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소 기계를 끄면 한 생명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그럼 지금은 그녀 곁에 있어야죠. 끝까지 함께 지켜 줘야죠.”“알았어요, 지금 바로 갈게요.”소지훈은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폐를 끼쳐드려서 미안해요.”나는 입술을 살짝 움직였다.“기적이 있기를 바랄게요.”소지훈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어젯밤 그를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뭘 봐? 전화도 안 받았고.”진정우가 다가와서 내가 들고 있던 꽃을 받아 들고 물었다.나는 소지훈에 대해 어떻게 말할지 몰랐다. 어젯밤 그와의 우연한 만남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소지훈의 사정이 복잡했기 때문이었다.가장 중요한 건 소지훈의 말이 내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정우 씨, 사람과 혈연관계가 없어도 닮은 사람이 있는 이유가 뭘까?”“사람은 유전자란 걸로 구성되니까...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 유전자가 비슷한 사람도 있을 수밖에 없지.”진정우는 아주 공식적인 답을 했다.나는 소지훈이 나를 따라다녔던 이유를 생각하며 다시 물었다.“그럼 언젠가 정우 씨는 날 닮은 사람을 보면 나를 찾으려고 할 거야?”“왜 그래야 하는데?”진정우는 날카롭게 물었다.“그냥. 만일의 경우 말이야.”“내 눈에 너는 오직 너 하나뿐이야.”진정우는 그다지 흔들림 없이 말했다.“알았어. 알았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다른 생각 안 할게.”진정우는 내 옆에 있던 흩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언제나 너는 오직 너 뿐이야. 나에겐 너밖에 없어.”“하하.”그 말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알겠어. 빨리 가자.”진정우는 꽃을 들고 내 손을 잡았다.“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 거야?”“방금 사진을 봤는데 내 얼굴과 정말 닮은 여자애가 있었어.”내가 잠시 멈칫하며 말했다.“정확히 말하면... 닮은 정도가 90%는 됐어.”그때는 그냥 얼굴이 비슷하다는 점에 놀랐지만 사진이 내 머릿속에 남고 나서야 닮은 점
그리고 그들이 우리를 지켜본 지 한참 된 것 같았다.그래서 아까 진정우와 내가 나눈 대화도 그들이 다 들었을 것이다.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아 보였다.이렇게 마주쳤으니 인사를 안 할 수도 없었다.진정우와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아줌마, 삼촌, 진혁 오빠.”그러자 아줌마가 제일 먼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지원아, 정우야, 너희 둘은 여기서 뭐 하고 있어?”나는 진정우를 힐끗 보며 대답했다.“친구를 보러 왔어요.”진소영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진정우가 진소영을 방해받는 걸 싫어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아줌마와 삼촌이 진소영이 병원에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병문안을 오려고 할지도 모르고 그럼 진소영이 나와 그들의 관계를 물을까 봐 설명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나는 말을 마치고 삼촌을 쳐다보았다. 삼촌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서 있었고 안색도 안 좋아 보였다. 분명 몸이 편찮으신 것 같았다.“삼촌, 괜찮으세요?”“그냥 혈압이 좀 올라서 그렇지 별일 아니야.”삼촌이 먼저 말을 꺼냈다.아줌마가 삼촌을 한 번 쳐다봤다. 삼촌이 거짓말을 하는 게 분명했다.삼촌도 뭔가를 숨기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나처럼 서로 숨기는 게 많아지면서 우리 관계도 점점 멀어져 가는 느낌이었다.예전에는 삼촌이 감기만 걸려도 나한테 먼저 약을 구해달라고 했었는데.“지원아, 너희 여기서 뭔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게 없어?”.“없어요.”나는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거절했다.대화는 자연스럽게 끊겼고 진정우가 분위기를 깨며 말했다.“삼촌, 저희랑 같이 가서 진찰받으시죠.”그 말은 정말 좋은 말이었다. 진정우는 항상 사람들에게 그를 고마워하게 만드는 법을 알고 있었다.“괜찮다니까. 너희는 너희 일 보러 가.”삼촌이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고 아줌마도 곧바로 말했다.“지원아, 나중에 시간 되면 삼촌 좀 보러 와.”“네. 그럼 저희 먼저 가볼게요.”나는 진정우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우리가 걸음을 떼자 아줌마의 한숨 소리
