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번에 눈물도 나지 않았다. 이미 흘려야 할 눈물은 다 흘린 것 같았고 그 이유는 내 마음에 있는 깊은 상처 때문이었다.나는 이제 진정우와 갈라서야 한다는 사실을 차분히 받아들이기로 했다.내가 돌아가는 도중에 비는 점점 더 거세졌다. 마치 장마가 시작된 것처럼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나는 잠시 방심했는지 아니면 비로 인한 도로 상태가 미끄러워서였는지 브레이크를 제대로 밟지 못하고 앞차를 들이받았다.비가 너무 많이 와서 차에서 내릴 수도 없었고 결국 우리는 차 안에서 경찰에 신고하기로 했다.경찰과 보험회사가 도착했을 때 비는 조금 줄어들었고 우리는 차에서 내려 서로를 마주했다. 그 순간 우리는 모두가 깜짝 놀랐다.“진작에 사고를 낸 사람이 지원 씨라는 걸 알았으면 경찰 안 불렀죠.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말이죠.”함소은이 짖궂게 웃으며 말하자 옆에 있던 20대 초반의 경찰은 얼굴에 미소를 숨기며 입술을 씰룩였다.“혹시 두 분 아는 사이세요? 이거 사적으로 처리할 건지 아니면 공식 처리할 건지 스스로 결정하세요.”경찰과 보험회사가 물었다.“공식 처리요.”“사적으로 처리할게요.”우리는 동시에 대답했다.경찰은 우리를 한 번 쳐다본 후 말했다.“일단 둘이 먼저 합의해 보세요. 아니면 제가 사고 처리해야 해요.”“공식 처리할 거예요. 보험도 있으니까요.”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그런데 공식 처리하면 차도 끌고 가야 하고 그럼 불편할 거예요. 이런 작은 사고로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요?”함소은이 그렇게 말하자 나도 그녀가 한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비가 계속 내리고 있는데 차 없이 나가는 것도 불편할 테니까.하지만 함소은은 차가 없을 일은 없을 거고 단지 귀찮아서 사적으로 처리하고 싶은 것이다.그래도 나는 공식 처리로 밀어붙였고 경찰과 보험회사에 현장에서 사고를 조사해 주기를 요청했다.그때, 갑자기 용은서가 나를 부르며 달려왔다.“언니, 언니!”나는 은서의 그 귀여운 얼굴을 보고 미소를
‘작은 녀석이 참 잘도 사람을 다루네.’나는 용은서를 안고 함소은이 부른 차에 올라탔다.가는 길에 나는 용은서에게 선물을 하나 예약했다. 비록 그녀는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지만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함소은 모녀는 해동 최고의 개인 주택단지에 살고 있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온 집안이 풍선과 장식들로 가득했다.“이건 모두 진표 씨가 준비한 거예요.”함소은이 내게 슬리퍼를 건네며 설명했다.집 안 가득한 화려한 장식과 격식에 나는 무심코 말했다.“진표 씨가 정말 은서를 아끼네요.”“당연하죠. 하지만 은서가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예요. 게다가...”함소은이 용은서를 슬쩍 바라보며 내게 속삭였다.“이젠 은서도 자라서 진표 씨랑 함께 나가면 사람들이 진표 씨를 할아버지라고 불러요. 은서도 그게 좀 껄끄러운 거죠.”용진표가 할아버지 나이까지 됐으니 오해를 살 만도 했다. 하지만 이게 과연 누구 잘못일까? 만약 용진표가 그런 나이가 아니었다면 상황도 달라졌을 텐데 말이다.용은서는 내 손을 잡고 기쁜 얼굴로 나를 어린이 방으로 데려가면서 또 함께 놀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와 놀아주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만 더 버티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미 기운이 빠진 걸 느꼈다.그때 내가 주문한 선물이 도착했다.“은서야, 언니가 네 선물 가져왔어. 네가 마음에 들어 하면 좋겠네.”이 기회를 빌려 잠깐 쉬고 있는데 그제야 함소은이 떠올랐다. 집에 들어오고서부터 그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집사가 커피와 과일을 가져다주면서 나는 무심코 물었다.“함소은 씨는 어디 계세요?”집사는 잠시 위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아마... 위층에 계신 것 같아요.”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은서와 함께 선물을 풀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갑자기 위층에서 함소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카롭게 누구랑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아까 왠지 집사가 이상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아꼈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네.’
