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나도 계속 숨고 다닐 수는 없었다.힘든 상황일수록 도망쳐서는 안 되었다.나는 손을 놓자 강진혁은 이불을 걷어내며 나를 바라봤다.“네가 홍수에 휩쓸렸다는 소리를 듣고 놀라 죽는 줄 알았어.”그는 자신이 여기 온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었고 나는 힘없이 웃으며 물었다.“그래서 내가 뉴스에라도 난 거야?”지금은 네티즌 시대였기에 아무리 작은 일도 온라인에 퍼지기 일쑤였으니 오늘처럼 큰 홍수가 있으면 사람들은 사람을 구하는 것보다 영상을 찍기에 바쁠 것이다.“그래. 마치 작은 불쌍한 아이처럼 찍혔어.”강진혁은 말하며 손을 뻗었다.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틀자 그는 당황하지 않고 가볍게 웃었다.“그냥 헝클어진 네 머리 좀 고쳐주려고 했을 뿐이야. 놀라기는.”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강진혁은 내 옆에 앉으며 물었다.“어때? 몸은 괜찮아?”“괜찮아. 검사 다 받았는데 별문제 없대.”“그래도 너 많이 놀랐던 것 같아. 울었어?”내가 울어서 눈이 붉어져 있다는 걸 그는 눈치챘다.강진혁은 내가 그저 놀라서 운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겠지만 그는 내 당황스러운 기분을 덜어주려고 그렇게 말해주었고 나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오빠는 요즘 말도 참 이쁘게 하네요. 거짓말까지 하면서 나를 달래는 거예요.”그러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렇지 않으면 네가 나한테 점점 더 멀어질까 봐.”강진혁은 내가 대답하기 어려운 말을 던졌고 그는 웃으며 말했다.“지원아, 나는 네가 요즘 날 피하는 거 다 알아. 내가 너한테 고백해서 그런 거야? 맞지?”그가 직접 말을 꺼내자 나도 거리낌 없이 말하려고 했다.“사실 나도 많이 후회하고 있어. 친오빠와 친동생으로도 지내지 못할까 봐 두려웠어. 하지만 나도 꼭 말해야 했어. 너한테 진심으로 마음이 갔기 때문이지. 그런데 그 와중에 난 네가 어쩌면 날 좋아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 나한테도 어쩌면 기회가 있을 줄 알았지.”강진혁은 오히려 지금 진심 어린 말투로 사실을 나한테 말하고 있
옆에 있던 강진혁은 눈빛이 어두워졌다. 방금 그가 내가 머리를 만져준다고 했을 때 난 바로 피했고 강유형이 나를 만졌을 땐 나는 거부하지 않았기에 그는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 나라고 해도 그 상황이면 서운했을 것이다.하지만 우리가 그동안 얘기를 나누었고 강진혁은 별다른 표정을 지어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그를 볼 때 그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던졌다.“넌 아직도 강유형의 친밀한 행동에 익숙한 거 같아.”“......”“그건 당연한 소리지. 지원이는 거의 내 아내가 될 뻔했으니까.”“......”“맞아. 거의였지.”강유형은 강진혁을 바라보며 미소를 띠었고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 어린 표정이 가득했다.“아무래도 이마가 좀 뜨거운 것 같아.”강유형은 말을 끝내며 지나가는 간호사를 불렀다.“체온계 좀 줘봐요.”“괜찮아. 아마도...”내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강유형이 끊었다.“괜찮은 건지는 그건 네가 스스로 판단할 일이 아니야.”강유형의 말에 간호사는 바로 체온계를 가져와 내 이마에 대었다.“37.7도입니다.”그러자 강유형은 간호사에게 말했다.“의사에게 상황을 좀 전해주세요. 그리고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나요? 감염인지 아니면 그냥 물에 젖어서 감기가 온 건지 확인해 주세요.”강유형은 정말 전문가처럼 말을 이어갔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의사인 줄 알겠네.’간호사는 대답하고는 떠났고 강진혁은 나에게 따뜻한 물을 부어줬다.“따뜻한 물이라도 마셔. 아마 그냥 몸이 얼어서 그런 거 같아.”두 형제가 이렇게 나를 챙겨주는 모습이 정말 감동적이지만 그만큼 부담도 컸다.나는 그들이 그만 가줬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강유형은 이미 먼저 말했다.“형, 아니면 먼저 돌아가. 내일 선보러 간다고 했잖아? 너무 늦게까지 있으면 피부에 안 좋아.”“오빠, 선보는 거예요? 방금 왜 말을 안 했어요?”나는 조금 놀랐고 강진혁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말할 새도 없이 강유형이 와서 방해했으니까.”이 말의 의미는 강유형이 우리 둘 사이
