엇일까?내 머릿속은 혼란스럽고 점점 아파지기 시작했고 마치 전기 드릴이 머리를 파고드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나는 다시 한번 삼촌을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침착하고 차분한 모습이었으나 반면 아줌마는 굉장히 긴장한 듯 삼촌의 팔을 꼭 쥐고 있었다.진정우와 삼촌이 몇 초간 눈을 마주친 후 삼촌이 입을 열었다.“네 아버지가 돈에 끌려서 그런 짓을 한 것과 나는 전혀 관계없어.”“정말로 관계가 없나요?”진정우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진정우, 네 아버지가 저지른 일을 네가 이미 다 말했잖아. 만약 네 아버지가 뭔가 했다면 나도 더 숨길 이유도 없잖아.”아줌마는 여전히 삼촌을 옹호하며 말했고 진정우는 얼굴을 더욱 단단히 굳혔다.“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용진표가 제 아버지를 매수한 이유가 분명히 다른 사람의 지시 때문이었어요.”삼촌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고 진정우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내 추측이 맞다면 당신들은 아마 지원의 앞길을 막으려고 했을 거예요. 지원의 부모가 죽으면 다른 사람도 지원이를 입양할 기회가 없겠죠.”나는 순간 놀라서 고개를 돌려 진정우를 바라봤고 이번엔 진정우도 나를 바라보았다.“왜냐하면 지원의 피는 특별했고 당신 아들의 예비 혈액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지원이를 잘 키우면 그동안 당신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 속죄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에요.”진정우는 말을 마친 후 삼촌을 향해 다시 말을 이었다.“지원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의 도구였어요.”아줌마는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그 순간 나는 그를 밀어낼 수 없었다. 내가 필요한 건 구원이었으니까.비록 잠시라도 나는 그게 필요했다.내 몸이 가벼워지자 진정우는 나를 안아 일으켰고 아줌마가 또 나와 진정우를 부르며 말했다.“지원아, 진정우... 너희들...”“먼저 지원이를 집에 데려가겠어요. 지원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나중에 얘기하죠.”진정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안고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그가 나를 차에 태운 후 나는 그의 옷깃을 움켜잡고 얼굴을 그의 목에 대고 크게 울기 시작했다.진정우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나는 그에게 눈물과 코를 묻히며 계속 울었다.이번엔 눈물이 너무 쏟아져서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진정우는 나를 병원으로 데려갔다.병원 침대에 누워 있을 때 나는 겨우 감정을 진정시킬 수 있었으나 머릿속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도통 알 수 없었다.경찰에 신고해서 삼촌을 잡아 부모님을 대신해 복수를 해야 할까?하지만 그건 복수가 아니라 그저 악한 사람들을 법의 심판을 받게 하는 것뿐이다.그런데 그것조차 내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내가 잃은 모든 것은 돌아오지 않으니까.그 생각을 하자 마음속에서 분노가 밀려오고 나 자신이 너무도 무력하게 느껴졌다.삼촌과 용진표를 잡아넣고 그들이 죽는다 해도 내 인생의 결핍은 채워지지 않을 거란 걸 알았다.마치 홀로 떠 있는 외로운 배처럼 내가 이렇게 무력한 건 처음이었다.“물 마실래?”진정우가 내가 깨어나자 물었고 그러자 나는 눈을 깜빡였다.“나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줘.”그는 긴 팔을 뻗어 나를 안아 일으킨 후 물컵을 내게 건넸다.“물 먼저 마셔.”나는 물컵을 받지 않고 그저 그를 바라봤고 그는 나의 유일한 구원자인 것 같았다.그는 물컵을 내 입 근처에 대고 말했다.“목소리가 안 나오잖아.”안 나오는 건가?난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나의 그런 모습을 보자 그는 얼굴에 피식 웃음 대신 어쩔 수 없
이렇게 하면 더 이상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내가 겪는 아픔에서 그가 준 부분이 조금이라도 덜어지겠지.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나는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그만 돌아가.”우리가 함께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나는 그가 준 이 작은 위로마저도 이제는 나에게 독이 될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러자 진정우의 어두운 눈빛이 더 깊어졌고 그는 턱을 움켜잡고 목덜미를 움찔거리며 말했다.“잘 지냈으면 좋겠어.”그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고 계속 울려대는 전화도 자동으로 끊겼다.나는 눈을 감았고 눈 주위가 아프게 부풀어 있었다.그때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마치 내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계속 울릴 것 같았다.