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는 이번에는 도망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서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혹시 저 아세요?”내가 다가가며 바로 물었다.“아니요. 모릅니다.”나는 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처음엔 평범해 보였지만 보면 볼수록 매력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피부는 하얗고 오늘 입은 물빛 티셔츠 덕분에 한층 깔끔하고 단정한 인상이었다.“하지만 어제와 오늘 우연히 마주친 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나는 그의 말이 거짓말임을 넌지시 지적했다.“정말 모릅니다. 다만 당신이 제가 아는 사람과 너무 닮아서요.”그가 이렇게 말하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는 건 너무 식상하지 않아?”그는 내 웃음 속 비꼼을 눈치챘는지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진짜라니까요. 사진도 있어요.”그는 말을 마치고 휴대전화를 꺼내 몇 번 터치한 뒤 내게 화면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화면으로 시선을 옮기며 한참 들여다봤다.사진 속 여자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동그랗게 묶고 있었다. 얼굴은 나와 놀라울 정도로 닮았지만 눈가에 있는 눈물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나는 사진 속 여자를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정말 닮긴 했네요. 하지만 저는 이 여자를 몰라요.”“그럴 줄 알았습니다.”그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런데 왜 저를 따라다니는 거죠?”나는 그의 신발에 잠시 시선을 두며 물었다. 그가 신고 있는 운동화가 묘하게 눈에 들어왔다.그는 잠시 침묵했다.그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이런 식으로 따라다니면 스토킹으로 간주할 수 있어요. 신고해도 된다고요.”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그런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의도가 나쁘지 않더라도 이런 행동은 여자에게 불안하고 무섭게 느끼게 만들 수 있어요. 이해하시겠어요?”내 말투는 마치 직원에게 충고하는 듯 단호했다.“죄송합니다.”그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솔직히 특별히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요. 어제와 오늘 있었던 일은 그냥 없던 걸
산소 기계를 끄면 한 생명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그럼 지금은 그녀 곁에 있어야죠. 끝까지 함께 지켜 줘야죠.”“알았어요, 지금 바로 갈게요.”소지훈은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폐를 끼쳐드려서 미안해요.”나는 입술을 살짝 움직였다.“기적이 있기를 바랄게요.”소지훈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어젯밤 그를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뭘 봐? 전화도 안 받았고.”진정우가 다가와서 내가 들고 있던 꽃을 받아 들고 물었다.나는 소지훈에 대해 어떻게 말할지 몰랐다. 어젯밤 그와의 우연한 만남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소지훈의 사정이 복잡했기 때문이었다.가장 중요한 건 소지훈의 말이 내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정우 씨, 사람과 혈연관계가 없어도 닮은 사람이 있는 이유가 뭘까?”“사람은 유전자란 걸로 구성되니까...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 유전자가 비슷한 사람도 있을 수밖에 없지.”진정우는 아주 공식적인 답을 했다.나는 소지훈이 나를 따라다녔던 이유를 생각하며 다시 물었다.“그럼 언젠가 정우 씨는 날 닮은 사람을 보면 나를 찾으려고 할 거야?”“왜 그래야 하는데?”진정우는 날카롭게 물었다.“그냥. 만일의 경우 말이야.”“내 눈에 너는 오직 너 하나뿐이야.”진정우는 그다지 흔들림 없이 말했다.“알았어. 알았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다른 생각 안 할게.”진정우는 내 옆에 있던 흩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언제나 너는 오직 너 뿐이야. 나에겐 너밖에 없어.”“하하.”그 말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알겠어. 빨리 가자.”진정우는 꽃을 들고 내 손을 잡았다.“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 거야?”“방금 사진을 봤는데 내 얼굴과 정말 닮은 여자애가 있었어.”내가 잠시 멈칫하며 말했다.“정확히 말하면... 닮은 정도가 90%는 됐어.”그때는 그냥 얼굴이 비슷하다는 점에 놀랐지만 사진이 내 머릿속에 남고 나서야 닮은 점