그러자 내 표정이 잠시 굳었다. 진정우는 진소영의 이마를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무슨 호적 조사라도 하냐?”진소영은 입을 삐죽이며 대답했다.“그냥 생각나서 물어본 거야.”나는 진정우를 보며 말했다.“검사는 다 끝났으니까 정우 씨가 소영이를 데리고 가서 뭐라도 먹어. 나는 가서 좀 볼 일이 있어.”“언니... 언니는 어디에 가는 건가요?”진소영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진정우는 내가 뭘 하러 가는지 이미 짐작한 듯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밀어내며 걸어가며 말했다.“너 원래 이렇게 말이 많았어? 여기 오더니 수다쟁이가 다 됐네.”“지금 안 하면 나중엔 말할 기회 없을 것 같아서요.”진소영의 말에 진정우의 걸음이 잠시 멈칫했다. 나 역시 그 말에 가슴이 아려왔다.진소영도 수술대에서 깨어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헛소리하지 마.”진정우는 그녀의 머리를 살짝 두드렸다.진소영은 그의 팔을 붙잡고 함께 걸어갔다. 둘이 멀어져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나는 발길을 돌려 강삼촌을 찾으러 갔다.“지원아, 어떻게 다시 왔어?”아줌마가 반가운 듯 물었다.“삼촌 상태가 걱정돼서요.”나는 솔직히 말했다.아까 진소영에게 그들이 내 양부모라고 말했던 것처럼 내 마음속에서 그들은 진짜 부모님 같은 존재였다.“괜찮다니까.”삼촌은 오늘따라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가 괜찮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삼촌, 저를 딸처럼 생각하신다면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도대체 무슨 일이세요?”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냥 혈압이 좀 높아서 가슴이 답답한 거야.”이번엔 강진혁이 대신 대답했고 아줌마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 요 며칠 결혼식 두 번 다녀오면서 술 좀 훔쳐 마셨더니 이러는 거야.”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여전히 안심되지 않았다. 강진혁의 표정을 보니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엄마, 여기 계세요. 검사 끝날 때까지 밖에 나가서 전화 좀 하고 올게요.”강진혁은 핑계를 대며 자리를 떴다.그래
조태혁의 비명과 함께 나는 들고 있던 커피 한 잔을 그의 얼굴에 부어버렸다.조태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얼굴에 흘러내리는 커피를 닦으며 소리쳤다.“누나 미쳤어? 무슨 정신 나간 여자야?”나는 빈 커피잔을 들고 그를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음번에 또 날 건드리면 이 잔으로 네 머리를 깨버릴 거야. 그리고 경찰서로 데려가서 차 한 잔 마시게 할 테니까 알아둬.”오늘 조태혁은 흰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커피 자국이 이미 티셔츠를 망쳐놨다. 머리카락도 젖어 커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정말 초라해 보였다.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여전히 건방졌다.“이렇게 하면 내가 겁먹을 것 같아? 난 하나도 안 무서워! 나...”그의 뒤로 이어지는 말은 듣지 않고 나는 바로 카페를 나와버렸다.그러자 강진혁이 뒤따라왔다.“저 자식은 누구야?”“조나연의 동생.”나는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손에 묻은 커피를 닦으며 말했다.“자주 저렇게 너를 괴롭히는 거야?”“몇 번 그랬어요.”나는 물티슈를 쓰고 쓰레기통에 버렸다.강진혁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나도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삼촌 이야기를 꺼냈다.“삼촌 병원에 입원하실 거죠?”“이미 입원했어. 병실은 812호야.”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나중에 병실로 가서 뵐게요.”“그래. 나는 좀 사러 갈 게 있어서 넌 먼저 할 일 봐.”강진혁은 나에게 먼저 가보라고 했다.나는 걸어 나가다가 문득 진소영이 지난번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아직 한 번도 제대로 된 커피나 밀크티를 마셔본 적이 없다고 했었다. 그래서 발길을 돌려 다시 카페로 들어갔다.그런데 마침 조태혁이 강진혁을 따라다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그 광경에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강진혁이 나보고 먼저 가라고 했던 이유가 조태혁을 손봐주려는 것이었구나?’나는 그들에게 다가가지 않고 그들이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밀크티와 커피를 샀다.병실에 들어가 보니 진소영은 혼자 침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아까 그녀가
