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옆에서 갑자기 나타난 사람을 곁눈질로 쳐다보았다.살짝 곱슬곱슬한 검은 머리카락과 파란 눈, 그리고 콧날이 살짝 올라간 모습은 분명 중서양 혼혈이 분명했다.그가 다시 만났다고 했지만 나는 그에 대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나를 스누커 소녀라고 부르며 말을 걸었다.분명히 그는 나를 알고 있었고 내가 스누커를 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네?”나는 미묘하게 눈살을 찌푸렸다.“저는 브라운이라고 하죠. 신지태의 당구장에서 당신이 당구를 치는 걸 봤어요. 정말 멋졌어요! 아니. 멋졌다가 아니라 날카로웠다고 해야 하나요?”그는 나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했고 그의 말은 내 의문을 풀어주었지만 나는 여전히 불편한 점이 있었다. 내가 당구를 칠 수 있게 된 건 강유형에게 배운 것이고 신지태와 함께 칠 때도 항상 강유형과 함께였지 다른 사람이랑 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그가 말한 내용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건 분명히 한 번쯤은 만났던 사람이라는 걸 의미했다. 하지만 혼혈인 사람이 있었다면 내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을 텐데...이 사람은 정말로 나를 알았던 사람일까?그렇지만 스누커와 관련된 일이라면 나는 모르는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고 싶었고 그래서 나는 부인했다.“그건 착각일 뿐이에요.”“절대 착각 아니에요. 확실히 당신이었어요.”그 남자는 아주 확신에 차서 말했고 그는 파란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윤... 지원 씨... 맞죠?”그는 내 이름까지 알고 있었지만 그런데 나는 점점 그와 얽히는 게 불편했다.익숙하지 않은 남자가 내 이름을 알다니 어떤 목적이든 간에 경계해야 할 이유가 충분했다.“미안하지만 저는 그쪽을 몰라요.”나는 그 말을 끝내고 돌아서려고 했지만 그는 내 길을 막았다.“악의는 없어요. 그냥 친구가 되고 싶어서 말 걸었어요.”나는 갑자기 불쾌해졌다.“그런데 저는 당신과 친구로 지내기 싫어요. 비켜요.”“지원 씨랑 한 게임 하고 싶어요.”그는 여전히 나를 붙잡으며 말했고 나의 불
“무슨 당구를 친다는 거야? 오늘 여긴 연회를 하는 자리야. 당구 대회를 하는 곳이 아니라고. 당구 치고 싶으면 다른 곳으로 가.”허진호는 총알처럼 빠르게 말하며 브라운의 손목을 꽉 쥐었다.“이거 놓으라고.”순식간에 브라운의 얼굴이 빨개졌고 허진호의 힘 때문에 고통을 느낀 게 분명했다.허진호도 생각보다 꽤 손에 힘이 있는 모양이다.하지만 브라운은 여전히 손을 놓지 않았다. 그때 내가 가장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진정우가 말을 던지면서 검은 정장을 입고 나타났고 그의 시선은 브라운이 내 손을 잡은 곳에 떨어졌다.브라운은 그를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진정우, 난 그냥 이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당구 한 게임 하자고 했을 뿐이야. 그런데 지원 씨가 내 체면을 전혀 세워주지 않네.”진정우는 내 얼굴을 지나쳐 브라운을 쳐다보며 차갑게 물었다. “왜 지원 씨가 네 체면을 챙겨줘야 하는 거지? 넌 누구야? 누가 너를 데려왔어?”그의 세 가지 차가운 질문이 떨어지자 누군가가 그의 귀에 속삭였다.진정우는 잠시 눈썹을 찌푸리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알려. 이 자식과 이 자식을 데려온 사람은 오늘 이 연회에서 나가라고.”그러자 브라운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너는 그냥 진씨 가문의 외부에서 온 잡종이야... 나를 쫓아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이번엔 진정우가 말하지 않자 그의 경호원들이 움직이려 했지만 진정우는 손을 들어 그들을 막았다.브라운은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비아냥거리며 떠났고 떠나면서 나에게 윙크하며 한마디 덧붙였다.“지원 씨, 이제 게임 한 번 하자. 약속했어.”정말 거만한 놈이었다.“뭐야?”허진호는 욕하며 진정우를 바라보았지만 진정우는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그저 자리를 떠났다.허진호는 진정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내 손목을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붉어졌네요. 저 외국 놈은 정말 여자를 어떻게 대는지도 모르나 봐요.”허진호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아파요?”그가 내 손을 부드럽게 불어주
