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리영이 떠나버리면 정말로 나와 이야기할 친구 하나도 남지 않겠지.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란 결국 만나고 헤어짐의 반복이라지만 부모나 친구는 물론, 심지어 부부 사이라도 그렇다지만 안리영만은 내 곁에 남아주었으면 했다.“아니야, 난 그냥 좀 더 쉴 생각이야. 그만두라면 그만두는 그런 쉬운 사람이 아니거든.”안리영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오, 안 과장님 드디어 반항하시네? 이제 좀 단단히 한 방 먹이겠다는 거야?”“맞아. 안 그러면 다음번에 무슨 일이 터져도 제일 먼저 나를 버리려 할 거 아니야.”역시 안리영다웠다. 직장에서도, 연애에서도 그녀는 늘 현실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다.“근데 너무 세게 나가다가 망하면 어떡해?”내가 장난스럽게 묻자 안리영은 물컵을 따라 내밀며 어깨를 으쓱했다.“여기서 날 놓치면 날 데려가겠다는 병원이 줄을 설걸?”그녀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자신 있게 말했다.“나 같은 사람이 갈 데가 없을 것 같아?”그녀의 자신감은 늘 확고했다.안리영의 능력을 알기에 이 병원이 그녀를 놓친다면 그녀를 영입하려는 병원이 줄을 설 게 뻔했다. 실제로 그런 제안을 받은 적도 있었지만 그녀는 늘 거절했었다.“한 곳에서 날 외면하면 더 좋은 곳으로 가면 그만이지”라는 안리영의 말을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런데 넌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데?”안리영은은 진지하게 진정우와 나 사이의 일을 물었다. 그러자 나는 물 한 모금을 마시고 그녀의 말을 따라 웃으며 대답했다.“그 사람과는 길이 안 맞더라고. 그냥 나랑 맞는 사람을 찾아보려고. 나도 선택지가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안리영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미소를 지었다.“이게 바로 내가 아는 윤지원이지. 우리가 직장이든 남자든 거기에 기대지 않아도 돼. 그들은 단지 우리 삶에 즐거움을 더해줄 뿐이지, 없어도 우리는 여전히 빛나.”그녀의 말은 내 마음속의 무거운 짐을 조금 덜어주는 듯했다. 안리령은 내 퇴원 절차를 도왔고 우리는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그날
나는 핸드폰을 쥔 채 잠시 망설였다. 강유형이 나를 왜 찾는 걸까?안리영은 턱짓으로 받으라는 신호를 보냈다.“지원아.”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나는 여전히 차가운 태도로 대답했다. 진정우와의 관계가 끝난 지금이라 해도 강유형과 다시 잘될 가능성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나를 찾을 때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벽을 치게 되었다.“나 돌아왔어.”그는 무슨 큰일을 겪고 돌아온 사람처럼 말했다.“알아. 강진혁한테 들었어.”내 말에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덧붙였다.“우리 만날 수 있을까? 네가 나랑 단둘이 만나는 게 싫다면 우리 집에 와도 돼. 부모님이 너를 많이 보고 싶어 하셔.”순간, 공항에서 나를 맞이하던 강유형의 부모님 모습이 떠올랐고 그들이 나를 걱정했던 건 사실이었다.“할 말이 있어. 신지태와 관련된 일이기도 하고... 진정우와도 관련 있어.”그 말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 진정우와 나는 이제 아무 관계도 아닌데 그와 관련된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일까? 이런 생각이 스쳤지만 결국 나는 본능적으로 대답하고 말았다.“알았어. 이따 갈게.”“좋아. 엄마한테 말해둘게. 너 오면 만두 해준다고 계속 기다리셨거든.”그의 목소리엔 약간의 기대감이 묻어 있었다. 전화를 끊자 안리영이 한마디 했다.“전 남친 참 열심이네.”나는 그녀의 농담에 대꾸하지 않고 말했다.“진정우와 관련된 일이 있다고 했어.”“그건 그냥 미끼야. 지원아, 너랑 진정우는 이미 끝난 거잖아.”안리영은 날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그녀의 의도를 알았지만 애써 부정하며 말했다.“진정우 때문이 아니라 강유형 부모님 때문에 가는 거야. 만두도 먹으러 가는 거고.”안리영은 비웃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만두 한 끼가 아니라 강유형 집 재산의 3분의 1을 줘도 모자랄걸? 너 그 사람 목숨 살려줬잖아.”그 말에 나는 지난 일이 떠올랐다. 강유형의 부모님이 모든 걸 솔직히 설명했고 내가 그것에 의심을 품는 건 내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일 뿐이었다.“너랑