“언니, 그렇게 오빠랑 함께 있고 싶어요?”진소영이 웃으며 말했다. 순간 약간 민망했지만 이어서 나는 장난스럽게 덧붙였다.“그래. 네 오빠가 참 좋아!”“이 고약한 꼬맹이야.”나는 일부러 그녀를 째려봤고 그러자 진소영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병실을 나와 복도를 둘러봤지만 진정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진소영 말대로라면 아마 조용한 곳에서 전화를 받고 있을 것이다. 잠깐 고민하다가 비상계단 쪽으로 향했다.계단에 가까워지자 진정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때의 정비소는 없어졌지만 정비사들은 아직 있을 거야. 방법을 찾아봐야 해... 물론 필요하지. 지원이한테 정확히 말해야 하고 아버지의 결백도 증명해야 해.”그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 며칠 동안 사고 당시 브레이크 문제를 다시 조사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진정우가 이미 알아보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가 전화를 끊자마자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또 다른 전화가 울렸다. 나는 다시 멈춰 섰다.문틈으로 보니 진정우가 담배 한 개비를 손에 든 채 전화를 받고 있었다.“돌아왔어... 응. 같이 왔어... 나랑 지원이 없으면 안 되는 거야?... 알았어. 올 필요 없어. 들키면 안 되니까... 문제없어. 코드 계속 쓰고 있어.”그의 대화는 회사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통화 상대는 아마 허진호일 것이다.그런데 진정우의 말투는 마치 허진호가 부하처럼 느껴졌다.‘진정우... 혹시...’갑자기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듯했다.‘나... 또 속은 건가?’하지만 그는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혹시 무슨 이유가 있는 걸까?’그가 전화를 끊고 복도로 나왔을 때 우리는 마주쳤다.“여기서 뭐 해?”그가 내 옆에 서서 물었다.“널 찾았는데 못 찾았어.”나는 거짓말했다.“전화 받고 있었어.”진정우가 내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삼촌 쪽은 어떠셔?”“폐암이래.”나는 무겁게 대답했다.폐암이란 병이 가진 의미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현실이었다.예전에 같이 일하던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늘 진소영이 받은 검사들을 떠올리며 물었다.“검사 결과가 안 좋았어?”안리영은 하얀 가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아니야. 검사 결과는 괜찮아. 문제는 기증자 쪽에서 생겼어.”“응?”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기증자는 뇌사 상태의 환자였어. 가족들이 기증을 동의했는데 갑자기 마음을 바꿨대.” 안리영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이 기증자가 진소영과 이식 조건이 완벽히 맞았던 사람인데 기증을 포기했다면 진소영은 다시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왜 기증을 포기했는지는 알아?”안리영은 입술을 삐죽이며 대답했다.“몰라. 단지 기증자 정보는 기밀이잖아. 나도 그저 통보만 받았어.”진소영이 새 삶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있는 걸 알기에 그녀가 이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실망할지 상상이 됐다. 그리고 아까 진정우를 부르러 갔던 이유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럼 진정우를 찾은 이유도 이 문제 때문이었어?”“아마도 그럴 거야.”안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너무 걱정하지 마. 선배가 분명히 다른 방법을 찾을 거야. 다만 수술 일정이 조금 늦어질 뿐이야.”“그렇다면 병원에 계속 있지 말고 퇴원해서 여행이라도 시켜주는 게 좋겠어.”나는 진소영을 위해서 생각을 털어놨다.“네 시누이는 네가 알아서 해야지.”안리영이 내 말에 장난스럽게 대꾸했다.나는 그녀의 어깨를 살짝 밀며 미소를 지었다.“근데 너랑 구 교수님은 어떻게 연애 중이야? 어느 정도까지 나갔어?”“나가기는 무슨. 나 야근하고 선배는 또 초과근무 중이라 제대로 볼 시간도 없어.”그녀는 장난스럽게 한숨을 쉬었다.“이러다 연애는커녕 지구가 멸망해야 겨우 데이트라도 할 수 있겠네.”나는 그녀를 놀렸다.“그게 뭐든 할 거야. 지금은 좀 어렵더라도 해결해야지.”그녀는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래서 네 계획이 뭔데? 설마 의사 그만두고 주부 9단이 되는 건 아니지?”내가 짓궂게 물었다.“말도 안 돼. 난
생리가 시작된 것 같았다.“잠깐만!”나는 안리영을 불러 세웠다.“네가 자꾸 얘기하더니 진짜 왔어. 너희 휴게실에 생리대 있지? 좀 쓸게.”안리영은 주머니에서 휴게실 열쇠를 꺼내 내밀며 말했다.“알아서 쓰고 와.”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녀의 과로 올라가는데 복도에서 거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이 뻔뻔한 여자야! 우리 아들이랑 결혼했으면서 다른 남자를 꼬셔서 우리 아들을 죽게 만들다니!”“네가 지금 배에 든 게 우리 아들의 아이라고? 누굴 속이려는 거야?”“우리 아들 보상금 노리는 거 누가 모를 줄 알아?”...안리영은 상황을 파악하려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고 나는 순간 멈춰 섰다. 이 익숙한 소리 어디서 들었는지 금세 기억났다.