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자 진소영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비쳤고 그녀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오늘 고개만 줄곧 젓네.’나는 의아한 마음을 억누르며 물었다.“소지훈이 너를 안거나 키스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너를 사랑한다고 확신해?”진소영은 얼굴이 조금 붉어진 채로 눈을 내리깔았다.“소지훈이... 한 번... 정말 거의 저에게 키스하려 했어요.”“거의?”나는 소지훈의 모습을 떠올리며 물었다.“술 마셨어?”술 때문에 남자들은 예전 사랑을 떠올리며 현재의 사람을 잘못 인식할 수 있다.진소영은 이번엔 고개를 흔들지 않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솔직히 털어놓았다.“지난주 소지훈이 기분이 안 좋다고 술을 마셨고 제가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선생님이 돌아가셨다고 하더라고요. 그 선생님은 100일 전에 돌아가셨고 선생님이 그리워서 너무 힘들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저를 바라보더니 키스하려고 했어요.”진소영이 이 말을 꺼내자 나는 잠시 멍해졌다. 나는 유희연이라는 사람이 이미 세상을 떠난 지 100일이 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소지훈은 그 당시 진소영을 유희연으로 착각했다.“그렇다면... 소지훈이 결국에는 너한테 키스는 못 했다는 거지? 네가 거절한 거야? 아니면 소지훈이 스스로 멈췄다는 거야?”그러자 진소영은 얼굴이 더 붉어지며 말했다.“소지훈이 멈췄어요. 그리고 저에게 미안하다고 말했어요.”“그러면 그 말만으로 소지훈이 너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거야?”나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너... 사랑 소설을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야?”“그것뿐이 아니에요. 그 외에도 소지훈은 저한테 너무 잘해주고 도서관에 있는 사람들도 우리 둘이 연애 중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어요. 때로는 우리한테 커플이 아니냐고 장난도 쳤지만 소지훈은 변명도 하지 않았어요.”진소영은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리고 소지훈이 늦게 왔을 때 다른 남자가 제 맞은쪽에 앉거나 제가 다른 남자랑 얘기하면 질투도 했어요.”그녀가 말한 내용들은 사실이었다. 소지훈이 그랬다면 진소영은 충
그 말에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다.나도 진소영을 끌어당기며 사람들과 함께 높은 곳으로 달려갔다.하지만 홍수의 속도는 우리가 달리는 것보다 훨씬 빨랐고 우리가 높은 곳에 도달하기도 전에 홍수가 이미 우리를 덮쳤다.“언니, 언니...”깜짝 놀란 진소영이 나를 부르며 소리쳤고 나 역시 무서웠지만 지금은 두려워한다고 뭐가 달라질 게 없었다. 나는 가까운 곳에 기둥이 보였고 진소영을 잡고 그곳으로 달려갔다.그러나 내가 진소영을 기둥 위로 올리자마자 홍수가 이미 내 앞에 밀려왔고 나는 더 이상 올라갈 시간이 없었고 강한 물살에 휘말려 떠내려갔다.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물에 휘말려 너무 멀리 가지 않았고 나는 무언가를 잡고 몸을 버텼다. 나는 필사적으로 그것을 움켜잡고 물 위에 머리가 떠 있도록 애썼다.“언니, 언니...”진소영은 너무 놀라서 기둥을 붙잡고 울고 있었다. 홍수에 떠내려오는 쓰레기와 파도가 내 몸을 휩쓸었고 그 순간 나는 통증도 물의 차가움도 느낄 수 없었고 다만 끝없는 두려움만이 가득했다.인생에 정말 예기치 않은 일이 있다는 말이 진짜라는 걸 그때 깨달았다. 나는 지금까지 이런 홍수를 겪을 거라고 상상도 못 했다.“언니, 언니!”진소영이 계속해서 나를 부르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곳에서 내가 손을 놓지 않으면 구조가 올 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나는 나 자신을 구하는 게 우선이었다.주변은 모두 물에 잠겼고 물이 퍼지는 속도도 굉장히 빨랐다. 이전의 도로는 이미 모두 바다처럼 변해 있었다.“오빠, 언니를 구해줘... 언니가 물에 떠내려가고 있어!” 어렴풋이 진소영의 목소리가 들렸고 아마 진정우가 그녀에게 전화했을 것이다. 정말로 때마침 걸려 온 전화였다. 진정우가 오면 나는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지금 나는 그와 이미 헤어졌다는 사실을 떠올릴 겨를도 없었고 그저 그가 빨리 와주기를 바랄 뿐이었다.그러나 진정우는 구조대보다 더 늦었고 나는 구조되어 올라갔고 진소영도 기둥에서 구조되어
