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천천히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들려오는 목소리는 점점 더 맑아지고 처량해졌다."분명 차설아일 거야, 그들이 차설아를 괴롭히고 있는 거야. 장재혁이 말한 것들은 모두 거짓이다. 차설아는 자정 살인마의 동생일 수 없어. 더더욱 나를 이렇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고!”감정이 격해진 성도윤은 문을 열려고 허둥대다가 계단에 걸려 넘어지면서 손바닥과 무릎이 까졌다.그는 더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재빨리 일어나 몇 걸음 걷다가 또 걸려 넘어졌는데 낭패의 극에 달했다."살려줘, 살려줘, 날 건드리지 마. 다들 꺼져!”도움을 청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점점 더 분명해지고 남자의 마음은 점점 더 졸여졌다."병신, 병신, 성도윤 이 병신아!”다급해진 성도윤은 자신을 계속 두드려대며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미칠 지경이었다.자신의 여자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느낌이 그를 더 괴롭게 했다."차설아, 기다려. 내가 곧 구하러 갈게!”성도윤은 모든 신경을 곤두세웠고 몇 번이고 넘어지고 부딪히면서 마침내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에 점점 가까워져 마치 자신의 앞에 있는 것 같았다.도움을 청하던 소리가 점차 그쳤다.서은아는 건장한 남자에 눌려 몇 차례 발버둥을 쳤지만 결과는 뻔했다.머리칼이 헝클어지고 볼과 손과 허벅지가 찢어져 피가 났는데 그녀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하하하, 역시 부잣집 아가씨네. 이 피부, 이 몸매 정말 일품인데?”"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일을 끝내, 아직 기다리는 사람이 많잖아.”“...”이들의 욕설을 듣고 있는 서은아의 얼굴은 무표정했다.침울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가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마치 힘없이 누군가의 손에 놀아나는 장난감 같았다.하지만 갑자기 이 남자들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전전긍긍하며 한쪽으로 흩어졌다."왜들 그래?”그녀의 몸을 만지던 남자는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뒤를 돌아보았다.그리고 혼이 다 빠져버려서는 곧바로 일어나 바지를 들어 올리고 머리를
"도윤아, 그게 무슨 뜻이야? 난 당연히 은아지. 설마 날 못 알아보겠어?”서은아는 찢어진 옷을 정돈하고 눈물을 글썽이며 수줍은 듯 성도윤을 바라보았다.“그 짐승들이 날 만졌다고 내가 너무 더러워서 더 이상 날 아는 척하고 싶지 않은 거야?”"너였구나!”성도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방금 도움을 청한 사람이 차설아인 줄로만 알았던 그의 머릿속엔 온갖 잔학무도한 그림들이 저절로 그려져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하지만 차설아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다."뭐... 무슨 뜻이야?”서은아의 눈빛은 더욱 절망적이었다.아까 당한 능욕보다 만 배나 더 고통스러웠다."설마 내가 차설아라고 생각했던 거야? 그년이 너를 구하려고 이딴 새끼들한테 능욕을 당했다고 생각해? 그리고 나였다는 걸 알고 안도의 숨을 내쉰다니... 나라면 넌 전혀 상관없는 거야?”성도윤은 굳은 얼굴로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물었다."네가 어떻게 여기 있어, 도대체 무슨 일이야?”서은아는 뒤로 두 걸음 물러서 눈물을 펑펑 쏟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남자의 태도가 그녀를 완전히 무너뜨렸다."성도윤, 방금 내가 당한 일을 못 봤어? 눈멀었어? 아니면 네 마음은 무쇠로 만든 거야? 널 구하러 달려온 내가 바보지!”"은아야, 진정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봐.”성도윤은 여인의 방향으로 손을 뻗어 잡아당기려 한참을 더듬어봤지만 잡히는 건 없었다."너, 너 왜 그래? 너 뭐 찾고 있어? 너 눈이 왜 그래...”서은아는 드디어 성도윤의 이상을 알아냈다.그녀는 손을 내밀어 성도윤 앞에서 흔들었는데 그의 날카롭고 그윽한 두 눈이 조금도 반응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난 지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성도윤은 처음에는 무너지고 절망하다가 지금의 무감각해지고 냉담해지기까지 너무 많은 심리적 고통을 겪어서 담담하게 말했다."넌 오지 말았어야 했어, 여긴 위험해. 이리 와... 내가 널 데리고 떠날게.”그는 여자에게 손을 내밀며 차분하게 말했다.서은아는 이미 이런 수모를 겪었는데
