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데 무슨 말을 꼭 밖에서 해?”아줌마가 잔소리를 늘어놓자 삼촌이 눈치를 줬다.“엄마, 아까 만두 빚어야 한다면서요. 제가 도와드릴게요.”그동안 말없이 있던 강진혁이 어머니를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이끌었다.나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강유형을 따라 밖으로 나갔고 그는 문 앞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솔직히 말하면 집 안에서도 충분히 조용히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이 많은데 굳이 비를 맞으며 밖으로 나갈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 같아 나는 따지지 않았다.“춥지 않아? 옷 가져올까?”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헤어진 후로 그는 예전보다 훨씬 다정해진 것 같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괜찮아.”나는 그의 손에서 우산을 받아 들고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그는 묵묵히 내 곁을 지키며 말했다.“우리 마지막으로 이렇게 비 속에서 걸었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1년 전이었다. 그때 며칠간 폭우가 계속 내려 도시 곳곳이 침수되고 차로 이동이 불가능했다.내가 걸어서 집에 가자고 내가 제안했을 때, 그는 헬리콥터를 부르겠다고 했다.“너는 헬리콥터를 타고 갈 수 있겠지만, 직원들은? 회사 대표가 혼자만 빠져나간다면 직원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어?”내가 그렇게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결국 그는 헬리콥터를 부르지 않고 직원들과 함께 우산을 쓰고 걸어갔다.처음에는 서로 바짓단을 젖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걷다가, 결국 물에 젖고 말았다.그때 나는 일부러 물웅덩이를 세게 밟아 그에게 물을 튀겼고 그도 화가 나서 나에게 물을 튀기며 맞받아쳤다.그렇게 물싸움을 하다 보니 화가 풀리고 웃음이 터졌다. 침수 지역을 벗어났을 때 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더 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즐거운 시간이었다.지금 그가 그때 일을 다시 꺼내는 이유를 나는 알 것 같지만 과거의 아름다웠던 기억은 그저 지나간 추억일 뿐이었다.그의 의도를 알면서도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기억 안 나.”그는 씁쓸한
나는 강유형이 빗속에서 걷는 모습을 보며 물었다.“그럼 진정우는?”강유형은 우산을 살짝 들고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몰라, 아무도 몰라.”그는 내 눈을 바라보며 덧붙였다.“내가 뭘 알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래서 나한테 물어보려고?”내 날카로운 시선에 강유형은 잠시 멈칫하고는 말했다.“너도 모르겠지.”그는 다시 앞을 보며 걸음을 재촉했다.“진정우가 일부러 숨기고 있는 거야. 그런데 내가 들은 얘기가 있어.”“무슨 얘기?”“Q 클럽에서 그들의 보스가 뭔가에 연루됐다는 소문이 돌아. 그런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아.”강유형은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나에게 전했고 나는 그 의도가 대충 짐작이 갔다.“진정우가 한 일이라 생각해?”강유형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그럴 수도 있지만 또 아닐 수도 있어. Q 클럽은 휴링턴에서 꽤 큰 영향력을 가진 조직이니까, 그들의 보스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야.”나는 강유형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알았다. 아마 그가 Q 클럽의 보스를 만나려 했으나, 결국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진정우가 어떻게 신지태를 도왔는지는 나도 몰라. 사실... 그는 내게 그 기회조차 주지 않았어“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한숨을 쉬었다. 그 순간 바람이 불며 빗방울 하나가 내 얼굴을 스쳤다. 그 차가운 느낌은 마치 진정우에게 밀려났을 때 흘렸던 눈물 같았다.“진정우는 네 설명도 듣지 않았어?”강유형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들었지, 하지만 나를 용서하지 않았어. 그는 내가 다른 남자를 위해 목숨 바치는 행동을 하는 걸 원치 않았다고 했어.”나는 우산을 높이 들고 강유형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사실, 진정우는 오해한 거야. 나는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똑같이 수혈했을 거야. 단지 그 사람이 네가 되었고 과거 우리는 또 연인이었으니 진정우가 오해할 수 있는 것도 당연해. 그건... 마치...”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마치 네가 나와 함께 있을 때 조나연과의 행동이 오해하
