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닦을 때 그녀는 약간 난처해하며 우물쭈물했는데 시종 옷을 걷어내고 닦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걱정하지 마, 난 아무것도 안 보여요.”그렇게 말하면서 성진은 백미러를 닫고 두 손을 들며 말했다.남자가 자신을 등지고 백미러까지 닫자 차설아는 한결 편하게 꼼꼼하게 몸을 닦기 시작했다.한편 성진은 아예 상의를 벗어 조수석으로 던졌고 완벽한 근육 라인이 차설아 앞에 드러났다.솔직히 말해서 그의 사촌 형 성도윤보다 못하지 않았다."콜록콜록!"차설아는 이에 헛기침하며 얼른 눈을 돌렸다."하하, 형수님, 도윤이랑 아이 둘을 낳았는데도 이렇게 수줍음이 많으시다니. 당신네 부부간의 즐거움은 매우 보수적인가 보군요!”"입 닥쳐!"차설아는 남자의 등에 주먹을 날리며 경고를 날렸다."내가 네 차에 탔다고 네가 헛소리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또 이렇게 분별없이 굴면 내려.”"미안해요. 내가 이런 거 처음 아는 것도 아니고. 최대한 진지하려고 노력할게요.”하지만 성진은 차설아에게 맞는 걸 즐겼고 그와 차설아가 이렇게 애매한 분위기 속에 단둘이 있는 시간이 너무 소중했는데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차 안의 온풍은 따뜻했고 두 사람은 더 이상 축축한 상태가 아니어서 기분이 조금은 풀렸다.성진은 스피커를 틀었고 차 안은 경쾌한 곡들로 둘러싸였는데 그녀와 그가 모두 좋아하는 라이트 록 음악이 흘러나왔다."우왕좌왕하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지하철을 탔는데 바로 8시 30분. 바쁜 사람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헤드셋을 끼고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지...”이런 리듬은 창밖 빗방울과도 잘 어울렸는데 차설아도 한때 밴드의 보컬이었던 만큼 음악에 민감했고 이내 빽빽한 기타와 드럼 비트 소리에 맞춰 머리를 흔들었다.성진은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그래, 이게 바로 내가 아는 차설아지, 멋지고 제멋대로고 만사에 해탈하고. 배신자 때문에 너무 슬퍼할 필요 없어.”"헛소리 작작 해.”"그럼 아까 빗속에서 폭주하고 울면서 무고한 행인을 폭행한 사람은 누구지?”
성진은 의자에 엎드려 뒷자리에 앉은 차설아를 향해 손짓했다. "귀 이리 대봐요, 내가 말해줄게.”차설아는 천진난만해 기대에 섞인 얼굴로 다가갔다. 피부에 달라붙은 민소매 꽃무늬 드레스는 옷깃이 살짝 컸는데 어깨에서 비스듬히 흘러내려 새하얀 어깨를 드러냈다.성진은 이 장면을 잠깐 흘겼는데 무의식적으로 침을 삼켰다."나와 결혼하고 성대 그룹을 가져요. 그럼 성도윤이 화가 나 죽을걸.”“???”성도윤은 열에 둘째 치고 차설아가 이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너 정말 죽고 싶구나, 아직 덜 맞았지? 또 나를 놀려!”차설아가 또 펀치를 날리는 것을 보고 성진은 얼른 손을 들어 용서를 빌었다."일단 화내지 말아요, 내 말을 끝까지 들어보라고요...”"무슨 할 말이 더 있어? 네 입에서 무슨 좋은 말이 나오겠어.”"내가 결혼하라는 건 진짜 결혼하자는 게 아니고 그냥 이 기회를 빌려 화풀이나 하라는 거죠...”성진은 정색을 하며 말을 이었다."생각해봐, 성도윤은 성대 그룹을 지키기 위해 너를 배신하고 서가와의 정략결혼을 선택했어. 만약 결국 네가 성대 그룹을 얻고 나처럼 네 말을 고분고분 듣는 꽃미남까지 얻으면 그의 체면을 구기는 데 충분하지 않을까?”“성대 그룹을 얻는다고?”이 말은 오히려 차설아의 마음을 조금 움직였다.지금 그녀의 손에 있는 천신 그룹도 새 출발을 기다리고 있는데 만약 정말 업계 선두인 성대 그룹을 손에 넣는다면 천신 그룹의 앞날은 물론 지금은 망한 차가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다.예전에는 성도윤을 생각해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지만 지금은... 한번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성진은 여자의 표정을 살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때, 나랑 한번 해보지 않을래요?”차설아는 성급하게 물어보는 성진의 표정을 보며 냉소를 지었다."이 자식 이거 정말 야망이 큰 것 좀 봐. 지난번 일이 망하고 성도윤에게 개처럼 쫓겨난 지가 얼만데 다시 또 이런 짓을 꾸며? 너는 정말 성도윤이 너를 뿌리째 뽑아버릴
"부끄러워하지 마. 난 엄청 개방적인 사람인걸?”"상상력이 어떻게 이렇게 풍부할 수가 있지? 혹시 전생에 책을 썼나?”"아니, 아니, 솔직히 말해 난 책도 썼었어. 나는 잘나가는 소설을 썼었는데 영화로도 만들어졌었지!”차설아는 사뭇 자랑스럽게 말했다.그해 화제가 됐던 '차성윤설'은 그녀가 처음 써서 후에 성도윤이 후속작을 썼는데 나중에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었다.차설아는 손을 비비며 신이 나서 말했다."괜찮다면 내가 당신과 성도윤을 원본으로 한 소설을 맞춤 제작할 수도 있어. 아마 핫뜨 사이트에 발표될 거야. 네티진들 사랑 엄청 많이 받을걸?”성진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어색해하며 되도록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말했다."고마워요. 하지만 당분간은 필요 없을 것 같네요.”"