나는 눈을 뜨고 전화를 보았지만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다시 눈을 감았다.강유형의 전화였다.하지만 지금 나는 그의 전화를 받기 싫었다.만약 내가 부모님이 죽은 원인을 추적한다면 그 끝에는 결국 강유형이 있을 것이다.그의 특이한 혈액형 때문에 이렇게 얽히고설킨 사랑과 증오 그리고 인생의 빚이 생겨난 것이다.나는 전화를 끊어버리고 그의 연락처를 차단했고 메시지도 카톡도 모두 차단했다.이제 내 세상은 잠시 조용해졌지만 나는 또다시 혼란스러웠다.나는 이런 혼란스러운 느낌이 너무 두려웠기에 전화를 걸어 안리영에게 도움을 청했다.반 시간 뒤에 안리영은 병실에 나타났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껴안았다.그녀는 나를 집으로 데려가서 따뜻한 목욕을 시키고 잠을 자라고 했다.“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내일 기분이 괜찮아지면 다시 생각해.”하지만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고 결국에 안리영이 준 물 한 잔을 마신 뒤 잠이 들었다.안리영은 의사였기에 나를 잠들게 하는 건 어렵지 않았고 나는 그녀가 참 고마웠다.그렇지 않으면 내가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을지도 몰랐다.다음 날, 내가 깨어났을 때 안리영은 아침을 준비해 놓았고 아무 말 없이 나에게 먹으라고 했다.하지만 나는 먹고 싶지 않았다. 정말 먹을 수 없었지만 안리영이 걱정할까 봐 억지로 하나의
강유형은 안색이 여전히 좋지 않았고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으며 턱에는 면도하지 않은 수염이 자라 있었다. 나는 그의 이런 모습을 처음 봤다. 이 한밤중에 그도 좋은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아마도 강유형은 삼촌이 저지른 일을 알게 된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내게 계속 전화를 하지 않았을 테니까. 비록 내가 그를 미워하고 그가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를 보니 미운 감정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보고 나니 이전보다 훨씬 차분해졌다. 아마 모든 감정이 무뎌져서 그런 것 같았다.그는 문 앞에서 서 있기엔 불편해 보여서 나는 그에게 차분히 말했다.“들어와서 이야기해.”그가 들어와서 내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엄마가 모든 걸 나에게 말했어... 지원아, 미안해...”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고 그가 내게 온 이유가 단순히 사과하려는 게 아니란 걸 알았다.“지원아, 내가 미안하다고 말해도 아무 소용 없다는 걸 알아. 그래서 오늘 내가 너한테 묻고 싶은 건... 아니, 사실은 부탁이야...”그는 잠시 망설였다.“부탁이라고?”나는 그 단어가 입에서 나온 걸 듣고 놀랐다. 평소 그의 태도와는 다르게 참으로 드문 일이었다. 그는 늘 대충 살아가던 사람이었지만 분명히 부모에게는 효자였다.“지원아, 이건 너무 무리한 부탁이라는 건 알아. 아버지는 이제 네 부모님에 대한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지금 당장이라도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을 거야. 하지만 내가 부탁할 수 있는 건 제발 아버지를 살려달라는 거야. 내가 대신 그 빚을 갚을게.”“너는 그게 무슨 빚인지 아냐?”내가 그의 말을 끊으며 차갑게 물었다.“그건 목숨이 달린 빚이야.”그러자 그의 시선이 잠시 땅에 닿았다.“알아. 그래서 네가 아버지를 용서해 준다면 네가 원하는 모든 걸 할게.”하지만 나는 그들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고 그게 바로 내게 주는 고통이었다.“그럼 네가 뭘 하면 내 부모님을 살릴 수 있겠어?”나는 그의 말을 더욱 날
강유형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건 두 시간 뒤였다. 강진혁이 나한테 전화를 걸어왔다.“지원아, 유형이 교통사고를 당했어. 지금 응급처치 중인데 좀 와줄 수 있겠어?”강진혁의 목소리는 매우 급했다.나는 그가 말하는 걸 듣고 나서 손이 떨렸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와 싸웠던 기억이 떠올라 핸드폰이 떨어져 버렸다.강진혁 쪽에서 아마도 그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지원아, 괜찮아? 너 괜찮은 거 맞아?”부엌에서 요리하고 있던 안리영이 급히 달려 나왔고 내 얼굴을 보고는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지원아, 오해하지 마. 네가 와야 하는 이유는 유형이 지금 치료 중이라서 네가 혈액을 공급해 달라고 그런 게 아니야. 그냥 네가 와서 유형이를 한 번만 봐달라는 거야. 유형이 구급차에 실려 가면서 계속 네 이름만 부르더라.”안리영은 내가 말한 대로 핸드폰을 주워서 강진혁에게 대신 대답했다.“강유형과 지원이는 이제 아무 관계도 없어요. 그런 소식은 필요 없습니다.”강진혁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안리영은 전화를 끊고 나를 옆에 앉히며 어깨를 감싸안았다.“이 강유형 집안은 정말 끝까지 사람을 이렇게 몰아붙이나?”“다 내 잘못이야...”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다 내 잘못이라고...”