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언니 왜 그래? 언니 아픈 거야?”“오빠, 왜 아무 말도 안 해? 언니가 나랑 같이 집에 가려고도 안 했어. 뭐야, 둘이 싸운 거야?”“오빠, 언니 언제 깨어날 거 같아?”...진소영의 초조한 목소리 속에서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진정우는 한쪽에 서 있었고 진소영은 그의 팔을 잡고 있었다. 눈가가 빨갛게 충혈된 걸 보니, 내가 갑자기 쓰러져서 얼마나 놀랐을지 짐작이 갔다.진정우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괜한 생각하지 마. 의사 선생님도 별일 아니라고 하셨잖아.”“그럼 둘은 괜찮은 거야?” 진소영은 진정우를 꼭 쥐고서 물었고 진정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나중에 얘기해줄게.”“오빠!” 진소영은 목소리를 높이며 그를 불렀다.“역시 언니랑 싸운 거구나. 왜 그런 거야? 오빠가 나를 아끼는 것처럼 언니도 아낀다고 했잖아!”“소영아, 네가 모르는 게 있어. 그러니까 말 못 해. 집에 가서 기다려줄래?” 진정우는 애써 진정하며 그녀를 달랬다.“안 가. 언니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거야.”진소영은 완강히 고집을 부리며 고개를 저었다. 진정우는 잠시 인내심을 보였지만 이내 짜증이 살짝 묻어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여기 있으면 내가 지원이한테 사과할 기회조차 없잖아.”진소영은 그 말에 눈을 깜빡이며 표정이 밝아졌다.“알겠어. 그럼 나 먼저 갈게. 이제 오빠답네!”“사람 불러 데려다줄게.” 진정우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밖으로 데려가려 했다. 그러나 진소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잠깐만. 언니 한 번 더 보고 갈게.”진소영이 내 쪽으로 다가오자 나는 급히 눈을 감았다.눈을 감고 있었지만 진소영의 걱정 어린 시선이 나를 향해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진정우에게 다시 물었다.“오빠, 언니 진짜 많이 말랐어. 얼굴도 안 좋고. 빈혈 때문에 쓰러졌다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내가 빈혈이었구나.’순간, 내가 강유형에게 피를 너무 많이 준 기억이 떠올랐다. 그를 살리긴 했지만 결국 내 몸이 달아난 셈이었다.
그는 매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돕느라 정작 동생의 심장 이식 수술비조차 마련하지 못했던 사람이었다.그리고 강유형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에게 피를 주지 않았다면 그건 그를 죽게 내버려둔 거나 다름없었다.그런데도 진정우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속마음을 알 수 없고 나도 더 이상 모른 척하고 싶지 않아 눈을 번쩍 떴다. 그의 관심과 사랑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다.그러자 내 얼굴을 어루만지던 그의 손이 순간 멈췄고 눈에 담긴 따뜻함과 안쓰러움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잠시 후 그는 손을 거두려 했고 나는 재빠르게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진정우,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나를 이렇게 아끼고 사랑하면서 왜 날 이렇게 괴롭히는 건데?”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왜 이렇게 자주 우는지 모르겠다.항상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눈물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나왔다.‘그래, 울고 싶으면 울어. 진정우 앞에서 우는 거라면 괜찮아.’이 눈물을 통해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아파하는지 보여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까는 자는 척하는 내 눈물 자국조차 닦아주던 사람이, 지금은 눈앞에서 내가 우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그 무언의 태도가 나를 더 미치게 했다.“진정우, 대체 뭐가 문제야? 왜 날 사랑하면서도 이렇게 밀어내는 거냐고! 대답 좀 해!”내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감정이 폭발하며 흔들리기 시작했다.“이미 말했잖아.”그의 낮은 목소리는 차갑게 들렸고 나는 고개를 흔들며 외쳤다.“말도 안 돼! 너는 그런 속 좁은 사람이 아니잖아. 그리고 너도 나랑 헤어지고 힘들어하잖아! 그렇지 않고서야 왜 밤마다 허진호 끌고 야근하고 몰래 담배를 피우겠어?”그와 스쳐 지날 때마다 느껴졌던 담배 냄새가 떠올랐다.그러자 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그래, 나도 힘들어. 사랑하는데 헤어졌으니까 당연히 힘들지.”그 말은 내 가슴을 후벼팠다.“그럼 왜
