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공원 개장과 관련된 화제와 내가 얽힌 핫이슈는 무려 3일간이나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지만 결국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매일 새로운 화젯거리가 떠돌아다니는 소셜미디어에서 아무리 흥미로운 이야기라도 금세 다른 이야기에 밀리기 마련이다.이 3일은 조나연이 반격하기에 가장 적합한 타이밍이었지만 그녀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강유형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그 영상을 공개할 용기가 없었다.만약 공개한다면 그녀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고 모든 계획이 수포가 되기 때문이다.그렇다고 그녀가 이대로 포기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자살 시도’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쓸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나는 병실에서 삼촌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간호사가 달려와 누군가가 옥상에서 뛰어내리려 한다고 전했다. 그 말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러워졌다.“게다가 임산부라네요. 산후우울증이라도 걸린 건지 모르겠어요.”간호사는 벌써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그때 내 휴대폰이 울렸다. 강유형이었다. 갑자기 눈꺼풀이 두 번이나 떨리며 불안감이 밀려왔다.“여보세요?”“지원아, 조나연이 옥상에서 뛰어내리겠대.”강유형의 목소리는 낮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나는 순간 몸이 굳었다. 조나연이 별의별 일을 다 벌여 왔지만 이번은 차원이 달랐다. 이번엔 자기 목숨을 걸고 심지어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생명까지 걸고 협박을 하고 있었다.삼촌이 옆에 있어 나는 전화를 들고 나가 통화하려고 하자 삼촌은 내 움직임을 눈치챈 듯 손짓으로 앉으라고 했다.“지금 어디야?”나는 강유형에게 물었다.“곧 병원에 도착해.”그의 대답에 나는 침을 삼키며 목이 타들어 가는 기분을 느꼈다.“나 지금 아버님이랑 같이 있어.”강유형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아버지께 숨길 수는 없어. 조나연이 병원 옥상에서 난리를 치는 건 아버지한테 알리려고 하는 거잖아.”“그럼 넌 어떻게 할 생각인데?”나는 그에게 물었지만 머릿속으로는 이미 답이 그려졌다.조나연이 이런 수를 쓰는
날카로운 비명이 들리며 나는 조나연이 옥상 끝으로 조금 더 다가서는 걸 똑똑히 보았다. 나는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심장이 목까지 차오르는 것 같았다.위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와 상관없이 그런 장면 자체가 보는 사람의 숨을 멎게 하고 온몸을 긴장하게 했다.조나연이 이런 행동을 하는 건 강유형이 옥상에 올라갔기 때문일 것 같았다.옥상이 너무 높아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들리지 않았고 나는 그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그때 누군가 내게 말했다.“아가씨, 핸드폰이 울리고 있어요.”그제야 정신이 돌아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전화를 건 사람은 강유형이었다.그가 지금 위에서 조나연과 대치 중인데 내게 전화를 걸 이유는 하나였다.조나연이 전화하게 시킨 것이다. 전화를 받자 예상대로였다. “지원아, 너 아버님을 모시고 여기로 올라와 줘.”나는 당황했다. 내가 올라가는 건 괜찮지만 왜 삼촌까지 불러야 한다는 건가?삼촌은 몸이 좋지 않으셨다. 조나연이 어떤 일을 벌이든 그것을 감당하는 건 무리가 될 수도 있었다.목이 뻣뻣하게 말라오는 느낌에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옥상 끝에 선 조나연을 바라보며 전화를 끊고 인파 속을 헤치고 엘리베이터로 들어섰다.나는 삼촌을 부르지 않고 혼자서 엘리베이터에 탔다.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올라가는 동안, 조나연이 나와 삼촌을 부르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계속 생각했다.옥상 문을 열자 강한 바람이 얼굴을 때리며 소름이 돋았다. 강유형은 나를 바라봤고 나는 조나연을 바라봤다. 그녀 역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소방관이 조나연에게 물었다.“저 사람이 맞나요? 만나고 싶다는 사람이?”조나연은 답했다.“아직 한 명 더 있어요.”나는 단호하게 말했다.“혼자예요. 삼촌은 몸이 안 좋아서 못 오셔요.”조나연의 얼굴이 굳었고 그녀는 날카롭게 말했다.“윤지원, 이쪽으로 와!”강유형이 그녀를 제지하려고 나섰다.“조나연, 지원이를 힘들게 하지 마. 내가 갈게.”조나연은 비웃으며 말했다.“강
