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형이 술에 너무 취해서 내가 데리러 온 것조차 기억하지 못한 게 화가 났었다.강유형은 그날 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여 가볍게 내 입술에 닿았다.그리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바보.”그날의 하늘은 지금과 비슷했다. 날이 밝아 오기 직전이었다. 술에 취한 그는 들뜬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산꼭대기로 가서 별 볼래?”나는 그의 습관을 잘 알았다. 그는 술에 취하면 흥분해서 잠들기를 싫어했다. 술을 마신 후 바로 잠들면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아서 어지럽다고 했다.그래서 그는 술을 마실 때마다 내가 운전해 그를 데리고 여기저기 드라이브를 다니곤 했다.그날도 나는 차를 몰아 그를 산꼭대기로 데려갔다. 우리는 큰 바위 위에 나란히 앉아 서로 기대며 새벽의 별들을 보았다.밤하늘의 어둠이 서서히 사라지고 해가 지평선 위로 떠오르며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는 순간을 함께했다.그날 그는 내 어깨에 기대어 잠들었다. 뜨거운 햇살이 그의 얼굴에 닿을 때까지 깊이 잠들었던 그는, 눈을 뜨고서야 산에서 내려갔다.나는 고개를 들어 머리 위로 펼쳐진 밤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예전에는 자주 이랬었는데.”“그래? 난 까먹었어.”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까먹었다고? 그래.’그가 나와의 약속과 함께했던 행복한 시간을 잊지 않았다면, 어찌 조나연의 유혹에 넘어갔겠는가.“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조나연 일은 다 알고 있었지. 왜 진작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그의 물음은 전혀 놀랍지 않았다. 나는 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말한다고 뭐가 달라졌을까? 오늘처럼 조나연이랑 크게 싸웠겠지. 그렇다고 상황이 변했을 것 같아?”임석진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다시 살아날 수 없다. 그리고 나와 강유형은 절대 과거로 돌아갈 수 없었다.내 대답에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걸 알게 된 이후, 내가 바보 같고 한심하게 느껴졌겠지?”“아니야.”나는 솔직히 대답했
강유형은 내 말을 듣더니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나는 그의 의도를 이미 짐작할 수 있었다.“원하는 조건이 ‘강씨 집안의 안주인’이 되는 거지?”내가 던진 말에 강유형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마치 내가 어떻게 이 모든 걸 다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잠시 후,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조나연을 꽤 잘 아네.”그 말은 직접적으로 날 비난하는 건 아니었지만 비꼬는 느낌은 충분했다. 내 남자를 빼앗아 간 여자가 원하는 걸 내가 알아챘다는 게 그에겐 의외였던 모양이다.“조나연을 잘 알아서가 아니라, 하는 행동을 보면 다 보이잖아. 부귀영화에 얼마나 집착하는지 너무 명확하니까.”내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어둑했던 하늘이 갑자기 밝아졌다. 나는 항상 밤이 아침으로 바뀌는 건 서서히 이루어지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건 한순간에 찾아오는 변화였다.그래서 시인들이 새벽을 ‘동틀 무렵’이라 표현하는 거겠지.‘트다’라는 표현이 정말 적절했다.검은 밤이 깨지고 밝은 빛이 스며드는 그 순간, 그건 확실히 파괴적일 만큼 강렬했다.“강유형, 놀이공원은 물론 큰 자산이긴 하지. 하지만 강씨 집안 안주인이 돼서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아.”내 말에 강유형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나를 바라봤다. 그가 내게 놀이공원을 선물한 건 사실이었다.하지만 그의 재산은 놀이공원 열 곳, 백 곳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그의 아내가 되는 건 곧 그의 재산 절반을 가지는 것과 같았다.조나연은 이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가 임석진의 죽음을 이용해 이런 길을 계획했을 리 없었다.“그녀가 원하는 건 내가 아니라, 내 돈이야.”강유형은 자조 섞인 말투로 말했다.나는 피식 웃었다.“그걸 이제야 깨달았어?”강유형은 정말 조나연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걸까? 이런 결혼이나 연애에서 진정한 사랑이란 게 얼마나 될까.대부분은 가문 사이의 동맹이나 이익 때문 아닌가.문득, 함소은이 떠올랐다. 젊고 앳된 그녀