비록 지금 당장 생리대가 급하지만 이 상황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나는 소란이 난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이 아이가 당신들 손자라고요! 아이 태어나면 유전자 검사하면 될 거 아니에요!”익숙한 목소리는 조나연이었다.‘그래서 이 장면이 낯설지 않았던 거구나.’“검사한다고 우리가 믿을 줄 알아? 네가 요즘 얼마나 돈 있는 남자들에게 들러붙는지 다 알아. 그따위 검사 결과를 우리가 믿을 것 같아?”“이 여자가 얼마나 뻔뻔한지 여기 있는 모두가 알아야 해요! 남편을 사고로 몰아넣고, 이제는 우리 아들한테 들러붙어 보상금까지 노리다니!”“하늘이시여! 이 여자를 벌하시고 우리 아들의 원한을 풀어주세요...”아줌마의 울부짖음에 병동이 떠나갈 듯했다. 그때 안리영이 차분히 나섰다.“아줌마, 여긴 병원이에요. 이렇게 소리 지르시면 다른 환자들에게 피해가 됩니다. 다른 데로 가세요."‘여기서 울고 소리치지 말라니, 그럼 다른 곳에서는 괜찮다는 건가?’그런 생각을 하니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안리영은 조나연을 알아보고 일부러 이런 식으로 말한 게 분명했다.“의사 선생님, 제가 왜 이러겠어요? 이 여자가 우리 아들과 우리 집안을 망가뜨렸어요. 우리 부부에게는 아들 하나뿐이었다고요!”아주머니의 말은 듣는 이의 마음을 아
만약 아줌마가 정말로 들이쳤다면 조나연의 아이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비록 아줌마는 아이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강유형은 이 아이가 자신과는 관련이 없으며 임석진의 아이라고 분명히 말했었다. 만약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임씨 가문은 정말로 대가 끊기게 될 상황이었다.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본능적으로 달려갔다. 가까운 곳에 있던 안리영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빠르게 아줌마의 팔을 붙잡았다.“아줌마, 이러시면 안 됩니다!”조나연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아이는 아줌마의 친손자예요! 만약 아줌마가 이 아이를 다치게 하면 임씨 가문은 끝나는 겁니다!”“네 뱃속의 아이가 우리 집 손자라고? 웃기지 마! 내가 오늘 당장 이 아이를 없애서 누구 아이인지 확인할 거야!”아줌마는 미친 듯 외쳤다.“좋아요, 아주머니가 직접 확인해 보세요! 이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조나연도 울분에 차서 맞받아쳤다.이 상황에 휘말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이는 소중한 생명이었다. 특히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 남긴 유일한 혈육이라면 더욱 그랬다.나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조나연을 붙잡았다.“정말로 이 아이를 포기할 생각이세요?”조나연이 나를 보고 잠시 멈칫했지만 곧 얼굴이 붉어졌다.“저랑 가시죠.”나는 그녀를 강하게 끌었다.“누구세요? 이 년을 데려가지 마세요! 오늘 이 여자를 죽여서 내 아들의 복수를 할 겁니다!”아줌마는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나는 안리영에게 눈짓했다. 그녀는 여전히 아주머니의 팔을 붙잡고 차분히 말했다. “아줌마, 정말 억울하시다면 법적으로 해결하세요. 이렇게 해서는 복수도 못 하고 아줌마만 더 위험해져요.”하지만 안리영의 설득은 오히려 불을 더 지핀 것처럼 보였다. 아줌마는 울부짖으며 말했다.“내 하나뿐인 아들이 죽었는데... 나도 살 이유가 없어요!”그녀의 말은 모든 것을 함께 끝내겠다는 선언처럼 들렸다.“빨리 가요.”나는 조나연에게 단호히 말했다.그제야 그녀는 내 뒤를 따라왔고 아주머니는 여전히 우리를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이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법운사로 향하는 길에 나는 강유형에게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기나긴 연결음 끝의 자동응답뿐이었다.가슴이 점점 무겁게 내려앉았다. 요즘 그가 법운사에 머물고 있었기에 더더욱 불안했다. 연락도 되지 않으니 머릿속은 온통 나쁜 상상으로 가득 찼다.그에게 전화를 건 건 단순히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부상자나 사망자가 있는지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었다.하지만 그에게 건 전화는 끝내 연결되지 못했다.나는 액셀을 밟으며 용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그의 어머니가 바로 그 절에 계셨으니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 역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이번엔 아예 거절당했다. 불안은 더 깊어졌다.‘혹시 김지영까지 무슨 일이 생긴 걸까?’그간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강유형과 김지영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다치거나 희생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복잡한 심경 속에서 차를 운전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멀쩡하던 절에 왜 불이 난 걸까? 