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안리영과 선약이 있었기 때문에 점심은 진정우와 허진호랑 먹지 않았다.안리영의 말에 따르면 선배가 그들 병원에 객원 교수로 초청되어 강연을 하게 되었는데 인사를 나눴으니 나도 가서 만나보라는 것이었다.특히 진소영의 치료와 관련해 구체적으로 논의할 기회라고 했다.“그럼 정우 씨도 같이 갈게. 어쨌든 소영이 오빠잖아. 직접 듣는 게 좋지 않을까?”그리고 수술 여부를 결정하는 것도 결국 그의 몫이니 함께 있는 게 맞았다.안리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왜? 불편해?”“너 혼자 오는 게 좋겠어. 시간이 촉박해서 선배님이 잠시 쉬는 틈에 간단히 얘기하는 게 전부일 거야.”안리영이 이렇게 설명했다.나는 혼자 진소영의 병력을 들고 병원으로 갔다.안리영은 이미 날 기다리고 있었고 내가 가져온 병력을 확인한 후 곧바로 학술 강연장으로 안내했고 가는 길에 그녀가 말했다.“선배님이 정말 바쁘셔. 강연 끝나면 또 다른 일정이 있어서 아마 너는 4,5분 정도밖에 얘기할 시간이 없을 거야.”나는 어이가 없었다.“그렇게 바빠? 대통령급 아니야?”안리영은 내 농담에 웃으며 말했다.“그렇지 뭐. 지금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교수잖아. 우리 병원에 온 건 완전 행운이지. 아마 병원장이 큰 선물이라도 들고 가서 부탁했거나 정말 운이 좋아서 초청된 거겠지.”나는 안리영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그녀의 말 속에서 약간의 씁쓸함이 느껴졌다.안리영도 충분히 뛰어난 사람이지만 그녀가 흠모하는 선배 앞에서는 그런 우수함이 빛을 잃는 것처럼 보였다.아마 이런 이유 때문에 그녀의 짝사랑은 쉽게 끝나지 않는 거겠지.사랑은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을 때 더 아름답다고 했다.“너 그 선배랑 개인적으로 만난 적은 없어?”나는 호기심에 물었다.“없어. 그 사람이 워낙 바쁘니까. 그리고 만약 따로 만날 수 있었다면 굳이 너를 부르진 않았겠지.”안리영은 웃으며 내 팔을 툭 치며 말했다.“말했잖아. 그는 대단한 교수님이고 조교랑 스
그의 강연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의학을 모르는 나조차도 쉽게 이해할 정도로 명확하고 깔끔했다. 덕분에 현대 의학의 대단함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너 왜 그래? 꼭 뭔가 수상한 짓이라도 한 사람 같아.”안리영은 내 감탄은 무시한 채 내 상태부터 지적했다.역시 산부인과 의사답게 눈치가 빨랐다. 내 이상함을 단번에 간파한 것도 모자라 이유까지 짚은 듯했다.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좀 피곤하긴 해.”안리영의 눈이 커지며 날 노려봤다.“진짜야? 누구랑?”“뭘 누구랑이야.”주위를 둘러보니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나는 살짝 웃으며 되물었다.“안리영, 네 생각엔 누구겠어?”그녀는 날 한참 뜯어보더니 조용히 말했다.“진정우?”나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정말 의외다. 강유형이랑은 10년을 넘게 지냈는데 결국 진정우가 먼저야?”“....”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뭐야, 네가 먼저 덮쳤어?”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장난스러운 말을 던졌다.나는 헛기침하며 말했다.“서로 좋아서 그렇게 된 거야.”안리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나는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왜 웃어? 진짜라니까. 내가 억지로 그런 거 아니야.”“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네가 그렇게 잘생기고 멋진 남자를 차지했다는 거지. 그럼 된 거야.”그녀의 말은 간결했지만 매번 날 놀라게 했다.나는 반격했다.“너는 이 많은 시간 동안 아무도 안 만나더니... 결국 네 목표는 구안석 교수님 같은 완벽한 남자였던 거야?”그녀는 태연히 말했다.“맞아. 마음에 드는 사람이면서도 뛰어난 사람이어야지.”“근데 진짜 구안석 교수님은 놓치기 아까운 사람이야. 마음 있으면 고백이라도 해봐. 혹시 모르잖아.”이번엔 내가 그녀를 부추겼다.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우린 안 될 거야. 내가 고백하면 결과는 딱 두 가지뿐일 테니까.”“어떤 두 가지?”그녀는 잠시 멈추더니 말했다.“하나는 시작. 서로 사랑하며
“리영아, 나를 찾았다면서?” 구안석이 먼저 말을 꺼냈다.그러자 안리영은 빠르게 자세를 가다듬으며 대답했다.“선배, 이쪽은 내가 말했던 윤지원이야. 전에 수술 상담을 요청했던 진소영이 바로 지원이의 시누이이고.”이 말을 듣자마자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안리영이 한마디로 나를 진정우와 엮어버린 셈이었다.구안석은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고 나는 재빨리 진소영의 병력을 그에게 건넸다.그는 병력을 받아 들고 빠르게 훑어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소영 씨의 상태는 이미 파악했습니다. 병력과 대체로 일치하고요. 이 수술은 치료 효과가 확실합니다. 게다가 빨리 진행할수록 좋습니다. 이미 심장이식 대기 등록도 해두었으니 적합한 심장이 나오면 바로 수술 가능합니다.”