진정우의 행동을 본 내 마음은 조금 더 차갑게 식었다.병원에서 두 시간 동안 모든 검사를 마친 후에 나는 진소영과 진정우를 만났다.진소영은 나를 붙잡고 물었다.“언니, 괜찮아요? 어디 불편한 데 없어요?”“괜찮아. 의사 선생님이 내가 복이 많다고 하셨어. 심지어 큰 부상도 없다고 했어.”나는 거짓말을 했다. 사실 내 몸에는 여러 군데 상처가 있었지만 진소영에게는 알리지 않기로 했다. 진소영이라면 분명히 내가 그녀를 구하려다 물에 휩쓸려 갔으니 내심 많이 자책하고 있을 거다.진소영이 자책하면 반드시 진정우를 시켜서 나한테 더 잘해주라고 할 것 같았지만 지금 그는 이미 나를 포기한 상태였다.“언니 말을 못 믿겠어요. 언니, 제가 한번 봐도 돼요?”진소영은 그렇게 말하며 나한테 다가오려 했고 나는 그녀의 손을 누르면서 말렸다.“소영아, 좀 피곤해서 잠시 자고 싶어. 정말 괜찮으니까 먼저 돌아가.”“언니, 저는 안 갈 거예요. 여기서 언니랑 같이 있을 거예요. 그리고 오빠도요.”진소영은 진정우를 불렀고 그가 다가왔다. 그의 시선은 내 얼굴에 머물렀지만 나는 그를 피하고 고개를 돌렸다.“먼저 나가자.”진정우가 진소영에게 말했다.드디어 진정우의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그들이 밖으로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오빠, 언니랑 무슨 일 있어? 싸웠어? 아무리 싸웠다고 해도 그렇지. 언니는 나를 구하려다가 목숨까지 잃을 뻔했어. 그런 언니에게 왜 이렇게 차갑게 대하는 거야?”진소영의 말에 난 마음이 더 아팠고 나는 그 아픔을 주체할 수 없어서 눈물이 흘렀고 고개를 돌려 눈물을 베개에 닦았다.“우리 일은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그리고 오늘 아침에 나도 너에게 말했잖아. 폭우가 내리니까 도서관에 가지 말라고. 왜 내 말을 듣지 않았어?”진정우는 진소영을 꾸짖었지만 진소영은 아무런 대답하지 않았고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그리고 윤지원은 왜 도서관에 있었던 거야? 너만 내 말을 잘 들었으면 이런 일이 안 생겼을 거야.”진정우의 말은 점점 더 차
“솔직히 말해봐, 너 윤지원이랑 해봤어?”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와 막 들어가려던 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문틈 사이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강유형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지원이가 먼저 다가왔지만 난 관심 없었어.”“강유형, 그렇게 사람 깎아내리지 마. 윤지원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 미인이야. 꽤 많은 사람들이 윤지원을 노리고 있다고.”말하는 사람은 강유형의 친구 신지태였다. 그는 나와 강유형의 10년 감정을 지켜본 증인이기도 했다.“너무 익숙해서 그래.” 강유형이 눈썹을 찌푸렸다.내가 14살 때 강씨 집안으로 보내졌고 그때 처음으로 강유형을 만났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 말했다. 앞으로 강유형과 결혼할 거라고.그 후로 우리는 함께 살았고 어느새 10년이 흘렀다.“그렇지. 너희 둘은 낮에는 한 회사에서 일하면서 얼굴 보고 밤에는 집에 와서 같은 식탁에서 밥 먹고. 아마 상대방이 하루에 몇 번 화장실 가는지까지 다 알겠어.”신지태가 농담을 던지고는 혀를 찼다. “지금은 오래 보면 정든다는 시대가 아니야. 남녀 사이엔 그래도 신선함이 있어야 하지.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그런 느낌, 그래야 감정이 생기고 자극적인 법이야.”강유형은 침묵했고 신지태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듯했다.“그래서 너 윤지원과 결혼할 거야?” 신지태의 질문에 내 숨이 멎는 것 같았다.강유형의 부모님은 우리에게 혼인신고를 하라고 하셨다. 그는 좋다고도, 싫다고도 하지 않았고 나도 그에게 묻지 않았다. 그러니 신지태가 나 대신 물어본 셈이다.강유형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신지태가 웃었다. “결혼하기 싫어?”“...그건 아니야.”“그럼 결혼은 하고 싶은데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는 거지?” 신지태와 강유형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사이라 서로의 마음을 잘 알았다.“지태야, 이런 말 들어봤어?” 강유형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뭔데?”“먹자니 맛없고 버리자니 아깝고.” 강유형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강유형은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고 그의 시선이 내 얼굴에 머물렀다. 굳이 보지 않아도 내 안색이 얼마나 좋지 않은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어디 아파?”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나는 말없이 그의 책상 앞으로 걸어가 목구멍에 맺힌 쓴맛을 삼키며 말했다. “나랑 결혼하고 싶지 않다면 내가 아주머니한테 말씀드릴게.”강유형의 미간 주름이 더 깊어졌다. 그는 내가 그와 신지태의 대화를 들었다는 걸 알아챘다.난 목이 메어 말을 잇기 힘들었다. “난 내가 먹자니 맛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존재가 될 줄은 몰랐어, 강유형...”“모든 사람들 눈에는 우린 이미 부부야.” 강유형이 내 말을 끊었다.‘그래서 뭐? 그 사람들 때문에 나랑 결혼하려는 건가?’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가 나를 사랑해서, 나와 평생을 함께 보내고 싶어서 결혼하는 거였다.