단순한 사고였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의도한 일이었을까? 혹시 나를 노린 불은 아니었을까?’만약 안리영이 나를 데리고 조경태의 생신 잔치에 가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그 절에 있었을 것이다. 죽었을 수도, 심하게 다쳤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내 손에 누군가가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걸 얻지 못하면 나를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그들이 저지른 일이라면 그건 너무 비인간적이었다. 죄 없는 사람들까지 희생시켜서는 안 됐다.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이 나는 어느덧 산기슭에 도착했다. 들이마시는 공기 속엔 타버린 재 냄새가 가득했고 멀리 보이는 산 위엔 아직도 연기가 자욱했다.산을 절반쯤 오르자 경찰이 차량을 막아섰다. 나는 차에서 내리며 이
난처한 상황이었다. 도무지 어찌할지 몰라 법까지 들먹이고 말았다.“법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서른이 넘도록 연애도 안 하고 결혼도 안 하는 건 정상이 아니야. 어느 날 갑자기 남자 며느리라도 데려오면 내가 무슨 낯으로 사람들을 보겠냐?”조경태는 누가 뭐라 해도 듣지 않겠다는 태도였다.“그럼 제가 하나 약속드릴게요. 절대 남자를 며느리로 데려오는 일은 없을 거예요.”조시언은 능청스럽게 받아쳤다.조경태는 씩씩 대며 화를 냈다. 그러자 안리영이 급히 나서며 말했다.“할아버지, 삼촌 좀 그만 괴롭히세요. 안 좋아하는데 억지로 떠민다고 행복해지겠어요?”“이 계집애는 왜 또 얘 편을 드는 거야?”할아버지는 안리영을 흘겨보았다.내가 얼른 말을 이었다.“오늘 온 아가씨들, 저랑 리영이 다 지켜봤어요. 삼촌이랑 어울릴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더라고요.”지금 이 순간 나도 안리영을 따라 조시언을 삼촌이라 부르고 있었다.“난 못 믿겠는걸.”조경태는 콧방귀를 뀌었다.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정말이에요, 할아버지. 그 여자들, 남 얘기하길 좋아해서 뒤에서 험담이나 하는 사람들이에요. 아까도 삼촌 뒷담 까고 있었어요.”조시언은 그녀를 바라보았고 조경태도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그래? 뭐라고 험담하던?”“삼촌이 나이가 꽤 됐는데도 아직 결혼 안 한 걸 말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삼촌을 차지해서 조씨 가문 며느리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수작 부릴 생각들만 하고 있었어요.”안리영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오늘 그 여자들이 조시언을 노리고 온 건 분명했으니 말이다.“그건 좋은 일이잖니.”조경태는 오히려 기뻐하며 말했다.“할아버지는 수작 부리는 여자가 좋으세요?”안리영은 조경태가 싫어하는 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조경태는 말이 없었다. 속이 시커먼 여자한테 크게 당할 뻔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안리영은 나를 향해 눈짓을 보냈고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삼촌 짝 찾는 일은 저랑 리영이에게 맡겨주세요.”내 말에 안리영이 눈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안리영과 나는 방 안의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서로 마주 본 채 각자의 소파에 앉은 모습이었다. 한 사람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젊고 준수한 청년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나이 차가 너무나 뚜렷해 그들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분명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일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부자 관계였다.안리영은 조시언이 입양된 아들이라고 내게 말해준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의아했다. 당시 나이로 치면 조경태는 조시언을 손자처럼 키워도 이상할 게 없었을 텐데 왜 굳이 아들로 삼은 건지 궁금했다.“시언아, 너 이제 나이도 어린 게 아니잖니. 결혼 안 하겠다는 건 그렇다 쳐도 여자 친구조차 없다니. 밖에서 사람들이 너를 두고 뭐라고 수군대는지 너도 알지?”조경태는 수군대다 같은 말도 자연스럽게 썼다.하지만 조시언은 묵묵히 앉아 있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조명이 그의 얼굴과 콧대를 선명하게 나누듯 비췄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면서 그의 이목구비는 더욱 또렷하게 도드라졌다. 깊은 눈썹뼈는 날카로운 선을 연출해 냈다.“사람들이 네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더라!”