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소영은 절대로 진정우를 혼자 두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병실에 혼자 두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나는 안리영에게 다시 도움을 요청했다. 마침 그녀는 오늘 야간 근무 중이었다.“지원아, 내가 야간 근무를 하고 있다는 거 알면서 시누이를 돌봐달라는 개인 부탁을 해? 내 가족도 아닌데 너무한 거 아니야?”안리영이 일부러 투덜거리며 말했다.“돌보는 게 아니야. 그냥 자고 있는 동안 시간 날 때 한 번씩 상태를 확인만 해달라는 거야.”나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안리영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우리가 이렇게 오래 친구로 지냈지만 난 네 시누이랑 비교하면 난 별거 아니구나.”“질투하지 마. 네가 내 마음속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인 건 변하지 않아. 진정우도 널 대체할 순 없다고.”나는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난 진정우 씨가 아니니 그런 말로 달래지 마. 나한테는 안 먹혀.”안리영은 내 손에 낀 반지를 살피며 말했다.“오래된 디자인이긴 하지만 진정우 씨가 직접 준 거니까 의미가 있는 거지. 강유형은 절대 이런 반지를 선물하지 않을 거야.”안리영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아마도 강유형의 마음속에서 난 이런 반지조차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겠지.”나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네가 옆에 있었으니 강유형은 네가 떠날 리 없다고 착각한 거겠지. 그러니 너의 감정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던 거야.”안리영이 한숨을 쉬며 말하자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그건 다 지나간 일이야. 지금 강유형이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잖아.”“강유형 씨는 어디 갔을까?”안리영이 자연스럽게 물었다.“모르겠어. 일부러 연락을 피하는 것 같아.”나는 조나연과 진정우의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며칠 전 강유형 씨가 병원에 자주 오던데 뭔가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아마 조나연 때문일 거야. 임신 중이니까.”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그럴 수도 있겠
안리영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복잡해졌다.그녀가 그동안 혼자서 마음고생하며 좋아하던 사람인데 내 부탁에 구안석을 찾아간 것이었다. 그런데 구안석이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다니 안리영이 얼마나 속상했을지 상상이 갔다.‘구안석은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면서 왜 이렇게까지 그녀의 마음에 상처 주는 걸까?’내가 말하려던 찰나 구안석이 입을 열었다.“전혀 귀찮지 않아. 그리고 오직 너만이 날 귀찮게 할 수 있지.”‘어라? 이건 또 무슨 말이지?’난 혼란스러워했고 안리영도 당황한 얼굴이었다.“선배... 그게 무슨...”“나를 좋아한다고 했잖아?”구안석이 다시 말을 끊고 말했다.안리영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그렇다면 왜 다른 남자한테 관심을 보이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받아주는 거지?”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문득 깨달았다.‘구안석 씨가 질투하는 거였네. 그런데 이 남자는 그걸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표현하다니. 아직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을 고백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설마 이게 사실상 고백인가?나도 덩달아 설레기 시작했고 나는 안리영을 지켜봤다.그녀도 그의 말에 완전히 당황한 표정이었다.“선배, 지금... 저한테 질투하시는 거예요?”‘아니... 그걸 말이라고. 왜 다시 확인하는 거야?’“맞아. 너는 나만 좋아해야 해. 흔들리면 안 돼,”구안석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그는 정말 직설적이고 솔직했다.안리영은 한 번 목을 삼키며 말았다.“선배님, 저... 좋아해요. 그런데 선배님은 저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 없잖아요. 그래서...”그녀는 말을 더 이상 이어가지 못했다.“난 싫다고 말한 적 없잖아.”구안석이 또 한 마디 덧붙였다.그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몹시 기뻤다.‘이제 구안석도 안리영을 좋아한다는 거잖아!’안리영은 아직도 조금 어리둥절해 보였지만 구안석의 말은 더 확실하게 그의 마음을 드러냈다.“안리영, 나도 널 좋아해. 네가 날 좋아했던 것보다 더 오래전부터 말이야.”구안석의 고백은 점점 더 직설적이고 강렬