‘탁’하는 소리와 함께 강유형의 손에 든 펜이 닫혔고 그의 시선이 내 손에 든 혼인 신고서에 머물렀다. “다음 주 수요일에 혼인신고 하러 가자.”이 말은 내가 듣고 싶었 거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가슴이 아팠다. 그것도 아주...난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강유형, 억지로 할 필요 없어. 나도 그럴 필요 없고.”“윤지원!” 그가 날카롭게 내 이름을 불렀다.나는 움찔했고 고개를 들어 그의 짜증 난 듯한 눈과 마주쳤다.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고 혼인 신고서를 쥔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그의 턱이 굳어졌다. “이리 줘.”나는 움직이지 않았고 분위기는 더욱 팽팽해졌다.몇 초 후, 그가 일어나 내게로 왔고 내 앞에 서더니 한숨을 살짝 내쉬며 말했다. “지태랑 한 얘기는 그냥 농담이었어. 넌 왜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거야?”정말 농담이었을까?“너도 알잖아. 남자들에게 체면이 얼마나 중요한 거.” 그의 손이 내 팔을 잡더니 천천히 내려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혼인 신고서를 빼앗아 갔다.“앞으로는 남의 말 함부로 믿지 마.” 그가 돌아서서 혼인 신고서를 서랍에 넣고 옆에 있
하루 종일 이 문제를 고민했지만 오후에 그가 나를 부를 때까지도 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도 난 그를 따라나섰다.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10년이란 시간 동안 나는 그에게, 그리고 퇴근 후 강씨 집안으로 돌아가는 일에 익숙해져 버렸다.“왜 말이 없어?”돌아가는 길에 강유형이 내 기분이 좋지 않음을 눈치챘는지 먼저 물었다.나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강유형, 우리 그냥...”뒷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의 휴대폰이 울리면서 차량 디스플레이에 이름 없는 번호가 떴고 강유형의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그가 긴장했다.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다.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는 이미 재빨리 차량 스피커를 끄고 블루투스로 전환했다. “여보세요... 네, 지금 가고 있습니다.”통화 시간은 짧았다. 그는 전화를 끊고 나를 보며 말했다. “지원아, 급한 일이 생겨서 집에 데려다줄 수가 없겠어.”사실 그가 말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나를 내버려두고 갈 거라는 걸. 이미 처음이 아니었으니까.그래도 그가 말하기 전까지는 나를 먼저 데려다줄 거라고 기대했었다.가슴 한구석이 갑자기 텅 비어 아파왔고 나는 서운함을 억누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강유형의 턱이 굳어졌다. 그는 대답 대신 밖을 보며 말했다. “저기서 내려줄게. 택시 타고 돌아가.”설명조차 해주지 않고 이미 다 결정해 놓은 듯했다. 그러니 내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더 묻고 떼를 쓰는 건 스스로 망신당하는 일일 뿐이다.“집에 도착하면 전화... 메시지 보내.” 강유형이 당부하는 사이 핸들은 이미 돌아가 도로변 임시 주차장에 멈춰 섰다.나는 가방을 꼭 쥐고 차에서 내렸다.내가 예민한 게 아니다. 그가 발신번호를 본 후의 이상한 반응부터 차량 스피커로 통화하지 않으려 한 것까지, 이미 예감이 왔다.다만 묻지도 말하지도 않았을 뿐이다.어떤 일들은 묻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그대로 두고 자기 위안을 할 수 있으니.“조심해서 가!” 서두르는 와중에
평생 이런 일을 겪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성추행 혐의로 경찰서에 끌려올 줄이야.그날 내가 부딪힌 건 고작 열일곱 살의 미성년자였다. 그 녀석은 내가 자기를 더럽게 만졌다고 우겼고 내가 아무리 부인해도 소용없었다.“어디를 만졌다는 거죠?” 경찰이 꼼꼼하게 물었다.조태혁이라는 소년은 나를 노려보며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더니 허리 아래를 가리켰다. “여기요, 여기... 이 여자가 다 만졌어요.”‘개소리하지 마, 이 자식아!’나는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강유형 같은 미남도 못 만져본 내가 겨우 털도 다 안 난 꼬맹이를 만진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경찰이 다시 나를 쳐다보자 난 그가 묻기도 전에 먼저 부인했다. “전 그 애를 만지지 않았어요. 그저 실수로 부딪쳤을 뿐이에요.”“술 드셨나요?” 경찰의 눈빛이 의미심장했다.이 사회에서 남자가 술에 찌들어 사는 건 정상이지만 여자가 술을 마시면 대부분 품행이 의심받게 된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셨어요.”“얼마나 드셨죠?” 경찰의 이 질문이 지금 상황과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맥주 한 병이요.”