강유형은 결국 강진혁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챘다.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대답했다.“그건 직접 물어봐야 할 거야. 그리고... 나는 지금 아무에게도 마음이 없어.”그러자 강유형은 무표정하게 말했다.“너무 자주 말하지 않아도 돼.”“사실을 말한 것뿐이야.”나는 말을 마친 후 기침을 두 번 했고 그러자 강유형은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진정우는 네가 사고를 당한 걸 몰랐어?”강진혁의 말은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컵 안에 있는 뜨거운 물의 온기가 몸의 차가움을 녹여주었지만 마음속의 차가운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왔었어. 그리고 다시 갔어.”강유형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나는 물컵을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나 좀 자고 싶어.”내가 눕자 강유형은 그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나는 열이 나서 눈꺼풀이 무겁고 잠에 빠져들기 직전에 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렸다.“나와 헤어질 때는 네가 이렇게 아프지 않았던 것 같은데.”‘뭐라고 하는 거야?’사실 맞는 말이었다. 강유형과 헤어질 때 지금처럼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은 없었다.“아마 너는 천천히 칼날로 내 마음을 줄곧 찔렀기 때문에 난 아픔에 익숙해졌겠지.”내가 목소리를 낮춰 말하며 뒤로 돌아누웠고 결국 깊은 잠에 빠졌다.나는 밥 냄새에 잠이 깼다. 눈을 떴을 때 강유형이 침대 옆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본 내용에 몰입한 듯 내가 깬 줄도 모르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정말 배가 고팠다. 침대 옆 식탁에 놓인 음식을 보며 일어나 보려고 했지만 몸의 상처가 아파서 움직이지 못하고 냉큼 숨을 쉬었다.강유형은 그 소리를 듣고 급히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가와 나를 부축했다.“깨어났어? 나한테 말하지.”“배가 고파.”나는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고 간단히 말했고 그는 웃으며 말했다.“알겠어. 네가 배고플 줄 알았어. 예전처럼 감기나 열이 나면 깨자마자 먹는 게 첫 번째잖아.”듣고 보니 난 확실히 그랬었다. 다른 사람들은 병에 걸리면 입맛이 없다고 하지만 나는 배가 고팠다.
“잠깐만.”내 말을 들은 강유형은 재빠르게 일어섰다.지금의 그는 내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마다 언제든지 응해주고 내가 부탁하지 않아도 먼저 다가오는 그런 사람으로 변해버렸다.만약 예전에도 이렇게 했다면 아마 난 강유형과 그렇게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세상에 만일이라는 건 없었고 나는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그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며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봤다. 화면이 멈춰 있었는데 그 영상 속에는 아마 3년 전의 내 모습이었다.나는 그때 내가 뭘 했는지 왜 그런 영상을 찍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휴대폰을 빼앗아 보고 싶었지만 또 그럴 수는 없어서 고민하던 그 순간 강유형이 물을 가지고 돌아왔다.그는 내가 휴대폰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았고 얼굴에 당황한 기색 없이 자연스럽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잠드는 동안 예전 사진과 영상을 좀 봤는데 지금 넌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졌더라.”나는 물을 마시며 그가 한 말에 이어서 대답했다.“그러면 예전엔 내가 안 예뻤다는 거네? 그래서 네가...”“그만해.”그가 내 말을 끊었다.“그 사람은 더 이상 언급하지 마.”물 몇 모금 마시자 나는 목이 좀 편해졌다.“조나연 그 일은 이제 다 정리한 거야?”나는 젓가락으로 목이버섯을 집어 입에 넣으면서 물었고 그 상큼하고 새콤한 맛에 기분이 좋아졌다.강유형은 휴대폰을 다시 들고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그 화면을 보고 있었고 나도 그저 맛있는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좀 더 먹으려던 찰나 강유형이 입을 열었다.“완전히 깨끗하게 끝냈어.”그 말에 나는 조금 더 생각했다. 그때 그 여자가 남긴 독한 말들을 떠올리며 이 일은 그렇게 간단히 끝날 일이 아닐 거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강유형이 이렇게 말하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고 다시 음식을 먹을 준비를 했다.“알겠어.”“잠시만.”그때 강유형이 나를 막아 나서면서 손으로 내 입술 옆에 묻은 기름을 닦아 주었다.“기름이 묻어서.”나는 입술
