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정왕부(攝政王府).동상방(東廂房) 내 꽃무늬가 새겨진 침상 주위에 옷들이 널브러져 있었다.낙청연(洛清淵)은 몸을 일으켜 앉더니 침상 위의 난잡한 흔적을 확인하고는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햇빛이 빨간색의 흔적을 또렷이 비추고 있었다. 어젯밤 신방(新房)에 대여섯 명의 남자들이 쳐들어왔던 기억을 떠올리니 다시 한번 수치심과 모욕감이 울컥 치밀어올라 돌연 그녀를 견딜 수 없었고 굴욕으로 인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왜 우는 것이냐? 드디어 네 바람대로 섭정왕부에 시집왔으니 기뻐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서늘하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낙청연은 등골이 오싹했다.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려보니 의자 위에 정좌로 앉은 남자가 보였다. 그는 위엄 있으면서도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의 차가우면서도 냉담한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을 때 낙청연은 그의 시선이 칼이 되어 살을 에이는 것 같았고 온몸이 피 칠갑이 된 것 같았다.낙청연은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 폭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이내 가슴 부근이 꽉 막힌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왕야(王爺)… 줄곧 여기 계셨습니까?”남자는 덤덤한 어투로 말했다.“너와 내가 혼인을 올린 날인데 본왕이 여기 있지 않으면 어디에 있어야 하느냐?”그 순간, 낙청연은 마치 벼락을 맞은 것 같았고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어젯밤 신방에 쳐들어왔던 남자들과 도처에 남겨진 어지러운 흔적들에 그녀는 수치스러웠고 분했는데 그녀와 함께 첫날밤을 보내야 했던 남자는 그 방 안에서 밤사이 그 남자들이 어떻게 그녀의 옷을 찢어발겼는지를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왜입니까? 제가 그렇게나 미우십니까?”정신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낙청연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분통을 터뜨렸다.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는 첫날밤 하인들더러 그녀의 순결을 빼앗게 했고 그녀의 몸과 마음을 더럽혔다.낙청연은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고통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그녀는 어릴 때부터 그를 경모했었고 당시 태황태후(太皇太后)는 두 사람이 금동옥
촤악.차가운 물이 얼굴을 향해 날아왔고 낙청연은 힘겹게 눈꺼풀을 들었다. ‘난 죽었는데? 왜 아픔이 느껴지는 것이지?’어멈처럼 보이는 하인이 대야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면서 화가 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울고불고 소란 피울 생각은 마시옵소서. 왕야께서는 그런 수작에 넘어가시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제 주제를 알아야지, 감히 동생을 대신해서 혼인을 치르러 하다니요? 섭정왕부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닙니다!”등 어멈(邓嬤嬤)은 얼굴에는 노여움이 가득했다. 그녀는 원래 집으로 돌아가 늙은 어미를 모시려 했으나 염치를 모르는 왕비가 자결 시도를 하는 바람에 다시 돌아와 그녀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승상부의 아씨로서 살 것이지 이런 추접한 일이나 벌리다니, 차라리 죽어버리지.”머리 위로 욕설과 불평이 끊임없이 쏟아졌고 낙청연은 이 모든 게 낯설었다. 그녀의 것이 아닌 기억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어젯밤은 섭정왕과 낙월영의 혼인날이었다. 그러나 낙청원은 사랑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신부로 위장하고는 방 안에 미정향(迷情香)을 피워놓고 섭정왕의 아이를 가질 생각이었다.그런데 부진환이 결정적인 시각에 정신을 되찾았고 화가 나서 사람들을 대여섯 명 불러들였으며 낙청연은 깨어난 뒤 굴욕을 참지 못하고 절망스러운 마음으로 벽에 머리를 찧어 죽으려 했다.몸의 원래 주인은 그를 미치도록 사랑했었고 그녀의 몸에서 그녀의 괴로움과 마지못한 심정을 느낄 수 있었다.여국(黎國)의 대제사장(大祭司)으로서 그녀는 죽을 운명이었지만 영혼이 흩어지지 않았고 천궐국(天闕國) 승상의 딸의 몸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렇게 고민에 빠져 있는데 난폭한 하인이 그녀를 바닥으로 밀어서 넘어뜨렸고 그 바람에 그녀는 침대 가장자리에 머리를 찧게 되었다. 뒤이어 극심한 고통이 느껴지자 낙청연은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키면서 손을 뻗어 머리를 만져봤고 피가 흥건했다.“돼지처럼 무거운데 누가 아씨를 옮기겠습니까? 눈치 좀 챙기세요. 섭정왕부로 시집왔다고 해서 정말 안주인이라도 된 줄 아
