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숨을 죽였다.곧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줌마, 여기 계속 있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저 유형이를 만나고 싶을 뿐이에요. 만나게 해주시면 바로 떠날게요. 귀찮게 할 생각 없어요.”조나연이었다. 그녀가 직접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강유형을 만나기 위해 집안까지 온 모양이었다.이전엔 강유형과 통화했을 때, 이미 조나연과 연락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상황을 보니 내가 완전히 착각했던 것 같다.이 여자의 뻔뻔함에는 정말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대체 어떤 배짱으로 이 집까지 찾아왔을까?“네 말은 내가 유형이를 숨겼다는 거야?” 아줌마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아니에요, 그런 의도는 없어요. 그저 유형이를 보고 싶을 뿐이에요.”조나연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할 수 없다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처음 그녀를 봤을 땐 정말 순수하고 청초한 느낌이라, 세상이 더 깨끗해진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었고 그 첫인상은 완전히 뒤집혀 버렸다.“유형이는 여기 없어. 이미 여러 번 얘기했잖아.” 아줌마는 점점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알아요, 여기 없다는 건.”조나연은 여전히 태연했다. 하지만 아줌마는 그녀의 태도에 더 화가 난 듯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내가 유형이를 숨겼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야?”조나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 태도가 아줌마의 화를 더 부추겼다.“하,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 지원이가 너한테 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우리 아들이 지원이 같은 착한 애를 놔두고 너 같은 여자를 택한 이유도 말이야.”아줌마의 말은 독설에 가까웠다. 조나연을 깎아내리면서도 나를 간접적으로 언급하며, 강유형과 나의 실패한 관계를 꼬집는 말이었다.“아줌마, 오늘 저를 욕하시든 때리시든 다 받아들일게요. 대신 유형이만 만나게 해주세요.”조나연은 눈물까지 보이며 말했다.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며, 나는 이 여자가 얼마나 교활한 사람인
나는 그녀가 절대 약을 마시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한 행동은 모두 명예와 부를 얻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병원에서 그렇게 큰 망신을 당하고도 자존심 하나로 버틴 그녀가 지금 와서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리 없었다.이건 단지 강유형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강 아줌마를 협박하는 수단일 뿐이었다. 그녀는 강유형이 삼촌과 아줌마에게 숨겨져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나연 씨, 이런 수단으로 아줌마를 협박하다니.” 나는 차갑게 웃으며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내 목소리에 아줌마가 급히 고개를 돌리며 나를 보았다. 얼굴에는 분명한 당황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내가 조나연을 오해할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반면 조나연은 그다지 놀란 표정은 아니었다. 아마 내가 들어오는 것을 미리 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 떨리는 걸 보니 내 존재가 그녀를 긴장하게 만들고 있음은 확실했다.조나연은 이내 울먹이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연락도 안 되고 어디 있는지 알 수도 없잖아요. 지금 저는 막다른 길에 몰렸어요. 지원 씨.”그녀는 또다시 피해자 코스프레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연기는 나에게 통하지 않았다.나는 그녀가 든 초록색 약병을 가리키며 말했다.“길이 없긴요. 나연 씨 손에 들린 게 바로 그 길 아닌가요?”그녀의 얼굴이 조금 더 창백해졌다. 그녀가 약병을 정말로 마실 의도가 없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손이 더 떨렸다. 예상대로였고 이건 단지 협박이었다.“지원 씨, 당신은 내가 죽길 바라는 거겠죠? 하지만 내가 죽으려면 적어도 유형이가 나와서 한마디라도 해줘야 해요.”조나연은 끝까지 강유형을 보겠다는 목적을 숨기지 않았다.“보고 싶으면 직접 찾아가야죠. 여기 와서 이러는 게 아니라.”나는 그녀 앞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봤다.내가 서 있고 그녀가 앉아 있으니 자연스럽게 그녀는 나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 눈빛엔 겁과 억지가 섞여 있었다.“찾을 수 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죠.”조나연