그리고 그들이 우리를 지켜본 지 한참 된 것 같았다.그래서 아까 진정우와 내가 나눈 대화도 그들이 다 들었을 것이다.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아 보였다.이렇게 마주쳤으니 인사를 안 할 수도 없었다.진정우와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아줌마, 삼촌, 진혁 오빠.”그러자 아줌마가 제일 먼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지원아, 정우야, 너희 둘은 여기서 뭐 하고 있어?”나는 진정우를 힐끗 보며 대답했다.“친구를 보러 왔어요.”진소영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진정우가 진소영을 방해받는 걸 싫어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아줌마와 삼촌이 진소영이 병원에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병문안을 오려고 할지도 모르고 그럼 진소영이 나와 그들의 관계를 물을까 봐 설명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나는 말을 마치고 삼촌을 쳐다보았다. 삼촌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서 있었고 안색도 안 좋아 보였다. 분명 몸이 편찮으신 것 같았다.“삼촌, 괜찮으세요?”“그냥 혈압이 좀 올라서 그렇지 별일 아니야.”삼촌이 먼저 말을 꺼냈다.아줌마가 삼촌을 한 번 쳐다봤다. 삼촌이 거짓말을 하는 게 분명했다.삼촌도 뭔가를 숨기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나처럼 서로 숨기는 게 많아지면서 우리 관계도 점점 멀어져 가는 느낌이었다.예전에는 삼촌이 감기만 걸려도 나한테 먼저 약을 구해달라고 했었는데.“지원아, 너희 여기서 뭔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게 없어?”.“없어요.”나는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거절했다.대화는 자연스럽게 끊겼고 진정우가 분위기를 깨며 말했다.“삼촌, 저희랑 같이 가서 진찰받으시죠.”그 말은 정말 좋은 말이었다. 진정우는 항상 사람들에게 그를 고마워하게 만드는 법을 알고 있었다.“괜찮다니까. 너희는 너희 일 보러 가.”삼촌이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고 아줌마도 곧바로 말했다.“지원아, 나중에 시간 되면 삼촌 좀 보러 와.”“네. 그럼 저희 먼저 가볼게요.”나는 진정우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우리가 걸음을 떼자 아줌마의 한숨 소리
그러자 내 표정이 잠시 굳었다. 진정우는 진소영의 이마를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무슨 호적 조사라도 하냐?”진소영은 입을 삐죽이며 대답했다.“그냥 생각나서 물어본 거야.”나는 진정우를 보며 말했다.“검사는 다 끝났으니까 정우 씨가 소영이를 데리고 가서 뭐라도 먹어. 나는 가서 좀 볼 일이 있어.”“언니... 언니는 어디에 가는 건가요?”진소영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진정우는 내가 뭘 하러 가는지 이미 짐작한 듯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밀어내며 걸어가며 말했다.“너 원래 이렇게 말이 많았어? 여기 오더니 수다쟁이가 다 됐네.”“지금 안 하면 나중엔 말할 기회 없을 것 같아서요.”진소영의 말에 진정우의 걸음이 잠시 멈칫했다. 나 역시 그 말에 가슴이 아려왔다.진소영도 수술대에서 깨어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헛소리하지 마.”진정우는 그녀의 머리를 살짝 두드렸다.진소영은 그의 팔을 붙잡고 함께 걸어갔다. 둘이 멀어져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나는 발길을 돌려 강삼촌을 찾으러 갔다.“지원아, 어떻게 다시 왔어?”아줌마가 반가운 듯 물었다.“삼촌 상태가 걱정돼서요.”나는 솔직히 말했다.아까 진소영에게 그들이 내 양부모라고 말했던 것처럼 내 마음속에서 그들은 진짜 부모님 같은 존재였다.“괜찮다니까.”삼촌은 오늘따라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가 괜찮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삼촌, 저를 딸처럼 생각하신다면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도대체 무슨 일이세요?”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냥 혈압이 좀 높아서 가슴이 답답한 거야.”이번엔 강진혁이 대신 대답했고 아줌마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 요 며칠 결혼식 두 번 다녀오면서 술 좀 훔쳐 마셨더니 이러는 거야.”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여전히 안심되지 않았다. 강진혁의 표정을 보니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엄마, 여기 계세요. 검사 끝날 때까지 밖에 나가서 전화 좀 하고 올게요.”강진혁은 핑계를 대며 자리를 떴다.그래