등 어멈은 화들짝 놀라면서 말했다.“아이고, 둘째 아씨 손이!”그러면서 등 어멈은 얼른 낙월영을 부축하면서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악독하기 그지없군요. 둘째 아씨의 혼사를 빼앗은 것으로도 모자라 둘째 아씨가 약을 먹여주는데 밀어서 넘어뜨리다니요!”바로 다음 순간, 한 인영이 빠른 걸음으로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잔뜩 긴장한 얼굴로 낙월영의 옆에 섰다.“월영아!”낙월영은 미간을 좁히더니 피로 얼룩진 손바닥을 들어 보았는데 그 모습은 못내 애처로워 보였다.부진환은 낙월영의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더니 살기 어린 눈빛으로 낙청연을 쏘아보았고 낙청연은 곧바로 입을 열려고 했다.“전…”그러나 해명을 하기도 전에 그녀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우면서 부진환이 억센 힘으로 그녀를 침상 위에서 끌어 내렸다. 바닥에 쓰러져서 몸의 중심을 잡기도 전에 부진환이 매섭게 따귀를 때렸다.그 순간 귓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뺨이 덴 것처럼 뜨거웠고 아렸다.낙청연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낙월영은 부진환의 옷소매를 잡으면서 간청했다.“왕야, 제가 부주의해서 넘어진 것입니다. 언니 잘못이 아닙니다.”등 어멈이 섭정왕에게 고자질했다.“왕야, 제가 똑똑히 보았습니다. 둘째 아씨께서 좋은 마음으로 약을 먹이는데 그 마음을 헤아리지는 못할망정 둘째 아씨를 밀쳤습니다. 둘째 아씨께서 선량하셔서 그냥 넘어가 주려고 하는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괴롭힘을 당해서야 되겠습니까?”“둘째 아씨를 데리고 가서 약을 발라주거라.”부진환이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예.”등 어멈은 낙월영을 부축하면서 떠났다.방 안에는 낙청연과 부진환 두 사람만이 남았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그는 자신의 서늘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힘주어 잡았다. 만약 그가 잡은 것이 낙청연의 목이었다면 그녀는 아마도 숨이 끊어졌을 것이다.“진짜 네가 왕비라도 된 것 같으냐? 월영이가 부탁하지만 않았다면 난 널 죽였을 것이다. 또 한 번
낙요는 눈가가 빨갰지만 눈빛만은 의연하고 차가웠다.방문을 닫은 뒤 그녀는 아직도 쑤시듯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침상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이 몸으로 환생해서인지 무력을 전혀 쓸 수가 없었다.그녀가 여국에서 모두가 우러러보는 대제사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풍수와 관상을 보고 점을 치는 능력이 출중한 것도 있지만 혼자서 백여 명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대단한 무공 실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었다.거기까지 생각하니 그녀는 자기 몸이 못내 그리워졌다. 어릴 때부터 무공을 배워서 경맥이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강인했으니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괴롭힐 수 있을 리가 없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몸은 이미 좌골양회(挫骨揚灰: 원한이 깊거나 중죄를 저지른 사람이 죽은 후 그 뼈를 갈아서 뿌리는 것)를 당했다.서방(書房)으로 돌아온 부진환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고 마음도 심란했다.소유(蘇游)가 그의 방으로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왕야, 오늘 밤도 그 사람들을 불러 큰아씨께 겁을 줄까요?”그의 말에 부진환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아니, 오늘은 됐다.”어젯밤 그녀를 단단히 혼냈으니 다시 한번 그런 일을 겪는다면 또 자결하겠다고 난리를 칠 게 뻔했고, 혹시라도 진짜 죽기라도 한다면 승상부 쪽에 얘기하기가 껄끄러워진다.소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고 희미한 광선이 방 안으로 쏟아졌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 있었다.젊고 예쁘장한 계집종이 방 안으로 들어오면서 오만한 태도로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왕비 마마께서는 신선이라도 되려고 그러십니까?”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낙청연이 눈을 떴다. 그녀의 눈빛은 싸늘하고 날카로웠고 그 눈빛에 맹금우(孟錦雨)는 순간 겁을 먹었다.그녀는 손을 휘저으며 밖에 있는 사람을 불러들이더니 일부러 거드름을 피우면서 느긋하게 얘기했다.“왕비 마마께서 온종일 음식을 드시지 않았으니 배가 많이 고플 것이라 하여 왕야께서 자비를 베풀어 이것들을 하사해주셨습니다.”계집종들이