“쫓아갈 거야?”나는 쫓아가서 꼭 물어보고 싶었다.하지만 쓰레기통에 버려진 도시락을 보니 더 이상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가 버린 것은 도시락도 음식도 아닌 나에 대한 마음이었다.그렇다면 내가 쫓아가서 물어본다고 해도 결국 스스로 굴욕을 찾는 일이었다.나는 마음을 되돌리고 도시락을 다시 내려놓고 내 병상으로 돌아갔으나 이제는 젓가락을 다시 들고 음식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무거웠다.도시락을 주운 사람은 그 변화를 눈치챘는지 조심스럽게 도시락을 다시 내 앞에 놓았다.“가져가세요.”“아, 아니에요...”그 사람은 손을 움켜잡으며 물러섰다.“당신이 주운 거니까 그냥 가져가세요. 게다가 시름 놓고 드시면 돼요. 맛은 있을 거예요.”나는 한숨을 쉬며 음식을 다시 집어 들었다. 분명히 화가 나 있었지만 그런데도 다시 먹기 시작했다.강유형은 옆에서 음식을 먹으려는 내 손을 살짝 눌렀다.“내 음식한테 화내지 마.”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진정우는 아마 내가 여기에 있는 걸 보고 떠난 거 같아.”그 말에 나는 잠시 멈췄다. 방금 강유형이 내 입술 옆을 닦아준 걸 생각하니 마음이아팠다.‘아, 이거 정말... 오해는 점점 더 깊어만 지는구나.’내가 잠시 멍하니 있을 때 강유형은 내가 먹던 음식을 쥐고 아무 말 없이 그것을 치웠다. 그리고 도시락을 손에 쥐고 나가려 했다.그가 어디로 가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아줌마에게서 전화가 왔다.“지원아, 유형이 너한테 음식을 가져왔을 때 별문제 없었지?”나는 순간적으로 멍해졌다.“아, 아줌마, 무슨 일이에요?”“유형의 입가에 상처가 있더라고. 싸운 거 같아서...”아줌마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고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설마 강유형이 나가서 진정우랑 싸운 거 아니야?’하지만 난 결국에 이 말을 내뱉지 않았고 아줌마는 또 몇 마디 했고 마지막으로 만두랑 음식이 맛이 어떤지 물었다.전화가 끊기자 나는 병원을 떠났다.다음 날 나는 회사에 갔고 마침 약속이
나는 숨이 잠시 멈췄고 그의 눈빛과 마주쳤고 그는 나를 바라보며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그는 언제나 정직하고 대범하게 대했지만 나는 항상 마음이 불안했다. 마치 헤어진 게 딱 내 잘못인 것처럼 말이다.“호랑이도 자기 말하면 온다더니... 정우 씨, 방금 윤 부장님과 정우 씨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어요.”허진호는 능글맞게 말을 이어갔지만 진정우는 그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네.”“정우 씨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허진호는 정말 끝내주는 재치로 우리를 괴롭혔다. 진정우는 아무런 말도 없이 고개를 숙였고 허진호는 코를 문지르면서 다시 말을 이어갔다.“정우 씨가 살이 빠졌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또 뭐라고 했던가...”허진호는 말을 잠시 멈추더니 나에게 눈을 찡긋했다.“윤 부장님, 정우 씨에게 알려주지 말자고요.”“하하.”나는 속으로 찐웃음이 터져 나와서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고 진정우가 딱 그 순간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시선을 돌렸다.그가 나를 원하지 않았기에 나도 진정우 없이 잘 살 수 있는 모습을 증명하고 싶었다.점심때, 나는 항상 전화를 걸지 말지 고민했던 함소은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그녀가 용진표랑 함께 있어서 불편할까 봐 전화하지 않았다.“어떻게 됐어요? 괜찮아요?”전화를 받자마자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오늘은 잘 피했어요.”함소은이 가볍게 말했다.그녀가 어떻게 피했는지 묻지 않았다. 이 여자는 용진표의 곁에서 몇 년이나 보내면서도 여전히 복수를 품고 살아왔다. 그리고 그에게 아이까지 낳은 여인이라면 그만큼 능수능란한 사람이기 때문이다.처음 그녀를 봤을 때 나는 그녀가 단지 외모를 과시하는 여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던 내 자신이 정말 부끄러웠다.“그럼 다른 이유로 저한테 전화한 거예요?”“지원 씨가 찾으라고 한 사람을 찾았어요. 그래서 직접 만나보고 싶은지 물어보려고 전화했어요.”나는 예상보다 일이 빨리 진행되고 있다는 말에 조금 놀랐고 이내 흥분해서 대답했다.“가능하다면 직접 만나고 싶어요