그녀는 분노와 억눌린 감정 그리고 마치 폭발을 기다리는 듯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본 적 없던 함소은의 또 다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긴장됐다.나는 목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그렇게까지 용진표를 미워하고 용진표가 한 짓을 다 알고 있으면서 왜 아직도...”내가 그 말을 끝내지 못한 건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잘 몰라서였다.그녀의 분노가 이렇게 극에 달한 상황에서 은서를 낳은 것은 사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이가 있으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잖아?하지만 그녀는 아이를 낳았다.“왜 은서를 낳았냐고 묻는 거죠. 맞아요?”함소은은 내 마음을 정확히 읽고 말을 이었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런데 만약 두 사람 정말 갈라서게 되면 은서는 어떻게 돼요? 은서는 잘못한 게 없잖아요.”“저도 그 당시에 은서를 낳고 싶어서 낳았겠어요?”함소은은 고개를 젖히며 술잔을 비웠다.그녀가 고통스럽게 술을 삼키는 모습을 보고 내 마음도 무겁게 내려앉았다.함소은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처음 임신했을 때 용진표는 병원에 가서 내 피를 뽑게 하고 내가 임신한 아이가 딸이라는 걸 알자마자 여섯 명의 보모를 들였어요. 겉으로는 내 몸을 돌보는 척했지만, 사실은 저를 감시하고 있었어요.”나는 놀라서 물었다.“그때에는 별로 아이를 정말 원하지 않았던 거예요?”“용진표가 나를 그렇게 손에 넣은 마당에 제가 왜 용진표의 아이를 낳고 싶겠어요?” 함소은은 은서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알아요? 만약 은서가 아들이었으면 오늘 같은 날이 없었을 거예요.”그녀가 방금 말한 대로 용진표와 싸운 일이 떠오른 나는 갑자기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그럼... 이번에 또 임신한 거예요?”함소은은 나를 보고 엄지를 세웠다.“정답이네요.”그렇게 칭찬을 듣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그대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용진표가 이 아이를 원하지 않다고 하면서 낙태하라고 한 거죠?”“맞아요. 내일 아침에 사람들이
내가 그렇게 말하자 함소은은 손을 들어 내 말을 막았고 은서를 가리키며 말했다.“은서는 정말 운이 좋은 아이였어요.”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고개를 갸웃했고 함소은은 나의 당황한 표정을 보고는 곧바로 눈치를 챘다.“지원 씨, 지금 많이 혼란스럽죠?”“네, 조금 혼란스러워요.”함소은은 가볍게 웃으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용진표와 그의 아내는 한 번 큰 교통사고를 당했었어요. 그때 용진표는 거의 죽을 뻔했고 용진표의 아내는 의식을 잃었죠. 한 열흘이나 보름 정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고 모두가 용진표의 아내가 다시는 깨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기적처럼 깨어난 거예요.”“그 여자가 깨어났을 때 꿈에서 어떤 한 소녀를 봤다고 말했어요. 소녀는 자신이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님을 따라다니는 동녀라고 했고 용진표의 아내에게 신령스러운 약을 주면서 이 약을 먹으면 다시 깨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하더라고요.”함소은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덧붙였다.“듣고 보면 좀 어이가 없죠?”“그러면 그 후엔 어떻게 되었나요?”나는 몹시 궁금했다.“그 여자가 깨어난 바로 그날에 제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때 용진표의 아내는 용진표에게 나를 데리고 가서 피검사를 하게 했죠. 만약 아기가 딸이면 그대로 두고 아들일 경우에는 낙태시키라고 했어요.”함소은은 잠시 침묵하며 용은서를 바라보았다.“그 여자에게 은서는 꿈에서 나타난 동녀 같은 존재였어요. 그래서 은서가 이 세상에 올 수 있었던 거죠.”그 말을 듣고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그럼 용진표의 아내는 은서를 신처럼 모셔야 할 텐데요.”“그렇죠. 사실 사고 후로 그 여자는 건강이 줄곧 안 좋아서 은서를 해치지 못한 거죠.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은서는 벌써 그 여자에게 빼앗겼을지도 몰라요.”함소은은 술잔을 들려 했지만 나는 손을 내밀어 그녀를 막았다.“그렇게 이 아이를 지키고 싶다면 방법이 있어요. 지금 이러는 행동은 사실 스스로 아이를 포기하는 셈이죠.”나는 차분히 말했다.“방법? 어