“구했으면 구한 거지 이유가 필요하더냐?”낙청연은 담담하게 대꾸하고는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녀가 저 멀리 걸어가자 등 어멈은 오늘 오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 죄책감이 들었고, 결국 참지 못하고 낙청연을 불러 세웠다.“왕비 마마!”낙청연이 발걸음을 멈추자 등 어멈은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갔다.“오늘 아침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왕비 마마의 시중을 드는 일만 아니었다면 전 이미 저택에서 나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왕비 마마를 원망하고 분풀이하였습니다.”등 어멈은 고개를 숙인 채로 미안한 듯 얘기했다.그녀는 왕비가 자신을 도와줄 줄 몰랐다. 그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자신은 아마도 맹금우에게 맞아 죽었을지도 모른다.게다가 낙청연은 그녀의 빠진 팔을 치료해주었고 소문처럼 그렇게 독살스러운 사람이 아니었다.등 어멈의 말에 낙청연은 그제야 연유를 깨달았고 등 어멈은 그녀에게 충고를 해주었다.“왕비 마마, 이 섭정왕부에서 계속 지내고 싶으시다면 맹금우와는 척을 지지 마셔야 합니다. 맹금우는 저택의 일등 계집종입니다. 내원 관사(內院管事)의 친딸이거든요.”“이미 척을 지지 않았더냐.”이제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등 어멈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낙청연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서는 목소리를 낮추며 얘기했다.“제가 무심코 들은 얘기가 있는데, 둘째 아씨께서 맹금우에게 한 가지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둘째 아씨께서 왕비 마마가 되면 건강이 좋지 않아 왕야의 시중을 들 수 없으니 맹금우를 통방으로 삼아 그녀더러 왕야의 시중을 들게 할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씨와 왕야의 혼례가 성사되지 않았으니 왕비 마마께서 맹금우를 구슬리시려면 맹금우더러 왕야의 시중을 들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왕비 마마께 그렇게 적대적이지는 않겠지요.”등 어멈은 낙청연의 도움에 감사했고 그래서 자신도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기에 그녀 대신에 방도를 생각했다.등 어멈의 말에 낙청연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낙월영은 맹금우와 통방을 조건으로 거래를 한 것이었고, 맹
낙청연은 벽 구석 쪽에 놓인 몽둥이를 휘둘러 맹금우를 기절시켰다. 그리고는 소매 안에서 찐빵을 꺼내서 그녀의 입안에 쑤셔 넣어 그녀가 삼키게 만들었다.사내들은 창문 쪽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낙청연이 창문 쪽으로 도망치려는 줄로 알았다.“여기 있었군. 감히 도망칠 생각을 하다니.”그중 한 명이 맹금우의 뺨을 내리쳤고 낙청연은 내친김에 맹금우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사내들은 기절한 맹금우를 낙청연으로 여겼고 그녀를 침상 위로 옮겼다.낙청연은 벽에 귀를 딱 붙이고 안쪽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일이 확실히 진행되고 있자 낙청연은 그제야 유유히 몸을 돌려 그곳을 떠났다.밤이 깊어진 틈을 타 낙청연은 몰래 부엌으로 가서 먹을 것을 찾았지만 부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결국 낙청연은 부엌 구석 쪽에 자리를 잡고 잠을 청했다.공무를 마친 부진환은 서방 안에서 휴식을 취하려 했는데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렸고 낙월영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왕야! 주무시고 계십니까?”그녀의 황급한 목소리에 부진환은 얼른 문을 열었다.“왜 그러느냐?”낙월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조금 전 눈물을 흘린 것처럼 그렁그렁한 눈으로 부진환을 바라보았다.“왕야, 제가 아까… 사내 여럿이 언니의 방 안으로 들어가는 걸 목격했습니다. 왕야, 제발 언니를 용서해주세요.”그녀의 말에 부진환의 안색이 돌변했다.사내 여럿이 낙청연의 방으로 들어갔다니? 그는 소유에게 분명 그 짓을 그만하라고 분부했었다.“왕야, 저한테 언니는 한 명뿐입니다. 언니가 무슨 짓을 저질렀든 언니가 제 언니인 건 변함없는 사실입니다.”낙월영은 울음을 터뜨리면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고 부진환은 미간을 좁히더니 얼른 그녀를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나와 함께 가보자꾸나.”“그…”낙월영은 고개를 숙이면서 민망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부진환의 눈빛이 살벌하게 빛났다. 낙청연이 대체 무슨 짓을 꾸민 것인지, 왜 지금에 와서도 포기하지 않는지 의문이었다. 게다가 낙월영이 그가 무슨 짓을 했다고 오해까지 하게 만들