“아까 누가 문 두드렸어?”안리영이 내 기분을 살피며 화제를 돌렸다.“조나연. 지난번에 나한테 협력하자고 하더니 이번엔 얘기 좀 하자고 찾아왔어. 무시했지.”나는 커튼을 열어 밖을 바라보았더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그 애, 한 달 뒤면 아이가 퇴원할 거래. 아이 상태도 괜찮다고 하더라. 그런데 단 한 번도 병문안에 가지 않았다네.”안리영이 조나연의 아이 이야기를 꺼냈다. 나도 한 번 본 적 있는 그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그 여자는 돈밖에 몰라. 만약 강유형이 아이를 데려간다면 바로 따라붙을걸.”“근데 도대체 무슨 협력을 하자고 한 걸까?”안리영이 의아해하며 물었다.“모르겠어. 어차피 좋은 일은 아니겠지. 그런 사람은 처음부터 엮이면 안 돼. 문제만 생길 테니까.”나는 단호하게 말했다.“맞아. 그런 사람은 멀리하는 게 상책이지. 근데 그런 끈질긴 성격에 한두 번 거절했다고 포기할까?”안리영은 비웃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나는 휴대폰을 열어 아침으로 먹을 음식을 주문했다.아침 식사를 끝낸 뒤, 안리영은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강씨 집안으로 향했다.강유형과 강진혁이 모두 있었고 아줌마는 나를 보자마자 달려와 내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니? 빈혈 때문이구나. 피를 너무 많이 써서 그래.”강유형 어머니의 눈가가 빨갛게 물들었다.“지원아, 우리 집에서 지내며 몸 좀 추스르자. 기운 차릴 때까지 같이 있자.”“그건 좀...”나는 애써 웃으며 거절했다. 이제 와서 다시 그 집으로 들어가는 건 불가능했다.삼촌은 나의 난처한 표정을 눈치채고는 부드럽게 말했다.“일단 앉아서 얘기하자꾸나. 계속 서 있으면 힘들잖니.”“제가 너무 걱정만 했네.”강유형 어머니는 나를 소파로 이끌며 앉히고는 부엌으로 가서 죽을 가져왔다.“요즘 왜 이렇게 말랐어? 몸 때문이야?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어?”삼촌은 내 상태를 금방 알아챘지만 나는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몸 때문이라고 하면 그들이 미안해할 테고 진정우와의 문제라고 하면 더
“비가 오는데 무슨 말을 꼭 밖에서 해?”아줌마가 잔소리를 늘어놓자 삼촌이 눈치를 줬다.“엄마, 아까 만두 빚어야 한다면서요. 제가 도와드릴게요.”그동안 말없이 있던 강진혁이 어머니를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이끌었다.나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강유형을 따라 밖으로 나갔고 그는 문 앞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솔직히 말하면 집 안에서도 충분히 조용히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이 많은데 굳이 비를 맞으며 밖으로 나갈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 같아 나는 따지지 않았다.“춥지 않아? 옷 가져올까?”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헤어진 후로 그는 예전보다 훨씬 다정해진 것 같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괜찮아.”나는 그의 손에서 우산을 받아 들고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그는 묵묵히 내 곁을 지키며 말했다.“우리 마지막으로 이렇게 비 속에서 걸었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1년 전이었다. 그때 며칠간 폭우가 계속 내려 도시 곳곳이 침수되고 차로 이동이 불가능했다.내가 걸어서 집에 가자고 내가 제안했을 때, 그는 헬리콥터를 부르겠다고 했다.“너는 헬리콥터를 타고 갈 수 있겠지만, 직원들은? 회사 대표가 혼자만 빠져나간다면 직원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어?”내가 그렇게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결국 그는 헬리콥터를 부르지 않고 직원들과 함께 우산을 쓰고 걸어갔다.처음에는 서로 바짓단을 젖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걷다가, 결국 물에 젖고 말았다.그때 나는 일부러 물웅덩이를 세게 밟아 그에게 물을 튀겼고 그도 화가 나서 나에게 물을 튀기며 맞받아쳤다.그렇게 물싸움을 하다 보니 화가 풀리고 웃음이 터졌다. 침수 지역을 벗어났을 때 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더 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즐거운 시간이었다.지금 그가 그때 일을 다시 꺼내는 이유를 나는 알 것 같지만 과거의 아름다웠던 기억은 그저 지나간 추억일 뿐이었다.그의 의도를 알면서도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기억 안 나.”그는 씁쓸한
