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안리영과 선약이 있었기 때문에 점심은 진정우와 허진호랑 먹지 않았다.안리영의 말에 따르면 선배가 그들 병원에 객원 교수로 초청되어 강연을 하게 되었는데 인사를 나눴으니 나도 가서 만나보라는 것이었다.특히 진소영의 치료와 관련해 구체적으로 논의할 기회라고 했다.“그럼 정우 씨도 같이 갈게. 어쨌든 소영이 오빠잖아. 직접 듣는 게 좋지 않을까?”그리고 수술 여부를 결정하는 것도 결국 그의 몫이니 함께 있는 게 맞았다.안리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왜? 불편해?”“너 혼자 오는 게 좋겠어. 시간이 촉박해서 선배님이 잠시 쉬는 틈에 간단히 얘기하는 게 전부일 거야.”안리영이 이렇게 설명했다.나는 혼자 진소영의 병력을 들고 병원으로 갔다.안리영은 이미 날 기다리고 있었고 내가 가져온 병력을 확인한 후 곧바로 학술 강연장으로 안내했고 가는 길에 그녀가 말했다.“선배님이 정말 바쁘셔. 강연 끝나면 또 다른 일정이 있어서 아마 너는 4,5분 정도밖에 얘기할 시간이 없을 거야.”나는 어이가 없었다.“그렇게 바빠? 대통령급 아니야?”안리영은 내 농담에 웃으며 말했다.“그렇지 뭐. 지금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교수잖아. 우리 병원에 온 건 완전 행운이지. 아마 병원장이 큰 선물이라도 들고 가서 부탁했거나 정말 운이 좋아서 초청된 거겠지.”나는 안리영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그녀의 말 속에서 약간의 씁쓸함이 느껴졌다.안리영도 충분히 뛰어난 사람이지만 그녀가 흠모하는 선배 앞에서는 그런 우수함이 빛을 잃는 것처럼 보였다.아마 이런 이유 때문에 그녀의 짝사랑은 쉽게 끝나지 않는 거겠지.사랑은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을 때 더 아름답다고 했다.“너 그 선배랑 개인적으로 만난 적은 없어?”나는 호기심에 물었다.“없어. 그 사람이 워낙 바쁘니까. 그리고 만약 따로 만날 수 있었다면 굳이 너를 부르진 않았겠지.”안리영은 웃으며 내 팔을 툭 치며 말했다.“말했잖아. 그는 대단한 교수님이고 조교랑 스
그의 강연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의학을 모르는 나조차도 쉽게 이해할 정도로 명확하고 깔끔했다. 덕분에 현대 의학의 대단함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너 왜 그래? 꼭 뭔가 수상한 짓이라도 한 사람 같아.”안리영은 내 감탄은 무시한 채 내 상태부터 지적했다.역시 산부인과 의사답게 눈치가 빨랐다. 내 이상함을 단번에 간파한 것도 모자라 이유까지 짚은 듯했다.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좀 피곤하긴 해.”안리영의 눈이 커지며 날 노려봤다.“진짜야? 누구랑?”“뭘 누구랑이야.”주위를 둘러보니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나는 살짝 웃으며 되물었다.“안리영, 네 생각엔 누구겠어?”그녀는 날 한참 뜯어보더니 조용히 말했다.“진정우?”나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정말 의외다. 강유형이랑은 10년을 넘게 지냈는데 결국 진정우가 먼저야?”“....”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뭐야, 네가 먼저 덮쳤어?”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장난스러운 말을 던졌다.나는 헛기침하며 말했다.“서로 좋아서 그렇게 된 거야.”안리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나는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왜 웃어? 진짜라니까. 내가 억지로 그런 거 아니야.”“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네가 그렇게 잘생기고 멋진 남자를 차지했다는 거지. 그럼 된 거야.”그녀의 말은 간결했지만 매번 날 놀라게 했다.나는 반격했다.“너는 이 많은 시간 동안 아무도 안 만나더니... 결국 네 목표는 구안석 교수님 같은 완벽한 남자였던 거야?”그녀는 태연히 말했다.“맞아. 마음에 드는 사람이면서도 뛰어난 사람이어야지.”“근데 진짜 구안석 교수님은 놓치기 아까운 사람이야. 마음 있으면 고백이라도 해봐. 혹시 모르잖아.”이번엔 내가 그녀를 부추겼다.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우린 안 될 거야. 내가 고백하면 결과는 딱 두 가지뿐일 테니까.”“어떤 두 가지?”그녀는 잠시 멈추더니 말했다.“하나는 시작. 서로 사랑하며
“리영아, 나를 찾았다면서?” 구안석이 먼저 말을 꺼냈다.그러자 안리영은 빠르게 자세를 가다듬으며 대답했다.“선배, 이쪽은 내가 말했던 윤지원이야. 전에 수술 상담을 요청했던 진소영이 바로 지원이의 시누이이고.”이 말을 듣자마자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안리영이 한마디로 나를 진정우와 엮어버린 셈이었다.구안석은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고 나는 재빨리 진소영의 병력을 그에게 건넸다.그는 병력을 받아 들고 빠르게 훑어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소영 씨의 상태는 이미 파악했습니다. 병력과 대체로 일치하고요. 이 수술은 치료 효과가 확실합니다. 게다가 빨리 진행할수록 좋습니다. 이미 심장이식 대기 등록도 해두었으니 적합한 심장이 나오면 바로 수술 가능합니다.”