전화를 건 사람은 바로 신정훈 형사였다. 우리는 전에 이미 약속했었고 지금 날짜를 잡으려고 전화한 것 같다.한때는 부모님의 사고 진실을 알기 위해 신정훈을 빨리 만나고 싶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런 마음이 점점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마치 고향에 가까워질수록 낯설게 느껴지는 그런 기분이었다.강유형은 눈치 빠르게 옆으로 한 발짝 물러섰고 나도 조금 더 거리를 두고서야 전화를 받았다.“신정훈 형사님.”“지원 씨, 지금 시간 되세요?”점점 더 거세지는 비를 보며 이런 악천후에도 만나자는 건 분명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쉬고 나서 대답했다.“네, 주소 알려 주세요.”내가 아줌마가 만든 만두를 않자 아줌마는 서운한 듯한 표정을 지었고 그 모습에 나도 마음이 아팠다.“다음에 시간 나면 또 와. 아줌마가 또 만두 만들어줄게.” 아줌마는 나갈 때 계속 그렇게 말했다.“네, 다음에 다시 올게요.”빗속을 뚫고 나는 차를 몰고 나왔다. 삼촌은 왜 이렇게 급하게 가야 하냐고 물었지만 나는 중요한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만 대답했다.신정훈이 약속한 장소는 부모님의 산소였다. 순간 예전 산소에 놓인 꽃들을 떠올리니, 대체 누가 보냈을지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그는 부모님의 묘비 앞에서 검은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신정훈 쪽으로 걸어갈수록 내 마음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나는 그의 옆에 다가갔지만 우산에 가져져 나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신정훈 형사님, 맞으시죠?”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그의 우산이 살짝 흔들리며 얼굴을 드러냈다. 순간, 나는 그가 맞다는 걸 확신했다.“안녕하세요, 지원 씨.” 그는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 순간, 신정훈 형사가 부모님의 사망 신고를 접수했던 장면이 떠올랐고 왜 그때 내 연락처를 물어본 건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형사님, 여길 자주 찾아오셨죠?” 나는 부모님 산소 앞에 놓인 꽃들을 바라보며 물었다.“몇 번 왔었죠.” 그의 목소리는 매우 무겁고 차분했다.그는 아무리 봐도 친근하기보다는 조금은 다가가기
“고인은 이제 떠났으니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깁시다.”신정훈의 말을 듣고 나는 더 불안해졌다. 부모님의 사고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죽은 사람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을 원망하지 말고 소중히 여기라고 나를 타이르는 것 같았다.“형사님, 그건 저도 알죠. 그리고 이 며칠 동안 많은 생각을 했어요.” 나는 내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그가 내 말을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저 결과를 알고 싶어서 말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노트북에서 계약서를 발견한 후로 수많은 추측과 고민을 했고 많은 일들을 이제는 이해하게 됐다.내가 신정훈을 만난 이후, 그는 주기적으로 나에게 정보를 주었지만 결코 답을 주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된 것 같다.신정훈이 말을 마친 뒤, 또 다른 손을 주머니에 넣더니 한 장의 봉투를 꺼냈다.하지만 그는 바로 그 봉투를 나에게 주지 않고 대신 이렇게 말했다.“진정우라는 사람을 알고 있죠?”나는 진정우가 아버지의 죽음을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진정우도 형사님을 찾아왔었나요?”“네, 같은 일로요.”신정훈의 말에 나는 숨이 가빠졌다.“그럼... 진정우도 알게 된 건가요?”신정훈이 고개를 살짝 젓자 나는 더 불안해졌고 그가 들고 있던 봉투를 보며 물었다. “형사님, 진정우에게도 이걸 주실 생각인가요?”내 말이 끝나자마자,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우산을 든 진정우가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내 심장은 마치 거센 폭풍에 휘말린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이 답답한 기분은 진정우와의 과거 때문이기도 하고 그와 함께 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부담 때문이었다.그 죽음이 단순한 사고였을지, 아니면 더 복잡한 이유가 있을지…진정우는 결국 계단을 두 단계 올라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우산 너머로 내게 향했지만 곧 신정훈에게로 돌아갔다.“안녕하세요.”신정훈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정우는 그 후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묘비 앞에
