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130화

작가: 꽃길
“술 드셨어요?”

진정우는 몇 초간 침묵하다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해줄 거예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어디 계세요?”

진정우 역시 답하지 않고 반문했다.

“됐어요. 대답은 알겠네요.”

나는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진정우가 나를 불렀다.

“지원 씨, 지금 어디예요? 집이에요 아니면 밖이에요?”

그의 목소리에는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내 마음속 억눌려 있던 감정이 한순간에 폭발했다.

“정우 씨가 뭔데요? 뭔데 저를 신경 써요? 내가 어디에 있든 내 마음이에요 나...”

갑자기 안리영이 다가와 내 폰을 빼앗듯이 받았다.

“진정우 씨, 안심하세요. 지금 지원이 저희 집에 있어요. 저는 지원이의 절친이에요.”

안리영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부탁할 땐 얌전히 말해야지.”

나는 안리영을 밀며 그녀와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때 진정우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내일 술이 깨면 다시 얘기합시다.”

그가 전화를 끊었다. 나는 멍하니 안리영을 바라봤다.

“정우 씨는 내가 취한 줄 아네.”

안리영은 웃음을 터뜨렸다.

“진정우는 네가 지금 정신이 온전하지 않아서 내일이면 말을 번복할까 봐 그런 거야.”

나는 술에 취했지만 그렇게까지 취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가 거절하는 또 다른 방식인 듯했다. 내가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직접 말했던 기억이 있을 테니 이제는 내가 장난을 치거나 그에게 복수하려고 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이 술자리가 이어진 후 나는 다음 날 아침 안리영이 언제 출근했는지도 몰랐고 시끄러운 휴대폰 소리에 간신히 눈을 떴다.

“여보세요?”

나는 번호를 확인도 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윤 팀장님, 지금 놀이공원으로 좀 와줄 수 있나요?”

고준석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고 비서님, 저 퇴사한 거 모르세요? 일이 있으면 강진혁 씨나 강 대표님께 연락하세요.”

“윤 팀장님, 저는 꼭 윤 팀장님을 찾아야겠어요.”

고준석의 고집에 웃음이 나면
잠긴 챕터
GoodNovel에서 계속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관련 챕터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131화

    “뭐라고요?” 나는 충격을 받았고 이어서 욕이 튀어나왔다. “정신 나간 거 아니에요?” “윤 팀장님, 강 대표님이 요즘 정말 좀 미친 것 같아요.” 고준석의 말에 나는 바로 이해했다. 그동안 예복이나 반지를 예약하는 등의 일들도 아마 그가 고준석에게 지시한 것이리라. “강유형은 도대체 뭘 하려는 거예요? 저를 역겹게 만들려는 건가요?” 나는 화가 나서 물었다. 고준석은 잠시 침묵했다. “누님, 저도 강 대표님이 뭘 하려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한 가지는 알 것 같아요. 강 대표님도 누님을 잃고 싶어 하지 않아요. 정말로 누님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고준석 씨”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다른 사람이야 뭐 그렇다 쳐도 당신마저 그렇게 말하다니. 고준석 씨는 진짜 강유형이 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해요?” 고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준석 씨, 강유형이 미쳐 가든 말든 저는 그 사람 곁에 있지 않을 거예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윤 팀장님, 사실 저는 그때부터 자책하고 있었어요. 그 사건이 없었다면 누님과 강 대표님이 이렇게까지 멀어지지 않았을 텐데요.” 고준석은 그 사건에 대해 아직도 자책하고 있었다. “고준석 씨, 오히려 저는 당신한테 고마워요. 만약 그 일이 없었다면 저는 결심하지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알아둬요. 제가 강유형과 헤어진 이유는 그 사건 하나 때문이 아니에요. 얼어붙은 감정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거든요. 당신도 이건 잘 알잖아요.” “하지만 결국 마지막 결정적 한 방을 제가 도운 셈이죠...” 고준석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정도로 말했으니 고 비서님도 더 이상 자책하지 마요. 만약 강유형이 오늘 비서님이 한 일로 해고한다면 그냥 떠나요. 세상은 넓고 비서님 능력이라면 더 나은 곳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나는 그를 위로했다. “윤 팀장님은 혹시 새로운 직장 찾으셨나요?” 고준석이 물었다. “제 능력을 믿고 있죠. 직장 찾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요.” 나는 분명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132화