내 몸이 잠시 비틀거렸고 아줌마가 황급히 나를 붙잡아 주었다. 감정이 북받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조나연을 보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혹시 내가 방금 한 말이 정말 맞았던 걸까?사실 방금 했던 말은 단지 추측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을 보니 임석진의 죽음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녀가 계획적으로 그 일을 벌인 것이라면, 이 여자는 정말 끔찍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다.생각해 보니 임석진 부모님이 그녀를 그렇게 심하게 욕했던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당신은 지금 굉장히 불안해하고 있어요.”나는 그녀를 더 몰아붙이며 말했다. 지금이 그녀의 실체를 완전히 드러낼 기회였다.조나연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부정하려 했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임석진이 당신이 원하는 부와 명예를 이루는 데 장애물이라고 생각했겠죠. 그래서 그를 없애야만 당신이 원하는 걸 가질 수 있다고 판단한 거죠.”“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조나연은 고함을 질렀다.나는 차갑게 그녀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그렇지만 당신이 바로 나서면 모든 게 들통날 테니, 교묘하게 일을 꾸몄겠죠. 임석진이 당신의 행동을 목격하도록 의도적으로 상황을 만들었고 그렇게 하면 그의 죽음이 강유형의 죄책감을 불러일으킬 거라 믿었겠네요. 당신 계획대로라면 강유형은 당신을 끝까지 책임지려고 했을 테니까.”“아니라고 했잖아!”조나연은 다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그녀 손에 쥐고 있던 약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손을 부들부들 떨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임석진이 죽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겠죠. 하지만 죽었네요.”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반응은 그녀가 임석진의 죽음을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그 사고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나는 그녀의 불룩한 배를 쳐다보며 덧붙였다.“그리고 임석진의 아이를 가질 줄은 더더욱 몰랐겠죠?”조나연은 몸을 웅크리고 있었고 그녀의 얼굴에는 완전히 무너진 모습이 역력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진
특히 조나연은 정말 혐오스러운 행동을 했지만 뱃속의 아이만큼은 무고했다. 게다가 그 아이는 임석진의 유일한 혈육이기도 했다.조나연이 떠나자 아줌마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손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강유형, 이 바보 같은 녀석! 저 여자한테 완전히 속아 넘어갔잖아. 평소엔 그렇게 똑똑한 애가 이번엔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렸을까?”그러면서 내 손을 꼭 붙잡고 물었다.“지원아, 너 다 들었지?”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아, 강유형은 완전히 저 여자한테 속아 넘어간 거야. 정말로 속았다니까.” 아줌마는 무언가를 설명하려 애쓰는 듯 보였다.나는 담담하게 말했다.“유형이가 미끼를 던졌으니 나연 씨가 덥석 물었겠죠.”내 말에 아줌마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잔인할 수가 있을까? 자기 남편까지 해치다니...”정말이지,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는 법이다.“유형이가 만약 저 여자와 결혼이라도 한다면 우리 집안이 다 무너질 거야. 나랑 네 삼촌도 제대로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줌마는 마치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나는 외부인이니 그 말을 받아칠 수 없었다.“안 되겠다. 당장 경찰에 신고해야겠어. 저 여자를 그냥 두면 안 돼. 경찰에 잡혀가면 강유형도 저 여자한테서 벗어날 수 있을 거야.” 아줌마는 갑자기 내 손을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지원아, 이제야 알겠어. 내가 강유형이 잠적한 걸 단순히 화가 나서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저 여자가 유형이를 그렇게 몰아넣은 거였어.”