“그럼 진소영 씨가 지금 바로 입원해서 이식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이야?” 안리영이 전문적인 질문으로 대화를 이어갔다.“응. 최대한 빨리 진행하는 게 좋을 거야.” 구안석은 안리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 순간 이상하게도 그의 눈빛은 부드러우면서도 따스한 느낌이 들었다.그저 선배가 후배를 바라보는 평범한 시선이라기엔 묘하게 다정함이 느껴졌다. 혹시 이건 일방적인 짝사랑이 아니라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오가는 거 아닐까? 나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구... 교수님.”나는 그의 호칭을 부르다 멈칫했다. 그는 이제 단순히 의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조만간 소영이를 입원시킬게요.”나는 재빨리 대답했다.안리영도 말을 덧붙였다.“선배, 바쁘신 와중에 신경 써주셔서 정말 고마워.”구안석은 그녀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입술이 살짝 움직이며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하얀 가운을 입은 여성이 다가왔다.그녀는 하얗고 고운 피부에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흰 가운과 잘 어울리는 우아함까지 겸비하고 있었다.곱슬머리를 살짝 묶어 올린 모습은 완벽한 미인이었다.그녀는 자연스럽게 구안석의 옆에 멈춰 섰다.“구 교수님, 왕 원장님이 저쪽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별거 아니야. 너랑 밥 한 끼 먹고 싶어서.” 구안석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안리영은 잠시 멍해 있다가 대답을 못 하고 있었다.‘이 바보 같은 계집얘... 또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거절하는 거 아니야?’그때 안리영이 단호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좋아요.”‘오! 생각보다 똑똑하네. 하긴 이렇게 멋진 남자를 멀리할 리 없지.’나는 속으로 안리영에게 박수를 보내며 그녀가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선배와 함께 아름다운 저녁 시간을 보낼 상상을 하고 있었다.그런데 그때 소희연이 끼어들었다.“졸업 이후로부터 우리 셋은 정말 오랜만에 만났네요. 다 같이 한 번 모이죠.”‘뭐라고? 정말 이렇게 눈치 없는 방해꾼이라고.’ 경험자로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소희연은 분명히 구안석과 안리영이 단둘이 시간을 보내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것이었다.안리영이 간신히 용기 내어 잡은 기회였기에 내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내가 말을 꺼내기 직전 안리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소 교수님, 저랑 구 교수님은 따로 이야기할 게 있어서요.”놀랍게도 안리영은 이번에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이런 그녀를 보며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잡은 기회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그녀의 태도가 돋보였다.하지만 소희연도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알아. 친구 가족분의 수술 관련 이야기겠지? 아마 모를 텐데 나도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어. 나중에 구 교수님과 함께 수술대에 설 거야.”‘와, 이건 정말 기가 막힌 이유네.’ 소희연이 수술에 직접 관여할 예정이라는 신분을 내세우다니 이건 빼도 박도 못하게 끼어들겠다는 의지였다.안리영의 입술이 약간 떨리는 걸 보니 거절하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그러나 그때 구안석이 나섰다.“희연아, 나랑 리영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거야.”그 한마디에 나는 속으로 외쳤다.‘이제 됐어!’이보다 더 완벽한 대응은 없었다.그 순간 소희연의 아름다운 얼굴이 굳어졌고 억지로 짓던 미소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난 확실히 말할 수 있다고. 구안석 씨는 널 좋아하는 게 확실해.”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구안석이 안리영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분명히 애정이 담겨 있었다.다만 지금의 안리영은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그도 그럴 것이다. 그녀는 오랫동안 구안석을 짝사랑했지만 고백하지 못했다.그가 너무 뛰어난 사람이라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그녀의 이런 태도는 사실 스스로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아마도 구안석이 직접 그녀에게 명확히 감정을 표현해야만 그녀가 마음을 열 수 있을 것이다.