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형의 얼굴이 굳어졌고 그의 눈동자가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히 흔들렸다.그 시선은 곧바로 내가 진정우와 꼭 잡고 있는 손으로 향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 역시 그러했다. 먼저 입을 연 건 진정우였다.“유형 씨, 좋은 아침이네요.”‘아침이라니, 아직 날도 밝지 않았는데...’진정우의 인사에 강유형은 정신을 차린 듯 보였다. 그는 턱을 약간 당기며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지원아, 할 말이 있어.”나는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어차피 언젠가 해야 할 말이라면 지금 말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말을 나누고 모든 걸 털어버리면 다시는 이 문제로 얽힐 일이 없을 테니까.“정우야, 먼저 올라가 있어. 나 우유가 마시고 싶어.”나는 마치 평범한 아내처럼 그에게 말했다. 진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옷깃을 단단히 여며주었다.“아침엔 쌀쌀해.”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고 강유형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엘리베이터의 숫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엘리베이터가 멈췄을 때야 나를 다시 바라보며 물었다.“넌 이 집을 언제 산 거야?”처음 조나연이 이곳에 산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강유형이 일부러 그녀에게 우리 집 위층을 사주어 나를 불쾌하게 하려 했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방금 그의 반응을 보니, 내가 그를 오해했던 것 같았다.“아마 네가 사기 전이었을 거야.”내 대답에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 그의 눈에는 더 짙은 음침함이 서렸다.나는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혹시 이 집, 조나연이 사달라고 한 거야?”강유형이 대답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침묵은 곧 답이었다.그녀는 정말로 치밀하고 악랄했다. 조나연은 의도적으로 우리 집 바로 위층의 집을 산 것이다.강유형과의 관계를 부각하면서 나를 괴롭히려는 목적이거나, 아니면 강유형이 나와 진정우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나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그녀의 계획은 나에게 이미 간파당했다.“할 말이 있다며? 여기서?”나는 강유형
강유형이 술에 너무 취해서 내가 데리러 온 것조차 기억하지 못한 게 화가 났었다.강유형은 그날 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여 가볍게 내 입술에 닿았다.그리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바보.”그날의 하늘은 지금과 비슷했다. 날이 밝아 오기 직전이었다. 술에 취한 그는 들뜬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산꼭대기로 가서 별 볼래?”나는 그의 습관을 잘 알았다. 그는 술에 취하면 흥분해서 잠들기를 싫어했다. 술을 마신 후 바로 잠들면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아서 어지럽다고 했다.그래서 그는 술을 마실 때마다 내가 운전해 그를 데리고 여기저기 드라이브를 다니곤 했다.그날도 나는 차를 몰아 그를 산꼭대기로 데려갔다. 우리는 큰 바위 위에 나란히 앉아 서로 기대며 새벽의 별들을 보았다.밤하늘의 어둠이 서서히 사라지고 해가 지평선 위로 떠오르며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는 순간을 함께했다.그날 그는 내 어깨에 기대어 잠들었다. 뜨거운 햇살이 그의 얼굴에 닿을 때까지 깊이 잠들었던 그는, 눈을 뜨고서야 산에서 내려갔다.나는 고개를 들어 머리 위로 펼쳐진 밤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예전에는 자주 이랬었는데.”“그래? 난 까먹었어.”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까먹었다고? 그래.’그가 나와의 약속과 함께했던 행복한 시간을 잊지 않았다면, 어찌 조나연의 유혹에 넘어갔겠는가.“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조나연 일은 다 알고 있었지. 왜 진작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그의 물음은 전혀 놀랍지 않았다. 나는 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말한다고 뭐가 달라졌을까? 오늘처럼 조나연이랑 크게 싸웠겠지. 그렇다고 상황이 변했을 것 같아?”임석진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다시 살아날 수 없다. 그리고 나와 강유형은 절대 과거로 돌아갈 수 없었다.내 대답에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걸 알게 된 이후, 내가 바보 같고 한심하게 느껴졌겠지?”“아니야.”나는 솔직히 대답했