맹금우와 하인들은 본디 낙청연의 방에 있지 말아야 했는데 하필 오늘 밤 이 모든 사람이 낙청연의 방에 모여들었고 정작 그녀는 방 안에 없었기에 부진환은 낙청연이 일을 꾸민 것으로 생각했다.낙청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미간을 좁히면서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왕야, 지금 죄인을 문초하시는 겁니까?”그 모습에 낙월영이 얼른 그녀에게로 다가가서 그녀의 팔뚝을 잡았다. 그녀는 작지만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한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왕야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오늘 밤 무엇을 하셨는지 솔직하게 왕야께 말씀드리세요. 제가 있으니 왕야께서는 언니를 난처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낙월영의 행동을 보면 오늘 밤 일이 진짜 낙청연이 꾸민 일 같아 보였다.낙청연의 눈동자에 티 나지 않게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녀는 무언가 켕기는 게 있다는 듯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뜨리면서 목소리를 낮췄다.“사실 오늘 내가 체면을 구기는 일을 하기는 했지…”그 말에 낙월영은 일부러 놀란 표정을 해 보이면서 목청을 높였다.“뭐라고요? 언니, 왜 이렇게 어리석습니까?”낙월영은 낙청연을 끌고 앞으로 나서면서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언니, 왕야께 잘못했다고 비세요. 제가 있으니 괜찮습니다.”낙월영은 낙청연의 표정을 살피더니 예전과 똑같이 멍청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이 기회를 틈타서 그녀가 자신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 다음 부진환이 화가 나서 그녀에게 곤장형을 내리기를 바랐다.부진환은 미간을 좁혔고 표정을 굳혔다.주위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모든 이의 이목이 낙청연에게로 집중되었고 모두 그녀가 자신의 죄를 털어놓기를 바랐다.맹금우는 맹 관사의 친딸로 섭정왕부의 일등 계집종이었다. 어찌 보면 왕야의 측근이기도 했기 때문에 낙청연이 맹금우를 해친 것이면 절대 용서받지 못할 것이었다.낙청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자신의 납작해진 배를 어루만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오늘 밤 부엌에 먹을 것을 훔치러 갔는데 찾아보니 쌀 한 톨 없더군요
낙청연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있는 하인들에게 다가가서 차분하고 느긋하게 물었다.“내가 시킨 일이라고 했느냐? 그럼 말해보거라. 내가 언제 어디서 너희들더러 여기로 오라고 했느냐? 언제 내 처소로 들어오라 어떻게 얘기했느냐? 게다가 이건 왕비의 처소다. 감히 이곳에 들어갈 생각을 했느냐? 내가 무슨 조건을 약속했길래 죽음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냐?”그녀의 연이은 질문에 무릎을 꿇고 있던 하인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들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맹금우를 바라보면서 그녀의 도움을 바랐다.부진환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조용히 그 모습들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고 낙청연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홀로 이 많은 적을 상대해야 하는데 그녀는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조리 있게 얘기했다. 낙청연은 생각보다 똑똑한 사람이었다.“말해보거라. 내가 시킨 일이라 하지 않았느냐? 내가 너희들에게 어떻게 얘기했는지 다시 말하는 것도 못 하겠느냐?”낙청연은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맹금우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들은 그 문제에 관해서 말을 맞춘 적이 없었기에 계획이 틀어지게 된 것이다. 맹금우는 무언가 기억난 듯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약입니다. 왕비 마마께서는 저에게 약을 쓰셨습니다. 왕야께서도 왕비 마마께 당한 적이 있으시지요. 왕비 마마께서 약을 쓴다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부진환의 눈빛이 차가워졌다.낙청연은 부진환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채고는 얼른 먼저 입을 열었다.“왕야, 제가 왕야께 이 약을 썼다면 혼인날 왕야께서 정신을 차릴 수 있었겠습니까? 게다가 제가 가져온 미정향은 그날 다 써버렸습니다. 전 이곳에 올 때 몸만 왔습니다. 제가 또 어디서 약을 구한다는 말입니까?”낙청연이 그날 썼던 약은 미정향이었고 그 약은 극락산보다 효과가 훨씬 떨어졌다. 맹금우는 정원 바닥에 내쳐지고도 정신을 아예 못 차렸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었으니 약효가 몹시 강하다는 건 아주 명백한 사실이었