“진정우 씨.” 나는 평범한 동료처럼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인사를 했지만 진정우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보았고 우리는 그냥 스쳐 지나갔다.하지만 그 순간 내 얼굴에 있는 미소가 조금 씁쓸하게 느껴졌다. 나는 회사 차를 몰고 함소은이 말한 곳으로 갔다.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함소은은 아직 오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그녀는 먼저 자리를 찾아 앉아 기다리라고 했다. 그녀를 기다리면서 나는 다시 휴대폰을 열었고 그때 진소영이 보낸 메시지를 받았다.스크롤을 위로 올려보니 진소영이 보낸 메시지는 거의 다 자책과 내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진정우를 변호하는 내용도 있었지만 나는 딱 한 번만 답을 보냈고 그 후에는 다시 답하지 않았다.[언니, 보면 답장해 줘. 오빠가 나를 방에 가두고 나가지 못하게 해요.]진소영의 메시지를 보고 한참 생각한 후에야 나는 그녀에게 답을 보냈다.[소영아, 나는 괜찮고 이젠 정상적으로 출근하고 있어. 그리고 나랑 네 오빠 사이에 대해선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아도 돼.]그러자 그녀는 바로 답을 보냈다. [언니, 오빠는 언니를 정말 사랑해요. 정말이에요. 맹세해요.]나는 답하지 않았고 그때 다시 메시지가 왔다.[오빠가 언니에게 죽을 끓여줄 때 정신이 없어서 팔까지 데었어요.]그 메시지를 보자 나는 그가 버린 죽을 떠올리며 여전히 답하지 않았다. [오빠가 언니한테 죽을 가져가고 돌아와서 잠도 자지 않고 창문 앞에 서 있었어요. 담배도 피웠고요.] [언니, 나는 언니와 오빠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요. 하지만 언니, 오빠한테 다시 기회를 주면 안 돼요?][언니와 오빠가 이렇게 지내는 걸 보면 마음이 아파요. 난 평생 혼자 살아도 괜찮으니 그냥 언니 오빠가 행복하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그 메시지를 보고 나는 웃음을 지었고 동시에 진소영이 소지훈에 대한 짝사랑을 떠올렸다.나는 또 한 번 메시지를 보냈다. [소지훈이 너한테 연락했어?][아니요!]진소영은 눈물 나는 이모티콘을 덧붙
나는 그녀를 보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가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머리를 흔들며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그때 함소은이 말했다. “용진표의 아내가 꿈을 꾼 게 아니라 용진표가 지원 씨를 만나고 싶다고 했죠.”“뭐라고요?”내가 말을 끝내기 전에 갑자기 나는 함소은이 완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몸이 뜨는 느낌이 들었고 귀에 함소은의 목소리가 들렸다.“잠깐만 자고 있어요.”나는 왜 자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입을 열지 못했다. 내 몸이 들어 올려지는 걸 느꼈지만 나는 눈은 뜨지 못했고 말도 할 수 없었다.어디론가 데려가졌고 그곳에서 물을 먹은 후 나는 눈을 떴다.눈에 들어온 것은 낯선 큰 남자였고 그가 바로 용진표의 경호원이었다.의식이 흐릿해지기 전에 함소은이 말한 내용을 떠올렸고 나는 이제 모든 걸 알았다. 나는 몸을 조금 움직이며 그에게 물었다.“용진표는 어디 있어?”그 사람은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돌아서서 나갔다.나는 손과 발이 묶여 움직일 수 없었고 눈앞에 보이는 곳은 폐차장이었고 주변에 낡은 타이어들이 쌓여 있었다.그 모든 상황을 파악한 나는 용진표가 나를 잡아둔 이유를 곰곰이 생각했다.그는 아마 내가 그가 한 일을 알게 되는 걸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게다가 내 몸까지 묶었으니 나한테 별로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지 않았다.막심한 공포가 밀려왔지만 나는 스스로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밖에는 용진표의 경호원이 서 있었고 내가 물을 마시고 깨어났으니 이제 아마 용진표가 올 것 같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고 경호원이 형님이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갇혀 있는 문이 열리자 용진표가 들어왔다. 그는 오늘 마치 무술 도복 같은 흰색 옷을 입고 있었다.“아가씨, 또 만났네.”용진표가 웃으며 말하자 나는 겁먹지 않고 대답했다.“용 대표님, 이런 식으로 만나는 건 영 마음에 들지 않아요.”“마음에 들지 않으면 왜 날 자꾸 자극한 거야?”그가 내 앞에 서자 경호원은 의자
소지훈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지 않았다. 혹은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나는 내가 짐작한 대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지훈 씨, 혹시 일부러 소영이 곁에 나타난 건가요?”소지훈은 갑자기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그의 반응 자체가 내 물음에 대한 답이었다.그때 나는 내 얼굴과 유난히 닮은 유희연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유희연이 세상을 떠난 후, 소지훈은 나와 함께 진소영의 수술실까지 갔었다.“소영이와 가까워지면 나랑 자주 만날 기회가 생기고 그러면 희연 씨를 보는 것 같아 좋아요?”소지훈은 급하게 부인하며 대답했다.“아니에요, 누나. 정말 그런 생각 한 적 없어요.”그는 급하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진정하려는 듯했다. 나는 그저 조용히 그를 바라봤다.