함소은이 말한 사고는 바로 내 부모님의 사고 아니야?그렇다면 용진표가 진정우의 아버지한테 돈을 주고 매수했다는 말이야?그 사실에 나는 충격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고 나는 함소은을 바라보았다.“그 말은 누가 했나요? 근거가 있나요?”함소은은 내 불안한 감정을 눈치채지 못한 채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그건 모르겠어요. 어쨌든 그런 말이 떠돌고 있었어요. 모두 몰래 이야기하는 거죠. 용진표의 주변 사람들은 용진표를 두려워해서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게 되면 다 죽을 수도 있죠.”“그러면 그 말을 들은 적이 있는 사람을 찾아볼 수 있을까요?”내 말에 함소은은 나를 돌아보았다.그녀는 뭔가 불안한 기운을 느낀 듯 웃으며 물었다.“왜 그 일에 그렇게 관심이 가는 거죠?”나는 그녀의 어두운 얼굴을 바라보며 결국 진실을 말하기로 했다.“사고를 당했던 그 부부가 제 부모님이고 운전기사는 제... 전 남자 친구의 아버지였어요.”함소은은 깜짝 놀라며 눈이 휘둥그레졌고 나는 그녀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그래서 그 일이 사실인지 알아야 해요. 증거가 필요해요.”그녀는 속눈썹을 살짝 떨며 물었다.“제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인가요?”내가 그녀에게 도와달라고 말하는 건 사실 꽤 민망한 일이었다. 그녀가 한때 내 친구가 되고 싶어 했으나 나는 거절했다.지금은 내가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거라 조금은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이었다.하지만 그녀는 용진표를 미워하는 사람인 만큼 이 정보도 그녀가 직접 들었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고 그만큼 소문을 낸 사람을 더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이런 소문이 나오는 데는 분명히 별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그래서 나는 내 자존심이 상하든 말든 그저 내가 뭔가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해도 절대 주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소은 씨, 제발 도와주세요.”함소은은 잠시 멈칫하다가 웃으며 말했다.“우리는 친구도 아니니까 저도 거절할 수 있죠?”여자들은 자주 그 작은 앙금을 마음속에 품고 사는 법이다. 그녀
“솔직히 말해봐, 너 윤지원이랑 해봤어?”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와 막 들어가려던 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문틈 사이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강유형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지원이가 먼저 다가왔지만 난 관심 없었어.”“강유형, 그렇게 사람 깎아내리지 마. 윤지원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 미인이야. 꽤 많은 사람들이 윤지원을 노리고 있다고.”말하는 사람은 강유형의 친구 신지태였다. 그는 나와 강유형의 10년 감정을 지켜본 증인이기도 했다.“너무 익숙해서 그래.” 강유형이 눈썹을 찌푸렸다.내가 14살 때 강씨 집안으로 보내졌고 그때 처음으로 강유형을 만났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 말했다. 앞으로 강유형과 결혼할 거라고.그 후로 우리는 함께 살았고 어느새 10년이 흘렀다.“그렇지. 너희 둘은 낮에는 한 회사에서 일하면서 얼굴 보고 밤에는 집에 와서 같은 식탁에서 밥 먹고. 아마 상대방이 하루에 몇 번 화장실 가는지까지 다 알겠어.”신지태가 농담을 던지고는 혀를 찼다. “지금은 오래 보면 정든다는 시대가 아니야. 남녀 사이엔 그래도 신선함이 있어야 하지.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그런 느낌, 그래야 감정이 생기고 자극적인 법이야.”강유형은 침묵했고 신지태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듯했다.“그래서 너 윤지원과 결혼할 거야?” 신지태의 질문에 내 숨이 멎는 것 같았다.강유형의 부모님은 우리에게 혼인신고를 하라고 하셨다. 그는 좋다고도, 싫다고도 하지 않았고 나도 그에게 묻지 않았다. 그러니 신지태가 나 대신 물어본 셈이다.강유형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신지태가 웃었다. “결혼하기 싫어?”“...그건 아니야.”“그럼 결혼은 하고 싶은데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는 거지?” 신지태와 강유형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사이라 서로의 마음을 잘 알았다.“지태야, 이런 말 들어봤어?” 강유형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뭔데?”“먹자니 맛없고 버리자니 아깝고.” 강유형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강유형은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고 그의 시선이 내 얼굴에 머물렀다. 굳이 보지 않아도 내 안색이 얼마나 좋지 않은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어디 아파?”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나는 말없이 그의 책상 앞으로 걸어가 목구멍에 맺힌 쓴맛을 삼키며 말했다. “나랑 결혼하고 싶지 않다면 내가 아주머니한테 말씀드릴게.”강유형의 미간 주름이 더 깊어졌다. 