    그는 내게 반한 걸까? 이 남자는 겉모습만큼이나 마음도 강직해서 미모 따위에 흔들릴 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남자는 다 똑같다는 말이 역시 맞나 보다. 이미 내가 진정우를 흔들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더 요염하게 웨이브 진 긴 머리를 넘겼다. 그러자 진정우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고 표정이 차가워졌다. 그의 감정 변화를 뭐 때문인지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굳이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진정우 씨, 제 부탁 들어줄 건가요?” “뭐라고요?” 그는 내 몸에서 시선을 떼며 물었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내가 술 취한 게 아니라 그가 취한 거였나? 아니, 알고 있었다. 그는 그냥 일부러 그러는 거였다. “제 남자친구가 되어 줘요, 임시로.” 어젯밤 했던 말을 다시 반복했다. 진정우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먼 곳을 응시했다. 나도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오늘의 대관람차가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있었다. 고준석이 강유형이 내게 청혼하려고 한다고 한 게 떠올라서 혹시 대관람차에서 청혼하려는 건 아닐까 싶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대관람차에 뭐가 있는지 살펴보려던 그때 진정우가 입을 열었다. “임시라는 게 무슨 의미죠?” “그러니까 잠시 동안만 제 남자친구 역할을 해달라는 거예요. 강유형 대표의 미친 짓이 끝나면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이 말을 하고 나니 왠지 스스로가 너무 이기적인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다시 설명했다. “우리가 진짜 사귀는 게 아니라 그냥 강유형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 둘이 교제 중인 것처럼 연기하는 거예요.” “제가 왜 그런 일을 해줘야 하죠?” 진정우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사실 이런 제안 자체가 창피했다. 어젯밤 안리영의 부추김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강유형의 미친 행동이 아니었다면 나도 이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바람이 불어 내 얼굴에 흩날린 머리카락을 손으로 뒤로 넘기며 대답했다. “제 곁에 당신만큼 적합한 사람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133화

    나는 웃으며 말했다. “진정우 씨, 저는 분명하게 얘기했어요. 우리의 목표가 다르다면 그만둬요.” “하지만 당신은 남자친구가 필요하잖아요?” 그가 물었다. “맞아요. 하지만 당신 같은 사람은 부담스럽네요.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요.” 내 말에 그의 눈빛이 한층 깊어졌다. 그가 나를 붙잡거나 타협할 거라 생각했지만 내가 나를 과대평가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녕히 계세요. 제가 무례했네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차를 몰고 떠나면서 마치 도망치는 기분이 들었다. 진정우의 시야에서 벗어난 것 같아 차를 멈추고 숨을 고르며 어젯밤 술기운에 했던 충동적인 행동을 후회했다. 아무나 부탁할걸. 하다못해 신지태를 남자친구 역할로 부탁하는 게 나았을 텐데 괜히 진정우를 끌어들였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꽃집에 들러 꽃다발을 하나 사서 부모님 묘지로 갔다. 그동안 명절이나 부모님 기일 외에는 잘 오지 않았는데 최근 들어 어릴 적 꿈에서 자주 부모님을 만나다 보니 그리워서 한 번 찾아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도착해 보니 묘비 앞에 이미 꽃다발 하나가 놓여 있었다. 꽃이 시든 걸 보니 누군가가 최대한 보름 안에 다녀간 것 같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 십 년이 넘었는데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나 외엔 강 씨 아버지와 강 씨 어머니뿐이었다. 혹시 그분들이 다녀가신 걸까? 그렇다면 왜 강 씨 어머니는 말하지 않으셨을까? 의아해하면서도 내가 강유형과 갈등을 빚고 있는 걸 생각해 보면 강 씨 어머니가 잊어버렸거나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시든 꽃을 한쪽으로 치우고 내가 가져온 꽃을 놓았다. 묘비에 새겨진 부모님의 젊은 얼굴을 보니 가슴이 아리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 아빠, 저 보고 싶으신가요? 요즘 자주 꿈에 나타나세요.” “엄마, 아빠, 저 강유형과 헤어졌어요. 죄송해요. 엄마 아빠와 강유형 부모님의 소원대로 강유형과 결혼하지 못했어요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134화