경찰은 믿지 않는 눈빛을 보였다. 난 즉시 내 친구 안리영이 증인이 돼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 꼬맹이와 내가 다투고 있을 때 안리영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출혈 중인 산모를 구하러 병원으로 긴급 소환됐다고.난 경찰의 의도를 이해하고 다시 한번 설명했다. “전 취하지 않았어요. 술 핑계로 이 꼬맹이를 건드릴 이유도 없고요.”경찰은 내 말을 기록하고 조태혁을 바라봤다. “저 여성분께서 만졌다고 확신해요? 거짓말이나 무고는 법적 책임을 져야 합니다.”“당연히 확실하죠” 조태혁은 정말 고집불통이었다. 나는 화가 나서 일어나 그를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그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조태혁의 눈이 갑자기 반짝였다. “누나, 왔어?”그가 미성년자니 당연히 보호자를 불렀을 거다. 나는 그의 가족에게 설명하려고 고개를
내 손이 아플 정도로 꽉 잡혔다. 분명 그가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이게 질투인 걸까?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이 스치는 순간 강유형은 내 손을 놓았고 그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윤지원, 내가 한마디 했다고 이렇게 복수하려는 거야?”나는 순간 당황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으니까.“아니 난...” 설명하려는 내 말은 도중에 끊겼다.“너 정말로 그 녀석을 만졌어? 정말로 그곳을?” 강유형의 턱이 굳어졌고 그의 눈에는 사람을 잡아먹을 것 같은 무서운 빛이 서렸다.이런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는데 역시 질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순간 내 마음속의 불편함이 많이 사라졌다. 그가 나를 여전히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만약 그가 나를 단순히 여동생이나 친구로만 여겼다면 내가 다른 남자를 만졌다고 해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아니야.” 나는 다시 한번 부인했다.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조태혁이 안에서 나왔고, 나를 향해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변태 아줌마, 또 우리 매형 꼬시려고?”사람 성격 쉽게 안 변한다더니 정말 그랬다.조태혁이 나를 바라보는 그 비열한 표정은 전생에 무슨 원수라도 졌나 싶을 정도였다.이쪽으로 걸어오는 남매를 보면서, 특히 조나연의 그 순수한 모습과 그녀가 강유형을 만졌던 장면을 떠올리며 나는 손을 들어 강유형의 팔을 감쌌다.하지만 그의 근육이 순간 굳어지는 걸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또 거짓말이지.” 조나연이 조태혁의 귀를 꼬집으며 다가왔다.그녀는 우리 앞에 서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유형 씨, 지원 씨, 정말 미안해요.”“네 잘못 아니야.” 강유형이 조태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음에 또 이런 짓 하면 아무도 널 구해주지 않을 거야.”“흥.” 조태혁이 불만스럽게 강유형을 흘겨보았다. “당신이 누군데요? 뭔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해요? 당신이 우리 새 매형이 되겠다면 말 들을게요.”“조태혁!”조나연이 꾸짖으며 그를 한 번 더 때렸고 조태혁은 피하며 말했다. “누나, 저 사람
진정우의 행동을 본 내 마음은 조금 더 차갑게 식었다.병원에서 두 시간 동안 모든 검사를 마친 후에 나는 진소영과 진정우를 만났다.진소영은 나를 붙잡고 물었다.“언니, 괜찮아요? 어디 불편한 데 없어요?”“괜찮아. 의사 선생님이 내가 복이 많다고 하셨어. 심지어 큰 부상도 없다고 했어.”나는 거짓말을 했다. 사실 내 몸에는 여러 군데 상처가 있었지만 진소영에게는 알리지 않기로 했다. 진소영이라면 분명히 내가 그녀를 구하려다 물에 휩쓸려 갔으니 내심 많이 자책하고 있을 거다.진소영이 자책하면 반드시 진정우를 시켜서 나한테 더 잘해주라고 할 것 같았지만 지금 그는 이미 나를 포기한 상태였다.“언니 말을 못 믿겠어요. 언니, 제가 한번 봐도 돼요?”진소영은 그렇게 말하며 나한테 다가오려 했고 나는 그녀의 손을 누르면서 말렸다.“소영아, 좀 피곤해서 잠시 자고 싶어. 정말 괜찮으니까 먼저 돌아가.”“언니, 저는 안 갈 거예요. 여기서 언니랑 같이 있을 거예요. 그리고 오빠도요.”진소영은 진정우를 불렀고 그가 다가왔다. 그의 시선은 내 얼굴에 머물렀지만 나는 그를 피하고 고개를 돌렸다.“먼저 나가자.”진정우가 진소영에게 말했다.드디어 진정우의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그들이 밖으로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오빠, 언니랑 무슨 일 있어? 싸웠어? 아무리 싸웠다고 해도 그렇지. 언니는 나를 구하려다가 목숨까지 잃을 뻔했어. 그런 언니에게 왜 이렇게 차갑게 대하는 거야?”진소영의 말에 난 마음이 더 아팠고 나는 그 아픔을 주체할 수 없어서 눈물이 흘렀고 고개를 돌려 눈물을 베개에 닦았다.“우리 일은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그리고 오늘 아침에 나도 너에게 말했잖아. 폭우가 내리니까 도서관에 가지 말라고. 왜 내 말을 듣지 않았어?”진정우는 진소영을 꾸짖었지만 진소영은 아무런 대답하지 않았고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그리고 윤지원은 왜 도서관에 있었던 거야? 너만 내 말을 잘 들었으면 이런 일이 안 생겼을 거야.”진정우의 말은 점점 더 차