그는 내가 그와 신지태의 대화를 들었다는 걸 알아챘다.난 목이 메어 말을 잇기 힘들었다. “난 내가 먹자니 맛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존재가 될 줄은 몰랐어, 강유형...”“모든 사람들 눈에는 우린 이미 부부야.” 강유형이 내 말을 끊었다.‘그래서 뭐? 그 사람들 때문에 나랑 결혼하려는 건가?’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가 나를 사랑해서, 나와 평생을 함께 보내고 싶어서 결혼하는 거였다.‘탁’하는 소리와 함께 강유형의 손에 든 펜이 닫혔고 그의 시선이 내 손에 든 혼인 신고서에 머물렀다. “다음 주 수요일에 혼인신고 하러 가자.”이 말은 내가 듣고 싶었 거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가슴이 아팠다. 그것도 아주...난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강유형, 억지로 할 필요 없어. 나도 그럴 필요 없고.”“윤지원!” 그가 날카롭게 내 이름을 불렀다.나는 움찔했고 고개를 들어 그의 짜증 난 듯한 눈과 마주쳤다.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고 혼인 신고서를 쥔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그의 턱이 굳어졌다. “이리 줘.”나는 움직이지 않았고 분위기는 더욱 팽팽해졌다.몇 초 후, 그가 일어나 내게로 왔고 내 앞에 서더니 한숨을 살짝 내쉬며 말했다. “지태랑 한 얘기는 그냥 농담이었어. 넌 왜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거야?”정말 농담이었을까?“너도 알잖아. 남자들에게 체면이 얼마나 중요한 거.” 그의 손이 내 팔을 잡더니 천천히 내려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혼인 신고서를 빼앗아 갔다.“앞으로는 남의 말 함부로 믿지 마.” 그가 돌아서서 혼인 신고서를 서랍에 넣고 옆에 있
하루 종일 이 문제를 고민했지만 오후에 그가 나를 부를 때까지도 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도 난 그를 따라나섰다.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10년이란 시간 동안 나는 그에게, 그리고 퇴근 후 강씨 집안으로 돌아가는 일에 익숙해져 버렸다.“왜 말이 없어?”돌아가는 길에 강유형이 내 기분이 좋지 않음을 눈치챘는지 먼저 물었다.나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강유형, 우리 그냥...”뒷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의 휴대폰이 울리면서 차량 디스플레이에 이름 없는 번호가 떴고 강유형의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그가 긴장했다.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다.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는 이미 재빨리 차량 스피커를 끄고 블루투스로 전환했다. “여보세요... 네, 지금 가고 있습니다.”통화 시간은 짧았다. 그는 전화를 끊고 나를 보며 말했다. “지원아, 급한 일이 생겨서 집에 데려다줄 수가 없겠어.”사실 그가 말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나를 내버려두고 갈 거라는 걸. 이미 처음이 아니었으니까.그래도 그가 말하기 전까지는 나를 먼저 데려다줄 거라고 기대했었다.가슴 한구석이 갑자기 텅 비어 아파왔고 나는 서운함을 억누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강유형의 턱이 굳어졌다. 그는 대답 대신 밖을 보며 말했다. “저기서 내려줄게. 택시 타고 돌아가.”설명조차 해주지 않고 이미 다 결정해 놓은 듯했다. 그러니 내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더 묻고 떼를 쓰는 건 스스로 망신당하는 일일 뿐이다.“집에 도착하면 전화... 메시지 보내.” 강유형이 당부하는 사이 핸들은 이미 돌아가 도로변 임시 주차장에 멈춰 섰다.나는 가방을 꼭 쥐고 차에서 내렸다.내가 예민한 게 아니다. 그가 발신번호를 본 후의 이상한 반응부터 차량 스피커로 통화하지 않으려 한 것까지, 이미 예감이 왔다.다만 묻지도 말하지도 않았을 뿐이다.어떤 일들은 묻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그대로 두고 자기 위안을 할 수 있으니.“조심해서 가!” 서두르는 와중에
함소은이 말한 사고는 바로 내 부모님의 사고 아니야?그렇다면 용진표가 진정우의 아버지한테 돈을 주고 매수했다는 말이야?그 사실에 나는 충격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고 나는 함소은을 바라보았다.“그 말은 누가 했나요? 근거가 있나요?”함소은은 내 불안한 감정을 눈치채지 못한 채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그건 모르겠어요. 어쨌든 그런 말이 떠돌고 있었어요. 모두 몰래 이야기하는 거죠. 용진표의 주변 사람들은 용진표를 두려워해서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게 되면 다 죽을 수도 있죠.”“그러면 그 말을 들은 적이 있는 사람을 찾아볼 수 있을까요?”내 말에 함소은은 나를 돌아보았다.그녀는 뭔가 불안한 기운을 느낀 듯 웃으며 물었다.“왜 그 일에 그렇게 관심이 가는 거죠?”나는 그녀의 어두운 얼굴을 바라보며 결국 진실을 말하기로 했다.