강유형은 내 말을 듣더니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나는 그의 의도를 이미 짐작할 수 있었다.“원하는 조건이 ‘강씨 집안의 안주인’이 되는 거지?”내가 던진 말에 강유형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마치 내가 어떻게 이 모든 걸 다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잠시 후,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조나연을 꽤 잘 아네.”그 말은 직접적으로 날 비난하는 건 아니었지만 비꼬는 느낌은 충분했다. 내 남자를 빼앗아 간 여자가 원하는 걸 내가 알아챘다는 게 그에겐 의외였던 모양이다.“조나연을 잘 알아서가 아니라, 하는 행동을 보면 다 보이잖아. 부귀영화에 얼마나 집착하는지 너무 명확하니까.”내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어둑했던 하늘이 갑자기 밝아졌다. 나는 항상 밤이 아침으로 바뀌는 건 서서히 이루어지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건 한순간에 찾아오는 변화였다.그래서 시인들이 새벽을 ‘동틀 무렵’이라 표현하는 거겠지.‘트다’라는 표현이 정말 적절했다.검은 밤이 깨지고 밝은 빛이 스며드는 그 순간, 그건 확실히 파괴적일 만큼 강렬했다.“강유형, 놀이공원은 물론 큰 자산이긴 하지. 하지만 강씨 집안 안주인이 돼서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아.”내 말에 강유형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나를 바라봤다. 그가 내게 놀이공원을 선물한 건 사실이었다.하지만 그의 재산은 놀이공원 열 곳, 백 곳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그의 아내가 되는 건 곧 그의 재산 절반을 가지는 것과 같았다.조나연은 이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가 임석진의 죽음을 이용해 이런 길을 계획했을 리 없었다.“그녀가 원하는 건 내가 아니라, 내 돈이야.”강유형은 자조 섞인 말투로 말했다.나는 피식 웃었다.“그걸 이제야 깨달았어?”강유형은 정말 조나연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걸까? 이런 결혼이나 연애에서 진정한 사랑이란 게 얼마나 될까.대부분은 가문 사이의 동맹이나 이익 때문 아닌가.문득, 함소은이 떠올랐다. 젊고 앳된 그녀
강유형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조나연은 그냥 마지막 결정타에 불과했어.”나는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었고 문득 이런 말이 떠올랐다.‘과거의 상처를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면 그건 정말로 마음을 내려놓은 거다.’“지원아, 나는 이해가 안 돼. 조나연 일은 내가 잘못한 건 맞아. 하지만 그전에는 내가 너한테 정말 잘했잖아.”강유형은 우리가 멀어진 이유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네가 나한테 잘해줬다는 건 인정해. 근데 내가 너한테 한 거는? 느꼈어? 아니면 보긴 했어?”내가 조용히 묻자 강유형은 한참 나를 보다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내가 널 소중히 여기지 못했어. 그래서 널 잃은 거야.”“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야? 차라리 조나연 얘기를 하자.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혹시 걔랑 같이 있고 싶어도 삼촌과 아줌마가 허락하지 않을까 봐서 걱정이야?”나는 대화를 원래 주제로 돌렸다.“내가 걔랑 같이 있고 싶다고? 넌 날 뭐로 보는 거야? 병신? 아니면 미친놈으로 보는 거야?”강유형의 목소리가 갑자기 격앙됐다.“그 영상으로 날 협박하겠다며? 공개하겠다고? 그럼 공개하게 두지 뭐.”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강유형은 협박에 굴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업에서도, 개인적인 일에서도.하지만 나는 우려를 떨칠 수 없었다.“정말로 그 영상을 공개하면 회사도 타격을 받을 거고 아버님도 충격을 견디지 못하실 거야.”나는 조용히 경고했다.“그래서 네가 필요해.”그는 마침내 이 대화를 시작한 목적을 밝혔다. 아침 햇살 아래, 그의 얼굴은 여전히 뚜렷하고 잘생겼지만 그늘진 표정이 그를 낯설고 멀게 느껴지게 했다.“도대체 뭘 도와달라는 건데?”“우리 아버지를 좀 설득해 줘.”그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솔직히 나랑 형 둘이 합쳐도 너 하나만 못하잖아. 네가 우리 아버지의 딸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그의 농담에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무슨 소리야, 진짜.”나는 그를 발로 가볍게 찼다. 그러자 강