‘아파!’나는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강한 손이 내 팔을 꽉 잡고 나는 그 힘에 끌려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낯선 얼굴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그 사람은 나를 보고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나를 놓고 갑자기 뒤돌아 뛰어갔다.나는 아픈 이마를 손으로 문지르며 급하게 떠나는 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뒤에 있는 안리영의 사무실을 보며 깨달았다.그 남자는 분명히 문 앞에 서서 나와 안리영의 대화를 훔쳐 듣고 있었다.그렇게 집중해서 듣고 있으니 내가 나가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결국 내게 부딪히게 된 거다.그렇다면 이 사람은... 차가운 마음이라는 아이디로 알려진 사람이었을까?내가 멍하니 생각하고 있을 때 뒤에서 진정우가 다가왔다. 내가 그쪽으로 가려고 했을 때 안리영이 사무실 안에서 한마디 했다.“선배, 나 지금 배고파.”그 말을 들은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안리영, 역시 선수야. 갑자기 차가운 태도와 부드러운 태도를 오가고 있다니... 정말 잘 다듬어진 모습이야.’“뭘 웃어?”진정우가 가볍게 물었다.“안리영과 구 교수님 말이야. 결국 사귀게 됐어.”나는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진정우는 잠깐 뒤를 보고는 내 책을 잡고 손목을 잡았다.“이제 돌아가자.”“소영이 혼자 괜찮을까?”나는 안리영에게는 말해 놓았지만 여전히 걱정이 되어 물었다.“괜찮아.”진정우는 안심한 듯 말했다.“그동안 소영이는 고향에서 혼자 지내왔어.”그 말에 나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그러네. 소영이는 겉보기에는 여리여리해 보이지만 그동안 정말 독립적이었지.’그렇게 말하는 진정우를 따라 나는 걱정 없이 집으로 향했다.집으로 가는 길에 진정우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여전히 진소영의 수술에 대해 걱정하는 것 같아 나도 조용히 있었다.차에서 내려 집에 도착했을 때 진정우는 여전히 내 손을 잡고 있었다.나는 슬쩍 손을 빼려 했지만 진정우는 손을 놓지 않았다.그가 내 손을 꽉 잡고 있었고 나는
진정우는 내 이마를 가만히 문지르며 낮게 말했다.“하지만 난 널 너무 좋아야. 정말 많이... 많이...”그는 내 손을 잡아 자신의 뜨거운 곳으로 가져갔다.나는 깜짝 놀라며 손을 확 빼고 몸 뒤로 숨겼다.그는 내가 당황한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너는 전혀 안 그런 거야?”“하나도 안 그래. 난 졸려. 그냥 자고 싶어.”나는 그를 밀치며 열쇠를 찾기 시작했다.하지만 마음이 급해서인지 열쇠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결국 진정우가 내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 주었다.“당황하지 마.”그는 내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그 말에 내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마치 그의 열기가 나를 덮친 듯한 기분이었다.진정우는 문을 열어줬지만 내가 들어가려는 순간 내 팔을 잡았다.“정말 나를 안 들여보낼 거야?”“절대 안 돼!”나는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말했다.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이미 방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나는 그를 째려보며 소리쳤다.“정우 씨!”“알았어.”그는 무표정하게 말하며 집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창문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모든 방을 둘러본 뒤 다시 내 앞에 섰다.“확인했어. 문도 창문도 다 안전하고 집 안도 아무 이상 없어.”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이 이상하게 저릿해졌다. 그리고 묘한 감정이 차올랐다.“오늘 하루 종일 비행기도 타고 병원도 다녀왔으니 피곤할 거야. 샤워하고 푹 자.”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고 내 볼을 살짝 꼬집었다.그의 다정한 말투에 나는 그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를 더 이상 벌주고 싶지도 않았다.사실 그가 고향에서 나를 대했던 태도가 떠올랐다.그건 진소영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한 것이었고 동시에 나를 배려하려는 마음도 담겨 있었던 것 같았다.우리 둘은 아직 결혼하지 않았으니까.“잘 자. 지원아.”진정우는 내 손을 놓으며 돌아서려 했다.나는 순간 그를 붙잡았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지만 내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그가 충분히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진정