안리영은 내가 강유형과 싸운 사실을 모르지만 내 감정을 헤아려서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대신 나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지원아... 이러지 마. 뭐든지 혼자서 다 짊어지려 하지 마. 네 잘못이 아니야.”나는 병원에 가지 않았지만 마음은 계속해서 불안하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는 강유형을 미워했고 그의 집안 사람들을 증오했지만 그런데도 그의 생사에 무관심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그가 죽는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그를 미워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가 죽으면 나의 분노도 함께 사라질지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강유형의 집안이 내 부모님의 죽음을 밝히고 난 뒤 나는 계속해서 혼란스러웠고 나아갈 길을 알 수 없었다. 심지어 내 머리는 터질 것처
“그럼 왜 넌 모든 사람을 위해 소원을 빌었어?”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고 그러자 안리영의 얼굴에 있던 미소가 서서히 사라지며 말했다.“지원아, 난 이 몇 년 동안 참 많이 봐왔어. 암에 걸린 여성들의 절망과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 아기들의 안타까움... 너무나 많은 생사이별을 봤어.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팠어. 그래서 이제는 그런 걸 다시 보고 싶지 않아. 그러면 내 마음이 더 행복해질 것 같아서.”안리영은 내 손을 잡고 이어 말했다.“그래서 나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거야. 사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거고.”그 말을 들으며 나는 잠시 안리영을 바라보았고 그녀는 마치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예전에는 단순히 밝고 활기찬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그녀 주위에 마치 부처님의 빛이 감도는 것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그녀는 그 사실을 몰랐는지 이어서 나에게 물었다.“넌 산에 올라갈 거야? 안 가도 괜찮아. 여기서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거야. 마음만큼은 진실하니까.”“올라갈 거야.”잠시 망설였지만 나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네 몸 상태 괜찮겠어? 그냥 나랑 같이 내려가자.”안리영은 여전히 나를 걱정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괜찮아.”말을 마친 후 나는 산꼭대기의 사찰을 올려다보며 말했다.“올라가서 네 소원도 같이 빌어줄게.”“하하.”안리영이 다시 웃었다.“그럼 고마워. 하지만 나는 진짜 올라갈 수 없어.”안리영은 나를 버린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나를 걱정하는 마음에 내가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신경 쓰는 듯 보였다.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그녀를 위아래로 쳐다보았다.“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안리영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는지 손으로 내 머리를 톡 쳤다.“무슨 일이긴... 아무 일 없다고. 그냥 산을 오르는 게 무서워. 예전에 한 번 올라갔다가 진짜 거의 죽을 뻔했거든.”“휴...”안리영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산 오르는 게 좀 트라우마가 있어.”나는 고
하룻밤 저러고 있었다고...내가 강씨 가문을 떠난 뒤 아줌마가 이곳에 왔나 보다.그녀가 무릎을 꿇고 등을 구부린 채로 복판에 엎드려 있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은 마치 누군가가 거대한 손으로 움켜잡은 듯했다.스님이 그쪽으로 다가갔지만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결국 나는 천천히 걸어가서 아줌마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아줌마.”그러자 아줌마는 몸이 한 번 떨렸고 그 뒤에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입술만 떨며 눈물을 흘렸다.그녀의 얼굴을 보며 나는 머리가 혼란스러웠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보고 그제야 하룻밤 사이에 많이 희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지원아.”아줌마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끌어안았다.그녀의 품은 나에게 그 누구보다 익숙하고 따뜻했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는 손을 들기조차 힘들었다.“지원아, 아줌마가 잘못했어. 죄를 뉘우치러 부처님에게로 왔어.”