조태혁의 비명과 함께 나는 들고 있던 커피 한 잔을 그의 얼굴에 부어버렸다.조태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얼굴에 흘러내리는 커피를 닦으며 소리쳤다.“누나 미쳤어? 무슨 정신 나간 여자야?”나는 빈 커피잔을 들고 그를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음번에 또 날 건드리면 이 잔으로 네 머리를 깨버릴 거야. 그리고 경찰서로 데려가서 차 한 잔 마시게 할 테니까 알아둬.”오늘 조태혁은 흰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커피 자국이 이미 티셔츠를 망쳐놨다. 머리카락도 젖어 커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정말 초라해 보였다.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여전히 건방졌다.“이렇게 하면 내가 겁먹을 것 같아? 난 하나도 안 무서워! 나...”그의 뒤로 이어지는 말은 듣지 않고 나는 바로 카페를 나와버렸다.그러자 강진혁이 뒤따라왔다.“저 자식은 누구야?”“조나연의 동생.”나는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손에 묻은 커피를 닦으며 말했다.“자주 저렇게 너를 괴롭히는 거야?”“몇 번 그랬어요.”나는 물티슈를 쓰고 쓰레기통에 버렸다.강진혁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나도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삼촌 이야기를 꺼냈다.“삼촌 병원에 입원하실 거죠?”“이미 입원했어. 병실은 812호야.”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나중에 병실로 가서 뵐게요.”“그래. 나는 좀 사러 갈 게 있어서 넌 먼저 할 일 봐.”강진혁은 나에게 먼저 가보라고 했다.나는 걸어 나가다가 문득 진소영이 지난번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아직 한 번도 제대로 된 커피나 밀크티를 마셔본 적이 없다고 했었다. 그래서 발길을 돌려 다시 카페로 들어갔다.그런데 마침 조태혁이 강진혁을 따라다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그 광경에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강진혁이 나보고 먼저 가라고 했던 이유가 조태혁을 손봐주려는 것이었구나?’나는 그들에게 다가가지 않고 그들이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밀크티와 커피를 샀다.병실에 들어가 보니 진소영은 혼자 침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아까 그녀가
“언니, 그렇게 오빠랑 함께 있고 싶어요?”진소영이 웃으며 말했다. 순간 약간 민망했지만 이어서 나는 장난스럽게 덧붙였다.“그래. 네 오빠가 참 좋아!”“이 고약한 꼬맹이야.”나는 일부러 그녀를 째려봤고 그러자 진소영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병실을 나와 복도를 둘러봤지만 진정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진소영 말대로라면 아마 조용한 곳에서 전화를 받고 있을 것이다. 잠깐 고민하다가 비상계단 쪽으로 향했다.계단에 가까워지자 진정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때의 정비소는 없어졌지만 정비사들은 아직 있을 거야. 방법을 찾아봐야 해... 물론 필요하지. 지원이한테 정확히 말해야 하고 아버지의 결백도 증명해야 해.”그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 며칠 동안 사고 당시 브레이크 문제를 다시 조사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진정우가 이미 알아보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가 전화를 끊자마자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또 다른 전화가 울렸다. 나는 다시 멈춰 섰다.문틈으로 보니 진정우가 담배 한 개비를 손에 든 채 전화를 받고 있었다.“돌아왔어... 응. 같이 왔어... 나랑 지원이 없으면 안 되는 거야?... 알았어. 올 필요 없어. 들키면 안 되니까... 문제없어. 코드 계속 쓰고 있어.”그의 대화는 회사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통화 상대는 아마 허진호일 것이다.그런데 진정우의 말투는 마치 허진호가 부하처럼 느껴졌다.‘진정우... 혹시...’갑자기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듯했다.‘나... 또 속은 건가?’하지만 그는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혹시 무슨 이유가 있는 걸까?’그가 전화를 끊고 복도로 나왔을 때 우리는 마주쳤다.“여기서 뭐 해?”그가 내 옆에 서서 물었다.“널 찾았는데 못 찾았어.”나는 거짓말했다.“전화 받고 있었어.”진정우가 내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삼촌 쪽은 어떠셔?”“폐암이래.”나는 무겁게 대답했다.폐암이란 병이 가진 의미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현실이었다.예전에 같이 일하던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늘 진소영이 받은 검사들을 떠올리며 물었다.“검사 결과가 안 좋았어?”안리영은 하얀 가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아니야. 검사 결과는 괜찮아. 문제는 기증자 쪽에서 생겼어.”“응?”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기증자는 뇌사 상태의 환자였어. 가족들이 기증을 동의했는데 갑자기 마음을 바꿨대.” 