푸하하하, 부끄러워서 그래?”차설아는 점점 더 두 사람의 관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너랑 성도윤이면 대체 누가 탑일까? 아니면 네가 해, 미친 탑이랑 냉정한 바텀, 너무 재밌을 것 같지 않아? 네가 성도윤 혼 좀 낼 수 있고 얼마나 좋아!”성진:"...”차설아:"항상 네 사촌 형을 죽이겠다고 소리쳤잖아, 이번에는 내가 너를 만족시켜 줄게.”성진: "...”차설아는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은 탓에 창작욕이 폭발했는데 그 자리에서 컴퓨터를 꺼내 키보드를 두드릴 충동이 일었다.성진은 들으면 들을수록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는데 어느새 차설아의 소설 속에서는 두 사람이 해외로 나가 혼인신고까지 했다니?"그만!"그는 참다못해 손을 뻗어 여자의 작은 입을 막은 다음 그녀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그의 오뚝한 콧날은 그녀의 희고 깨끗한 뺨에 닿았고 그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당신의 추측 말이야, 하나는 맞았어. 내가 탐나는 게 하나 있긴 해...예를 들면, 너.”이상한 기운이 차 안을 채웠고 야릇한 감정이 두 사람을 감쌌다.성진은 차설아의 입술을 보며 침을 삼켰는데 목젖의 움직임이 선명했고 그는 참지 않고 눈을 감고는 차설아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어떻게 하면 눈앞의
매년 열리는 전 세계 전자기술 산업 서밋이 해안 산타피아 호텔에서 개최된다. 초대된 인원들은 모두 세계 최고의 기술 회사의 대표들로 성대 그룹과 KCL 그룹은 당연히 그중 가장 실력이 막강한 두 회사였기에 기사들의 주목을 받아 왔다.다만 최근 성대 그룹에 일이 생기고 성대 그룹과 KCL 그룹의 합작이 확정되지 않고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최대 규모인 G6 칩 핸드폰 사업이 반년 가까이 지체되면서 주요 생산라인과 판매라인이 멈춰서는 등 사태로 실적이 2분기 연속 하락하는 큰 손실을 보았다.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서가를 비롯한 투자회사들이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투자금 철회를 제기하면서 성대 그룹의 최고 에이스인 연구개발(R&D)팀도 뿔뿔이 흩어지는 등 그룹 전체가 암울한 조짐을 보이고 있다.따라서 오늘 이 글로벌 전자기술산업 회의는 성대 그룹에게 매우 중요하며 향후 10년 동안 해안 및 전 세계 전자기술 분야의 산업 구조를 결정한다고도 할 수 있었다.“서가네 투자회사가 진짜 성대 그룹에 대한 투자를 철회할까?”“성대 그룹이 과연 KCL과 협력할 수 있을까?”“성대 그룹이 위기를 잘 넘기고 1위 자리를 굳건히 유지할 수 있을까.”이 모든 궁금증이 이 회담에서 해답을 얻을 것이다.이른 아침부터 호텔 입구에는 기자들이 몰려들어 회의를 생중계하고 싶어 안달이었다.하지만 회의 입장 요구가 많아 전자기술 분야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아니면 입장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고 설사 유명 언론 매체라도 호텔 외연에서 기다려야만 했다.주차장에는 꽃과 레드카펫이 깔렸고 여러 유명인사가 하나둘씩 등장했다.그러다 길쭉한 링컨 한 대가 들어서자 기자들은 일제히 셔터를 누르며 흥분했고 구경꾼들은 수다를 떨었다."서 씨네 차인 것 같은데... 이번 회의 이후에도 서가가 성대 그룹과 계속 협력할 수 있을까요?”"계속 협력하겠죠. 얼마 전에는 두 대가족이 정력 결혼에 대해 의논을 했다던데 왜 또 추진이 안 되는지 모르겠어요...”"계속 협력할지는 서가네 딸 한마디로 결정 날 일이
"마음대로 해. 성가네가 망해도 난 상관없어.”성도윤은 이미 이 모든 것에 싫증이 났고 상인들이 서로 속이고 속이는 더러운 짓거리들을 싫어했다.세상 사람들이 쫓는 명예를 그는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었는데도 그는 이런 데서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먼저 얘기하고 있어요. 나 바람 좀 쐬고 올게요.”남자는 고개를 약간 끄덕이며 손에 든 샴페인 잔을 내려놓고는 몰려든 군중 속에서 몸을 빼내어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자리를 떴다.산타피아 호텔 2층. 커다란 테라스에는 푸르고 무성한 열대 식물이 심겨 있었고 그 위에는 작은 불빛이 반짝이는 것이 작은 별처럼 보였다.이곳은 조용하고 아늑하며 때로는 날아다니는 새와 나비가 있었는데 사람들의 발길이 드물었다.성도윤 역시 우연히 이곳을 찾았는데 그러다 겹겹이 늘어선 나무꽃밭을 지나 테라스 통나무 난간에 기대어 있는 매혹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상반신이 타이트하고 하체가 펄럭이는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등은 완전히 드러난 디자인으로 눈처럼 희고 섬세한 등 라인을 자랑해 눈길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산들한 바람이 스쳐 지나가 그녀의 불규칙한 붉은색 치맛자락과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 머리카락도 따라 휘날렸는데 말할 수 없는 정취가 넘쳤다.'차설아?'