진정우가 말없이 나를 바라보자 내 심장은 점점 빠르게 뛰었다. 마치 죄를 지은 사람이 판결을 기다리듯 숨이 막히고 긴장감이 몰려왔다.오랜 침묵 끝에 그는 마침내 손을 들어 내 손목을 붙잡고 말했다.“손 놔.”그 한마디가 날 무너뜨렸다.심연 속으로 떨어지는 듯한 절망감이 가슴을 짓눌렀다.이토록 쓰라린 순간에도 나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그를 붙잡았지만 그는 여전히 날 외면했다.그는 정말 마음을 굳힌 게 분명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함께할 수 없다는 그의 고집에 분노와 원망, 그리고 절망이 뒤섞여 결국 나는 이성을 잃고 그의 어깨를 덥석 물었다.있는 힘껏 이를 악물었고 그의 얕은 신음이 들렸지만 그는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물리면서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분이 풀리지 않아 더 세게 물며 생각했다.‘이렇게라도 아프게 해야 정신을 차릴 거야.’하지만 내 턱이 아플 정도로 힘을 줘도 그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마치 나무처럼 단단하고 움직임도 없었다.나는 그에게 모든 말을 쏟아냈고 약속도 했고 이렇게까지 절박하게 붙잡았는데도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계속 매달려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걸 깨닫고 결국 그를 밀치며 말했다.“가. 나가. 그리고 다시는 날 찾지 마.”진정우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결국 병실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참아왔던 눈물이 터졌다. 나는 베개를 끌어안고 소리 없이 울었다.안리영이 병실로 찾아왔을 때, 나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고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껍데기처럼 누워 있을 뿐이었다. 강유형에게 배신당했을 때조차 이렇게까지 공허하지 않았다.“난 네가 빈혈로 쓰러진 줄 알았는데 혼까지 빠져나간 줄은 몰랐네.”안리영은 날카롭게 내뱉으며 병실로 들어왔다. 나는 힘없이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어떻게 온 거야? 직위 해제 끝났어?”“내가 안 왔으면 너 여기서 굶어 죽어도 아무도 몰랐을걸.”
안리영이 떠나버리면 정말로 나와 이야기할 친구 하나도 남지 않겠지.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란 결국 만나고 헤어짐의 반복이라지만 부모나 친구는 물론, 심지어 부부 사이라도 그렇다지만 안리영만은 내 곁에 남아주었으면 했다.“아니야, 난 그냥 좀 더 쉴 생각이야. 그만두라면 그만두는 그런 쉬운 사람이 아니거든.”안리영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오, 안 과장님 드디어 반항하시네? 이제 좀 단단히 한 방 먹이겠다는 거야?”“맞아. 안 그러면 다음번에 무슨 일이 터져도 제일 먼저 나를 버리려 할 거 아니야.”역시 안리영다웠다. 직장에서도, 연애에서도 그녀는 늘 현실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다.“근데 너무 세게 나가다가 망하면 어떡해?”내가 장난스럽게 묻자 안리영은 물컵을 따라 내밀며 어깨를 으쓱했다.“여기서 날 놓치면 날 데려가겠다는 병원이 줄을 설걸?”그녀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자신 있게 말했다.“나 같은 사람이 갈 데가 없을 것 같아?”그녀의 자신감은 늘 확고했다.안리영의 능력을 알기에 이 병원이 그녀를 놓친다면 그녀를 영입하려는 병원이 줄을 설 게 뻔했다. 실제로 그런 제안을 받은 적도 있었지만 그녀는 늘 거절했었다.“한 곳에서 날 외면하면 더 좋은 곳으로 가면 그만이지”라는 안리영의 말을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런데 넌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데?”안리영은은 진지하게 진정우와 나 사이의 일을 물었다. 그러자 나는 물 한 모금을 마시고 그녀의 말을 따라 웃으며 대답했다.“그 사람과는 길이 안 맞더라고. 그냥 나랑 맞는 사람을 찾아보려고. 나도 선택지가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안리영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미소를 지었다.“이게 바로 내가 아는 윤지원이지. 우리가 직장이든 남자든 거기에 기대지 않아도 돼. 그들은 단지 우리 삶에 즐거움을 더해줄 뿐이지, 없어도 우리는 여전히 빛나.”그녀의 말은 내 마음속의 무거운 짐을 조금 덜어주는 듯했다. 안리령은 내 퇴원 절차를 도왔고 우리는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그날