“오늘 전하려는 또 다른 기쁜 소식은 바로 진씨 가문과 용씨 가문의 결혼 소식입니다. 진정우는 3개월 후에 용씨 가문의 아가씨 용설아와 결혼할 것입니다.”진정우의 할아버지의 말은 마치 얼음물 한 바가지가 내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것 같았고 나는 순간 온몸이 차가워졌다. 어쩌면 이게 진정우가 나와 헤어지려고 하는 진짜 이유일지도 모른다.용설아, 나는 그녀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녀는 용준호의 여동생이며 해외에서 유학 중이었다. 내가 용진표를 조사할 때도 이 정보를 알게 되었고 당시 용설아의 높은 학력에 관심이 갔었고 그녀의 사진도 본 적이 있었다. 사람도 정말 예쁘고 박사학위도 가졌으니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여자라고 할 수 있다.나는 진정우를 바라보며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내 발걸음은 너무 빨라서 신은 하이힐이 내 발을 따라오지 못했고 나는 문 앞에서 거의 발목을 삐끗할 뻔했다.사람이 안 풀리면 물 한 모금 마셔도 체한다고 했는데 진짜 그런 것 같았다.발목의 고통을 참으면서 나는 문 앞에 도달해 차를 부르기 위해 손을 들었다. 지금 나는 이곳을 빨리 떠나고 싶었고 1초라도 더 머무는 게 견디기 힘들었다.그때 내 손이 겨우 들려 했을 때 한 대의 차가 내 앞에 멈춰 섰고 창문이 내려가면서 강진혁의 얼굴이 보였다.“내가 데려다줄게.”그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고 내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나는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강진혁은 내 말을 끊었다.“지원아, 네가 이미 우리 집안 사람들과 다 얘기를 했지만 나랑은 아직 확실히 관계를 정리하지 않은 것 같아서... 오늘이 딱 좋은 기회야.”그의 말이 맞았다. 삼촌이 모든 걸 털어놓은 뒤 나는 강유형과 이야기했고 아줌마와도 얘기를 나눴지만 강진혁에게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언가를 말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강진혁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멀리하고 싶은 사람일 뿐이었다.나는 마음속으로 슬픔을 눌러가며 말했다.“오빠는 내가
강진혁의 눈빛에 잠시 실망이 스쳤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택시를 불러주고 내 차 문을 열어줬다.그런데 택시가 떠날 때 강진혁의 차는 멀찍이 떨어져서 내 뒤를 따라왔다.“아가씨, 남자 친구랑 싸운 거예요?”택시 기사가 웃으며 물었다.“남자 친구분이 괜찮은 사람이네요. 억지로 차에 태우려 하지 않고 아가씨가 화가 난 걸 알고 그냥 뒤에서 따라오면서 걱정만 하잖아요.”기사 아저씨는 참으로 말이 많았고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남자 친구 아니에요.”기사 아저씨는 잠시 놀란 듯 말이 없었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그렇게 밤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차창 너머로 뒤에 보이는 차를 발견했고 강진혁의 차 외에도 한 대가 있었다.그 차는... 진정우의 차 같았다.아까 진정우 할아버지가 발표한 결혼 소식이 귀에 맴돌았다.나는 마음이 마치 칼에 베인 것처럼 아팠고 모든 게 환상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눈을 감았다.잠시 후에 가슴의 고통이 조금 가라앉자 나는 다시 눈을 떴다. 그러나 진정우의 차는 여전히 뒤를 따르고 있었다.이번엔 확실했다. 이건 절대 환상이 아니라 진정우의 차가 맞았다.그는 지금 기쁜 마음으로 축하를 받으며 용씨 가문의 사람들과 결혼식을 준비해야 하는 게 맞잖아? 왜 내 뒤를 이렇게 따라오는 걸까?나는 궁금했지만 그가 직접 운전하는 차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기사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기사님. 잠깐만요. 차가 좀 미끄는척 해줄 수 있나요?”“뭐라고요?”기사 아저씨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남자 친구가 정말 나를 걱정하는지 확인해 보려고요.”내가 그렇게 말하자 기사 아저씨는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역시 여자들은 정말 하루에도 세 번씩 마음이 바뀌는구나.’사실, 내가 뒤차를 남자 친구라고 부르긴 했지만 진짜 확인하고 싶었던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다.“알겠어요. 남을 도와주면 더 오래 살 수 있다고 하잖아요. 아가씨, 잘 잡고 계세요.”기사 아저씨는 흔쾌히 동의하며 가속을 붙
밤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길게 늘어진 가로등 불빛 아래 진정우의 모습은 더욱 커져 보였고 나와 함께 있을 때보다 키가 더 커진 것 같았다.그가 내 곁에 서자 내 그림자는 그의 그림자 속에 묻혀 마치 우리가 하나처럼 느껴졌다.그 순간, 내 마음은 다시 씁쓸하고 아려왔다.마음이 아프고 숨 쉬는 것도 힘들 정도로 괴로워졌다.그 고통 속에서 그는 높은 곳에 올라서서 용씨 가문과의 결혼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 생각에 내 마음은 더 아파왔다. 결국 나는 고통을 견디며 입을 열었다.“진정우, 나를 불러서 뭐 하려고 그러는 거야?”진정우는 나를 보지 않고 그저 밤하늘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너... 