아줌마는 내 귀에 흐느끼며 말했지만 나는 그녀의 사죄와 애원으로는 내 부모님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알았다. 나는 사찰의 부처님 동상을 바라보며 더 이상 내 부모님의 부재를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내가 무엇을 하거나 또 얼마나 그들을 미워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모든 감정이 나와 살아있는 사람들을 더 아프게 할 뿐이었다.안리영이 했던 말과 스님이 해준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나는 생각했다. 내가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내가 미워하는 이유는 그들이 내 부모를 빼앗아 갔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 미움이 부모님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미움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결국 나만 고통스럽게 할 뿐이었다.“아줌마, 무슨 소원을 빌어도 돌아오지 않아요. 아줌마는 그냥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싶을 뿐이잖아요.”내 목소리가 목에 걸리며 말을 이었다.“하지만 그런 마음은 부처님께서 줄 수 없어요. 오직 내가 줄 수 있어요.”왜냐하면 내가
아줌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을 놓았다.“전화해서 물어볼게.”그녀는 전화하러 가고 나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 채 기도했다. 나는 모든 이들의 평안과 순조로운 삶을 기도했다.그때 아줌마의 목소리가 내 기도 속에서 들려왔다.“강진혁, 날 속이지 마. 정말 괜찮은 거야? 알겠어. 지금 바로 돌아갈게. 유형에게 말해줘 난 지금 법운사에 왔다고. 여기서 지원이도 만났어.”아줌마는 말을 마치고 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지원이는... 괜찮아. 아무 일 없었어. 유형에게도 말해줘. 지원은 괜찮고 우리 잘못도 용서했다고... 알겠어...”나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숙이고 절을 했다. 그 절은 단순히 절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묶여 있던 모든 감정을 내려놓는 순간이었다.아줌마는 돌아갔고 나는 스님이 읊조리는 경을 들으며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저녁이 되어 산에서 내려올 때까지 나는 그곳에 있었다.안리영이 나를 데리러 왔고 그녀는 해바라기 꽃 한 송이를 건넸다.“너 이제 다시 태어난 거야. 축하해.”그녀는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었고 내가 이번에 모든 미움과 원망을 내려놓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덕에 나는 나 자신을 놓아줄 수 있었다.안리영과 나는 서로를 안고 산에서 내려갔고 지 사장네 가게에 가서 술을 마셨다. 많이 마신 건 아니지만 아주 늦게까지 마셨다. 모든 사람이 떠난 뒤 우리는 지 사장을 불러 함께 마셨다.“사장님, 이 술집은 평생 열어줘야 해요. 우리가 치아 없이 늙어버려도 여기에 와서 한 잔씩 할 수 있게 말이죠.”안리영이 내 어깨를 감싸며 지 사장한테 부탁했고 그러자 지 사장은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들이 치아를 잃을 때면 저는 이 세상에 없을 거겠죠.”그는 우리보다 나이가 많았으니까 사실을 말한 거였다.나는 안리영과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지 사장은 술잔을 우리에게 흔들며 말했다.“모든 사람은 죽음을 향해 살고 있죠. 그래서 죽음은 필연적인 거죠. 그러니 이르게 오든 늦게 오든 뭐가 중요하겠어요?”그 말에
“헤르나!”진정우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나는 친근한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더 절박하게 도움을 요청하면 할수록 헤르나가 진정우를 더 쉽게 협박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헤르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고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런 뒤 여유롭게 와인잔을 들었다.“진, 너의 여자 친구는 정말 귀엽고 아름다워. 정말 매력적이야.”“걔는 이제 내 여자가 아니야.”진정우의 말은 마치 내 가슴을 칼로 베는 듯했다. 그가 사실을 말하는 건 알았지만 그 말이 여전히 날 아프게 했다.“아니라고? 내 정보가 아직 정확하지 않나 보네.”헤르나가 비웃었다.“할 말이 있으면 빨리해. 아니면 끊을 거야.” 진정우의 차가운 말투가 내 마음을 꽁꽁 얼어붙게 했다. 그가 나를 구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건 예상했지만 이렇게 차가운 목소리로 나를 내버려두는 건 상상도 못 했다.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것이 바로 이 순간이었다. 내가 헤르나에게 이용당할지 모르는 데도 진정우는 내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왜 그래?” 헤르나가 말하며 내 몸을 던지듯 당기더니 갑자기 자기 품으로 끌어당겼다.그는 자기 얼굴을 내 쪽으로 바싹 붙이며 진정우에게 그대로 보여주었다.