“누나,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전 절대 누나를 희연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물론 두 분이 닮으셨지만 저는 분명히 알고 있어요. 희연이와 누나는 같은 사람이 아니에요.” 소지훈은 진지하게 말했고 그 말은 거짓말 같지 않았다. 나는 조금 안도하며 그를 바라봤지만 여전히 걱정됐다.소지훈이 나를 유희연이라고 생각하며 그리움과 고통을 끊어내지 못할까 봐 걱정이었다. 비록 아니라고 했지만 여전히 내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그런데 왜 자꾸 소영이 곁에 나타나죠? 이건 우연일까요?”소지훈은 입술을 꼭 깨물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지훈 씨, 만약 말할 수 없다면 더 이상 소영이를 만나지 마세요.”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누나, 소영이에게 나쁜 의도가 없어요. 저는 그냥... 그녀를 지키고 싶어요. 조용히 지키고 싶어요.”소지훈은 다시 말을 멈췄다.“그냥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그의 진심은 보였지만 그는 진소영과 특별한 인연이 없고 그렇게 깊은 감정으로 지켜줄 이유가 없어 보였다.“왜요?”나는 그 질문을 던지면서 갑자기 무언가가 떠오르며 순간 내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지훈 씨, 혹시...”이번엔 내가 당
“지태 오빠의 경기는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있을까? 지태 오빠가 위험한 건 아닐까?”나는 어쩔 수 없이 신지태가 걱정되었다.“신지태는 괜찮아.”진정우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자 나는 창밖에 짙은 어둠을 바라보며 물었다.“나는 정말로 돌아가야 하는 거야?”진정우는 잠시 침묵한 후 말했다.“내가 연락할 때까지 기다려. 그리고... 그 사람이 보낸 메시지는 삭제하고 차단해.”그 말을 끝으로 그는 잠시 멈췄고 나는 그가 더 말할 줄 알았지만 결국 전화를 끊었다.이국의 밤은 원래 잠들기 어려운 법인데 이렇게 상황이 꼬여버리니 나는 아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진정우의 말을 듣고 나는 그 사람의 메시지를 삭제한 뒤 신지태에게 보낸 메시지를 열어보았다. 정말로 그에게 안부를 묻고 싶었지만 그가 지금 긴급 훈련 중이라는 걸 알기에 그의 마음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다시 채팅창을 닫았다.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잠이 오지 않아 억지로 눈을 감았다. 그러다 문득 진소영이 깬 걸 알고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전화하는 소리도 들렸다.그녀의 목소리는 원래 부드러운데 사랑하는 사람과 전화할 때는 더 부드럽고 온화했고 나는 듣기만 해도 행복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이 소지훈이라는 걸 생각하니 나는 또 불안해졌다.그래도 진정우가 그 사람에 대해 조사를 다 했을 테니 그가 나에게 진소영을 소지훈에게 맡기라고 했으니 나는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나는 진소영이 소지훈과 전화하는 소리를 들으며 잠에 들었다. 아마도 그 행복한 기운이 내 불안을 치유해 준 것 같았다. 이 잠은 오전 11시까지 이어졌다.내가 눈을 뜨자 진소영이 책을 보고 있었다. 소지훈이 그녀에게 준 에너지는 확실히 긍정적이었다.“밥 먹었어?”나는 가장 먼저 진소영의 식사를 걱정했고 진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음식 주문했어요.”진소영은 공부도 잘하고 어젯밤에 우리가 돌아왔을 때도 내가 전화해서 음식을 주문했다. 오늘은 내가 나서지 않아도 혼자서 해결할 수 있었다
나는 전방위적으로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그런데 그는 왜 나를 따라다니는 걸까? 복수라도 하려는 걸까?나는 휴대폰을 꽉 쥐고 화면을 응시지만 더 이상 그는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많이 고민하다가 나는 그 메시지를 캡처해서 진정우에게 보냈다.브라운이 나를 노리고 지금 진소영이 내 옆에 있다면 내가 위험에 처할 때 진소영도 연루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나는 진정우에게 내 위험을 알리기로 했다. 그가 나를 보호하고 싶지 않더라도 적어도 진소영은 그가 방치할 수 없을 것이다.이런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진정우에게 도움을 요청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저 습관이겠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그에게만 의지하는 것 같았다. 설령 그가 나를 원하지 않는다 해도 말이다.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내 전화가 울렸다. 진정우였다.나는 바로 전화를 받았지만 먼저 말을 꺼낸 건 진정우였다.“걱정하지 마. 