신지태 경기를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다음 주에 경기가 있어. 가고 싶으면 내가 항공권 사줄게.”내 마음이 꽉 조여들었다. 경기를 보라는 게 아니라 그냥 나를 떠나라고 하는 것이었다.이제 결혼을 앞두고 있으니 내가 여기 있으면 그 좋은 기회를 방해할까 봐 두려운 거겠지?그와 헤어진 이후 나는 그가 날 상처 입히는 방식이 점점 더 잔인해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나는 입술을 꽉 물었다.“누가 가고 싶다고 했어?”내가 이 말을 할 때 나의 목소리는 마치 기가 빠진 공처럼 약해졌다. 화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눈물이 터질 것 같았지만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가 내 앞에서 내게 흘린 눈물을 본다면 그건 내가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자존심마저 잃어버리는 거니까.예전에는 내가 그를 붙잡기 위해서 울었고 그랬을 때 그는 오해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가 나보고 경기 보러 가라는 건 다른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서 나보고 자리를 비워달라는 뜻이었다.그는 이제 내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사람이었기에 지금 이 상황에 내가 울면 그저 내 가치를 떨어뜨릴 뿐이다.“네가 가면 신지태가 반가워할 거야.”진정우는 비꼬듯 말하는 것 같았다. 예전 같으면 나는 진정우가 질투하는 걸로 생각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그 말이 그냥 차가운 조롱처럼 들렸다.나
사랑 때문에 나는 한 번만 비참할 수 있어. 다시는 반복하지 않을 거야.“너는 잊었나 봐. 우리는 원수지간이었지. 그래서 나는 이미 너를 다 잊었어. 너랑 무슨 일도 없을 거야. 네가 누구랑 결혼하든 나는 상관하지 않아. 방해하지도 않을 거고. 원한다면 결혼 축하 선물이라도 보낼 수 있어.”“그리고 넌 나를 신경 쓸 필요도 없어. 나는 집요하게 달라붙지 않아. 원래 그렇지 않았어. 내가 한번 놓아버리면 죽어도 돌아가지 않아. 너랑 나는 몇 달밖에 안 됐잖아. 난 10년이나 함께한 강유형과도 금방 끝낼 수 있는 사람이야.”"그리고 너의 아버지는 내 부모님을 죽인 범인이야. 그 복수는 너한테 묻지 않겠다고 해도 원한은 사라진 게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너랑 다시 사랑할 수 있겠어? 그럴 수 없지. 그러면 나는 매일 밤 악몽을 꾸고 부모님도 날 용서해 주지 않을 거야. 그리고 용씨 가문도 내 원수야. 내가 지금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이 일을 잊은 게 아니라 그냥... 그냥...”나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할 말은 이미 다 했으니까.이렇게 한 번에 다 말하고 나니 나는 목이 꽉 막혔다. 그래도 내 마음속에서는 계속해서 말이 나올 것만 같았다.“우리 사이에 이렇게 많은 원한이 있는데 어떻게 내가 너를 다시 사랑할 수 있겠어? 그러니까 내가 네 결혼식에 방해받을까 봐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내가 복수하려면 다른 방법으로 할 거야. 너의 사랑과 결혼을 깨뜨릴 생각은 없어. 반면에 나는 정말 널 축복해 주고 싶어. 너의 행복을 기원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진심이야. 안 믿겠다면 하늘에 맹세할 수 있어."나는 손을 들어 그에게 웃으면서 말했고 그 순간 눈물이 주르르 흐르고 있었다.그리고 드디어 진정우의 눈 속에서 아픔과 함께 그가 긴장한 듯한 표정을 볼 수 있었다.내 말에 반응한 걸까? 혹시 내가 진정우를 마음 아프게 한 걸까? 아니면 진정우가 아직 나에게 감정이 남아 있는 걸까?그렇지만 이런 생
“언니도 휴링턴에 가게 될 줄은 몰랐어요.”진소영은 예전처럼 밝게 나를 언니라고 불렀다. 마치 진정우와 관련된 인터넷 정보를 전혀 모르는 듯했지만 나는 그녀가 다 봤다는 걸 알았다. 다만 그녀는 그 사실을 모르는 척 나와 함께 지내는 것이다.그녀는 진정우의 동생이기도 하고 또 하나의 개별적인 사람이다. 내가 진정우와의 감정적인 얽힘 때문에 그녀에게 뭐라 할 수는 없다.“날 그냥 언니라고 불러. 어차피...”내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너희 오빠는 다른 사람과 결혼할 거니까.”내 말에 진소영의 웃음이 굳어졌고 그 후엔 울음이 터질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아니에요.”그녀가 고개를 저었다.“언니는 나한테 영원한 언니예요. 나는 언니만 언니라고 부를 거예요. 아무도 못 바꿔요.”비록 그녀의 말이 내 마음의 상처를 모두 치유해 주진 않았지만 그 말은 어쩐지 내 마음을 조금은 편안하게 해줬다.진소영은 내가 그녀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를 이해하고 있구나 싶었다.“언니, 오빠는 아직도 언니를 사랑해요. 제가 맹세할 수 있어요.”진소영이 갑자기 손을 들어서 맹세하는 시늉을 했다.그 모습을 보니 어젯밤 진정우 앞에서 나도 똑같은 행동을 했던 게 떠올랐다.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내렸다.“그만해. 일단 어떻게 네 오빠가 아직 나를 사랑한다고 확신하는 건지 말해봐.”“언니, 내가 전에 말했던 것 말고도 한 번은 오빠가 술에 취했을 때 난 오빠가 목이 마를까 봐 방에 가서 물을 따라줬어요. 그랬더니 오빠는 언니 인형을 안고 있었고 나를 부르며 언니 이름을 계속 불렀어요. 그때 오빠가 뭔가 말했어요. 언니가 기다리면 일이 끝나면 언니를 데려갈 거라고...”내 마음이 확 쪼여왔다.진정우가 그런 말을 했다고? 혹시 진소영이 나를 위로하려고 그런 말을 만든 걸까?“언니, 오늘 이 비행기 티켓도 오빠가 사줬어요.”진소영의 말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그럼 진정우는 내가 이 비행기를 탄다는 걸 알았다는 말이야?”“그건 잘 모르겠어요. 근데 제가 경기