“그럼 진소영 씨가 지금 바로 입원해서 이식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이야?” 안리영이 전문적인 질문으로 대화를 이어갔다.“응. 최대한 빨리 진행하는 게 좋을 거야.” 구안석은 안리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 순간 이상하게도 그의 눈빛은 부드러우면서도 따스한 느낌이 들었다.그저 선배가 후배를 바라보는 평범한 시선이라기엔 묘하게 다정함이 느껴졌다. 혹시 이건 일방적인 짝사랑이 아니라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오가는 거 아닐까? 나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구... 교수님.”나는 그의 호칭을 부르다 멈칫했다. 그는 이제 단순히 의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조만간 소영이를 입원시킬게요.”나는 재빨리 대답했다.안리영도 말을 덧붙였다.“선배, 바쁘신 와중에 신경 써주셔서 정말 고마워.”구안석은 그녀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입술이 살짝 움직이며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하얀 가운을 입은 여성이 다가왔다.그녀는 하얗고 고운 피부에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흰 가운과 잘 어울리는 우아함까지 겸비하고 있었다.곱슬머리를 살짝 묶어 올린 모습은 완벽한 미인이었다.그녀는 자연스럽게 구안석의 옆에 멈춰 섰다.“구 교수님, 왕 원장님이 저쪽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별거 아니야. 너랑 밥 한 끼 먹고 싶어서.” 구안석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안리영은 잠시 멍해 있다가 대답을 못 하고 있었다.‘이 바보 같은 계집얘... 또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거절하는 거 아니야?’그때 안리영이 단호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좋아요.”‘오! 생각보다 똑똑하네. 하긴 이렇게 멋진 남자를 멀리할 리 없지.’나는 속으로 안리영에게 박수를 보내며 그녀가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선배와 함께 아름다운 저녁 시간을 보낼 상상을 하고 있었다.그런데 그때 소희연이 끼어들었다.“졸업 이후로부터 우리 셋은 정말 오랜만에 만났네요. 다 같이 한 번 모이죠.”‘뭐라고? 정말 이렇게 눈치 없는 방해꾼이라고.’ 경험자로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소희연은 분명히 구안석과 안리영이 단둘이 시간을 보내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것이었다.안리영이 간신히 용기 내어 잡은 기회였기에 내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내가 말을 꺼내기 직전 안리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소 교수님, 저랑 구 교수님은 따로 이야기할 게 있어서요.”놀랍게도 안리영은 이번에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이런 그녀를 보며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잡은 기회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그녀의 태도가 돋보였다.하지만 소희연도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알아. 친구 가족분의 수술 관련 이야기겠지? 아마 모를 텐데 나도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어. 나중에 구 교수님과 함께 수술대에 설 거야.”‘와, 이건 정말 기가 막힌 이유네.’ 소희연이 수술에 직접 관여할 예정이라는 신분을 내세우다니 이건 빼도 박도 못하게 끼어들겠다는 의지였다.안리영의 입술이 약간 떨리는 걸 보니 거절하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그러나 그때 구안석이 나섰다.“희연아, 나랑 리영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거야.”그 한마디에 나는 속으로 외쳤다.‘이제 됐어!’이보다 더 완벽한 대응은 없었다.그 순간 소희연의 아름다운 얼굴이 굳어졌고 억지로 짓던 미소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난 확실히 말할 수 있다고. 구안석 씨는 널 좋아하는 게 확실해.”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구안석이 안리영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분명히 애정이 담겨 있었다.다만 지금의 안리영은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그도 그럴 것이다. 그녀는 오랫동안 구안석을 짝사랑했지만 고백하지 못했다.그가 너무 뛰어난 사람이라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그녀의 이런 태도는 사실 스스로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아마도 구안석이 직접 그녀에게 명확히 감정을 표현해야만 그녀가 마음을 열 수 있을 것이다.이 문제는 내가 대신 해결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굳이 말을 더 할 필요도 없었다.“난 이만 가볼게. 