놀이공원 개장과 관련된 화제와 내가 얽힌 핫이슈는 무려 3일간이나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지만 결국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매일 새로운 화젯거리가 떠돌아다니는 소셜미디어에서 아무리 흥미로운 이야기라도 금세 다른 이야기에 밀리기 마련이다.이 3일은 조나연이 반격하기에 가장 적합한 타이밍이었지만 그녀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강유형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그 영상을 공개할 용기가 없었다.만약 공개한다면 그녀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고 모든 계획이 수포가 되기 때문이다.그렇다고 그녀가 이대로 포기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자살 시도’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쓸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나는 병실에서 삼촌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간호사가 달려와 누군가가 옥상에서 뛰어내리려 한다고 전했다. 그 말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러워졌다.“게다가 임산부라네요. 산후우울증이라도 걸린 건지 모르겠어요.”간호사는 벌써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그때 내 휴대폰이 울렸다. 강유형이었다. 갑자기 눈꺼풀이 두 번이나 떨리며 불안감이 밀려왔다.“여보세요?”“지원아, 조나연이 옥상에서 뛰어내리겠대.”강유형의 목소리는 낮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나는 순간 몸이 굳었다. 조나연이 별의별 일을 다 벌여 왔지만 이번은 차원이 달랐다. 이번엔 자기 목숨을 걸고 심지어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생명까지 걸고 협박을 하고 있었다.삼촌이 옆에 있어 나는 전화를 들고 나가 통화하려고 하자 삼촌은 내 움직임을 눈치챈 듯 손짓으로 앉으라고 했다.“지금 어디야?”나는 강유형에게 물었다.“곧 병원에 도착해.”그의 대답에 나는 침을 삼키며 목이 타들어 가는 기분을 느꼈다.“나 지금 아버님이랑 같이 있어.”강유형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아버지께 숨길 수는 없어. 조나연이 병원 옥상에서 난리를 치는 건 아버지한테 알리려고 하는 거잖아.”“그럼 넌 어떻게 할 생각인데?”나는 그에게 물었지만 머릿속으로는 이미 답이 그려졌다.조나연이 이런 수를 쓰는
날카로운 비명이 들리며 나는 조나연이 옥상 끝으로 조금 더 다가서는 걸 똑똑히 보았다. 나는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심장이 목까지 차오르는 것 같았다.위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와 상관없이 그런 장면 자체가 보는 사람의 숨을 멎게 하고 온몸을 긴장하게 했다.조나연이 이런 행동을 하는 건 강유형이 옥상에 올라갔기 때문일 것 같았다.옥상이 너무 높아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들리지 않았고 나는 그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그때 누군가 내게 말했다.“아가씨, 핸드폰이 울리고 있어요.”그제야 정신이 돌아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전화를 건 사람은 강유형이었다.그가 지금 위에서 조나연과 대치 중인데 내게 전화를 걸 이유는 하나였다.조나연이 전화하게 시킨 것이다. 전화를 받자 예상대로였다. “지원아, 너 아버님을 모시고 여기로 올라와 줘.”나는 당황했다. 내가 올라가는 건 괜찮지만 왜 삼촌까지 불러야 한다는 건가?삼촌은 몸이 좋지 않으셨다. 조나연이 어떤 일을 벌이든 그것을 감당하는 건 무리가 될 수도 있었다.목이 뻣뻣하게 말라오는 느낌에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옥상 끝에 선 조나연을 바라보며 전화를 끊고 인파 속을 헤치고 엘리베이터로 들어섰다.나는 삼촌을 부르지 않고 혼자서 엘리베이터에 탔다.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올라가는 동안, 조나연이 나와 삼촌을 부르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계속 생각했다.옥상 문을 열자 강한 바람이 얼굴을 때리며 소름이 돋았다. 강유형은 나를 바라봤고 나는 조나연을 바라봤다. 그녀 역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소방관이 조나연에게 물었다.“저 사람이 맞나요? 만나고 싶다는 사람이?”조나연은 답했다.“아직 한 명 더 있어요.”나는 단호하게 말했다.“혼자예요. 삼촌은 몸이 안 좋아서 못 오셔요.”조나연의 얼굴이 굳었고 그녀는 날카롭게 말했다.“윤지원, 이쪽으로 와!”강유형이 그녀를 제지하려고 나섰다.“조나연, 지원이를 힘들게 하지 마. 내가 갈게.”조나연은 비웃으며 말했다.“강
조나연의 날카로운 비명은 마치 공기를 찢어놓는 듯한 울림으로 모두의 귀를 때렸다.“저분을 자극하지 마세요.”소방관이 다시 한번 내게 경고했지만 강유형이 손을 들어 막았다.그는 조나연이 진짜로 죽으려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의 행동은 단지 연극에 불과했다. 사람들에게 자신이 완전히 무너져 자살하려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쇼였다.역시나, 그녀는 소리를 지르다가 나와 강유형을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겁만 주는 줄 알겠지? 진짜로 뛰어내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그럼 오늘 내가 보여줄게. 내가 진짜 죽으려는 건지, 아니면 연기하는 건지.”그녀는 말하며 옥상 끝으로 한 발짝씩 물러섰다. 그녀의 발걸음을 볼 때마다 내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진짜로 뛰어내릴 생각이 없더라도 발을 헛디디거나 중심을 잃는다면 결국 그녀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나는 그녀의 배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의 정확한 임신 기간은 알 수 없었지만 내가 강유형과 헤어진 지 6개월이 넘었으니 최소한 6, 7개월은 되었을 것이다.