진정우가 돌아간 뒤 나는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를 들었다.안리영에게서 사진과 함께 메시지가 와 있었다.사진 속에는 잠들어 있는 진소영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메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너의 작은 시누이가 무사히 잘 자고 있음.]역시 믿고 맡길 수 있는 친구였다.나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고마워요. 나의 여왕님.]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안리영에게서 영상통화가 걸려 왔다. 마치 내 답장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그녀가 이제 막 짝사랑하던 사람과 연애를 시작했으니 나와 기쁨을 나누고 싶었을 게 분명했다.화면 속 그녀는 의자에 기대어 있었는데 얼굴 가득 기쁨이 넘쳐나는 모습이었다.나는 장난스럽게 말했다.“와, 얼굴에서 꽃이 피었네. 숨길 수가 없어. 이렇게 행복한 티를 내다니.”“칭찬 고마워. 지원아.”안리영이 엄지를 치켜들며 웃었다.나는 그녀를 더 놀리며 말했다.“근데 리영아, 너 꽤 사람을 잘 다루는 것 같더라. 오늘 보니까 수준급이던데?”“그래? 내가 그런가?”그녀는 웃음기 어린 얼굴로 물었다.“당연하지.”안리영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내 말을 받아들였다.나는 아까 본 장면을 떠올리며 흥분해서 말했다.“리영아, 네가 고백받는 순간에 내가 얼마나 심장이 뛰었는지 알아? 구 교수님이 널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난 네가 당장 교수님의 품에 뛰어들 줄 알았어!”“그랬다면 너무 뻔하지 않아? 그래서 안 그랬어.”그녀가 웃으며 대답했다.“그럼 왜 그렇게 침착한 거야? 혹시 너무 행복해서 머리가 하얘졌던 거야?”“아니야. 행복한 건 맞는데 일부러 그랬어.”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뭐야. 감히 수작을 부린 거야?”“그런 셈이지.”그녀가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원아, 나는 선배를 정말 오래 좋아했지만 내 감정에 휘둘리고 싶진 않았어. 그리고 선배가 나를 받아들인다는 게 내게 어떤 큰 은혜처럼 느껴지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그 말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정말 연애에 대한 감각이
“비밀이라면 말하지 마.”안리영은 내가 농담하는 줄 알며 웃었다.하지만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너한테 추파 던지던 남자는... 명확히 거절했어?”“당연하지. 그 자리에서 바로 거절했어.”“근데 아직 포기 안 한 것 같아. 그러지 않았으면 꽃과 음식을 계속 보내지 않았겠지.”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리고... 그 남자가 아까 밖에서 몰래 엿듣기도 했어.”그러자 안리영의 표정이 점점 진지해졌다. 나는 어제 그 남자에 대해 설명했다.예전에 내가 소개팅 상대에게 스토킹 당하고 위협을 겪었던 일을 떠올리며 단호하게 말했다.“리영아, 요즘 특히 조심해. 그런 남자들은 가만히 있지 않을 가능성이 커. 출퇴근하거나 운전할 때도 항상 주의해야 해.”안리영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어디론가 걸어갔다.“어디 가는 거야? 내가 한 말 듣긴 했어?”나는 뒤따라 물었다.그녀는 간호사 데스크로 가더니 졸고 있는 간호사에게 말했다.“오늘 밤 8시 30분 전후 10분 동안 제 사무실 문 앞을 드나든 남자의 CCTV를 좀 확인해 줘요.”그녀가 시간을 정확히 말하는 걸 보니 구안석의 고백 때문에 시간을 기억하는 듯했다.간호사는 곧바로 CCTV를 확인했고 안리영은 그제야 내게 말했다.“네가 말한 그 사람이 날 쫓아다니는 남자일 확률은 낮아.”“뭐?”나는 이해하지 못했다.“그 남자의 가족에게 확인했는데 지금 이 지역에 없어. 어제 이미 떠났고 오늘 보낸 물건은 온라인으로 주문한 거래.”안리영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의아했다.그렇지만 그 남자는 분명 어젯밤 내 얘기를 엿듣고 있었다.곧 간호사가 CCTV 영상을 가져왔다.“안 의사님, 이 사람 맞나요?”안리영은 영상을 나에게 넘기며 물었다.“지원아, 네가 확인해 봐. 이 사람 맞아?”영상 속 남자는 회색 후드티를 입고 있었다.“맞아. 이 남자야.”영상을 통해 내가 그와 부딪힌 장면까지 보이자 안리영이 말했다.“확실히 날 쫓아다니던 그 남자는 아니야. 이 남자는 처음 보
그 남자는 이번에는 도망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서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혹시 저 아세요?”내가 다가가며 바로 물었다.“아니요. 모릅니다.”나는 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처음엔 평범해 보였지만 보면 볼수록 매력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피부는 하얗고 오늘 입은 물빛 티셔츠 덕분에 한층 깔끔하고 단정한 인상이었다.“하지만 어제와 오늘 우연히 마주친 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나는 그의 말이 거짓말임을 넌지시 지적했다.“정말 모릅니다. 다만 당신이 제가 아는 사람과 너무 닮아서요.”그가 이렇게 말하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는 건 너무 식상하지 않아?”그는 내 웃음 속 비꼼을 눈치챘는지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진짜라니까요. 