“진정우!”나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움켜잡았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고 내 눈과 입술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내 마음을 알아챈 듯싶었다. 내가 목이 너무 아파서 말도 제대로 못 할 때, 그가 낮고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린 답을 알아야 해.”조금이라도 늦으면 내가 그를 막을까 봐 말을 마치자 그는 빠르고 단호하게 내 손을 밀어내고 봉투를 받아서 열었다.노란 종이 위에 몇 줄의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고 나는 그 글을 보지 않았다.진정우는 한 줄씩 주의 깊게 읽었다. 글을 다 읽은 후, 그는 마치 뭔가 확인하려는 듯한 눈빛으로 신정훈을 바라보았다.“이 보고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 당시 서명하기 전 세 공장에 가서 검증을 받았고 그 결과도 이 봉투 안에 들어 있어요.” 신정훈의 말을 듣고 진정우는 다시 봉투를 열었다. 종이는 모두 누렇게 변색하였고 서명과 도장이 찍혀 있었다.그러니 이 보고서는 근거가 있는 거였다. 진정우는 잠시 손을 내리고 그 후 나를 바라보며 손에 든 몇 장의 종이를 나에게 건넸다.사실 나는 이미 대답을 알았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건네받았고 그때 신정훈이 나에게 말했다.“지원 씨, 한번 확인해 보세요.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도 돼요.”나는 사령관을 바라보았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격려의 눈빛 속에서 나는 종이를 펼쳤다.[2013년 6월 10일, 해청로 교통사고.기술적인 감정 결과, 사고 원인은 브레이크 시스템 고장으로 확인되었으며 브레이크 시스템은 고의로 파손된 것으로 밝혀졌다.차량이 사고를 일으킨 경로를 조사한 결과, 차량은 운전자인 진성국만이 운전했으며 다른 사람은 개입하지 않았다. 따라서 진성국의 혐의가 가장 크나 고의로 브레이크 시스템을 파손했는지에 대한 판단은 불완전하다.]결론을 내리지 못한다는 사실이 참 어이가 없었다.“그래서 그때는 이 내용을 사건 기록에 남기지 않았어. 고인은 이미 떠났으나 자식으로서
“내가 아버지의 몫까지 너에게 다 보상해 줄게.”그 말에 내 마음이 마치 무엇에 찔린 것처럼 아팠고 나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네가 이렇게 말하는 거 보면 결국 그 결론을 인정한 거지? 네가 계속 조사한다고 했잖아. 결국 너는 네 아버지가 브레이크를 조작해서 내 부모님을 죽게 했다는 거야?”사실 우리는 이미 이런 추측을 했었다. 그가 결과를 알려주겠다고 했을 때, 나는 그가 결국 진실을 알게 될 거라고 믿었다.하지만 지금 진정우가 형사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이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혼란스러웠다.그게 무슨 의미일까? 대충 넘어가려는 건지, 아니면 자기 아버지의 잘못을 핑계로 내가 자기를 원망하며 멀리하게 하려는 의도인지?진정우는 내 눈을 보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더 이상 나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가슴이 아파졌다.“너 이미 이 결과를 알고 있었지? 그래서 휴링턴 일이랑 엮어서 나랑 헤어진 거야?”“아니.”그는 바닥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의 일은 계속 조사할 거야. 진전이 있으면 너에게 알려줄게. 하지만 지금 이 보고서는 내용대로 보면 우리 아버지는 주요 용의자야.”그의 말을 듣고 나는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그럼, 만약 휴링턴 일이 없었더라면 지금 이 결론을 보고 넌 어떻게 했을 거야? 나랑 헤어졌을까?”진정우가 나를 바라봤고 그의 눈동자 속에는 어두운 빛이 떠올랐다.“모르겠어, 아마 헤어졌을 거야...”“‘아마’ 헤어졌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네가 살인자의 아들과 함께 있는 걸 원하지 않아. 네가 마음속으로 부모님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될까 봐서 걱정이야.” 진정우가 목을 움켜잡듯 말했다. “지원아, 아마 우리는 처음부터 함께할 운명이 아니었나 봐.”운명이란 말이 너무 아프게 들렸다.“진정우, 네가 나랑 헤어지려고 하는 이유는 알겠어. 이제 나를 핑계로 이유를 대지 않아도 돼.” 나는 그를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나는 이번에 눈물도 나지 않았다. 이미 흘려야 할 눈물은 다 흘린 것 같았고 그 이유는 내 마음에 있는 깊은 상처 때문이었다.나는 이제 진정우와 갈라서야 한다는 사실을 차분히 받아들이기로 했다.내가 돌아가는 도중에 비는 점점 더 거세졌다. 마치 장마가 시작된 것처럼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나는 잠시 방심했는지 아니면 비로 인한 도로 상태가 미끄러워서였는지 브레이크를 제대로 밟지 못하고 앞차를 들이받았다.비가 너무 많이 와서 차에서 내릴 수도 없었고 결국 우리는 차 안에서 경찰에 신고하기로 했다.경찰과 보험회사가 도착했을 때 비는 조금 줄어들었고 우리는 차에서 내려 서로를 마주했다. 그 순간 우리는 모두가 깜짝 놀랐다.“진작에 사고를 낸 사람이 지원 씨라는 걸 알았으면 경찰 안 불렀죠.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말이죠.”함소은이 짖궂게 웃으며 말하자 옆에 있던 20대 초반의 경찰은 얼굴에 미소를 숨기며 입술을 씰룩였다.“혹시 두 분 아는 사이세요? 이거 사적으로 처리할 건지 아니면 공식 처리할 건지 스스로 결정하세요.”경찰과 보험회사가 물었다.“공식 처리요.”“사적으로 처리할게요.”우리는 동시에 대답했다.경찰은 우리를 한 번 쳐다본 후 말했다.“일단 둘이 먼저 합의해 보세요. 아니면 제가 사고 처리해야 해요.”“공식 처리할 거예요. 보험도 있으니까요.”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그런데 공식 처리하면 차도 끌고 가야 하고 그럼 불편할 거예요. 이런 작은 사고로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요?”함소은이 그렇게 말하자 나도 그녀가 한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비가 계속 내리고 있는데 차 없이 나가는 것도 불편할 테니까.하지만 함소은은 차가 없을 일은 없을 거고 단지 귀찮아서 사적으로 처리하고 싶은 것이다.그래도 나는 공식 처리로 밀어붙였고 경찰과 보험회사에 현장에서 사고를 조사해 주기를 요청했다.그때, 갑자기 용은서가 나를 부르며 달려왔다.“언니, 언니!”나는 은서의 그 귀여운 얼굴을 보고 미소를