안리영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이 기증자가 진소영과 이식 조건이 완벽히 맞았던 사람인데 기증을 포기했다면 진소영은 다시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왜 기증을 포기했는지는 알아?”안리영은 입술을 삐죽이며 대답했다.“몰라. 단지 기증자 정보는 기밀이잖아. 나도 그저 통보만 받았어.”진소영이 새 삶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있는 걸 알기에 그녀가 이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실망할지 상상이 됐다. 그리고 아까 진정우를 부르러 갔던 이유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럼 진정우를 찾은 이유도 이 문제 때문이었어?”“아마도 그럴 거야.”안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너무 걱정하지 마. 선배가 분명히 다른 방법을 찾을 거야. 다만 수술 일정이 조금 늦어질 뿐이야.”“그렇다면 병원에 계속 있지 말고 퇴원해서 여행이라도 시켜주는 게 좋겠어.”나는 진소영을 위해서 생각을 털어놨다.“네 시누이는 네가 알아서 해야지.”안리영이 내 말에 장난스럽게 대꾸했다.나는 그녀의 어깨를 살짝 밀며 미소를 지었다.“근데 너랑 구 교수님은 어떻게 연애 중이야? 어느 정도까지 나갔어?”“나가기는 무슨. 나 야근하고 선배는 또 초과근무 중이라 제대로 볼 시간도 없어.”그녀는 장난스럽게 한숨을 쉬었다.“이러다 연애는커녕 지구가 멸망해야 겨우 데이트라도 할 수 있겠네.”나는 그녀를 놀렸다.“그게 뭐든 할 거야. 지금은 좀 어렵더라도 해결해야지.”그녀는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래서 네 계획이 뭔데? 설마 의사 그만두고 주부 9단이 되는 건 아니지?”내가 짓궂게 물었다.“말도 안 돼. 난
생리가 시작된 것 같았다.“잠깐만!”나는 안리영을 불러 세웠다.“네가 자꾸 얘기하더니 진짜 왔어. 너희 휴게실에 생리대 있지? 좀 쓸게.”안리영은 주머니에서 휴게실 열쇠를 꺼내 내밀며 말했다.“알아서 쓰고 와.”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녀의 과로 올라가는데 복도에서 거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이 뻔뻔한 여자야! 우리 아들이랑 결혼했으면서 다른 남자를 꼬셔서 우리 아들을 죽게 만들다니!”“네가 지금 배에 든 게 우리 아들의 아이라고? 누굴 속이려는 거야?”“우리 아들 보상금 노리는 거 누가 모를 줄 알아?”...안리영은 상황을 파악하려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고 나는 순간 멈춰 섰다. 이 익숙한 소리 어디서 들었는지 금세 기억났다.비록 지금 당장 생리대가 급하지만 이 상황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나는 소란이 난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이 아이가 당신들 손자라고요! 아이 태어나면 유전자 검사하면 될 거 아니에요!”익숙한 목소리는 조나연이었다.‘그래서 이 장면이 낯설지 않았던 거구나.’“검사한다고 우리가 믿을 줄 알아? 네가 요즘 얼마나 돈 있는 남자들에게 들러붙는지 다 알아. 그따위 검사 결과를 우리가 믿을 것 같아?”“이 여자가 얼마나 뻔뻔한지 여기 있는 모두가 알아야 해요! 남편을 사고로 몰아넣고, 이제는 우리 아들한테 들러붙어 보상금까지 노리다니!”“하늘이시여! 이 여자를 벌하시고 우리 아들의 원한을 풀어주세요...”아줌마의 울부짖음에 병동이 떠나갈 듯했다. 그때 안리영이 차분히 나섰다.“아줌마, 여긴 병원이에요. 이렇게 소리 지르시면 다른 환자들에게 피해가 됩니다. 다른 데로 가세요."‘여기서 울고 소리치지 말라니, 그럼 다른 곳에서는 괜찮다는 건가?’그런 생각을 하니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안리영은 조나연을 알아보고 일부러 이런 식으로 말한 게 분명했다.“의사 선생님, 제가 왜 이러겠어요? 이 여자가 우리 아들과 우리 집안을 망가뜨렸어요. 우리 부부에게는 아들 하나뿐이었다고요!”아주머니의 말은 듣는 이의 마음을 아
‘결벽증 있다더니 이게 무슨 행동이야?’헤르나는 안았다가 이제는 손까지 잡고 있었다.나는 손을 뿌리치려다 병실 안을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침대에 누운 사람은 진정우가 아니었고 그는 나를 보자마자 얼굴을 찌푸리며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왜 저 여자를 데리고 온 거야?”헤르나는 내 손을 꼭 잡은 채 천천히 걸어가 소파에 앉았다.“경기 데려가기 전에 들른 거야. 그런데 상태는 좀 어때?”그 말에 브라운의 얼굴은 한순간에 창백해졌다. 헤르나는 일부러 그의 상처를 그것도 가장 굴욕적인 상처 들춰내고 있었다.브라운이 다쳤다는 이야기를 떠올리자, 나는 본능적으로 그 부위를 떠올렸고 솔직히 조금 민망했다.“복수는커녕, 이 여자를 데리고 와서 날 조롱하려고?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브라운의 분노가 병실에 울려 퍼졌지만 헤르나는 태연히 대답했다.“그냥 알리러 온 거야.”그는 내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이제 이 사람은 내 사람이니까 건들지 마.”브라운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그럼 난 괜히 당한 거야?”“네가 당한 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 이 사람과는 아무 상관 없어. 