사진도 있어요.”그는 말을 마치고 휴대전화를 꺼내 몇 번 터치한 뒤 내게 화면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화면으로 시선을 옮기며 한참 들여다봤다.사진 속 여자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동그랗게 묶고 있었다. 얼굴은 나와 놀라울 정도로 닮았지만 눈가에 있는 눈물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나는 사진 속 여자를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정말 닮긴 했네요. 하지만 저는 이 여자를 몰라요.”“그럴 줄 알았습니다.”그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런데 왜 저를 따라다니는 거죠?”나는 그의 신발에 잠시 시선을 두며 물었다. 그가 신고 있는 운동화가 묘하게 눈에 들어왔다.그는 잠시 침묵했다.그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이런 식으로 따라다니면 스토킹으로 간주할 수 있어요. 신고해도 된다고요.”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그런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의도가 나쁘지 않더라도 이런 행동은 여자에게 불안하고 무섭게 느끼게 만들 수 있어요. 이해하시겠어요?”내 말투는 마치 직원에게 충고하는 듯 단호했다.“죄송합니다.”그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솔직히 특별히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요. 어제와 오늘 있었던 일은 그냥 없던 걸
산소 기계를 끄면 한 생명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그럼 지금은 그녀 곁에 있어야죠. 끝까지 함께 지켜 줘야죠.”“알았어요, 지금 바로 갈게요.”소지훈은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폐를 끼쳐드려서 미안해요.”나는 입술을 살짝 움직였다.“기적이 있기를 바랄게요.”소지훈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어젯밤 그를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뭘 봐? 전화도 안 받았고.”진정우가 다가와서 내가 들고 있던 꽃을 받아 들고 물었다.나는 소지훈에 대해 어떻게 말할지 몰랐다. 어젯밤 그와의 우연한 만남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소지훈의 사정이 복잡했기 때문이었다.가장 중요한 건 소지훈의 말이 내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정우 씨, 사람과 혈연관계가 없어도 닮은 사람이 있는 이유가 뭘까?”“사람은 유전자란 걸로 구성되니까...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 유전자가 비슷한 사람도 있을 수밖에 없지.”진정우는 아주 공식적인 답을 했다.나는 소지훈이 나를 따라다녔던 이유를 생각하며 다시 물었다.“그럼 언젠가 정우 씨는 날 닮은 사람을 보면 나를 찾으려고 할 거야?”“왜 그래야 하는데?”진정우는 날카롭게 물었다.“그냥. 만일의 경우 말이야.”“내 눈에 너는 오직 너 하나뿐이야.”진정우는 그다지 흔들림 없이 말했다.“알았어. 알았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다른 생각 안 할게.”진정우는 내 옆에 있던 흩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언제나 너는 오직 너 뿐이야. 나에겐 너밖에 없어.”“하하.”그 말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알겠어. 빨리 가자.”진정우는 꽃을 들고 내 손을 잡았다.“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 거야?”“방금 사진을 봤는데 내 얼굴과 정말 닮은 여자애가 있었어.”내가 잠시 멈칫하며 말했다.“정확히 말하면... 닮은 정도가 90%는 됐어.”그때는 그냥 얼굴이 비슷하다는 점에 놀랐지만 사진이 내 머릿속에 남고 나서야 닮은 점
‘결벽증 있다더니 이게 무슨 행동이야?’헤르나는 안았다가 이제는 손까지 잡고 있었다.나는 손을 뿌리치려다 병실 안을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침대에 누운 사람은 진정우가 아니었고 그는 나를 보자마자 얼굴을 찌푸리며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왜 저 여자를 데리고 온 거야?”헤르나는 내 손을 꼭 잡은 채 천천히 걸어가 소파에 앉았다.“경기 데려가기 전에 들른 거야. 그런데 상태는 좀 어때?”그 말에 브라운의 얼굴은 한순간에 창백해졌다. 헤르나는 일부러 그의 상처를 그것도 가장 굴욕적인 상처 들춰내고 있었다.브라운이 다쳤다는 이야기를 떠올리자, 나는 본능적으로 그 부위를 떠올렸고 솔직히 조금 민망했다.“복수는커녕, 이 여자를 데리고 와서 날 조롱하려고?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브라운의 분노가 병실에 울려 퍼졌지만 헤르나는 태연히 대답했다.“그냥 알리러 온 거야.”그는 내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이제 이 사람은 내 사람이니까 건들지 마.”브라운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그럼 난 괜히 당한 거야?”