"내가 그 변태의 눈을 파 너를 위해 복수할게!”"감정적으로 굴지 마, 여기는 그의 구역이야. 그의 변태의 잔인함은 네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라고.”"도윤아, 너 왜 이렇게 나약해졌어, 그 사람이 네 눈을 멀게 하고 나는 짐승들한테 모욕을 당하게 했는데 우리가 그냥 넘어가야 해? 너는 성도윤이야, 너...”"아니, 난 아니야.”“성도윤은 죽었어.”"그렇게 말하지 마, 너는 비록 지금은 시력을 잃었지만 지금 의술이 이렇게 발달했으니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적당한 눈을 찾으면 너는 다시 볼 수 있을 거야...”서은아가 남자를 껴안고 울먹였다."강해져야 해. 성가와 서가가 그렇게 부자이고 그렇게 권력이 큰데 눈 하나 치료 못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그러니 우리는 더욱 이성적으로 여길 떠날 방법을 생각해야 해.”성도윤은 무뚝뚝하게 말했다.그는 서은아가 무사히 떠날 수 있기를 바랬다. 그렇지 않으면 이 죄책감이 큰 산처럼 평생 그를 억압할 것이다."네 말이 맞아!”서은아는 마침내 냉정하게 눈물을 닦으며 성도윤을 부축했다."우리 함께 도망가자, 어떻게 가야 해? 내가 너의 지팡이가 되어줄게!”두 사람은 서로를 부축하며 나아갔는데 이때 그들은 서로의 유일한 기둥이 되었다.짝짝짝!갑자기 박수 소리가 들리더니 차성철이 어두운 곳에서 나오며 입을 열었다."멋지다, 멋져!”"아, 오지 마!”차성철을 본 서은아는 귀신이라도 본 듯 본능적으로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우람한 성도윤의 뒤에 숨었다.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이렇게 오랫동안 건방진 아가씨로 지내오면서 이렇게 누군가를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복수하려면 나 한 사람한테만 해. 다른 사람 끌어들이지 말고.”"저 여자를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어, 스스로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당신을 내놓지 않으면 전당포를 불태우겠다고 했는데 그래도 참았어... 하지만 내 여동생을 모욕하기 위해 망언을 했으니 혀를 뽑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인 줄 알아!”서은아가 차설아를 모욕한 것을 생각하니 그의 눈
"내가 뭘 하길 원하는지 그냥 말해.”성도윤은 차성철이 그들을 이렇게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것이라고 일찍이 예상하였다. 차성철은 원수는 반드시 갚아야 하는 성격이니 그를 극한까지 괴롭히지 않고서는 이 모든 것을 끝낼 수 없을 것이다."간단해, 나는 방금 단골손님의 주문을 받았는데 그는 나이가 들어 강한 심장을 바꾸고 싶어 해. 그리고 이 심장의 주인이 만약 하늘의 총아라면 좋겠어서 목표를 너로 정했어. 전체 해안에 있는 사람 중 성가의 둘째 도련님만이 하늘의 총아라는 칭호가 어울리는 사람 아니겠어...”차성철은 미소를 지으며 마치 날씨에 관해 이야기하듯 가볍게 말했다. "다시 말해 만약 네가 기꺼이 심장을 내 고객에게 바꿔준다면 나는 서씨 가문의 아가씨를 놓아줄 거야.”"안 돼, 절대 안 돼!”서은아는 원래 두려움 때문에 매우 겁에 질려 성도윤의 뒤에 숨어있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돌볼 겨를이 없이 두 팔을 벌려 남자의 앞을 막았다."이 변태, 악마야! 분명 심장이라는 것은 돈을 좀 쓰면 적당한 것을 찾을 수 있는데 도윤이 것을 원한다니... 그냥 그의 목숨을 원한 거잖아. 나는 도윤이가 다치게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야!”차성철은 서은아를 외면하고 웃으며 성도윤을 바라보았다."넌 어떻다고 생각해? 서 씨네 아가씨를 위해 너의 심장을 바칠 거야? 저 여자는 방금 너를 위해 그녀의 몸을 바쳤는데 말이지... 너희들의 감정을 시험할 때가 왔어...”"내가 협조만 해주면 풀어주는 거 맞지?”성도윤의 말투는 차분했고 눈빛은 공허했다."물론.""자정 살인마는 비록 피비린내 나는 것을 좋아하고 좀 변태적이지만 뱉은 말은 반드시 지켜.”"그래."성도윤은 약속을 받아낸 뒤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놔줘, 수술하러 갈게.”서은아는 순간적으로 무너져내렸다. 남자의 팔을 잡아당겼는데 감동이었고 마음이 아파 엉엉 울었다."도윤아, 너 함부로 말하지 마. 나는 너와 함께 갈 거야. 너에게 일이 있다면 나도 살 수 없을 거야... 난 가지 않을 거야, 난 너와
그는 약간 황홀하여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심장을 만졌다. 아직 '펑펑' 뛰고 있어...“빌어먹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남자는 머리도 아프고 실명 때문에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몰랐다.그러다 소영금이 펑펑 우는 소리를 들었다."도윤이야, 정말 도윤이가 돌아왔어. 정말 다행이야!”소영금은 그를 으스러지게 껴안았다."어머니?"성도윤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떠보는 듯 물었다."아들, 엄마 여기 있어. 정말 고생했어, 엄마 여기 있어!”소영금은 감격에 겨워 대답했다.