내가 사람을 보내서 너를 지켜줄게.”그 말을 듣고 내 마음이 묘하게 따뜻해졌지만 그 따뜻함 속에 씁쓸함도 섞여 있었다.그래도 나는 여전히 퉁명스럽게 대답했다.“날 지켜달라는 게 아니라 내가 걱정하는 건 소영이가 내 옆에 있는데 만약 내가 뭔가 문제가 생기면 소영이도 위험해질 거잖아. 네가 그런 상황을 방치하지 않길 바라는 거야.”전화기 너머에서 진정우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있었고 전화를 끊지도 않았다.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후 나는 그에게 다시 물었다.“브라운이 왜 나를 노리는데? 혹시... 신지태 때문이야?”브라운이 처음 만났을 때 나를 스누커 소녀라고 불렀고 나는 사실 신지태와만 게임을 했었다. 게다가 최근에 신지태 사건도 있었고 나도 그를 만나러 이곳에 왔다.그래서 브라운이 나를 따라오는 이유는 아마도 그것 때문일 거로 생각했다.진정우는 잠시 생각하더니 짧게 대답했다.“신지태는 그저 구실일 뿐이야. 그 사람들은 너를 이용해서 나를 공격하려는 거겠지.”그 말에 나는 잠시 놀랐고 바로 그때 강유형이 나한테 했었던 말이 떠올랐다.“Q 클럽의 보스
“지원아, 소영이는 어디 있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진정우는 전보다 훨씬 낮은 목소리로 거의 간절하게 물었다.그 목소리에 나는 마음이 찔리듯 아팠다. 오랜만에 그의 입에서 지원이라는 내 이름이 들려왔다.그때 검사실 문이 열리면서 진소영이 나왔고 나는 휴대폰을 그녀에게 건넸다.“널 찾아.”진소영은 잠시 멈칫하다가 전화를 받아 귀에 대고 말했고 나는 조금 떨어져서 그녀의 말을 들었다.“비행기 타고 오느라 너무 힘들었어. 내가 걱정돼서 언니가 날 데리고 병원에 왔어. 괜찮대. 의사님은 심장에 문제없다고 했어. 그냥 좀 쉬면 될 거라고 했어.”“알았어. 언니가 날 잘 챙겨주니까 오빠도 걱정하지 마. 오빠, 나는 언니 외에 다른 여자를 절대 안 받아들여. 오빠가 다른 여자랑 결혼하면 나한테도 이제 오빠는 없는 거야.”진소영의 말에 나는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고 숨이 안 올라와서 나는 숨을 헐떡이며 그 말을 듣고 있었다.“알았어. 오빠, 걱정하지 마. 나도 언니 잘 챙겨줄게.”마지막 말은 좀 더 크게 나왔고 나는 그 말이 나에게 들리게 하려고 일부러 크게 말한 거라는 걸 알았다.진소영은 진정우와 나를 위해 너무 신경 쓰고 있지만 사랑은 그렇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언니, 괜찮아요?”진소영이 나에게 묻자 나는 이미 감정을 추스르고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괜찮아. 너는 좀 나아졌어?”진소영은 보고서를 건네주며 말했다.“보세요. 제가 괜찮다고 했잖아요. 언니는 뭐 하러 이렇게 돈 써서 검사까지 한 거예요.”“검사 안 하고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네 오빠가 내게 뭐라고 할 것 같아서.”나는 장난스럽게 대답했다.“그럴 리 없잖아. 오빠는 언니의 목숨을 자기 목숨보다도 훨씬 소중하게 생각해요.”진소영은 언제나 진정우를 챙기려고 하는 나쁜 습관을 버리지 않았다.나는 대꾸하지 않고 그녀를 데리고 호텔로 갔다.밤이 되자 진소영은 잠이 들었지만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휴대폰을 꺼냈다. 안리영이 보낸 여러 개의 읽지 않은
“뭐? 그런 일이 있었어?”나는 진정우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전혀 들은 적이 없었다.사실 우리가 함께한 이 몇 달 동안 진소영을 제외하고는 그가 가족이나 과거에 관해 이야기하는 걸 거의 본 적이 없다.처음엔 그가 가족이 형편이 안 좋아서 자존심이 상할까 봐 아예 물어보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아마 그는 자신의 진짜 정체를 숨기기 위해 말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했다.그 생각에 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어떻게 된 거야? 유괴라도 당했어?”나는 농담처럼 물었다.“유괴보다 더 끔찍했어요. 그냥 납치된 거 같은데... 부모님은 그 얘기를 절대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진소영이 그때의 일을 말하며 고개를 저었고 나는 그 말을 듣고 또 한 번 놀랐다.“납치? 그때라면 너희 오빠도 이제 꽤 컸잖아. 어떻게 납치가 되지?”“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때 부모님이 저 몰래 이런 얘기 하셔서 저도 몰랐어요. 나중에 오빠가 돌아왔고 부모님은 오빠를 군대에 보냈어요.”진소영은 머리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언니, 오빠가 군대 간다고 할 때 나는 정말 너무 슬퍼서 펑펑 울었어요.”나는 진정우가 군대에 갔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그 당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건 몰랐다.아마도 그의 부모님은 그를 강하게 키우고 싶었을 것이고 앞으로 어떤 위험에 처하더라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말이다.