오늘 저녁 잘 준비하고 예쁘게 꾸미고 약속에 나가. 그리고 근무는 미리 교대해 둬.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약속 깨는 건 절대 안 돼.”나는 마치 그녀의 엄마처럼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안리영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엄마도 너만큼 나에 대해 그렇게 신경 안 써.”그건 그녀의 엄마가 딸이 이렇게 힘들게 짝사랑하고 있다는 걸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힘내, 리영아!”나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그녀를 응원했다. “그럼 난 간다.”“잠깐. 그냥 가지 말고 나랑 사무실에 좀 들르자.” 안리영이 나를 붙잡았다.“왜? 빨리 가서 정우 씨랑 얘기해서 소영이를 입원 준비시키는 일 상의해야 하는데.” 나는 급한 일이라며 서둘렀지만 그녀는 여전히 내 팔을 놓지 않았다.“조금만 시간 내. 금방이면 돼.”결국 나는 그녀를 따라 사무실로 갔다. 그녀는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이게 뭐야?”나는 그녀가 건넨 물건을 보며 물었다.뭔지 확인하기도 전에 그녀가 사용법과 용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집에 가서 깨끗이 씻은 뒤에 발라. 부기를 가라앉히고 멍도 없애 줄 거야.”그제야 나는 그 약의 용도를 알아챘다.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도 이런 건 좀 부끄러웠다. 그래서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나 필
똑같은 말이지만 지금 그의 입에서 다시 들으니 그저 비웃음처럼 들렸다.“알아. 나도 이제 어린애가 아니니까.”내 말에 강유형은 숨은 의미를 이해했는지 쓴웃음을 지었다. “괜히 내가 너무 신경 썼네.”나는 대꾸하지 않았고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앞으론 걸을 때 집중 좀 해. 딴생각하지 말고.”나는 짧게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순간 지난밤 꿈속에서 피투성이였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지금 병원에 있는 그를 보니 괜히 가슴이 철렁했고 나는 본능적으로 물었다.“여긴 왜 온 거야?”그는 잠시 입을 열 듯하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혹시...”아픈 데 없는지 물어보려던 찰나 멀리서 누군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유형 씨, 빨리 와요!”조나연이었다.강유형의 큰 키에 가려 그녀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목소리만큼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그 순간 나는 그가 왜 병원에 있는지 알게 되었다.그가 아파서 온 게 아니라 조나연과 함께 온 것이다.굳이 이유를 묻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조나연의 산부인과 검진을 위해 왔을 것이었다.그런데 나는 겨우 꿈 하나 때문에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니. 정말 쓸데없는 짓이었다.조나연의 부름에 강유형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나는 빈정대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볼 일 있으면 먼저 가봐.”그렇게 말한 뒤 바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차에 올라타자 휴대전화가 두 번 진동했다. 누군가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확인해 보니 조나연에게서 온 메시지였다.“지원 씨, 당신과 유형 씨는 이미 끝났으니 앞으로는 유형 씨와 거리를 두길 바랍니다.”그 메시지를 보는 순간 나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나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불안하면 강유형의 허리에 끈이라도 묶어놓으세요. 난 상관없으니까요.”메시지를 보낸 뒤 난 조나연의 번호를 바로 차단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차를 몰아 회사로 돌아갔다.하지만 회사에 도착해 보니 진정우도 허진호도 없었다. 입사 환영회가 너무 즐거웠던
나는 갑자기 긴장감이 스쳤다. ‘설마 이 사람이 또 그럴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식욕과 성욕은 인간의 본능이라더니 정말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맛을 본 사람은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더니 아무리 품위 높은 사람도 결국은 이겨내지 못하는 게 사랑인 것 같다.그래서일까.판타지 드라마 속 차가운 신들조차 금기를 깨고 연애를 한다는 설정이 이해가 갔다.사랑이란 하늘이 인간에게 준 가장 치명적인 약점일지도 모른다.진정우의 깊은 키스에 정신을 빼앗긴 나는 엉뚱한 생각들을 하다가 갑자기 입술에 살짝 아린 통증을 느끼고서야 현실로 돌아왔다.그는 이미 나를 침대에 눕힌 상태였다.그의 눈에는 강렬한 갈망이 가득했다.그의 목젖이 은근히 위아래로 움직이는 모습 양팔로 내 몸을 감싸며 반쯤 몸을 지탱하고 있는 근육질의 팔 모든 게 한눈에 들어왔다.