“언니, 사실 저도 스누커를 좋아해요. 이상한 일이긴 한데 전에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유도 모르겠지만 그게 너무 좋아요. 그리고... 수술 후에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 맛이나 생각들이 예전과 달라졌어요.”“언니, 이건 내 심장의 주인 때문이 아닐까요? 제가 책에서 본 적이 있어요. 장기 이식을 하면 원래 주인의 습관이나 취향을 물려받는다고요.”진소영은 애절하게 나를 바라보며 답을 기다렸다.사실 나도 TV에서 이런 걸 본 적은 있지만 의학적으로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하지만 실제로 경험한 사람들은 많다고 했다.간 이식만 해도 이전에 매운 걸 못 먹던 사람이 간 이식 후에는 매운 음식을 좋아하게 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그럴 수도 있겠네.”나는 그녀의 가슴을 쳐다보았고 그곳에서 다른 사람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어라. 얘기가 왜 이렇게 흘러갔지? 제가 아닌 오빠 이야기하고 있었잖아요. 언니, 저는 확실히 말할 수 있어. 오빠는 겉으로는 차갑게 보이지만 속으로는 분명히 언니를 몰래 걱정하고 있을 거예요.”진소영은 단호하게 말하자 난 방금 본 뉴스가 떠올랐다. 병원에 실려 간 브라운이 생각났고 누군가가 그의 항문에 스누커 공을 넣었다는 사건 말이다.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 누군가가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라면 그냥 그런 식으로 처리할 일이 아니었을 텐데...설마 날 괴롭힌 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그래서 이 일을 처리한 사람이 진정우였던 걸까?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휴대폰으로 허진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어젯밤 그 혼혈 남자 사건은 혹시 진정우가 처리한 거예요?]그러자 몇 초 만에 답이 왔다.[그렇죠. 아니면 또 누구겠어요?]메시지가 보내고 바로 삭제되었지만 나는 이미 보아버렸고 허진호는 다시 다른 메시지를 보냈다.[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지원 씨가 직접 진정우한테 물어보는 게 낫겠네요.]나는 그 메시지를 보고 웃음이 나왔고 휴대폰을 껐다.“언니랑 오빠 사이가 어떤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이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법운사로 향하는 길에 나는 강유형에게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기나긴 연결음 끝의 자동응답뿐이었다.가슴이 점점 무겁게 내려앉았다. 요즘 그가 법운사에 머물고 있었기에 더더욱 불안했다. 연락도 되지 않으니 머릿속은 온통 나쁜 상상으로 가득 찼다.그에게 전화를 건 건 단순히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부상자나 사망자가 있는지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었다.하지만 그에게 건 전화는 끝내 연결되지 못했다.나는 액셀을 밟으며 용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그의 어머니가 바로 그 절에 계셨으니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 역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이번엔 아예 거절당했다. 불안은 더 깊어졌다.‘혹시 김지영까지 무슨 일이 생긴 걸까?’그간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강유형과 김지영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다치거나 희생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복잡한 심경 속에서 차를 운전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멀쩡하던 절에 왜 불이 난 걸까? 단순한 사고였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의도한 일이었을까? 혹시 나를 노린 불은 아니었을까?’만약 안리영이 나를 데리고 조경태의 생신 잔치에 가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그 절에 있었을 것이다. 죽었을 수도, 심하게 다쳤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내 손에 누군가가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걸 얻지 못하면 나를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그들이 저지른 일이라면 그건 너무 비인간적이었다. 죄 없는 사람들까지 희생시켜서는 안 됐다.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이 나는 어느덧 산기슭에 도착했다. 들이마시는 공기 속엔 타버린 재 냄새가 가득했고 멀리 보이는 산 위엔 아직도 연기가 자욱했다.산을 절반쯤 오르자 경찰이 차량을 막아섰다. 나는 차에서 내리며 이