강유형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조나연은 그냥 마지막 결정타에 불과했어.”나는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었고 문득 이런 말이 떠올랐다.‘과거의 상처를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면 그건 정말로 마음을 내려놓은 거다.’“지원아, 나는 이해가 안 돼. 조나연 일은 내가 잘못한 건 맞아. 하지만 그전에는 내가 너한테 정말 잘했잖아.”강유형은 우리가 멀어진 이유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네가 나한테 잘해줬다는 건 인정해. 근데 내가 너한테 한 거는? 느꼈어? 아니면 보긴 했어?”내가 조용히 묻자 강유형은 한참 나를 보다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내가 널 소중히 여기지 못했어. 그래서 널 잃은 거야.”“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야? 차라리 조나연 얘기를 하자.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혹시 걔랑 같이 있고 싶어도 삼촌과 아줌마가 허락하지 않을까 봐서 걱정이야?”나는 대화를 원래 주제로 돌렸다.“내가 걔랑 같이 있고 싶다고? 넌 날 뭐로 보는 거야? 병신? 아니면 미친놈으로 보는 거야?”강유형의 목소리가 갑자기 격앙됐다.“그 영상으로 날 협박하겠다며? 공개하겠다고? 그럼 공개하게 두지 뭐.”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강유형은 협박에 굴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업에서도, 개인적인 일에서도.하지만 나는 우려를 떨칠 수 없었다.“정말로 그 영상을 공개하면 회사도 타격을 받을 거고 아버님도 충격을 견디지 못하실 거야.”나는 조용히 경고했다.“그래서 네가 필요해.”그는 마침내 이 대화를 시작한 목적을 밝혔다. 아침 햇살 아래, 그의 얼굴은 여전히 뚜렷하고 잘생겼지만 그늘진 표정이 그를 낯설고 멀게 느껴지게 했다.“도대체 뭘 도와달라는 건데?”“우리 아버지를 좀 설득해 줘.”그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솔직히 나랑 형 둘이 합쳐도 너 하나만 못하잖아. 네가 우리 아버지의 딸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그의 농담에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무슨 소리야, 진짜.”나는 그를 발로 가볍게 찼다. 그러자 강
놀이공원 개장과 관련된 화제와 내가 얽힌 핫이슈는 무려 3일간이나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지만 결국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매일 새로운 화젯거리가 떠돌아다니는 소셜미디어에서 아무리 흥미로운 이야기라도 금세 다른 이야기에 밀리기 마련이다.이 3일은 조나연이 반격하기에 가장 적합한 타이밍이었지만 그녀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강유형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그 영상을 공개할 용기가 없었다.만약 공개한다면 그녀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고 모든 계획이 수포가 되기 때문이다.그렇다고 그녀가 이대로 포기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자살 시도’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쓸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나는 병실에서 삼촌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간호사가 달려와 누군가가 옥상에서 뛰어내리려 한다고 전했다. 그 말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러워졌다.“게다가 임산부라네요. 산후우울증이라도 걸린 건지 모르겠어요.”간호사는 벌써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그때 내 휴대폰이 울렸다. 강유형이었다. 갑자기 눈꺼풀이 두 번이나 떨리며 불안감이 밀려왔다.“여보세요?”“지원아, 조나연이 옥상에서 뛰어내리겠대.”강유형의 목소리는 낮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나는 순간 몸이 굳었다. 조나연이 별의별 일을 다 벌여 왔지만 이번은 차원이 달랐다. 이번엔 자기 목숨을 걸고 심지어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생명까지 걸고 협박을 하고 있었다.삼촌이 옆에 있어 나는 전화를 들고 나가 통화하려고 하자 삼촌은 내 움직임을 눈치챈 듯 손짓으로 앉으라고 했다.“지금 어디야?”나는 강유형에게 물었다.“곧 병원에 도착해.”그의 대답에 나는 침을 삼키며 목이 타들어 가는 기분을 느꼈다.“나 지금 아버님이랑 같이 있어.”강유형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아버지께 숨길 수는 없어. 조나연이 병원 옥상에서 난리를 치는 건 아버지한테 알리려고 하는 거잖아.”“그럼 넌 어떻게 할 생각인데?”나는 그에게 물었지만 머릿속으로는 이미 답이 그려졌다.조나연이 이런 수를 쓰는
날카로운 비명이 들리며 나는 조나연이 옥상 끝으로 조금 더 다가서는 걸 똑똑히 보았다. 나는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심장이 목까지 차오르는 것 같았다.위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와 상관없이 그런 장면 자체가 보는 사람의 숨을 멎게 하고 온몸을 긴장하게 했다.조나연이 이런 행동을 하는 건 강유형이 옥상에 올라갔기 때문일 것 같았다.옥상이 너무 높아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들리지 않았고 나는 그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그때 누군가 내게 말했다.“아가씨, 핸드폰이 울리고 있어요.”그제야 정신이 돌아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전화를 건 사람은 강유형이었다.