나는 핸드폰을 쥔 채 잠시 망설였다. 강유형이 나를 왜 찾는 걸까?안리영은 턱짓으로 받으라는 신호를 보냈다.“지원아.”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나는 여전히 차가운 태도로 대답했다. 진정우와의 관계가 끝난 지금이라 해도 강유형과 다시 잘될 가능성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나를 찾을 때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벽을 치게 되었다.“나 돌아왔어.”그는 무슨 큰일을 겪고 돌아온 사람처럼 말했다.“알아. 강진혁한테 들었어.”내 말에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덧붙였다.“우리 만날 수 있을까? 네가 나랑 단둘이 만나는 게 싫다면 우리 집에 와도 돼. 부모님이 너를 많이 보고 싶어 하셔.”순간, 공항에서 나를 맞이하던 강유형의 부모님 모습이 떠올랐고 그들이 나를 걱정했던 건 사실이었다.“할 말이 있어. 신지태와 관련된 일이기도 하고... 진정우와도 관련 있어.”그 말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 진정우와 나는 이제 아무 관계도 아닌데 그와 관련된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일까? 이런 생각이 스쳤지만 결국 나는 본능적으로 대답하고 말았다.“알았어. 이따 갈게.”“좋아. 엄마한테 말해둘게. 너 오면 만두 해준다고 계속 기다리셨거든.”그의 목소리엔 약간의 기대감이 묻어 있었다. 전화를 끊자 안리영이 한마디 했다.“전 남친 참 열심이네.”나는 그녀의 농담에 대꾸하지 않고 말했다.“진정우와 관련된 일이 있다고 했어.”“그건 그냥 미끼야. 지원아, 너랑 진정우는 이미 끝난 거잖아.”안리영은 날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그녀의 의도를 알았지만 애써 부정하며 말했다.“진정우 때문이 아니라 강유형 부모님 때문에 가는 거야. 만두도 먹으러 가는 거고.”안리영은 비웃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만두 한 끼가 아니라 강유형 집 재산의 3분의 1을 줘도 모자랄걸? 너 그 사람 목숨 살려줬잖아.”그 말에 나는 지난 일이 떠올랐다. 강유형의 부모님이 모든 걸 솔직히 설명했고 내가 그것에 의심을 품는 건 내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일 뿐이었다.“너랑
“아까 누가 문 두드렸어?”안리영이 내 기분을 살피며 화제를 돌렸다.“조나연. 지난번에 나한테 협력하자고 하더니 이번엔 얘기 좀 하자고 찾아왔어. 무시했지.”나는 커튼을 열어 밖을 바라보았더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그 애, 한 달 뒤면 아이가 퇴원할 거래. 아이 상태도 괜찮다고 하더라. 그런데 단 한 번도 병문안에 가지 않았다네.”안리영이 조나연의 아이 이야기를 꺼냈다. 나도 한 번 본 적 있는 그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그 여자는 돈밖에 몰라. 만약 강유형이 아이를 데려간다면 바로 따라붙을걸.”“근데 도대체 무슨 협력을 하자고 한 걸까?”안리영이 의아해하며 물었다.“모르겠어. 어차피 좋은 일은 아니겠지. 그런 사람은 처음부터 엮이면 안 돼. 문제만 생길 테니까.”나는 단호하게 말했다.“맞아. 그런 사람은 멀리하는 게 상책이지. 근데 그런 끈질긴 성격에 한두 번 거절했다고 포기할까?”안리영은 비웃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나는 휴대폰을 열어 아침으로 먹을 음식을 주문했다.아침 식사를 끝낸 뒤, 안리영은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강씨 집안으로 향했다.강유형과 강진혁이 모두 있었고 아줌마는 나를 보자마자 달려와 내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니? 빈혈 때문이구나. 피를 너무 많이 써서 그래.”강유형 어머니의 눈가가 빨갛게 물들었다.“지원아, 우리 집에서 지내며 몸 좀 추스르자. 기운 차릴 때까지 같이 있자.”“그건 좀...”나는 애써 웃으며 거절했다. 이제 와서 다시 그 집으로 들어가는 건 불가능했다.삼촌은 나의 난처한 표정을 눈치채고는 부드럽게 말했다.“일단 앉아서 얘기하자꾸나. 계속 서 있으면 힘들잖니.”“제가 너무 걱정만 했네.”강유형 어머니는 나를 소파로 이끌며 앉히고는 부엌으로 가서 죽을 가져왔다.“요즘 왜 이렇게 말랐어? 몸 때문이야?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어?”삼촌은 내 상태를 금방 알아챘지만 나는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몸 때문이라고 하면 그들이 미안해할 테고 진정우와의 문제라고 하면 더
“비가 오는데 무슨 말을 꼭 밖에서 해?”아줌마가 잔소리를 늘어놓자 삼촌이 눈치를 줬다.“엄마, 아까 만두 빚어야 한다면서요. 제가 도와드릴게요.”그동안 말없이 있던 강진혁이 어머니를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이끌었다.나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강유형을 따라 밖으로 나갔고 그는 문 앞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솔직히 말하면 집 안에서도 충분히 조용히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이 많은데 굳이 비를 맞으며 밖으로 나갈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 같아 나는 따지지 않았다.“춥지 않아? 옷 가져올까?”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헤어진 후로 그는 예전보다 훨씬 다정해진 것 같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괜찮아.”나는 그의 손에서 우산을 받아 들고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그는 묵묵히 내 곁을 지키며 말했다.“우리 마지막으로 이렇게 비 속에서 걸었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1년 전이었다. 그때 며칠간 폭우가 계속 내려 도시 곳곳이 침수되고 차로 이동이 불가능했다.