나는 강유형이 빗속에서 걷는 모습을 보며 물었다.“그럼 진정우는?”강유형은 우산을 살짝 들고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몰라, 아무도 몰라.”그는 내 눈을 바라보며 덧붙였다.“내가 뭘 알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래서 나한테 물어보려고?”내 날카로운 시선에 강유형은 잠시 멈칫하고는 말했다.“너도 모르겠지.”그는 다시 앞을 보며 걸음을 재촉했다.“진정우가 일부러 숨기고 있는 거야. 그런데 내가 들은 얘기가 있어.”“무슨 얘기?”“Q 클럽에서 그들의 보스가 뭔가에 연루됐다는 소문이 돌아. 그런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아.”강유형은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나에게 전했고 나는 그 의도가 대충 짐작이 갔다.“진정우가 한 일이라 생각해?”강유형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그럴 수도 있지만 또 아닐 수도 있어. Q 클럽은 휴링턴에서 꽤 큰 영향력을 가진 조직이니까, 그들의 보스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야.”나는 강유형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알았다. 아마 그가 Q 클럽의 보스를 만나려 했으나, 결국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진정우가 어떻게 신지태를 도왔는지는 나도 몰라. 사실... 그는 내게 그 기회조차 주지 않았어“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한숨을 쉬었다. 그 순간 바람이 불며 빗방울 하나가 내 얼굴을 스쳤다. 그 차가운 느낌은 마치 진정우에게 밀려났을 때 흘렸던 눈물 같았다.“진정우는 네 설명도 듣지 않았어?”강유형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들었지, 하지만 나를 용서하지 않았어. 그는 내가 다른 남자를 위해 목숨 바치는 행동을 하는 걸 원치 않았다고 했어.”나는 우산을 높이 들고 강유형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사실, 진정우는 오해한 거야. 나는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똑같이 수혈했을 거야. 단지 그 사람이 네가 되었고 과거 우리는 또 연인이었으니 진정우가 오해할 수 있는 것도 당연해. 그건... 마치...”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마치 네가 나와 함께 있을 때 조나연과의 행동이 오해하
전화를 건 사람은 바로 신정훈 형사였다. 우리는 전에 이미 약속했었고 지금 날짜를 잡으려고 전화한 것 같다.한때는 부모님의 사고 진실을 알기 위해 신정훈을 빨리 만나고 싶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런 마음이 점점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마치 고향에 가까워질수록 낯설게 느껴지는 그런 기분이었다.강유형은 눈치 빠르게 옆으로 한 발짝 물러섰고 나도 조금 더 거리를 두고서야 전화를 받았다.“신정훈 형사님.”“지원 씨, 지금 시간 되세요?”점점 더 거세지는 비를 보며 이런 악천후에도 만나자는 건 분명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쉬고 나서 대답했다.“네, 주소 알려 주세요.”내가 아줌마가 만든 만두를 않자 아줌마는 서운한 듯한 표정을 지었고 그 모습에 나도 마음이 아팠다.“다음에 시간 나면 또 와. 아줌마가 또 만두 만들어줄게.” 아줌마는 나갈 때 계속 그렇게 말했다.“네, 다음에 다시 올게요.”빗속을 뚫고 나는 차를 몰고 나왔다. 삼촌은 왜 이렇게 급하게 가야 하냐고 물었지만 나는 중요한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만 대답했다.신정훈이 약속한 장소는 부모님의 산소였다. 순간 예전 산소에 놓인 꽃들을 떠올리니, 대체 누가 보냈을지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그는 부모님의 묘비 앞에서 검은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신정훈 쪽으로 걸어갈수록 내 마음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나는 그의 옆에 다가갔지만 우산에 가져져 나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신정훈 형사님, 맞으시죠?”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그의 우산이 살짝 흔들리며 얼굴을 드러냈다. 순간, 나는 그가 맞다는 걸 확신했다.“안녕하세요, 지원 씨.” 그는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 순간, 신정훈 형사가 부모님의 사망 신고를 접수했던 장면이 떠올랐고 왜 그때 내 연락처를 물어본 건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형사님, 여길 자주 찾아오셨죠?” 나는 부모님 산소 앞에 놓인 꽃들을 바라보며 물었다.“몇 번 왔었죠.” 그의 목소리는 매우 무겁고 차분했다.그는 아무리 봐도 친근하기보다는 조금은 다가가기
“고인은 이제 떠났으니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깁시다.”신정훈의 말을 듣고 나는 더 불안해졌다. 부모님의 사고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죽은 사람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을 원망하지 말고 소중히 여기라고 나를 타이르는 것 같았다.“형사님, 그건 저도 알죠. 그리고 이 며칠 동안 많은 생각을 했어요.” 나는 내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그가 내 말을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저 결과를 알고 싶어서 말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노트북에서 계약서를 발견한 후로 수많은 추측과 고민을 했고 많은 일들을 이제는 이해하게 됐다.