이 상황 자체가 눈앞에서 펼쳐지는 유혹 그 자체였다.내 몸은 알 수 없는 떨림과 함께 묘한 쾌감이 퍼지기 시작했다.찌릿찌릿.온몸을 감싸는 전류처럼 말이다.뭔가가 한 점에서 시작해 천천히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느낌이었다.나는 내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느꼈다.욕망이란 것이 이렇게 통제 불가능한 것임을 이제야 체감했다.그런데 어제의 불편함이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터라 마음 한편에서는 불안감이 있었다.‘만약 정말 리영이 말했던 대로 무리하다 다치기라도 한다면 심지어 나중에 큰 문제가 생긴다면 어떻게 하지?’이런 불안감은 내 머릿속에서 줄곧 맴돌았다.나는 마음을 다잡고 이 상황을 어떻게 거절할지 고민하고 있었다.그런데 진정우가 갑자기 몸을 숙이며 그의 얼굴이 내 뺨에 닿았다.그리고 그의 입술은 내 머리카락과 귀 언저리를 스쳤다.“수고했어, 우리 아내.” 그의 목소리는 낮고 허스키했다.이 한마디가 진소영의 수술 준비로 내가 고생한 것을 알아주겠다는 의미인 걸 알았다.그런데 아까 그가 너무 담담해서 나는 그가 별로 원하지 않는 줄 알았었다.“난 정우 씨가 별로 기뻐하지 않는 줄
강유형에 대한 마음은 이미 내려놓았지만 그렇다고 그와 관련된 모든 상처와 불쾌했던 기억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지원아, 너도 참. 그렇게 큰 모욕을 당하고도 아무 말도 안 했어? 그 집은 너를 위해 산 거야. 그런 여자는 당장 쫓아내야지. 차라리 거지한테 줘도 그년한테는 못 줘!”아줌마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아줌마는 단 한 점의 허물도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아마 이 때문에 삼촌도 평생 한눈팔지 않고 아내만 사랑한 것 같다. 사랑해서 그랬을 테지만 그녀를 두려워한 이유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나와 강유형은 아무런 관계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더는 이 일을 논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나는 아줌마를 진정시키려 했다. “아줌마, 이미 지나간 일이에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너는 지나갔어도 난 못 지나가! 오늘 당장 사람을 시켜서 그 집을 되찾아올 거야.”아줌마는 강하게 말했고 나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조나연을 그 집에서 내쫓아도 강유형이 또 다른 집을 사주면 그만이에요.”조나연은 확실히 나와 강유형 사이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모든 기회를 준 건 강유형이었다.진짜 문제는 조나연이 아니라 강유형이었다.“다른 집은 사주더라도 그 집만큼은 네 거야. 네가 아닌 다른 여자는 그 집에 발도 못 들여놔.”아줌마의 말은 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마치 친엄마가 나를 걱정해 주는 것 같았다.“아줌마, 저를 생각해 주시는 건 알겠지만 정말 괜찮아요. 그러니 너무 화내지 마세요.”나는 아줌마를 달랬다.사실 그녀가 정말로 소란을 피운다면 강유형은 또다시 나를 의심할 것이다.나는 이미 끝난 관계에서 더 얽히고 싶지 않았다. 조나연 또한 내가 그와 경쟁한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난 화난 게 아니야. 절대 그 둘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러니 넌 신경 쓰지 마.” 그녀의 화는 누가 말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더는 아줌마를 말릴 수 없음을 깨달은 나는 입을 다물었다.“그 못된 놈이 감히 신
“헤르나!”진정우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나는 친근한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더 절박하게 도움을 요청하면 할수록 헤르나가 진정우를 더 쉽게 협박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헤르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고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런 뒤 여유롭게 와인잔을 들었다.“진, 너의 여자 친구는 정말 귀엽고 아름다워. 정말 매력적이야.”“걔는 이제 내 여자가 아니야.”진정우의 말은 마치 내 가슴을 칼로 베는 듯했다. 그가 사실을 말하는 건 알았지만 그 말이 여전히 날 아프게 했다.“아니라고? 내 정보가 아직 정확하지 않나 보네.”헤르나가 비웃었다.“할 말이 있으면 빨리해. 아니면 끊을 거야.” 진정우의 차가운 말투가 내 마음을 꽁꽁 얼어붙게 했다. 그가 나를 구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건 예상했지만 이렇게 차가운 목소리로 나를 내버려두는 건 상상도 못 했다.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것이 바로 이 순간이었다. 내가 헤르나에게 이용당할지 모르는 데도 진정우는 내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왜 그래?” 헤르나가 말하며 내 몸을 던지듯 당기더니 갑자기 자기 품으로 끌어당겼다.그는 자기 얼굴을 내 쪽으로 바싹 붙이며 진정우에게 그대로 보여주었다.