성도윤이 실종된 요 며칠 동안 그녀는 밤낮으로 울어서 눈이 지금 매우 빨갛게 부어올라 하룻밤 사이에 열 살이나 늙은 것 같았다."아들, 도대체 어디에 갔던 거야? 우리는 온 해안을 다 뒤질 뻔했어. 감히 너에게 손을 대다니, 우리 성가가 반드시 복수할 거야, 우리...”성도윤은 별다른 감정 없이 물었다."나 지금 어디예요?”"바보야, 지금 우리 집 대문이잖아. 네가 직접 운전해서 온 것도 몰라?”"내가 운전하고 온 게 아니에요.”"무슨 소리야, 네가 운전한 게 아니라면 왜 운전석에 앉아 있었겠어? 게다가 어떻게 자기 집도 몰라? 아무리 밤이라도 잘 안 보일 정도는 아닌데,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던 거야?”"걱정 끼쳐서 죄송해요.”성도윤은 담담하게 말했다.보아하니 차성철이 그래도 사정을 봐주어 목숨을 살려준 모양이다.근데 이건 그 스타일 같지 않은데?설마..."핸드폰이 있어요? 얼른 은아한테 전화해서 잘 들어갔는지 물어봐 줘요.”"좋아, 내가 바로 칠게. 그 애가 너의 행방을 알아냈으니 반드시 너를 무사히 데려올 것이라고 맹세하더니 역시 무사하게 데리고 왔네...”소영금은 말을 하며 서은아에게 전화를 걸었다.마침 서은아가 비틀거리며 택시에서 내려 성가로 뛰어가려던 참이었다."은아야, 여기, 도윤이가 돌아왔어!”소영금은 감격에 겨워 손을 흔들었다."아주머니!"서은아는 소영금을 보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린 채 주저앉아 거의 무너져 내렸다."왜, 너희 두
성도윤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속상하게 해서 죄송해요.”소영금은 자신이 한때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던 훌륭한 아들이 갑자기 우울해지고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마치 살아있는 시체처럼 빛을 잃은 것 같았다.그녀의 마음은 마치 칼로 긁고 있는 것처럼 아파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아들, 내 아들 도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거야?”그녀는 성도윤을 끌어안고 충격을 받아 마음이 아팠다.남자가 사라진 시간 동안 어떤 비인간적인 괴롭힘을 겪어서 이렇게 됐는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이미 지나간 일이니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아요.”성도윤의 목소리는 담담했고 알리고 싶지 않아 했다.그에게 있어 오늘 그가 당한 모든 것은 그가 차설아에 대한 빚을 갚고 있는 것이며 모두 그의 자업자득일 뿐이다.빚은 이미 다 갚았고 서로 빚지지 않으니 더 이상 매달릴 필요가 없었다."그래, 돌아오면 되었어, 그래...”소영금은 묵묵히 눈물을 흘리며 손으로 부드럽게 성도윤의 등을 두드렸는데 마치 어린 시절의 그를 껴안고 재워주는 것 같았다."걱정하지 마, 엄마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치료해 줄게!”성도윤은 피곤했는지 집에 들어오자마자 잠이 들었다.하지만 소영금은 누가 그녀의 아들을 이렇게 해쳤는지 반드시 알아야만 했다.그녀는 객실 문을 두드렸다.”은아야, 자니?”"아니요, 누구세요?”서은아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이미 세수를 마치고 잠옷을 입은 그녀는 새우처럼 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떨고 있었다."얘야, 겁먹지 마, 나야.”"아주머니, 들어오세요.”서은아가 일어나 방의 불을 켰다.소영금이 들어와 침실 문을 닫은 뒤 침대 옆에 앉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얘야, 이렇게 늦었으니 너도 쉬어야 한다만...”"괜찮아요, 아주머니. 그런 일을 겪었는데 제가 어떻게 잠이 오겠어요. 마침 오셨으니 저랑 얘기 좀 해요.”"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만...”소영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까 도윤이 상태가 좋지 않아 그런 슬픈 일을 언급하기
"나도 차설아 씨가 이렇게 모질게 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도윤이는 그녀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남자였는데 아무리 큰 원한이라도 이런 독수를 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안타깝네요... 확실히 차설아 씨가 해친 것이에요. 사랑이라는 것은 매우 아름답기도 하지만 무섭기도 하죠!”서은아는 일부러 차설아에게 모든 잘못을 덮어씌웠다.어차피 사람을 해친 건 차설아의 오빠이니 차설아가 해친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차설아 씨가 저지른 일이니 도윤이는 옛정을 생각해서 가족들께 알리지 않으려 합니다. 충동적으로 그녀에게 복수하지 않도록 말이에요.”서은아는 소영금의 표정을 살피며 계속 기름을 부었다."그뿐만 아니라 제가 도윤이를 구하러 갔을 때도 수모를 겪었어요...”여자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금세 눈물이 비 오듯 쏟아지며 무너질 듯이 울었다."