    “며칠 후면 네 삼촌 생일이잖아. 올 거지?” 강 씨 어머니의 말에 순간 멍해졌다. 이제 곧 강 씨 아버지 생신이 다가온다는 걸 떠올렸다.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잊지 않을 것이다. 강 씨 가문 가족들의 생일은 모두 알람에 설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강 씨 가문에서 지내며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나는 항상 미리 준비해왔다. 비록 의지해 사는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항상 조심스럽게 지냈다. 혹여 어디선가 부족하게 보이면 나에 대한 마음이 달라질까 봐 신경 썼다. 순간 멍하니 대답하지 않자 강 씨 어머니가 다시 말했다. “지원아, 알다시피 우리는 늘 너를 딸처럼 여겨왔어. 매년 생일에 네가 보내준 선물과 축하를 받았는데 이번에 네가 안 오면 삼촌이 많이 서운해할 거야.” 사실 나는 가지 않으려 했지만 선물은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렇게 물으니 곤란했다. 특히 최근 강유형이 미친 사람처럼 구는 걸 생각하면 내가 강 씨 가문에 가면 그가 갑자기 날 데려가려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렇다고 안 간다고 말하면 강 씨 어머니가 또 설득할 게 뻔했다. 그래서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 “당연히 갈 거예요, 이모.” “그럼 다행이다. 네가 안 오면 삼촌이 생일을 제대로 보내지 못할까 봐 걱정했어.” 강 씨 어머니의 말은 일종의 압박이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강 씨 어머니는 다시 물었다. “강유형이 한 짓은 우리가 이미 혼내고 나무랐어. 더는 너에게 못된 짓을 하지 않았지?” 그 말을 듣자 웃음이 나왔다. 강유형이 최근 벌인 짓을 그들이 모른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들이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걸까? 그들이 나에게 정말 잘해주었기 때문에 악의적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요. 그러지 않았어요.” 사실 있었더라도 강 씨 어머니는 전화를 통해 나를 달래기 위해 강유형을 꾸짖고 벌을 주겠다고 약속할 뿐이었다. 그러나 강유형은 이미 제멋대로인 성격이라 누가 말려도 막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강 씨 어머니가 아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135화

    “그래? 그럼 누굴까? 네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도 꽤 되었고 예전 친구들도 이미 부모님을 잊은 지 오래야. 그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러 올 리가 있겠니?” 강 씨 어머니의 말에 가슴이 아려왔다. 사람이 떠나면 차가워진다는 말이 딱 맞았다. 예전에는 그다지 실감하지 못했지만 강 씨 어머니가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지원아, 혹시 누군가가 실수로 잘못 놔둔 걸 수도 있잖니?” 강 씨 어머니는 그렇게 내게 덧붙였다. 나는 묘비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사진도 있고 이름도 있는데 실수로 잘못 올 수 있을까? 그건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말 같았다. “아마도 그렇겠죠.” 나는 강 씨 어머니에게 맞장구쳤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계속해서 말할 것이 뻔했다. 이제 강 씨 어머니 가족이 보낸 것이 아니란 걸 확신했고 부모님 옛 친구들도 아니라면 이 꽃에는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나는 방법을 찾아 알아봐야 했다. “지원아, 괜한 걱정 말고 내가 나중에 삼촌에게 물어볼게. 혹시 옛 친구 중 누군가가 갔는지.” 강 씨 어머니는 나를 달래주려 했다. 나는 대충 대답하고 강 씨 어머니는 다시 한번 강 씨 아버지 생일에 꼭 오라고 당부한 후 전화를 끊었다. 나는 손에 든 꽃을 사진으로 찍고 SNS에 올리며 ‘이건 누구의 추억일까?'라고 적었다. 그러자 안리영이 내 게시물을 보고 전화했다. 요즘 그녀는 정말 한가한지 SNS를 볼 시간도 있는 모양이었다. “무슨 상황이야?” 안리영이 물었다. 나는 상황을 설명하며 중얼거렸다. “정말 누군지 궁금해.” “너 진짜 강 씨 가문에 갈 거야? 그건 말 그대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거잖아.” 안리영은 내 얘기를 듣고 꽃보다는 그 사실에 더 주목했다. “안 가면 이상하고 가면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돼.” 나도 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남자를 한 명 데리고 가야 해. 혹시 문제가 생겨도 너를 지켜줄 수 있고 강유형과 강 씨 가문 사람들의 미련도 끊어놓을 수 있을 거야.” 안리영은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136화