이 문제는 내가 대신 해결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굳이 말을 더 할 필요도 없었다.“난 이만 가볼게. 오늘 저녁 잘 준비하고 예쁘게 꾸미고 약속에 나가. 그리고 근무는 미리 교대해 둬.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약속 깨는 건 절대 안 돼.”나는 마치 그녀의 엄마처럼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안리영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엄마도 너만큼 나에 대해 그렇게 신경 안 써.”그건 그녀의 엄마가 딸이 이렇게 힘들게 짝사랑하고 있다는 걸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힘내, 리영아!”나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그녀를 응원했다. “그럼 난 간다.”“잠깐. 그냥 가지 말고 나랑 사무실에 좀 들르자.” 안리영이 나를 붙잡았다.“왜? 빨리 가서 정우 씨랑 얘기해서 소영이를 입원 준비시키는 일 상의해야 하는데.” 나는 급한 일이라며 서둘렀지만 그녀는 여전히 내 팔을 놓지 않았다.“조금만 시간 내. 금방이면 돼.”결국 나는 그녀를 따라 사무실로 갔다. 그녀는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이게 뭐야?”나는 그녀가 건넨 물건을 보며 물었다.뭔지 확인하기도 전에 그녀가 사용법과 용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집에 가서 깨끗이 씻은 뒤에 발라. 부기를 가라앉히고 멍도 없애 줄 거야.”그제야 나는 그 약의 용도를 알아챘다.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도 이런 건 좀 부끄러웠다. 그래서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나 필
똑같은 말이지만 지금 그의 입에서 다시 들으니 그저 비웃음처럼 들렸다.“알아. 나도 이제 어린애가 아니니까.”내 말에 강유형은 숨은 의미를 이해했는지 쓴웃음을 지었다. “괜히 내가 너무 신경 썼네.”나는 대꾸하지 않았고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앞으론 걸을 때 집중 좀 해. 딴생각하지 말고.”나는 짧게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순간 지난밤 꿈속에서 피투성이였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지금 병원에 있는 그를 보니 괜히 가슴이 철렁했고 나는 본능적으로 물었다.“여긴 왜 온 거야?”그는 잠시 입을 열 듯하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혹시...”아픈 데 없는지 물어보려던 찰나 멀리서 누군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유형 씨, 빨리 와요!”조나연이었다.강유형의 큰 키에 가려 그녀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목소리만큼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그 순간 나는 그가 왜 병원에 있는지 알게 되었다.그가 아파서 온 게 아니라 조나연과 함께 온 것이다.굳이 이유를 묻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조나연의 산부인과 검진을 위해 왔을 것이었다.그런데 나는 겨우 꿈 하나 때문에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니. 정말 쓸데없는 짓이었다.조나연의 부름에 강유형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나는 빈정대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볼 일 있으면 먼저 가봐.”그렇게 말한 뒤 바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차에 올라타자 휴대전화가 두 번 진동했다. 누군가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확인해 보니 조나연에게서 온 메시지였다.“지원 씨, 당신과 유형 씨는 이미 끝났으니 앞으로는 유형 씨와 거리를 두길 바랍니다.”그 메시지를 보는 순간 나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나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불안하면 강유형의 허리에 끈이라도 묶어놓으세요. 난 상관없으니까요.”메시지를 보낸 뒤 난 조나연의 번호를 바로 차단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차를 몰아 회사로 돌아갔다.하지만 회사에 도착해 보니 진정우도 허진호도 없었다. 입사 환영회가 너무 즐거웠던