그가 지금 위에서 조나연과 대치 중인데 내게 전화를 걸 이유는 하나였다.조나연이 전화하게 시킨 것이다. 전화를 받자 예상대로였다. “지원아, 너 아버님을 모시고 여기로 올라와 줘.”나는 당황했다. 내가 올라가는 건 괜찮지만 왜 삼촌까지 불러야 한다는 건가?삼촌은 몸이 좋지 않으셨다. 조나연이 어떤 일을 벌이든 그것을 감당하는 건 무리가 될 수도 있었다.목이 뻣뻣하게 말라오는 느낌에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옥상 끝에 선 조나연을 바라보며 전화를 끊고 인파 속을 헤치고 엘리베이터로 들어섰다.나는 삼촌을 부르지 않고 혼자서 엘리베이터에 탔다.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올라가는 동안, 조나연이 나와 삼촌을 부르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계속 생각했다.옥상 문을 열자 강한 바람이 얼굴을 때리며 소름이 돋았다. 강유형은 나를 바라봤고 나는 조나연을 바라봤다. 그녀 역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소방관이 조나연에게 물었다.“저 사람이 맞나요? 만나고 싶다는 사람이?”조나연은 답했다.“아직 한 명 더 있어요.”나는 단호하게 말했다.“혼자예요. 삼촌은 몸이 안 좋아서 못 오셔요.”조나연의 얼굴이 굳었고 그녀는 날카롭게 말했다.“윤지원, 이쪽으로 와!”강유형이 그녀를 제지하려고 나섰다.“조나연, 지원이를 힘들게 하지 마. 내가 갈게.”조나연은 비웃으며 말했다.“강
조나연의 날카로운 비명은 마치 공기를 찢어놓는 듯한 울림으로 모두의 귀를 때렸다.“저분을 자극하지 마세요.”소방관이 다시 한번 내게 경고했지만 강유형이 손을 들어 막았다.그는 조나연이 진짜로 죽으려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의 행동은 단지 연극에 불과했다. 사람들에게 자신이 완전히 무너져 자살하려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쇼였다.역시나, 그녀는 소리를 지르다가 나와 강유형을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겁만 주는 줄 알겠지? 진짜로 뛰어내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그럼 오늘 내가 보여줄게. 내가 진짜 죽으려는 건지, 아니면 연기하는 건지.”그녀는 말하며 옥상 끝으로 한 발짝씩 물러섰다. 그녀의 발걸음을 볼 때마다 내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진짜로 뛰어내릴 생각이 없더라도 발을 헛디디거나 중심을 잃는다면 결국 그녀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나는 그녀의 배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의 정확한 임신 기간은 알 수 없었지만 내가 강유형과 헤어진 지 6개월이 넘었으니 최소한 6, 7개월은 되었을 것이다.조나연이 어떤 짓을 했든 그 아이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세상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생명이었다.내 안에서 그녀를 향한 분노와 연민이 뒤섞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좋게 말하거나 부탁해봐야 그녀가 원하는 대로 흐를 뿐이었다. 그녀의 탐욕을 겨냥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조나연, 네가 지금 뛰어내린다고 해도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이 네가 스스로 뛰어내렸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어. 그건 자살로 간주할 거고 네가 얻고 싶었던 모든 건 사라질 거야. 네 계획은 허사가 되고 널 사랑했던 그 남자의 희생도 무의미해지겠지.”내 말에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지금 난 아무것도 없어. 시댁에서도 버림받았고 친정에서도 외면받아.”그녀의 말에 지금 그녀가 얼마나 벼랑 끝에 몰려 있는지 알 수 있었다.동생까지 그녀를 배신했으니, 더는 기댈 곳이 없었을 것이다.“윤지원, 내가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강유형을 내게 줘. 강유형이 나와 결혼하게 해
조나연이 갑자기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난 상관없어! 강유형, 말해. 나랑 결혼할 거야? 말 거야?”강유형은 입을 꽉 다물었다. 그는 이 상황에서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대답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솔직하고 단호하게 말했다.“조나연, 보상은 해줄 거라고 말했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그의 대답에 소방관들조차 그를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조나연의 눈에는 절망으로 가득 찼다. “내가 원하는 보상은 바로 너야!”강유형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조나연, 넌 날 함정에 빠뜨렸고 임석진을 죽게 했어. 내가 그걸 문제 삼지 않는 건, 오직 이 아이 때문이야.”강유형은 어릴 때부터 협박에 굴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의 어머니조차 그를 고집불통이라며 혀를 찼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의 단호한 태도는 조나연을 더 자극했다.