부소는 깜짝 놀라 다급히 부원뢰를 업으려 했다.“아버지를 데리고 도성에 가서 의술이 더 뛰어난 의원을 찾겠습니다!”“분명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부원뢰는 부소의 손을 잡아당겼다.“콜록... 내 몸은 내가 잘 알고 있다. 난 시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사람은 결국 죽을 테니, 그렇게 걱정하지 말거라.”부원뢰는 힘없이 말하며 그를 위로하려 억지 미소를 지으며 부소의 손등을 두드렸다.“어떻게 이럴 수가...”부소는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부원뢰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나도 생각지 못했다.”“네가 장가를 가고 아이를 낳는 것도 보지 못했는데, 아쉬움을 품고 가야 할 것 같구나.”말을 마치고 그는 옆에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옥교를 보며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아가씨, 하나만 묻겠네. 부소가 마음에 드느냐?”옥교는 멈칫하다 저도 몰래 고개를 돌려 부소를 바라보았다.부원뢰가 말했다.“너에게 물은 것이니, 부소를 보지 말거라.”“내가 곧 죽는다고 해서 듣기 좋은 말로 위로하려 하지 말거라. 난 그저 사실을 듣고 싶을 뿐이다.”옥교는 조금 쑥스러웠지만 그래도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부원뢰는 그녀의 손을 잡고 품에서 피로 물든 옥팔찌 하나를 꺼내 꼼꼼히 닦은 후 옥교에게 건네주었다.“이 팔찌는 부소 어머니의 혼수다. 이번에 이곳으로 온 것도 부소 어머니의 임무를 받고 온 것이다. 네가 참 마음에 드는구나. 앞으로 두 사람이 함께 있든 아니든 이 팔찌를 받기를 바란다.”“내 소원을 들어준다고 생각하거라. 그렇지 않으면 죽어서도 부소 어머니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될 것이다.”옥교는 그 말을 듣고 놀라기도 했고 난처하기도 했다.그녀는 부소의 마음도 모르는데 어떻게 며느리의 신분을 의미하는 받을 수 있겠는가.게다가 이 옥팔찌는 너무도 귀하다.부소도 그녀가 난처한 것을 알고 말했다.“그냥 받으시오.”옥교는 그제야 팔찌를 받았다.그녀는 나중에 부소에게 돌려주기로 생각했다. 그녀는 부소가 아버지의 아쉬움을 달래
눈시울을 붉히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송천초의 모습을 보며 초경은 마음이 아프면서도 못내 기뻤다.그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뽀뽀했다.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가치가 있다고 하면 가치가 있는 것이오!”초경은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로 그녀를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그의 확고한 눈빛에 송천초는 저도 몰래 팔을 들어 그의 목을 휘감고 더욱 적극적인 대답을 했다....송천초는 날이 밝자마자 깨어났다.그녀는 옆에 누워 있는 초경을 보고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려 하지 않았다.“뭘 그렇게 보는 것이오? 그렇게 좋소?”갑자기 눈을 뜬 초경이 입꼬리를 올렸다.“깨어나셨습니까?”“본디 잠이 많지 않소.”초경은 말하면서 얼굴을 쓰다듬고 있던 송천초의 손을 잡고 잡아당겼다.“왜 그러시오? 아침부터 왜 그리 걱정이 많은 것이오?”“다음 생에 당신처럼 잘해 주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습니다.”송천초는 그의 손을 꼭 잡고 진지하게 그를 바라보았다.“다음 생에 꼭 일찍 저를 찾아오십시오.”“다음 생이 지나도 마찬가지입니다.”초경은 그녀의 말에 웃음을 터트리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좋소. 다음 생에도 앞으로도 꼭 일찍 찾아 지켜줄 것이오.”“평생 지켜줄 것이오.”그 말을 듣고 송천초가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수명도 아껴야지 않겠습니까? 수명이 줄면 어찌 저를 평생 지켜줄 수 있습니까?”초경은 멈칫하다 마음이 따뜻해져 그녀를 꼭 안았다.“좋소. 자네의 말을 듣고 소중히 아끼겠소.”“하지만 동하국을 없애는 일은 이미 부진환에게 승낙했으니, 약속을 어길 순 없지 않소?”“걱정하지 마시오. 이 일은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오.”“앞으로 뭐든 자네의 말을 듣고 수명을 소중히 여기며 평생 당신을 지켜줄 것이오.”송천초도 그를 꼭 껴안았다.“좋습니다.”-며칠 후, 이한도 쪽에서 고강해를 미끼로 삼아 그를 구하려는 사람을 몇 명 잡았다.심문하자, 그들은 모두 왕자를 구하러