성도윤은 손가락을 오므리며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여자는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지으며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귀밑으로 넘겼다.“왔어?”그녀는 마치 오랫동안 기회를 노린 사냥꾼처럼 그녀의 사냥감이 제 발로 집까지 걸어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성대 그룹 대표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어?”차설아는 레드 와인 한 잔을 손에 들고 살랑살랑 흔들며 말했다.'이럴 때 아래에 있는 유명 인사들과 산업의 미래를 담론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이런 곳에서 이러고 있어?”성도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여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물었다."당신은 여긴 왜 왔어? 옷은 이게 또 뭐고?”"옷이 뭐가 어때서?”차설아는 술잔을 내려놓고 치맛자락을 들고 빙글빙글 돌며 남자의 눈을
“글쎄요?”차설아는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 여우처럼 신비롭고 요염한 웃음을 날리며 종잡을 수 없게 했다.그녀는 부드럽고 가느다란 손을 뻗어 남자의 완벽한 뺨을 어루만졌다. 약간 까칠한 수염과 얼굴의 냉기는 너무나 익숙했다. 옛날의 금슬이 아직도 눈에 선하지만 두 사람은 마치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당신이 무슨 목적으로 왔든 당장 나가. 여긴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니야.”성도윤은 애써 냉혹한 모습을 보이며 차설아가 떠나게 하려 했다.그는 차설아가 갑작스레 나타나서 그가 힘들게 쌓아 온 노력을 깨뜨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마지막 순간에 차설아 때문에 마음이 약해질까 봐 두렵기도 했다.만약 마음이 약해지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나를 급히 쫓아내는 건 당신이 찔리는 것이 있기 때문이죠?”차설아는 정곡을 찔렀다.“...”성도윤은 차설아를 외면한 채 그의 손을 놓으며 안전거리를 유지하려 했다.성도윤은 자신의 약점을 잘 알고 있다. 보기엔 새침한 뇌섹남이지만 실제로는 사랑밖에 모르는 단세포 동물이었다. 차설아와 가까이할수록 이성은 더욱 흐려졌다.하필이면 차설아는 청개구리처럼 말을 듣지 않았고 거리를 두려 하면 오히려 더 껴안으며 달라붙었다. 어깨를 껴안고 뜨거운 입술을 얼굴에 대며 유혹했다. “오늘 밤 당신을 되찾기 위해 올 거야. 나 믿지?”“그만 좀 해!”성도윤은 차설아가 이렇게 주동적일 줄 생각지도 못했으며 내심 기뻐했으나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차갑게 대했다.“당신은 나와 헤어질 준비를 다 했다고 하지 않았어? 난 그저 당신의 백업일 뿐 내가 없어도 여전히 눈부실 거라고 했지. 헤어질 날이 되니 도리어 당신이 손을 떼지 못하네.”“당신도 헤어지는 날까지 라고 했어. 하지만 우린 아직 그 정도는 아니잖아.”차설아는 고양이처럼 자신의 머리를 성도윤의 어깨에 기대며 애교를 부렸다. “나는 당신이 아직도 나를 사랑한다고 믿어. 분명히 고민 탓에 별수 없었을 거야. 여기에 다른 사람이 없고 오직 나와 당신뿐이야. 내가 기회를
테라스의 다른 구석에서 성진이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그는 말쑥한 차림새에 테 없는 안경까지 쓰고는 웃는 듯 마는 듯 걸어 나왔다.“자기야, 이젠 여한이 없을 테니 슬슬 준비 시작해도 돼.”성진은 손목에 있는 비싼 시계를 가리키며 차설아를 귀띔해주었다.“맞아, 쇼 타임 시작이야!”차설아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나서 씩씩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의 초라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졌다.“성 대표, 자업자득이야.”차설아는 성도윤의 어깨를 툭 치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또 성진에게 다가가 그의 팔짱을 끼고는 연회장으로 갔다.“...”성도윤은 그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말없이 있다가 가볍게 웃었다.차설아 답게 복수를 하든 다른 무엇을 원하든 더는 그를 위해 슬퍼하지 않는다면 그는 만족할 거다.차설아와 성진이 연회장에 나타났을 때 많은 사람의 눈총을 받았다. 하나는 권력 찬탈을 하려 했으나 실패한 2인자.하나는 가문이 몰락하고 남자에게 버림받은 무능한 여자.이 둘은 이런 자리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잘못이었고 무시당했다.뭇사람들의 받들림속에 있던 서은아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자 마음이 다소 불편해졌다.화려한 회전계단을 바라보니 차설아와 성진이 그곳에 있었다.서은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차설아 앞으로 다가가 도도하게 물었다.“차설아 씨, 성 부사장의 파트너 신분으로 이번 회의에 참여했어요?”서은아는 차설아 앞으로 다가가 일부러 언성을 높여 비아냥거렸다.“오늘 이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모두 업계에 일정한 공헌을 한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걸 잘 모르나 봐요. 성 부사장도 자격이 없지만, 당신처럼 멋만 부리는 여자는 더더욱 자격이 없어요.”“이런 규칙도 있었나요? 어머 미안, 난 전혀 몰랐어요!”성진은 예전처럼 어리바리하게 보이기 위해 히죽히죽 웃었다.“그리고 울 허니가 나를 따라 이번 회의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허니를 따라 회의에 들러리로 온 거야. 허니는 하이 테크 협회 회장이거든. 나는 허니를 따라서 식견을 넓