난처한 상황이었다. 도무지 어찌할지 몰라 법까지 들먹이고 말았다.“법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서른이 넘도록 연애도 안 하고 결혼도 안 하는 건 정상이 아니야. 어느 날 갑자기 남자 며느리라도 데려오면 내가 무슨 낯으로 사람들을 보겠냐?”조경태는 누가 뭐라 해도 듣지 않겠다는 태도였다.“그럼 제가 하나 약속드릴게요. 절대 남자를 며느리로 데려오는 일은 없을 거예요.”조시언은 능청스럽게 받아쳤다.조경태는 씩씩 대며 화를 냈다. 그러자 안리영이 급히 나서며 말했다.“할아버지, 삼촌 좀 그만 괴롭히세요. 안 좋아하는데 억지로 떠민다고 행복해지겠어요?”“이 계집애는 왜 또 얘 편을 드는 거야?”할아버지는 안리영을 흘겨보았다.내가 얼른 말을 이었다.“오늘 온 아가씨들, 저랑 리영이 다 지켜봤어요. 삼촌이랑 어울릴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더라고요.”지금 이 순간 나도 안리영을 따라 조시언을 삼촌이라 부르고 있었다.“난 못 믿겠는걸.”조경태는 콧방귀를 뀌었다.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정말이에요, 할아버지. 그 여자들, 남 얘기하길 좋아해서 뒤에서 험담이나 하는 사람들이에요. 아까도 삼촌 뒷담 까고 있었어요.”조시언은 그녀를 바라보았고 조경태도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그래? 뭐라고 험담하던?”“삼촌이 나이가 꽤 됐는데도 아직 결혼 안 한 걸 말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삼촌을 차지해서 조씨 가문 며느리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수작 부릴 생각들만 하고 있었어요.”안리영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오늘 그 여자들이 조시언을 노리고 온 건 분명했으니 말이다.“그건 좋은 일이잖니.”조경태는 오히려 기뻐하며 말했다.“할아버지는 수작 부리는 여자가 좋으세요?”안리영은 조경태가 싫어하는 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조경태는 말이 없었다. 속이 시커먼 여자한테 크게 당할 뻔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안리영은 나를 향해 눈짓을 보냈고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삼촌 짝 찾는 일은 저랑 리영이에게 맡겨주세요.”내 말에 안리영이 눈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안리영과 나는 방 안의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서로 마주 본 채 각자의 소파에 앉은 모습이었다. 한 사람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젊고 준수한 청년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나이 차가 너무나 뚜렷해 그들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분명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일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부자 관계였다.안리영은 조시언이 입양된 아들이라고 내게 말해준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의아했다. 당시 나이로 치면 조경태는 조시언을 손자처럼 키워도 이상할 게 없었을 텐데 왜 굳이 아들로 삼은 건지 궁금했다.“시언아, 너 이제 나이도 어린 게 아니잖니. 결혼 안 하겠다는 건 그렇다 쳐도 여자 친구조차 없다니. 밖에서 사람들이 너를 두고 뭐라고 수군대는지 너도 알지?”조경태는 수군대다 같은 말도 자연스럽게 썼다.하지만 조시언은 묵묵히 앉아 있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조명이 그의 얼굴과 콧대를 선명하게 나누듯 비췄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면서 그의 이목구비는 더욱 또렷하게 도드라졌다. 깊은 눈썹뼈는 날카로운 선을 연출해 냈다.“사람들이 네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더라!”조경태는 말을 끝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런 이상한 소문이 퍼지는 건 우리 조씨 가문의 체면을 망치는 일이다. 우린 그런 망신 못 당한다!”조시언은 그 말에도 여전히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평온한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고요했다.“남의 입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떠들어대는 건 그들 사정일 뿐, 우린 신경 쓰지 않으면 됩니다.”“넌 신경 안 쓴다지만, 이 늙은이는 창피해서 못 살겠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지금 당장 사람 하나 데리고 오든가, 아니면 내가 직접 찾아줄 거다. 결혼 안 해도 좋다. 그냥 네 옆에 여자 하나 세워놔라. 사람들이 널 정상으로 보게 말이다!”그 말에 안리영과 나는 동시에 서로의 팔을 꼬집었다. 안 그러면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이 노