“솔직히 말해봐, 너 윤지원이랑 해봤어?”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와 막 들어가려던 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문틈 사이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강유형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지원이가 먼저 다가왔지만 난 관심 없었어.”“강유형, 그렇게 사람 깎아내리지 마. 윤지원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 미인이야. 꽤 많은 사람들이 윤지원을 노리고 있다고.”말하는 사람은 강유형의 친구 신지태였다. 그는 나와 강유형의 10년 감정을 지켜본 증인이기도 했다.“너무 익숙해서 그래.” 강유형이 눈썹을 찌푸렸다.내가 14살 때 강씨 집안으로 보내졌고 그때 처음으로 강유형을 만났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 말했다. 앞으로 강유형과 결혼할 거라고.그 후로 우리는 함께 살았고 어느새 10년이 흘렀다.“그렇지. 너희 둘은 낮에는 한 회사에서 일하면서 얼굴 보고 밤에는 집에 와서 같은 식탁에서 밥 먹고. 아마 상대방이 하루에 몇 번 화장실 가는지까지 다 알겠어.”신지태가 농담을 던지고는 혀를 찼다. “지금은 오래 보면 정든다는 시대가 아니야. 남녀 사이엔 그래도 신선함이 있어야 하지.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그런 느낌, 그래야 감정이 생기고 자극적인 법이야.”강유형은 침묵했고 신지태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듯했다.“그래서 너 윤지원과 결혼할 거야?” 신지태의 질문에 내 숨이 멎는 것 같았다.강유형의 부모님은 우리에게 혼인신고를 하라고 하셨다. 그는 좋다고도, 싫다고도 하지 않았고 나도 그에게 묻지 않았다. 그러니 신지태가 나 대신 물어본 셈이다.강유형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신지태가 웃었다. “결혼하기 싫어?”“...그건 아니야.”“그럼 결혼은 하고 싶은데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는 거지?” 신지태와 강유형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사이라 서로의 마음을 잘 알았다.“지태야, 이런 말 들어봤어?” 강유형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뭔데?”“먹자니 맛없고 버리자니 아깝고.” 강유형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강유형은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고 그의 시선이 내 얼굴에 머물렀다. 굳이 보지 않아도 내 안색이 얼마나 좋지 않은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어디 아파?”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나는 말없이 그의 책상 앞으로 걸어가 목구멍에 맺힌 쓴맛을 삼키며 말했다. “나랑 결혼하고 싶지 않다면 내가 아주머니한테 말씀드릴게.”강유형의 미간 주름이 더 깊어졌다. 그는 내가 그와 신지태의 대화를 들었다는 걸 알아챘다.난 목이 메어 말을 잇기 힘들었다. “난 내가 먹자니 맛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존재가 될 줄은 몰랐어, 강유형...”“모든 사람들 눈에는 우린 이미 부부야.” 강유형이 내 말을 끊었다.‘그래서 뭐? 그 사람들 때문에 나랑 결혼하려는 건가?’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가 나를 사랑해서, 나와 평생을 함께 보내고 싶어서 결혼하는 거였다.‘탁’하는 소리와 함께 강유형의 손에 든 펜이 닫혔고 그의 시선이 내 손에 든 혼인 신고서에 머물렀다. “다음 주 수요일에 혼인신고 하러 가자.”이 말은 내가 듣고 싶었 거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가슴이 아팠다. 그것도 아주...난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강유형, 억지로 할 필요 없어. 나도 그럴 필요 없고.”“윤지원!” 그가 날카롭게 내 이름을 불렀다.나는 움찔했고 고개를 들어 그의 짜증 난 듯한 눈과 마주쳤다.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고 혼인 신고서를 쥔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그의 턱이 굳어졌다. “이리 줘.”나는 움직이지 않았고 분위기는 더욱 팽팽해졌다.몇 초 후, 그가 일어나 내게로 왔고 내 앞에 서더니 한숨을 살짝 내쉬며 말했다. “지태랑 한 얘기는 그냥 농담이었어. 넌 왜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거야?”정말 농담이었을까?“너도 알잖아. 남자들에게 체면이 얼마나 중요한 거.” 그의 손이 내 팔을 잡더니 천천히 내려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혼인 신고서를 빼앗아 갔다.“앞으로는 남의 말 함부로 믿지 마.” 그가 돌아서서 혼인 신고서를 서랍에 넣고 옆에 있