내가 신정훈을 만난 이후, 그는 주기적으로 나에게 정보를 주었지만 결코 답을 주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된 것 같다.신정훈이 말을 마친 뒤, 또 다른 손을 주머니에 넣더니 한 장의 봉투를 꺼냈다.하지만 그는 바로 그 봉투를 나에게 주지 않고 대신 이렇게 말했다.“진정우라는 사람을 알고 있죠?”나는 진정우가 아버지의 죽음을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진정우도 형사님을 찾아왔었나요?”“네, 같은 일로요.”신정훈의 말에 나는 숨이 가빠졌다.“그럼... 진정우도 알게 된 건가요?”신정훈이 고개를 살짝 젓자 나는 더 불안해졌고 그가 들고 있던 봉투를 보며 물었다. “형사님, 진정우에게도 이걸 주실 생각인가요?”내 말이 끝나자마자,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우산을 든 진정우가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내 심장은 마치 거센 폭풍에 휘말린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이 답답한 기분은 진정우와의 과거 때문이기도 하고 그와 함께 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부담 때문이었다.그 죽음이 단순한 사고였을지, 아니면 더 복잡한 이유가 있을지…진정우는 결국 계단을 두 단계 올라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우산 너머로 내게 향했지만 곧 신정훈에게로 돌아갔다.“안녕하세요.”신정훈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정우는 그 후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묘비 앞에
“진정우!”나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움켜잡았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고 내 눈과 입술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내 마음을 알아챈 듯싶었다. 내가 목이 너무 아파서 말도 제대로 못 할 때, 그가 낮고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린 답을 알아야 해.”조금이라도 늦으면 내가 그를 막을까 봐 말을 마치자 그는 빠르고 단호하게 내 손을 밀어내고 봉투를 받아서 열었다.노란 종이 위에 몇 줄의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고 나는 그 글을 보지 않았다.진정우는 한 줄씩 주의 깊게 읽었다. 글을 다 읽은 후, 그는 마치 뭔가 확인하려는 듯한 눈빛으로 신정훈을 바라보았다.“이 보고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 당시 서명하기 전 세 공장에 가서 검증을 받았고 그 결과도 이 봉투 안에 들어 있어요.” 신정훈의 말을 듣고 진정우는 다시 봉투를 열었다. 종이는 모두 누렇게 변색하였고 서명과 도장이 찍혀 있었다.그러니 이 보고서는 근거가 있는 거였다. 진정우는 잠시 손을 내리고 그 후 나를 바라보며 손에 든 몇 장의 종이를 나에게 건넸다.사실 나는 이미 대답을 알았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건네받았고 그때 신정훈이 나에게 말했다.“지원 씨, 한번 확인해 보세요.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도 돼요.”나는 사령관을 바라보았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격려의 눈빛 속에서 나는 종이를 펼쳤다.[2013년 6월 10일, 해청로 교통사고.기술적인 감정 결과, 사고 원인은 브레이크 시스템 고장으로 확인되었으며 브레이크 시스템은 고의로 파손된 것으로 밝혀졌다.차량이 사고를 일으킨 경로를 조사한 결과, 차량은 운전자인 진성국만이 운전했으며 다른 사람은 개입하지 않았다. 따라서 진성국의 혐의가 가장 크나 고의로 브레이크 시스템을 파손했는지에 대한 판단은 불완전하다.]결론을 내리지 못한다는 사실이 참 어이가 없었다.“그래서 그때는 이 내용을 사건 기록에 남기지 않았어. 고인은 이미 떠났으나 자식으로서
“내가 아버지의 몫까지 너에게 다 보상해 줄게.”그 말에 내 마음이 마치 무엇에 찔린 것처럼 아팠고 나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네가 이렇게 말하는 거 보면 결국 그 결론을 인정한 거지? 네가 계속 조사한다고 했잖아. 결국 너는 네 아버지가 브레이크를 조작해서 내 부모님을 죽게 했다는 거야?”사실 우리는 이미 이런 추측을 했었다. 그가 결과를 알려주겠다고 했을 때, 나는 그가 결국 진실을 알게 될 거라고 믿었다.하지만 지금 진정우가 형사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이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혼란스러웠다.그게 무슨 의미일까? 대충 넘어가려는 건지, 아니면 자기 아버지의 잘못을 핑계로 내가 자기를 원망하며 멀리하게 하려는 의도인지?진정우는 내 눈을 보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더 이상 나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가슴이 아파졌다.“너 이미 이 결과를 알고 있었지? 그래서 휴링턴 일이랑 엮어서 나랑 헤어진 거야?”“아니.”