진정우는 검은색 셔츠를 입고 있었고 금색 칼라 핀을 꽂고 있었다. 그는 화면 속에서 내게 무심히 시선을 보냈고 그 눈빛은 마치 내 존재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차갑고 냉정했다.“진, 이제 네 여자가 아니라면 내가 얘를 가져도 되겠지?”헤르나가 말하며 내 얼굴에 입술을 밀어붙이려고 했다.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물러났지만 그의 큰 손은 이미 내 목을 움켜잡고 있었다.그의 입술은 내게 닿지 않았지만 그 느낌은 마치 독사처럼 차가운 혓바닥이 내 몸을 스치는 듯했다.그는 이 모든 걸 진정우에게 보이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진정우가 정말 나를 도와주지 않고 모른 사람 취급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바로 그때 진정우가 말했다.“헤르나, 네 마
내가 말하려고 입을 열기 전에, 헤르나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꼬마야, 지금 그 남자를 들여보내면 인질 한 명 더 많아지는 건데.”그는 나를 협박하며 또 겁을 주고 있었다.“지원아?”강유형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고 목소리에서 급한 기색이 묻어났다.나는 헤르나가 나를 데려가도록 그냥 두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갑자기 그의 손을 물었다.헤르나는 깜짝 놀라며 손을 뺐고 그 틈을 타서 나는 몸을 일으켜 힘껏 문 쪽으로 달려갔다.“강유형, 구...”하지만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목뒤에서 차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나는 기억을 잃고 쓰러졌다.다시 눈을 떴을 때 주변은 어두운 상태였고 몇 개의 노란 불빛만이 희미하게 켜져 있었다. 나는 부드러운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흐릿한 기억이 떠오르면서 나는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나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내고 내 옷을 확인했다.그 순간, 내가 입고 있는 낯선 잠옷을 보고 머리가 멍해졌다.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같은 잠옷을 입은 헤르나가 들어왔다.나는 순간적으로 온몸이 얼어붙었고 두려움과 분노가 가득 찬 눈빛으로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이렇게 화를 내다니?”헤르나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는 그를 눈으로 죽어라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저 내 옷을 누가 바꿔 입혔는지 왜 잠옷을 입고 있는지 묻는 것조차 용기가 나지 않았다.헤르나는 와인잔을 손에 들고 침대에 앉았다. 그의 하얀 피부와 유럽식 미남의 외모가 어우러져 고요하면서도 묘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혹시 네 옷차림 때문에 화가 난 건가?”그는 내 몸에 입은 잠옷을 가리키며 웃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불을 더 꽉 움켜쥐었다.헤르나가 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묻고 싶었지만 너무 바보 같을 것 같았다.그가 나에게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간단했다. 그냥 몸을 조금만 움직이면 알 수 있을 테니까.“정말 순진한 여자애구나.”헤르나가 웃으며 와인 한 모금을 마셨다.“저를 여기 데려와서 도대체 뭘 하려고 하는 거예요?”나
사람은 정말로 의식이 끊어지는 순간이 있다. 지금 내가 바로 그런 상태였다.그렇지 않았다면 첫 반응으로 소리를 지르거나 문을 열고 도망쳤을 텐데 나는 그냥 그 자리에 앉아 멍하니 그 남자에게 물었다.“누구세요?”“왜 이렇게 슬픈 표정이야? 사랑의 아픔을 겪고 있는 거야?”그 남자는 전형적인 외국인이었다. 깊은 눈두덩, 높은 콧날, 입체적인 이목구비를 가진 모습이었지만 한국어는 정말 유창하게 했다.그가 정말 대단한 사람인 게 내가 왜 슬픈지 한 번에 알아차린 것 같았다.“누구세요?”나는 여전히 멍하니 그에게 물었다.그 순간,잠깐 끊겼던 의식이 돌아오면서 나는 Q 클럽의 회장이 떠올랐다.하지만 그가 정말 그 사람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나는 Q 클럽 회장이라면 거칠고 강한 남자일 거라 생각했는데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단정하고 우아하며 나이에 비해 매우 세련된 멋있는 남자였다.길거리에서 만났다면 모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문득 강유형이 말했던 Q 클럽 회장이 다쳤다는 말을 기억했다. 그래서 나는 그 남자를 다시 유심히 살펴봤지만 그냥 이 남자가 점점 더 잘생기고 멋있어 보였다.“난 헤르나 톨스크라고 해.”그 남자가 몸을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그제야 나는 우리가 매우 가까운 거리라는 것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그는 내 얼굴을 만지려는 듯 다가왔지만 나는 고개를 돌려 그 손을 피했다.그럼에도 그는 손을 내 머리에 얹고 마치 애완견을 쓰다듬듯 가볍게 톡톡 쳤다.“날 ‘헤르나’나 ‘톨스크’라고 불러도 돼.”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의 손길을 피했다. 마치 궁지에 몰린 고양이가 꼬리를 감싸듯이 말이다.“뭐 하는 거죠?”나는 소리 지르지 않았다. 만약 지금 소리라도 질렀다면 강유형이 달려와도 나는 그 남자의 손안에 갇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맞춰봐.”헤르나는 늘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기에 나는 그다지 무섭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대답했다.“나 잡으러 왔겠죠.”“하하...”헤르나는 껄