“사고를 당했던 그 부부가 제 부모님이고 운전기사는 제... 전 남자 친구의 아버지였어요.”함소은은 깜짝 놀라며 눈이 휘둥그레졌고 나는 그녀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그래서 그 일이 사실인지 알아야 해요. 증거가 필요해요.”그녀는 속눈썹을 살짝 떨며 물었다.“제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인가요?”내가 그녀에게 도와달라고 말하는 건 사실 꽤 민망한 일이었다. 그녀가 한때 내 친구가 되고 싶어 했으나 나는 거절했다.지금은 내가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거라 조금은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이었다.하지만 그녀는 용진표를 미워하는 사람인 만큼 이 정보도 그녀가 직접 들었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고 그만큼 소문을 낸 사람을 더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이런 소문이 나오는 데는 분명히 별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그래서 나는 내 자존심이 상하든 말든 그저 내가 뭔가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해도 절대 주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소은 씨, 제발 도와주세요.”함소은은 잠시 멈칫하다가 웃으며 말했다.“우리는 친구도 아니니까 저도 거절할 수 있죠?”여자들은 자주 그 작은 앙금을 마음속에 품고 사는 법이다. 그녀
내가 그렇게 말하자 함소은은 손을 들어 내 말을 막았고 은서를 가리키며 말했다.“은서는 정말 운이 좋은 아이였어요.”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고개를 갸웃했고 함소은은 나의 당황한 표정을 보고는 곧바로 눈치를 챘다.“지원 씨, 지금 많이 혼란스럽죠?”“네, 조금 혼란스러워요.”함소은은 가볍게 웃으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용진표와 그의 아내는 한 번 큰 교통사고를 당했었어요. 그때 용진표는 거의 죽을 뻔했고 용진표의 아내는 의식을 잃었죠. 한 열흘이나 보름 정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고 모두가 용진표의 아내가 다시는 깨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기적처럼 깨어난 거예요.”“그 여자가 깨어났을 때 꿈에서 어떤 한 소녀를 봤다고 말했어요. 소녀는 자신이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님을 따라다니는 동녀라고 했고 용진표의 아내에게 신령스러운 약을 주면서 이 약을 먹으면 다시 깨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하더라고요.”함소은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덧붙였다.“듣고 보면 좀 어이가 없죠?”“그러면 그 후엔 어떻게 되었나요?”나는 몹시 궁금했다.“그 여자가 깨어난 바로 그날에 제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때 용진표의 아내는 용진표에게 나를 데리고 가서 피검사를 하게 했죠. 만약 아기가 딸이면 그대로 두고 아들일 경우에는 낙태시키라고 했어요.”함소은은 잠시 침묵하며 용은서를 바라보았다.“그 여자에게 은서는 꿈에서 나타난 동녀 같은 존재였어요. 그래서 은서가 이 세상에 올 수 있었던 거죠.”그 말을 듣고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그럼 용진표의 아내는 은서를 신처럼 모셔야 할 텐데요.”“그렇죠. 사실 사고 후로 그 여자는 건강이 줄곧 안 좋아서 은서를 해치지 못한 거죠.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은서는 벌써 그 여자에게 빼앗겼을지도 몰라요.”함소은은 술잔을 들려 했지만 나는 손을 내밀어 그녀를 막았다.“그렇게 이 아이를 지키고 싶다면 방법이 있어요. 지금 이러는 행동은 사실 스스로 아이를 포기하는 셈이죠.”나는 차분히 말했다.“방법? 어
그녀는 분노와 억눌린 감정 그리고 마치 폭발을 기다리는 듯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본 적 없던 함소은의 또 다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긴장됐다.나는 목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그렇게까지 용진표를 미워하고 용진표가 한 짓을 다 알고 있으면서 왜 아직도...”내가 그 말을 끝내지 못한 건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잘 몰라서였다.그녀의 분노가 이렇게 극에 달한 상황에서 은서를 낳은 것은 사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이가 있으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잖아?하지만 그녀는 아이를 낳았다.“왜 은서를 낳았냐고 묻는 거죠. 맞아요?”함소은은 내 마음을 정확히 읽고 말을 이었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런데 만약 두 사람 정말 갈라서게 되면 은서는 어떻게 돼요? 은서는 잘못한 게 없잖아요.”“저도 그 당시에 은서를 낳고 싶어서 낳았겠어요?”함소은은 고개를 젖히며 술잔을 비웠다.