조나연이 어떤 짓을 했든 그 아이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세상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생명이었다.내 안에서 그녀를 향한 분노와 연민이 뒤섞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좋게 말하거나 부탁해봐야 그녀가 원하는 대로 흐를 뿐이었다. 그녀의 탐욕을 겨냥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조나연, 네가 지금 뛰어내린다고 해도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이 네가 스스로 뛰어내렸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어. 그건 자살로 간주할 거고 네가 얻고 싶었던 모든 건 사라질 거야. 네 계획은 허사가 되고 널 사랑했던 그 남자의 희생도 무의미해지겠지.”내 말에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지금 난 아무것도 없어. 시댁에서도 버림받았고 친정에서도 외면받아.”그녀의 말에 지금 그녀가 얼마나 벼랑 끝에 몰려 있는지 알 수 있었다.동생까지 그녀를 배신했으니, 더는 기댈 곳이 없었을 것이다.“윤지원, 내가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강유형을 내게 줘. 강유형이 나와 결혼하게 해
조나연이 갑자기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난 상관없어! 강유형, 말해. 나랑 결혼할 거야? 말 거야?”강유형은 입을 꽉 다물었다. 그는 이 상황에서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대답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솔직하고 단호하게 말했다.“조나연, 보상은 해줄 거라고 말했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그의 대답에 소방관들조차 그를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조나연의 눈에는 절망으로 가득 찼다. “내가 원하는 보상은 바로 너야!”강유형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조나연, 넌 날 함정에 빠뜨렸고 임석진을 죽게 했어. 내가 그걸 문제 삼지 않는 건, 오직 이 아이 때문이야.”강유형은 어릴 때부터 협박에 굴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의 어머니조차 그를 고집불통이라며 혀를 찼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의 단호한 태도는 조나연을 더 자극했다.“아이? 또 아이 얘기야?”조나연은 배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너희 모두 이 아이 때문에 그러는 거지. 그럼 난 뭐야? 아이 낳는 도구야?”그녀는 눈빛을 번뜩이며 강유형을 노려보며 말했다.“네가 이 아이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나와 결혼하지 않으면 이 아이를 없애버릴 거야.”그러더니 그녀는 배를 주먹으로 치기 시작했다.나는 순간적으로 몸이 떨렸다. 호랑이도 제 새끼는 해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 여자는 너무도 잔인했다. 그녀는 아이를 도구 삼아 협박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조나연!”강유형은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만약 이 아이가 잘못되면, 너를 지옥 끝까지 쫓아갈 거야.”하지만 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조나연은 배를 더 세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몰래 그녀에게 접근했던 소방관 한 명이 그녀를 재빠르게 끌어안았다.하지만 조나연은 본능적으로 몸부림쳤고 그녀는 건물 가장자리에 서 있었기에 소방관의 몸도 균형을 잃고 뒤로 기울어졌다.“아악!”조나연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나는 본능적으로 입을 막으며 그 장면을 똑똑히 지켜봤다.소방관의 한 손이 건물 난간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고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이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법운사로 향하는 길에 나는 강유형에게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기나긴 연결음 끝의 자동응답뿐이었다.가슴이 점점 무겁게 내려앉았다. 요즘 그가 법운사에 머물고 있었기에 더더욱 불안했다. 연락도 되지 않으니 머릿속은 온통 나쁜 상상으로 가득 찼다.그에게 전화를 건 건 단순히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부상자나 사망자가 있는지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었다.하지만 그에게 건 전화는 끝내 연결되지 못했다.나는 액셀을 밟으며 용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그의 어머니가 바로 그 절에 계셨으니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 역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이번엔 아예 거절당했다. 