하루 종일 이 문제를 고민했지만 오후에 그가 나를 부를 때까지도 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도 난 그를 따라나섰다.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10년이란 시간 동안 나는 그에게, 그리고 퇴근 후 강씨 집안으로 돌아가는 일에 익숙해져 버렸다.“왜 말이 없어?”돌아가는 길에 강유형이 내 기분이 좋지 않음을 눈치챘는지 먼저 물었다.나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강유형, 우리 그냥...”뒷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의 휴대폰이 울리면서 차량 디스플레이에 이름 없는 번호가 떴고 강유형의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그가 긴장했다.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다.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는 이미 재빨리 차량 스피커를 끄고 블루투스로 전환했다. “여보세요... 네, 지금 가고 있습니다.”통화 시간은 짧았다. 그는 전화를 끊고 나를 보며 말했다. “지원아, 급한 일이 생겨서 집에 데려다줄 수가 없겠어.”사실 그가 말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나를 내버려두고 갈 거라는 걸. 이미 처음이 아니었으니까.그래도 그가 말하기 전까지는 나를 먼저 데려다줄 거라고 기대했었다.가슴 한구석이 갑자기 텅 비어 아파왔고 나는 서운함을 억누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강유형의 턱이 굳어졌다. 그는 대답 대신 밖을 보며 말했다. “저기서 내려줄게. 택시 타고 돌아가.”설명조차 해주지 않고 이미 다 결정해 놓은 듯했다. 그러니 내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더 묻고 떼를 쓰는 건 스스로 망신당하는 일일 뿐이다.“집에 도착하면 전화... 메시지 보내.” 강유형이 당부하는 사이 핸들은 이미 돌아가 도로변 임시 주차장에 멈춰 섰다.나는 가방을 꼭 쥐고 차에서 내렸다.내가 예민한 게 아니다. 그가 발신번호를 본 후의 이상한 반응부터 차량 스피커로 통화하지 않으려 한 것까지, 이미 예감이 왔다.다만 묻지도 말하지도 않았을 뿐이다.어떤 일들은 묻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그대로 두고 자기 위안을 할 수 있으니.“조심해서 가!” 서두르는 와중에
평생 이런 일을 겪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성추행 혐의로 경찰서에 끌려올 줄이야.그날 내가 부딪힌 건 고작 열일곱 살의 미성년자였다. 그 녀석은 내가 자기를 더럽게 만졌다고 우겼고 내가 아무리 부인해도 소용없었다.“어디를 만졌다는 거죠?” 경찰이 꼼꼼하게 물었다.조태혁이라는 소년은 나를 노려보며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더니 허리 아래를 가리켰다. “여기요, 여기... 이 여자가 다 만졌어요.”‘개소리하지 마, 이 자식아!’나는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강유형 같은 미남도 못 만져본 내가 겨우 털도 다 안 난 꼬맹이를 만진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경찰이 다시 나를 쳐다보자 난 그가 묻기도 전에 먼저 부인했다. “전 그 애를 만지지 않았어요. 그저 실수로 부딪쳤을 뿐이에요.”“술 드셨나요?” 경찰의 눈빛이 의미심장했다.이 사회에서 남자가 술에 찌들어 사는 건 정상이지만 여자가 술을 마시면 대부분 품행이 의심받게 된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셨어요.”“얼마나 드셨죠?” 경찰의 이 질문이 지금 상황과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맥주 한 병이요.”경찰은 믿지 않는 눈빛을 보였다. 난 즉시 내 친구 안리영이 증인이 돼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 꼬맹이와 내가 다투고 있을 때 안리영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출혈 중인 산모를 구하러 병원으로 긴급 소환됐다고.난 경찰의 의도를 이해하고 다시 한번 설명했다. “전 취하지 않았어요. 술 핑계로 이 꼬맹이를 건드릴 이유도 없고요.”경찰은 내 말을 기록하고 조태혁을 바라봤다. “저 여성분께서 만졌다고 확신해요? 거짓말이나 무고는 법적 책임을 져야 합니다.”“당연히 확실하죠” 조태혁은 정말 고집불통이었다. 나는 화가 나서 일어나 그를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그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조태혁의 눈이 갑자기 반짝였다. “누나, 왔어?”그가 미성년자니 당연히 보호자를 불렀을 거다. 나는 그의 가족에게 설명하려고 고개를
내 손이 아플 정도로 꽉 잡혔다. 분명 그가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이게 질투인 걸까?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이 스치는 순간 강유형은 내 손을 놓았고 그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윤지원, 내가 한마디 했다고 이렇게 복수하려는 거야?”나는 순간 당황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으니까.“아니 난...” 설명하려는 내 말은 도중에 끊겼다.“너 정말로 그 녀석을 만졌어? 정말로 그곳을?” 강유형의 턱이 굳어졌고 그의 눈에는 사람을 잡아먹을 것 같은 무서운 빛이 서렸다.이런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는데 역시 질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순간 내 마음속의 불편함이 많이 사라졌다. 그가 나를 여전히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만약 그가 나를 단순히 여동생이나 친구로만 여겼다면 내가 다른 남자를 만졌다고 해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아니야.” 