“네가 당한 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 이 사람과는 아무 상관 없어. 그리고 널 다치게 한 사람도 얘가 아니야.”헤르나는 단호하게 말했고 그제야 나는 헤르나가 나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를 깨달았다.“하지만 모든 게 저 여자 때문이었잖아.”브라운은 여전히 적대적인 시선으로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그건 네가 먼저 건드렸기 때문이지.”헤르나는 냉정하게 말했고 그의 말에 브라운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브라운은 입술을 꾹 다문 채 푸른 눈동자로 나를 쏘아보았다.“그래도 저년이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도대체 왜 신지태의 문제에 얽히려 한 거야?”그의 말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지.’나는 단순히 신지태가 걱정돼서 관여했을 뿐이었는데 이런 상황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러다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혹시 강유형이 일부러 날 이런 상황에 끌어들인 건 아닐까?’그 생각은 스쳐 갔지만
나는 헤르나의 말을 듣고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진정우가 용설아와 함께 온 건가? 이제 이렇게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된 걸까? 항상 붙어 다니는 거야?’헤르나는 내 표정이 잠시 멍해진 것을 보고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역시 네 눈이 네 입보다 솔직하네.”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병원 입구 쪽으로 걸어갔고 나는 숨 막히는 답답함을 삼키고 그의 뒤를 따랐다.내가 이곳에 올 때는 헤르나에게 기절당한 채 끌려왔지만 이제는 그의 고급 차량에 앉아 창밖 풍경을 감상하며 이동하고 있었다.하지만 창밖의 풍경은 또렷이 기억나는데 내 마음속은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차가 멈추자 나는 옆에 앉은 헤르나를 바라보며 물었다.“여기 병원에 왜 온 거죠?”“한 사람을 만나러.” 헤르나는 내 긴장한 모습을 흘깃 보며 말했다.“누구를요?” 내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가까이 다가와, 깊고 어두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이렇게 긴장하는 걸 보니, 진정우를 생각하고 있는가 봐?”나는 진정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하고 있었다.“이미 헤어졌잖아. 미워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그를 신경 써?”헤르나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고 나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지만 억지로 그의 눈을 마주 보며 대답했다.“헤어졌다고 해서 신경을 안 쓴다는 법은 없잖아요.”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동안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마치 내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잠시 후, 그는 차에서 내렸다.“그게 진정우인지 아닌지는 네가 가서 보면 알겠지.”나는 차 안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만약 진정우라면 난 가지 않을 거예요.”“왜?” 헤르나가 웃으며 물었다.“그 사람에게는 약혼자가 있잖아요. 내가 전 연인으로 찾아가면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까요.”헤르나는 입가를 살짝 핥으며 웃었다.“선을 잘 지키네. 하지만…… 넌 가야 해.”“가지 않으면요?” 나는 그와 대립하듯 대꾸했다.“그럼 내가 널 안고 갈 거야.”나는 눈이 커
헤르나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그는 약속한 경기 날이 다가올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날 진정우가 올 거라는 말도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하지만 진정우가 오든 오지 않든, 이제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았다.아무리 깊은 사랑이라도 실망이 반복되면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걸, 강유형과 진정우를 통해 뼈저리게 깨달았다.셋째 날 아침, 헤르나가 돌아왔다. 나는 테라스의 흔들의자에 앉아 아침 햇살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는 아래에서 손을 흔들며 나를 불렀다.고개를 돌리니 연한 카키색 재킷과 흰색 캐주얼 팬츠를 입고 손에는 하얀 장미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190cm가 넘는 그의 키와 탄탄한 체격은 마치 톱 모델처럼 보였다.“내려와.”그가 나를 부르자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그는 꽃다발을 건네며 나를 가볍게 안으려 했다.