내가 걸어서 집에 가자고 내가 제안했을 때, 그는 헬리콥터를 부르겠다고 했다.“너는 헬리콥터를 타고 갈 수 있겠지만, 직원들은? 회사 대표가 혼자만 빠져나간다면 직원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어?”내가 그렇게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결국 그는 헬리콥터를 부르지 않고 직원들과 함께 우산을 쓰고 걸어갔다.처음에는 서로 바짓단을 젖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걷다가, 결국 물에 젖고 말았다.그때 나는 일부러 물웅덩이를 세게 밟아 그에게 물을 튀겼고 그도 화가 나서 나에게 물을 튀기며 맞받아쳤다.그렇게 물싸움을 하다 보니 화가 풀리고 웃음이 터졌다. 침수 지역을 벗어났을 때 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더 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즐거운 시간이었다.지금 그가 그때 일을 다시 꺼내는 이유를 나는 알 것 같지만 과거의 아름다웠던 기억은 그저 지나간 추억일 뿐이었다.그의 의도를 알면서도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기억 안 나.”그는 씁쓸한
“솔직히 말해봐, 너 윤지원이랑 해봤어?”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와 막 들어가려던 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문틈 사이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강유형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지원이가 먼저 다가왔지만 난 관심 없었어.”“강유형, 그렇게 사람 깎아내리지 마. 윤지원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 미인이야. 꽤 많은 사람들이 윤지원을 노리고 있다고.”말하는 사람은 강유형의 친구 신지태였다. 그는 나와 강유형의 10년 감정을 지켜본 증인이기도 했다.“너무 익숙해서 그래.” 강유형이 눈썹을 찌푸렸다.내가 14살 때 강씨 집안으로 보내졌고 그때 처음으로 강유형을 만났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 말했다. 앞으로 강유형과 결혼할 거라고.그 후로 우리는 함께 살았고 어느새 10년이 흘렀다.“그렇지. 너희 둘은 낮에는 한 회사에서 일하면서 얼굴 보고 밤에는 집에 와서 같은 식탁에서 밥 먹고. 아마 상대방이 하루에 몇 번 화장실 가는지까지 다 알겠어.”신지태가 농담을 던지고는 혀를 찼다. “지금은 오래 보면 정든다는 시대가 아니야. 남녀 사이엔 그래도 신선함이 있어야 하지.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그런 느낌, 그래야 감정이 생기고 자극적인 법이야.”강유형은 침묵했고 신지태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듯했다.“그래서 너 윤지원과 결혼할 거야?” 신지태의 질문에 내 숨이 멎는 것 같았다.강유형의 부모님은 우리에게 혼인신고를 하라고 하셨다. 그는 좋다고도, 싫다고도 하지 않았고 나도 그에게 묻지 않았다. 그러니 신지태가 나 대신 물어본 셈이다.강유형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신지태가 웃었다. “결혼하기 싫어?”“...그건 아니야.”“그럼 결혼은 하고 싶은데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는 거지?” 신지태와 강유형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사이라 서로의 마음을 잘 알았다.“지태야, 이런 말 들어봤어?” 강유형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뭔데?”“먹자니 맛없고 버리자니 아깝고.” 강유형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비가 오는데 무슨 말을 꼭 밖에서 해?”아줌마가 잔소리를 늘어놓자 삼촌이 눈치를 줬다.“엄마, 아까 만두 빚어야 한다면서요. 제가 도와드릴게요.”그동안 말없이 있던 강진혁이 어머니를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이끌었다.나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강유형을 따라 밖으로 나갔고 그는 문 앞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솔직히 말하면 집 안에서도 충분히 조용히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이 많은데 굳이 비를 맞으며 밖으로 나갈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 같아 나는 따지지 않았다.“춥지 않아? 옷 가져올까?”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헤어진 후로 그는 예전보다 훨씬 다정해진 것 같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괜찮아.”나는 그의 손에서 우산을 받아 들고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그는 묵묵히 내 곁을 지키며 말했다.“우리 마지막으로 이렇게 비 속에서 걸었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1년 전이었다. 그때 며칠간 폭우가 계속 내려 도시 곳곳이 침수되고 차로 이동이 불가능했다.