나는 다시 한번 부인했다.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조태혁이 안에서 나왔고, 나를 향해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변태 아줌마, 또 우리 매형 꼬시려고?”사람 성격 쉽게 안 변한다더니 정말 그랬다.조태혁이 나를 바라보는 그 비열한 표정은 전생에 무슨 원수라도 졌나 싶을 정도였다.이쪽으로 걸어오는 남매를 보면서, 특히 조나연의 그 순수한 모습과 그녀가 강유형을 만졌던 장면을 떠올리며 나는 손을 들어 강유형의 팔을 감쌌다.하지만 그의 근육이 순간 굳어지는 걸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또 거짓말이지.” 조나연이 조태혁의 귀를 꼬집으며 다가왔다.그녀는 우리 앞에 서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유형 씨, 지원 씨, 정말 미안해요.”“네 잘못 아니야.” 강유형이 조태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음에 또 이런 짓 하면 아무도 널 구해주지 않을 거야.”“흥.” 조태혁이 불만스럽게 강유형을 흘겨보았다. “당신이 누군데요? 뭔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해요? 당신이 우리 새 매형이 되겠다면 말 들을게요.”“조태혁!”조나연이 꾸짖으며 그를 한 번 더 때렸고 조태혁은 피하며 말했다. “누나, 저 사람
조나연은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아이는 무사했고 그녀는 병실로 돌아왔다. 창백한 얼굴에 붉어진 눈, 거기에 하얀 달빛까지 더해져 정말 애처롭고 가련해 보였다.“너무 걱정하지 마. 아이는 괜찮아.” 강유형이 위로했다.“유형 씨, 나 너무 무서웠어.” 조나연이 울음을 터뜨렸다. 강유형이 휴지를 건네자 조나연은 그것을 받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그의 손등에 기댔다.비록 가엾긴 하지만 그렇다고 남의 약혼자를 자기 남자처럼 대해도 되는 걸까?나는 다가가 말했다. “나연 씨,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가 흥분하면 태아에게 좋지 않대요. 겨우 아이를 지키셨는데 이렇게 울다가 또 문제가 생기면 곤란해질 거예요.”말하면서 난 그녀를 부축하며 강유형과 살짝 떼어놓았다. 하지만 강유형의 손등에 남은 눈물자국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내 것이 다른 사람에 의해 더럽혀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깨끗한 걸 좋아한다. 일상에서도 그렇고 감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조나연은 내가 이렇게 말한 것에 놀란 듯했다. 그녀는 얼굴색이 확 변했다가 순식간에 표정을 바로 잡았다.“유형 씨, 미안해. 내가 이렇게...”그녀가 휴지를 집어 강유형의 손을 닦으려 하자 내가 가로막았다. “나연 씨, 지금은 함부로 움직이면 안 돼요.”조나연의 표정이 굳었다. 눈물 고인 눈으로 강유형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분명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병실을 나오자마자 나는 강유형에게 물었다. “나연 씨가 널 좋아하나 봐?”“아니야!”강유형이 부인했다.“그럼 넌? 나연 씨를 좋아해?”한 번에 확실히 물어보고 싶었다. 애매하게 끌려다니고 싶지 않았으니까.강유형의 표정이 굳어졌다. 몇 초 후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그저 친구일 뿐이야...”정말 그저 친구일까?“석진이가 세상을 떠날 때 내 손을 잡고 나연이를 돌봐달라고 했어...” 강유형의 목소리가 떨렸고 늘어뜨린 손도 마찬가지였다.임석진의 죽음을 언급할 때마다 그는 항상 이렇게 격앙되
날카로운 비명이 들리며 나는 조나연이 옥상 끝으로 조금 더 다가서는 걸 똑똑히 보았다. 나는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심장이 목까지 차오르는 것 같았다.위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와 상관없이 그런 장면 자체가 보는 사람의 숨을 멎게 하고 온몸을 긴장하게 했다.조나연이 이런 행동을 하는 건 강유형이 옥상에 올라갔기 때문일 것 같았다.옥상이 너무 높아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들리지 않았고 나는 그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그때 누군가 내게 말했다.“아가씨, 핸드폰이 울리고 있어요.”그제야 정신이 돌아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전화를 건 사람은 강유형이었다.그가 지금 위에서 조나연과 대치 중인데 내게 전화를 걸 이유는 하나였다.조나연이 전화하게 시킨 것이다. 전화를 받자 예상대로였다. “지원아, 너 아버님을 모시고 여기로 올라와 줘.”나는 당황했다. 내가 올라가는 건 괜찮지만 왜 삼촌까지 불러야 한다는 건가?삼촌은 몸이 좋지 않으셨다. 조나연이 어떤 일을 벌이든 그것을 감당하는 건 무리가 될 수도 있었다.목이 뻣뻣하게 말라오는 느낌에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옥상 끝에 선 조나연을 바라보며 전화를 끊고 인파 속을 헤치고 엘리베이터로 들어섰다.나는 삼촌을 부르지 않고 혼자서 엘리베이터에 탔다.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올라가는 동안, 조나연이 나와 삼촌을 부르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계속 생각했다.옥상 문을 열자 강한 바람이 얼굴을 때리며 소름이 돋았다. 강유형은 나를 바라봤고 나는 조나연을 바라봤다. 그녀 역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소방관이 조나연에게 물었다.“저 사람이 맞나요? 만나고 싶다는 사람이?”조나연은 답했다.“아직 한 명 더 있어요.”나는 단호하게 말했다.“혼자예요. 삼촌은 몸이 안 좋아서 못 오셔요.”조나연의 얼굴이 굳었고 그녀는 날카롭게 말했다.“윤지원, 이쪽으로 와!”강유형이 그녀를 제지하려고 나섰다.“조나연, 지원이를 힘들게 하지 마. 내가 갈게.”조나연은 비웃으며 말했다.“강