“언니, 오빠가 그런 얘기 한 적 없었어요?”진소영이 갑자기 묻자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아니, 그런 얘기는 없었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모든 걸 공유하고 싶은 법인데 말이야. 그렇지 않겠어?”진소영은 소지훈을 좋아해서 그 마음을 잘 이해할 것이다.그녀는 반박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말했다.“오빠는 정말 너무 말이 없어요. 집에 있을 때도 한 해 내내 말 몇 마디 안 했어요.”진소영의 말은 다소 억지스러워서 나는 그냥 웃어넘겼다.진소영은 이미 비행기표를 샀고 이유가 무엇이든 나는 할 말이 없었고 그녀를 배려해서 기내에서 자리를 바꿔주기도 했다.그녀는 비행기에서
“언니, 사실 저도 스누커를 좋아해요. 이상한 일이긴 한데 전에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유도 모르겠지만 그게 너무 좋아요. 그리고... 수술 후에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 맛이나 생각들이 예전과 달라졌어요.”“언니, 이건 내 심장의 주인 때문이 아닐까요? 제가 책에서 본 적이 있어요. 장기 이식을 하면 원래 주인의 습관이나 취향을 물려받는다고요.”진소영은 애절하게 나를 바라보며 답을 기다렸다.사실 나도 TV에서 이런 걸 본 적은 있지만 의학적으로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하지만 실제로 경험한 사람들은 많다고 했다.간 이식만 해도 이전에 매운 걸 못 먹던 사람이 간 이식 후에는 매운 음식을 좋아하게 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그럴 수도 있겠네.”나는 그녀의 가슴을 쳐다보았고 그곳에서 다른 사람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어라. 얘기가 왜 이렇게 흘러갔지? 제가 아닌 오빠 이야기하고 있었잖아요. 언니, 저는 확실히 말할 수 있어. 오빠는 겉으로는 차갑게 보이지만 속으로는 분명히 언니를 몰래 걱정하고 있을 거예요.”진소영은 단호하게 말하자 난 방금 본 뉴스가 떠올랐다. 병원에 실려 간 브라운이 생각났고 누군가가 그의 항문에 스누커 공을 넣었다는 사건 말이다.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 누군가가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라면 그냥 그런 식으로 처리할 일이 아니었을 텐데...설마 날 괴롭힌 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그래서 이 일을 처리한 사람이 진정우였던 걸까?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휴대폰으로 허진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어젯밤 그 혼혈 남자 사건은 혹시 진정우가 처리한 거예요?]그러자 몇 초 만에 답이 왔다.[그렇죠. 아니면 또 누구겠어요?]메시지가 보내고 바로 삭제되었지만 나는 이미 보아버렸고 허진호는 다시 다른 메시지를 보냈다.[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지원 씨가 직접 진정우한테 물어보는 게 낫겠네요.]나는 그 메시지를 보고 웃음이 나왔고 휴대폰을 껐다.“언니랑 오빠 사이가 어떤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언니도 휴링턴에 가게 될 줄은 몰랐어요.”진소영은 예전처럼 밝게 나를 언니라고 불렀다. 마치 진정우와 관련된 인터넷 정보를 전혀 모르는 듯했지만 나는 그녀가 다 봤다는 걸 알았다. 다만 그녀는 그 사실을 모르는 척 나와 함께 지내는 것이다.그녀는 진정우의 동생이기도 하고 또 하나의 개별적인 사람이다. 내가 진정우와의 감정적인 얽힘 때문에 그녀에게 뭐라 할 수는 없다.“날 그냥 언니라고 불러. 어차피...”내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너희 오빠는 다른 사람과 결혼할 거니까.”내 말에 진소영의 웃음이 굳어졌고 그 후엔 울음이 터질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아니에요.”그녀가 고개를 저었다.“언니는 나한테 영원한 언니예요. 나는 언니만 언니라고 부를 거예요. 아무도 못 바꿔요.”비록 그녀의 말이 내 마음의 상처를 모두 치유해 주진 않았지만 그 말은 어쩐지 내 마음을 조금은 편안하게 해줬다.진소영은 내가 그녀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를 이해하고 있구나 싶었다.“언니, 오빠는 아직도 언니를 사랑해요. 제가 맹세할 수 있어요.”진소영이 갑자기 손을 들어서 맹세하는 시늉을 했다.그 모습을 보니 어젯밤 진정우 앞에서 나도 똑같은 행동을 했던 게 떠올랐다.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내렸다.“그만해. 일단 어떻게 네 오빠가 아직 나를 사랑한다고 확신하는 건지 말해봐.”“언니, 내가 전에 말했던 것 말고도 한 번은 오빠가 술에 취했을 때 난 오빠가 목이 마를까 봐 방에 가서 물을 따라줬어요. 그랬더니 오빠는 언니 인형을 안고 있었고 나를 부르며 언니 이름을 계속 불렀어요. 그때 오빠가 뭔가 말했어요. 언니가 기다리면 일이 끝나면 언니를 데려갈 거라고...”내 마음이 확 쪼여왔다.진정우가 그런 말을 했다고? 혹시 진소영이 나를 위로하려고 그런 말을 만든 걸까?“언니, 오늘 이 비행기 티켓도 오빠가 사줬어요.”진소영의 말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그럼 진정우는 내가 이 비행기를 탄다는 걸 알았다는 말이야?”“그건 잘 모르겠어요. 근데 제가 경기