내가 걸어서 집에 가자고 내가 제안했을 때, 그는 헬리콥터를 부르겠다고 했다.“너는 헬리콥터를 타고 갈 수 있겠지만, 직원들은? 회사 대표가 혼자만 빠져나간다면 직원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어?”내가 그렇게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결국 그는 헬리콥터를 부르지 않고 직원들과 함께 우산을 쓰고 걸어갔다.처음에는 서로 바짓단을 젖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걷다가, 결국 물에 젖고 말았다.그때 나는 일부러 물웅덩이를 세게 밟아 그에게 물을 튀겼고 그도 화가 나서 나에게 물을 튀기며 맞받아쳤다.그렇게 물싸움을 하다 보니 화가 풀리고 웃음이 터졌다. 침수 지역을 벗어났을 때 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더 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즐거운 시간이었다.지금 그가 그때 일을 다시 꺼내는 이유를 나는 알 것 같지만 과거의 아름다웠던 기억은 그저 지나간 추억일 뿐이었다.그의 의도를 알면서도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기억 안 나.”그는 씁쓸한
“아까 누가 문 두드렸어?”안리영이 내 기분을 살피며 화제를 돌렸다.“조나연. 지난번에 나한테 협력하자고 하더니 이번엔 얘기 좀 하자고 찾아왔어. 무시했지.”나는 커튼을 열어 밖을 바라보았더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그 애, 한 달 뒤면 아이가 퇴원할 거래. 아이 상태도 괜찮다고 하더라. 그런데 단 한 번도 병문안에 가지 않았다네.”안리영이 조나연의 아이 이야기를 꺼냈다. 나도 한 번 본 적 있는 그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그 여자는 돈밖에 몰라. 만약 강유형이 아이를 데려간다면 바로 따라붙을걸.”“근데 도대체 무슨 협력을 하자고 한 걸까?”안리영이 의아해하며 물었다.“모르겠어. 어차피 좋은 일은 아니겠지. 그런 사람은 처음부터 엮이면 안 돼. 문제만 생길 테니까.”나는 단호하게 말했다.“맞아. 그런 사람은 멀리하는 게 상책이지. 근데 그런 끈질긴 성격에 한두 번 거절했다고 포기할까?”안리영은 비웃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나는 휴대폰을 열어 아침으로 먹을 음식을 주문했다.아침 식사를 끝낸 뒤, 안리영은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강씨 집안으로 향했다.강유형과 강진혁이 모두 있었고 아줌마는 나를 보자마자 달려와 내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니? 빈혈 때문이구나. 피를 너무 많이 써서 그래.”강유형 어머니의 눈가가 빨갛게 물들었다.“지원아, 우리 집에서 지내며 몸 좀 추스르자. 기운 차릴 때까지 같이 있자.”“그건 좀...”나는 애써 웃으며 거절했다. 이제 와서 다시 그 집으로 들어가는 건 불가능했다.삼촌은 나의 난처한 표정을 눈치채고는 부드럽게 말했다.“일단 앉아서 얘기하자꾸나. 계속 서 있으면 힘들잖니.”“제가 너무 걱정만 했네.”강유형 어머니는 나를 소파로 이끌며 앉히고는 부엌으로 가서 죽을 가져왔다.“요즘 왜 이렇게 말랐어? 몸 때문이야?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어?”삼촌은 내 상태를 금방 알아챘지만 나는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몸 때문이라고 하면 그들이 미안해할 테고 진정우와의 문제라고 하면 더
나는 핸드폰을 쥔 채 잠시 망설였다. 강유형이 나를 왜 찾는 걸까?안리영은 턱짓으로 받으라는 신호를 보냈다.“지원아.”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나는 여전히 차가운 태도로 대답했다. 진정우와의 관계가 끝난 지금이라 해도 강유형과 다시 잘될 가능성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나를 찾을 때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벽을 치게 되었다.“나 돌아왔어.”그는 무슨 큰일을 겪고 돌아온 사람처럼 말했다.“알아. 강진혁한테 들었어.”내 말에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덧붙였다.“우리 만날 수 있을까? 네가 나랑 단둘이 만나는 게 싫다면 우리 집에 와도 돼. 부모님이 너를 많이 보고 싶어 하셔.”순간, 공항에서 나를 맞이하던 강유형의 부모님 모습이 떠올랐고 그들이 나를 걱정했던 건 사실이었다.“할 말이 있어. 신지태와 관련된 일이기도 하고... 진정우와도 관련 있어.”그 말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 진정우와 나는 이제 아무 관계도 아닌데 그와 관련된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일까? 이런 생각이 스쳤지만 결국 나는 본능적으로 대답하고 말았다.“알았어. 이따 갈게.”“좋아. 엄마한테 말해둘게. 너 오면 만두 해준다고 계속 기다리셨거든.”그의 목소리엔 약간의 기대감이 묻어 있었다. 전화를 끊자 안리영이 한마디 했다.“전 남친 참 열심이네.”나는 그녀의 농담에 대꾸하지 않고 말했다.“진정우와 관련된 일이 있다고 했어.”“그건 그냥 미끼야. 지원아, 너랑 진정우는 이미 끝난 거잖아.”안리영은 날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그녀의 의도를 알았지만 애써 부정하며 말했다.“진정우 때문이 아니라 강유형 부모님 때문에 가는 거야. 만두도 먹으러 가는 거고.”안리영은 비웃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만두 한 끼가 아니라 강유형 집 재산의 3분의 1을 줘도 모자랄걸? 너 그 사람 목숨 살려줬잖아.”그 말에 나는 지난 일이 떠올랐다. 강유형의 부모님이 모든 걸 솔직히 설명했고 내가 그것에 의심을 품는 건 내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일 뿐이었다.“너랑