아줌마는 점점 더 흥분하며 내 손을 꼭 잡고 말했다.“지원아, 네가 경찰에 신고해줘. 증거를 경찰에 넘기면 저 여자를 잡아갈 수 있을 거야.”아줌마의 간절한 눈빛을 마주하며 나는 고개를 살짝 떨구고 말했다.“아줌마, 제가 가진 증거는 없어요.”“증거가 없다고? 너 그렇게 많이 알고 있잖아! 도대체 어떻게 증거가 없다는 거야?” 아줌마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조나연의 가식과 욕망을 내가 들춰낸 뒤, 그녀는 분노와 수치심에 휩싸였을 것이다.그리고 그런 감정으로 이 자리에 나타난 것 같았다.조나연은 차 문을 잡고 나를 바라봤다. 처음엔 차 문을 열고 나를 끌어내리거나 화를 낼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갑자기 몸을 낮추더니 내 차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전혀 예상 밖이었다.그녀가 나를 붙잡고 애원할 줄은 알았지만 무릎까지 꿇을 줄은 몰랐다.이 여자는 정말 상황에 따라 온갖 방법을 쓰는군.솔직히 그녀가 무릎을 꿇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녀는 내 약혼자를 빼앗아 간 사람이니까.하지만 그녀가 임신한 몸이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무릎을 꿇다니, 혹시라도 뱃속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할 게 뻔했다.그렇다고 해서 내가 직접 차에서 내려 그녀를 부축할 필요는 없었다.그녀는 뱃속 아이를 방패 삼아 나를 이용하려는 속셈일 테니까.나는 차창 너머로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연 씨, 이게 무슨 뜻이죠?”“지원 씨...” 그녀는 애절한 표정으로 애원하기 시작했다.“제발 저를 봐주세요. 아니, 제 아이를 살려주세요. 저희에게 기회를 주세요.”그녀는 여전히 아이를 이용하려 들었다.뱃속의 아이는 이제 그녀의 가장 강력한 방패가 된 것이다.하지만 나는 이 상황에 끌려가지 않기로 했다.“내가 당신에게 뭘 했다고 살려달라 하죠?” 나는 차분히 물었다.그녀의 입술이 떨리며 간신히 대답했다.“지원 씨, 제가 강유형을 빼앗은 건 잘못된 일이에요. 그건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저도 잘 살고 싶었을 뿐이에요.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고 사람은 높은 곳으로 가고 싶어 하잖아요.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요?”나는 참 어이가 없었다.“잘 살고 싶어서 남의 자리를 빼앗고 남을 짓밟는 게 잘못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지금 무릎 꿇고 있는 건 뭐죠?”조나연은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처지를 늘어놓기 시작했다.“지원 씨, 당신은 저랑 다르잖아요. 당신은 비록
임석진이 사람들 앞에서는 항상 밝게 웃던 모습과 달리,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나는 몰랐다.“하지만 석진 씨도 사람이에요. 그도 지쳤죠. 여러 번 몰래 그가 한밤중에 일어나 담배를 피우는 걸 봤어요. 그럴 때마다 정말 마음이 아팠고 제가 짐이 된 것 같아 스스로를 원망했어요.” 조나연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을 이었다.“그래서 그와 헤어지고 싶었어요. 완전히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렇게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갑자기 그녀의 말투와 태도가 바뀌었다. 자신이 임석진을 위해 희생한 사람이라도 되는 듯한 뉘앙스였다. 그러자 나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럼 지금은 안 힘들겠네요. 이제 영원히 안 힘들겠죠.”조나연은 내 말에서 비꼬는 의도를 느꼈는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은 내 삶을 살아보지 않았잖아요. 내 고통을 이해할 리가 없죠.”그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거의 외치는 듯 말했다.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이 이내 조금씩 가라앉았다.“지원 씨, 석진 씨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정말로 내가 그를 해치려 한 게 아니에요. 나는 단지... 나의 배신을 발견하면서 자발적으로 나를 떠나도록 만들고 싶었어요. 그를 자유롭게 해주려고요.”나는 가만히 물었다. “그럼 그 사고는... 정말 당신 짓이 아니에요?”조나연은 격렬하게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석진 씨는 나에게 너무 잘해줬어요. 내가 짐승도 아닌데 어떻게 그를 죽일 생각을 하겠어요?”하지만 나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그래도 결국 당신 때문에 죽었잖아요.”나는 단호하게 그녀의 핑계를 차단했다.조나연은 한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다음 생에... 내가 더 잘할게요. 석진 씨한테...”나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다음 생에도 이런 식으로 나오면 석진 씨는 당신을 보고 도망칠 거예요.”내 말은 한층 날카롭게 그녀를 찔렀다.내심 아이만 없었다면 그녀를 붙잡