그리고 널 다치게 한 사람도 얘가 아니야.”헤르나는 단호하게 말했고 그제야 나는 헤르나가 나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를 깨달았다.“하지만 모든 게 저 여자 때문이었잖아.”브라운은 여전히 적대적인 시선으로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그건 네가 먼저 건드렸기 때문이지.”헤르나는 냉정하게 말했고 그의 말에 브라운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브라운은 입술을 꾹 다문 채 푸른 눈동자로 나를 쏘아보았다.“그래도 저년이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도대체 왜 신지태의 문제에 얽히려 한 거야?”그의 말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지.’나는 단순히 신지태가 걱정돼서 관여했을 뿐이었는데 이런 상황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러다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혹시 강유형이 일부러 날 이런 상황에 끌어들인 건 아닐까?’그 생각은 스쳐 갔지만
나는 헤르나의 말을 듣고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진정우가 용설아와 함께 온 건가? 이제 이렇게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된 걸까? 항상 붙어 다니는 거야?’헤르나는 내 표정이 잠시 멍해진 것을 보고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역시 네 눈이 네 입보다 솔직하네.”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병원 입구 쪽으로 걸어갔고 나는 숨 막히는 답답함을 삼키고 그의 뒤를 따랐다.내가 이곳에 올 때는 헤르나에게 기절당한 채 끌려왔지만 이제는 그의 고급 차량에 앉아 창밖 풍경을 감상하며 이동하고 있었다.하지만 창밖의 풍경은 또렷이 기억나는데 내 마음속은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차가 멈추자 나는 옆에 앉은 헤르나를 바라보며 물었다.“여기 병원에 왜 온 거죠?”“한 사람을 만나러.” 헤르나는 내 긴장한 모습을 흘깃 보며 말했다.“누구를요?” 내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가까이 다가와, 깊고 어두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이렇게 긴장하는 걸 보니, 진정우를 생각하고 있는가 봐?”나는 진정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하고 있었다.“이미 헤어졌잖아. 미워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그를 신경 써?”헤르나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고 나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지만 억지로 그의 눈을 마주 보며 대답했다.“헤어졌다고 해서 신경을 안 쓴다는 법은 없잖아요.”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동안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마치 내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잠시 후, 그는 차에서 내렸다.“그게 진정우인지 아닌지는 네가 가서 보면 알겠지.”나는 차 안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만약 진정우라면 난 가지 않을 거예요.”“왜?” 헤르나가 웃으며 물었다.“그 사람에게는 약혼자가 있잖아요. 내가 전 연인으로 찾아가면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까요.”헤르나는 입가를 살짝 핥으며 웃었다.“선을 잘 지키네. 하지만…… 넌 가야 해.”“가지 않으면요?” 나는 그와 대립하듯 대꾸했다.“그럼 내가 널 안고 갈 거야.”나는 눈이 커
헤르나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그는 약속한 경기 날이 다가올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날 진정우가 올 거라는 말도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하지만 진정우가 오든 오지 않든, 이제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았다.아무리 깊은 사랑이라도 실망이 반복되면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걸, 강유형과 진정우를 통해 뼈저리게 깨달았다.셋째 날 아침, 헤르나가 돌아왔다. 나는 테라스의 흔들의자에 앉아 아침 햇살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는 아래에서 손을 흔들며 나를 불렀다.고개를 돌리니 연한 카키색 재킷과 흰색 캐주얼 팬츠를 입고 손에는 하얀 장미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190cm가 넘는 그의 키와 탄탄한 체격은 마치 톱 모델처럼 보였다.“내려와.”그가 나를 부르자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그는 꽃다발을 건네며 나를 가볍게 안으려 했다.