안리영이 떠나버리면 정말로 나와 이야기할 친구 하나도 남지 않겠지.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란 결국 만나고 헤어짐의 반복이라지만 부모나 친구는 물론, 심지어 부부 사이라도 그렇다지만 안리영만은 내 곁에 남아주었으면 했다.“아니야, 난 그냥 좀 더 쉴 생각이야. 그만두라면 그만두는 그런 쉬운 사람이 아니거든.”안리영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오, 안 과장님 드디어 반항하시네? 이제 좀 단단히 한 방 먹이겠다는 거야?”“맞아. 안 그러면 다음번에 무슨 일이 터져도 제일 먼저 나를 버리려 할 거 아니야.”역시 안리영다웠다. 직장에서도, 연애에서도 그녀는 늘 현실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다.“근데 너무 세게 나가다가 망하면 어떡해?”내가 장난스럽게 묻자 안리영은 물컵을 따라 내밀며 어깨를 으쓱했다.“여기서 날 놓치면 날 데려가겠다는 병원이 줄을 설걸?”그녀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자신 있게 말했다.“나 같은 사람이 갈 데가 없을 것 같아?”그녀의 자신감은 늘 확고했다.안리영의 능력을 알기에 이 병원이 그녀를 놓친다면 그녀를 영입하려는 병원이 줄을 설 게 뻔했다. 실제로 그런 제안을 받은 적도 있었지만 그녀는 늘 거절했었다.“한 곳에서 날 외면하면 더 좋은 곳으로 가면 그만이지”라는 안리영의 말을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런데 넌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데?”안리영은은 진지하게 진정우와 나 사이의 일을 물었다. 그러자 나는 물 한 모금을 마시고 그녀의 말을 따라 웃으며 대답했다.“그 사람과는 길이 안 맞더라고. 그냥 나랑 맞는 사람을 찾아보려고. 나도 선택지가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안리영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미소를 지었다.“이게 바로 내가 아는 윤지원이지. 우리가 직장이든 남자든 거기에 기대지 않아도 돼. 그들은 단지 우리 삶에 즐거움을 더해줄 뿐이지, 없어도 우리는 여전히 빛나.”그녀의 말은 내 마음속의 무거운 짐을 조금 덜어주는 듯했다. 안리령은 내 퇴원 절차를 도왔고 우리는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그날
진정우가 말없이 나를 바라보자 내 심장은 점점 빠르게 뛰었다. 마치 죄를 지은 사람이 판결을 기다리듯 숨이 막히고 긴장감이 몰려왔다.오랜 침묵 끝에 그는 마침내 손을 들어 내 손목을 붙잡고 말했다.“손 놔.”그 한마디가 날 무너뜨렸다.심연 속으로 떨어지는 듯한 절망감이 가슴을 짓눌렀다.이토록 쓰라린 순간에도 나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그를 붙잡았지만 그는 여전히 날 외면했다.그는 정말 마음을 굳힌 게 분명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함께할 수 없다는 그의 고집에 분노와 원망, 그리고 절망이 뒤섞여 결국 나는 이성을 잃고 그의 어깨를 덥석 물었다.있는 힘껏 이를 악물었고 그의 얕은 신음이 들렸지만 그는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물리면서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분이 풀리지 않아 더 세게 물며 생각했다.‘이렇게라도 아프게 해야 정신을 차릴 거야.’하지만 내 턱이 아플 정도로 힘을 줘도 그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마치 나무처럼 단단하고 움직임도 없었다.나는 그에게 모든 말을 쏟아냈고 약속도 했고 이렇게까지 절박하게 붙잡았는데도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계속 매달려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걸 깨닫고 결국 그를 밀치며 말했다.“가. 나가. 그리고 다시는 날 찾지 마.”진정우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결국 병실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참아왔던 눈물이 터졌다. 나는 베개를 끌어안고 소리 없이 울었다.안리영이 병실로 찾아왔을 때, 나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고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껍데기처럼 누워 있을 뿐이었다. 강유형에게 배신당했을 때조차 이렇게까지 공허하지 않았다.“난 네가 빈혈로 쓰러진 줄 알았는데 혼까지 빠져나간 줄은 몰랐네.”안리영은 날카롭게 내뱉으며 병실로 들어왔다. 나는 힘없이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어떻게 온 거야? 직위 해제 끝났어?”“내가 안 왔으면 너 여기서 굶어 죽어도 아무도 몰랐을걸.”