사랑 때문에 나는 한 번만 비참할 수 있어. 다시는 반복하지 않을 거야.“너는 잊었나 봐. 우리는 원수지간이었지. 그래서 나는 이미 너를 다 잊었어. 너랑 무슨 일도 없을 거야. 네가 누구랑 결혼하든 나는 상관하지 않아. 방해하지도 않을 거고. 원한다면 결혼 축하 선물이라도 보낼 수 있어.”“그리고 넌 나를 신경 쓸 필요도 없어. 나는 집요하게 달라붙지 않아. 원래 그렇지 않았어. 내가 한번 놓아버리면 죽어도 돌아가지 않아. 너랑 나는 몇 달밖에 안 됐잖아. 난 10년이나 함께한 강유형과도 금방 끝낼 수 있는 사람이야.”"그리고 너의 아버지는 내 부모님을 죽인 범인이야. 그 복수는 너한테 묻지 않겠다고 해도 원한은 사라진 게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너랑 다시 사랑할 수 있겠어? 그럴 수 없지. 그러면 나는 매일 밤 악몽을 꾸고 부모님도 날 용서해 주지 않을 거야. 그리고 용씨 가문도 내 원수야. 내가 지금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이 일을 잊은 게 아니라 그냥... 그냥...”나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할 말은 이미 다 했으니까.이렇게 한 번에 다 말하고 나니 나는 목이 꽉 막혔다. 그래도 내 마음속에서는 계속해서 말이 나올 것만 같았다.“우리 사이에 이렇게 많은 원한이 있는데 어떻게 내가 너를 다시 사랑할 수 있겠어? 그러니까 내가 네 결혼식에 방해받을까 봐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내가 복수하려면 다른 방법으로 할 거야. 너의 사랑과 결혼을 깨뜨릴 생각은 없어. 반면에 나는 정말 널 축복해 주고 싶어. 너의 행복을 기원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진심이야. 안 믿겠다면 하늘에 맹세할 수 있어."나는 손을 들어 그에게 웃으면서 말했고 그 순간 눈물이 주르르 흐르고 있었다.그리고 드디어 진정우의 눈 속에서 아픔과 함께 그가 긴장한 듯한 표정을 볼 수 있었다.내 말에 반응한 걸까? 혹시 내가 진정우를 마음 아프게 한 걸까? 아니면 진정우가 아직 나에게 감정이 남아 있는 걸까?그렇지만 이런 생
밤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길게 늘어진 가로등 불빛 아래 진정우의 모습은 더욱 커져 보였고 나와 함께 있을 때보다 키가 더 커진 것 같았다.그가 내 곁에 서자 내 그림자는 그의 그림자 속에 묻혀 마치 우리가 하나처럼 느껴졌다.그 순간, 내 마음은 다시 씁쓸하고 아려왔다.마음이 아프고 숨 쉬는 것도 힘들 정도로 괴로워졌다.그 고통 속에서 그는 높은 곳에 올라서서 용씨 가문과의 결혼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 생각에 내 마음은 더 아파왔다. 결국 나는 고통을 견디며 입을 열었다.“진정우, 나를 불러서 뭐 하려고 그러는 거야?”진정우는 나를 보지 않고 그저 밤하늘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너... 신지태 경기를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다음 주에 경기가 있어. 가고 싶으면 내가 항공권 사줄게.”내 마음이 꽉 조여들었다. 경기를 보라는 게 아니라 그냥 나를 떠나라고 하는 것이었다.이제 결혼을 앞두고 있으니 내가 여기 있으면 그 좋은 기회를 방해할까 봐 두려운 거겠지?그와 헤어진 이후 나는 그가 날 상처 입히는 방식이 점점 더 잔인해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나는 입술을 꽉 물었다.“누가 가고 싶다고 했어?”내가 이 말을 할 때 나의 목소리는 마치 기가 빠진 공처럼 약해졌다. 화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눈물이 터질 것 같았지만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가 내 앞에서 내게 흘린 눈물을 본다면 그건 내가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자존심마저 잃어버리는 거니까.예전에는 내가 그를 붙잡기 위해서 울었고 그랬을 때 그는 오해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가 나보고 경기 보러 가라는 건 다른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서 나보고 자리를 비워달라는 뜻이었다.그는 이제 내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사람이었기에 지금 이 상황에 내가 울면 그저 내 가치를 떨어뜨릴 뿐이다.“네가 가면 신지태가 반가워할 거야.”진정우는 비꼬듯 말하는 것 같았다. 예전 같으면 나는 진정우가 질투하는 걸로 생각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그 말이 그냥 차가운 조롱처럼 들렸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