그녀가 고통스럽게 술을 삼키는 모습을 보고 내 마음도 무겁게 내려앉았다.함소은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처음 임신했을 때 용진표는 병원에 가서 내 피를 뽑게 하고 내가 임신한 아이가 딸이라는 걸 알자마자 여섯 명의 보모를 들였어요. 겉으로는 내 몸을 돌보는 척했지만, 사실은 저를 감시하고 있었어요.”나는 놀라서 물었다.“그때에는 별로 아이를 정말 원하지 않았던 거예요?”“용진표가 나를 그렇게 손에 넣은 마당에 제가 왜 용진표의 아이를 낳고 싶겠어요?” 함소은은 은서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알아요? 만약 은서가 아들이었으면 오늘 같은 날이 없었을 거예요.”그녀가 방금 말한 대로 용진표와 싸운 일이 떠오른 나는 갑자기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그럼... 이번에 또 임신한 거예요?”함소은은 나를 보고 엄지를 세웠다.“정답이네요.”그렇게 칭찬을 듣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그대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용진표가 이 아이를 원하지 않다고 하면서 낙태하라고 한 거죠?”“맞아요. 내일 아침에 사람들이
‘작은 녀석이 참 잘도 사람을 다루네.’나는 용은서를 안고 함소은이 부른 차에 올라탔다.가는 길에 나는 용은서에게 선물을 하나 예약했다. 비록 그녀는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지만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함소은 모녀는 해동 최고의 개인 주택단지에 살고 있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온 집안이 풍선과 장식들로 가득했다.“이건 모두 진표 씨가 준비한 거예요.”함소은이 내게 슬리퍼를 건네며 설명했다.집 안 가득한 화려한 장식과 격식에 나는 무심코 말했다.“진표 씨가 정말 은서를 아끼네요.”“당연하죠. 하지만 은서가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예요. 게다가...”함소은이 용은서를 슬쩍 바라보며 내게 속삭였다.“이젠 은서도 자라서 진표 씨랑 함께 나가면 사람들이 진표 씨를 할아버지라고 불러요. 은서도 그게 좀 껄끄러운 거죠.”용진표가 할아버지 나이까지 됐으니 오해를 살 만도 했다. 하지만 이게 과연 누구 잘못일까? 만약 용진표가 그런 나이가 아니었다면 상황도 달라졌을 텐데 말이다.용은서는 내 손을 잡고 기쁜 얼굴로 나를 어린이 방으로 데려가면서 또 함께 놀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와 놀아주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만 더 버티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미 기운이 빠진 걸 느꼈다.그때 내가 주문한 선물이 도착했다.“은서야, 언니가 네 선물 가져왔어. 네가 마음에 들어 하면 좋겠네.”이 기회를 빌려 잠깐 쉬고 있는데 그제야 함소은이 떠올랐다. 집에 들어오고서부터 그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집사가 커피와 과일을 가져다주면서 나는 무심코 물었다.“함소은 씨는 어디 계세요?”집사는 잠시 위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아마... 위층에 계신 것 같아요.”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은서와 함께 선물을 풀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갑자기 위층에서 함소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카롭게 누구랑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아까 왠지 집사가 이상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아꼈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네.’
나는 이번에 눈물도 나지 않았다. 이미 흘려야 할 눈물은 다 흘린 것 같았고 그 이유는 내 마음에 있는 깊은 상처 때문이었다.나는 이제 진정우와 갈라서야 한다는 사실을 차분히 받아들이기로 했다.내가 돌아가는 도중에 비는 점점 더 거세졌다. 마치 장마가 시작된 것처럼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나는 잠시 방심했는지 아니면 비로 인한 도로 상태가 미끄러워서였는지 브레이크를 제대로 밟지 못하고 앞차를 들이받았다.비가 너무 많이 와서 차에서 내릴 수도 없었고 결국 우리는 차 안에서 경찰에 신고하기로 했다.경찰과 보험회사가 도착했을 때 비는 조금 줄어들었고 우리는 차에서 내려 서로를 마주했다. 그 순간 우리는 모두가 깜짝 놀랐다.“진작에 사고를 낸 사람이 지원 씨라는 걸 알았으면 경찰 안 불렀죠.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말이죠.”함소은이 짖궂게 웃으며 말하자 옆에 있던 20대 초반의 경찰은 얼굴에 미소를 숨기며 입술을 씰룩였다.“혹시 두 분 아는 사이세요? 이거 사적으로 처리할 건지 아니면 공식 처리할 건지 스스로 결정하세요.”경찰과 보험회사가 물었다.“공식 처리요.”“사적으로 처리할게요.”우리는 동시에 대답했다.경찰은 우리를 한 번 쳐다본 후 말했다.“일단 둘이 먼저 합의해 보세요. 아니면 제가 사고 처리해야 해요.”“공식 처리할 거예요. 보험도 있으니까요.”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그런데 공식 처리하면 차도 끌고 가야 하고 그럼 불편할 거예요. 이런 작은 사고로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요?”함소은이 그렇게 말하자 나도 그녀가 한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비가 계속 내리고 있는데 차 없이 나가는 것도 불편할 테니까.하지만 함소은은 차가 없을 일은 없을 거고 단지 귀찮아서 사적으로 처리하고 싶은 것이다.그래도 나는 공식 처리로 밀어붙였고 경찰과 보험회사에 현장에서 사고를 조사해 주기를 요청했다.그때, 갑자기 용은서가 나를 부르며 달려왔다.“언니, 언니!”나는 은서의 그 귀여운 얼굴을 보고 미소를