“아이? 또 아이 얘기야?”조나연은 배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너희 모두 이 아이 때문에 그러는 거지. 그럼 난 뭐야? 아이 낳는 도구야?”그녀는 눈빛을 번뜩이며 강유형을 노려보며 말했다.“네가 이 아이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나와 결혼하지 않으면 이 아이를 없애버릴 거야.”그러더니 그녀는 배를 주먹으로 치기 시작했다.나는 순간적으로 몸이 떨렸다. 호랑이도 제 새끼는 해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 여자는 너무도 잔인했다. 그녀는 아이를 도구 삼아 협박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조나연!”강유형은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만약 이 아이가 잘못되면, 너를 지옥 끝까지 쫓아갈 거야.”하지만 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조나연은 배를 더 세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몰래 그녀에게 접근했던 소방관 한 명이 그녀를 재빠르게 끌어안았다.하지만 조나연은 본능적으로 몸부림쳤고 그녀는 건물 가장자리에 서 있었기에 소방관의 몸도 균형을 잃고 뒤로 기울어졌다.“아악!”조나연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나는 본능적으로 입을 막으며 그 장면을 똑똑히 지켜봤다.소방관의 한 손이 건물 난간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고
아이는 7개월 반 만에 조산으로 태어났다. 거의 투명에 가까운 몸으로 인큐베이터에 누워 있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안리영조차 아이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모든 건 이 아이의 운명에 달려 있어.”조나연은 결국 뛰어내리지 않았지만 아이와 함께 큰 대가를 치렀다. 그녀는 자궁 파열로 인해 대량 출혈을 겪었고 결국 자궁을 제거해야 했다.그녀가 목숨을 건진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 이후 그녀의 삶이 어떻게 될지는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 아이는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아버지 없이 태어난 데다, 임석진의 부모님조차 아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무엇보다 조나연이 그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할지도 의문이었다. 그녀가 아이를 사랑했다면 그렇게 무모한 짓을 반복하지 않았을 테니까.진정우가 병원으로 나를 데리러 왔을 때 그의 표정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안리영은 내 옆에서 가볍게 어깨로 나를 쿡 찌르며 말했다.“너 남편 화난 것 같아.”나도 이미 느끼고 있었다.“너 이렇게 강유형이랑 얽히고설켜 있으면, 누가 안 화나겠어?”안리영의 농담 섞인 충고였다. 나는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진정우는 이미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그의 차가운 시선은 주위 공기마저 얼어붙게 했다. 우리가 함께한 이후로 그는 한 번도 이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나도 오늘 일이 조금만 어긋났다면 여기서 무사히 설 수 없었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나는 한 발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나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어.”하지만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으며 간절히 말했다.“다시는 그들의 일에 관여하지 않을게. 약속할게.”안리영은 가볍게 헛기침하며 다가왔다.“정우 씨, 당신 부인 이미 오늘 겁나서 혼쭐났을 텐데 그만 화 푸시죠. 이럴 땐 따뜻하게 안아줘야 하잖아요?”하지만 진정우는 안아주기는커녕 안리영에게 물었다.“확실히 아무 문제 없나요?”“의사인 나의 명예를 걸고
“...”그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고 얼굴이 뜨거워졌다.조금 전까지 내가 그를 떠보려 했는데 오히려 당하고 말았다.그는 겉으로 보기엔 진지하고 무심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은근슬쩍 던지는 말은 전혀 초보자가 아니었다.이 남자, 예상보다 훨씬 노련한데?나는 속으로 피식 웃으며 태연한 척 입꼬리를 올렸다.“착각하지 마세요.”나는 천천히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TV가 켜진 거실로 향했다.그는 여유롭게 식탁을 정리한 뒤 내가 뿜어낸 죽이 튄 옷을 간단히 닦고 설거지를 시작했다.그러고 부엌까지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서야 내 쪽으로 걸어왔다.“화장실 좀 써도 될까요?”그의 정중한 태도에 나는 무심하게 손짓했다.“맘대로 쓰세요.”그런데, 바로 이어진 말이 내 손을 멈추게 했다.“샤워도 좀 해야겠네요.”나는 즉시 그의 얼굴을 바라봤고 그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태연하게 서 있었다.마치 내가 이상한 생각을 한다면 그건 내 문제라는 듯한 표정으로 말이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머리카락을 보았다.