불안은 더 깊어졌다.‘혹시 김지영까지 무슨 일이 생긴 걸까?’그간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강유형과 김지영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다치거나 희생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복잡한 심경 속에서 차를 운전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멀쩡하던 절에 왜 불이 난 걸까? 단순한 사고였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의도한 일이었을까? 혹시 나를 노린 불은 아니었을까?’만약 안리영이 나를 데리고 조경태의 생신 잔치에 가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그 절에 있었을 것이다. 죽었을 수도, 심하게 다쳤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내 손에 누군가가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걸 얻지 못하면 나를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그들이 저지른 일이라면 그건 너무 비인간적이었다. 죄 없는 사람들까지 희생시켜서는 안 됐다.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이 나는 어느덧 산기슭에 도착했다. 들이마시는 공기 속엔 타버린 재 냄새가 가득했고 멀리 보이는 산 위엔 아직도 연기가 자욱했다.산을 절반쯤 오르자 경찰이 차량을 막아섰다. 나는 차에서 내리며 이
난처한 상황이었다. 도무지 어찌할지 몰라 법까지 들먹이고 말았다.“법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서른이 넘도록 연애도 안 하고 결혼도 안 하는 건 정상이 아니야. 어느 날 갑자기 남자 며느리라도 데려오면 내가 무슨 낯으로 사람들을 보겠냐?”조경태는 누가 뭐라 해도 듣지 않겠다는 태도였다.“그럼 제가 하나 약속드릴게요. 절대 남자를 며느리로 데려오는 일은 없을 거예요.”조시언은 능청스럽게 받아쳤다.조경태는 씩씩 대며 화를 냈다. 그러자 안리영이 급히 나서며 말했다.“할아버지, 삼촌 좀 그만 괴롭히세요. 안 좋아하는데 억지로 떠민다고 행복해지겠어요?”“이 계집애는 왜 또 얘 편을 드는 거야?”할아버지는 안리영을 흘겨보았다.내가 얼른 말을 이었다.“오늘 온 아가씨들, 저랑 리영이 다 지켜봤어요. 삼촌이랑 어울릴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더라고요.”지금 이 순간 나도 안리영을 따라 조시언을 삼촌이라 부르고 있었다.“난 못 믿겠는걸.”조경태는 콧방귀를 뀌었다.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정말이에요, 할아버지. 그 여자들, 남 얘기하길 좋아해서 뒤에서 험담이나 하는 사람들이에요. 아까도 삼촌 뒷담 까고 있었어요.”조시언은 그녀를 바라보았고 조경태도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그래? 뭐라고 험담하던?”“삼촌이 나이가 꽤 됐는데도 아직 결혼 안 한 걸 말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삼촌을 차지해서 조씨 가문 며느리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수작 부릴 생각들만 하고 있었어요.”안리영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오늘 그 여자들이 조시언을 노리고 온 건 분명했으니 말이다.“그건 좋은 일이잖니.”조경태는 오히려 기뻐하며 말했다.“할아버지는 수작 부리는 여자가 좋으세요?”안리영은 조경태가 싫어하는 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조경태는 말이 없었다. 속이 시커먼 여자한테 크게 당할 뻔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안리영은 나를 향해 눈짓을 보냈고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삼촌 짝 찾는 일은 저랑 리영이에게 맡겨주세요.”내 말에 안리영이 눈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안리영과 나는 방 안의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서로 마주 본 채 각자의 소파에 앉은 모습이었다. 한 사람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젊고 준수한 청년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나이 차가 너무나 뚜렷해 그들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분명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일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부자 관계였다.안리영은 조시언이 입양된 아들이라고 내게 말해준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의아했다. 당시 나이로 치면 조경태는 조시언을 손자처럼 키워도 이상할 게 없었을 텐데 왜 굳이 아들로 삼은 건지 궁금했다.“시언아, 너 이제 나이도 어린 게 아니잖니. 결혼 안 하겠다는 건 그렇다 쳐도 여자 친구조차 없다니. 밖에서 사람들이 너를 두고 뭐라고 수군대는지 너도 알지?”조경태는 수군대다 같은 말도 자연스럽게 썼다.