“내가 아버지의 몫까지 너에게 다 보상해 줄게.”그 말에 내 마음이 마치 무엇에 찔린 것처럼 아팠고 나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네가 이렇게 말하는 거 보면 결국 그 결론을 인정한 거지? 네가 계속 조사한다고 했잖아. 결국 너는 네 아버지가 브레이크를 조작해서 내 부모님을 죽게 했다는 거야?”사실 우리는 이미 이런 추측을 했었다. 그가 결과를 알려주겠다고 했을 때, 나는 그가 결국 진실을 알게 될 거라고 믿었다.하지만 지금 진정우가 형사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이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혼란스러웠다.그게 무슨 의미일까? 대충 넘어가려는 건지, 아니면 자기 아버지의 잘못을 핑계로 내가 자기를 원망하며 멀리하게 하려는 의도인지?진정우는 내 눈을 보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더 이상 나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가슴이 아파졌다.“너 이미 이 결과를 알고 있었지? 그래서 휴링턴 일이랑 엮어서 나랑 헤어진 거야?”“아니.”그는 바닥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의 일은 계속 조사할 거야. 진전이 있으면 너에게 알려줄게. 하지만 지금 이 보고서는 내용대로 보면 우리 아버지는 주요 용의자야.”그의 말을 듣고 나는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그럼, 만약 휴링턴 일이 없었더라면 지금 이 결론을 보고 넌 어떻게 했을 거야? 나랑 헤어졌을까?”진정우가 나를 바라봤고 그의 눈동자 속에는 어두운 빛이 떠올랐다.“모르겠어, 아마 헤어졌을 거야...”“‘아마’ 헤어졌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네가 살인자의 아들과 함께 있는 걸 원하지 않아. 네가 마음속으로 부모님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될까 봐서 걱정이야.” 진정우가 목을 움켜잡듯 말했다. “지원아, 아마 우리는 처음부터 함께할 운명이 아니었나 봐.”운명이란 말이 너무 아프게 들렸다.“진정우, 네가 나랑 헤어지려고 하는 이유는 알겠어. 이제 나를 핑계로 이유를 대지 않아도 돼.” 나는 그를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진정우!”나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움켜잡았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고 내 눈과 입술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내 마음을 알아챈 듯싶었다. 내가 목이 너무 아파서 말도 제대로 못 할 때, 그가 낮고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린 답을 알아야 해.”조금이라도 늦으면 내가 그를 막을까 봐 말을 마치자 그는 빠르고 단호하게 내 손을 밀어내고 봉투를 받아서 열었다.노란 종이 위에 몇 줄의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고 나는 그 글을 보지 않았다.진정우는 한 줄씩 주의 깊게 읽었다. 글을 다 읽은 후, 그는 마치 뭔가 확인하려는 듯한 눈빛으로 신정훈을 바라보았다.“이 보고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 당시 서명하기 전 세 공장에 가서 검증을 받았고 그 결과도 이 봉투 안에 들어 있어요.” 신정훈의 말을 듣고 진정우는 다시 봉투를 열었다. 종이는 모두 누렇게 변색하였고 서명과 도장이 찍혀 있었다.그러니 이 보고서는 근거가 있는 거였다. 진정우는 잠시 손을 내리고 그 후 나를 바라보며 손에 든 몇 장의 종이를 나에게 건넸다.사실 나는 이미 대답을 알았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건네받았고 그때 신정훈이 나에게 말했다.“지원 씨, 한번 확인해 보세요.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도 돼요.”나는 사령관을 바라보았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격려의 눈빛 속에서 나는 종이를 펼쳤다.[2013년 6월 10일, 해청로 교통사고.기술적인 감정 결과, 사고 원인은 브레이크 시스템 고장으로 확인되었으며 브레이크 시스템은 고의로 파손된 것으로 밝혀졌다.차량이 사고를 일으킨 경로를 조사한 결과, 차량은 운전자인 진성국만이 운전했으며 다른 사람은 개입하지 않았다. 따라서 진성국의 혐의가 가장 크나 고의로 브레이크 시스템을 파손했는지에 대한 판단은 불완전하다.]결론을 내리지 못한다는 사실이 참 어이가 없었다.“그래서 그때는 이 내용을 사건 기록에 남기지 않았어. 고인은 이미 떠났으나 자식으로서