하이 테크 협회 현임 회장 단기혁은 곧게 선 양복을 입고 안경을 밀며 차분하게 말했다.“여러분, 급해서 하지 마세요. 제가 차설아 씨에게 초청장을 보낸 이유는 그의 특별한 신분, 그리고 하이 테크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차설아 씨는 누구보다도 이 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있어요. 업계의 좋은 발전을 위해 차분한 교류를 바래요.”단기혁의 말에 나이가 좀 많은 몇몇 어른 들은 몹시 불쾌해하였다.“단기혁,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20대 계집애의 공로와 지위가 우리를 초과할 수 있다니! 이 자식 미인계에 속았나?”“단기혁, 우리는 당신을 하이 테크 협회 회장으로 뽑을 수 있지만 쫓아낼 수도 있어.”단기혁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원탁회의가 시작되면 나의 깊은 뜻을 알게 될 거에요. 만약 그때가 되어도 차설아 씨가 이번 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없다고 투표되면 난 기꺼이 해임하겠어요.”단기혁 회장이 패기 있게 말하자 차설아를 더는 난처하게 하지 않고 각자 흩어지고 말았다.서은아는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아 술을 한잔 가득 따른 후 능청스럽게 차설아에게 건넸다.“차설아 씨, 내 판단이 맞는다면 당신은 도윤 씨를 위해 온 거죠? 날짜도 참 잘 골랐어요. 오늘 이 연회를 빌어 나와 도윤 씨는 사랑 발표를 하기로 했어요. 진심으로 축복해줄 거죠?”차설아는 술잔을 건네받은 다음 쿨하게 건배했다.“나의 축복이 당신의 마음을 안정시킨다면 기꺼이 해드리죠. 하지만 당신은 도윤 씨를 지킬 수 없어요. 내가 만약 당신이라면 나는 이 밑지는 장사를 하지 않을 거예요. 지금은 자랑하지만, 나중에 차이게 되면 낭패가 따로 없어요.”이 말을 들은 서은아는 명문가 아가씨의 체면을 돌보지도 못하고 포효했다.“우리를 저주하지 마세요! 나와 도윤 씨는 항상 함께 할 거에요. 4년 전에도, 4년 후에도 버림받은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죠!”그러면서 차설아의 얼굴에 와인을 뿌렸다.성진은 재빨리 차설아를 품에 감싸며 서은아에게 경고했다.“서은아 씨, 과분했어요. 계
사도현의 말에 병실 안이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사실 요즘 늘 이런 분위기가 반복되고 있었다.진찬영이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고 사도현이 뭐라 비꼬는 것의 반복이었다배경윤은 마치 인형처럼 두 남자 사이에서 양쪽으로 잡아당겨지는 기분이었다.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피곤했다.신중히 고민한 끝에 그녀는 결국 화가 치밀어 올라서 핸드폰을 꺼내 이렇게 적었다.[두 사람 다 내일부터 오지 마.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아.]배경윤은 이렇게 적어서 각각 사도현과 진찬영, 두 사람에게 각각 보여주었다.그러자 진찬영이 바로 사과했다.“미안해요, 경윤 씨. 제 잘못이에요. 제가 강요하지 말아야 했어요.”그는 깨끗하고 맑은 얼굴에 마치 대학교 남학생 같은 순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는데 어떤 여자든 그의 순진한 표정을 보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사도현 같은 사람에게 놓고 말해서 진찬영처럼 하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그래서 그는 이를 악물고 진찬영을 노려보며 이를 갈며 말했다.“여우 같은 놈.”하지만 진찬영은 그 말을 듣고도 전혀 화를 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눈을 살짝 내리깔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억울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도현 씨, 미안해요. 사실 저도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아요. 그런데 경윤 씨가 너무 좋아서 어쩔 수 없나 봐요. 소유욕 때문에 말이 거칠어졌어요. 제가 떠날게요. 경윤 씨만 행복할 수 있다면 저는 상관없어요.”“진찬영 씨, 그럴듯하게 포장하면 제가 못 알아볼 줄 아세요?”사도현이 버럭 소리쳤지만 진찬영은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경윤 씨, 전 경윤 씨가 행복하길 바랄 뿐이에요. 만약 제 존재가 부담스럽다면 더 이상 여기 있지 않을게요. 잘 지내요.”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려 했다.하지만 그 순간, 배경윤은 순간적으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본능적으로 그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저었다.배경윤은 핸드폰을 들어 차분한 표