하지만 조시언은 묵묵히 앉아 있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조명이 그의 얼굴과 콧대를 선명하게 나누듯 비췄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면서 그의 이목구비는 더욱 또렷하게 도드라졌다. 깊은 눈썹뼈는 날카로운 선을 연출해 냈다.“사람들이 네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더라!”조경태는 말을 끝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런 이상한 소문이 퍼지는 건 우리 조씨 가문의 체면을 망치는 일이다. 우린 그런 망신 못 당한다!”조시언은 그 말에도 여전히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평온한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고요했다.“남의 입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떠들어대는 건 그들 사정일 뿐, 우린 신경 쓰지 않으면 됩니다.”“넌 신경 안 쓴다지만, 이 늙은이는 창피해서 못 살겠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지금 당장 사람 하나 데리고 오든가, 아니면 내가 직접 찾아줄 거다. 결혼 안 해도 좋다. 그냥 네 옆에 여자 하나 세워놔라. 사람들이 널 정상으로 보게 말이다!”그 말에 안리영과 나는 동시에 서로의 팔을 꼬집었다. 안 그러면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이 노
“넌 안 그럴 거야, 맞지?”안리영은 계속 나를 놀리면서도 언제나 내 편이었다.우리는 함께 연회장으로 들어섰다.조경태는 자줏빛과 금색이 어우러진 긴 도포를 입고 활짝 웃으며 손님들의 축하 선물을 받고 있었다.그는 내가 가져온 선물을 보곤 눈을 반짝였다.“특별한 선물이구나. 아주 마음에 들어.”그 말에 나는 괜히 민망해졌다.강유형의 어머니도 비슷한 걸 선물했는데 어째서 내 것을 특별하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역시 세상을 오래 산 사람은 달랐다. 누구보다도 말솜씨가 뛰어났다. 받는 사람도 기쁘고 주는 사람도 흐뭇하게 만드는 한마디였다.“리영아, 구 교수는 어디 갔니? 오늘은 왜 같이 안 왔어?”조경태가 슬며시 물었다.안리영은 내 옆구리를 몰래 콕 찔렀다.“그냥 따로 말 안 했어요. 오늘은 그냥 제가 단순히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온 거거든요.”그러나 이 정도 지긋한 나이가 되면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오늘 같은 잔칫날에 인원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고 왔다 해서 구안석이 못 오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는 안리영을 힐끔 바라보다 두어 번 웃고는 더 묻지 않았다.“할아버지, 그럼 선물마저 받으시고요. 저는 지원이랑 가서 뭐 좀 먹고 올게요.”안리영은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려 했다. 또 무슨 질문이 나올까 봐 걱정된 눈치였다.“그래, 다녀오거라. 다만 너무 멀리 가지는 마. 좀 있다 너희 둘 도움 좀 받아야겠구나.”그 말에 우리 둘은 눈빛을 주고받았다.“혹시 케이크 자르실 때 저희한테 맡기시려는 거 아니에요?”안리영이 농담처럼 물었다.조경태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콕 찔렀다.“이놈의 계집애, 지금 누굴 놀리는 거냐. 케이크 칼 정도는 들 수 있다고! 그게 아니고, 너희 둘한테 자문 좀 구하고 싶어서 그래.”“자문이요? 혹시 애인이라도 골라달라는 거예요?”안리영은 정말 무서울 정도로 겁 없이 농을 던졌다. 외할머니가 들으면 바로 이마 한 대는 맞았을 거다.“점점 대담해지는구나.”조경태가 다시 한번 그녀를 가리키며
안리영과 조시언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성준수는 그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안리영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하긴 이렇게나 예쁜데 조시언이 마음 줄 만도 하지... 아야, 아파! 조시언, 너 왜 그래?!”성준수는 조시언에게 뒷덜미를 잡힌 채 끌려 나갔고 안리영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정신 나갔네.”“조시언네 리영이?”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난스럽게 되물었다.안리영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너까지 말썽이야, 얼른 가자. 외할아버지께 선물 드려야지.”그녀는 내 손을 잡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빨갛게 물든 귓바퀴가 그녀의 부끄러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아까 조시언과의 어색한 분위기를 떠올리다 나도 모르게 장난을 쳤다.“리영아, 너랑 외삼촌 피가 섞인 것도 아니잖아. 내가 보기엔 한번 고려해 볼 만도 해. 잘생겼지, 돈 많지, 만약 네가 저 사람 잡으면 적어도 밖으로 새는 물은 없을 거 아니야.”안리영은 눈을 부릅떴다.“윤지원, 너 또 그런 소리 하면 진짜 절교할 거야.”“어머, 발끈하네?”나는 계속해서 놀렸다.“그만하라고 했지!”안리영은 나를 쫓아와 때리려 했다.나는 그녀를 피해 도망치다가 무언가에 부딪혔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익숙한 향이 먼저 스며들었다.고개를 들자 강유형이 서 있었다.요즘 그와 자주 마주쳤다. 절에서도 마주쳤고 조씨 가문에서도 마주쳤으니 말이다.“강 대표님, 이제 가시려고요?”안리영의 말투엔 노골적으로 쫓아내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나는 이미 다 털어냈다 하더라도 안리영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네.”강유형은 나를 살짝 놓아주며 내 발을 내려다봤다. 다친 데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했다.“조경태 씨 생신 축하하러 왔어요.”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는 볼 거 다 보고 별일 다 겪은 사이였다. 나는 담담하게 물었다.“저녁 식사는 안 하고 가?”“응, 그게...”그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집에 가봐야 해서.”그 말에 문득 김희연이 내게 건넨 말과