나는 갑자기 긴장감이 스쳤다. ‘설마 이 사람이 또 그럴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식욕과 성욕은 인간의 본능이라더니 정말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맛을 본 사람은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더니 아무리 품위 높은 사람도 결국은 이겨내지 못하는 게 사랑인 것 같다.그래서일까.판타지 드라마 속 차가운 신들조차 금기를 깨고 연애를 한다는 설정이 이해가 갔다.사랑이란 하늘이 인간에게 준 가장 치명적인 약점일지도 모른다.진정우의 깊은 키스에 정신을 빼앗긴 나는 엉뚱한 생각들을 하다가 갑자기 입술에 살짝 아린 통증을 느끼고서야 현실로 돌아왔다.그는 이미 나를 침대에 눕힌 상태였다.그의 눈에는 강렬한 갈망이 가득했다.그의 목젖이 은근히 위아래로 움직이는 모습 양팔로 내 몸을 감싸며 반쯤 몸을 지탱하고 있는 근육질의 팔 모든 게 한눈에 들어왔다.이 상황 자체가 눈앞에서 펼쳐지는 유혹 그 자체였다.내 몸은 알 수 없는 떨림과 함께 묘한 쾌감이 퍼지기 시작했다.찌릿찌릿.온몸을 감싸는 전류처럼 말이다.뭔가가 한 점에서 시작해 천천히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느낌이었다.나는 내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느꼈다.욕망이란 것이 이렇게 통제 불가능한 것임을 이제야 체감했다.그런데 어제의 불편함이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터라 마음 한편에서는 불안감이 있었다.‘만약 정말 리영이 말했던 대로 무리하다 다치기라도 한다면 심지어 나중에 큰 문제가 생긴다면 어떻게 하지?’이런 불안감은 내 머릿속에서 줄곧 맴돌았다.나는 마음을 다잡고 이 상황을 어떻게 거절할지 고민하고 있었다.그런데 진정우가 갑자기 몸을 숙이며 그의 얼굴이 내 뺨에 닿았다.그리고 그의 입술은 내 머리카락과 귀 언저리를 스쳤다.“수고했어, 우리 아내.” 그의 목소리는 낮고 허스키했다.이 한마디가 진소영의 수술 준비로 내가 고생한 것을 알아주겠다는 의미인 걸 알았다.그런데 아까 그가 너무 담담해서 나는 그가 별로 원하지 않는 줄 알았었다.“난 정우 씨가 별로 기뻐하지 않는 줄
강유형에 대한 마음은 이미 내려놓았지만 그렇다고 그와 관련된 모든 상처와 불쾌했던 기억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지원아, 너도 참. 그렇게 큰 모욕을 당하고도 아무 말도 안 했어? 그 집은 너를 위해 산 거야. 그런 여자는 당장 쫓아내야지. 차라리 거지한테 줘도 그년한테는 못 줘!”아줌마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아줌마는 단 한 점의 허물도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아마 이 때문에 삼촌도 평생 한눈팔지 않고 아내만 사랑한 것 같다. 사랑해서 그랬을 테지만 그녀를 두려워한 이유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나와 강유형은 아무런 관계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더는 이 일을 논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나는 아줌마를 진정시키려 했다. “아줌마, 이미 지나간 일이에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너는 지나갔어도 난 못 지나가! 오늘 당장 사람을 시켜서 그 집을 되찾아올 거야.”아줌마는 강하게 말했고 나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조나연을 그 집에서 내쫓아도 강유형이 또 다른 집을 사주면 그만이에요.”조나연은 확실히 나와 강유형 사이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모든 기회를 준 건 강유형이었다.진짜 문제는 조나연이 아니라 강유형이었다.“다른 집은 사주더라도 그 집만큼은 네 거야. 네가 아닌 다른 여자는 그 집에 발도 못 들여놔.”아줌마의 말은 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마치 친엄마가 나를 걱정해 주는 것 같았다.“아줌마, 저를 생각해 주시는 건 알겠지만 정말 괜찮아요. 그러니 너무 화내지 마세요.”나는 아줌마를 달랬다.사실 그녀가 정말로 소란을 피운다면 강유형은 또다시 나를 의심할 것이다.나는 이미 끝난 관계에서 더 얽히고 싶지 않았다. 조나연 또한 내가 그와 경쟁한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난 화난 게 아니야. 절대 그 둘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러니 넌 신경 쓰지 마.” 그녀의 화는 누가 말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더는 아줌마를 말릴 수 없음을 깨달은 나는 입을 다물었다.“그 못된 놈이 감히 신
“여긴 공항이야, 사람들이 많고 아이들도 있는데.” 진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고 있어.”“그런데도...” 내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러자 진정우는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하고 싶어.”그의 단호한 대답을 듣고 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강유형을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질투하는 거겠지.진정우는 강유형을 포기하게 만들려고 그런 걸까?그 생각이 들자 나는 결심하고 눈을 감았다. 심장은 요동치며 공항 대기실에서 진정우의 입맞춤을 기대했다.하지만 그의 입술이 다가오는 대신 내 손에 무게감이 느껴졌다.눈을 뜨고 보니 내 손에 작은 가방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이게 뭐야?” 내가 궁금해서 물었다.진정우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내가 열어보라고 손짓했다.내가 의아한 마음으로 가방을 열자 그 안에는 두 장의 카드와 하나의 증명서가 들어 있었다.그 카드와 증명서는 그가 전해주고 싶었던 것들이었다.“이게 무슨 의미야?” 나는 다시 물었다.