슬퍼하지 마. 설아가 어떻게 했는지 나한테 말해봐...”"남자들을 구해서 저한테 그런 짓을 했는데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요!”서은아는 여기까지 말하고 잠옷의 치맛자락을 위로 들어 올렸는데 파릇파릇한 다리의 아찔한 상처가 드러났다."하늘이시여, 이...이거 너무 끔찍하잖니!”소영금은 서은아의 허벅지에 난 흔적들을 보고 여러 사람에게 짓밟힌 뒤에야 생긴 것이라는 것을 알아챘는데 너무 놀라 몸을 떨었다."아주머니, 도윤이의 눈을 멀게 한 게 차설아의 짓이라는 것을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제가 당한 것들은 차설아가 사람을 시켜서 한 짓이에요. 저는 그녀가 저를 그렇게 미워할 줄은 몰랐어요. 저는...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요. 더는 도윤이랑 어울리지 않아요!”"그렇게 말하지 마, 넌 그냥 몸이 더러워졌을 뿐이야. 하지만 어떤 사람은 심장이 더럽지. 그게 정말 더러운 거야!”소영금은 서은아를 껴안고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너와 도윤이 너무 고생했어. 내가 너희들의 고생이 헛되지 않게 할게. 차설아... 가만두지 않을 거야!”원래 그녀는 서은아의 말에 의심을 하며 차설아의 인품을 믿었다.하지만 서은아의
"좋은 물건이라는데, 내가 안 보는 건 오빠 체면을 안 세워주는 거 아니겠어? 한 번 봐보지 뭐.”차설아는 포도 스무디 밀크티를 한 모금 빨며 말했다."그럼 마음의 준비 잘해, 이건 좀 보기 버거울 수 있으니까.”차성철은 신비로운 표정으로 뜸을 들였다.차설아는 참지 못하고 눈을 희번덕거렸다.“얼른, 보고 나면 가서 잘 거야.”"이 게으름뱅이, 잠이 너무 많은 거 아니야? 네가 본 후에 잠을 못 잘 거라고 장담하는데...”차성철은 차설아의 휴대전화에 동영상을 보내며 말했다.차설아은 처음에는 나른한 표정으로 켜보았는데 점차 표정이 굳어졌고 손가락은 살짝 조여졌다.몇 분 뒤 차성철이 물었다."어때, 다 봤어?”"다 봤어.”"정말 다 봤어?”남자는 얄밉게 물었다.“그럼 어떤 기분이야?”"아무 느낌 안 들어.”차설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낮게 대답했다."그럴 리 없어. 감정이 없는 나도 보고 감개무량했는데 너는 정이 깊었으니 더 감회가 더 많지 않겠어?”차성철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의외였어, 성도윤은 정말 대단해. 서 씨네 아가씨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심장을 기증하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과 같잖아. 보아하니 그는 서 씨네 아가씨를 정말 사랑하는 것 같아. 이건 완전 순애보가 다름없잖아? 내가 그 집 사람이라면 그를 때려죽일 거야!”"설마 정말 그 사람 심장을 건드린 건 아니겠지?”차설아는 문득 무언가를 깨닫고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그럴 리가, 이 오빠가 그의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약속했으니 단지 그를 놀라게 했을 뿐이야. 그저 이 녀석의 마음속에 도대체 누가 있는지 테스트했을 뿐이고 결과는 이렇게 나왔네!”차성철은 이를 악물었고 지금 생각해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자식이 사랑하는 것은 역시 서씨 집안의 아가씨였어, 쓰레기가 따로 없다고. 네가 그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나는 벌써 그 자식을 물고기에게 먹였을 거야.”"중요하지 않아.”푸른 바다를 바라보는 차설아는 괜찮다는 듯 어깨를 으
사도현은 배경윤이 적은 글을 보고 낮게 한숨을 쉬었다.“윤설 씨에게 공개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렇게 하면 더 큰 사이버 폭력이 일어날 수도 있어. 난 그냥 소란을 일으킨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 연예인 본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어.”[흠, 당연히 연예인 본인까지 끌어들이지 않길 바랄 거야. 그 사람들 도현 씨 팬들이잖아. 게다가 윤설 씨까지 얽혀서 그 여자가 곤란해질까 봐 그런 거지?]배경윤은 그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신경을 쓰는 모습을 처음 봤다. 윤설이 첫 번째이자 아마 유일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에 그녀는 눈앞의 이 남자를 더 용서할 수 없었다.‘이런 바람둥이!’“조금만 머리 쓰면 내가 왜 이렇게 하는지 알 텐데.”사도현은 배경윤의 ‘모함’을 듣고 이 오명을 씻을 수 없다는 생각에 더 이상 해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차갑게 말했다.“네가 뭐라고 생각하든, 나는 이 사건에 연예인 본인을 끌어들이는 걸 절대로 허용하지 않아.”그도 어쨌든 윈스 엔터테인먼트의 CEO였고 연예계의 돌아가는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때로는 하나의 루머가 칼날처럼 되어 사람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을 수 있다.