“아이참, 엄마!”안리영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오늘은 외할아버지 생신 잔치잖아, 내 맞선 자리가 아니고.”“뭐 어때?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셈이잖니. 좀 있다가 잘 둘러보렴. 우리 딸처럼 예쁘고 똑똑한 애가 남자 친구 하나 못 찾겠어? 눈만 마주치면 끝이지.”조민영은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안리영은 체념한 듯 말했다.“알겠어. 엄마는 먼저 가서 볼일 봐. 난 지원이 찾으러 갈게. 외할아버지께 드릴 선물도 걔가 챙겨왔거든.”안리영은 그렇게 핑계를 대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난 그녀와 어머니의 대화를 이미 들은 터라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아주머니 꽤 개방적이시네. 근데 나도 그 말 일리 있다고 봐. 예전에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라고.”“좋아. 마음에 드는 사람 있으면 바로 들이댈게.”그 순간 나는 조시언을 발견했다.그는 어두운 톤의 정장에 검은 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다. 셔츠 단추는 몇 개 풀려있었고 그로 인해 허연 목덜미가 살짝 드러나 있었다. 그 하얀 피부와 검은 셔츠가 만들어내는 대비는 그를 더욱 차가워 보이게 만들었다. 어쩐지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도 자아냈다.“네 외삼촌, 진짜 잘생겼다.”나는 감탄했다.안리영도 내 시선을 따라가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여자들한테 인기 많았어. 예전에 내가 저 사람한테 온 러브레터를 얼마나 많이 대신 받아줬는지 몰라.”하긴 조시언 같은 사람이 인기가 없을 리가 없었다.“그럼 연애는 해봤대?”안리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아니, 못 해봤을걸.”“그렇다면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있다는 말이겠지.”내 말에 안리영이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내 가슴을 콕 찌르는 말을 꺼냈다.“아, 맞네. 너 연애 경험 많았지.”“나 약 올리는 거야? 그렇게 나오면 나도 너 도와줄 마음 싹 사라지는데?”우리가 대화를 나눌 동안 조시언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안리영은 어느새 자세를 바짝 고쳐
안리영은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초 후 그냥 끊어버렸다.그토록 단호하고 주저 없는 태도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마 정말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다.이런 부분에선 그녀가 나보다 훨씬 강했다. 질질 끌지도 않았고 미련도 없었다.사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강유형과 헤어진 건 헤어진 거고 가끔 연락을 하긴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을 때뿐이었다.안리영과 구안석이 여기까지 온 게 아쉽긴 해도 딱히 뭐라고 말할 순 없었다.감정의 온도는 결국 그 당사자만이 아는 법이니 말이다.우리가 함께 차를 마시며 점원의 포장 작업을 기다리는 동안 안리영의 휴대폰 화면이 다시 한번 반짝였다.새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구안석에게서 온 메시지였다.‘리영아, 나 이제 갈게.’나는 슬쩍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이따가 차단할 거야.”“직접 못 하겠으면 내가 대신 해줄까?”내가 농담처럼 말했다.안리영은 나에게 절친만이 보낼 수 있는 눈빛을 건넸다. 점원이 포장해 준 작품을 들고 매장을 나설 때까지 그녀는 끝내 구안석에게 답장하지 않았다.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이 구안석의 메신저 대화창에서 멈춘 걸 발견했다. 그녀는 그들이 나눈 대화를 처음부터 다시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나는 의아해 물었다.“왜 웃어?”안리영은 내게 휴대폰을 내밀며 말했다.“선배님이랑 나눈 대화 좀 봐봐.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합쳐도 겨우 몇십 개밖에 안 돼. 우리 과 단톡방에서 일주일에 올라오는 공지보다도 적어.”나는 보지도 않고 다시 그녀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이미 헤어지기로 한 거잖아. 그런 거 봐서 뭐 하려고.”“지원아, 나 진짜로 연애한 게 맞긴 한 걸까?”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구안석을 차단했다.“공적인 일 있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럴 때도 연락 안 하게?”나는 애써 분위기를 풀어보려 장난을 던졌다.“그 사람은 흉부외과고 나는 산부인과야. 서로