목 속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가슴 속 깊이까지 퍼져 나갔고 나는 침묵 속에서 겨우 입을 열었다.“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게. 반지 고르느라 바쁜 것 같네. 그럼, 이만!”나는 마지막까지 정신을 붙잡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끊어지는 순간 내 마음도 그 자리에서 무겁게 내려앉았고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나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한 채 그렇게 서 있었다. 그리고 그때, 강유형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강유형이 점점 가까워지자 나는 급히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잠깐만 기다려. 짐 정리하고 올게.”강유형은 나를 따라오며 말했다.“내가 같이 올라갈게.”“괜찮아, 혼자 올라갈게.”나는 큰 소리로 거절하며 더 빠르게 걸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강유형은 나를 계속 따라왔다.“무슨 일이야?”그는 내 불안한 모습을 눈치챘다. 나는 마음속에서 치솟는 감정을 억누르며 그를 바라봤다.“괜찮아. 그냥... 혼자 정리하고 싶어서.”하지만 내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내 마음은 점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강유형의 그 질문에 난 거의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그러나 나는 그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다. 진정우와 함께할 때 나는 강유형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때는 정말 자신만만했었지만 지금은 그 아픔이 배로 되어 나를 덮치는 것 같았다.나는 마음속에서 넘쳐나려는 슬픔을 억누르며 억지로 강한 척 그를 바라봤다.“너랑 함께 올라가는 건 좀...”나는 담담하게 말했다.“다른 뜻은 없어. 네가 걱정돼서 그래. 그럼 문 앞에서 기다릴게.”그가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나는 강유형이 문밖에 있는 것조차 싫었다. 지금 나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나는 진정우를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방금 그 여자의 한마디가 나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나는 진정우를 완전히 잊지 못했고 여전히 신경 쓰고 있었다.“무슨 일이 생기겠어? 너무 걱정하는 거 아니야?”결국 나는 공격적인 어조로 대답했다. 강유형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와 함께
‘가야 하는가?’강유형이 그렇게 많은 충고를 줬지만 난 여전히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모르겠다. 강유형은 나를 묵묵히 바라보았고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정우한테 물어볼게.”그러자 강유형의 눈빛이 순간 어두워졌다. 그래도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나는 강유형을 믿지 않는 게 아니라 진정우만큼은 확실히 믿는다. 그래서 나는 그가 내린 결정을 따라야 했다. “여보세요?”전화가 연결되자 진정우의 목소리가 낮고 매력적으로 들려서 귀가 조금 따갑게 느껴졌다.“무슨 일이야?” 내가 말을 꺼내지 않자 진정우가 다시 물었다.“정우야, 지금 내가 있는 호텔에 두 사람이 나를 감시하고 있어. 네가 보낸 사람이야?”내가 숨을 고르며 말을 이어갔다. “3A 좌석에 있는 사람들 맞아?”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 사람들이 3A에 있으면 맞겠지. 그곳에서 널 지켜보고 있어.”그렇다면 그는 내가 있는 곳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강유형이 여기서 뭘 하든 진정우는 이미 전혀 모르는 게 없다는 게 확실해졌다.“강유형이 지금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말해줬어. 그래서 묻고 싶은 게 있어. 나는 돌아가야 할까 아니면 강유형이 마련한 다른 곳으로 가야 할까?” 내 목소리가 낮아졌다. 진정우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차가운 침묵을 깨고 나서 물었다.“왜 나한테 묻는 거지?”나는 그냥 그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서 묻는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이 일이 너와도 관련이 있잖아.”침묵 속에서 난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 잠시 후 그는 다시 말을 꺼냈다. “강유형은 널 해치지 않을 거야.”그의 말은 결국 내가 강유형을 따라야 한다는 뜻이었고 강유형과 함께 가라는 의미였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이 불편했다.이전에 진정우는 나를 강유형에게 맡기기도 했고 내가 강유형을 위해 헌혈했을 때 화를 냈었다. 그런데 지금 이 남자는 또 나를 강유형에게 보내려고 한다