그때 나는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친하지도 않은 남녀 사이에 이건 아닌 것 같네요. 함부로 그러지 마세요.”나는 순간 뭔가 깨달았다. 헤르나는 나에게 유난히 관대한 것 같았고 내가 반항적이고 제멋대로 굴수록 그는 오히려 나를 더 흥미롭게 대했다. 아마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늘 남들의 복종에 익숙해져서, 가끔 말을 안 듣고 반항하는 사람을 만나면 신선하게 느끼는 모양이다.“하하, 참 쑥스러움이 많네.”그는 웃음 가득한 얼굴로 소파로 걸어갔다.나는 그를 따라가며 물었다.“경기 보러 언제 가요?”“서두를 필요 없어. 내가 없으면 시작도 못 할 테니까.”그는 자신의 영향력을 감추려 하지 않았고 이런 일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다.스누커뿐 아니라 다른 스포츠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의 대답을 들으니, 얼마나 많은 선수가 이런 부당한 현실 속에서 희생되었을지 떠올라 분노가 치밀었다.“헤르나 씨, 이렇게 하면 양심에 찔리지는 않아요?”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처음엔 그랬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아무렇지도 않더라.”그는 정말 솔직했지만 그 솔직함이 오히려 화를 돋웠다.이틀 동
나는 강유형을 세게 밀치며 소리쳤다.“안 간다고 했잖아! 왜 자꾸 이래? 지금은 여기에 있고 싶어. 내가 늑대한테 잡아먹히든, 개한테 물리든 그게 네 일이야?”강유형의 얼굴이 굳어졌다.“지원아...”나는 단호하게 말했다.“강유형, 우린 이미 아무 사이도 아니야. 내 일에 간섭하지 마. 그리고 네가 신경 쓰는 것도 원하지 않아.”내 말에 강유형의 눈빛이 깊은 고통으로 일그러졌고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지원아, 이건 네 선택이야. 후회하지 마.”“내 선택에 후회한 적 없어.”나는 냉정하게 대답했다.그 말에 강유형은 입술을 꽉 깨물고 등을 돌렸지만 몇 걸음 걷다 멈춰 서서 손가락으로 헤르나를 가리키며 말했다.“경고야. 지원이한테 손대지 마. 네가 무슨 짓을 하든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 말을 남기고 그는 다시 나를 한 번 쳐다본 후 떠났다.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 마음 한구석에 묘한 익숙함이 스쳐 지나갔다.“그 자식 아직도 널 사랑하는 것 같아.”헤르나가 내 귀에 속삭이듯 말했고 나는 시선을 땅으로 떨구며 대답했다.“유통기한 지난 사랑은 아무리 좋아도 필요 없어요.”헤르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제법 똑똑한 소녀네.”그가 나를 칭찬한 건지, 아니면 내가 여기 남겠다고 한 선택이 현명하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내가 강유형과 함께 떠나겠다고 했더라면 그는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가자. 뭐라도 먹어야지. 오늘 특별히 중국 요리사를 불러서 네가 좋아할 만한 음식을 준비했어.”헤르나는 마치 소중한 손님을 대접하듯 말했다.이게 무슨 상황이지? 나는 그의 '인질'인데도, 그는 나를 VIP처럼 대했다.식탁에는 다양한 요리가 준비되어 있었고 특히 내가 좋아하는 만두까지 있었다.'이 사람, 철저히 나를 조사했구나.'내가 모르는 사이 누군가가 나를 관찰하고 정보를 수집했을 거라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왜 안 먹어?”그는 만두 하나를 내 접시에 놓으
내가 언제 헤르나의 사람이 됐다는 거지?헤르나는 일부러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고 순식간에 공기가 팽팽하게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마치 내가 도화선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강유형은 내 손을 더 꽉 잡으며 어두운 눈빛으로 헤르나를 노려보았다.“헤르나 씨, 경찰의 관심을 끌고 싶다면 계속 그렇게 해 봐.”헤르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경찰을 들먹이다니, 너 수준이 진징우보다 조금 낮구나. 그래서 지원이가 너 대신 진정우를 선택했구나.”나는 숨이 멎을 뻔했다. ‘헤르나... 정말 교활한 자식이야. 강유형과 진정우 사이의 갈등까지 부추기다니.’강유형의 얼굴은 이미 험악했는데 진정우의 이름이 나오자 더욱 굳어졌다.진정우는 강유형에게 가시 같은 존재인데 헤르나는 그 가시를 더 깊이 찔러 넣었다.“헤르나, 네가 누구를 상대로 하든, 어떤 일을 꾸미든 그건 내 알 바 아니야. 하지만 지원이에게 손대는 건 절대 안 돼.”강유형은 차가운 경고의 말을 던졌다. 그러나 헤르나는 내 손목을 쥔 채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이렇게 귀여운 소녀를 어떻게 건드릴 수 있겠어?”그는 깊고 서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내 곁에 두고 싶을 뿐이야.”그의 목소리마저도 유난히 다정하게 들렸다.“죽고 싶어!”강유형은 화가 치밀어 올라 크게 소리쳤지만 헤르나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운 채 나를 향해 물었다.“네가 직접 말해봐. 여기서 나갈지, 남을지.”그는 교묘하게 나를 갈등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지원아, 걱정하지 마. 내가 널 데리고 나갈게.”강유형은 단호한 눈빛으로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강유형은 비록 나에게 상처를 준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보호하려는 그의 태도만큼은 진심이었다.하지만 헤르나의 뒤에 있는 두 명의 체격 좋은 경호원이 그의 뒤를 바짝 지키고 있었다. 헤르나가 눈짓만 하면 그들은 당장이라도 강유형에게 달려들 태세였다.강유형이 강해 보이긴 했지만 그는 군대를 다녀온 진정우처럼 싸움에 능한 사람이 아니고 한 명도 아니고 두 명