그는 바닥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의 일은 계속 조사할 거야. 진전이 있으면 너에게 알려줄게. 하지만 지금 이 보고서는 내용대로 보면 우리 아버지는 주요 용의자야.”그의 말을 듣고 나는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그럼, 만약 휴링턴 일이 없었더라면 지금 이 결론을 보고 넌 어떻게 했을 거야? 나랑 헤어졌을까?”진정우가 나를 바라봤고 그의 눈동자 속에는 어두운 빛이 떠올랐다.“모르겠어, 아마 헤어졌을 거야...”“‘아마’ 헤어졌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네가 살인자의 아들과 함께 있는 걸 원하지 않아. 네가 마음속으로 부모님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될까 봐서 걱정이야.” 진정우가 목을 움켜잡듯 말했다. “지원아, 아마 우리는 처음부터 함께할 운명이 아니었나 봐.”운명이란 말이 너무 아프게 들렸다.“진정우, 네가 나랑 헤어지려고 하는 이유는 알겠어. 이제 나를 핑계로 이유를 대지 않아도 돼.” 나는 그를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진정우!”나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움켜잡았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고 내 눈과 입술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내 마음을 알아챈 듯싶었다. 내가 목이 너무 아파서 말도 제대로 못 할 때, 그가 낮고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린 답을 알아야 해.”조금이라도 늦으면 내가 그를 막을까 봐 말을 마치자 그는 빠르고 단호하게 내 손을 밀어내고 봉투를 받아서 열었다.노란 종이 위에 몇 줄의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고 나는 그 글을 보지 않았다.진정우는 한 줄씩 주의 깊게 읽었다. 글을 다 읽은 후, 그는 마치 뭔가 확인하려는 듯한 눈빛으로 신정훈을 바라보았다.“이 보고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 당시 서명하기 전 세 공장에 가서 검증을 받았고 그 결과도 이 봉투 안에 들어 있어요.” 신정훈의 말을 듣고 진정우는 다시 봉투를 열었다. 종이는 모두 누렇게 변색하였고 서명과 도장이 찍혀 있었다.그러니 이 보고서는 근거가 있는 거였다. 진정우는 잠시 손을 내리고 그 후 나를 바라보며 손에 든 몇 장의 종이를 나에게 건넸다.사실 나는 이미 대답을 알았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건네받았고 그때 신정훈이 나에게 말했다.“지원 씨, 한번 확인해 보세요.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도 돼요.”나는 사령관을 바라보았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격려의 눈빛 속에서 나는 종이를 펼쳤다.[2013년 6월 10일, 해청로 교통사고.기술적인 감정 결과, 사고 원인은 브레이크 시스템 고장으로 확인되었으며 브레이크 시스템은 고의로 파손된 것으로 밝혀졌다.차량이 사고를 일으킨 경로를 조사한 결과, 차량은 운전자인 진성국만이 운전했으며 다른 사람은 개입하지 않았다. 따라서 진성국의 혐의가 가장 크나 고의로 브레이크 시스템을 파손했는지에 대한 판단은 불완전하다.]결론을 내리지 못한다는 사실이 참 어이가 없었다.“그래서 그때는 이 내용을 사건 기록에 남기지 않았어. 고인은 이미 떠났으나 자식으로서
“고인은 이제 떠났으니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깁시다.”신정훈의 말을 듣고 나는 더 불안해졌다. 부모님의 사고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죽은 사람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을 원망하지 말고 소중히 여기라고 나를 타이르는 것 같았다.“형사님, 그건 저도 알죠. 그리고 이 며칠 동안 많은 생각을 했어요.” 나는 내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그가 내 말을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저 결과를 알고 싶어서 말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노트북에서 계약서를 발견한 후로 수많은 추측과 고민을 했고 많은 일들을 이제는 이해하게 됐다.내가 신정훈을 만난 이후, 그는 주기적으로 나에게 정보를 주었지만 결코 답을 주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된 것 같다.신정훈이 말을 마친 뒤, 또 다른 손을 주머니에 넣더니 한 장의 봉투를 꺼냈다.하지만 그는 바로 그 봉투를 나에게 주지 않고 대신 이렇게 말했다.“진정우라는 사람을 알고 있죠?”나는 진정우가 아버지의 죽음을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진정우도 형사님을 찾아왔었나요?”“네, 같은 일로요.”신정훈의 말에 나는 숨이 가빠졌다.“그럼... 진정우도 알게 된 건가요?”신정훈이 고개를 살짝 젓자 나는 더 불안해졌고 그가 들고 있던 봉투를 보며 물었다. “형사님, 진정우에게도 이걸 주실 생각인가요?”