    저녁 무렵 카페에서 내가 두 번째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쯤에서야 소개팅 상대가 도착했다. 그는 비대한 체형도 아니고 머리가 벗어진 것도 아니었으며 청량한 물빛 셔츠를 깔끔하게 입고 있어 전혀 기름지지 않았다. 프로필 사진과도 잘 일치해서 다행히 속은 느낌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지각은 호감도를 크게 떨어뜨렸고 다행히도 진짜 연애를 할 생각이 아니라 단지 강유형을 피하기 위해 잠시 그를 빌리려는 거였기에 그러려니 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남자는 예의 바르게 사과했다. “괜찮아요. 사실 소개팅이 아니라 전 남자친구를 빌리고 싶어서 나왔거든요.” 나는 솔직하게 내 의도를 밝혔다. 남자는 갑자기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남자친구를 빌린다고요?” “네, 진지하게 연애를 하려는 건 아니지만 현재 상황상 급히 남자친구가 필요해요.” 나는 상세히 설명했다. 남자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가 기분이 상한 건가 싶어 한마디 덧붙였다. “물론 비용을 지불하겠습니다.” “아, 돈이 많으신가 보네요.” 남자는 미세하게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돈에 흥미를 느끼는 반응이 약간 불쾌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일이 잘 풀릴 수도 있었다. 나는 그의 말을 따르지 않고 곧바로 제안을 꺼냈다. “비용은 일당으로 드릴 수도 있고 매달 드릴 수도 있습니다. 얼마가 적당할지 말씀해 주세요.” “그럼 아가씨는 얼마나 지불할 생각이신가요? 그리고 이 렌털은 단순히 겉모습만 필요한 건가요 아니면 전부 포함인가요?” 그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남자는 경험이 많고 이런 일을 여러 번 해봤다는걸. 또 내가 남자친구 렌털을 이용한 첫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냥 겉모습만입니다.” 그는 전부 포함하길 원하지만 내가 허락할 리 없었다. “만약 친밀한 접촉이나 신체 접촉이 필요하면 어떻게 하죠?” 남자는 프로처럼 물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이쪽 분야에서 일해 본 분이신 것 같네요. 이전에는 어떤 조건으로 하셨는지 말씀해 주시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137화

    “그런 일은 많지 않아요. 사실 소개팅은 여전히 뜻이 맞는 짝을 찾기 위한 게 주요한 목적이죠.” 그의 말을 들으니 정말 헛웃음이 나왔다. 뜻이 맞는 짝이라고? 아마 나와 같은 방식으로 돈을 벌며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싶은 것뿐일 텐데. 다들 요즘 취업이 어렵다고는 하지만 조금만 머리를 쓰면 무자본으로도 돈을 벌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다. “정말 남자친구로 빌리고 싶은 건지 아니면 한 번 만나보면서 교제할 생각은 없는 건지 궁금한데요?” 남자는 다시 내게 물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커피를 우아하게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일반적으로 영리한 여성들은 교제를 선택하죠. 그러면 비용을 지불할 필요 없이 맞지 않으면 그냥 헤어지면 되니까요. 모두 그렇게 하면 당신은 손해 아니에요?” 나는 커피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나 기회를 주진 않죠. 상대의 조건도 보고 선택할 사람만 선택해요.” 그의 의도는 이해했다. 나를 꽤 괜찮은 상대로 보고 있으니 무비용으로 한 번 시험해 볼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다. “아까 말한 서비스 요금에 VIP 할인 혜택 같은 건 없나요?” 솔직히 그가 부른 가격은 꽤 비쌌다. 손을 잡는 것만 해도 하루에 5만 7천 원이라니 강유형 앞에서 연기를 하려면 필수적일 텐데. “없습니다.”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협상 불가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신 조건은 다 이해했어요. 생각 좀 해보고 연락드릴게요. 그동안 다른 일 받으셔도 괜찮고요. 혹시 적합한 사람이 있으면 이건 거절하셔도 됩니다.” 이 말을 하면서 문득 이게 소개팅이 아니라 완전히 사업 상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진심으로 협력하고 싶습니다.” “조건이 제 기준에 맞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좀 만나보고 결정할게요. 우수한 지원자를 고르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세요.” 나는 비즈니스 협상에서 숙련된 태도를 유지하며 말했다. “좋습니다. 좋은 소식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138화

    아무 대답도 없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이때 물러설 수 없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다시 한번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도대체 누구야?” “저예요!” 세 글자가 어둠 속에서 울렸다. 이어지는 발소리와 함께 설명이 들려왔다. “오늘 저녁 카페에서 당신이 만난 소개팅 상대예요.” 그 남자라니? 나는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한 번 마주쳤을 뿐인데 그가 나를 따라왔다니 오히려 더 무서웠다. 복도에 불이 나가 어둑어둑했고 겨우 창문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 덕분에 바로 앞 몇 걸음 정도만 볼 수 있었다. 아직 그 남자가 계단을 다 오르지 않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손에 꼭 쥔 열쇠를 더 세게 쥐고 방어 태세를 갖추며 물었다. “왜 날 따라왔어요?” “오해하지 마세요. 나쁜 의도는 없어요. 당신 같은 여자가 이렇게 늦은 시간에 혼자 다니는 건 위험하잖아요.” 그의 말이 끝나자 그제야 남자의 모습이 어렴풋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설명에 황당함이 치밀었다. 이렇게 나를 깜짝 놀라게 해서 내가 안전해진다고? 우리는 그저 한 번 본 사이였고 계약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는 나를 따라왔고 보호해 주겠다니... 내가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런 말을 믿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가 이미 내 집까지 따라왔으니 그를 자극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었다. 그래서 최대한 온화하게 그를 달래며 물러나게 하기로 했다. 나는 속으로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고맙네요. 신경 써줘서. 저는 이제 다 왔으니까 그만 돌아가세요.” 내가 말을 하는 사이 남자는 계단 모퉁이를 돌아 나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목이 좀 마른데 물 한 잔 주실래요?” 그의 유치한 핑계를 듣고 속이 들끓었다. 나는 손에 쥔 열쇠를 더욱 단단히 쥐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너무 늦었어요. 불편하네요.” 그는 계단을 한 걸음 더 올라오며 말했다. “우리가 사귀려고 하는데 뭐가 그렇게 불편해요?” 그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내 마음속 불안이 극