‘작은 녀석이 참 잘도 사람을 다루네.’나는 용은서를 안고 함소은이 부른 차에 올라탔다.가는 길에 나는 용은서에게 선물을 하나 예약했다. 비록 그녀는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지만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함소은 모녀는 해동 최고의 개인 주택단지에 살고 있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온 집안이 풍선과 장식들로 가득했다.“이건 모두 진표 씨가 준비한 거예요.”함소은이 내게 슬리퍼를 건네며 설명했다.집 안 가득한 화려한 장식과 격식에 나는 무심코 말했다.“진표 씨가 정말 은서를 아끼네요.”“당연하죠. 하지만 은서가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예요. 게다가...”함소은이 용은서를 슬쩍 바라보며 내게 속삭였다.“이젠 은서도 자라서 진표 씨랑 함께 나가면 사람들이 진표 씨를 할아버지라고 불러요. 은서도 그게 좀 껄끄러운 거죠.”용진표가 할아버지 나이까지 됐으니 오해를 살 만도 했다. 하지만 이게 과연 누구 잘못일까? 만약 용진표가 그런 나이가 아니었다면 상황도 달라졌을 텐데 말이다.용은서는 내 손을 잡고 기쁜 얼굴로 나를 어린이 방으로 데려가면서 또 함께 놀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와 놀아주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만 더 버티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미 기운이 빠진 걸 느꼈다.그때 내가 주문한 선물이 도착했다.“은서야, 언니가 네 선물 가져왔어. 네가 마음에 들어 하면 좋겠네.”이 기회를 빌려 잠깐 쉬고 있는데 그제야 함소은이 떠올랐다. 집에 들어오고서부터 그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집사가 커피와 과일을 가져다주면서 나는 무심코 물었다.“함소은 씨는 어디 계세요?”집사는 잠시 위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아마... 위층에 계신 것 같아요.”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은서와 함께 선물을 풀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갑자기 위층에서 함소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카롭게 누구랑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아까 왠지 집사가 이상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아꼈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네.’
“알았어요.”나는 짧게 하고 대답한 뒤,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도 묻지 않고 바로 회의실로 향했다.“잠깐만요.” 허진호가 나를 불러 세웠다. “어제 그 남자 모델, 진짜로 정우 씨 아니에요.”“알아요.” 나는 커피잔을 들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내가 직접 그를 땅에 묻었으니까.”허진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를 그냥 두겠다는 듯 다시 물러섰다. 나는 회의실 문을 열었고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강유형은 마치 내 감정을 읽으려는 듯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하지만 오늘의 나는 요즘 중에서 가장 좋은 상태였다. 게다가 화장까지 하고 나왔으니 거울 속 내 모습이 꽤 근사해 보이기까지 했다.무엇보다도, 밤새 아팠던 다리도 거짓말처럼 나아 이제 걷는 것도 전혀 문제없었다.“좀 늦었네?” 강유형이 나를 훑어보더니 가벼운 농담처럼 말했다.“응, 근데 우리 대표님이 워낙 너그럽거든. 지각했다고 월급 깎지 않더라.”내 말에 강유형의 얼굴이 잠깐 굳어졌다.예전에 내가 KS그룹에 다닐 때, 지각이나 조퇴를 하면 누구든 벌금을 내야 했다. 나는 대표님의 약혼녀라는 타이틀이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예외는 없었다.“어제 너한테 계속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 집까지 갔더니 불도 꺼져 있길래 걱정됐어.”강유형은 거침없이 걱정스러웠던 마음을 내비쳤다.나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집에 가서 바로 잤어.”“그렇게 쉽게 잘 수 있었어?”“못 잘 이유라도 있어?” 나는 그가 나를 찾아온 이유가 배성재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 사람, 진정우 아니야. 내가 직접 조사해 봤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뭔가를 하더니 바로 그때, 내 주머니 속 핸드폰이 가볍게 진동했다.“밤새 사람 시켜서 조사했어. 관련 자료 다 보냈으니까 확인해 봐.”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윤지원, 진정우는 이미 죽었어. 네가 직접 봤잖아.”나는 손에 쥔 커피잔을 가만히 돌리며 대답했다.“나도 알아. 그 사람이 죽었다는 거.