조나연의 말에 나는 어이없었다.“강유형이요? 그 사람을 원한다고요?”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조나연은 내 눈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듯 말했다.“맞아요. 강유형 그 사람이요. 하지만 제가 원하는 건 그의 마음이 아니라, 그의 존재예요.”나는 그 말에 속으로 비웃었다. ‘정말 대단한 여자네.’“조나연 씨, 잘못 말씀하신 거 아니에요? 당신이 원하는 건 강유형이 아니라, 그의 신분과 그 뒤에 숨겨진 부잖아요.”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그건 부정하지 않아요. 하지만...”그리고 잠시 말을 멈추더니, 비수처럼 날카로운 한마디를 내뱉었다.“하지만 그동안 유형 씨가 저에게 잘해줬어요. 너무 잘해줘서 저도 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됐어요. 이제는 그와 평생 함께하고 싶어요.”그 말을 듣자 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나를 겨냥하듯, 강유형이 자신에게 잘해줬다는 점을 강조한 그녀의 말투에 감춰진 의도가 뻔히 보였다.그래서 나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그가 그렇게 잘해줬다면 왜 도망쳤을까요?”조나연의 얼굴이 굳었고 나는 계속 이어 말했다.“그가 정말로 당신과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하세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돌아오기만 하면 제가 방법을 찾겠어요.”나는 고개를 저으며 냉정히 말했다.“그럼 당신이 알아서 돌아오게 해 보세요. 저는 도와줄 생각이 없으니까요.”그녀는 한참 동안 무릎을 꿇고 있어 몸이 휘청거렸고 그래서 차 문을 꽉 잡았다.“왜요? 설마 아직도 유형 씨를 사랑해요?”그녀의 말에 나는 짧게 웃으며 대꾸했다.“그렇게 믿고 싶다면 그렇게 믿으세요.”조나연은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무릎 꿇고 계시면 아기한테도 안 좋으니까 이제 일어나세요. 저도 가야 하거든요.”그러나 그녀는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지원 씨가 강유형 씨에게 연락하지 않으면, 저는 여기서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그녀의 집착이 얼마나 강한
강유형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조나연은 이미 눈물이 가득 고였고 목소리가 떨렸다.“유형아... 나 정말 너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해.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그녀는 간절하게 애원했지만 강유형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조나연은 초조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확인하며 물었다.“유형아, 너 듣고 있는 거 맞지? 듣고 있어?”화면에는 여전히 통화 중이라는 표시가 떠 있었지만 강유형은 입을 열지 않았다.그러다 마침내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조나연, 네가 우리 집에 간 거, 누가 시켰어? 내가 너한테 뭐라고 경고했는지 잊었어?”그녀는 핸드폰을 쥔 손을 떨며 변명했다.“유형아, 어쩔 수 없었어... 난 이 아이를 지키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아이한테 무슨 일 생기면 안 된다고 했잖아.”그녀의 태도에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아이를 없애겠다고 했던 사람이 이제 와서...강유형의 목소리는 더 차가워졌다.“이번이 마지막이야. 조나연.”“유형아...!”하지만 그의 단호한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통화는 종료되었고 핸드폰에서는 뚜뚜 신호음만 울렸다.조나연은 멍하니 핸드폰을 쥔 채 계속 이름을 불렀다.“유형아, 유형아...”나는 차분히 말했다.“전화 끊겼으니까 핸드폰 돌려줘요. 이제 끝난 거 같네요.”그녀는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고 앉아버렸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보였다.나는 더 이상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차를 몰고 자리를 떠났다.운전하는 동안 머릿속에는 그녀가 했던 말들과 임석진의 죽음이 떠올랐다. 정신이 흐려져 어떻게 운전했는지도 모른 채 민원센터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이러다 큰일 나겠다.’나는 스스로를 다잡으며 화장증명서와 서류를 들고 걸어갔다.서류를 제출하자 직원은 이를 확인한 뒤 컴퓨터에 무언가를 입력하며 업무를 시작했다. 나는 그녀를 불렀다.“잠깐만요.”직원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네?”“부모님 자료 좀 찍어두고 싶어서요. 기념으로요.”사진을 찍고 나자 직원은 곧바로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