놀이공원 개장과 관련된 화제와 내가 얽힌 핫이슈는 무려 3일간이나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지만 결국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매일 새로운 화젯거리가 떠돌아다니는 소셜미디어에서 아무리 흥미로운 이야기라도 금세 다른 이야기에 밀리기 마련이다.이 3일은 조나연이 반격하기에 가장 적합한 타이밍이었지만 그녀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강유형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그 영상을 공개할 용기가 없었다.만약 공개한다면 그녀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고 모든 계획이 수포가 되기 때문이다.그렇다고 그녀가 이대로 포기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자살 시도’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쓸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나는 병실에서 삼촌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간호사가 달려와 누군가가 옥상에서 뛰어내리려 한다고 전했다. 그 말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러워졌다.“게다가 임산부라네요. 산후우울증이라도 걸린 건지 모르겠어요.”간호사는 벌써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그때 내 휴대폰이 울렸다. 강유형이었다. 갑자기 눈꺼풀이 두 번이나 떨리며 불안감이 밀려왔다.“여보세요?”“지원아, 조나연이 옥상에서 뛰어내리겠대.”강유형의 목소리는 낮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나는 순간 몸이 굳었다. 조나연이 별의별 일을 다 벌여 왔지만 이번은 차원이 달랐다. 이번엔 자기 목숨을 걸고 심지어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생명까지 걸고 협박을 하고 있었다.삼촌이 옆에 있어 나는 전화를 들고 나가 통화하려고 하자 삼촌은 내 움직임을 눈치챈 듯 손짓으로 앉으라고 했다.“지금 어디야?”나는 강유형에게 물었다.“곧 병원에 도착해.”그의 대답에 나는 침을 삼키며 목이 타들어 가는 기분을 느꼈다.“나 지금 아버님이랑 같이 있어.”강유형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아버지께 숨길 수는 없어. 조나연이 병원 옥상에서 난리를 치는 건 아버지한테 알리려고 하는 거잖아.”“그럼 넌 어떻게 할 생각인데?”나는 그에게 물었지만 머릿속으로는 이미 답이 그려졌다.조나연이 이런 수를 쓰는
강유형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조나연은 그냥 마지막 결정타에 불과했어.”나는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었고 문득 이런 말이 떠올랐다.‘과거의 상처를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면 그건 정말로 마음을 내려놓은 거다.’“지원아, 나는 이해가 안 돼. 조나연 일은 내가 잘못한 건 맞아. 하지만 그전에는 내가 너한테 정말 잘했잖아.”강유형은 우리가 멀어진 이유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네가 나한테 잘해줬다는 건 인정해. 근데 내가 너한테 한 거는? 느꼈어? 아니면 보긴 했어?”내가 조용히 묻자 강유형은 한참 나를 보다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내가 널 소중히 여기지 못했어. 그래서 널 잃은 거야.”“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야? 차라리 조나연 얘기를 하자.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혹시 걔랑 같이 있고 싶어도 삼촌과 아줌마가 허락하지 않을까 봐서 걱정이야?”나는 대화를 원래 주제로 돌렸다.“내가 걔랑 같이 있고 싶다고? 넌 날 뭐로 보는 거야? 병신? 아니면 미친놈으로 보는 거야?”강유형의 목소리가 갑자기 격앙됐다.“그 영상으로 날 협박하겠다며? 공개하겠다고? 그럼 공개하게 두지 뭐.”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강유형은 협박에 굴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업에서도, 개인적인 일에서도.하지만 나는 우려를 떨칠 수 없었다.“정말로 그 영상을 공개하면 회사도 타격을 받을 거고 아버님도 충격을 견디지 못하실 거야.”나는 조용히 경고했다.“그래서 네가 필요해.”그는 마침내 이 대화를 시작한 목적을 밝혔다. 아침 햇살 아래, 그의 얼굴은 여전히 뚜렷하고 잘생겼지만 그늘진 표정이 그를 낯설고 멀게 느껴지게 했다.“도대체 뭘 도와달라는 건데?”“우리 아버지를 좀 설득해 줘.”그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솔직히 나랑 형 둘이 합쳐도 너 하나만 못하잖아. 네가 우리 아버지의 딸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그의 농담에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무슨 소리야, 진짜.”나는 그를 발로 가볍게 찼다. 그러자 강