그때 나는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친하지도 않은 남녀 사이에 이건 아닌 것 같네요. 함부로 그러지 마세요.”나는 순간 뭔가 깨달았다. 헤르나는 나에게 유난히 관대한 것 같았고 내가 반항적이고 제멋대로 굴수록 그는 오히려 나를 더 흥미롭게 대했다. 아마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늘 남들의 복종에 익숙해져서, 가끔 말을 안 듣고 반항하는 사람을 만나면 신선하게 느끼는 모양이다.“하하, 참 쑥스러움이 많네.”그는 웃음 가득한 얼굴로 소파로 걸어갔다.나는 그를 따라가며 물었다.“경기 보러 언제 가요?”“서두를 필요 없어. 내가 없으면 시작도 못 할 테니까.”그는 자신의 영향력을 감추려 하지 않았고 이런 일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다.스누커뿐 아니라 다른 스포츠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의 대답을 들으니, 얼마나 많은 선수가 이런 부당한 현실 속에서 희생되었을지 떠올라 분노가 치밀었다.“헤르나 씨, 이렇게 하면 양심에 찔리지는 않아요?”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처음엔 그랬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아무렇지도 않더라.”그는 정말 솔직했지만 그 솔직함이 오히려 화를 돋웠다.이틀 동
나는 강유형을 세게 밀치며 소리쳤다.“안 간다고 했잖아! 왜 자꾸 이래? 지금은 여기에 있고 싶어. 내가 늑대한테 잡아먹히든, 개한테 물리든 그게 네 일이야?”강유형의 얼굴이 굳어졌다.“지원아...”나는 단호하게 말했다.“강유형, 우린 이미 아무 사이도 아니야. 내 일에 간섭하지 마. 그리고 네가 신경 쓰는 것도 원하지 않아.”내 말에 강유형의 눈빛이 깊은 고통으로 일그러졌고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지원아, 이건 네 선택이야. 후회하지 마.”“내 선택에 후회한 적 없어.”나는 냉정하게 대답했다.그 말에 강유형은 입술을 꽉 깨물고 등을 돌렸지만 몇 걸음 걷다 멈춰 서서 손가락으로 헤르나를 가리키며 말했다.“경고야. 지원이한테 손대지 마. 네가 무슨 짓을 하든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 말을 남기고 그는 다시 나를 한 번 쳐다본 후 떠났다.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 마음 한구석에 묘한 익숙함이 스쳐 지나갔다.“그 자식 아직도 널 사랑하는 것 같아.”헤르나가 내 귀에 속삭이듯 말했고 나는 시선을 땅으로 떨구며 대답했다.“유통기한 지난 사랑은 아무리 좋아도 필요 없어요.”헤르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제법 똑똑한 소녀네.”그가 나를 칭찬한 건지, 아니면 내가 여기 남겠다고 한 선택이 현명하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내가 강유형과 함께 떠나겠다고 했더라면 그는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가자. 뭐라도 먹어야지. 오늘 특별히 중국 요리사를 불러서 네가 좋아할 만한 음식을 준비했어.”헤르나는 마치 소중한 손님을 대접하듯 말했다.이게 무슨 상황이지? 나는 그의 '인질'인데도, 그는 나를 VIP처럼 대했다.식탁에는 다양한 요리가 준비되어 있었고 특히 내가 좋아하는 만두까지 있었다.'이 사람, 철저히 나를 조사했구나.'내가 모르는 사이 누군가가 나를 관찰하고 정보를 수집했을 거라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왜 안 먹어?”그는 만두 하나를 내 접시에 놓으
내가 언제 헤르나의 사람이 됐다는 거지?헤르나는 일부러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고 순식간에 공기가 팽팽하게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마치 내가 도화선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강유형은 내 손을 더 꽉 잡으며 어두운 눈빛으로 헤르나를 노려보았다.“헤르나 씨, 경찰의 관심을 끌고 싶다면 계속 그렇게 해 봐.”헤르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경찰을 들먹이다니, 너 수준이 진징우보다 조금 낮구나. 그래서 지원이가 너 대신 진정우를 선택했구나.”나는 숨이 멎을 뻔했다. ‘헤르나... 정말 교활한 자식이야. 강유형과 진정우 사이의 갈등까지 부추기다니.’강유형의 얼굴은 이미 험악했는데 진정우의 이름이 나오자 더욱 굳어졌다.진정우는 강유형에게 가시 같은 존재인데 헤르나는 그 가시를 더 깊이 찔러 넣었다.“헤르나, 네가 누구를 상대로 하든, 어떤 일을 꾸미든 그건 내 알 바 아니야. 하지만 지원이에게 손대는 건 절대 안 돼.”강유형은 차가운 경고의 말을 던졌다. 그러나 헤르나는 내 손목을 쥔 채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이렇게 귀여운 소녀를 어떻게 건드릴 수 있겠어?”그는 깊고 서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내 곁에 두고 싶을 뿐이야.”그의 목소리마저도 유난히 다정하게 들렸다.“죽고 싶어!”강유형은 화가 치밀어 올라 크게 소리쳤지만 헤르나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운 채 나를 향해 물었다.“네가 직접 말해봐. 여기서 나갈지, 남을지.”그는 교묘하게 나를 갈등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지원아, 걱정하지 마. 내가 널 데리고 나갈게.”강유형은 단호한 눈빛으로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강유형은 비록 나에게 상처를 준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보호하려는 그의 태도만큼은 진심이었다.하지만 헤르나의 뒤에 있는 두 명의 체격 좋은 경호원이 그의 뒤를 바짝 지키고 있었다. 헤르나가 눈짓만 하면 그들은 당장이라도 강유형에게 달려들 태세였다.강유형이 강해 보이긴 했지만 그는 군대를 다녀온 진정우처럼 싸움에 능한 사람이 아니고 한 명도 아니고 두 명