조경태는 말을 끝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런 이상한 소문이 퍼지는 건 우리 조씨 가문의 체면을 망치는 일이다. 우린 그런 망신 못 당한다!”조시언은 그 말에도 여전히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평온한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고요했다.“남의 입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떠들어대는 건 그들 사정일 뿐, 우린 신경 쓰지 않으면 됩니다.”“넌 신경 안 쓴다지만, 이 늙은이는 창피해서 못 살겠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지금 당장 사람 하나 데리고 오든가, 아니면 내가 직접 찾아줄 거다. 결혼 안 해도 좋다. 그냥 네 옆에 여자 하나 세워놔라. 사람들이 널 정상으로 보게 말이다!”그 말에 안리영과 나는 동시에 서로의 팔을 꼬집었다. 안 그러면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이 노
“넌 안 그럴 거야, 맞지?”안리영은 계속 나를 놀리면서도 언제나 내 편이었다.우리는 함께 연회장으로 들어섰다.조경태는 자줏빛과 금색이 어우러진 긴 도포를 입고 활짝 웃으며 손님들의 축하 선물을 받고 있었다.그는 내가 가져온 선물을 보곤 눈을 반짝였다.“특별한 선물이구나. 아주 마음에 들어.”그 말에 나는 괜히 민망해졌다.강유형의 어머니도 비슷한 걸 선물했는데 어째서 내 것을 특별하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역시 세상을 오래 산 사람은 달랐다. 누구보다도 말솜씨가 뛰어났다. 받는 사람도 기쁘고 주는 사람도 흐뭇하게 만드는 한마디였다.“리영아, 구 교수는 어디 갔니? 오늘은 왜 같이 안 왔어?”조경태가 슬며시 물었다.안리영은 내 옆구리를 몰래 콕 찔렀다.“그냥 따로 말 안 했어요. 오늘은 그냥 제가 단순히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온 거거든요.”그러나 이 정도 지긋한 나이가 되면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오늘 같은 잔칫날에 인원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고 왔다 해서 구안석이 못 오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는 안리영을 힐끔 바라보다 두어 번 웃고는 더 묻지 않았다.“할아버지, 그럼 선물마저 받으시고요. 저는 지원이랑 가서 뭐 좀 먹고 올게요.”안리영은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려 했다. 또 무슨 질문이 나올까 봐 걱정된 눈치였다.“그래, 다녀오거라. 다만 너무 멀리 가지는 마. 좀 있다 너희 둘 도움 좀 받아야겠구나.”그 말에 우리 둘은 눈빛을 주고받았다.“혹시 케이크 자르실 때 저희한테 맡기시려는 거 아니에요?”안리영이 농담처럼 물었다.조경태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콕 찔렀다.“이놈의 계집애, 지금 누굴 놀리는 거냐. 케이크 칼 정도는 들 수 있다고! 그게 아니고, 너희 둘한테 자문 좀 구하고 싶어서 그래.”“자문이요? 혹시 애인이라도 골라달라는 거예요?”안리영은 정말 무서울 정도로 겁 없이 농을 던졌다. 외할머니가 들으면 바로 이마 한 대는 맞았을 거다.“점점 대담해지는구나.”조경태가 다시 한번 그녀를 가리키며
안리영과 조시언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성준수는 그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안리영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하긴 이렇게나 예쁜데 조시언이 마음 줄 만도 하지... 아야, 아파! 조시언, 너 왜 그래?!”성준수는 조시언에게 뒷덜미를 잡힌 채 끌려 나갔고 안리영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정신 나갔네.”“조시언네 리영이?”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난스럽게 되물었다.안리영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너까지 말썽이야, 얼른 가자. 외할아버지께 선물 드려야지.”그녀는 내 손을 잡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빨갛게 물든 귓바퀴가 그녀의 부끄러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아까 조시언과의 어색한 분위기를 떠올리다 나도 모르게 장난을 쳤다.“리영아, 너랑 외삼촌 피가 섞인 것도 아니잖아. 내가 보기엔 한번 고려해 볼 만도 해. 잘생겼지, 돈 많지, 만약 네가 저 사람 잡으면 적어도 밖으로 새는 물은 없을 거 아니야.”안리영은 눈을 부릅떴다.“윤지원, 너 또 그런 소리 하면 진짜 절교할 거야.”“어머, 발끈하네?”나는 계속해서 놀렸다.“그만하라고 했지!”안리영은 나를 쫓아와 때리려 했다.나는 그녀를 피해 도망치다가 무언가에 부딪혔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익숙한 향이 먼저 스며들었다.고개를 들자 강유형이 서 있었다.요즘 그와 자주 마주쳤다. 절에서도 마주쳤고 조씨 가문에서도 마주쳤으니 말이다.“강 대표님, 이제 가시려고요?”안리영의 말투엔 노골적으로 쫓아내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나는 이미 다 털어냈다 하더라도 안리영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네.”강유형은 나를 살짝 놓아주며 내 발을 내려다봤다. 다친 데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했다.“조경태 씨 생신 축하하러 왔어요.”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는 볼 거 다 보고 별일 다 겪은 사이였다. 나는 담담하게 물었다.“저녁 식사는 안 하고 가?”“응, 그게...”그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집에 가봐야 해서.”그 말에 문득 김희연이 내게 건넨 말과