나는 강유형이 정말 용준호를 한 대 칠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난처한 사람은 나였다.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어 나는 휠체어도 버리고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진짜 하나같이...” 안리영이 주변 사람들을 싸잡아 욕하면서 내 쪽으로 다가와 조용히 내 팔을 잡아 부축했다.그녀는 나를 데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까지 가서야 멈춰 섰다. “지원아, 아까 그 사람 목에 정말 점이 없었어? 혹시 일부러 없앤 거 아닐까? 흉터 같은 건 안 만져졌어?”그녀가 이렇게까지 묻는 건 여전히 배성재가 진정우일지도 모른다는 미련을 떨치지 못해서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도 처음에는 믿을 수 없어 그의 목을 여러 번 확인했다. 혹시나 해서 손끝으로 몇 번이나 훑어봤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내 반응을 본 안리영은 헷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나를 의자에 앉히며 다시 물었다. “그럼 넌 어떻게 생각해? 그 사람이 정말 진정우 같아?”때때로 느낌이란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정확한 법이다. 처음에는 분명 신분을 바꾼 채 나를 일부러 외면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방금 전,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그의 냉정한 태도와 차갑기 그지없는 눈빛을 보면서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진정우는 나를 사랑했다. 그는 나를 위해 직접 방울 팔찌를 만들었고 반지를 주문해 줬다. 나는 아직도 그걸 손에 끼고 있었고 만약 정말 진정우였다면 못 봤을 리가 없고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밀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지원아, 그냥 그 사람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안리영은 더 이상 나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은 듯 조심스럽게 말했다.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안리영이 한숨을 쉬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DNA 검사를 하면 확실해질 거야. 그 사람, 분명 진씨 가문 사람이잖아? 진정우의 여동생이나, 아니면 진씨 가문 사람 중 누구랑 비교해 보면 되잖아.”“하지만 진영이랑은 친남매가 아니야.”그
“그건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아니면 제대로 못 봐서 가까이서 다시 한번 봐야겠어?”용준호가 말하며 손짓을 하자, 배성재는 조금 더 다가갔다. 그가 강진혁과 강유형 앞에 거의 얼굴을 맞댈 정도로 가까이 서자, 이제 그들은 그의 모공까지도 볼 수 있었다.물론 나도 그 장면을 똑똑히 봤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무조건 진정우가 맞다고 확신했다.“용준호, 정말 대단해. 이런 사람을 어디서 구해왔어?” 강유형이 낮게 비웃었다. 그러자 용준호는 차분하게 미소 지었다. “운명 같은 거지.”그리고 나를 보며 물었다. “그렇죠, 지원아?”나는 진정우가 맞는지 확인하려고 뚫어지게 배성재를 바라보았다.“성재야, 지원 씨가 네가 좋다며 너를 데려가고 싶대. 괜찮겠어?” 용준호가 조금 귀찮은 듯 말하며 본격적으로 질문을 던졌다.“도련님, 제 원칙 알잖아요. 저는 몸을 팔지 않아요.” 배성재는 자신의 입장을 확실히 했다. 그 말에 강진혁과 강유형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용준호가 나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봐봐. 내가 말했지? 절대 동의 안 한다고.”“다른 일 없으면 전 돌아갈게요.” 배성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려 했다. 그때 내 어깨가 살짝 무거워지더니 안리영이 내 팔을 짚으며 손끝으로 내게 신호를 보냈다.“잠깐만요.” 나는 배성재를 불렀고 일어나서 두 걸음 걸어 그에게 다가갔다. 나는 팔로 그의 목을 감싸며 발끝을 들고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윤지원, 너 뭐 하는 거야?” 강진혁이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외쳤고 안리영도 얼른 덧붙였다. “지원이가 지금 사람을 홀리고 있어요.”그 틈에 나는 손을 배성재의 목덜미에 가져갔지만 그곳은 부드럽고 매끄러워, 아무것도 없었다.나는 실망감에 빠져서 다시 한번 그곳을 더듬어 보았다. 뒷머리까지 만져보았지만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진정우에게 있던 그 점, 손끝으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분명했던 그 자국은 여기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그가 진정우가 아님을 깨달았다.팔을 풀고 물러