막사로 돌아간 후 부진환은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그는 고강해를 미끼로 삼으려고 이한도로 데려갔다.그리고 동하국에 소식을 전해 투항을 권했다.3일도 지나지 않아 동하국 선박이 이한도 부근에 와서 고강해가 정말 이한도에 있는지 알아보려 했다.그와 동시에 송천초와 초경도 청주를 찾아왔다.부진환은 소식을 듣고 직접 맞이하러 가서 열정적으로 접대했다.세 사람은 정원에 술과 안주를 준비했다.부진환은 술을 따르고 말했다.“여제께서 두 사람이 올 것이라 편지를 보냈는데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소. 왜 며칠 더 놀다 오지 않은 것이오?”송천초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이젠 여제라 부르는 것입니까? 괜히 낯설어 보이십니다.”부진환은 멈칫하다 웃으며 답했다.“보는 눈도 많은데 마음대로 여제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예의가 아니지 않소. 이미 여제라 부르는 것이 익숙하오.”“하긴 여국의 부 태사시니, 여제께 무례를 범하며 안 되시지요. 이렇게 빨리 여국으로 오실 줄 몰랐습니다. 부 태사 같은 분은 정말 흔치 않습니다.”“자, 제가 한 잔 드리지요!”송천초는 술잔을 들고 단숨에 다 마셨고 부진환도 잔을 들어 술을 마셨다.두 사람은 전쟁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초경이 마음이 급한 듯 먼저 입을 열었다.“동하국과의 전쟁은 어떻게 되었소?”“동하국 위치는 알아낸 것이오? 내가 가서 그들을 죽일 것이오.”“절대 늦어서는 안 되오.”부진환은 살짝 당황했다.“그리 조급해하는 것이오?”초경은 천천히 음식을 먹으며 물었다.“빨리 없애는 것이 좋지 않소?”“일찍 끝내야 천초가 매일 같이 걱정을 하지 않을 것이오.”부진환이 웃으며 답했다.“동하국의 위치는 이미 사람을 보내 알아보고 있소. 아마 곧 소식이 있을 것이오.”“하지만 자네는 이제 보통 사람이 아니오. 나라 사이의 전쟁에 끼어들면 수위에 영향을 끼치지 않겠소?”사실 이 일은 초경이 나설 일이 아니다.평소 송천초를 지키기 위해 사람을 몇 명 죽이는 것은 괜찮지만, 나라 사이의 전쟁은 결코
고강해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소. 그들이 원하는 것은 열쇠요.”“하지만 다들 열쇠가 가짜라는 것을 모르고 있소.”부진환은 곰곰이 생각하다 또 좋은 계획이 떠올랐다.그가 물었다.“당신을 대신한 형제들과 고옥서 남매를 제외하고 몇 명의 성인 형제자매가 있는 것이오?”고강해는 생각하다 답했다.“아홉 명이 더 있소.”이 숫자에 부진환은 살짝 놀랐다.동하국 왕의 자식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아홉 명 전부 동하국에 있는 것이오? 왜 나타나지 않는 것이오?”고강해가 답했다.“우리는 서로 싸우는 사이라 아무도 서로 굴복하고 지휘받는 것을 원하지 않소.”“그래서 따로 병사를 통솔하고 있소. 그래야 공로를 세워도 다른 사람과 나눌 필요가 없소.”“내가 잡히자, 고옥서가 오지 않았는가?”부진환은 그 말을 듣고 가볍게 웃었다.“그렇게 서로 싸우면서 뿔뿔이 흩어져 어찌 여국을 상대하려는 것이오?”고강해가 말했다.“우리에게는 약사가 있소.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지 자네는 모르오.”“여국의 풍수사가 강하다고 하지만, 그녀의 손가락 하나에도 비길 수 없소.”그 말을 듣고 부진환이 물었다.“전쟁을 오랫동안 했는데, 그 대단하다는 약사는 왜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오?”“정말 궁지에 몰리지 않은 이상 약사는 동하국을 떠나지 않을 것이오.”“약사는 스무살에 동하국으로 왔고 이미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소. 하지만 약사는 아직도 스무살 때의 얼굴을 유지하고 있소. 어찌 비긴다는 말이오?”“약사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여국을 평정할 수 있소.”비록 부진환은 이런 허풍을 믿지 않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적을 얕볼 순 없다.“약사가 그렇게 대단하면 어찌 이렇게 많은 동하국 사람의 희생이 필요하오? 어차피 약사는 동하국 사람이 아니니, 동하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을 것이오.”부진환이 단번에 중점을 꼬집어 말하자 고강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부진환이 말을 이었다.“게다가 당신이 잡혀도 아무도 구하지 않을 것이오.”“형제자매들은 자네가 죽기를
“왜 계속 당신을 남겨두었는지 알고 있소?”부진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고강해는 고개를 떨구고 힘없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동하국 왕자이기 때문에 남겨 두면 반드시 쓸모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소.”“하지만 동하국 사람이 당신을 죽이려 할 줄은 생각지 못했소.”고강해는 그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오?”“자네는 이젠 아무런 가치가 없소.”고강해는 자신의 처지를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고 답했다.“사실 난 잡힌 순간부터 아무런 가치도 없었소.”“동하국에는 황자가 많으니, 나 하나 없다고 문제 될 것 없소.”“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나를 죽이려 할 줄은 몰랐소. 도망가는 와중에도 나를 쏘려고 했소.”