“아이참, 엄마!”안리영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오늘은 외할아버지 생신 잔치잖아, 내 맞선 자리가 아니고.”“뭐 어때?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셈이잖니. 좀 있다가 잘 둘러보렴. 우리 딸처럼 예쁘고 똑똑한 애가 남자 친구 하나 못 찾겠어? 눈만 마주치면 끝이지.”조민영은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안리영은 체념한 듯 말했다.“알겠어. 엄마는 먼저 가서 볼일 봐. 난 지원이 찾으러 갈게. 외할아버지께 드릴 선물도 걔가 챙겨왔거든.”안리영은 그렇게 핑계를 대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난 그녀와 어머니의 대화를 이미 들은 터라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아주머니 꽤 개방적이시네. 근데 나도 그 말 일리 있다고 봐. 예전에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라고.”“좋아. 마음에 드는 사람 있으면 바로 들이댈게.”그 순간 나는 조시언을 발견했다.그는 어두운 톤의 정장에 검은 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다. 셔츠 단추는 몇 개 풀려있었고 그로 인해 허연 목덜미가 살짝 드러나 있었다. 그 하얀 피부와 검은 셔츠가 만들어내는 대비는 그를 더욱 차가워 보이게 만들었다. 어쩐지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도 자아냈다.“네 외삼촌, 진짜 잘생겼다.”나는 감탄했다.안리영도 내 시선을 따라가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여자들한테 인기 많았어. 예전에 내가 저 사람한테 온 러브레터를 얼마나 많이 대신 받아줬는지 몰라.”하긴 조시언 같은 사람이 인기가 없을 리가 없었다.“그럼 연애는 해봤대?”안리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아니, 못 해봤을걸.”“그렇다면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있다는 말이겠지.”내 말에 안리영이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내 가슴을 콕 찌르는 말을 꺼냈다.“아, 맞네. 너 연애 경험 많았지.”“나 약 올리는 거야? 그렇게 나오면 나도 너 도와줄 마음 싹 사라지는데?”우리가 대화를 나눌 동안 조시언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안리영은 어느새 자세를 바짝 고쳐
안리영은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초 후 그냥 끊어버렸다.그토록 단호하고 주저 없는 태도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마 정말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다.이런 부분에선 그녀가 나보다 훨씬 강했다. 질질 끌지도 않았고 미련도 없었다.사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강유형과 헤어진 건 헤어진 거고 가끔 연락을 하긴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을 때뿐이었다.안리영과 구안석이 여기까지 온 게 아쉽긴 해도 딱히 뭐라고 말할 순 없었다.감정의 온도는 결국 그 당사자만이 아는 법이니 말이다.우리가 함께 차를 마시며 점원의 포장 작업을 기다리는 동안 안리영의 휴대폰 화면이 다시 한번 반짝였다.새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구안석에게서 온 메시지였다.‘리영아, 나 이제 갈게.’나는 슬쩍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이따가 차단할 거야.”“직접 못 하겠으면 내가 대신 해줄까?”내가 농담처럼 말했다.안리영은 나에게 절친만이 보낼 수 있는 눈빛을 건넸다. 점원이 포장해 준 작품을 들고 매장을 나설 때까지 그녀는 끝내 구안석에게 답장하지 않았다.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이 구안석의 메신저 대화창에서 멈춘 걸 발견했다. 그녀는 그들이 나눈 대화를 처음부터 다시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나는 의아해 물었다.“왜 웃어?”안리영은 내게 휴대폰을 내밀며 말했다.“선배님이랑 나눈 대화 좀 봐봐.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합쳐도 겨우 몇십 개밖에 안 돼. 우리 과 단톡방에서 일주일에 올라오는 공지보다도 적어.”나는 보지도 않고 다시 그녀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이미 헤어지기로 한 거잖아. 그런 거 봐서 뭐 하려고.”“지원아, 나 진짜로 연애한 게 맞긴 한 걸까?”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구안석을 차단했다.“공적인 일 있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럴 때도 연락 안 하게?”나는 애써 분위기를 풀어보려 장난을 던졌다.“그 사람은 흉부외과고 나는 산부인과야. 서로