“네가 끝났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지. 강유형은 널 잊지 못한 것 같은데. 너밖에 신경 안 쓰이는 것 같아.” 안리영이 시원하게 한마디 했다.조시언이 자리에 앉으면서 드디어 조명이 켜지고 공연이 시작됐다. 50분이 넘는 공연 동안 조명이 하나도 반복되지 않았고 특히 마지막에 나온 남성 모델들의 몸을 이용한 조명 쇼는 관객들에게 우리 회사의 창의력과 연구 개발 능력을 제대로 보여줬다.쇼가 끝날 때, 우리 회사 로고가 크게 빛을 내며 등장했고 관객들은 뜨겁게 박수를 보냈다.“정말 창의적이고 신선하네요, 특히 마지막 조명 쇼가 인상 깊었어요.” 고객인 조시언은 매우 높이 평가했다.“이건 저희 마케팅 부서 윤지원 부장님의 기획이에요.” 허진호는 나에게 공을 돌리며 칭찬했다.모두가 나를 향해 박수를 쳤고 용준호는 농담처럼 한마디 했다. “윤지원 부장님의 기획도 좋지만 우리 남자 모델들도 중요한 역할을 했죠.”“맞아요, 그래서 준호 씨의 지원에 감사해요.” 나는 고마움을 표현했다.“윤지원 부장님을 돕게 되어 영광이죠.” 용준호는 그렇게 말하며 강진혁과 강유형을 쳐다봤다.“두 분, 맞죠?”용준호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사건을 키우는 걸 좋아했다. 나는 그가 강진혁과 강유형을 자극하려는 의도임을 잘 알았다.그들이 지금 이 순간에 이 사람과 협력한 걸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느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지금은 그저 배성재가 진정우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배성재는 용준호 사람이라, 용준호를 빼고는 그를 빼낼 방법이 없었다.“준호 씨, 그 배성재 모델 제가 데리고 있어도 될까요?”용준호가 웃으며 말했다. “마음에 들어?”“네!”나는 당당하게 대답했지만 내 한마디에 강유형과 강진혁의 표정은 확실히 어두워졌다.용준호는 그들을 보고 잠시 웃더니 다시 말했다. “안돼. 우리 클럽의 남자 모델들은 모두 규칙을 지키며 일요. 고객을 위한 서비스는 제공하지만 그 이상의 서비스는 제공하지 않아.”
“안리영, 너 왜 이렇게 네 삼촌을 무서워해? 혹시 그 사람한테 뭔가 잘못한 거 있냐?”내가 휠체어를 타고 천천히 가는 동안 참지 못하고 물어봤다.안리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다시 물었다.“정말 뭐가 있긴 한 거지?”“우리 그 얘기 그만하자.”안리영의 말을 듣자 나는 뭔가 비밀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나는 손으로 안리영을 톡톡 쳤다.“내가 한번 맞춰볼까? 혹시 네가 그 사람 잘생긴 얼굴에 홀려서 뭔가 더 과한 짓을 한 거 아니야?”“무슨 말이야, 내 삼촌이라고.” 안리영이 내 머리를 가볍게 쳤다.“그럼 왜 그를 보면 그렇게 떨고 겁을 먹고 있어?”나는 정말 궁금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하의 안리영이 이렇게 떨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별거 아니야, 그냥 내가 한 번 우연히 삼촌이 샤워하는 걸 봤거든.” 안리영의 말에 나는 놀라서 멈췄다.“뭐라고? 어디서 봤어? 다 봤어?”안리영이 눈을 감았다. “그만 말해.”“왜?”그 말에 안리영은 한숨을 내쉬고 결국 솔직히 말했다.“욕실에서... 다 봤어.”“뭐야! 대박!”나는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혹시 술 취해서 실수로 들어간 거 아니야?”“아니야.” 안리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날 내가 외할머니 집에 갔었고 그 집엔 아무도 없었어. 나는 땀을 흘려서 씻고 싶어서 위층에 올라갔고 그 방에 들어갔어. 그리고 욕실로 가서...”그 뒤 이야기는 말하지 않아도 나는 다 짐작이 갔다.“그 욕실에서 물소리 안 들렸어?”안리영이 한숨을 쉬었다. “그때 내가 이어폰 끼고 음악 듣고 있었어. 옷을 벗고 욕실에 들어갔지.”“잠깐만!” 내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너 옷 벗고 욕실에 들어갔다고? 그러면... 너도 그 사람처럼 전부 다 보여준 거네?”안리영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하하.” 나는 웃음을 터뜨렸고 화가 난 안리영은 내 머리를 쳤다. “그럼 너도 이제 신경 쓸 필요 없겠네, 다 봤으니 서로 부끄러울 것도 없잖아?”“나야말로 부