아직도 죽이 튀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그제야 나는 생각을 바꿨다.‘아... 샤우할만 하네.’그래서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 그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갈아입을 옷 있나요?”나는 그제야 그가 처음부터 이걸 의도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순간적으로 거절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가 덧붙인 말이 내 결정을 흔들어 놓았다.“헌 옷이라도 괜찮아요.”그는 진정우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나도 분명했다.내 집에 남자의 옷이 있다면 그건 당연히 진정우의 것일 테니까.나는 그를 노려봤지만 그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었다.이건 완벽한 연기였다.그러니까 내가 괜한 의미를 부여하면 오히려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는 상황이었다.나는 내심 한숨을 쉬며 억지로 무덤덤한 척 대답했다.“찾아볼게요.”나는 옷장을 열어 진정우의 옷을 손에 들었다.그 순간 나는 마음이 매우 복잡해졌다.이걸
“와서 밥 먹어요.”배성재가 나를 부르자 나는 그대로 서서 그를 바라봤다. 그는 식탁 위에 수저를 놓으며 다시 말했다.“와서 맛 좀 봐요.”주방 조명 아래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진정우와 닮아 있었다.특히 조금 전 죽을 저을 때의 습관까지 똑같았다.사람은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몸에 밴 습관은 쉽게 숨길 수 없는 법이다.나는 그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확신했다.배성재, 당신이 바로 진정우 맞지?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더 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다.나는 조용히 그에게 다가가, 그의 등을 감싸안았다.“...”그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지만 그는 나를 밀어내지는 않고 대신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밥 먹어요.”나는 그의 등을 꼭 끌어안은 채 낮게 속삭였다.“당신... 진정우 맞죠?”그는 침묵했고 나는 그의 몸을 돌려세워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여긴 우리 둘뿐이에요. 나한테만은 솔직해져요. 당신이 진정우라는 거... 인정해 줄 수 없어요?”그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가 그의 한 마디는 내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렸다.“아닙니다.”나는 멍해진 채 그를 바라봤고 그는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내 이름은 배성재입니다.”그 순간 내 손이 저절로 힘을 잃고 그의 소매를 놓아버렸다.나는 한 발짝 물러서며 고개를 끄덕였다.“미안해요. 당신이 이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하는 모습이... 너무 똑같았어요. 심지어 죽을 저을 때도 똑같이 왼손으로 세 번 저었어요.”그는 약간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그냥 우연의 일치겠죠.”“그러게요. 참 신기하죠. 너무 우연이 겹치니까... 저도 모르게 또 헷갈렸어요.”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식탁에 앉았다.그리고 젓가락을 들어 그가 만든 음식을 한 입 넣었다.그런데...나는 순간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그가 눈치를 챘는지 곧바로 물었다.“맛이 없나요? 아니면 간이 안 맞아요?”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맛이 없어서가 아니고 간이 부족해서도 아니었다.이건 분명히 그 사람의 맛
나는 배성재에게 가까이 다가가 일부러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흔히들 남자는 유혹에 약하다고 하지만 그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보고 싶었다.“당신 집에서 하죠.”그는 아무런 변화 없는 얼굴로 대답하더니 곧바로 나와의 거리를 벌렸다.그런 그의 태도를 보자, 문득 진정우와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고 그때도 그는 쉽게 휘둘리지 않았다.지금의 배성재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를 데리고 집으로 향했고 그는 곧바로 부엌으로 가 요리를 시작했다.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봤다.그는 예전에 진정우가 자주 두르던 앞치마를 묶고 한결같은 동작으로 채소를 씻고 손질했다.그 순간, 마치 진정우가 돌아온 것 같았다.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며 이 사람이 정말 진정우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또다시 하게 됐다.하지만 이내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그는 진정우가 아니다. 