진정우는 검은색 셔츠를 입고 있었고 금색 칼라 핀을 꽂고 있었다. 그는 화면 속에서 내게 무심히 시선을 보냈고 그 눈빛은 마치 내 존재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차갑고 냉정했다.“진, 이제 네 여자가 아니라면 내가 얘를 가져도 되겠지?”헤르나가 말하며 내 얼굴에 입술을 밀어붙이려고 했다.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물러났지만 그의 큰 손은 이미 내 목을 움켜잡고 있었다.그의 입술은 내게 닿지 않았지만 그 느낌은 마치 독사처럼 차가운 혓바닥이 내 몸을 스치는 듯했다.그는 이 모든 걸 진정우에게 보이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진정우가 정말 나를 도와주지 않고 모른 사람 취급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바로 그때 진정우가 말했다.“헤르나, 네 마
내가 말하려고 입을 열기 전에, 헤르나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꼬마야, 지금 그 남자를 들여보내면 인질 한 명 더 많아지는 건데.”그는 나를 협박하며 또 겁을 주고 있었다.“지원아?”강유형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고 목소리에서 급한 기색이 묻어났다.나는 헤르나가 나를 데려가도록 그냥 두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갑자기 그의 손을 물었다.헤르나는 깜짝 놀라며 손을 뺐고 그 틈을 타서 나는 몸을 일으켜 힘껏 문 쪽으로 달려갔다.“강유형, 구...”하지만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목뒤에서 차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나는 기억을 잃고 쓰러졌다.다시 눈을 떴을 때 주변은 어두운 상태였고 몇 개의 노란 불빛만이 희미하게 켜져 있었다. 나는 부드러운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흐릿한 기억이 떠오르면서 나는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나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내고 내 옷을 확인했다.그 순간, 내가 입고 있는 낯선 잠옷을 보고 머리가 멍해졌다.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같은 잠옷을 입은 헤르나가 들어왔다.나는 순간적으로 온몸이 얼어붙었고 두려움과 분노가 가득 찬 눈빛으로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이렇게 화를 내다니?”헤르나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는 그를 눈으로 죽어라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저 내 옷을 누가 바꿔 입혔는지 왜 잠옷을 입고 있는지 묻는 것조차 용기가 나지 않았다.헤르나는 와인잔을 손에 들고 침대에 앉았다. 그의 하얀 피부와 유럽식 미남의 외모가 어우러져 고요하면서도 묘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혹시 네 옷차림 때문에 화가 난 건가?”그는 내 몸에 입은 잠옷을 가리키며 웃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불을 더 꽉 움켜쥐었다.헤르나가 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묻고 싶었지만 너무 바보 같을 것 같았다.그가 나에게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간단했다. 그냥 몸을 조금만 움직이면 알 수 있을 테니까.“정말 순진한 여자애구나.”헤르나가 웃으며 와인 한 모금을 마셨다.“저를 여기 데려와서 도대체 뭘 하려고 하는 거예요?”나
사람은 정말로 의식이 끊어지는 순간이 있다. 지금 내가 바로 그런 상태였다.그렇지 않았다면 첫 반응으로 소리를 지르거나 문을 열고 도망쳤을 텐데 나는 그냥 그 자리에 앉아 멍하니 그 남자에게 물었다.“누구세요?”“왜 이렇게 슬픈 표정이야? 사랑의 아픔을 겪고 있는 거야?”그 남자는 전형적인 외국인이었다. 깊은 눈두덩, 높은 콧날, 입체적인 이목구비를 가진 모습이었지만 한국어는 정말 유창하게 했다.그가 정말 대단한 사람인 게 내가 왜 슬픈지 한 번에 알아차린 것 같았다.“누구세요?”나는 여전히 멍하니 그에게 물었다.그 순간,잠깐 끊겼던 의식이 돌아오면서 나는 Q 클럽의 회장이 떠올랐다.하지만 그가 정말 그 사람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나는 Q 클럽 회장이라면 거칠고 강한 남자일 거라 생각했는데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단정하고 우아하며 나이에 비해 매우 세련된 멋있는 남자였다.길거리에서 만났다면 모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문득 강유형이 말했던 Q 클럽 회장이 다쳤다는 말을 기억했다. 그래서 나는 그 남자를 다시 유심히 살펴봤지만 그냥 이 남자가 점점 더 잘생기고 멋있어 보였다.“난 헤르나 톨스크라고 해.”그 남자가 몸을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그제야 나는 우리가 매우 가까운 거리라는 것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그는 내 얼굴을 만지려는 듯 다가왔지만 나는 고개를 돌려 그 손을 피했다.그럼에도 그는 손을 내 머리에 얹고 마치 애완견을 쓰다듬듯 가볍게 톡톡 쳤다.“날 ‘헤르나’나 ‘톨스크’라고 불러도 돼.”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의 손길을 피했다. 마치 궁지에 몰린 고양이가 꼬리를 감싸듯이 말이다.“뭐 하는 거죠?”나는 소리 지르지 않았다. 만약 지금 소리라도 질렀다면 강유형이 달려와도 나는 그 남자의 손안에 갇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맞춰봐.”헤르나는 늘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기에 나는 그다지 무섭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대답했다.“나 잡으러 왔겠죠.”“하하...”헤르나는 껄