연예계에서 온라인 폭력에 의해 처참하게 망가진 스타들이 많았고 배경윤과 차설아 같은 일반인은 그 악플의 고통을 더 견디기 힘들 것이다.[헐, 이제 나를 협박하겠다는 거야? 도현 씨가 그렇게 말할수록 난 더 윤설을 찾아갈 거야. 날 어떻게 할 건데?]배경윤은 분노를 담아 빠르게 타자를 했다. 소리 없이 치는 타자 소리만으로도 그녀의 분노가 느껴졌다.성도윤은 그들 옆에서 분위기를 살피며 처음으로 연애 문제가 이렇게 복잡하고 피곤할 수 있다는 걸 실감했다.이 두 사람은 분명 서로에게 감정이 있었지만 계속해서 상처가 되는 말들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망쳐가고 있었다.‘내가 보기엔 차설아와 내 관계가 훨씬 더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 같아. 내가 정말 운이 좋아.’차설아를 떠올리며 성도윤은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지금 2층으로
“오늘 소란을 일으킨 사람 중에 내 팬도 있었던 거 확실해?”사도현은 사실 명성과 노출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배경윤 때문이 아니라면 절대 미디어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어색한 연애 프로그램 같은 것도 참가하지 않았을 것이다.그가 이렇게 많은 팬을 얻게 된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조용한 성격이라 팬들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팬들이... 오물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충격을 받았다.“믿을 수 없지?”배경윤이 오늘 자신과 차설아가 괴롭힘을 당한 영상 파일을 사도현에게 보여주었다.“봐봐, 그 팬이라는 여자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도현 씨가 잘생기고, 부유하고, 성격도 좋고, 완벽한 남자라며 윤설과 천생연분이라고 하더라. 도현 씨가 윤설의 왕자인데 내가 그 악녀가 되어 두 사람의 관계를 망쳤다고 하면서, 심지어 설아까지 모욕했어.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뭐, 우리 설아까지 욕했다고?”옆에서 무표정하게 싸움을 구경하던 성도윤은 배경윤의 말을 듣고 나서 차설아에게 더 한없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그는 사도현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빼앗 분노에 차서 영상을 확인한 뒤 싸늘하게 말했다.“이 사람들, 이런 짓을 할 용기가 있다면 그 자만과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어떻게 할 건데?”배경윤이 성도윤에게 물었다. 이전과 달리 이제는 거부하는 태도가 없었다.“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이 사람들 다 찾아낸 뒤, 두 사람 앞에서 머리 조아려 사과하게 해야지.”성도윤이 이를 갈며 한 글자씩 뱉어냈다.이 말은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끝까지 추궁할 수 있는 말이었다.“그나마 다행이네...”배경윤이 사도현을 보며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저것 봐, 사랑하는 여자가 괴롭힘을 당했으면 정상적인 반응은 저런 건데, 도현 씨는... 아니지. 도현 씨한테는 사랑하는 여자가 괴롭힘을 당한 게 아니라 사랑하는 여자의 팬이 그냥 길 가던 사람을 괴롭힌 정도잖아. 이제야 왜 이렇게 무관심한지 알
[무슨 소리야, 그건 옛날얘기지. 지금은 완전히 아니라고! 나도 한때 도현 씨를 내 ‘남신’이라고 했었잖아? 그런데 그 결과가 어땠어?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형편없더라!]배경윤이 가차 없이 쏘아붙였다.[두 사람, 완전 끼리끼리야. 나랑 설아는 이제 두 사람이랑 거리를 둬야 해. 안 그러면 우리도 불행해질 거야. 봐, 오늘 내가 이렇게 재수 없는 일을 겪은 것도 다 네 탓이야.]“아니, 이게 왜 또 내 탓이야?”사도현은 어이없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그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죄인처럼 배경윤의 분노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당연히 도현 씨 탓이지! 오늘 나랑 설아에게 똥물을 뿌린 사람들이 누구인 줄 알아?]배경윤이 팔짱을 끼고 사도현을 노려봤다.“누군데?”사도현이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아무리 세상이 험악해졌다고 해도 앞을 못 보는 여자랑 말을 못 하는 여자를 상대로 그런 짓을 할 정도면 정말 제정신 아닌 인간들 아니야?’[한쪽은 도현 씨 팬들이고, 다른 한쪽은 윤설의 광적인 팬들이야.]“뭐?”사도현의 표정이 얼어붙었다.[내가 도현 씨를 알지 않았으면 윤설이랑 엮일 일도 없었을 거고, 그 여자의 팬들에게 이런 일을 당하지도 않았을 거야. 그리고 당신 팬들도 마찬가지야. 윤설 팬들이랑 다를 게 뭐야? 둘 다 극성맞고 정신 나간 사람들뿐이야. 그러니까 이 모든 게 도현 씨 탓이라고!]배경윤은 흥분해서 글을 계속해서 쳐냈다. 사도현은 그녀가 쓴 긴 글을 읽고 머리가 핑 돌 지경이었다. 글에는 온통 그에 대한 비난이 가득했다.사도현은 억울한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근데 말이야, 팬들이 한 행동을 내가 어떻게 책임져? 사람마다 다 성격이 다르고 수천, 수만 명의 팬을 내가 어떻게 다 통제해?”[핑계 대지 마!]배경윤은 여전히 흥분한 상태였다.[팬들의 행동은 결국 본인이 책임지는 거야. 팬덤 문화 몰라? ‘팬들의 행동은 본인이 책임진다.’ 이게 기본 원칙이야! 팬들이 왜 그렇게 극성인지 알아? 그건 본인이