강유형은 내 말을 듣더니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나는 그의 의도를 이미 짐작할 수 있었다.“원하는 조건이 ‘강씨 집안의 안주인’이 되는 거지?”내가 던진 말에 강유형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마치 내가 어떻게 이 모든 걸 다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잠시 후,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조나연을 꽤 잘 아네.”그 말은 직접적으로 날 비난하는 건 아니었지만 비꼬는 느낌은 충분했다. 내 남자를 빼앗아 간 여자가 원하는 걸 내가 알아챘다는 게 그에겐 의외였던 모양이다.“조나연을 잘 알아서가 아니라, 하는 행동을 보면 다 보이잖아. 부귀영화에 얼마나 집착하는지 너무 명확하니까.”내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어둑했던 하늘이 갑자기 밝아졌다. 나는 항상 밤이 아침으로 바뀌는 건 서서히 이루어지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건 한순간에 찾아오는 변화였다.그래서 시인들이 새벽을 ‘동틀 무렵’이라 표현하는 거겠지.‘트다’라는 표현이 정말 적절했다.검은 밤이 깨지고 밝은 빛이 스며드는 그 순간, 그건 확실히 파괴적일 만큼 강렬했다.“강유형, 놀이공원은 물론 큰 자산이긴 하지. 하지만 강씨 집안 안주인이 돼서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아.”내 말에 강유형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나를 바라봤다. 그가 내게 놀이공원을 선물한 건 사실이었다.하지만 그의 재산은 놀이공원 열 곳, 백 곳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그의 아내가 되는 건 곧 그의 재산 절반을 가지는 것과 같았다.조나연은 이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가 임석진의 죽음을 이용해 이런 길을 계획했을 리 없었다.“그녀가 원하는 건 내가 아니라, 내 돈이야.”강유형은 자조 섞인 말투로 말했다.나는 피식 웃었다.“그걸 이제야 깨달았어?”강유형은 정말 조나연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걸까? 이런 결혼이나 연애에서 진정한 사랑이란 게 얼마나 될까.대부분은 가문 사이의 동맹이나 이익 때문 아닌가.문득, 함소은이 떠올랐다. 젊고 앳된 그녀
강유형이 술에 너무 취해서 내가 데리러 온 것조차 기억하지 못한 게 화가 났었다.강유형은 그날 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여 가볍게 내 입술에 닿았다.그리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바보.”그날의 하늘은 지금과 비슷했다. 날이 밝아 오기 직전이었다. 술에 취한 그는 들뜬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산꼭대기로 가서 별 볼래?”나는 그의 습관을 잘 알았다. 그는 술에 취하면 흥분해서 잠들기를 싫어했다. 술을 마신 후 바로 잠들면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아서 어지럽다고 했다.그래서 그는 술을 마실 때마다 내가 운전해 그를 데리고 여기저기 드라이브를 다니곤 했다.그날도 나는 차를 몰아 그를 산꼭대기로 데려갔다. 우리는 큰 바위 위에 나란히 앉아 서로 기대며 새벽의 별들을 보았다.밤하늘의 어둠이 서서히 사라지고 해가 지평선 위로 떠오르며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는 순간을 함께했다.그날 그는 내 어깨에 기대어 잠들었다. 뜨거운 햇살이 그의 얼굴에 닿을 때까지 깊이 잠들었던 그는, 눈을 뜨고서야 산에서 내려갔다.나는 고개를 들어 머리 위로 펼쳐진 밤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예전에는 자주 이랬었는데.”“그래? 난 까먹었어.”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까먹었다고? 그래.’그가 나와의 약속과 함께했던 행복한 시간을 잊지 않았다면, 어찌 조나연의 유혹에 넘어갔겠는가.“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조나연 일은 다 알고 있었지. 왜 진작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그의 물음은 전혀 놀랍지 않았다. 나는 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말한다고 뭐가 달라졌을까? 오늘처럼 조나연이랑 크게 싸웠겠지. 그렇다고 상황이 변했을 것 같아?”임석진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다시 살아날 수 없다. 그리고 나와 강유형은 절대 과거로 돌아갈 수 없었다.내 대답에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걸 알게 된 이후, 내가 바보 같고 한심하게 느껴졌겠지?”“아니야.”나는 솔직히 대답했