그는 매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돕느라 정작 동생의 심장 이식 수술비조차 마련하지 못했던 사람이었다.그리고 강유형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에게 피를 주지 않았다면 그건 그를 죽게 내버려둔 거나 다름없었다.그런데도 진정우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속마음을 알 수 없고 나도 더 이상 모른 척하고 싶지 않아 눈을 번쩍 떴다. 그의 관심과 사랑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다.그러자 내 얼굴을 어루만지던 그의 손이 순간 멈췄고 눈에 담긴 따뜻함과 안쓰러움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잠시 후 그는 손을 거두려 했고 나는 재빠르게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진정우,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나를 이렇게 아끼고 사랑하면서 왜 날 이렇게 괴롭히는 건데?”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왜 이렇게 자주 우는지 모르겠다.항상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눈물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나왔다.‘그래, 울고 싶으면 울어. 진정우 앞에서 우는 거라면 괜찮아.’이 눈물을 통해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아파하는지 보여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까는 자는 척하는 내 눈물 자국조차 닦아주던 사람이, 지금은 눈앞에서 내가 우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그 무언의 태도가 나를 더 미치게 했다.“진정우, 대체 뭐가 문제야? 왜 날 사랑하면서도 이렇게 밀어내는 거냐고! 대답 좀 해!”내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감정이 폭발하며 흔들리기 시작했다.“이미 말했잖아.”그의 낮은 목소리는 차갑게 들렸고 나는 고개를 흔들며 외쳤다.“말도 안 돼! 너는 그런 속 좁은 사람이 아니잖아. 그리고 너도 나랑 헤어지고 힘들어하잖아! 그렇지 않고서야 왜 밤마다 허진호 끌고 야근하고 몰래 담배를 피우겠어?”그와 스쳐 지날 때마다 느껴졌던 담배 냄새가 떠올랐다.그러자 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그래, 나도 힘들어. 사랑하는데 헤어졌으니까 당연히 힘들지.”그 말은 내 가슴을 후벼팠다.“그럼 왜
“오빠, 언니 왜 그래? 언니 아픈 거야?”“오빠, 왜 아무 말도 안 해? 언니가 나랑 같이 집에 가려고도 안 했어. 뭐야, 둘이 싸운 거야?”“오빠, 언니 언제 깨어날 거 같아?”...진소영의 초조한 목소리 속에서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진정우는 한쪽에 서 있었고 진소영은 그의 팔을 잡고 있었다. 눈가가 빨갛게 충혈된 걸 보니, 내가 갑자기 쓰러져서 얼마나 놀랐을지 짐작이 갔다.진정우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괜한 생각하지 마. 의사 선생님도 별일 아니라고 하셨잖아.”“그럼 둘은 괜찮은 거야?” 진소영은 진정우를 꼭 쥐고서 물었고 진정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나중에 얘기해줄게.”“오빠!” 진소영은 목소리를 높이며 그를 불렀다.“역시 언니랑 싸운 거구나. 왜 그런 거야? 오빠가 나를 아끼는 것처럼 언니도 아낀다고 했잖아!”“소영아, 네가 모르는 게 있어. 그러니까 말 못 해. 집에 가서 기다려줄래?” 진정우는 애써 진정하며 그녀를 달랬다.“안 가. 언니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거야.”진소영은 완강히 고집을 부리며 고개를 저었다. 진정우는 잠시 인내심을 보였지만 이내 짜증이 살짝 묻어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여기 있으면 내가 지원이한테 사과할 기회조차 없잖아.”진소영은 그 말에 눈을 깜빡이며 표정이 밝아졌다.“알겠어. 그럼 나 먼저 갈게. 이제 오빠답네!”“사람 불러 데려다줄게.” 진정우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밖으로 데려가려 했다. 그러나 진소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잠깐만. 언니 한 번 더 보고 갈게.”진소영이 내 쪽으로 다가오자 나는 급히 눈을 감았다.눈을 감고 있었지만 진소영의 걱정 어린 시선이 나를 향해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진정우에게 다시 물었다.“오빠, 언니 진짜 많이 말랐어. 얼굴도 안 좋고. 빈혈 때문에 쓰러졌다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내가 빈혈이었구나.’순간, 내가 강유형에게 피를 너무 많이 준 기억이 떠올랐다. 그를 살리긴 했지만 결국 내 몸이 달아난 셈이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너 지금 그 모습은... 조금 좋아하거나 마음이 설렌 것 같지 않냐?”“언니...”진소영이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그래, 내가 맞았다.