내 말이 끝나자마자,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우산을 든 진정우가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내 심장은 마치 거센 폭풍에 휘말린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이 답답한 기분은 진정우와의 과거 때문이기도 하고 그와 함께 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부담 때문이었다.그 죽음이 단순한 사고였을지, 아니면 더 복잡한 이유가 있을지…진정우는 결국 계단을 두 단계 올라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우산 너머로 내게 향했지만 곧 신정훈에게로 돌아갔다.“안녕하세요.”신정훈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정우는 그 후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묘비 앞에
전화를 건 사람은 바로 신정훈 형사였다. 우리는 전에 이미 약속했었고 지금 날짜를 잡으려고 전화한 것 같다.한때는 부모님의 사고 진실을 알기 위해 신정훈을 빨리 만나고 싶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런 마음이 점점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마치 고향에 가까워질수록 낯설게 느껴지는 그런 기분이었다.강유형은 눈치 빠르게 옆으로 한 발짝 물러섰고 나도 조금 더 거리를 두고서야 전화를 받았다.“신정훈 형사님.”“지원 씨, 지금 시간 되세요?”점점 더 거세지는 비를 보며 이런 악천후에도 만나자는 건 분명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쉬고 나서 대답했다.“네, 주소 알려 주세요.”내가 아줌마가 만든 만두를 않자 아줌마는 서운한 듯한 표정을 지었고 그 모습에 나도 마음이 아팠다.“다음에 시간 나면 또 와. 아줌마가 또 만두 만들어줄게.” 아줌마는 나갈 때 계속 그렇게 말했다.“네, 다음에 다시 올게요.”빗속을 뚫고 나는 차를 몰고 나왔다. 삼촌은 왜 이렇게 급하게 가야 하냐고 물었지만 나는 중요한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만 대답했다.신정훈이 약속한 장소는 부모님의 산소였다. 순간 예전 산소에 놓인 꽃들을 떠올리니, 대체 누가 보냈을지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그는 부모님의 묘비 앞에서 검은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신정훈 쪽으로 걸어갈수록 내 마음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나는 그의 옆에 다가갔지만 우산에 가져져 나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신정훈 형사님, 맞으시죠?”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그의 우산이 살짝 흔들리며 얼굴을 드러냈다. 순간, 나는 그가 맞다는 걸 확신했다.“안녕하세요, 지원 씨.” 그는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 순간, 신정훈 형사가 부모님의 사망 신고를 접수했던 장면이 떠올랐고 왜 그때 내 연락처를 물어본 건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형사님, 여길 자주 찾아오셨죠?” 나는 부모님 산소 앞에 놓인 꽃들을 바라보며 물었다.“몇 번 왔었죠.” 그의 목소리는 매우 무겁고 차분했다.그는 아무리 봐도 친근하기보다는 조금은 다가가기
나는 강유형이 빗속에서 걷는 모습을 보며 물었다.“그럼 진정우는?”강유형은 우산을 살짝 들고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몰라, 아무도 몰라.”그는 내 눈을 바라보며 덧붙였다.“내가 뭘 알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래서 나한테 물어보려고?”내 날카로운 시선에 강유형은 잠시 멈칫하고는 말했다.“너도 모르겠지.”그는 다시 앞을 보며 걸음을 재촉했다.“진정우가 일부러 숨기고 있는 거야. 그런데 내가 들은 얘기가 있어.”“무슨 얘기?”“Q 클럽에서 그들의 보스가 뭔가에 연루됐다는 소문이 돌아. 그런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아.”강유형은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나에게 전했고 나는 그 의도가 대충 짐작이 갔다.“진정우가 한 일이라 생각해?”강유형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그럴 수도 있지만 또 아닐 수도 있어. Q 클럽은 휴링턴에서 꽤 큰 영향력을 가진 조직이니까, 그들의 보스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야.”나는 강유형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알았다. 아마 그가 Q 클럽의 보스를 만나려 했으나, 결국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진정우가 어떻게 신지태를 도왔는지는 나도 몰라. 사실... 그는 내게 그 기회조차 주지 않았어“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한숨을 쉬었다. 그 순간 바람이 불며 빗방울 하나가 내 얼굴을 스쳤다. 그 차가운 느낌은 마치 진정우에게 밀려났을 때 흘렸던 눈물 같았다.“진정우는 네 설명도 듣지 않았어?”강유형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들었지, 하지만 나를 용서하지 않았어. 그는 내가 다른 남자를 위해 목숨 바치는 행동을 하는 걸 원치 않았다고 했어.”나는 우산을 높이 들고 강유형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사실, 진정우는 오해한 거야. 나는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똑같이 수혈했을 거야. 단지 그 사람이 네가 되었고 과거 우리는 또 연인이었으니 진정우가 오해할 수 있는 것도 당연해. 그건... 마치...”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마치 네가 나와 함께 있을 때 조나연과의 행동이 오해하