헤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좋아. 사랑에 눈이 먼 여자는 아닌가 봐.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 왜 하필 신지태를 구하려고 한 거야? 그 사람이 그렇게 중요해?”겉으로는 친절해 보이는 헤르나지만 그는 계속해서 나를 떠보며 내 약점을 찾으려 했고 내 가치를 최대한 활용하려는 속셈이 분명했다.“중요하지 않아요.”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헤르나는 미소를 지었지만 나를 믿지 않는 눈빛이었다.“하지만 유일한 기회를 그를 위해 썼잖아.”“내가 스누커를 배운 건 지태 오빠 덕분이에요. 그래서 오늘 이 기회는 그의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내 말에 헤르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왜 너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어? 나를 설득해서 너를 놓아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었잖아.”“어차피 당신은 날 여기 가두고 경기를 보게 하려고 했잖아요. 날 풀어준다 해도 공항까지 무사히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나는 지태 오빠의 경기를 보러 왔기에 굳이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내가 말하며 그의 팔에 난 상처를 힐끔 쳐다보자, 헤르나는 내 시선을 눈치채고는 여유롭게 웃으며 소매를 걷었다.“이거? 아직 완전히 낫지는 않았어. 다 나으면 문신이라도 해서 보기 흉하지 않게 만들어야겠지.”“누가 그런 거예요?”나는 뻔히 알면서도 물었다.“모를 리가 있나?”헤르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가 이렇게 대놓고 말하니, 나도 더 숨길 필요가 없었다.“그래서 정우를 상대로 복수하려는 거군요.”헤르나는 소매를 내리며 말했다.“그게 전부는 아니야.”그리고 와인잔을 흔들며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우리 사이의 문제는 단순히 그가 날 다치게 해서 생긴 게 아니거든.”“진정우랑 이미 알고 지낸 사이였어요?”내가 묻자, 이번엔 헤르나가 미간을 찌푸렸다.“너희 사귀었다면서? 그런데도 자기 과거 이야기는 하나도 안 했어?”그의 말은 내 가슴을 찌르는 비수 같았다.“안 했어요.”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헤르나는 고개를 저으며 연민이
그러나 나는 그에게 바로 대답하지 않고 일부러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헤르나는 옆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와서 앉아서 천천히 생각해 봐.”사실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무엇을 요구할지 이미 마음속으로 정해놓았기 때문이다.헤르나는 자리에 앉아 흰색 캐주얼 팬츠 위로 긴 다리를 교차시킨 채 와인잔을 손에 들었다. 그의 태도는 한없이 여유롭고 느긋했다.조용히 와인을 홀짝이는 그의 모습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평화로웠고 이 모든 게 그에게는 전혀 급하지 않은 듯 보였다.솔직히 말해, 그의 외모는 정말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특히 깊고 또렷한 눈매는 마치 사람을 빨아들이는 심연 같아서 오랫동안 쳐다볼 수 없었다.나는 그의 눈을 의식적으로 피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당구대 모퉁이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경기가 끝나면 절대 지태 오빠에게 다시는 손대지 마세요.”현존 최고의 스누커 선수라면 단연 신지태였다.그들은 불법 도박 자본을 이용해 경기를 조작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한 번으로 끝날 리는 없었다.결국 신지태를 완전히 그들의 수중에 넣으려 할 것이고 내가 아는 신지태는 그런 상황에서 차라리 자신의 팔을 끊어버릴 만큼 단호한 사람이었다.헤르나는 내 말을 듣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 표정을 보자 나는 곧바로 말했다.“당신이 내가 이기면 어떤 요구든 들어준다고 하지 않았나요?”헤르나는 와인잔을 살짝 흔들며 답했다.“긴장하지 마. 약속을 깨겠다는 건 아니야. 다만 네가 알아야 할 게 있어서 그래.”“역시 이런 사람들은 말만 번지르르하지.”나는 비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큐대를 내던지고 뒤돌아섰다.그때, 헤르나의 목소리가 내 등 뒤에서 들려왔다.“널 여기 데려온 건 두 사람 때문이야.”그 말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누군데요? 당신, 브라운 때문에 날 납치한 거 아니었어요?”그가 내게 조건을 내걸라고 했지만 나는 브라운과 그의 팬들에게 나를 놔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신지태를 구