“넌 안 그럴 거야, 맞지?”안리영은 계속 나를 놀리면서도 언제나 내 편이었다.우리는 함께 연회장으로 들어섰다.조경태는 자줏빛과 금색이 어우러진 긴 도포를 입고 활짝 웃으며 손님들의 축하 선물을 받고 있었다.그는 내가 가져온 선물을 보곤 눈을 반짝였다.“특별한 선물이구나. 아주 마음에 들어.”그 말에 나는 괜히 민망해졌다.강유형의 어머니도 비슷한 걸 선물했는데 어째서 내 것을 특별하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역시 세상을 오래 산 사람은 달랐다. 누구보다도 말솜씨가 뛰어났다. 받는 사람도 기쁘고 주는 사람도 흐뭇하게 만드는 한마디였다.“리영아, 구 교수는 어디 갔니? 오늘은 왜 같이 안 왔어?”조경태가 슬며시 물었다.안리영은 내 옆구리를 몰래 콕 찔렀다.“그냥 따로 말 안 했어요. 오늘은 그냥 제가 단순히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온 거거든요.”그러나 이 정도 지긋한 나이가 되면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오늘 같은 잔칫날에 인원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고 왔다 해서 구안석이 못 오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는 안리영을 힐끔 바라보다 두어 번 웃고는 더 묻지 않았다.“할아버지, 그럼 선물마저 받으시고요. 저는 지원이랑 가서 뭐 좀 먹고 올게요.”안리영은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려 했다. 또 무슨 질문이 나올까 봐 걱정된 눈치였다.“그래, 다녀오거라. 다만 너무 멀리 가지는 마. 좀 있다 너희 둘 도움 좀 받아야겠구나.”그 말에 우리 둘은 눈빛을 주고받았다.“혹시 케이크 자르실 때 저희한테 맡기시려는 거 아니에요?”안리영이 농담처럼 물었다.조경태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콕 찔렀다.“이놈의 계집애, 지금 누굴 놀리는 거냐. 케이크 칼 정도는 들 수 있다고! 그게 아니고, 너희 둘한테 자문 좀 구하고 싶어서 그래.”“자문이요? 혹시 애인이라도 골라달라는 거예요?”안리영은 정말 무서울 정도로 겁 없이 농을 던졌다. 외할머니가 들으면 바로 이마 한 대는 맞았을 거다.“점점 대담해지는구나.”조경태가 다시 한번 그녀를 가리키며
안리영과 조시언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성준수는 그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안리영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하긴 이렇게나 예쁜데 조시언이 마음 줄 만도 하지... 아야, 아파! 조시언, 너 왜 그래?!”성준수는 조시언에게 뒷덜미를 잡힌 채 끌려 나갔고 안리영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정신 나갔네.”“조시언네 리영이?”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난스럽게 되물었다.안리영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너까지 말썽이야, 얼른 가자. 외할아버지께 선물 드려야지.”그녀는 내 손을 잡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빨갛게 물든 귓바퀴가 그녀의 부끄러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아까 조시언과의 어색한 분위기를 떠올리다 나도 모르게 장난을 쳤다.“리영아, 너랑 외삼촌 피가 섞인 것도 아니잖아. 내가 보기엔 한번 고려해 볼 만도 해. 잘생겼지, 돈 많지, 만약 네가 저 사람 잡으면 적어도 밖으로 새는 물은 없을 거 아니야.”안리영은 눈을 부릅떴다.“윤지원, 너 또 그런 소리 하면 진짜 절교할 거야.”“어머, 발끈하네?”나는 계속해서 놀렸다.“그만하라고 했지!”안리영은 나를 쫓아와 때리려 했다.나는 그녀를 피해 도망치다가 무언가에 부딪혔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익숙한 향이 먼저 스며들었다.고개를 들자 강유형이 서 있었다.요즘 그와 자주 마주쳤다. 절에서도 마주쳤고 조씨 가문에서도 마주쳤으니 말이다.“강 대표님, 이제 가시려고요?”안리영의 말투엔 노골적으로 쫓아내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나는 이미 다 털어냈다 하더라도 안리영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네.”강유형은 나를 살짝 놓아주며 내 발을 내려다봤다. 다친 데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했다.“조경태 씨 생신 축하하러 왔어요.”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는 볼 거 다 보고 별일 다 겪은 사이였다. 나는 담담하게 물었다.“저녁 식사는 안 하고 가?”“응, 그게...”그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집에 가봐야 해서.”그 말에 문득 김희연이 내게 건넨 말과