병실 밖에서 우연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사도현은 코웃음을 쳤다.그러곤 갓 사 온 레드벨벳 케이크를 들고 들어왔다.“사과 같은 거 먹어서 뭐 해? 차갑기만 하고 이가 시려서 고생한다고... 케이크 사 왔으니까 이거 먹어. 이거 사려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사도현은 진찬영과 배경윤 사이에 떡하니 자리 잡더니 작고 정교한 케이크를 배경윤에게 건넸다.배경윤은 평소 사도현에게 그리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진 않았지만 이 레드벨벳 케이크만큼은 예전부터 너무나도 먹고 싶어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바로 받아 들었다.이 케이크 가게의 사장은 굉장히 까다로운 성격으로 유명했는데 하루에 딱 세 개만 만들었고 돈이 많다고 해서 아무나 살 수 있는 게 아니었다.그 사장이 진심이 느껴지는 손님에게만 케이크를 파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배경윤도 몇 번이나 줄을 서서 사장에게 간절히 부탁했지만 끝내 사지 못했었다.그런 케이크를 사도현이 어떻게든 구해 왔으니 사느라 엄청 고생했다는 말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을 것이다.그런데 바로 그때, 진찬영이 차가운 표정으로 배경윤에게 손을 내밀었다.“사과에는 비타민이 풍부하지만 케이크에는 당분이 너무 많아요. 지금은 회복하는 중이라서 단 음식을 많이 먹으면 안 돼요.”“경윤 씨, 자제해야죠? 빨리 회복해야 일찍 퇴원하고 목도 나을 수 있잖아요.”배경윤은 케이크를 한번 내려다보더니 침을 꿀꺽 삼켰다.갑자기 먹기가 두려워졌던 것이다.“그깟 조각 케이크 하나가 무슨 대수라고 그래요. 의사도 안 된다고 안 했잖아요. 게다가 케이크가 주는 행복은 그쪽이 하는 아재 개그보다 훨씬 크다고요.”사도현 역시 싸늘하게 그의 말을 맞받아쳤다.“만약 정말 경윤 씨를 위한다면 건강부터 챙겨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지금은 행복보다 회복이 더 중요해요.”진찬영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끝까지 반대할 작정이었다.“경윤이 인생이니까 제가 책임져요. 우리는 연인 사이예요. 앞으로도 결혼할 사이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그쪽이 참
한편, 뱀에게 물린 배경윤은 일시적인 쇼크 상태에 빠졌다가 구조된 뒤로 줄곧 병원에서 요양 중이었다.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그는 목숨을 건졌지만 프로그램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녀와 사도현, 진찬영 사이에서 벌어진 삼각관계로 인해 그녀를 둘러싼 논란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네티즌들은 세 가지 부류로 나뉘었는데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들,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들, 그리고 나머지는 중립적인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또 사도현을 좋아하는 사람, 진찬영을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배경윤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그들 사이의 논쟁은 끊이질 않았고 결국 이 세 사람은 인기가 많아져서 배경윤 같은 일반인조차 연예인처럼 주목받게 되었다.배경윤은 목숨을 건졌지만 부작용으로 목소리를 잃게 되었다.병원에 있는 동안, 사도현과 진찬영이 번갈아 가며 그녀를 돌봤다. 그 덕분에 병실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격한 신경전이 벌어지게 되었다.그날도 사도현은 회사 일을 마치자마자 일찍 병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진찬영이 더 먼저 도착해 있었다.늘 조용하던 그였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과일을 깎으면서도 배경윤을 웃겨주려고 그녀에게 장난을 쳤다. 그의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배경윤은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경윤 씨, 사과 먹으면 하나 더 들려줄게요.”진찬영은 깎은 사과를 한입 크기로 잘라서 그녀에게 건넸고 배경윤은 반짝이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활발하고 털털한 성격을 가졌기에 평소와 달리 아무 말 없이 웃는 모습은 뜻밖의 차분함과 부드러움을 풍기고 있었다.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저 예전에 도사를 만난 적 있는데 그 사람이 그러더군요. 매주 일요일 밤 12시 이후가 귀신들한테 제일 위험한 시간이라고 말이에요. 왜 그런지 알아요?”진찬영은 일부러 신비로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배경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핸드폰으로 타자를 했다.[왜요? 왜요? 빨리 말해봐요!]그녀는 평소 점을 치는 거나 미신 같은 걸 꽤 좋아했다. 그래