헤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좋아. 사랑에 눈이 먼 여자는 아닌가 봐.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 왜 하필 신지태를 구하려고 한 거야? 그 사람이 그렇게 중요해?”겉으로는 친절해 보이는 헤르나지만 그는 계속해서 나를 떠보며 내 약점을 찾으려 했고 내 가치를 최대한 활용하려는 속셈이 분명했다.“중요하지 않아요.”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헤르나는 미소를 지었지만 나를 믿지 않는 눈빛이었다.“하지만 유일한 기회를 그를 위해 썼잖아.”“내가 스누커를 배운 건 지태 오빠 덕분이에요. 그래서 오늘 이 기회는 그의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내 말에 헤르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왜 너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어? 나를 설득해서 너를 놓아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었잖아.”“어차피 당신은 날 여기 가두고 경기를 보게 하려고 했잖아요. 날 풀어준다 해도 공항까지 무사히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나는 지태 오빠의 경기를 보러 왔기에 굳이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내가 말하며 그의 팔에 난 상처를 힐끔 쳐다보자, 헤르나는 내 시선을 눈치채고는 여유롭게 웃으며 소매를 걷었다.“이거? 아직 완전히 낫지는 않았어. 다 나으면 문신이라도 해서 보기 흉하지 않게 만들어야겠지.”“누가 그런 거예요?”나는 뻔히 알면서도 물었다.“모를 리가 있나?”헤르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가 이렇게 대놓고 말하니, 나도 더 숨길 필요가 없었다.“그래서 정우를 상대로 복수하려는 거군요.”헤르나는 소매를 내리며 말했다.“그게 전부는 아니야.”그리고 와인잔을 흔들며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우리 사이의 문제는 단순히 그가 날 다치게 해서 생긴 게 아니거든.”“진정우랑 이미 알고 지낸 사이였어요?”내가 묻자, 이번엔 헤르나가 미간을 찌푸렸다.“너희 사귀었다면서? 그런데도 자기 과거 이야기는 하나도 안 했어?”그의 말은 내 가슴을 찌르는 비수 같았다.“안 했어요.”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헤르나는 고개를 저으며 연민이
그러나 나는 그에게 바로 대답하지 않고 일부러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헤르나는 옆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와서 앉아서 천천히 생각해 봐.”사실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무엇을 요구할지 이미 마음속으로 정해놓았기 때문이다.헤르나는 자리에 앉아 흰색 캐주얼 팬츠 위로 긴 다리를 교차시킨 채 와인잔을 손에 들었다. 그의 태도는 한없이 여유롭고 느긋했다.조용히 와인을 홀짝이는 그의 모습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평화로웠고 이 모든 게 그에게는 전혀 급하지 않은 듯 보였다.솔직히 말해, 그의 외모는 정말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특히 깊고 또렷한 눈매는 마치 사람을 빨아들이는 심연 같아서 오랫동안 쳐다볼 수 없었다.나는 그의 눈을 의식적으로 피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당구대 모퉁이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경기가 끝나면 절대 지태 오빠에게 다시는 손대지 마세요.”현존 최고의 스누커 선수라면 단연 신지태였다.그들은 불법 도박 자본을 이용해 경기를 조작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한 번으로 끝날 리는 없었다.결국 신지태를 완전히 그들의 수중에 넣으려 할 것이고 내가 아는 신지태는 그런 상황에서 차라리 자신의 팔을 끊어버릴 만큼 단호한 사람이었다.헤르나는 내 말을 듣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 표정을 보자 나는 곧바로 말했다.“당신이 내가 이기면 어떤 요구든 들어준다고 하지 않았나요?”헤르나는 와인잔을 살짝 흔들며 답했다.“긴장하지 마. 약속을 깨겠다는 건 아니야. 다만 네가 알아야 할 게 있어서 그래.”“역시 이런 사람들은 말만 번지르르하지.”나는 비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큐대를 내던지고 뒤돌아섰다.그때, 헤르나의 목소리가 내 등 뒤에서 들려왔다.“널 여기 데려온 건 두 사람 때문이야.”그 말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누군데요? 당신, 브라운 때문에 날 납치한 거 아니었어요?”그가 내게 조건을 내걸라고 했지만 나는 브라운과 그의 팬들에게 나를 놔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신지태를 구