목 속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가슴 속 깊이까지 퍼져 나갔고 나는 침묵 속에서 겨우 입을 열었다.“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게. 반지 고르느라 바쁜 것 같네. 그럼, 이만!”나는 마지막까지 정신을 붙잡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끊어지는 순간 내 마음도 그 자리에서 무겁게 내려앉았고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나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한 채 그렇게 서 있었다. 그리고 그때, 강유형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강유형이 점점 가까워지자 나는 급히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잠깐만 기다려. 짐 정리하고 올게.”강유형은 나를 따라오며 말했다.“내가 같이 올라갈게.”“괜찮아, 혼자 올라갈게.”나는 큰 소리로 거절하며 더 빠르게 걸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강유형은 나를 계속 따라왔다.“무슨 일이야?”그는 내 불안한 모습을 눈치챘다. 나는 마음속에서 치솟는 감정을 억누르며 그를 바라봤다.“괜찮아. 그냥... 혼자 정리하고 싶어서.”하지만 내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내 마음은 점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강유형의 그 질문에 난 거의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그러나 나는 그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다. 진정우와 함께할 때 나는 강유형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때는 정말 자신만만했었지만 지금은 그 아픔이 배로 되어 나를 덮치는 것 같았다.나는 마음속에서 넘쳐나려는 슬픔을 억누르며 억지로 강한 척 그를 바라봤다.“너랑 함께 올라가는 건 좀...”나는 담담하게 말했다.“다른 뜻은 없어. 네가 걱정돼서 그래. 그럼 문 앞에서 기다릴게.”그가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나는 강유형이 문밖에 있는 것조차 싫었다. 지금 나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나는 진정우를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방금 그 여자의 한마디가 나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나는 진정우를 완전히 잊지 못했고 여전히 신경 쓰고 있었다.“무슨 일이 생기겠어? 너무 걱정하는 거 아니야?”결국 나는 공격적인 어조로 대답했다. 강유형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와 함께
‘가야 하는가?’강유형이 그렇게 많은 충고를 줬지만 난 여전히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모르겠다. 강유형은 나를 묵묵히 바라보았고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정우한테 물어볼게.”그러자 강유형의 눈빛이 순간 어두워졌다. 그래도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나는 강유형을 믿지 않는 게 아니라 진정우만큼은 확실히 믿는다. 그래서 나는 그가 내린 결정을 따라야 했다. “여보세요?”전화가 연결되자 진정우의 목소리가 낮고 매력적으로 들려서 귀가 조금 따갑게 느껴졌다.“무슨 일이야?” 내가 말을 꺼내지 않자 진정우가 다시 물었다.“정우야, 지금 내가 있는 호텔에 두 사람이 나를 감시하고 있어. 네가 보낸 사람이야?”내가 숨을 고르며 말을 이어갔다. “3A 좌석에 있는 사람들 맞아?”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 사람들이 3A에 있으면 맞겠지. 그곳에서 널 지켜보고 있어.”그렇다면 그는 내가 있는 곳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강유형이 여기서 뭘 하든 진정우는 이미 전혀 모르는 게 없다는 게 확실해졌다.“강유형이 지금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말해줬어. 그래서 묻고 싶은 게 있어. 나는 돌아가야 할까 아니면 강유형이 마련한 다른 곳으로 가야 할까?” 내 목소리가 낮아졌다. 진정우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차가운 침묵을 깨고 나서 물었다.“왜 나한테 묻는 거지?”나는 그냥 그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서 묻는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이 일이 너와도 관련이 있잖아.”침묵 속에서 난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 잠시 후 그는 다시 말을 꺼냈다. “강유형은 널 해치지 않을 거야.”그의 말은 결국 내가 강유형을 따라야 한다는 뜻이었고 강유형과 함께 가라는 의미였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이 불편했다.이전에 진정우는 나를 강유형에게 맡기기도 했고 내가 강유형을 위해 헌혈했을 때 화를 냈었다. 그런데 지금 이 남자는 또 나를 강유형에게 보내려고 한다