최신 챕터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624화

    남자는 쉽게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특히, 여자 앞에서는 더더욱.하지만 지금, 나는 허진호가 내 앞에서 눈가가 붉어지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내는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그가 그렇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먹먹했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그의 사무실을 나와, 그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충분히 진정우를 기릴 수 있도록 공간을 내어주었다.이 회사가 진정우의 것이라고 했지만 공식적인 사장은 허진호였다.그만큼 두 사람 사이의 신뢰가 깊었고 진정우는 그를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겼다.그런데 이제, 진정우가 사라졌다. 그를 기다리던 허진호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의 슬픔도, 나 못지않을 것이다.나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진정우의 연구실로 향했다. 그는 연구개발을 했기에 직접 실험을 진행하는 일이 많았고 책상 위에는 각종 실험 도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하지만 그 많은 장비에도 불구하고 연구실은 전혀 어수선하지 않았다.나는 천천히 다가가 책상 위에 놓인 실험 기록 노트를 집어 들었다. 빼곡하게 적힌 숫자들, 그리고 그가 직접 쓴 강직한 글씨들. 손끝으로 글자를 따라가다가, 다시 가슴이 아려왔다.모든 것이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그는 더 이상 여기에 없었다.그가 남긴 것들은 내 손에 닿지만 정작 그는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 그가 있었던 흔적이 이렇게나 선명한데 그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나는 자리로 앉아 그의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평소 그가 쓰던 펜, USB, 블루투스 이어폰, 그리고 기록 노트가 있었다.그리고 눈에 띄는 투명한 상자 하나가 있어 나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꺼내 열어보았더니 안에는 묘하게 낯선 질감을 가진 가느다란 팔찌가 들어 있었다.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금속이나 은이 아니라,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재질이었고 잠금장치가 없었다. 혹시 빠진 걸까 싶어 상자 안을 뒤적이다가 몇 개의 미완성 부품과 함께 접혀 있는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623화

    신입 사원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씩씩하게 대답했다.“그럼요! 윤 부장님, 밥 사주세요.”그 직설적인 대답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좋아, 그럼 오늘 저녁에 다 같이 ‘성해 반점’에서 모이자. 내가 쏠게.”“정말이죠?”“당연하지.”“와! 윤 부장님 최고!”신입 사원은 신나서 뛰어나갔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별것 아닌 대화였지만 회사 분위기가 한결 밝아진 것 같았다.가방을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본 후, 나는 허진호가 있는 사무실로 향했다.“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는 책상 가득 쌓인 서류에 파묻혀 있었다. 누가 들어왔는지도 모른 채 바쁘게 사인을 하고 있었다.나는 그의 책상을 흘끗 바라봤다. 거기에는 내가 맡았던 부서의 서류들도 섞여 있었다.‘역시, 내가 아무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건 이 사람이 뒤에서 버텨주고 있었기 때문이구나.'내가 없는 동안, 모든 업무를 그가 대신 처리했을 것이다.“허 대표님, 이렇게 혼자서 모든 걸 떠안고 일할 거면 차라리 사람을 더 뽑는 게 낫지 않아요?”내 말을 들은 허진호는 순간 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그는 나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세상에, 윤 부장님! 드디어 돌아오셨네요! 저 정말...”그는 말을 멈췄지만 나는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내가 회사로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하지만 만약 내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왜 새로운 직원을 뽑지 않았던 걸까? 혹시 내 퇴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허 대표님, 저 복직할 수 있는 거죠?” 나는 직설적으로 물었다.“당연하죠! 무조건! 그런데 복직 안 하면 설마 퇴사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절대 안 돼요. 회사 규정상 최소 1년은 근무해야 사직이 가능하다고요!”그의 말에 나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계약서에 그런 조항이 있었어? 나 왜 몰랐지?’“이건 말도 안 되는 규정이에요.”나는 장난을 치며 말했다.“서명했으면 끝난 거예요. 이제 와서 불평하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622화