나는 수없이 부정하고 또다시 인정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그러던 중, 휴대전화가 울렸다.“언니 아직 안 잤지?”전화기 너머에서 진소영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들려왔다.“아니. 지금 밥 먹으려던 참이야.”나는 여전히 부엌에 있는 배성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이 시간에? 집에서 직접 해 먹어? 아니면 배달시킨 거야?”진소영의 물음에 나는 자세를 바꿔 옆으로 누웠다.“해 먹지.”“오빠가 있었으면 절대 언니가 직접 요리하게 두지 않았을 텐데.”진소영이 잠시 말을 멈추더니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혹시 요즘 오빠랑 연락했어? 여전히 전화가 안 돼서 마음이 불안해.”나는 배성재를 바라보며 천천히 대답했다.“응, 연락했어.”그 순간, 배성재가 왼손으로 조심스럽게 죽을 저었다.그런데 그는 죽을 세 번 저었다. 나는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진정우도 죽을 끓일 때마다 항상 정확히 세 번 저었고 그건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그만의 방식이었다.이것도 우연일까?나는 순간적으로 숨이 멎는 듯했다. 진소영이 계속해서 무언가 말하고 있었지만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나는 멍
손끝에 날카로운 통증이 스쳤다. 본능적으로 손을 움켜쥐려 했지만 배성재가 단단히 붙잡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조금만 참으세요. 금방 끝납니다.”그의 목소리는 전에 듣던 차가운 톤과 달리 부드러웠다.‘이 사람, 기분이 바뀌는 속도가 한여름 날씨보다 더 변덕스럽네.’간호사는 능숙한 솜씨로 내 손끝에 박힌 유리 조각을 제거했다. 그녀는 조각을 핀셋으로 집어 들어 내게 보여주며 말했다.“보세요. 이렇게 크잖아요. 그대로 두면 계속 찌르고 아팠을 거예요.”나는 언제 유리가 박혔는지도 몰랐다. 아마 아까 재떨이를 던질 때 튀어서 박힌 듯했다.간호사는 조심스럽게 소독한 뒤, 작은 반창고를 붙여주었다.“다 됐습니다.”그러자 배성재가 짧게 말했다.“고맙습니다.”그는 간호사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고서야 내 손을 놓았다.나는 순간적으로 손을 움츠리며 반창고가 붙은 손끝을 바라보다가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성재 씨는요?”“뭐가요?”“다치신 곳 없어요?”“없습니다.”방금 나를 구해주면서 몇 번이나 뒹굴었는데 하나도 다친 데가 하나도 없다니. 배성재는 보기보다 훨씬 단단한 사람이었다. 병원 복도를 걸어 나오며 나는 문득 생각났다.“이제 말해보세요. 당신,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거죠? 나한테 복수하려는 건가요? 아니면 또 다른 속셈이라도 있는 거예요?”그는 미묘하게 눈썹을 찌푸렸다.“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네요.”나는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아니 당신 나 엄청 싫어하잖아요. 그런데 방금 전까지 내 손까지 잡아가며 치료해 줬잖아요. 그게 무슨 의미냐고요.”“당신이 다친 건 저 때문이잖아요. 병원에 데려온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요?”그의 태도는 이상할 정도로 태연했다.“그렇다면 우리 이제 퉁친 거네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었다.“제가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과 정말 많이 닮았나요?”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처음엔 그랬죠.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점점 다른 사람이란
“그냥 빚을 갚은 겁니다.”배성재의 대답은 단순했고 동시에 그가 나를 오해했던 일도 떠올랐다.“그럼 왜 그렇게 딱 맞춰 제가 위험할 때 나타난 거죠? 저도 이제 당신이 일부러 판 함정 아닐까 의심해야 하는 건가요?”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전방을 주시한 채, 담담하게 대답했다.“미안합니다. 제가 당신을 오해했군요.”그의 뜻밖의 빠른 인정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방금 전에 그 남자가 전화하는 걸 들었어요. 오늘 일은 강유형의 짓이 아니라, 강진혁이 주도한 거더군요.”그의 말에 나는 순간 멍해졌다.‘뭐라고? 방금 그 남자는 분명 강유형이라고 했는데?’그러자 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증거가 있습니다. 녹음해 뒀어요.”그는 휴대폰을 꺼내 녹음 파일을 재생했다.“대표님, 일 처리 끝났습니다. 지원 씨가 강유형 님이 한 짓이라고 믿고 있습니다.”나는 휴대폰을 쥔 손을 살짝 떨었다.나는 지금까지 강유형이 움직였다고 확신했었지만 이 녹음이 사실이라면 강진혁은 내가 강유형을 의심하도록 유도한 셈이고 최근 강유형이 나한테 신경 쓰는 게 불편했던 거였다.나는 불현듯, 진정우가 사고를 당했던 날이 떠올랐다.그때도 강진혁은 진정우, 강유형, 그리고 신지태까지 한 번에 제거하려 했었다.그는 나를 얻기 위해서라면 가족이고 뭐고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만약 그가 나를 차지할 수 없다면 나 역시도 제거 대상이 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평소 온화하고 친절했던 그의 모습과, 지금 그의 행동이 너무나 대조적이었다.