“아이참, 엄마!”안리영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오늘은 외할아버지 생신 잔치잖아, 내 맞선 자리가 아니고.”“뭐 어때?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셈이잖니. 좀 있다가 잘 둘러보렴. 우리 딸처럼 예쁘고 똑똑한 애가 남자 친구 하나 못 찾겠어? 눈만 마주치면 끝이지.”조민영은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안리영은 체념한 듯 말했다.“알겠어. 엄마는 먼저 가서 볼일 봐. 난 지원이 찾으러 갈게. 외할아버지께 드릴 선물도 걔가 챙겨왔거든.”안리영은 그렇게 핑계를 대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난 그녀와 어머니의 대화를 이미 들은 터라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아주머니 꽤 개방적이시네. 근데 나도 그 말 일리 있다고 봐. 예전에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라고.”“좋아. 마음에 드는 사람 있으면 바로 들이댈게.”그 순간 나는 조시언을 발견했다.그는 어두운 톤의 정장에 검은 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다. 셔츠 단추는 몇 개 풀려있었고 그로 인해 허연 목덜미가 살짝 드러나 있었다. 그 하얀 피부와 검은 셔츠가 만들어내는 대비는 그를 더욱 차가워 보이게 만들었다. 어쩐지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도 자아냈다.“네 외삼촌, 진짜 잘생겼다.”나는 감탄했다.안리영도 내 시선을 따라가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여자들한테 인기 많았어. 예전에 내가 저 사람한테 온 러브레터를 얼마나 많이 대신 받아줬는지 몰라.”하긴 조시언 같은 사람이 인기가 없을 리가 없었다.“그럼 연애는 해봤대?”안리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아니, 못 해봤을걸.”“그렇다면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있다는 말이겠지.”내 말에 안리영이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내 가슴을 콕 찌르는 말을 꺼냈다.“아, 맞네. 너 연애 경험 많았지.”“나 약 올리는 거야? 그렇게 나오면 나도 너 도와줄 마음 싹 사라지는데?”우리가 대화를 나눌 동안 조시언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안리영은 어느새 자세를 바짝 고쳐
안리영은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초 후 그냥 끊어버렸다.그토록 단호하고 주저 없는 태도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마 정말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다.이런 부분에선 그녀가 나보다 훨씬 강했다. 질질 끌지도 않았고 미련도 없었다.사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강유형과 헤어진 건 헤어진 거고 가끔 연락을 하긴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을 때뿐이었다.안리영과 구안석이 여기까지 온 게 아쉽긴 해도 딱히 뭐라고 말할 순 없었다.감정의 온도는 결국 그 당사자만이 아는 법이니 말이다.우리가 함께 차를 마시며 점원의 포장 작업을 기다리는 동안 안리영의 휴대폰 화면이 다시 한번 반짝였다.새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구안석에게서 온 메시지였다.‘리영아, 나 이제 갈게.’나는 슬쩍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이따가 차단할 거야.”“직접 못 하겠으면 내가 대신 해줄까?”내가 농담처럼 말했다.안리영은 나에게 절친만이 보낼 수 있는 눈빛을 건넸다. 점원이 포장해 준 작품을 들고 매장을 나설 때까지 그녀는 끝내 구안석에게 답장하지 않았다.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이 구안석의 메신저 대화창에서 멈춘 걸 발견했다. 그녀는 그들이 나눈 대화를 처음부터 다시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나는 의아해 물었다.“왜 웃어?”안리영은 내게 휴대폰을 내밀며 말했다.“선배님이랑 나눈 대화 좀 봐봐.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합쳐도 겨우 몇십 개밖에 안 돼. 우리 과 단톡방에서 일주일에 올라오는 공지보다도 적어.”나는 보지도 않고 다시 그녀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이미 헤어지기로 한 거잖아. 그런 거 봐서 뭐 하려고.”“지원아, 나 진짜로 연애한 게 맞긴 한 걸까?”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구안석을 차단했다.“공적인 일 있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럴 때도 연락 안 하게?”나는 애써 분위기를 풀어보려 장난을 던졌다.“그 사람은 흉부외과고 나는 산부인과야. 서로