진정우는 녹색의 책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이건 내가 군 복무를 마친 증명서야. 그리고 이건 내 열정이 담긴 헌혈 증서야. 이 카드들은 내 전 재산이야.”나는 그 말을 듣고 문득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전 재산을 보여주는 장면이 떠올랐다.진정우는 내게 재산을 넘기려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신념까지도 함께 전하려고 하는 것이다.특히 빨간 헌혈 증서를 보자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이걸 왜 준비한 거야?” 나는 조금 울컥하며 물었다.“너에게 주는 믿음이야. 이게 사랑 보험보다 더 실용적이야.”진정우는 그렇게 말하며 내가 강유형과 사랑 보험에 가입했던 사실을 안 것 같았다.하지만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그가 내게 주는 것이 모든 것 같았다.“이 두 개는 내가 가질게. 하지만 카드는 네가 갖고 있어.”나는 그가 준 돈을 받을 생각이 없었고 돈에 욕심이 없다. 만약 돈에 눈이 먼 여자라면 나는 강유형과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진정우는 카드를 받지 않고 조금 난처한 듯 말했
“네, 누구세요?”전화를 받으면서 나는 무심코 강유형을 쳐다보았다.그는 나를 보지 않고 혼자서 멀리 있는 의자 쪽으로 걸어갔다.“저는 하트시그널 보험사의 A8338번 직원입니다. 4년 전, 윤지원 씨와 강유형 씨가 저희 회사 사랑 보험에 가입하셨고 이제 보험 만기일이 다가와 관련 정보를 확인하려고 연락드렸습니다.”이 말을 듣고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본능적으로 진정우를 보았다.그는 내 옆에서 자리를 피하고 내가 전화를 받을 때는 멀리 떨어져 앉았다.그는 내게 충분한 개인 공간을 주고 있었다.진정우는 정말 세심하다. 나에게 필요한 안전감도, 여유도 모두 제공해 주고 있었다.“실례지만 두 분 지금 연애 중인가요, 아니면 결혼하셨나요?” 상대방이 조심스레 물었다.그 말에 나는 다시 강유형을 쳐다보았다. 그는 전화를 받고 있었고 표정은 매우 심각해 보였다.“지원 씨?” 상대방이 내 대답을 기다리며 다시 물었다.나는 침을 삼키는 동작을 하며 대답했다. “네, 듣고 있어요. 저희... “‘이미 헤어졌어요’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 강유형이 갑자기 나를 바라봤다.그 순간, 나는 피할 틈도 없이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우리는 그렇게 눈을 마주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원 씨?” 상대방이 또 나를 부르며 물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물어봤다. “왜 남자 쪽은 묻지 않나요?”“묻긴 했습니다. 다른 동료가 강유형 씨와 연락 중입니다.” 그의 대답을 들으니 강유형 역시 이 전화를 받고 있다는 걸 알았다. 세상엔 정말 재밌는 일이 많다.나는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왔다.“우리는 헤어졌어요.”“확실한가요?” 상대방의 말투가 불쾌하게 들렸다.나는 강유형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 진정우를 쳐다보며 손에 낀 반지를 살펴보았다.“저는 이미 결혼했어요.”상대방은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지원 씨. 만약 강유형 씨도 같은 답을 하셨다면, 이 사랑 보험 계약은 보험 규정에 따라
내가 그런 말을 했지만 이건 사적인 일이 아닌가?진정우는 내가 이해하지 못한 걸 알아차린 듯 바로 설명해 줬다. “내가 그 사람한테 말한 거야.”“아, 그렇구나.” 나는 대답하고 계속 죽을 먹었다. 그런데 두어 숟갈 먹고 나서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너 허 대표님하고 그렇게 친해? 내가 대신 휴가를 부탁했더니 대표님이 그냥 허락하고, 오히려 공손하게 나한테 말까지 했잖아?”진정우는 천천히 음식을 먹으며 말했다. “그렇게 친한 건 아니야.”“친하지 않다고? 내가 보기엔 마치 네가 그 사람의... 대표님 같아.”진정우가 한마디만 하면 허진호는 절대 거절할 리가 없어 보였다.“비슷한 거지.” 진정우가 의외로 그렇게 대답했다. “허 대표님이 나한테 새 제품을 개발해달라고 부탁하고, 내가 돈을 벌어줘야 하니까내가 말하면 거절할 수 없어.”대단하네!나는 마음속으로 존경을 표하며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실력이 있는 사람은 역시 자신감 넘치게 말한다. 이게 바로 진짜 실력이지.“우리 늦지 않았어?” 나는 밥을 다 먹고 물어봤다.“괜찮아. 늦으면 그냥 항공편 변경하면 돼.” 진정우는 정말 나를 방임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이해가 안 돼서 물었다. “왜 그렇게 급하지 않아? 나 좀 재촉해줘도 될 텐데.”“네 마음대로 하게 하고 싶어.” 진정우가 또 닭살이 돋는 멘트를 하자 나는 당황해서 얼른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불만을 털어놨다. “어제 미리 말이라도 해줬으면 내가 준비했을 텐데.”“어제... 내가 말할 기회가 없었잖아.” 진정우의 말에 나도 순간 뜨끔하면서 얼굴이 빨개졌다.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진정우는 살짝 웃으며 내가 당황한 모습을 보며 평온하게 말했다. “너무 서두르지 마. 천천히 해. 부족한 것 있으면 가서 사면 돼.”“일찍 말했으면 내가 준비 안 했을 텐데.” 내가 그에게 짜증을 내며 말했다.진정우는 화내지 않고 또 한마디 했다. “근데 나는 네가 물건 정리하는 모습 보는 게 좋아.”“