“신지태는 당분간 괜찮을 거야.” 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강유형이 설명을 덧붙였다.“Q 클럽은 겉으로는 스누커를 하지만 실제로는 도박을 하고 있어. 신지태에게 그런 일을 벌인 건 그들이 우승을 이어가면서 도박에서 가장 큰 이득을 챙기려는 거였어.”도박이라... 들은 적은 있지만 스누커와 그런 일이 연관될 줄은 몰랐다.“신지태는 이제 그들 손에 넘어가지 않을 거야. 그런데 그들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냈어. 그게 바로 지태를 도박에 이용하는 거야. 지태가 경기에서 이기면 겉으로는 그들이 돈을 잃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더 큰 이득을 챙기게 될 거야.”강유형의 말에 등 뒤로 서늘한 기운이 돌았다. 스누커 하나로도 그런 무서운 자본가들이 돈을 챙기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예전에 신지태가 스누커를 좋아한다고 했었고 그 후에는 세계 무대에서 한국인도 스누커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했었는데... 만약 그가 지금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걸 알면 기분이 어떨까?나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지태 오빠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몰라. 만약 알았다면 아마 경기를 하지 않았을 거야.”강유형은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말을 이었다.“그런데 만약 지태가 경기를 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나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았다.“지원아,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진정우가 신지태를 구했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 게 아니야. 사실 이 일은 그들이 모두 계획한 함정이었어.”나는 갑자기 닭살이 돋기 시작했다. 진정우는 이 일을 알고 있는 걸까? 진정우도 모르고 있는 건가?“지원아, 이제 경기까지 이틀밖에 남지 않았어. 그때까지 아무 일도 없어야 해. 그런데 브라운이란 사람은 예외야. 그의 팬은 Q클럽이 아무리 손을 써도 제어할 수 없지. 그래서 Q클럽은 너한테도 손을 대려 할 거야. 너를 다치게 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너를 협상 카드로 쓰려고 할 거야.”내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정우는 다시 Q클럽에 복수하는 걸 안 무서워하는 거야?”강유
강유형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이유는 분명히 뭔가 의도가 있는 거였다.그는 내 눈을 깊게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진정우는 좀 더 신중하게 브라운을 처리해야 했어. 그의 배경을 먼저 조사하고 나서 행동을 취했어야지.”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지만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네 말은 그 사람 배경이 강하니까 내가 괴롭힘을 당해도 참고 있어야 한다는 거야? 내가 피해를 봐도 그냥 참고 있으라는 거지?”강유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지원아, 그런 말은 아니야.”“강유형, 나는 진정우가 한 일이 잘못된 게 아니라고 생각해. 브라운은 그냥 자업자득이야.”나는 단호하게 말했고 강유형의 눈빛에 잠깐의 무력감이 스쳤다.“내 말은 좀 더 다른 방법을 쓸 수도 있었잖아. 이런 식으로 일을 키우는 건 결국 너를 더 위험하게 만들 뿐이야.”그는 말을 멈추고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지원아, 내가 말하는 건 진정우를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 그저 상황을 냉정하게 보자는 거야.”나는 그가 내 뜻을 왜곡할까 봐 걱정하지 않기 위해 선을 그었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봤자 소용없어. 게다가 브라운의 목표는 나니까 진정우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가 더 대담해질 거야.”브라운은 이미 진정우와 강유형이 함께한 연회에서 나를 괴롭혔고 그는 아예 두 사람을 무시하고 행동하는 거였다.“지금은 그의 팬들이 더 난리가 났지.” 강유형은 멀리 있는 남자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지원아, 넌 지금 어디에 있든 위험할 수 있어. 그래서 여기에 있는 건 안전하지 않아.”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강유형이 나에게 말한 의도를 알겠지만 내가 그와 함께 호텔에 가는 건 더 불편한 일이었다.내가 그에게 피를 주고 진정우는 이미 자기와 헤어졌다고 오해하고 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있으면 상황이 더 복잡해지겠지.그래서 나는 그럴 수는 없었다.“그의 팬들이 나를 노리고 있는 거니까 어디에 있든 난 위험할 거야.”나는 내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강유형은 턱선