성도윤은 묵묵히 참다가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배경윤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랑 차설아의 관계는 너 같은 외부인이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우리는 지금 행복해. 네가 보기 불편하면 그냥 나가면 되잖아.”“...”배경윤이 성도윤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손목이 붙잡히자 이번엔 발을 들어 그를 걷어차려 했다.성도윤은 체격이 크고 힘도 센 편이었지만 배경윤의 저돌적인 공격에 살짝 밀리는 기분이 들어 결국 긴 팔을 뻗어 그녀의 목을 단단히 옭아맸다.“형, 지금 뭐 하는 거야?”바로 그 순간, 사도현이 들어와 이 장면을 목격하고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상황이라니,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성도윤과 배경윤도 순간 굳어버렸다.“오해하지 마.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성도윤이 가볍게 헛기침하며 배경윤을 놓아주었고 배경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성도윤의 발을 힘껏 밟았다.“너 진짜 끝까지 이럴 거야?!”성도윤은 발끝이 부러질 것 같은 고통에 이를 악물었지만 차설아를 떠올리며 꾹 참았다.차설아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강렬했는데 그녀의 절친인 배경윤까지 보니 정말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떠올랐다.그리고 슬쩍 사도현을 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너, 보험 많이 들어둬.”“무슨 뜻이야?”사도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무슨 뜻이긴? 저 호랑이 같은 여자를 네가 감당할 수 있겠냐고.”성도윤이 배경윤에게 얻어맞은 부위를 문지르며 투덜댔다.그러자 사도현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지, 우리 경윤이는 원래 이렇게 폭력적인 애가 아니야. 분명 형이 선을 넘었으니까 그런 거겠지.”그는 중요한 순간에 배경윤 편을 들기로 했다.사실 예전에는 서로 의견이 다를 때마다 배경윤과 말다툼이 잦았다.배경윤은 성도윤을 두고 철저히 쓰레기라고 욕했고 사도현은 차설아가 너무 까다롭다고 반박하며 두 사람은 끝없는 논쟁을 벌이곤 했다.하지만 이
“그만 좀 해요, 너무 닭살 돋아요.”차설아는 예전 같았으면 이런 사랑 고백을 들으면 쑥스러웠지만, 이제는 쑥스럽기보다 오히려 닭살이 돋아 참을 수가 없었다.처음엔 성도윤이 차갑고 말수가 적은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건 전부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꾸민 모습이었고 실제로는 입만 열면 온갖 달콤한 말을 쏟아내는 사람이었다.성도윤이 손으로 물 온도를 확인한 뒤 말했다.“물 받아놨어. 들어가서 몸 좀 풀고 와.”“좋긴 한데... 좀 나가주겠어요?”차설아가 고개를 푹 숙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그건 안 되지. 당신이 미끄러지거나 수건이 필요하거나 옷을 입어야 할 때 누가 도와줘?”“괜찮아요, 나 혼자서도 잘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잠깐만 나가 있어 줘요. 도윤 씨가 여기 있으면 부담스러워서 못 하겠어요.”차설아는 아직 성도윤과 그렇게까지 오픈된 관계는 아니었다.게다가 자신만 벗고 그는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니. 상상만 해도 얼굴이 뜨거워졌다.“알겠어. 그럼 욕조까지만 데려 줄게. 다 끝나면 전화해.”성도윤이 한발 물러나며 휴대폰을 욕조 옆 선반에 올려놨다.“여기 핸드폰 놔뒀어. 손만 뻗으면 닿을 거야.”“알았어요. 그러니까 이제 제발 가요!”차설아가 손을 휘저으며 성도윤을 재촉했다.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 차설아는 그가 정말 나갔다고 확신하고서야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차설아는 원래 몸매가 좋은 편이었다. 곡선이 부드럽게 이어졌고 피부는 우유처럼 부드럽고 하얬다. 실루엣만 봐도 누구든 넋을 놓을 정도였다.그런데, 옷을 벗다가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거칠고 낮은 숨소리가 문가에서 들려오자 차설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개졌다.“도윤 씨, 변태예요?!”“들켰네.”성도윤의 목소리가 낮고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그는 아쉬운 듯 차설아를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불만 지르고... 알겠어, 나 간다.”그는 투덜거리며 재빨리 문을 닫고 나갔다.더 있다가는 차설아가 진짜로 그를 때려눕힐지도 몰랐다.성도윤은 자