    나는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강유형을 바라봤다.“네가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난 이미 알고 있으니까.”강현우의 눈빛이 깊어졌다.“누구라고 생각하는데?”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몸을 일으키며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다.“지원아, 설마 형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형이랑 만나려는 것도 결국 진정우의 복수를 위해서야?”오랫동안 나를 사랑했던 사람답게, 내 속마음을 읽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진혁 오빠 아니야? 그렇다면 진짜 배후가 누구인지 알려줘.”내 질문에 그는 잠시 말을 삼켰다가 조용히 대답했다.“지원아, 형은 아니야. 사실 나도 정확한 배후가 누군지는 몰라. 그때 네게 말했던 건 그저 추측이었어.”나는 조급해하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아니라면 더 좋지. 그렇다면 내가 진혁 오빠를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겠네.”강현우의 표정이 굳어졌다.“지원아…“나는 깊은숨을 내쉬며 담담하게 말했다.“우린 10년을 알고 지냈고 4년 동안 사랑했어. 그리고 나는 진정우를 사랑하게 됐지. 나는 여러 가지 사랑을 경험했어. 짝사랑이 이루어지는 설렘도, 운명처럼 빠져드는 감정도. 하지만 결국 사랑이란 건 너무 피곤한 감정이더라. 이제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선택하고 싶어.”“좋아, 네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건 이해하지만 형은 절대 안 돼.”강현우는 강하게 반대했고 나는 미소 지으며 되물었다.“왜 안 되는데? 이유를 말해봐.”그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지원아, 이유 모를 리 없잖아. 꼭 내가 말해야 해? 내 형이잖아. 너는 한때 내 약혼녀였고. 둘이 같이 있으면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볼 것 같아? 우리 가족은 또 어떻게 보겠어? 나더러 어떻게 널 마주하라는 거야?”나는 잠시 침묵했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그럼 네 체면과 감정을 위해, 난 내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는 거야?”그는 내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마음의 준비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621화

    만약 강유형이 정말 이대로 다리를 잃게 된다면 내가 그에게 진 빚이 너무 클 것이다.하지만 그와 더 이상 복잡하게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저 할 수 있는 한 그를 설득해 제대로 치료를 받게 하려는 것뿐이었다.“그렇게 심각하지 않아. 몇 번 더 치료받으면 괜찮아질 거야.”그는 창백한 얼굴로 힘없이 말했고 목소리조차 기운이 없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그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그를 더 설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강유형이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네가 돌아왔으니, 내 상처도 금방 나을 거야.”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지만 그는 곧장 화제를 돌렸다.“신지태가 널 몇 번이나 찾았어. 내가 말리지 않았으면 실종 신고라도 했을걸?”나는 한동안 연락을 끊고 지냈다. 그동안 나를 걱정한 사람들이 많았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지태 오빠 오늘 와?”나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모르겠어. 네가 왔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뛰어올걸?”그는 핸드폰을 집어 들며 신지태에게 연락하려 했다.그러나 팔을 움직이는 순간, 상처에서 뻐근한 통증이 밀려온 듯 그는 순간적으로 멈췄다. 나는 그의 감싼 팔을 조심스레 붙잡으며 말했다.“굳이 전화할 필요 없어. 내가 돌아왔으니, 곧 만나겠지.”그는 통증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의사 불러줄까?”그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적셨다.“물 좀 줘.”나는 컵을 건네주었고 그는 두어 모금 마신 후에야 얼굴이 조금 나아 보였다.“형은 너 보러 왔어?”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번 왔었어.”“어제 돌아오면서 우연히 마주쳤어.”“어디서?”“샤부샤부 집에서.”강유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의 반응이 흥미로워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나랑 참 인연이 깊은 것 같아.”그는 내 말을 단숨에 이해했는지,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지원아,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돌려 말하지 말고 그냥 말해.”나는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620화