“비가 오는데 무슨 말을 꼭 밖에서 해?”아줌마가 잔소리를 늘어놓자 삼촌이 눈치를 줬다.“엄마, 아까 만두 빚어야 한다면서요. 제가 도와드릴게요.”그동안 말없이 있던 강진혁이 어머니를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이끌었다.나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강유형을 따라 밖으로 나갔고 그는 문 앞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솔직히 말하면 집 안에서도 충분히 조용히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이 많은데 굳이 비를 맞으며 밖으로 나갈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 같아 나는 따지지 않았다.“춥지 않아? 옷 가져올까?”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헤어진 후로 그는 예전보다 훨씬 다정해진 것 같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괜찮아.”나는 그의 손에서 우산을 받아 들고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그는 묵묵히 내 곁을 지키며 말했다.“우리 마지막으로 이렇게 비 속에서 걸었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1년 전이었다. 그때 며칠간 폭우가 계속 내려 도시 곳곳이 침수되고 차로 이동이 불가능했다.내가 걸어서 집에 가자고 내가 제안했을 때, 그는 헬리콥터를 부르겠다고 했다.“너는 헬리콥터를 타고 갈 수 있겠지만, 직원들은? 회사 대표가 혼자만 빠져나간다면 직원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어?”내가 그렇게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결국 그는 헬리콥터를 부르지 않고 직원들과 함께 우산을 쓰고 걸어갔다.처음에는 서로 바짓단을 젖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걷다가, 결국 물에 젖고 말았다.그때 나는 일부러 물웅덩이를 세게 밟아 그에게 물을 튀겼고 그도 화가 나서 나에게 물을 튀기며 맞받아쳤다.그렇게 물싸움을 하다 보니 화가 풀리고 웃음이 터졌다. 침수 지역을 벗어났을 때 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더 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즐거운 시간이었다.지금 그가 그때 일을 다시 꺼내는 이유를 나는 알 것 같지만 과거의 아름다웠던 기억은 그저 지나간 추억일 뿐이었다.그의 의도를 알면서도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기억 안 나.”그는 씁쓸한
“아까 누가 문 두드렸어?”안리영이 내 기분을 살피며 화제를 돌렸다.“조나연. 지난번에 나한테 협력하자고 하더니 이번엔 얘기 좀 하자고 찾아왔어. 무시했지.”나는 커튼을 열어 밖을 바라보았더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그 애, 한 달 뒤면 아이가 퇴원할 거래. 아이 상태도 괜찮다고 하더라. 그런데 단 한 번도 병문안에 가지 않았다네.”안리영이 조나연의 아이 이야기를 꺼냈다. 나도 한 번 본 적 있는 그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그 여자는 돈밖에 몰라. 만약 강유형이 아이를 데려간다면 바로 따라붙을걸.”“근데 도대체 무슨 협력을 하자고 한 걸까?”안리영이 의아해하며 물었다.“모르겠어. 어차피 좋은 일은 아니겠지. 그런 사람은 처음부터 엮이면 안 돼. 문제만 생길 테니까.”나는 단호하게 말했다.“맞아. 그런 사람은 멀리하는 게 상책이지. 근데 그런 끈질긴 성격에 한두 번 거절했다고 포기할까?”안리영은 비웃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나는 휴대폰을 열어 아침으로 먹을 음식을 주문했다.아침 식사를 끝낸 뒤, 안리영은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강씨 집안으로 향했다.강유형과 강진혁이 모두 있었고 아줌마는 나를 보자마자 달려와 내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니? 빈혈 때문이구나. 피를 너무 많이 써서 그래.”강유형 어머니의 눈가가 빨갛게 물들었다.“지원아, 우리 집에서 지내며 몸 좀 추스르자. 기운 차릴 때까지 같이 있자.”“그건 좀...”나는 애써 웃으며 거절했다. 이제 와서 다시 그 집으로 들어가는 건 불가능했다.삼촌은 나의 난처한 표정을 눈치채고는 부드럽게 말했다.“일단 앉아서 얘기하자꾸나. 계속 서 있으면 힘들잖니.”“제가 너무 걱정만 했네.”강유형 어머니는 나를 소파로 이끌며 앉히고는 부엌으로 가서 죽을 가져왔다.“요즘 왜 이렇게 말랐어? 몸 때문이야?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어?”삼촌은 내 상태를 금방 알아챘지만 나는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몸 때문이라고 하면 그들이 미안해할 테고 진정우와의 문제라고 하면 더