“고인은 이제 떠났으니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깁시다.”신정훈의 말을 듣고 나는 더 불안해졌다. 부모님의 사고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죽은 사람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을 원망하지 말고 소중히 여기라고 나를 타이르는 것 같았다.“형사님, 그건 저도 알죠. 그리고 이 며칠 동안 많은 생각을 했어요.” 나는 내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그가 내 말을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저 결과를 알고 싶어서 말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노트북에서 계약서를 발견한 후로 수많은 추측과 고민을 했고 많은 일들을 이제는 이해하게 됐다.내가 신정훈을 만난 이후, 그는 주기적으로 나에게 정보를 주었지만 결코 답을 주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된 것 같다.신정훈이 말을 마친 뒤, 또 다른 손을 주머니에 넣더니 한 장의 봉투를 꺼냈다.하지만 그는 바로 그 봉투를 나에게 주지 않고 대신 이렇게 말했다.“진정우라는 사람을 알고 있죠?”나는 진정우가 아버지의 죽음을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진정우도 형사님을 찾아왔었나요?”“네, 같은 일로요.”신정훈의 말에 나는 숨이 가빠졌다.“그럼... 진정우도 알게 된 건가요?”신정훈이 고개를 살짝 젓자 나는 더 불안해졌고 그가 들고 있던 봉투를 보며 물었다. “형사님, 진정우에게도 이걸 주실 생각인가요?”내 말이 끝나자마자,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우산을 든 진정우가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내 심장은 마치 거센 폭풍에 휘말린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이 답답한 기분은 진정우와의 과거 때문이기도 하고 그와 함께 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부담 때문이었다.그 죽음이 단순한 사고였을지, 아니면 더 복잡한 이유가 있을지…진정우는 결국 계단을 두 단계 올라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우산 너머로 내게 향했지만 곧 신정훈에게로 돌아갔다.“안녕하세요.”신정훈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정우는 그 후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묘비 앞에
전화를 건 사람은 바로 신정훈 형사였다. 우리는 전에 이미 약속했었고 지금 날짜를 잡으려고 전화한 것 같다.한때는 부모님의 사고 진실을 알기 위해 신정훈을 빨리 만나고 싶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런 마음이 점점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마치 고향에 가까워질수록 낯설게 느껴지는 그런 기분이었다.강유형은 눈치 빠르게 옆으로 한 발짝 물러섰고 나도 조금 더 거리를 두고서야 전화를 받았다.“신정훈 형사님.”“지원 씨, 지금 시간 되세요?”점점 더 거세지는 비를 보며 이런 악천후에도 만나자는 건 분명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쉬고 나서 대답했다.“네, 주소 알려 주세요.”내가 아줌마가 만든 만두를 않자 아줌마는 서운한 듯한 표정을 지었고 그 모습에 나도 마음이 아팠다.“다음에 시간 나면 또 와. 아줌마가 또 만두 만들어줄게.” 아줌마는 나갈 때 계속 그렇게 말했다.“네, 다음에 다시 올게요.”빗속을 뚫고 나는 차를 몰고 나왔다. 삼촌은 왜 이렇게 급하게 가야 하냐고 물었지만 나는 중요한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만 대답했다.신정훈이 약속한 장소는 부모님의 산소였다. 순간 예전 산소에 놓인 꽃들을 떠올리니, 대체 누가 보냈을지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그는 부모님의 묘비 앞에서 검은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신정훈 쪽으로 걸어갈수록 내 마음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나는 그의 옆에 다가갔지만 우산에 가져져 나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신정훈 형사님, 맞으시죠?”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그의 우산이 살짝 흔들리며 얼굴을 드러냈다. 순간, 나는 그가 맞다는 걸 확신했다.“안녕하세요, 지원 씨.” 그는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 순간, 신정훈 형사가 부모님의 사망 신고를 접수했던 장면이 떠올랐고 왜 그때 내 연락처를 물어본 건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형사님, 여길 자주 찾아오셨죠?” 나는 부모님 산소 앞에 놓인 꽃들을 바라보며 물었다.“몇 번 왔었죠.” 그의 목소리는 매우 무겁고 차분했다.그는 아무리 봐도 친근하기보다는 조금은 다가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