    “지원아, 돌아왔구나?”강진혁이 나를 보며 살짝 놀란 듯, 그리고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네, 오늘 막 도착했어요.”나는‘오늘’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대답했고 안리영도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오자마자 이렇게 마주치는 거 보면 진짜 우연인가 보네요.”강진혁은 그녀의 말에서 숨은 의미를 느꼈는지, 위층을 가리키며 덤덤하게 말했다.“고등학교 친구들이 며칠 전부터 약속 잡고 여기서 모이기로 했어.”마침 누군가 그를 불렀다.“진혁아, 우리 먼저 갈게.”그는 멀리 있는 친구들에게 손짓하며 배웅한 뒤, 다시 우리를 바라보며 물었다.“더 필요한 거 있어? 주문할 거 있으면 내가 계산할게.”그의 말투는 자연스러웠지만 분명 의도적으로 챙기려는 느낌이 들었다.“이미 결제했어요.”안리영이 대신 대답했다. 그러자 강진혁은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지원아, 좀 쉬고 나면 집에 와서 밥 한 끼 하자. 부모님이 네 걱정을 많이 하셔.”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조만간 먼저 연락할게요. 그리고... 휴링턴에서 신세 많이 졌어요.”굳이 ‘휴링턴’을 언급한 이유는, 그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서였지만 그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짧게 대답했다.“그래.”그는 안리영에게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 우리는 유리창 너머로 그가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그 순간, 안리영이 내 발을 슬쩍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물었다.“뭐야, 강진혁 아직도 너 못 잊은 거 아냐?”나는 시선을 다시 테이블로 돌리며 끓어오르는 국물 속에서 부글거리는 재료들을 바라보았다.“리영아, 나는 지금... 강진혁이 이 모든 일의 배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뭐라고?”그녀는 놀라서 젓가락을 들던 손을 멈췄다. 나는 휴링턴에서 발견한 것들에 대해 조용히 이야기했다.“앞으로 내가 하는 일이 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해해 줘.”안리영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이상하게 보인다니, 도대체 뭘 하려고?”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619화

    나는 의료 서적을 넘기며 한 장 한 장 읽어 내려갔다. 문외한인 내가 이런 책을 본다는 게 쉽지 않았지만 지난 한 달 동안 고요한 시간을 보내면서 마음이 차분해져서인지 의외로 집중이 잘 됐다. 어쩌면 이제야 비로소 내 마음이 가라앉았다는 증거일지도 몰랐다.얼마 후, 안리영이 수술을 마치고 돌아왔다. 문 앞에서 나를 보던 그녀는 몇 초간 멈춰 서 있더니, 아무 말 없이 다가와 나를 꼭 안아 주었다.“돌아왔네.”진정우의 일을 나는 오직 안리영에게만 이야기했다. 진정우를 어디에 묻었는지 아는 사람도 그녀뿐이었다.나는 그녀의 어깨에 기대며 익숙한 소독약 냄새를 맡았다.“나, 갑자기 훠궈가 먹고 싶어.”“좋지! 당장 가자!”그녀의 대답에는 묘하게 들뜬 기운이 섞여 있었다. 어쩌면 그녀도 내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게 반가웠던 걸지도 몰랐다.그래, 나도 이제 다시 살아가야 했다. 진정우는 떠났지만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았다.식사를 하던 중, 문득 떠오른 듯 물었다.“강유형, 본 적 있어?”“그럼, 매일 보지. 악어한테 물린 이후로 계속 우리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어.”그녀의 말에 나는 젓가락을 멈췄다.“벌써 한 달이 넘었잖아? 아직도 치료 중이야?”“응. 상처가 아물질 않아서 계속 곪고 있대. 이미 몇 번이나 괴사한 살을 도려냈다더라.”그 말을 듣는 순간, 강유형이 악어에게 물렸던 장면이 눈앞을 스쳤다.“그 정도로 심각했어?”“직접 가서 볼래?”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나 때문이잖아.”안리영이 고기를 집어 내 그릇에 올려주며 말했다.“많이 먹어. 한 달 사이에 살이 너무 빠졌어.”“그래? 나 하루 세 끼 잘 챙겨 먹었는데.”나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진정우 곁을 지키는 동안에도 먹고 자는 것만큼은 철저히 지켰다.“그럼... 마음고생 때문인가 보네.”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나는 안리영을 보며 피식 웃었다.“넌 얼굴이 더 좋아진 것 같은데? 교수님이랑 잘 지내나 보네?”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618화

    나는 진정우를 고국으로, 그리고 우리가 함께 꿈꾸던 집으로 데려왔다.해가 지는 어느 저녁, 우리는 그가 노후를 함께 보내고 싶다던 그 땅에 그를 묻었다. 그렇게 하고도 쉽게 떠날 수 없어 나는 그의 곁에 꼬박 35일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다녀왔다.어릴 적 어머니가 이야기하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영혼은 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소중했던 사람 곁에서 머문다고. 흔히 말하는 35날이라는 기간 동안 말이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것을 믿고 싶었다. 그가 홀로 떠나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함께 있어 주고 싶었다. 그의 영혼이 완전히 떠난 후에야 나도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그동안 나는 세상과의 연락을 끊고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진소영이 그랬던 것처럼 책을 읽고 꽃을 따서 차를 우려 마시고 그림을 그렸고 그림 속에는 온통 진정우뿐이었다. 그를 그릴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강진혁의 방에 빼곡히 걸려 있던 내 초상화들이었다.아침과 저녁이면 그의 곁에서 혼잣말을 하듯 이야기를 나눴다.“진정우, 오늘 밤 꿈에라도 와서, 그때 못다 한 말을 마저 해줄래?”“진정우, 네가 너무 보고 싶어. 너를 안아보고 싶은데 이제는 만질 수도 없잖아. 그런 공허한 아픔이 날 미치게 할 것 같아.”“진정우, 오늘 길에서 다친 작은 새를 주웠어. 어미는 보이지 않더라. 내가 잘 키울 수 있을까?”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그의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가끔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마치 마지막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던 그의 손길처럼 느껴졌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침내 35번째 날, 나는 새로 딴 꽃을 들고 그의 곁을 찾았다.“진정우, 오늘이 네가 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날이야? 내일부터는 정말로 네가 없는 걸까? 나도 이제 돌아가야겠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마주해야 할 사람들을 만나야 해. 그리고...”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나는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널 함정에 빠뜨린 사람을 찾아야겠어.”그 순간, 바람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617화