“하지만 우리는 형제 사이의 정이 없었소. 그저 경쟁과 싸움뿐이었소.”부진환은 그가 많은 말을 하자, 계속 물었다.“그저 싸우는 사이라면 어찌 자네를 그렇게 미워하는 것이오? 구하지 않는 것도 망정이지, 왜 죽이려 하는 것이오?”고강해가 답했다.“그들은 나한테서 무언가를 얻으려 하오.”“만약 그것을 얻는다면 새로운 왕자가 될 수 있소.”부진환은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고옥서가 고옥언을 구할 때, 그는 옆 방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고 고강해 시체에서 뭔가를 갖고 가겠다는 것을 들었다.“그게 무엇이오?”고강해는 대답하지 않고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우리 동하국에는 존경받는 약사가 있소.”“하지만 과거 그녀는 동하국의 제압을 받던 일반 의원이었소. 독을 만들 줄 알기에 우리의 핍박을 받고 독을 만들었소.”“그녀는 여국인이지만 진법으로 인해 밖으로 나와 다시는 돌아가지 못했소. 그렇게 떠돌다 그녀는 동하국으로 왔고 늘 여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소.”“그녀의 계획은 줄곧 실패했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홀로 바다에 갔소. 그날 그녀는 파도 때문에 배가 뒤집혔지만, 마침 바다 밑에서 보물을 발견했소.”“오래된 침몰선이 해저에서 거대한 궁전이 된 듯한 모습이었고, 그녀는 그 안에서 많은 보물을 얻었고 특
고강해는 절망에 휩싸여 눈을 감고 죽음을 맞이했다.하지만 이때, 옆에서 화살이 날아가 정확히 고옥서가 쏜 화살을 떨구었다.고옥서는 그 모습을 보고 화를 내며 활을 내던지고 재빨리 마차를 이끌고 그곳을 떠났다.이내 그 마차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났다.병사들도 신속히 그들의 뒤를 쫓았고 성문에 걸린 고강해도 내려져 감옥으로 데려갔다.고옥서와 고옥언은 바닷가로 도망쳐 작은 배를 찾아 먼저 숨을 곳을 찾기로 했다.하지만 너무 빨리 쫓아온 병사들 때문에 두 사람은 숨을 곳 없이 훤히 모습을 드러냈다.두 사람은 힘껏 노를 저어 떠나려 했다.바다에서 힘에 부쳐 곧 쫓기려는 그때, 눈앞에 동하국의 배 한 척이 나타났다.그리고 배 위에는 동하국 깃발이 달려 있었다. 고옥서는 미리 계획한 배가 마침 인근에 왔다고 추측했다.두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본 듯이 배 위에 있는 사람에게 인사를 했고 곧 배에 올랐다.“어서 돌아가거라! 병사가 쫓아왔다!”고옥서가 다급히 명을 내렸다.하지만 배는 바다에 멈춰 꼼짝도 하지 않았다.고옥서는 눈살을 찌푸리고 배 위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무엇들 하는 게냐? 귀가 먹은 것이냐?”비록 배 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동하국 병사였지만 이상하게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고 그녀의 말도 신경 쓰지 않았다.고옥서는 병사들이 곧 쫓아올 것 같아 조바심을 내며 그들에게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았으며 배도 움직이지 않았다.고옥서는 어딘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끼고 고옥언을 끌고 배에서 뛰어내리려 했다.하지만 그때, 선실에서 청주군 병사들이 뛰어나와 단번에 그들을 포위했다.배에서 뛰어 내리려 해도 이젠 뛸 수 없었다.그리고 추격하던 병사들도 가까이 도착해 그들의 배를 겹겹이 에워쌌다. 그리고 배 위에는 부소가 서 있었다!그녀는 놀란 나머지 절망스러웠다. 고옥서는 화를 내며 동하국 사람을 붙잡았다.“적들을 도와 우리에게 함정을 파놓은 것이냐?”상대는 울먹이는 말
결국 다들 시선을 부소에게로 옮겼다.부소는 멍하니 자기를 가리키며 물었다.“나한테 가라는 것이오?”“그것도 아니지 않소?”부진환이 말했다.“주락과 계진 둘 다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미인계에 넘어가게 생겼소?”“자네의 연기가 비슷할 것 같소.”부소가 다급히 말했다.“다른 사람을 찾으면 되지 않소?”“다른 사람은 마음이 놓이지 않소.”부소는 한참 고민하다 잔에 담긴 차를 단숨에 다 마셨다.“가면 될 것 아니오!”“좋은 소식 기다리시오!”부소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부진환이 그를 불러 세웠다.“오늘 이미 심문을 받았으니, 지금 가는 것은 너무 티가 날 것이오. 급할 것 없이, 내일 다시 가시오.”-다음 날 저녁.부소는 부진환이 말한 대로 고옥서를 심문하러 갔다.부 태사가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고옥서는 전쟁 때문에 그가 오지 못했다고 생각했다.역시 부진환의 추측대로 고옥서의 계략 중 하나가 바로 미인계였다.부 태사에게는 통하지 않았지만, 부소는 다르다.한바탕 유혹하고 난 후, 고옥서는 기회를 잡아 부소와 단둘이 있게 되었다. 그녀는 고옥언이 갇힌 위치를 알아내고 부소가 방심한 틈을 타서 독 가루를 뿌려 그를 쓰러트렸고 감옥 문 열쇠를 훔쳐냈다.그리고 그녀는 독으로 감옥을 지키고 있던 옥졸을 쓰러트리고 고옥언이 갇힏 곳을 찾아 고옥언을 구출했다.“누나!”고옥언은 감격에 겨웠다.“어찌 온 것입니까? 동하국이 청주성을 뚫은 것입니까?”고옥서는 사방을 경계하며 말했다.“아니다. 홀로 너를 구하려 들어온 것이다.”“일단 이곳을 떠날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두 사람은 조용히 감옥을 떠나려 했다. 하지만 감옥 끝에 있는 철문을 보고 고옥언이 발걸음을 멈추었다.“누나. 고강해가 저곳에 갇혀 있는 것 같습니다.”“데리고 가실 겁니까?”고옥서는 바로 거절했다.“안 된다. 너무 위험한 상황이라, 우리도 나갈 수 있을지 모른다.”“누나. 저는 그저 고강해가 지니고 있는 열쇠를 말한 것입니다.”그 말을 듣고