“와, 대박! 이런 주제에 감히 남자를 뺏으려고 했다고?”그 여자들은 비웃으며 휴대폰을 꺼내 차설아와 배경윤을 마구 찍어댔다. 조롱과 비아냥이 섞인 웃음소리가 이어졌다.“으...”배경윤은 분노로 얼굴이 새빨개졌다. 한편으로는 차설아를 보호해야 했고 동시에 그 여자들과 맞서야 해서 허둥지둥했다.“꺼져!”날카롭고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성도윤이 험상꿎은 얼굴로 난동을 부리던 여자 하나를 단숨에 잡아채 거침없이 밀쳐버렸다. “설아야!”그는 온몸에 더러운 물을 뒤집어쓴 채 힘없이 서 있는 차설아의 모습을 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주저 없이 배경윤을 밀어내고 차설아를 와락 끌어안았다.“도윤 씨?”차설아가 손을 더듬어 그의 손을 잡았다가 순간 움찔하며 한 발짝 물러났다.“가까이 오지 마요. 나 더러워요.”“상관없어.”성도윤은 단호하게 대답하며 그녀를 다시 품에 안아 두 손을 꼭 쥐고는 후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너무 늦게 왔지. 혼자 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정말 미안해.”그 모습을 본 여자들은 겁에 질려 황급히 도망쳤다.하지만 이 장면은 누군가에 의해 영상으로 찍혀 인터넷에 퍼졌고 각종 편집과 조롱으로 도배되었다.온라인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세상에 공평한 법은 있구나. 이게 바로 업보지!][아무리 그래도 팬들이 너무 폭력적이야.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그리고 바로 이 영상을 통해 차설아가 실명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한편, 성진의 차 안.성진은 무료한 듯 핸드폰을 스크롤내리며 영상을 보고 있었다.최근 권력 싸움에서 그는 확고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허전했다. 승리를 코앞에 두고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그러다 우연히 영상 속 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선글라스를 낀 채, 온몸에 오물을 뒤집어쓰고 초라하게 서 있는 차설아.그 순간, 그의 심장이 조여들었다.“설아의 눈이...”모든 게 퍼즐처럼 맞춰졌다.그가 가지고 있는 이 눈은 바로 차설아가 준 것이었다.여러 감
“당연히 다르지!”차설아가 단호하게 말했다.“너랑 나의 가장 큰 차이는,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도윤 씨 한 사람만 좋아했다는 거야. 그러니까 선우시원이든, 성진 씨든, 내 선택은 항상 도윤 씨였어. 하지만 넌 다르잖아... 네 마음은 진찬영 씨한테도 가고 도현 씨한테도 끌리고 있잖아. 솔직히 말하면, 너 둘 다 갖고 싶어 하는 거 맞지?”[너 진짜 무섭다!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집어내냐!]배경윤은 차설아의 날카로운 분석을 듣고 반박도 못 하고 민망하게 웃었다.사실 그녀도 자신이 왜 이렇게 고민하는지 몰랐고 이제 보니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 욕심이 많았던 거였다.“그러니까, 이제 솔직해지자. 굳이 도망갈 필요 없어. 양쪽 다 품으면 되잖아? 왼쪽엔 한 명, 오른쪽엔 한 명. 얼마나 좋아? 만약 내가 두 사람을 좋아할 능력이 있었으면 진작에 후궁 3천은 거느렸을걸?”차설아가 반은 농담, 반은 진심으로 말했다.[야, 진짜 맞는 말이네! 네 말 듣고 나니까 머리가 확 맑아졌어!]배경윤은 갑자기 머릿속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더니 핸드폰을 꺼내 신나게 글을 써 내려갔다.[가만 생각해 보니까, 역사적으로 연애에서 이득 본 건 전부 남자들이었어. 우리는 애 낳아야지, 생리해야지, 시댁 챙겨야지, 애 키워야지, 일도 해야지, 불륜까지 걱정해야지... 정작 이득은 다 남자들이 보고 있잖아. 그렇게 따지면, 우리가 남편을 두 명쯤 두는 것도 합리적인 거 아니야?]“그치? 나는 진찬영 씨랑 도현 씨 둘 다 괜찮다고 보는데? 한 명은 집에서 살림하고 나 챙겨주고 한 명은 데이트하고... 완벽한 조합 아니야?”[하하하, 그러네, 그러네! 생각만 해도 너무 좋다.]배경윤은 벌써 왼쪽엔 진찬영을, 오른쪽엔 사도현을 끼고 달콤한 나날을 보내는 상상을 하며 싱글벙글했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잠깐만, 그런데 말이야… 너 아까 네가 오직 성도윤 한 사람만 좋아했다고 했잖아. 설마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한 거야?]“어... 그러니까..