    나는 무겁게 발을 떼며 앞으로 걸어갔다. 신지태가 나를 부축하며 문 앞까지 데려다주었지만 안으로 들어가기 전 이미 누군가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그 사람의 품에는 검은색 상자가 안겨 있었고 그의 얼굴에는 깊은 슬픔과 혼란이 서려 있었다. 나는 그 상자를 보는 순간, 숨이 멎었다.신지태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나를 더 단단히 부축했지만 그마저도 희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온몸의 감각이 무뎌졌다. 나는 다시 정신을 붙잡으려 애쓰며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다가 문 안쪽,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용설아를 한눈에 그녀를 보았다.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저 등 뒤로 느껴지는 깊은 절망과 슬픔만으로도 충분히 모든 걸 알 수 있었다.그 순간, 발이 땅에 박힌 듯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신지태도 함께 멈춰 섰고 우리 둘 다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잠시 후, 용설아는 천천히 몸을 돌렸고 그녀의 두 손 위에는 검은색 상자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대로 시야가 흐려지며 쓰러질 뻔했다.용설아는 내 앞까지 걸어와 조용히 말했다.“이건 진정우가 남긴 마지막 부탁이에요. 그가 원했던 대로, 지원 씨가 직접 그를 데려가 주세요. 두 분이 가장 좋아했던 그곳에 묻어달라고 했어요.”나는 그녀가 들고 있는 상자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지난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그와 함께 걸었던 들판, 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던 약속들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살자고 했던 말.그러나 그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나에게 마지막 부탁을 남겼다.그를 그곳에 묻어달라는 마지막 부탁 말이다.‘이건, 나보고 죽으라는 말이야?’나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상자를 노려보았다.“왜 나를 기다리지 않았어?”작은 상자 하나에 다 담길 리 없는 그를 떠올리며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왜... 기다려주지 않았어, 진정우?”“정우는 지원 씨가 그 순간을 직접 마주하지 않길 바랐거든요.”용설아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힘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정우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616화

    강유형과 신지태 오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고 그들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하게 물었다.“둘 다 몰라?”나는 머릿속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서도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그럼 내가 직접 찾아갈게...”그 순간, 신지태가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나를 붙잡았고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왜 그래?”“지원아, 이제 받아들여야 해. 진정우는... 더 이상 없어.”강유형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알아... 나도 알아.”그러면서도 어설프게 웃으며 덧붙였다.“그래서, 그를 보러 가려고 해. 조용히 곁에 있고 싶어서.”그 순간, 신지태의 손끝에 힘이 들어가면서 살짝 아프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내 팔을 더 강하게 움켜잡았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오빠, 너무 아파.”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지원아... 진정우는... 없어. 더 이상 볼 수 없어.”그 말에 나는 얼어붙은 듯 멈춰 섰고 눈앞이 흔들렸지만 나는 애써 강하게 말했다.“아니, 난 볼 수 있어. 그러니까 가게 해 줘.”“지원아!”신지태가 단호하게 나를 불렀지만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려 하며 애타게 말했다.“제발, 가게 해 줘.”그 순간, 강유형이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볼 수 없어. 그는 이미... 화장됐어.”그 순간, 내 손이 허공에서 멈춰 섰고 나는 서서히 강유형을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고 온몸이 얼어붙은 듯 머릿속이 텅 빈 느낌이었다.“강유형.”신지태 오빠가 낮게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여전히 내 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지원아... 진정해.”나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그 말이 거짓이길 바랐다.“그 말, 거짓말이지...? 진정우... 진짜 아니지?”신지태 오빠의 눈이 더 붉어졌다.“지원아, 울고 싶으면 울어.”나는 울고 싶지 않았다. 아니, 나는 믿고 싶지 않았다. 눈앞이 흐려지면서 몸이 떨렸고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