그 말에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다.나도 진소영을 끌어당기며 사람들과 함께 높은 곳으로 달려갔다.하지만 홍수의 속도는 우리가 달리는 것보다 훨씬 빨랐고 우리가 높은 곳에 도달하기도 전에 홍수가 이미 우리를 덮쳤다.“언니, 언니...”깜짝 놀란 진소영이 나를 부르며 소리쳤고 나 역시 무서웠지만 지금은 두려워한다고 뭐가 달라질 게 없었다. 나는 가까운 곳에 기둥이 보였고 진소영을 잡고 그곳으로 달려갔다.그러나 내가 진소영을 기둥 위로 올리자마자 홍수가 이미 내 앞에 밀려왔고 나는 더 이상 올라갈 시간이 없었고 강한 물살에 휘말려 떠내려갔다.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물에 휘말려 너무 멀리 가지 않았고 나는 무언가를 잡고 몸을 버텼다. 나는 필사적으로 그것을 움켜잡고 물 위에 머리가 떠 있도록 애썼다.“언니, 언니...”진소영은 너무 놀라서 기둥을 붙잡고 울고 있었다. 홍수에 떠내려오는 쓰레기와 파도가 내 몸을 휩쓸었고 그 순간 나는 통증도 물의 차가움도 느낄 수 없었고 다만 끝없는 두려움만이 가득했다.인생에 정말 예기치 않은 일이 있다는 말이 진짜라는 걸 그때 깨달았다. 나는 지금까지 이런 홍수를 겪을 거라고 상상도 못 했다.“언니, 언니!”진소영이 계속해서 나를 부르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곳에서 내가 손을 놓지 않으면 구조가 올 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나는 나 자신을 구하는 게 우선이었다.주변은 모두 물에 잠겼고 물이 퍼지는 속도도 굉장히 빨랐다. 이전의 도로는 이미 모두 바다처럼 변해 있었다.“오빠, 언니를 구해줘... 언니가 물에 떠내려가고 있어!” 어렴풋이 진소영의 목소리가 들렸고 아마 진정우가 그녀에게 전화했을 것이다. 정말로 때마침 걸려 온 전화였다. 진정우가 오면 나는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지금 나는 그와 이미 헤어졌다는 사실을 떠올릴 겨를도 없었고 그저 그가 빨리 와주기를 바랄 뿐이었다.그러나 진정우는 구조대보다 더 늦었고 나는 구조되어 올라갔고 진소영도 기둥에서 구조되어
그러자 진소영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비쳤고 그녀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오늘 고개만 줄곧 젓네.’나는 의아한 마음을 억누르며 물었다.“소지훈이 너를 안거나 키스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너를 사랑한다고 확신해?”진소영은 얼굴이 조금 붉어진 채로 눈을 내리깔았다.“소지훈이... 한 번... 정말 거의 저에게 키스하려 했어요.”“거의?”나는 소지훈의 모습을 떠올리며 물었다.“술 마셨어?”술 때문에 남자들은 예전 사랑을 떠올리며 현재의 사람을 잘못 인식할 수 있다.진소영은 이번엔 고개를 흔들지 않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솔직히 털어놓았다.“지난주 소지훈이 기분이 안 좋다고 술을 마셨고 제가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선생님이 돌아가셨다고 하더라고요. 그 선생님은 100일 전에 돌아가셨고 선생님이 그리워서 너무 힘들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저를 바라보더니 키스하려고 했어요.”진소영이 이 말을 꺼내자 나는 잠시 멍해졌다. 나는 유희연이라는 사람이 이미 세상을 떠난 지 100일이 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소지훈은 그 당시 진소영을 유희연으로 착각했다.“그렇다면... 소지훈이 결국에는 너한테 키스는 못 했다는 거지? 네가 거절한 거야? 아니면 소지훈이 스스로 멈췄다는 거야?”그러자 진소영은 얼굴이 더 붉어지며 말했다.“소지훈이 멈췄어요. 그리고 저에게 미안하다고 말했어요.”“그러면 그 말만으로 소지훈이 너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거야?”나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너... 사랑 소설을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야?”“그것뿐이 아니에요. 그 외에도 소지훈은 저한테 너무 잘해주고 도서관에 있는 사람들도 우리 둘이 연애 중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어요. 때로는 우리한테 커플이 아니냐고 장난도 쳤지만 소지훈은 변명도 하지 않았어요.”진소영은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리고 소지훈이 늦게 왔을 때 다른 남자가 제 맞은쪽에 앉거나 제가 다른 남자랑 얘기하면 질투도 했어요.”그녀가 말한 내용들은 사실이었다. 소지훈이 그랬다면 진소영은 충