나는 오직 그녀만을 믿었다.“괜찮아. 초음파 사진 봤어. 아기는 아주 건강해.”안리영의 곱고 단정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저 그렇게 미묘하게 번진 웃음 하나가 내겐 믿음을 주는 보약처럼 느껴졌다.“리영아, 제발 이 아이만은 꼭 지킬 수 있게 도와줘.”나는 긴장과 초조함 속에서 그녀에게 매달리듯 말했다.“당연하지. 이건 너랑 정우 씨의 사랑의 결실이잖아.”안리영이 장난스럽게 받아쳤다.강유형은 고개를 돌렸다. 감춰지지 못한 외로움이 스쳐 지나갔다.그와의 관계에서 나는 이미 완전히 빠져나왔다. 그 역시 이별을 받아들였다고 하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듯했다.안리영 덕분에 나는 병실에, 그것도 VIP 병실에 입원할 수 있었다. 그녀의 당직실이 아니라 정식 병실이었다.아랫배의 통증도 가라앉았고 출혈도 점점 잦아들었다. 마음이 조금 놓이자 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그 강 선생님이라는 사람, 갑자기 부임한 거라면서? 어떻게 된 일이야?”안리영은 반 박자쯤 쉬었다가 입을 열었다.“소희연의 고모인가 이모인가 그래.”이 말을 듣고 나는 바로 눈치를 챘다. 슬쩍 그녀의 표정을 살폈지만 전과 다를 건 없었다. 다만 얼굴이 조금 더 야위어 보였다.그녀는 구안석과 헤어졌다. 게다가 먼저 끝내자고 한 것도 그녀였다. 실망이 극에 달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그래도 구안석은 그녀가 오랜 세월 마음을 품었던 사람이었다. 그 오랜 감정을 끊어낸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나는 그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그런 감정은 그 누구도 위로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위로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저 무심히 말했다.“강유형이 병원장한테 얘기할 것 같아.”“고자질할 만하면 해야지.”안리영은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가만히 당해줄 호구도 아니었다.나는 웃음이 터졌다.“의사 선생님답네. 칼 쥐고 돈 받는 직업이라 그런가 마음도 차갑기 그지없군.”“남한테 괜히 마음 써봤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셈이나
“유산 조짐이 있습니다.”그 말을 듣자 나는 마치 환청이라도 들은 듯 얼이 빠졌다.‘유산이라니?’“의사 선생님, 저 임신한 거예요?”놀라움과 기쁨이 한꺼번에 몰려와 나는 의사의 가운을 붙잡았다.“몰랐어요?”의사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러고는 곧 못마땅하다는 듯 한마디 덧붙였다.“요즘 젊은이들은 쾌락만 즐기고 책임질 생각을 전혀 안 한다니까요.”의사는 나와 강유형을 연인으로 착각하고는 설교를 퍼부었다.하지만 지금은 그걸 해명할 정신도, 그의 핀잔에 대응할 여유도 없었다. 나는 재차 물었다.“선생님, 저 정말 임신한 거 맞죠?”“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유산 조짐이 보여요. 아이를 지킬 수 있을지는 아직 몰라요.”의사의 말에 나는 그의 가운을 더 꽉 움켜쥐었다.“제발 부탁드릴게요. 아이를 지켜 주세요.”흥분에 겨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요즘 들어 이유 없이 아이가 갖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는데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선물처럼 안겨 오다니 꿈만 같은 소식이었다.그런데도 나는 멍청하게 지금까지 아무것도 몰랐었고 그로 인해 아이를 놀라게 하고 말았다.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왔다.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아가야, 아무 일 없어야 해. 꼭...’“우선은 보태부터 시작할게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화장실을 가는 것과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무조건 누워 있어야 해요. 일주일 정도 상태를 지켜본 후에 다시 판단할 겁니다. 계속 출혈이 있으면 아이는 지키기 힘들지도 몰라요.”의사는 이미 키보드를 두드리며 처방전을 작성하고 있었다.“선생님, 여기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받을 수 있을까요?”나는 지금 몸을 함부로 움직이기 두려웠고 그저 병원 안에 머무르고 싶었다.이 병원엔 안리영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산부인과 과장이기도 하다.지금은 또 수술에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내가 안정을 취할 수 있게 도와줬을 것이 분명했다.“지금은 남는 병상이 없어요. 일단 집에서 안정을