“신지태는 당분간 괜찮을 거야.” 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강유형이 설명을 덧붙였다.“Q 클럽은 겉으로는 스누커를 하지만 실제로는 도박을 하고 있어. 신지태에게 그런 일을 벌인 건 그들이 우승을 이어가면서 도박에서 가장 큰 이득을 챙기려는 거였어.”도박이라... 들은 적은 있지만 스누커와 그런 일이 연관될 줄은 몰랐다.“신지태는 이제 그들 손에 넘어가지 않을 거야. 그런데 그들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냈어. 그게 바로 지태를 도박에 이용하는 거야. 지태가 경기에서 이기면 겉으로는 그들이 돈을 잃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더 큰 이득을 챙기게 될 거야.”강유형의 말에 등 뒤로 서늘한 기운이 돌았다. 스누커 하나로도 그런 무서운 자본가들이 돈을 챙기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예전에 신지태가 스누커를 좋아한다고 했었고 그 후에는 세계 무대에서 한국인도 스누커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했었는데... 만약 그가 지금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걸 알면 기분이 어떨까?나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지태 오빠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몰라. 만약 알았다면 아마 경기를 하지 않았을 거야.”강유형은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말을 이었다.“그런데 만약 지태가 경기를 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나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았다.“지원아,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진정우가 신지태를 구했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 게 아니야. 사실 이 일은 그들이 모두 계획한 함정이었어.”나는 갑자기 닭살이 돋기 시작했다. 진정우는 이 일을 알고 있는 걸까? 진정우도 모르고 있는 건가?“지원아, 이제 경기까지 이틀밖에 남지 않았어. 그때까지 아무 일도 없어야 해. 그런데 브라운이란 사람은 예외야. 그의 팬은 Q클럽이 아무리 손을 써도 제어할 수 없지. 그래서 Q클럽은 너한테도 손을 대려 할 거야. 너를 다치게 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너를 협상 카드로 쓰려고 할 거야.”내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정우는 다시 Q클럽에 복수하는 걸 안 무서워하는 거야?”강유
강유형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이유는 분명히 뭔가 의도가 있는 거였다.그는 내 눈을 깊게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진정우는 좀 더 신중하게 브라운을 처리해야 했어. 그의 배경을 먼저 조사하고 나서 행동을 취했어야지.”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지만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네 말은 그 사람 배경이 강하니까 내가 괴롭힘을 당해도 참고 있어야 한다는 거야? 내가 피해를 봐도 그냥 참고 있으라는 거지?”강유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지원아, 그런 말은 아니야.”“강유형, 나는 진정우가 한 일이 잘못된 게 아니라고 생각해. 브라운은 그냥 자업자득이야.”나는 단호하게 말했고 강유형의 눈빛에 잠깐의 무력감이 스쳤다.“내 말은 좀 더 다른 방법을 쓸 수도 있었잖아. 이런 식으로 일을 키우는 건 결국 너를 더 위험하게 만들 뿐이야.”그는 말을 멈추고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지원아, 내가 말하는 건 진정우를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 그저 상황을 냉정하게 보자는 거야.”나는 그가 내 뜻을 왜곡할까 봐 걱정하지 않기 위해 선을 그었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봤자 소용없어. 게다가 브라운의 목표는 나니까 진정우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가 더 대담해질 거야.”브라운은 이미 진정우와 강유형이 함께한 연회에서 나를 괴롭혔고 그는 아예 두 사람을 무시하고 행동하는 거였다.“지금은 그의 팬들이 더 난리가 났지.” 강유형은 멀리 있는 남자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지원아, 넌 지금 어디에 있든 위험할 수 있어. 그래서 여기에 있는 건 안전하지 않아.”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강유형이 나에게 말한 의도를 알겠지만 내가 그와 함께 호텔에 가는 건 더 불편한 일이었다.내가 그에게 피를 주고 진정우는 이미 자기와 헤어졌다고 오해하고 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있으면 상황이 더 복잡해지겠지.그래서 나는 그럴 수는 없었다.“그의 팬들이 나를 노리고 있는 거니까 어디에 있든 난 위험할 거야.”나는 내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강유형은 턱선