강진혁은 원래부터 이런 사람이었나? 아니면 처음부터 연기였던 걸까?”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창밖을 바라봤다. 그렇게 아무런 말 없이 병원에 도착했고 차가 멈춰 선 순간 배성재가 내게 물었다.“조금 전에 당신을 치려던 차, 누가 보낸 거라고 생각해요?”나는 순간 당황하며 그를 바라봤다.사실, 지금까지 그 부분을 깊이 생각하지 못했지만 확실한 건, 그 차는 분명 나를 겨냥한 것이었다.그리고 만약 배성재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쯤 크게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동안 오지 않다가 오늘 왔는데 공교롭게도 배성재가 여기 있었고 또 마침 사고까지 났다.이건 분명 우연이 아니었고 누군가 일부러 꾸민 일일 가능성이 높았다.나는 그대로 주차장에서 아까 나한테 맞은 고진구를 가로막았다.“이봐요, 오늘 누가 시켜서 이런 짓을 한 겁니까?”그의 얼굴은 피범벅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모습을 보고 움찔했겠지만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그는 눈을 피하며 말을 얼버무렸다.“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그의 눈빛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나는 그의 반응을 살피며 피식 웃었다.“난 말로 하는 거 귀찮아서 행동으로 보여주는 편이에요.”내가 주변을 둘러보자,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지원 씨, 제발 좀 쉽게 가시죠.”나는 차분히 말했다.“간단해요. 대답만 하면 끝나는 문제입니다.”그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말했다.“그럼 내가 하나씩 말할 테니까, 맞으면 끄덕이고 아니면 고개를 저으면 되겠네요.”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윤지원 씨...”나는 그의 말을 끊고 바로 물었다.“강씨 가문에서 시킨 거죠?”그 순간, 그의 몸이 굳어졌다. 나는 바로 반응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강유형?”“지원 씨...”그의 눈이 크게 흔들렸고 그 반응만으로 충분했다. 내가 강유형을 의심한 이유는 단순했다. 강진혁은 이미 용준호와 손을 잡고 있었다. 만약 그가 배성재를 시험하려 했다면 내부 인물을 이용했을 것이고 굳이 눈앞의 고진구를 끼워 넣을 필요가 없었다.“제발, 도련님을 건드리지 마세요. 그러면 전 끝장납니다.”나는 대답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주차장에 세워진 차들의 반사경에 비친 고진구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들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마도 강유형에게 보고하는 거겠지. 참 열심이네, 강유형.”그가 이 모든 걸 배성재를 망신 주기 위해 벌인 일이란 건 뻔했다.배성재가 무너지면 나는 다시 그를 진정우와 비교할
나는 혹시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하려고 제일 먼저 배성재를 바라보았다.다행히 멀쩡히 서 있긴 했지만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놀란 건가?’하지만 만약 그가 진정우였다면 그는 결코 이런 상황에서 주눅 들지 않았을 것이다. 배성재가 진정우가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나는 바닥에 깨진 유리 조각들을 조심히 밟으며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무슨 일입니까?”그러나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고 오히려 불편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그때, 방 안에 앉아 있던 한 남자가 비아냥거리듯 내게 말을 걸었다.“넌 또 누구야?”그러자 옆자리에 있던 다른 남자가 그의 팔을 살짝 당기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윤씨 가문 사람이야.”그제야 그 남자가 다시 나를 찬찬히 훑어보더니 이번엔 실소를 터뜨렸다.“강유형이 버린 여자잖아?”순간 속이 메스꺼웠다. 이런 식으로 내 이름이 떠돌다니. 도대체 강유형은 무슨 생각으로 나와 다시 관계를 맺으려 했던 걸까?만약 내가 정말 그와 다시 엮였다면 이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을 것이다.나는 차분히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저는 윤지원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제 사람입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그 말이 끝나자, 아까 나를 비웃었던 거구의 남자가 다시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네가 뭔데 책임진다는 거야?”이런 부류의 인간들은 대화가 통하지 않아 나는 무시하고 곧장 배성재의 손목을 잡았다.“갑시다.”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다시 한번 손목을 당기자 배성재가 천천히 나를 바라봤다.“X발, 별별 것들이 다 까불대네. 어디서 나서서 이러는 거야?”그 남자가 험한 욕설을 내뱉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이제 대화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군.’