그러자 진소영은 눈이 갑자기 붉어졌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어린 소녀 같았고 그녀와는 달리 나는 이미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 속에서 연애하고 있었다. 나는 언제나 자신의 사랑과 원망을 직설적으로 드러냈지만 진소영은 갈팡질팡하며 마음을 숨기고 있었다.그녀의 상처받은 표정을 보고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소지훈이 뭐라고 했기에 그래?”진소영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대답했다.“거절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고백한 후 소지훈이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았어요.”그것도 결국 거절인 셈이었다. 소지훈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유희연의 자리가 큰 것 같았다.“며칠이 지났어?”나는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가볍게 두드리며 물었다.“3일이요.”진소영은 눈을 비비면서 말했다.“사실 후회하고 있어요. 제가 먼저 고백하지 말아야 했어요.”나는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네 감정에 확신이 없었던 거야?”“그건 아니에요.”진소영은 코끝까지 빨개져서 말했다.“좋아하는 건 맞아요. 후회하는 건 제가 고백한 후에 소지훈이 저를 피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진소영은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책의 모서리를 계속해서 움켜잡으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이럴 줄 알았다면 고백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예요. 그저 친구로라도 소지훈을 볼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고백한 후로 소지훈은 저를 피하는 것 같아서 너무 힘들어요.”진소영의 말속에서 그녀가 소지훈에게 얼마나 깊이 빠져 있는지 알 수 있었다.“그러면 3일 내내 소지훈을 기다린 거야?”나는 왜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그녀가 도서관에 앉아 있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네.”진소영은 정말 순진한 아이였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물었다.“그렇게 기다리기만 할 거야? 전화라도 해보지.”그러자 진소영은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이미 꺼놨어요.”“그러면 카톡은?”“답장이 없어요.”진소영은 입술을 내밀며 대답했다.전화도 꺼져 있고 카톡도 답하지 않는다면 그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다. 소
“언니, 지금 도서관에 올 수 있어요? 할 얘기가 있어요.”진소영이 전화로 물었지만 나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다음에 보자. 오늘은 좀 피곤해서.”나는 그녀의 부탁을 거절했고 진소영은 아무 말 없이 잠시 침묵에 잠겼다. 그런데도 나는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나는 물었다.“그렇게 중요한 일이야?”“네. 정말 중요해요.”진소영이 잠깐 망설이다가 이어서 말했다.“언니, 아니면 제가 언니한테 갈게요.”나는 진소영이 나를 꼭 만나겠다는 마음이 느껴졌다. 어쩌면 내가 진정우와의 일 때문에 괴로워하는 걸 알고 나를 위로하려는 계획일 수도 있었다.“소영아...”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언니, 주소만 보내줘요. 택시 타고 갈게요.”진소영이 말하는 동안 책을 정리하는 소리가 들렸다.창밖을 보니 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있었고 지금 택시를 타기엔 힘들 것 같았다. 거기다 그녀는 최근에 수술을 받았고 면역력이 낮은 상태여서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었다.비록 진정우와 헤어졌지만 나는 여전히 진소영을 걱정하고 있었다. 적어도 진정우가 그녀에게 맞는 사람을 찾을 때까지는 내가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결국 그녀의 고집에 내가 양보했다.“아니야, 내가 너한테 갈게.”“정말요? 그럼 기다릴게요. 언니!”진소영의 목소리가 한층 밝아진 것 같았다.전화를 끊고 나는 기사에게 도서관 주소를 말해주었고 그는 방향을 틀어 나를 그곳으로 데려갔다.비 때문인지 도서관엔 사람이 많지 않았고 나는 한눈에 진소영을 발견했다.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책은 덮어두고 창밖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었고 분명히 뭔가 고민이 있는 모양이었다.내 발소리를 들었는지 진소영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는 반갑게 손을 흔들며 내게 다가왔다.“언니, 비 맞지 않았죠? 정말 비가 많이 오네요.”진소영이 나를 살펴보며 물었다.“괜찮아.”나는 자리에 앉으며 그녀가 펼쳐놓은 책들을 보았다. 모두 덮어놓은 상태였다.저번에 이곳에서 소지훈과 마주쳤을 때 나는 그가 진소영과 친밀한 사