“이거 포장해 주세요. 선물할 거니까 선물 상자에 담아 주세요.”김희연은 점원에게 부탁을 마치고 돌아서다 나를 발견했다.“지원아!”그녀가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인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아줌마.”나는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김희연은 나를 바라보며 눈가를 붉혔고 눈동자까지 촉촉하게 물들였다.“지원아...”그녀는 내 이름만을 부를 뿐 다른 말은 쉽사리 꺼내지 못했다. 마음속에 수많은 말들이 맴돌고 있을 게 분명했지만 끝내 꺼낼 용기가 나지 않는 듯했다.나도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몇 달 만에 마주한 모습이었다. 흰머리가 부쩍 늘었고 수척해진 인상이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눈빛에서 생기가 보이지 않았다.그녀가 요즘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강두식은 병상에 계시고 두 아들 사이엔 균열이 생겨 서로 등을 돌린 상태다.말 그대로 집안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모든 시작은 나와 강유형이 끝을 맺으면서부터였던 것 같다.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들이 잘 풀린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잘 지내니?”그녀가 한참 만에 힘들게 물었다.“네,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거면 됐다. 그거면 좋아.”나는 그녀에게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시간을 견뎌냈는지 이미 보아냈으니 말이다.“너도 혹시 작품 보러 왔니? 선물하려고?”그녀는 어색함을 덜기 위해 다시 말을 건넸다.“오늘 저희 외할아버지 생신이라서요. 지원이가 저희 외할아버지 드리려고 보고 있었어요.”안리영이 대신 대답했다.“지원이도 조씨 댁에 가는구나. 잘 됐다, 그분도 지원이를 참 좋아하시잖니. 예전에도 자주 얘기하셨지.”그녀는 말을 잇다가 목이 메인 듯 얼굴을 살짝 돌렸다.나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그렇게 슬픔을 억누르는 모습이 안쓰러워 조용히 입을 열었다.“아줌마, 저 먼저 고르러 가볼게요.”“지원아.”그녀가 다시 나를 불러 세웠다.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어렵게 말을 이었다.
“네가 헤어지자고 했는데 구안석이 아무 말도 안 했다고?”안리영의 말을 듣고 나도 좀 놀랐다.안리영은 살짝 웃었다.“아마 그 사람도 지쳤겠지. 차라리 혼자일 때가 더 편했을 거야. 뭘 하든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간섭받을 일도 없고 신경 쓸 일도 없으니까.”딱 봐도 감정 섞인 말이었다.“너, 혹시 이별하자는 말도 일부러 한 거 아니야? 화나서?”내가 조심스레 물었다.안리영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난 정말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야.”내가 코웃음을 쳤다. 안리영이 웃으며 말했다.“진짜라니까. 지난번에 내가 선배한테 귀국할 수 없냐고 물었을 때부터 쭉 고민해 왔어.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뭘까, 생각하게 되더라고.”“사실 사랑이든 결혼이든 여자들이 바라는 건 결국 하나잖아. 안정감, 그리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 근데 그 사람이 그걸 못 준다면 나 혼자서도 충분한데 굳이 그런 사랑을 붙잡을 필요가 있을까?”안리영은 낮게 물었다.나는 장난스럽게 말해봤다.“그럼 생리적 욕구 해결은?”안리영은 다시 웃었다.“남자를 그 이유 하나로만 찾는 거면 얼마나 쉬워.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되잖아. 게다가 종류도 다양하고 취향 바꾸는 것도 가능하고.”“하하하.”나는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리영이, 네 취향 은근히 세네?”장난처럼 말했지만 사실 그녀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리영아, 네가 어떤 결정을 해도 난 응원할 거야. 하지만 말이지... 이별이라는 건, 특히 진심이었을 때는 헤어지는 순간도 진짜 아프잖아. 힘들면 꼭 나한테 말해. 같이 술이라도 마셔주지.”“응, 필요하면 연락할게.”안리영은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살짝 맞댔다.“그보다 지금 당장 네가 좀 도와줘야 하는 일이 하나 있어.”“뭔데?”“오늘 우리 외할아버지 생신이야. 이번엔 도저히 빠질 수가 없어.”안리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부모님도 몇 번이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보고 싶어 하신다고 했는데 그녀는 그때마다 핑계를 대고 빠졌단다. 이번까지 거절하면 그녀의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