나는 주저 없이 테이블 위에 놓인 유리 재떨이를 그대로 집어 들고 있는 힘껏 그의 얼굴을 향해 내리쳤다.쾅!묵직한 소리와 함께 그 남자가 뒤로 휘청거렸고 방 안의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너무나 익숙한 얼굴. 하지만 내가 이 사람을 모르는 척할 수 있을까?아니 이제는 그래야만 한다. 그는 더 이상 내 인생에 발을 들일 수 없도록, 스스로 포기하도록 만들어야 했다.“난 이미 널 낯선 사람으로 보고 있어.”나는 조용히 손을 뺐고 더 이상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왔다.강유형이 언제 떠났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가 내게 보낸 메시지를 한 번 쓱 훑어봤다.내용은 어제 용준호가 했던 말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배성재의 부모와 형제자매까지 포함된 상세한 신상 정보가 추가되어 있었다.이걸 나에게 보낸 이유는 단 하나, 즉 배성재를 진정우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나는 그 메시지를 보고 피식 웃었고 점심 무렵, 용준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아마 어젯밤 내가 전화를 씹었던 걸 아직도 기분 나빠하는 거야?’나는 대신, 그냥 직접 드래곤킹으로 향했다.이번에는 숨길 것도 없이 당당하게 들어가 로비 매니저를 불러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용준호 좀 보자고 해. 내 이름 대면 알 거야.”매니저의 태도가 순식간에 바뀌었다.“윤지원 씨,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이걸 보니 용준호가 미리 내 이름을 언급해 두었음이 분명했다. 그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한 걸 보면 나를 견제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나는 안내된 방에 들어가 앉았다. 매니저가 음료나 원하는 서비스를 묻자, 나는 간단히 말했다.“과일이랑 음료만 주세요.”그리고 배성재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지금 용준호는 분명 나를 낚으려고 배성재를 미끼로 던진 상태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그가 먼저 움직이도록 놔둬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용준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올 줄 알았어.”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고 나는 바로 수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계약 정산하러 왔어.”그는 수표를 보지도 않고 오히려 내 얼굴을 살폈다.“고작 이 일 때문에?”“아니면 뭐요? 남자 모델 하나 골라서 밤새 놀고 가라는
“알았어요.”나는 짧게 하고 대답한 뒤,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도 묻지 않고 바로 회의실로 향했다.“잠깐만요.” 허진호가 나를 불러 세웠다. “어제 그 남자 모델, 진짜로 정우 씨 아니에요.”“알아요.” 나는 커피잔을 들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내가 직접 그를 땅에 묻었으니까.”허진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를 그냥 두겠다는 듯 다시 물러섰다. 나는 회의실 문을 열었고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강유형은 마치 내 감정을 읽으려는 듯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하지만 오늘의 나는 요즘 중에서 가장 좋은 상태였다. 게다가 화장까지 하고 나왔으니 거울 속 내 모습이 꽤 근사해 보이기까지 했다.무엇보다도, 밤새 아팠던 다리도 거짓말처럼 나아 이제 걷는 것도 전혀 문제없었다.“좀 늦었네?” 강유형이 나를 훑어보더니 가벼운 농담처럼 말했다.“응, 근데 우리 대표님이 워낙 너그럽거든. 지각했다고 월급 깎지 않더라.”내 말에 강유형의 얼굴이 잠깐 굳어졌다.예전에 내가 KS그룹에 다닐 때, 지각이나 조퇴를 하면 누구든 벌금을 내야 했다. 나는 대표님의 약혼녀라는 타이틀이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예외는 없었다.“어제 너한테 계속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 집까지 갔더니 불도 꺼져 있길래 걱정됐어.”강유형은 거침없이 걱정스러웠던 마음을 내비쳤다.나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집에 가서 바로 잤어.”“그렇게 쉽게 잘 수 있었어?”“못 잘 이유라도 있어?” 나는 그가 나를 찾아온 이유가 배성재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 사람, 진정우 아니야. 내가 직접 조사해 봤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뭔가를 하더니 바로 그때, 내 주머니 속 핸드폰이 가볍게 진동했다.“밤새 사람 시켜서 조사했어. 관련 자료 다 보냈으니까 확인해 봐.”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윤지원, 진정우는 이미 죽었어. 네가 직접 봤잖아.”나는 손에 쥔 커피잔을 가만히 돌리며 대답했다.“나도 알아. 그 사람이 죽었다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