“그거 전혀 이상한 거 아니야. 이제 너도 충분히 연애할 나이야.”나는 옆을 보며 말했다. 그 옆엔 한 쌍의 남녀가 책을 보며 서로 가끔 눈을 맞추고 있었고 그들의 눈빛에는 사랑이 가득했다.나는 문득 학창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도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커플들을 보면 유난히 부러웠다. 나는 강유형을 여러 번 불러 함께 책을 읽자고 했지만 그는 몇 분도 못 참고는 핑계를 대며 자리를 뜨곤 했다.그때부터 이미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던 것 같다. 어쩌면 우리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갈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언니.”진소영이 내 이름을 부르자 나는 잠시 생각을 멈추고 진소영을 보며 물었다.“그 남자 이름이 뭐야? 비밀로 해줄게.”사실 나는 그 남자가 소지훈인지 아닌지 확실히 알고 싶었다.진소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언니, 저 말하기 싫은데...”그녀가 말하지 않으면 내가 강요할 수는 없어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물론, 말하지 않아도 돼.”진소영은 얼굴이 빨개지며 말을 이었다.“언니, 내가 언니를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지금 그 사람과 나는 그냥 친한 친구일 뿐이에요. 가끔 만나서 같이 책을 읽을 때가 있을 뿐, 언니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는 아니에요.”“알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소영의 불안함을 달래주었다.“언니, 난 언니가 너무 좋아요. 마치 내 친구 같아요.”진소영이 내 팔을 잡으며 말했다. 나는 그녀가 나와 진정으로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꼈다.“친구? 앞으로는 그냥 언니와 친구처럼 지내자. 너한테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언제든지 곁에 있을게.”진소영은 그런 내 말에 기뻐하며 웃었다.“그럼 이제 언니는 내 친구이자 언니도 되겠네!”나는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고 진소영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진소영은 나와 진정우와 결별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진소영의 뺨이 붉게 물들고 그녀는 작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게...”분명히 거짓말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지적하지 않고 대신 도서관을 둘러보며 말했다.“좋네. 나중에 일이 없을 때 여기 와서 몰래 쉬어도 되겠어.”그런데 진소영은 내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떳떳했다면 아마 기뻐하며 나를 끌어안고 같이 책을 읽을 수 있다며 좋아했을 것이다.그렇다면 진소영은 혼자 책을 보는 게 아니었고 아마 함께 있는 사람은 남자였을 것이다.‘소지훈? 방금 소지훈이 가끔 온다고 말했으니까, 아마 내가 오버한 거겠지.’“여기서 책 읽는 남자들도 꽤 많네. 나는 요즘 남자애들은 게임만 좋아하고 책 읽는 건 별로 안 좋아할 줄 알았어.” 나는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아니에요.” 진소영이 즉시 반박했다.“응? 그럼 너는 잘 아는 공부 열심히 하는 남자애라도 있어?” 내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진소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아이고 어색한 연기 좀 봐. ’“없어요.” 진소영은 여전히 부인했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소영아, 여기서 좋아하는 남자애라도 만난 거야?”“아니에요, 언니.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진소영은 당황한 듯 얼굴이 붉어지고 코끝에 땀이 맺혔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있어도 괜찮잖아. 너도 이제 다 컸고 이렇게 예쁜데 남자애들이 너 좋아하고 따라오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야. 저기 있는 남자들, 너 들어올 때부터 계속 너만 쳐다보고 있어.”나는 옆을 가리켰다. 진소영은 그쪽을 잠시 보더니 얼굴을 내리깔았다.“저런 애들 저는 별로예요.”“그럼 어떤 애를 좋아해?” “언니...” 진소영이 부끄러워하며 말을 피했다.“소영아, 언니는 네 사생활을 캐려는 게 아니야. 네가 잘못된 사람을 좋아해서 상처받을까 봐 걱정되는 거지.”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진소영은 입술을 움켜잡고 나를 끌어 옆으로 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이건 오빠한테 절대 말하지 마세요.”“왜? 오빠가 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