하지만 차설아는 현이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오후가 되자 김정민이 두 아이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리고 현이는 퇴근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그녀는 가방을 메고 텅 빈 거리를 걸었다. 마음이 무겁고 복잡해서인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걸음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거의 집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한 그림자가 나타나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내가 시킨 일은 제대로 했어?”검은 옷을 입고 커다란 모자로 얼굴을 반쯤 가린 여자였다. 얼굴에는 깊은 흉터가 새겨져 있었고 눈빛은 싸늘했다.“말씀하신 대로 다 했어요. 제발 엄마를 놓아주세요.”현이는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애원했다.“계속해. 열흘 뒤에야 풀어줄 거야.”여자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며 현이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었다.“헛짓거리할 생각은 마. 날 속이거나, 하루라도 늦거나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네 엄마는 죽는 거야. 알아?”“네, 알겠어요.”현이는 침을 꿀꺽 삼키며 몸을 살짝 떨었다. 감히 반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그제야 그 여자는 현이를 놓아주고 뒤돌아서 걸어가기 시작했다.그 순간, 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 세웠다.“잠깐만요!”그 여자는 걸음을 멈췄다.“뭔데?”“그냥 궁금해서요. 설아 씨랑 무슨 원한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설아 씨는 정말 착한 분이에요. 앞도 보지 못하는 상황이라 이미 충분히 힘들어하시는데...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 거죠?”현이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그녀는 이 여자에게 조종당해 차설아를 해치는 일이 너무 괴로웠다. 그런데 만약 이유조차 모르고 있으면 그녀는 언젠가 그 죄책감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질 것만 같았다.그러자 그 모자를 쓴 여자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착하다고?”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모자 아래서 반짝이는 두 눈은 마치 독을 품은 뱀과도 같았다.“차설아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나 해? 그 여자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그 여자가 누굴 해쳤는지 너는 상상도 못 할걸?”“그럴
“현이 씨?”차설아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이 시간대에 집에 있는 사람이라면 현이 뿐이었으니 말이다.하지만 현이는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차설아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그녀는 즉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그쪽... 현이 씨 아니죠?”“설아 씨, 저 맞아요.”현이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의 활기차고 상냥한 말투와 달랐다.차설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라도 있어요?”“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집에 일이 좀 있어서요.”현이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얼버무렸다. 그리고는 최대한 평소처럼 행동하려 애썼다.“설아 씨, 아까 뭐라고 하셨어요?”“아, 옷 좀 가져다 달라고 했어요. 옷장 맨 왼쪽에 있는 니트 한 벌이면 돼요.”차설아가 또렷하게 말했다.“알겠습니다.”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옷장으로 가 그녀가 원하는 옷을 꺼냈다. 니트를 받아 든 차설아는 능숙하게 옷을 입기 시작했다.비록 그녀는 앞을 볼 수는 없었지만 자립심이 강했기에 일상생활에는 큰 불편이 없었다.오히려 현이 입장에서는 여느 고용인들보다 차설아를 돌보는 게 훨씬 수월했다. 그래서 그녀는 진심으로 차설아를 좋아했다.하지만...아름답고 따뜻한 그녀의 모습을 보며 현이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아침 식사 시간이 되자 현이는 평소처럼 우유 한 잔에 통밀 토스트, 그리고 과일 몇 조각을 준비했다.차설아는 식탁에 앉아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 토스트를 씹으며 현이에게 말했다.“혹시 집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어려운 일이라도 있으면 말해요. 제가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요.”“아, 아니에요.”현이는 입술을 꼭 깨물며 망설였다.“그냥... 가족끼리 또 싸웠을 뿐이에요. 사실 맨날 싸워서 이제 익숙하지만요. 그래도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뭘 그렇게까지 격식을 차려요? 앞을 못 보고 나서 지금까지 현이 씨가 절 도와주고 있잖아요. 오히려 제가 현이 씨한테 고마워해야 하는데...”차