“왜 안 받아?” 내가 무심코 물었다.“받을 거야.” 진정우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너는 자지 말고 일어나서 씻고 아침 먹어.”나는 깜짝 놀랐다.“아침 벌써 준비했어?”나는 그가 내 옆에서 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정우는 이미 아침을 다 준비하고 내가 일어나지 않자 다시 침대에 돌아와서 나와 함께 공부한 거였다. 역시 뛰어난 사람은 항상 뒤에서 묵묵히 노력하는구나.“응, 내가 계란 죽을 끓였어. 일어나서 좀 먹어.” 진정우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사랑받는 느낌은 정말 좋다. 마치 내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처럼 느껴진다.진정우는 전화를 받으러 나갔고 나는 손을 이불에서 빼내며 내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고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면서 한정판이라고 묘사했다.그리고 다시 SNS를 놀다가 잠시 후에야 일어났다. 그런데 진정우의 전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나는 별 신경 쓰지 않고 화장실로 향했다.하지만 화장실에 들어가서야 나는 안리영이 준 약이 반 통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 전에 약을 4분의 1만 썼던 것 같은데 그럼 진정우가 사용한 건가? 언제였지?혹시 내가 자고 있을 때?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왜 아직도 안 씻었어?” 진정우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어색하지 않게 하려면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가는 게 제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대로 말이 나와버렸다. “너 기다리느라 그래.”진정우가 잠깐 멈칫하다가, 목젖이 살짝 움직였다. 분명, 내 말이 그에게 어떤 자극을 준 거였다. 나는 더 이상 아침에 뭔가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일부러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서둘러 씻고 그에게 말했다. “빨리 죽 끓여 놓고 나오는 대로 밥 차려줘.”“안 늦었어.” “지금 몇 시인데 아직도 안 늦었다고 해?” 내가 그를 비꼬며 말했다.“10시 비행기야, 시간 충분해.” 진정우의 말에 나는 동작을 멈추었다. 나는 원래 거울 속에서 그를 보고 있었는데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 그
“알았어.” 진정우는 여전히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이 터졌다.“이제야 네가 왜 서른이 넘도록 연애를 안 했는지 알겠어. 네가 너무 재미없잖아.”“너도 내가 재미없다고 생각해?”그는 가볍게 내게 물었다. 연애라는 부분에서 그는 약간 둔한 면이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웃으며 말했다.“내 말은 네가 여자 마음을 잘 달래주는 방법을 모른다는 뜻이야.”그는 몇 초 동안 조용히 생각하더니 대답했다.“내 생각엔 달래는 건 속인다는 뜻이야.”그의 참신한 대답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럼 내가 널 달래줘야겠어?”진정우가 다시 물었다. 어떤 여자라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다정함은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 아니라 진정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 나는 과거 강유형이 나를 대했던 방식을 떠올리며 말했다.“아니, 지금처럼 해. 난 너의 방식이 좋아. 너는 정말 특별하니까.”그의 품에 더 깊숙이 기대며 덧붙였다.“내가 프러포즈하면 받아줄 거야?”진정우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당황스러워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말했다.“안 하면서 뭘 물어?”그 순간, 진정우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불 안에서 내 손을 꺼내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만지며 말했다.“윤지원, 나와 결혼해 줄래?”순간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네 프러포즈이야?”“아니, 완전한 건 아니지만 맞기도 해.”그의 애매한 대답에 나는 그를 살짝 때리고 싶었다. 솔직히 내가 처음으로 프러포즈를 받을 거라고 상상했던 장면은 이런 게 아니었다. 한때 나는 내 인생 첫 프러포즈는 강유형이 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진정우였다.그 말을 들으니 얼마 전 강유형이 나를 위해 준비한 놀이공원 프러포즈 이벤트가 떠올랐다.나는 가지 않았지만 이후 몇몇 네티즌이 사진을 찍어 온라인에 올렸다. 그들은 그걸 단순히 오픈 이벤트의 리허설로 생각했겠지만 나는 그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알고