나는 핸드폰을 쥔 채 잠시 망설였다. 강유형이 나를 왜 찾는 걸까?안리영은 턱짓으로 받으라는 신호를 보냈다.“지원아.”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나는 여전히 차가운 태도로 대답했다. 진정우와의 관계가 끝난 지금이라 해도 강유형과 다시 잘될 가능성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나를 찾을 때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벽을 치게 되었다.“나 돌아왔어.”그는 무슨 큰일을 겪고 돌아온 사람처럼 말했다.“알아. 강진혁한테 들었어.”내 말에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덧붙였다.“우리 만날 수 있을까? 네가 나랑 단둘이 만나는 게 싫다면 우리 집에 와도 돼. 부모님이 너를 많이 보고 싶어 하셔.”순간, 공항에서 나를 맞이하던 강유형의 부모님 모습이 떠올랐고 그들이 나를 걱정했던 건 사실이었다.“할 말이 있어. 신지태와 관련된 일이기도 하고... 진정우와도 관련 있어.”그 말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 진정우와 나는 이제 아무 관계도 아닌데 그와 관련된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일까? 이런 생각이 스쳤지만 결국 나는 본능적으로 대답하고 말았다.“알았어. 이따 갈게.”“좋아. 엄마한테 말해둘게. 너 오면 만두 해준다고 계속 기다리셨거든.”그의 목소리엔 약간의 기대감이 묻어 있었다. 전화를 끊자 안리영이 한마디 했다.“전 남친 참 열심이네.”나는 그녀의 농담에 대꾸하지 않고 말했다.“진정우와 관련된 일이 있다고 했어.”“그건 그냥 미끼야. 지원아, 너랑 진정우는 이미 끝난 거잖아.”안리영은 날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그녀의 의도를 알았지만 애써 부정하며 말했다.“진정우 때문이 아니라 강유형 부모님 때문에 가는 거야. 만두도 먹으러 가는 거고.”안리영은 비웃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만두 한 끼가 아니라 강유형 집 재산의 3분의 1을 줘도 모자랄걸? 너 그 사람 목숨 살려줬잖아.”그 말에 나는 지난 일이 떠올랐다. 강유형의 부모님이 모든 걸 솔직히 설명했고 내가 그것에 의심을 품는 건 내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일 뿐이었다.“너랑
안리영이 떠나버리면 정말로 나와 이야기할 친구 하나도 남지 않겠지.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란 결국 만나고 헤어짐의 반복이라지만 부모나 친구는 물론, 심지어 부부 사이라도 그렇다지만 안리영만은 내 곁에 남아주었으면 했다.“아니야, 난 그냥 좀 더 쉴 생각이야. 그만두라면 그만두는 그런 쉬운 사람이 아니거든.”안리영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오, 안 과장님 드디어 반항하시네? 이제 좀 단단히 한 방 먹이겠다는 거야?”“맞아. 안 그러면 다음번에 무슨 일이 터져도 제일 먼저 나를 버리려 할 거 아니야.”역시 안리영다웠다. 직장에서도, 연애에서도 그녀는 늘 현실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다.“근데 너무 세게 나가다가 망하면 어떡해?”내가 장난스럽게 묻자 안리영은 물컵을 따라 내밀며 어깨를 으쓱했다.“여기서 날 놓치면 날 데려가겠다는 병원이 줄을 설걸?”그녀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자신 있게 말했다.“나 같은 사람이 갈 데가 없을 것 같아?”그녀의 자신감은 늘 확고했다.안리영의 능력을 알기에 이 병원이 그녀를 놓친다면 그녀를 영입하려는 병원이 줄을 설 게 뻔했다. 실제로 그런 제안을 받은 적도 있었지만 그녀는 늘 거절했었다.“한 곳에서 날 외면하면 더 좋은 곳으로 가면 그만이지”라는 안리영의 말을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런데 넌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데?”안리영은은 진지하게 진정우와 나 사이의 일을 물었다. 그러자 나는 물 한 모금을 마시고 그녀의 말을 따라 웃으며 대답했다.“그 사람과는 길이 안 맞더라고. 그냥 나랑 맞는 사람을 찾아보려고. 나도 선택지가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안리영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미소를 지었다.“이게 바로 내가 아는 윤지원이지. 우리가 직장이든 남자든 거기에 기대지 않아도 돼. 그들은 단지 우리 삶에 즐거움을 더해줄 뿐이지, 없어도 우리는 여전히 빛나.”그녀의 말은 내 마음속의 무거운 짐을 조금 덜어주는 듯했다. 안리령은 내 퇴원 절차를 도왔고 우리는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그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