“세 판.”“좋아요.”나는 말하면서 천천히 큐를 골랐다.“보는 눈이 있는데?”내가 큐를 손에 쥐자마자, 헤르나가 웃으며 칭찬했고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그는 곧 이유를 덧붙였다.“네가 고른 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거야.”“그래요?”나는 살짝 비웃으며 큐를 살펴보다가 큐 위에 새겨진 글자를 발견했다.자세히 보니, 큐에 새겨진 건 ‘진’이라는 번체 글자였다.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이 나도 모르게 먼저 튀어나왔다.“이건 당신 게 아니라..”나는 이어서 진정우의 큐라고 말하려다 멈췄다.진정우와 헤르나는 완전히 대립 관계 아닌가. 그가 어떻게 진정우의 큐를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 게다가 이런 큐는 보통 프로 선수들만 사용하는 건데.이전에도 진정우에게 스누커를 잘 치냐고 물었을 때, 그는 그냥 보통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전문 큐를 가질 리 없었다.“이거 누구 거야?”헤르나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띠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마치 나에게 맞춰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당신 것은 아니예요. 큐에 다른 사람 이름이 적혀 있으니까.”나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는 내 대답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역시 스누커를 잘 아는 소녀답네. 이런 것도 알아보네.”‘스누커 소녀’라는 말에 순간적으로 얼굴이 굳었다. 브라운이 나를 처음 그렇게 불렀었다.“그렇게 저를 부르지 마세요. 듣기 싫어요.”나는 단호하게 말했다.“왜?”헤르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쓰레기 같은 인간이 저를 그렇게 부른 적이 있었거든요.”나는 헤르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꼬마야, 나를 욕하고 싶으면 그냥 대놓고 해.”나는 헤르나를 욕하려 한건 아니었지만 아무 말 없이 그의 웃음을 무시했고 이미 공이 배치된 테이블을 보며 말했다.“이제 시작하죠.”그는 손짓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해봐.”내가 먼저 시작하라는 조건이었으니,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큐를
‘무슨 경기를 본다는 거야. 이건 그냥 날 인질로 잡아 지태 오빠가 이기게 만들려는 거잖아.’경기가 끝나기 전까지 이곳을 떠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그렇다면... 여기 온 김에 차분히 적응하는 수밖에.’사실 이미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방금 핸드폰을 던지며 보였던 격앙된 행동은 모두 헤르나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기였을 뿐이었다.그는 이미 내 핸드폰을 만졌으니, 내 메시지나 통화를 모두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걸 막는 유일한 방법은 핸드폰을 아예 없애는 것이었다.더 이상 발버둥 쳐봐야 소용이 없었다. 헤르나도 이미 나에게 구체적으로 통보했고 이 상황에서 계속 소란을 피워봐야 무의미할 뿐이었다.그래서 방에서 나와 테라스로 향해 바람이라도 쐬려고 했다. 그런데 테라스에 나서자마자, 눈앞의 광경에 숨이 멎었다.엄청난 규모의 테라스 아래로는 거대한 정원이 펼쳐져 있었고 사방은 푸른 식물들로 둘러싸여 있었다.골프장, 야외 스누커 경기장, 커다란 수영장과 화려한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테라스에서 내려다보니, 그곳에서 헤르나가 한가롭게 당구를 치고 있었다고 그는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말했다.“꼬마야, 내려와서 나랑 한 판 치지 않을래?”순간, 나와 시합을 하겠다고 큰소리치던 브라운이 떠올랐다.브라운과 헤르나가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헤르나가 브라운을 압도할 만한 인물이라는 것이다.브라운 한 명은 대처할 수 있겠지만 그의 수많은 팬들은 이미 광기에 휩싸여 있고 언제든 극단적인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다.결국 이 팬들을 진정시키려면 브라운이 직접 나서야 하는데 그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헤르나뿐이었다.하지만 나는 그저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아무 말 없이 그를 내려다보기만 했다.“네가 당구를 잘 친다고 들었어. 만약 네가 나를 이기면 널 미리 돌려보내 줄 수도 있지.”헤르나가 유혹적인 제안을 던졌고 나는 어이가 없었다. 진정우나 신지태와 가끔 시합을 즐겼을 뿐인데 어쩌다 내 당구 실력이 이리 소문났는지.두 명의 외국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