“정말인 것이냐? 동하국에는 나를 거절할 수 있는 남자가 없다.”그 말을 듣고 부진환이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동하국 사람들이 워낙 적으니, 그럴만하다.”고옥서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정말 단호하구나.”말을 마치고 고옥서는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옷을 입었다.부 태사에게 미인계가 통하지 않을 줄 생각지도 못했다.“인내심이 없으니,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거라.”부진환이 천천히 몸을 돌려 불쾌한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고옥서는 어쩔 수 없이 답했다.“내 동생을 구하러 왔다.”“동하국 왕자, 고강해.”“너에게 잡힌 지 오래되었는데, 아직 살아 있는 것이냐?”부진환은 놀라지 않았다.“얼마 전에 그를 구하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다들 실패했는데, 너라고 성공할 거라 생각한 것이냐?”고옥서가 가볍게 웃었다.“확신이 없다면 어찌 왔겠느냐? 청주성에서 순찰하는 청주군도 많지 않은 듯한데, 다들 바닷가로 갔나 보구나.”“동하국의 배가 부담을 준 것이냐?”부진환이 담담하게 그녀를 힐긋 보고 답했다.“쓸데없는 걱정이구나.”말을 마치고 부진환은 몸을 돌려 떠났다.부진환의 반응을 본 고옥서는 전쟁의 상황이 부 태사에게 큰 부담이 되었고 막사마저 사라졌을 것이라 추측했다.그렇지 않으면 부 태사가 어찌 안색을 바꾸었겠는가?그렇게 생각한 고옥서는 자신감에 찬 미소를 지으며 철문을 바라보았다.감옥에서 나간 부진환은 눈살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부소가 와서 그를 부른 것도 듣지 못할 정도였다.부소는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왜 그리 넋을 놓고 있소? 여러 번 불러도 도통 반응이 없었소.”“심문하러 간 동하국 여인은 어떻게 되었소? 안색이 좋지 않소.”부진환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청주성에 들어와 동하국 왕자이자 그녀의 동생 고강해를 구하러 왔다고 순순히 말했소.”부소가 깜짝 놀랐다.“고강해 말이오?”“그런 뜻으로 말했소. 하지만 고옥서라는 이름을 들으니, 고옥언과의 관계가 궁금해졌소.”“나이를 보니
“모든 것이 예전처럼 회복될 것입니다.”차강남은 고개를 끄덕이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황량한 이한도의 모습을 바라보며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다 잘될 것이다.”그는 이한도를 예전의 모습으로 만드는 것이 시간문제일 것이라 믿는다.마음만 먹으면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것이다.-저녁이 되자 바닷가의 막사는 고요함을 되찾았다. 전쟁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이 깨끗이 청소되었다.옥에 갇힌 고옥서는 아직도 동하국의 병사들이 매복을 당해 전쟁에서 지고 도망친 것을 모르고 있다.그녀는 옥에 끌려간 후 동생의 모습을 보고 싶어 두리번거렸지만 계속 그를 찾지 못했다.지하 감옥의 가장 깊은 곳에는 철문이 하나 있었다. 엄격하게 지키는 것으로 보아 중요한 죄수를 수감하는 곳 같았다.그녀는 철문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옥에 갇혀 있었다.위치가 적합하니, 기회만 생기면 동생을 구출할 수 있을 것이다.그녀는 늦게까지 누군가 오기를 기다렸다.하지만 감옥에 온 사람은 부진환이었다.고옥서는 입꼬리를 올렸다.“부 태사?”부진환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네가 바로 동하국의 공주구나.”“몇 번 교전할 때, 네가 지휘하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용기에 비해 계략이 부족하더구나.”“홀로 청주성에 들어오다니. 정말 청주군의 눈이 멀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고옥서는 천천히 바닥에서 일어나 문 앞까지 걸어가 웃으며 말했다.“부 태사는 역시 대단하구먼.”“중독된 사람들과 달리 아직도 멀쩡하게 기운이 남아도는구먼.”“바깥 상황은 어떠하냐? 부 태사의 막사는 지켜낸 것이냐?”고옥서는 일부러 그를 비웃으려 득의양양하게 비꼬았다.하지만 부진환은 표정 변화 없이 그냥 싸늘하게 그녀를 보고 있었다.하지만 고옥서는 그의 뜻을 지키지 못했다고 이해했다.하지만 청주성은 아직 뚫리지 않은듯하다.“이름이 무엇이냐? 동하국에 내세울 사람이 없는 것이냐? 어찌 여인을 보내 전쟁을 지휘하게 하는 것이냐?”부진환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고옥서는 입꼬리를 올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