강유형의 얼굴이 굳어졌고 그의 눈동자가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히 흔들렸다.그 시선은 곧바로 내가 진정우와 꼭 잡고 있는 손으로 향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 역시 그러했다. 먼저 입을 연 건 진정우였다.“유형 씨, 좋은 아침이네요.”‘아침이라니, 아직 날도 밝지 않았는데...’진정우의 인사에 강유형은 정신을 차린 듯 보였다. 그는 턱을 약간 당기며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지원아, 할 말이 있어.”나는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어차피 언젠가 해야 할 말이라면 지금 말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말을 나누고 모든 걸 털어버리면 다시는 이 문제로 얽힐 일이 없을 테니까.“정우야, 먼저 올라가 있어. 나 우유가 마시고 싶어.”나는 마치 평범한 아내처럼 그에게 말했다. 진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옷깃을 단단히 여며주었다.“아침엔 쌀쌀해.”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고 강유형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엘리베이터의 숫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엘리베이터가 멈췄을 때야 나를 다시 바라보며 물었다.“넌 이 집을 언제 산 거야?”처음 조나연이 이곳에 산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강유형이 일부러 그녀에게 우리 집 위층을 사주어 나를 불쾌하게 하려 했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방금 그의 반응을 보니, 내가 그를 오해했던 것 같았다.“아마 네가 사기 전이었을 거야.”내 대답에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 그의 눈에는 더 짙은 음침함이 서렸다.나는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혹시 이 집, 조나연이 사달라고 한 거야?”강유형이 대답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침묵은 곧 답이었다.그녀는 정말로 치밀하고 악랄했다. 조나연은 의도적으로 우리 집 바로 위층의 집을 산 것이다.강유형과의 관계를 부각하면서 나를 괴롭히려는 목적이거나, 아니면 강유형이 나와 진정우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나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그녀의 계획은 나에게 이미 간파당했다.“할 말이 있다며? 여기서?”나는 강유형
사실 신지태에게 조사를 부탁한 건, 진정우의 결론만 믿고 기다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결국 당시 사고 차량을 운전했던 건 그의 아버지였으니까.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내가 너무 많이 생각한 것 같았다.“그때 브레이크 고장이었다는 걸 의심하고 있는 거지?”진정우가 내게 물었다. 이제 우리 관계는 공식적으로 확립되었으니, 그에게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다.“맞아. 난 진실을 알고 싶어.”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부드럽게 물었다.“지원아, 만약... 만약에... 그 사고의 브레이크 고장이 우리 아버지와 관련이 있다면, 너는... 날 떠나겠어?”그 말은 심장을 찌르는 듯 아팠다. 목이 바짝 타들어 가며 마치 누군가 내 목을 움켜쥔 것 같았다.그가 왜 이런 질문을 했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런 상황을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기에 대답하기 두려웠다.“모르겠어.”내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설령 그 사고가 그의 아버지와 관련 있다고 해도 그는 그이고 그의 아버지는 그의 아버지일 뿐, 그 잘못을 진정우에게 돌릴 수 없다는 목소리가 들렸다.하지만 그런 생각이 논리적으로 맞다 해도,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였다.나는 자세를 조금 바꿔 그의 품에서 더 편안한 위치를 찾았다.“정우야, 만약 정말 그렇다면 넌 어떻게 할 거야? 너는... 너희 아버지의 잘못 때문에 나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날 떠날 거야?”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그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 역시 답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난 단 하나만 알아. 널 잃을 순 없다는 거야.”‘날 떠나겠냐’는 질문과 ‘널 잃을 순 없다’는 그의 대답은 내 마음을 숨 막히게 했다.“진정우, 그런 일은 없을 거야. 하늘이 우리에게 그렇게 잔인하진 않을 거라고 믿어.”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내 피부에 닿으며 점점 더 깊이 나를 삼켜갔다.그 순간, 다른 생각은 더