불과 20분도 채 안 돼서 배경윤은 성도윤은 물론 그의 주변 사람까지 깡그리 욕해버렸다.차설아는 그녀의 분노를 고스란히 느꼈고 이런 분위기에서 성도윤과 다시 화해했다는 사실을 밝힐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아 얼른 화제를 돌렸다.“됐고, 너 얘기나 해 봐. 그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 촬영은 잘 끝났어? 최종 선택은 누구야?”“이 타이밍에 왜 하필 이걸 묻냐, 이 친구야!”배경윤은 코를 킁킁대며 조금 민망한 표정을 짓더니 또 귤을 집어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나 몇 회 봤는데 사도현 씨도 그렇고 진찬영 씨도 그렇고, 둘 다 너한테 진심이더라. 지금 많이 고민되겠어, 맞지?”차설아도 친구의 선택이 궁금했다.“하... 너까지 이 얘기를 꺼내다니, 나 진짜 이 주제에서 벗어날 수가 없구나.”배경윤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퇴원 후 팬들을 만나고 오빠를 만나고 그리고 차설아를 만나기까지, 늘 똑같은 질문을 받는 것 같았다.그러다 문득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그래, 사도현과 진찬영, 둘 다 진심이었어. 그런데 나는 도대체 누구를 더 좋아하는 걸까?’“설아야, 너라면... 내가 누구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해?”배경윤은 차설아의 말을 가장 신뢰했기에 모든 기대를 걸고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너만 말해 봐. 네가 고르라고 하면 난 그냥 그 사람 선택할게.”“장난치지 마. 이런 중요한 인생 결정을 남한테 맡기면 안 돼. 네가 직접 결정해야지.”“내가 모르겠으니까 묻는 거잖아!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찬영 씨가 더 맞는 것 같아. 여러 면에서 봤을 때 우리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거든. 그런데...”배경윤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찬영 씨가 나한테 마취 깨고 난 뒤의 영상을 보여줬거든. 그걸 보고서야 알았어. 내 무의식은 사도현한테 더 끌리고 있더라. 거의 그를 한입에 집어삼킬 기세였어. 이유 없이 스킨십하고 싶고 안고 싶고 뽀뽀하고 싶고... 나 진짜 미쳤나 봐.”“음, 알겠다. 그러니까 네가 진찬영 씨를 좋아하는 감정은 ‘영혼의 동반자’
두 사람은 점점 지루해졌다.[우리 근처 공원 가볼까? 여기 많이 변했더라. 원래 화학 공장을 지으려던 곳인데 결국 보존돼서 주민 지역으로 바뀌었대. 습지 공원도 새로 조성돼서 꽤 예쁘더라고...]배경윤은 문장을 입력하다 문득 차설아가 더 이상 앞을 볼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문장을 고쳐 적었다.[우리 근처 습지 공원 가볼래? 공기가 정말 좋더라.]“좋아!”차설아는 고민 없이 바로 대답했다. 그녀도 사실 집에만 계속 있다 보니 너무 답답해서 누군가가 데리고 나가 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참이었다.배경윤은 차설아의 손을 잡고 함께 근처 습지 공원으로 향했다.공원 안에는 커다란 인공 호수가 있었고 호숫가엔 무성한 갈대밭이 펼쳐져 있었다. 많은 관광객들이 인증사진을 찍고 있었지만 차설아와 배경윤은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해 비교적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그곳엔 커다란 바위 하나가 호수 중앙을 향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덕분에 신선한 공기와 은은한 물풀 향기가 물씬 느껴졌고 햇살이 호수 위로 내려앉아 반짝이며 일렁였다.[괜찮으면 눈이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 말해줄 수 있어?]배경윤은 귤을 까면서도 궁금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타자한 문자를 음성으로 변환해 차설아에게 물었다.“빚을 갚았어.”차설아가 담담하게 말했다.[무슨 빚이길래 네 눈까지 내줘야 했어?]“마음의 빚.”[마음의 빚이라니, 누구한테?]배경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네가 무슨 빚을 졌다고 그래? 항상 손해 보는 쪽은 너였잖아.]“성진 씨...”차설아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예전에,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자신의 눈을 도윤 씨에게 줬어. 그렇게 똑똑했던 사람이었는데 점점 나락으로 빠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 그 모습을 보면서 너무 괴로웠어. 그의 인생을 망쳐버린 게 결국 나였으니까. 이 은혜를 갚지 않으면 평생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어.”[뭐라고? 네 말은, 네 눈을 성진한테 줬다는 거야?]배경윤은 화가 나서 귤을 손에 꽉 쥐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