안리영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왜 이렇게 소심해. 손 한 번 만지는 것도 안 되나요?”배성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예의 바르게 말했다.“죄송합니다. 저는 몸은 팔지 않아요. 부담스럽네요.”그렇게 똑 부러지면서도 예의 바른 남자를 마주하자 안리영은 더 이상 그 선을 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손을 빼며 다시 질문을 이어갔다. “올해 몇 살이에요?”“스물아홉입니다.”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얼굴을 잠시 올려다보며 물었다.“키는요?”“183.7cm예요.”안리영은 또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대학교는 다녔나요?”“네, 청수대 인공지능 전공입니다.”“음, 요즘 그 전공 많이 인기 있죠.” 그 말은, 이렇게 좋은 전공을 하고도 남자 모델을 한다는 게 아깝다는 뜻이었다.“이건 제 알바예요.”배성재가 덧붙였다.안리영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요즘 사람들은 이렇게 바쁘게 살고 있나? 제대로 된 본업도 있으면서 왜 알바를 할까?’그와 같은 열정적인 사람과 비교하니 나는 내 자신이 정말 게으른 사람 같았다.“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이네요.”안리영이 감탄하며 말했다. 배성재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고 나는 이제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해 안리영에게 말했다.“가자, 공연 곧 시작해.”안리영은 배성재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부모님이 아이를 잃어본 적 있어요?”“저는 외동이에요.”안리영은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부모님 유전자 정말 좋네요.”그녀는 나를 밀며 조용히 속삭였다.“아까 말한 것 중에 진정우랑 겹치는 부분이 있어?”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 외에는 진정우와 일치하는 점이 전혀 없었다.“그 사람이 진정우가 아니라고 하는데 얼굴은 진짜 똑같고 목소리도 아니고 정보도 다르고... 진짜 진정우인지 모르겠어.” 안리영도 한숨을 쉬며 말했다.나는 아무 말 없이 침묵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 남자를 어떻게 더 시험해 볼지 고민하고 있었다. 진정우가 아니라고 한다면 정말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윤지원, 왜 휠체어에 앉아 있어?”강유형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리자 고개를 돌리니 그와 조시언이 다가오고 있었다.두 사람은 각각 흰색 셔츠와 검은 셔츠를 입고 흑백 조합이 시선을 사로잡았다.“오늘 정말 시끌시끌하네, 하나같이 다 왔네.”안리영이 작게 투덜거렸다. 이렇게 작은 조명 쇼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릴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안리영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조시언이 오기 싫어서였겠지만 그는 고객이었고 이번 쇼를 보러 온 사람 중 하나였다.강유형이 내 쪽으로 걸어오며 내 다리를 쳐다봤다. “어디 다친 거야?”“무릎을 살짝 긁혔어. 별일 아니야.”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강유형은 믿지 않았다. “별일 아니라는 사람은 휠체어에 앉지 않아.”“정말 괜찮아요. 강진혁 씨가 너무 걱정해서 휠체어를 가져온 거예요. 지원이도 안 타려고 했는데 결국 이렇게 된 거죠.” 안리영이 대신 설명했다. 안리영 덕분에 강유형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물론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그럴 만도 했다.안리영은 강유형의 반응을 무시하고 내게 덧붙였다. “하지만 이 휠체어는 꽤 괜찮아. 이렇게 밀고 다니면 다리가 좀 더 편하겠네. 널 세심하게 챙기고 다니는 건 확실히 강유형보다 나아.”그러자 강유형이 턱을 굳게 다물었 그 옆에서 조시언이 미소를 지으며 분위기를 풀어줬다.“너희 어디 가는 거야?”“멋진 남자들 보러 가요.”안리영이 대답했다. 그 말에 강유형은 한숨을 쉬었지만 우리는 그저 그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백스테이지에 들어서자 마자 대기 중인 남자 모델들이 보였다. 모두 이미 의상을 갈아입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눈에 봐도, 다들 비슷한 체형에 못지않게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와, 이 몸매들 정말 장난 아니네!” 안리영은 역시 중요한 포인트를 잘 찝었다.“몸매보다는 얼굴이 중요하지.” 나는 살짝 눈치를 주며 말했다.“그거야 알지만 자세히 볼 수 있으면 좋겠네.” 안리영은 발끝으로 서서 그들을 뚫어지게 쳐다봤다.그때, 무대 감