“이거 포장해 주세요. 선물할 거니까 선물 상자에 담아 주세요.”김희연은 점원에게 부탁을 마치고 돌아서다 나를 발견했다.“지원아!”그녀가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인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아줌마.”나는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김희연은 나를 바라보며 눈가를 붉혔고 눈동자까지 촉촉하게 물들였다.“지원아...”그녀는 내 이름만을 부를 뿐 다른 말은 쉽사리 꺼내지 못했다. 마음속에 수많은 말들이 맴돌고 있을 게 분명했지만 끝내 꺼낼 용기가 나지 않는 듯했다.나도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몇 달 만에 마주한 모습이었다. 흰머리가 부쩍 늘었고 수척해진 인상이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눈빛에서 생기가 보이지 않았다.그녀가 요즘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강두식은 병상에 계시고 두 아들 사이엔 균열이 생겨 서로 등을 돌린 상태다.말 그대로 집안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모든 시작은 나와 강유형이 끝을 맺으면서부터였던 것 같다.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들이 잘 풀린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잘 지내니?”그녀가 한참 만에 힘들게 물었다.“네,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거면 됐다. 그거면 좋아.”나는 그녀에게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시간을 견뎌냈는지 이미 보아냈으니 말이다.“너도 혹시 작품 보러 왔니? 선물하려고?”그녀는 어색함을 덜기 위해 다시 말을 건넸다.“오늘 저희 외할아버지 생신이라서요. 지원이가 저희 외할아버지 드리려고 보고 있었어요.”안리영이 대신 대답했다.“지원이도 조씨 댁에 가는구나. 잘 됐다, 그분도 지원이를 참 좋아하시잖니. 예전에도 자주 얘기하셨지.”그녀는 말을 잇다가 목이 메인 듯 얼굴을 살짝 돌렸다.나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그렇게 슬픔을 억누르는 모습이 안쓰러워 조용히 입을 열었다.“아줌마, 저 먼저 고르러 가볼게요.”“지원아.”그녀가 다시 나를 불러 세웠다.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어렵게 말을 이었다.
“네가 헤어지자고 했는데 구안석이 아무 말도 안 했다고?”안리영의 말을 듣고 나도 좀 놀랐다.안리영은 살짝 웃었다.“아마 그 사람도 지쳤겠지. 차라리 혼자일 때가 더 편했을 거야. 뭘 하든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간섭받을 일도 없고 신경 쓸 일도 없으니까.”딱 봐도 감정 섞인 말이었다.“너, 혹시 이별하자는 말도 일부러 한 거 아니야? 화나서?”내가 조심스레 물었다.안리영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난 정말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야.”내가 코웃음을 쳤다. 안리영이 웃으며 말했다.“진짜라니까. 지난번에 내가 선배한테 귀국할 수 없냐고 물었을 때부터 쭉 고민해 왔어.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뭘까, 생각하게 되더라고.”“사실 사랑이든 결혼이든 여자들이 바라는 건 결국 하나잖아. 안정감, 그리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 근데 그 사람이 그걸 못 준다면 나 혼자서도 충분한데 굳이 그런 사랑을 붙잡을 필요가 있을까?”안리영은 낮게 물었다.나는 장난스럽게 말해봤다.“그럼 생리적 욕구 해결은?”안리영은 다시 웃었다.“남자를 그 이유 하나로만 찾는 거면 얼마나 쉬워.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되잖아. 게다가 종류도 다양하고 취향 바꾸는 것도 가능하고.”“하하하.”나는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리영이, 네 취향 은근히 세네?”장난처럼 말했지만 사실 그녀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리영아, 네가 어떤 결정을 해도 난 응원할 거야. 하지만 말이지... 이별이라는 건, 특히 진심이었을 때는 헤어지는 순간도 진짜 아프잖아. 힘들면 꼭 나한테 말해. 같이 술이라도 마셔주지.”“응, 필요하면 연락할게.”안리영은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살짝 맞댔다.“그보다 지금 당장 네가 좀 도와줘야 하는 일이 하나 있어.”“뭔데?”“오늘 우리 외할아버지 생신이야. 이번엔 도저히 빠질 수가 없어.”안리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부모님도 몇 번이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보고 싶어 하신다고 했는데 그녀는 그때마다 핑계를 대고 빠졌단다. 이번까지 거절하면 그녀의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