“세 판.”“좋아요.”나는 말하면서 천천히 큐를 골랐다.“보는 눈이 있는데?”내가 큐를 손에 쥐자마자, 헤르나가 웃으며 칭찬했고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그는 곧 이유를 덧붙였다.“네가 고른 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거야.”“그래요?”나는 살짝 비웃으며 큐를 살펴보다가 큐 위에 새겨진 글자를 발견했다.자세히 보니, 큐에 새겨진 건 ‘진’이라는 번체 글자였다.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이 나도 모르게 먼저 튀어나왔다.“이건 당신 게 아니라..”나는 이어서 진정우의 큐라고 말하려다 멈췄다.진정우와 헤르나는 완전히 대립 관계 아닌가. 그가 어떻게 진정우의 큐를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 게다가 이런 큐는 보통 프로 선수들만 사용하는 건데.이전에도 진정우에게 스누커를 잘 치냐고 물었을 때, 그는 그냥 보통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전문 큐를 가질 리 없었다.“이거 누구 거야?”헤르나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띠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마치 나에게 맞춰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당신 것은 아니예요. 큐에 다른 사람 이름이 적혀 있으니까.”나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는 내 대답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역시 스누커를 잘 아는 소녀답네. 이런 것도 알아보네.”‘스누커 소녀’라는 말에 순간적으로 얼굴이 굳었다. 브라운이 나를 처음 그렇게 불렀었다.“그렇게 저를 부르지 마세요. 듣기 싫어요.”나는 단호하게 말했다.“왜?”헤르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쓰레기 같은 인간이 저를 그렇게 부른 적이 있었거든요.”나는 헤르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꼬마야, 나를 욕하고 싶으면 그냥 대놓고 해.”나는 헤르나를 욕하려 한건 아니었지만 아무 말 없이 그의 웃음을 무시했고 이미 공이 배치된 테이블을 보며 말했다.“이제 시작하죠.”그는 손짓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해봐.”내가 먼저 시작하라는 조건이었으니,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큐를
‘무슨 경기를 본다는 거야. 이건 그냥 날 인질로 잡아 지태 오빠가 이기게 만들려는 거잖아.’경기가 끝나기 전까지 이곳을 떠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그렇다면... 여기 온 김에 차분히 적응하는 수밖에.’사실 이미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방금 핸드폰을 던지며 보였던 격앙된 행동은 모두 헤르나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기였을 뿐이었다.그는 이미 내 핸드폰을 만졌으니, 내 메시지나 통화를 모두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걸 막는 유일한 방법은 핸드폰을 아예 없애는 것이었다.더 이상 발버둥 쳐봐야 소용이 없었다. 헤르나도 이미 나에게 구체적으로 통보했고 이 상황에서 계속 소란을 피워봐야 무의미할 뿐이었다.그래서 방에서 나와 테라스로 향해 바람이라도 쐬려고 했다. 그런데 테라스에 나서자마자, 눈앞의 광경에 숨이 멎었다.엄청난 규모의 테라스 아래로는 거대한 정원이 펼쳐져 있었고 사방은 푸른 식물들로 둘러싸여 있었다.골프장, 야외 스누커 경기장, 커다란 수영장과 화려한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테라스에서 내려다보니, 그곳에서 헤르나가 한가롭게 당구를 치고 있었다고 그는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말했다.“꼬마야, 내려와서 나랑 한 판 치지 않을래?”순간, 나와 시합을 하겠다고 큰소리치던 브라운이 떠올랐다.브라운과 헤르나가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헤르나가 브라운을 압도할 만한 인물이라는 것이다.브라운 한 명은 대처할 수 있겠지만 그의 수많은 팬들은 이미 광기에 휩싸여 있고 언제든 극단적인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다.결국 이 팬들을 진정시키려면 브라운이 직접 나서야 하는데 그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헤르나뿐이었다.하지만 나는 그저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아무 말 없이 그를 내려다보기만 했다.“네가 당구를 잘 친다고 들었어. 만약 네가 나를 이기면 널 미리 돌려보내 줄 수도 있지.”헤르나가 유혹적인 제안을 던졌고 나는 어이가 없었다. 진정우나 신지태와 가끔 시합을 즐겼을 뿐인데 어쩌다 내 당구 실력이 이리 소문났는지.두 명의 외국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