“그가 이 일을 시작한 지 2년이나 됐다고요?” 나는 놀라움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더 큰 실망감을 느꼈다.진정우가 사고를 당한 지 몇달 밖에 안 되었으니 무대 위에 서 있는 사람은 분명히 진정우가 아니다.그런데 왜 이 사람은 진정우랑 이렇게 똑같이 생긴 걸까?혹시 이 사람과 진정우의 관계는, 내가 유희연과 같은 관계처럼 비슷한 건가?나는 그 사람을 유심히 쳐다보며 머릿속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 강진혁이 내 이름을 부를 때까지 그가 왔다는 것도 몰랐다. “너, 얼굴이 안 좋다. 어디 아파?” 강진혁은 나의 상태를 바로 알아챘다.“다쳤어.” 용준호가 그 말을 대신했다.하지만 그가 말한‘다쳤다’는 내 몸의 상처뿐 아니라, 내 마음의 상처도 포함된 말이었다. 용준호가 이렇게 진정우랑 닮은 사람을 일부러 데려다 놓은 건, 분명히 나를 괴롭히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무릎을 다쳤어요.” 이번엔 허진호가 또 내 말을 대신해 주었다. 정말 고마운 두 남자 덕분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겠다.강진혁은 살짝 찡그리며 내 바지를 올리려고 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지만 강진혁의 손은 매우 빠르고 금세 내 발목을 잡았다. 그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움직이지 마, 잠깐만 볼게.”그가 내 바지를 살짝 올리자 상처가 드러났다. 강진혁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언제 다친 거야? 이렇게 심각한데 왜 말 안 했어?”그 모습이 마치 걱정스러워하면서도 나에게 화가 난, 그런 전형적인 남자 친구의 모습 같았다. 만약 내가 그가 의도가 나쁘지 않다는 걸 알지 못했다면 사실 그의 행동에 감동했을지도 모르겠다.“이미 안리영한테 확인을 받았어요. 별일 없었어요.” 나는 다리를 흔들며 말했다.그의 얼굴은 굳어졌고 다시 내 상처를 살펴본 후, 몇 초 후에야 바지를 내려놓고 일어섰다.“이렇게 다정한 모습은 지원이 앞에서만 볼 수 있네. 강진혁.” 용준호가 놀리듯 말했지만 강진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진정우였다!지난번 골목에서 봤던 그 모습과 똑같았다.그때 내가 넘어져서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보겠다고 결심하고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나 또다시 내 상처를 잊고 움직이자 그대로 넘어졌다.“어이, 이 여자 일부러 이러는 거 아니야? 날 안고 싶으면 그냥 말해.”용준호는 장난스럽게 나를 일으켜 세웠다.나는 진정우를 바라보며 소리쳤다.“불 켜!”내 말에 연습 중이던 사람들이 모두 멈췄지만 여전히 무대 뒤쪽의 불은 꺼져 있었다.“불 켜!” 내가 다시 소리쳤다. 밖에서 들어온 허진호가 내 소리에 놀라며 말했다.“뭐야? 불 켜, 빨리 켜!”허진호의 말에 모두가 움직여, 뒤쪽의 조명이 켜지자 눈이 부셔서 모두 눈을 찡그렸다.나는 무대 위의 모델들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나씩 얼굴을 살피다가, 결국 가장 중앙에 있는 얼굴에 시선이 멈췄다.그 얼굴은 내가 매일 밤 꿈에서 그리워했던 얼굴, 진정우의 얼굴이었다.그가 드디어 살아 돌아와 내 앞에 서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너무 낯설고 심지어 어쩐지 혼란스럽고 불안한 기색까지 감돌았다.그 순간,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다리의 고통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무대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너 뭐 하는 거야?” 용준호가 물었다. 허진호는 무대 위 사람을 가리키며 혼란스러워했다. “정우 씨, 정... 정우 씨가 여기 어떻게...”허진호 역시 충격을 받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나는 비틀거리며 무대 앞에 다가가 그 얼굴을 더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정말 진정우의 얼굴이 맞다고 나는 확신했다.“진정우.” 나는 그토록 많이 부른 이름을 낮게 불렀다. 하지만 무대 위의 남자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나를 부축하던 용준호가 웃으며 말했다.“지원아, 이 남자는 진정우가 아니야. 배성재야. 여기서 제일 유명한 모델이야.”용준호는 그렇게 말하며 손짓을 하자 배성재는 곧장 다가왔다. “준호 도련님.”“윤지원 씨야, 인사해.” 용준호가 말했다.배성재는 순순히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