“이거 포장해 주세요. 선물할 거니까 선물 상자에 담아 주세요.”김희연은 점원에게 부탁을 마치고 돌아서다 나를 발견했다.“지원아!”그녀가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인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아줌마.”나는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김희연은 나를 바라보며 눈가를 붉혔고 눈동자까지 촉촉하게 물들였다.“지원아...”그녀는 내 이름만을 부를 뿐 다른 말은 쉽사리 꺼내지 못했다. 마음속에 수많은 말들이 맴돌고 있을 게 분명했지만 끝내 꺼낼 용기가 나지 않는 듯했다.나도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몇 달 만에 마주한 모습이었다. 흰머리가 부쩍 늘었고 수척해진 인상이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눈빛에서 생기가 보이지 않았다.그녀가 요즘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강두식은 병상에 계시고 두 아들 사이엔 균열이 생겨 서로 등을 돌린 상태다.말 그대로 집안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모든 시작은 나와 강유형이 끝을 맺으면서부터였던 것 같다.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들이 잘 풀린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잘 지내니?”그녀가 한참 만에 힘들게 물었다.“네,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거면 됐다. 그거면 좋아.”나는 그녀에게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시간을 견뎌냈는지 이미 보아냈으니 말이다.“너도 혹시 작품 보러 왔니? 선물하려고?”그녀는 어색함을 덜기 위해 다시 말을 건넸다.“오늘 저희 외할아버지 생신이라서요. 지원이가 저희 외할아버지 드리려고 보고 있었어요.”안리영이 대신 대답했다.“지원이도 조씨 댁에 가는구나. 잘 됐다, 그분도 지원이를 참 좋아하시잖니. 예전에도 자주 얘기하셨지.”그녀는 말을 잇다가 목이 메인 듯 얼굴을 살짝 돌렸다.나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그렇게 슬픔을 억누르는 모습이 안쓰러워 조용히 입을 열었다.“아줌마, 저 먼저 고르러 가볼게요.”“지원아.”그녀가 다시 나를 불러 세웠다.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어렵게 말을 이었다.
“네가 헤어지자고 했는데 구안석이 아무 말도 안 했다고?”안리영의 말을 듣고 나도 좀 놀랐다.안리영은 살짝 웃었다.“아마 그 사람도 지쳤겠지. 차라리 혼자일 때가 더 편했을 거야. 뭘 하든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간섭받을 일도 없고 신경 쓸 일도 없으니까.”딱 봐도 감정 섞인 말이었다.“너, 혹시 이별하자는 말도 일부러 한 거 아니야? 화나서?”내가 조심스레 물었다.안리영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난 정말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야.”내가 코웃음을 쳤다. 안리영이 웃으며 말했다.“진짜라니까. 지난번에 내가 선배한테 귀국할 수 없냐고 물었을 때부터 쭉 고민해 왔어.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뭘까, 생각하게 되더라고.”“사실 사랑이든 결혼이든 여자들이 바라는 건 결국 하나잖아. 안정감, 그리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 근데 그 사람이 그걸 못 준다면 나 혼자서도 충분한데 굳이 그런 사랑을 붙잡을 필요가 있을까?”안리영은 낮게 물었다.나는 장난스럽게 말해봤다.“그럼 생리적 욕구 해결은?”안리영은 다시 웃었다.“남자를 그 이유 하나로만 찾는 거면 얼마나 쉬워.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되잖아. 게다가 종류도 다양하고 취향 바꾸는 것도 가능하고.”“하하하.”나는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리영이, 네 취향 은근히 세네?”장난처럼 말했지만 사실 그녀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리영아, 네가 어떤 결정을 해도 난 응원할 거야. 하지만 말이지... 이별이라는 건, 특히 진심이었을 때는 헤어지는 순간도 진짜 아프잖아. 힘들면 꼭 나한테 말해. 같이 술이라도 마셔주지.”“응, 필요하면 연락할게.”안리영은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살짝 맞댔다.“그보다 지금 당장 네가 좀 도와줘야 하는 일이 하나 있어.”“뭔데?”“오늘 우리 외할아버지 생신이야. 이번엔 도저히 빠질 수가 없어.”안리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부모님도 몇 번이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보고 싶어 하신다고 했는데 그녀는 그때마다 핑계를 대고 빠졌단다. 이번까지 거절하면 그녀의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