내가 그에게 무엇을 조사해달라고 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이건 분명 나에게 축하할 일이 세 가지나 겹친 날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불안한 예감에 눈꺼풀이 두 번 연속 떨렸다.“결과가 어떻게 나왔어?”나는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네가 봤던 자료는 완전하지 않았어. 뒤에 최종 결론이 있었는데 네가 왜 못 본 건지 모르겠어.”신지태의 말에 나도 모르게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그래서 그걸 찾아냈어?”“아니. 당시 사고를 담당했던 경찰이 이미 사망했거든.”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목이 바짝 타들어 갔다.“언제 죽었는데?”“네 아빠 교통사고가 처리된 지 한 달 후.”숨이 막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신지태는 조심스레 내 이름을 부르며 다시 말을 걸었다.“지원아...”나는 그를 끊고 말했다.“그 경찰의 죽음이 우리 아빠 사고 결론과 관련이 있어?”“나도 그런 의심은 했어. 하지만 당시 사망 원인은 심장마비로 판명됐고 병원의 사망 진단서도 있어.”그의 말에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그 경찰의 가족을 찾아봤어. 하지만 별다른 정보를 얻을 수 없었어.”신지태가 말을 덧붙이자 나는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럼 더 이상 알아낼 방법은 없는 거네, 그렇지?”“지금으로선 그래. 그때 사건을 맡았던 경찰이 뭔가를 남겼다면 모를까, 그의 가족조차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더라고. 게다가 그는 심장마비로 갑자기 죽었으니까.”신지태의 말은 결국 내가 아빠의 사고를 더 이상 파헤칠 수 없다는 뜻이었다.“그 경찰의 동료나 친한 친구는? 그들에겐 물어봤어?”실망스러웠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찾아봤고 물어보기도 했어.”그 말을 들은 나는 눈을 감았다.“결국 죽은 사람이 살아나지 않는 한, 이건 여기서 끝난 거네.”“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내가 그 경찰의 가족이나 친했던 동료들과 다시 얘기해 볼게. 뭔가 실마리가 나올 수도 있잖아.”신지태의 말은 분명 나를 위로하기
나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다가 멈칫했다.우리 뒤를 따르던 자전거들 위로 어느새 플래카드가 나부끼고 있었고 그 위에는 무언가가 적혀 있었다.아직 그 문구를 제대로 보기도 전에, 자전거들이 갑자기 속도를 높였고 진정우는 우리가 탄 자전거의 속도를 천천히 줄였다.내가 상황을 파악했을 땐 이미 자전거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플래카드 위의 글씨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지원아, 나랑 결혼해 줘.]그 문구를 본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고 즉시 진정우를 바라보았다.그는 전혀 당황하거나 놀란 기색 없이 평온한 얼굴이었다. 이건 분명 그의 계획이었다.“진정우, 이거... 나한테 청혼하려는 거야?” 나는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었다.“응. 널 집으로 데려가야 아무도 널 탐내지 못할 테니까.”그는 담담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강진혁이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내가 그의 말을 곱씹는 동안, 누군가 뒤에서 외쳤다.“오빠, 빨리 프러포즈를 해야지.”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진소영이 자전거에 앉아 웃으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진정우는 자전거에서 내려 앞으로 걸어갔다. 마치 마술을 부리듯 손에서 반지를 꺼낸 그는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나랑 결혼해 줄래? 남은 삶 동안 내가 네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고 싶어.”나는 자전거에 앉은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정성껏 준비된 자전거들과 그의 진심 어린 눈빛을 보니, 마음속에서 묘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결혼해!”“결혼해!”“언니! 빨리 대답해 주세요!”사람들과 진소영이 외쳐댔다. 나는 자전거에서 내려 그 앞에 섰다. 그리고 진정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만약 거절한다면... 실망할 거야?”조금 전까지 흥겨웠던 분위기는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진소영도 놀란 얼굴로 나를 불렀다.“아니. 지금 당장 네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건 네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뜻이고 내가 너에게 충분한 신뢰를 주지 못한 탓이겠지.”그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일어서려 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