온몸이 이불에 휩싸인 채 침대로 돌아오고 나서야 내가 괜히 이상한 상상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한 번 더 군인 출신인 진정우의 자제력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도 실감했다.그는 단순히 나를 씻겨준 것뿐이었다. 말 그대로 그냥 깨끗하게 씻겨준 것.이미 그의 능력을 확인했지만 그래도 승부욕이 발동해 장난스럽게 말했다.“진정우, 너 혹시... 안 되는 거 아니야?”이 말은 남자에게 치명적인 모욕이다. 어지간한 남자는 이런 말을 듣고 참을 수 없겠지만 진정우는 보통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내 어깨를 가볍게 누르며 말했다.“얌전히 있어. 그리고 더 이상 애쓰지 마. 아무 소용 없으니까.”내 속마음을 꿰뚫어 본 듯한 그의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살짝 상처받았는데...”나는 일부러 힘없이 실망한 척하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그러자 그가 이불을 살짝 당겨 내 얼굴을 드러내며 내 볼을 살짝 문지르며 말했다.“내가 안 되는 게 아니고 네가 날 끌어당기지 못하는 것도 아니야. 단지, 내가 널 다치게 할까 봐 조금 더 기다리는 거야.”그의 말에 내 얼굴이 더 붉어졌다.“그럼 내가 너랑 가까워지기만 하면 다칠 것 같으면 너 평생 나한테 손도 안 댈 거야?”그는 입술을 살짝 움직이며 말했다.“응, 참아야겠지.”“...”나는 다시 이불을 덮어버렸다. 그러자 그는 이불째 나를 품에 안았다.“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야.”그의 말에 내 얼굴이 더 뜨거워졌다. 그는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며 부드럽게 말했다.“조금만 쉬어. 나 샤워하고 올게.”분명 찬물 샤워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차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찬물 샤워하러 간다.”“...”정말 원칙 하나는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다. 자신이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나를 상처 주지 않으려는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나는 그가 돌아서는 모습을 바라보며 불렀다.“진정우.”“응?”“너, 진짜 최고야.”그리고는 창피해서 혀를 쏙 내밀고 이불 속으로 숨었다. 그러자 그가
진정우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는 내가 모든 원칙을 포기해도 괜찮은 사람이니까.”그는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평범하게 말했지만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그 자체로 깊은 사랑을 담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직접 꺼내지 않아도, 문장 하나하나가 사랑이었다. 나는 코끝이 찡해졌고 전을 먹으며 입안 가득 찬 상태로 웅얼거렸다.“진정우, 이리 와봐.”“왜?”그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오라면 오라니까.”나는 괜히 고집을 부렸다. 그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와 앉았다. 소파에 앉자마자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는 잠시 놀란 듯 멈췄고 내가 말했다.“네 어깨에 기대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아.”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부드러운 웃음소리에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진정우가 나를 침대에 눕히며 물었다.“오늘 여기서 잘까, 아니면 네 방에서 잘까?”“여기서 잘래!”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문득, 밤마다 푸쉬업을 하고 찬물 샤워를 하던 그가 떠올랐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근데 오늘 밤에는 푸쉬업 금지야.”그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일부러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그 얘긴 다시 꺼내지 마.”나는 그의 품에 안기며 그의 허리를 살짝 감쌌다.“안 하면 안 꺼낼게.”진정우의 목젖이 한 번 크게 움직였다.“장난치지 마.”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못 참겠어?”나는 한층 대담하게 물었다. 진정우는 내 허리를 조심스럽게 잡으며 말했다.“장난은 이제 그만. 그리고 나를 더 자극하지 마.”마지막 말은 거의 속삭이듯 낮아진 목소리였다.“너도 원하고 있잖아.”나는 점점 더 직설적으로 말했다.“지원아...”그는 나의 손길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의 티셔츠 끝자락을 잡아 올리며 안으로 파고들었다.“지원아.”그의 목소리는 완전히 잠겨 있었다. 나는 그의 귀에 바짝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난 이제 다 나았어.