“이 난장판에 끼어들 생각은 없어요. 대단하신 지원 양이 알아서 해봐요.”함소은은 그렇게 말하며 용은서의 손을 잡아당겼다. “가자. 준호 오빠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너랑 놀아줄 틈 없어”“싫어요! 나랑 안 놀아줄 거면 저 언니를 내려놓으라고 해요! 언니가 나랑 놀아주면 되잖아요!”이 아이는 참으로 귀엽고 사랑스러웠다.“그래, 그럼 여기서 계속 붙잡고 있어. 난 먼저 간다.”함소은은 아이의 손을 놓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용준호에게 한마디 던졌다.“이번엔 너한테 맡긴다. 제대로 잘 봐. 잃어버리기만 해봐, 아주 그냥.”그러고는 정말로 가버렸다. 그것도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아주 태연하게 말이다.이 여자는 정말 대단했다. 아이는 그렇게 내버려둔 채로 신경도 안 쓰고 가버렸다.하긴 자신의 딸을 납치까지 했던 사람이니 용준호한테 애를 맡기는 건 별일도 아닐 게 분명했다.하지만 그녀의 행동이 내게는 도움이 됐다. 용은서가 용준호를 붙잡고 있는 덕분에 날 업고 도망가기는 어렵게 됐으니 말이다.함소은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유형이 도착했다.코피는 이미 멈췄지만 낯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용준호, 윤지원 놓아줘. 아니면 오늘 나랑 끝을 보든지 해.”강유형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용준호랑 한패도 아니었고 평소에 저렇게 거칠게 말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코피도 아직 덜 닦았구먼 왜 또 여기서 영웅 행세야?”용준호가 빈정거리듯 말했다.“오빠 피도 아직 안 말랐거든.”용준호가 날 어깨에 짊어지고 있어 답답하긴 했지만 한마디는 해야겠다 싶었다.용준호는 내 말을 완전히 무시한 채 강유형을 바라보며 말했다.“강유형, 이 여자는 이미 딴 남자랑 잤어. 이제 너랑은 아무 관계 없는 여자라고.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남이 쓰던 걸 다시 쓰고 싶냐고.”‘이 자식이 지금 날 뭐라고 한 거야? 지금 붙잡혀 있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렸을 텐데.’“내려놓으라고 했어. 헛소리는 그만하지?”강유형은 더 이상 말다툼할 가치도 없다
사람들이 나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모두 의혹 가득한 눈으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멀찍이 서서 바라볼 뿐이었다.용준호는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어느 새끼가 감히 널 구하려는지 두고 보자고!”그는 너무나도 오만방자했다.“오빠!”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용준호가 걸음을 멈추었다. 뒤집힌 시야 속에서 만두 머리를 한 여자아이를 보았다.바로 용은서였다.내가 이 여자아이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전에 용준호는 콧방귀를 뀌었다.“저리 썩 꺼져.”살벌한 목소리에 평범한 아이였다면 벌써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하지만 용은서는 그의 혈육이었고 평소에도 늘 호통에 익숙했는지 전혀 겁내지 않고 당당하게 물었다.“왜 사람을 업고 있어? 강도 같아!”대담한 발언이었다.“꺼지라니까.”용준호는 음을 길게 끌며 말했다.“사람 말을 못 알아듣나? 집에서 안 가르쳐줬어?”용은서는 눈을 흘기며 받아쳤다.“오빤 맨날 이렇게 화내.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용준호가 다시 호통을 치려는 순간 용은서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오빠, 나 할 말 있어.”용은서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내가 제대로 서 있기만 했어도 당장 품에 안아서 볼에 뽀뽀를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하지만 용준호는 여전히 사나웠다.“꺼지라고 했지. 말 안 들으면 발로 차버린다.”혈육에게 말이 너무 지나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후려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하지만 용은서는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고 오히려 그의 바지 끝을 움켜잡으며 나를 바라보았다.“은서야, 언니 구해줘!”나는 목소리를 냈지만 어린아이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이 소꿉장난처럼 느껴져 부끄럽기 그지없었다.“윤지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애한테 도움을 청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냐?” 용준호는 나에게도 으르렁댔다.지금의 그는 미친개처럼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 중이었다.“오빠, 왜 언니를 업고 있어? 다쳐서 걷지 못해?”용은서의 질문은 철없는 아이다운 순수함이 묻어났다.용준호의 인내심은 바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