“경기를 보러 온 거야? 티켓 샀어?” 강유형이 갑자기 화제를 바꿨다.“아직 안 샀어. 너는 티켓 있어? 티켓 구하기 힘드니까 내가 네 걸 살게. 얼마야?”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빠른 길이 있는데 일부러 돌아가는 건 어리석은 일이니까.그러자 강유형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있긴 한데 안 팔아.”그는 말하자마자 주머니에서 티켓을 꺼냈고 그것도 두 장이었다. “이미 나한테 남겨두라고 했어. 이건 신지태가 준비한 거야.”그 말을 들으니 내 마음이 잠깐 떨렸다. 신지태는 나에게 오라고 연락도 안 했는데 티켓을 남겨둔 걸 보면 나를 기다린 거였을 거다. 내가 안 왔으면 실망했을 것 같았다.“한 장 더 줄 수 있어?”강유형이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또 다른 티켓을 꺼내주었다.“강유형, 너 진짜 티켓 파는 사람 같아.”나는 티켓을 받으며 그를 놀리듯 말했다. 강유형은 웃기만 했지 특별히 대답은 하지 않았고 나도 더 이상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그때, 마침 소지훈이 진소영을 데리고 내려왔다. 그는 진소영의 짐을 밀어주고 진소영은 수줍게 그의 옆을 따르며 둘은 정말 달콤한 느낌을 주었다.“친구들이야.” 나는 강유형에게 두 사람을 소개하며 일어섰다.진소영은 소지훈과 함께 내 쪽으로 걸어오며 큰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새언니.”나는 진소영을 보며 그녀가 강유형을 경계하듯 쳐다보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의도적으로 ‘새언니’라고 불렀다. 이건 분명 강유형을 자극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지훈이가 잘 돌봐줄 거야. 그런데 만약 뭐가 이상하거나 네가 괴롭힘당하면 언제든지 전화해.”나는 진소영에게 말하는 척하며 소지훈에게 경고했다. 진소영은 얼굴이 빨개지면서도 소지훈을 지키려고 했다.“지훈 오빠는 저를 절대 괴롭히지 않아요. 언니 걱정하지 마세요.”나는 소지훈에게 티켓을 건네며 말했다.“이건 돈으로 살 수 없는 거야.”“고마워요, 새언니.”진소영은 예의 있게 답하며 또다시 나를 ‘새언니’라고 불렀다.“잘 가. 뭐 필요하면 연
“예쁜 아가씨, 저 좀 도와줄 수 있어요?”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순간적으로 긴장이 되어 고개를 들었다.그러자 흰머리의 외국인 할머니가 애처롭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죠?” 나는 예의 있게 물었다.“커... 커피 한잔 사주실 수 있을까요? 돈이 없어서 너무 오래 마셔보지 못했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깜짝 놀라면서 그런 그녀가 불쌍하게 느껴졌다.그래서 나는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정말 고마워요.” 그녀는 내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여기 앉아서 마셔도 될까요?”선한 마음으로 도와주는 거니까 앉게 해주는 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갑자기 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저기요. 저쪽 자리가 비었는데 그쪽으로 앉으세요.”나는 깜짝 놀라서 그를 보았다. ‘강유형이 왜 여기 있지?’어리둥절한 사이 강유형은 내 커피를 마시려던 그 할머니에게 옆자리를 가리키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서 건네주었다.“커피 드시고 싶으시면 직접 주문하시면 돼요.”강유형의 행동에 그 할머니는 그대로 물러나고 커피도 주문하지 않고 나갔다.나는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아무 말 없이 지켜봤다. 할머니가 돈을 들고 가는 모습에 미묘한 불쾌감이 들었다. 그때 강유형이 다시 말을 꺼냈다.“봤지? 그 할머니는 사실 커피를 마시고 싶었던 게 아니야.”“돈을 원한 거야?”“그래. 만약 오늘 그 할머니가 여기 앉아서 커피를 주문하게 되면 10분도 안 돼서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질 거야. 그러면 누군가 신고하고 넌 커피를 사준 사람으로 경찰에 끌려갈 거야.”강유형의 말에 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 말이 떠오르면서 신지태가 겪었던 일이 생각났다. 나는 믿기지 않았지만 그래도 강유형의 말에 반박했다.“사람들을 그렇게 나쁘게만 볼 필요 없잖아.”강유형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핸드폰을 꺼내 내 앞에 들이밀었다. 화면에는 한 할머니와 젊은 여자가 싸우는 영상이 나왔고 내용은 강유형이 말한 것과 거의 똑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