성도윤은 남자로서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것도, 눈물을 흘리는 것도 싫어했었다. 하지만 차설아는 그로 하여금 닭살 돋는 말을 하게 만들었고 눈물도 흘리게 했다.그녀를 만난 순간부터 그는 평생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된 기분이었다.“알면 됐어요. 제가 얼마나 좋은 아내인데요! 그러니까 평생 저만 사랑해 주세요.”차설아는 그렇게 말하며 성도윤의 목을 감싸안고 입을 맞췄다.술이란 참 좋은 것이었다. 완전히 긴장을 풀어 주고 가장 솔직한 자신을 드러내게 해 줬으니 말이다.사실 차설아는 오래전부터 성도윤과 진하게 키스하고 싶었다. 그저 자존심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었다.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녀는 술기운을 빌려 그동안 부족했던 만큼 한꺼번에 채울 생각이었다.“너, 너... 취한 거 아냐?”성도윤은 갑자기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차설아를 보고 당황했다. 평소에 그녀가 이러는 건 꿈이거나 아니면 술에 취했을 때뿐이었으니 말이다.그는 어찌할 바 몰랐다. 괜히 진하게 키스했다가 그녀를 놀라게 할까 봐 조심스러웠다.“취했든 안 취했든 상관없어요. 오늘은 그냥 키스하고 싶을 뿐이에요.”그녀는 두 손으로 성도윤의 얼굴을 감싸 쥐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입술을 포갰다. 차설아가 워낙 격렬하게 덤벼드는 바람에 두 사람은 그대로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아니면... 위층으로 올라갈까?”성도윤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살짝 쉬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그것도 괜찮은 선택인 것 같은데요?”그녀는 장난스럽게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그를 자기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위층으로 가면 단순히 키스만 하는 게 아닐 텐데 괜찮아요?”“상관없어. 오늘 밤, 난 주인님의 말씀만 잘 따를 테니까.”그렇게 말한 성도윤은 차설아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는 긴 다리로 망설임 없이 계단을 올랐고 단숨에 침실까지 도착했다.아이들이 캠프를 떠난 타이밍이 이렇게 절묘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이토록 완벽한 둘만의 시간을 두 사람은 너무 오래
성도윤의 반응에 차설아는 깜짝 놀랐다. 그녀도 자신의 말이 지나쳤다는 걸 깨달았다.“미안해요. 저는 그냥 도윤 씨가 나중에 후회하지 않았으면 해서...”차설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아는 성도윤은 아주 대단한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먹이 사슬의 최고점에 서 있는 존재였다. 그런 그가 사소한 감정에 휘둘려 무너져 버리면 그녀는 가슴이 너무 아플 것 같았다.무엇보다도 성도윤이 가장 후회할 거라는 것을 아는 차설아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녀는 그 순간을 보고 싶지 않았다.“후회할지 말지는 내 선택이야. 나는 이제 어른이고 나한테 진짜 중요한 게 뭔지 잘 알아.”성도윤은 불만을 억누르려 애쓰며 크고 따뜻한 손으로 차설아의 손을 덮었다.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우리의 관계는 진짜 유리 조각인 것 같아. 햇빛 아래에서 보면 맑고 아름답지만 쉽게 깨지는... 그래서 우리 둘이 함께 지켜나가야 해. 나는 우리가 힘들게 찾은 이 행복이 산산조각 나는 걸 원하지 않아. 그러니까 날 믿어주면 안 돼?”“더 이상 뭐라 하지 않을게요. 무슨 일이 생기든 함께 맞서면 되니까요.”차설아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성도윤을 다독이는 듯했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었다.사실 가장 힘든 건 성도윤이 아니라 차설아였다. 만약 예전처럼 멀쩡한 두 눈을 가지고 있었다면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도윤이 큰 위기에 처하더라도 자기가 든든한 버팀목으로 되어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하지만 지금 차설아는 성도윤에게 그저 짐일 뿐이었다. 그를 도와줄 힘도 없으면서 부담만 늘려 가는 것 같아서 그녀는 너무 괴로웠다. 그래서 자꾸 포기하고 싶어졌던 것이다.“네가 뭘 두려워하는지 알지만 걱정하지 마. 그런 날이 오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니까.”성도윤은 차설아를 품에 안으며 그녀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그러다가 성도윤은 깊은숨을 내쉬고 차설아를 바라보며 말했다.“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뭔데