“경기를 보러 온 거야? 티켓 샀어?” 강유형이 갑자기 화제를 바꿨다.“아직 안 샀어. 너는 티켓 있어? 티켓 구하기 힘드니까 내가 네 걸 살게. 얼마야?”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빠른 길이 있는데 일부러 돌아가는 건 어리석은 일이니까.그러자 강유형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있긴 한데 안 팔아.”그는 말하자마자 주머니에서 티켓을 꺼냈고 그것도 두 장이었다. “이미 나한테 남겨두라고 했어. 이건 신지태가 준비한 거야.”그 말을 들으니 내 마음이 잠깐 떨렸다. 신지태는 나에게 오라고 연락도 안 했는데 티켓을 남겨둔 걸 보면 나를 기다린 거였을 거다. 내가 안 왔으면 실망했을 것 같았다.“한 장 더 줄 수 있어?”강유형이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또 다른 티켓을 꺼내주었다.“강유형, 너 진짜 티켓 파는 사람 같아.”나는 티켓을 받으며 그를 놀리듯 말했다. 강유형은 웃기만 했지 특별히 대답은 하지 않았고 나도 더 이상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그때, 마침 소지훈이 진소영을 데리고 내려왔다. 그는 진소영의 짐을 밀어주고 진소영은 수줍게 그의 옆을 따르며 둘은 정말 달콤한 느낌을 주었다.“친구들이야.” 나는 강유형에게 두 사람을 소개하며 일어섰다.진소영은 소지훈과 함께 내 쪽으로 걸어오며 큰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새언니.”나는 진소영을 보며 그녀가 강유형을 경계하듯 쳐다보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의도적으로 ‘새언니’라고 불렀다. 이건 분명 강유형을 자극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지훈이가 잘 돌봐줄 거야. 그런데 만약 뭐가 이상하거나 네가 괴롭힘당하면 언제든지 전화해.”나는 진소영에게 말하는 척하며 소지훈에게 경고했다. 진소영은 얼굴이 빨개지면서도 소지훈을 지키려고 했다.“지훈 오빠는 저를 절대 괴롭히지 않아요. 언니 걱정하지 마세요.”나는 소지훈에게 티켓을 건네며 말했다.“이건 돈으로 살 수 없는 거야.”“고마워요, 새언니.”진소영은 예의 있게 답하며 또다시 나를 ‘새언니’라고 불렀다.“잘 가. 뭐 필요하면 연
“예쁜 아가씨, 저 좀 도와줄 수 있어요?”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순간적으로 긴장이 되어 고개를 들었다.그러자 흰머리의 외국인 할머니가 애처롭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죠?” 나는 예의 있게 물었다.“커... 커피 한잔 사주실 수 있을까요? 돈이 없어서 너무 오래 마셔보지 못했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깜짝 놀라면서 그런 그녀가 불쌍하게 느껴졌다.그래서 나는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정말 고마워요.” 그녀는 내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여기 앉아서 마셔도 될까요?”선한 마음으로 도와주는 거니까 앉게 해주는 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갑자기 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저기요. 저쪽 자리가 비었는데 그쪽으로 앉으세요.”나는 깜짝 놀라서 그를 보았다. ‘강유형이 왜 여기 있지?’어리둥절한 사이 강유형은 내 커피를 마시려던 그 할머니에게 옆자리를 가리키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서 건네주었다.“커피 드시고 싶으시면 직접 주문하시면 돼요.”강유형의 행동에 그 할머니는 그대로 물러나고 커피도 주문하지 않고 나갔다.나는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아무 말 없이 지켜봤다. 할머니가 돈을 들고 가는 모습에 미묘한 불쾌감이 들었다. 그때 강유형이 다시 말을 꺼냈다.“봤지? 그 할머니는 사실 커피를 마시고 싶었던 게 아니야.”“돈을 원한 거야?”“그래. 만약 오늘 그 할머니가 여기 앉아서 커피를 주문하게 되면 10분도 안 돼서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질 거야. 그러면 누군가 신고하고 넌 커피를 사준 사람으로 경찰에 끌려갈 거야.”강유형의 말에 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 말이 떠오르면서 신지태가 겪었던 일이 생각났다. 나는 믿기지 않았지만 그래도 강유형의 말에 반박했다.“사람들을 그렇게 나쁘게만 볼 필요 없잖아.”강유형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핸드폰을 꺼내 내 앞에 들이밀었다. 화면에는 한 할머니와 젊은 여자가 싸우는 영상이 나왔고 내용은 강유형이 말한 것과 거의 똑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