함소은이 말한 사고는 바로 내 부모님의 사고 아니야?그렇다면 용진표가 진정우의 아버지한테 돈을 주고 매수했다는 말이야?그 사실에 나는 충격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고 나는 함소은을 바라보았다.“그 말은 누가 했나요? 근거가 있나요?”함소은은 내 불안한 감정을 눈치채지 못한 채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그건 모르겠어요. 어쨌든 그런 말이 떠돌고 있었어요. 모두 몰래 이야기하는 거죠. 용진표의 주변 사람들은 용진표를 두려워해서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게 되면 다 죽을 수도 있죠.”“그러면 그 말을 들은 적이 있는 사람을 찾아볼 수 있을까요?”내 말에 함소은은 나를 돌아보았다.그녀는 뭔가 불안한 기운을 느낀 듯 웃으며 물었다.“왜 그 일에 그렇게 관심이 가는 거죠?”나는 그녀의 어두운 얼굴을 바라보며 결국 진실을 말하기로 했다.“사고를 당했던 그 부부가 제 부모님이고 운전기사는 제... 전 남자 친구의 아버지였어요.”함소은은 깜짝 놀라며 눈이 휘둥그레졌고 나는 그녀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그래서 그 일이 사실인지 알아야 해요. 증거가 필요해요.”그녀는 속눈썹을 살짝 떨며 물었다.“제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인가요?”내가 그녀에게 도와달라고 말하는 건 사실 꽤 민망한 일이었다. 그녀가 한때 내 친구가 되고 싶어 했으나 나는 거절했다.지금은 내가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거라 조금은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이었다.하지만 그녀는 용진표를 미워하는 사람인 만큼 이 정보도 그녀가 직접 들었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고 그만큼 소문을 낸 사람을 더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이런 소문이 나오는 데는 분명히 별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그래서 나는 내 자존심이 상하든 말든 그저 내가 뭔가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해도 절대 주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소은 씨, 제발 도와주세요.”함소은은 잠시 멈칫하다가 웃으며 말했다.“우리는 친구도 아니니까 저도 거절할 수 있죠?”여자들은 자주 그 작은 앙금을 마음속에 품고 사는 법이다. 그녀
내가 그렇게 말하자 함소은은 손을 들어 내 말을 막았고 은서를 가리키며 말했다.“은서는 정말 운이 좋은 아이였어요.”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고개를 갸웃했고 함소은은 나의 당황한 표정을 보고는 곧바로 눈치를 챘다.“지원 씨, 지금 많이 혼란스럽죠?”“네, 조금 혼란스러워요.”함소은은 가볍게 웃으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용진표와 그의 아내는 한 번 큰 교통사고를 당했었어요. 그때 용진표는 거의 죽을 뻔했고 용진표의 아내는 의식을 잃었죠. 한 열흘이나 보름 정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고 모두가 용진표의 아내가 다시는 깨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기적처럼 깨어난 거예요.”“그 여자가 깨어났을 때 꿈에서 어떤 한 소녀를 봤다고 말했어요. 소녀는 자신이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님을 따라다니는 동녀라고 했고 용진표의 아내에게 신령스러운 약을 주면서 이 약을 먹으면 다시 깨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하더라고요.”함소은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덧붙였다.“듣고 보면 좀 어이가 없죠?”“그러면 그 후엔 어떻게 되었나요?”나는 몹시 궁금했다.“그 여자가 깨어난 바로 그날에 제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때 용진표의 아내는 용진표에게 나를 데리고 가서 피검사를 하게 했죠. 만약 아기가 딸이면 그대로 두고 아들일 경우에는 낙태시키라고 했어요.”함소은은 잠시 침묵하며 용은서를 바라보았다.“그 여자에게 은서는 꿈에서 나타난 동녀 같은 존재였어요. 그래서 은서가 이 세상에 올 수 있었던 거죠.”그 말을 듣고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그럼 용진표의 아내는 은서를 신처럼 모셔야 할 텐데요.”“그렇죠. 사실 사고 후로 그 여자는 건강이 줄곧 안 좋아서 은서를 해치지 못한 거죠.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은서는 벌써 그 여자에게 빼앗겼을지도 몰라요.”함소은은 술잔을 들려 했지만 나는 손을 내밀어 그녀를 막았다.“그렇게 이 아이를 지키고 싶다면 방법이 있어요. 지금 이러는 행동은 사실 스스로 아이를 포기하는 셈이죠.”나는 차분히 말했다.“방법? 어