이 상황, 얼마나 민망했을지 상상이 간다. 물론 진정우는 예외였다.“잠시만요.”진정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나를 소파에 앉혔다. 그는 바로 자리를 뜨지 않고 천천히 물티슈를 꺼내 내 손을 닦아주었다.“천천히 먹어. 죽이 좀 뜨거우니까 급하게 먹지 말고.”문가에 서 있는 강진혁은 들어오기도, 물러서기도 난감해 보였다. 그 어색한 분위기가 나까지 불편하게 만들었다.“내가 알아서 먹을게.”내 말은 진정우에게 얼른 강진혁을 챙기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진정우는 자리를 뜨기 전에 모든 음식 포장을 풀고 식기를 내 앞에 정갈히 놓아주었다.문가에 서 있던 강진혁은 그야말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애정 행위를 강제로 목격한 셈이었다.아마 나를 짝사랑하는 그의 입장에선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강 실장님, 무슨 일이 신가요?”진정우는 문가로 걸어가며 강진혁에게 물었다.강진혁은 병실 밖으로 나갔고 그가 진정우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나는 듣지 못했다.진정우는 약 3분 후에 돌아왔는데 그의 평온한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그가 표정을 드러내지 않자 궁금증이 더해졌다. 그래서 나는 죽을 먹으며 물었다.“무슨 일이야?”“별일 아니야.”그의 대답은 꽤 건조했다. 아마도 그 자신도 느꼈는지 덧붙였다.“나를 스카우트하려고 하더군.”“스카우트? 어디로? KS그룹?”강진혁은 아직 총괄 감독에 불과하다. 스카우트 같은 건 인사 부서나 그룹 회장이 해야 할 일 아닌가?혹시 이미 강유형의 자리를 대신할 준비를 하고 있는 걸까?만약 그렇다면, 아까 그가 내게 한 말은 다 무슨 뜻이었을까?내게 심리적 준비를 시키려는 걸까, 아니면 나를 떠보려는 걸까?“어디로 간다는 얘기는 없었고 그저 내 생각을 물어봤어.”진정우는 덤덤하게 답하며 의자에 앉았다. 나는 죽을 휘휘 저으며 물었다.“뭐라고 대답했는데?”“고려하지 않는다고 했어.”그의 대답은 직설적이고 단호했다.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왜 웃어?”“너무 솔직하고 귀여워서.”칭찬을 듣자
“오빠, 강유형은 성인이에요. 본인이 한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죠.”나는 솔직하게 내 생각을 말했다.강유형을 회사에서 내보내든, 관계를 끊든, 그건 전부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나도 알아. 하지만 아버지랑 그렇게 싸우는 걸 보니 속이 타더라. 그리고 그가 회사에서 나가면 회사에도 영향이 클 거야.”강진혁은 이유를 설명했다. 나는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오빠가 있잖아요?”그의 눈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지원아, 난 한 번도 회사를 관리할 생각을 해본 적 없어. 그러지 않을 거였으면 애초에 회사를 떠나지도 않았겠지.”그가 진심인지 아닌지는 본인만 알겠지만 나는 굳이 따지지 않았다.다만 내 생각을 덧붙였다.“회사의 일은 삼촌께서 알아서 계획하고 계실 거예요. 강유형이 떠난다고 해서 회사가 멈추는 건 아니죠.”나는 이성적으로 말하며 마지막에 한 마디를 더했다.“세상은 누구 없어도 돌아가게 돼 있어요.”강진혁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하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내가 생각이 짧았던 거야.”“오빠, 아마 너무 걱정되니까 그런 거겠죠.”나는 그의 체면을 세워주는 말을 덧붙였다.강진혁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지원아, 네가 4년 전과는 정말 많이 달라졌구나.”4년 전?그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4년이라는 시간은 아이도 어엿한 청소년으로 성장할 만큼 충분한 시간이다.“그걸 성장이라고 하죠.”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강진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맞아. 네가 정말 많이 컸다, 우리 꼬마 지원이.”그의 말에 가슴 한쪽이 찡했다.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내가 강가에 들어왔을 때, 강유형과 강진혁은 종종 나를 이렇게 부르며 장난스럽게, 때로는 애정을 담아 나를 놀리곤 했다.그런데 그 말을 들은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오빠, 이런 문제는 본인들이 알아서 해결하게 놔두세요. 너무 관여하면 오히려 안 좋아요.”그의 ‘꼬마 지원이'라는 말에 잠시 감정이 흔들렸지만 나는 결국 한마디 덧붙였다.강진혁은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