그녀는 분노와 억눌린 감정 그리고 마치 폭발을 기다리는 듯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본 적 없던 함소은의 또 다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긴장됐다.나는 목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그렇게까지 용진표를 미워하고 용진표가 한 짓을 다 알고 있으면서 왜 아직도...”내가 그 말을 끝내지 못한 건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잘 몰라서였다.그녀의 분노가 이렇게 극에 달한 상황에서 은서를 낳은 것은 사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이가 있으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잖아?하지만 그녀는 아이를 낳았다.“왜 은서를 낳았냐고 묻는 거죠. 맞아요?”함소은은 내 마음을 정확히 읽고 말을 이었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런데 만약 두 사람 정말 갈라서게 되면 은서는 어떻게 돼요? 은서는 잘못한 게 없잖아요.”“저도 그 당시에 은서를 낳고 싶어서 낳았겠어요?”함소은은 고개를 젖히며 술잔을 비웠다.그녀가 고통스럽게 술을 삼키는 모습을 보고 내 마음도 무겁게 내려앉았다.함소은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처음 임신했을 때 용진표는 병원에 가서 내 피를 뽑게 하고 내가 임신한 아이가 딸이라는 걸 알자마자 여섯 명의 보모를 들였어요. 겉으로는 내 몸을 돌보는 척했지만, 사실은 저를 감시하고 있었어요.”나는 놀라서 물었다.“그때에는 별로 아이를 정말 원하지 않았던 거예요?”“용진표가 나를 그렇게 손에 넣은 마당에 제가 왜 용진표의 아이를 낳고 싶겠어요?” 함소은은 은서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알아요? 만약 은서가 아들이었으면 오늘 같은 날이 없었을 거예요.”그녀가 방금 말한 대로 용진표와 싸운 일이 떠오른 나는 갑자기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그럼... 이번에 또 임신한 거예요?”함소은은 나를 보고 엄지를 세웠다.“정답이네요.”그렇게 칭찬을 듣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그대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용진표가 이 아이를 원하지 않다고 하면서 낙태하라고 한 거죠?”“맞아요. 내일 아침에 사람들이
‘작은 녀석이 참 잘도 사람을 다루네.’나는 용은서를 안고 함소은이 부른 차에 올라탔다.가는 길에 나는 용은서에게 선물을 하나 예약했다. 비록 그녀는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지만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함소은 모녀는 해동 최고의 개인 주택단지에 살고 있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온 집안이 풍선과 장식들로 가득했다.“이건 모두 진표 씨가 준비한 거예요.”함소은이 내게 슬리퍼를 건네며 설명했다.집 안 가득한 화려한 장식과 격식에 나는 무심코 말했다.“진표 씨가 정말 은서를 아끼네요.”“당연하죠. 하지만 은서가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예요. 게다가...”함소은이 용은서를 슬쩍 바라보며 내게 속삭였다.“이젠 은서도 자라서 진표 씨랑 함께 나가면 사람들이 진표 씨를 할아버지라고 불러요. 은서도 그게 좀 껄끄러운 거죠.”용진표가 할아버지 나이까지 됐으니 오해를 살 만도 했다. 하지만 이게 과연 누구 잘못일까? 만약 용진표가 그런 나이가 아니었다면 상황도 달라졌을 텐데 말이다.용은서는 내 손을 잡고 기쁜 얼굴로 나를 어린이 방으로 데려가면서 또 함께 놀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와 놀아주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만 더 버티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미 기운이 빠진 걸 느꼈다.그때 내가 주문한 선물이 도착했다.“은서야, 언니가 네 선물 가져왔어. 네가 마음에 들어 하면 좋겠네.”이 기회를 빌려 잠깐 쉬고 있는데 그제야 함소은이 떠올랐다. 집에 들어오고서부터 그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집사가 커피와 과일을 가져다주면서 나는 무심코 물었다.“함소은 씨는 어디 계세요?”집사는 잠시 위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아마... 위층에 계신 것 같아요.”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은서와 함께 선물을 풀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갑자기 위층에서 함소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카롭게 누구랑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아까 왠지 집사가 이상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아꼈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