차설아는 테이블 위에 놓인 꽃다발을 안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이거 장미예요? 향이 정말 좋아요. 분명 아주 생생하고 예쁠 거예요.”“지나가다가 너랑 참 잘 어울리는 장미가 보여서 샀어. 예쁘잖아.”성도윤은 아낌없이 달콤한 말을 건넸다.“도윤 씨 너무 많이 변한 거 아니에요? 열 마디 중 아홉 마디가 사랑 고백인데요? 예전 같았으면 이런 말은 일 년에 한 번도 안 했을걸요?”차설아는 부끄러운 듯 장난을 치면서 그를 놀렸다.성도윤은 전형적인 철벽남이었다. 잘 웃지도 않고 말수도 적었다. 달달한 말은커녕 대화도 하기 힘들 정도였다.지금까지 함께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면 두 사람 모두 참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차설아는 그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을 더없이 소중하게 여겼다.그녀가 스테이크 자르는 걸 불편해하자 성도윤은 아무 말 없이 고기를 작은 조각으로 잘라 그녀의 접시에 놓아 주었다.차설아는 고개를 숙이고 스테이크를 먹으며 무심한 듯 그에게 물었다.“오늘 회의 어땠어요? 많이 힘들었어요?”성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담담하게 말했다.“대표 자리에 있으면 편한 날이 없지. 익숙해.”“사람들이 도윤 씨를 곤란하게 했죠? 뉴스에도 나왔던데...”성대 그룹이 뭘 하든 기자들은 항상 과장해서 말했고 모두 기사로 보도되었다. 일부러 찾아보지 않은 차설아도 알게 될 정도였다.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큰 문제에 부딪혔다는 걸 말이다. 깊이 분석할 필요도 없었다.그런데도 성도윤은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고 모든 걸 혼자 감당하면서 그녀를 위해 저녁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그런 그의 마음이 차설아는 너무도 감동적이었다.“내가 누군데? 성대 그룹의 대표야. 그래서 주주들에게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어. 요즘 회사 실적이 좋지 않으니 견제를 당하는 것도 당연한 거지.”“너무 걱정하지는 마. 최악이라고 해도 내가 대표 자리에서 내려오면 그만이야. 어차피 돈은 넘쳐나니까. 너랑 아이들한테 쓸 돈은 충분해. 게다가 우리 아내도 한 재력
회의가 끝나자마자 성도윤은 마치 도망치듯 발걸음을 재촉하며 차설아네 집으로 돌아갔다.예전에는 밤늦게까지 일만 하고 야근도 밥 먹듯이 하던 워커홀릭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변해버렸다. 1분도 그녀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성도윤의 이런 태도는 직원들에게도 영향을 줬다. 그를 따라 항상 야근을 하던 회사 직원들도 야근을 줄이기 시작했고 덕분에 회사 분위기는 한층 더 좋아졌다.집으로 가는 길에 그는 꽃 한 다발 스테이크를 샀다. 오늘 저녁은 차설아와 함께 촛불을 켜고 오붓한 저녁 식사를 할 계획이었다.비록 반나절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그 시간이 성도윤에게는 몇 주일 같이 느껴졌다.게다가 달이와 원이도 이틀 동안 캠프에 참가하게 되는 바람에 집에는 차설아와 그녀를 돌봐주는 가정부 현이만이 남아 있었다.“대표님, 돌아오셨어요?”현이는 시급을 받는 가정부였기에 성도윤이 집에 돌아오자 짐을 챙겨 퇴근할 준비를 했다. 그는 거실과 집 안을 둘러보았지만 차설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성도윤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설아는 어디 있어?”“설아 씨는 좀 피곤하다고 하셔서 지금 침실에서 쉬고 계세요. 깨워드릴까요?”“아니, 그냥 퇴근해. 오늘 수고했어.”성도윤은 부드럽게 말했다.“그럼 대표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일 다시 올게요.”현이는 인사를 남기고 집을 나섰다.넓은 저택에는 성도윤과 차설아, 단둘만이 남았다. 그는 차설아를 깨우지 않았고 꽃을 내려놓은 후 바로 주방으로 가서 스테이크를 굽기 시작했다.오랜만에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순간이었기에 그는 그녀에게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팬 위에서 스테이크가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가 났다. 스테이크가 적당하게 익자 성도윤은 그 위에 후추 가루를 솔솔 뿌렸다. 그리고 최상급 레드와인을 꺼냈다.그때,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늘 왜 이렇게 로맨틱하게 구는 거죠?”그가 뒤를 돌아보자 차설아가 잠옷 차림으로 주방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왜 내려왔어? 아직 준비도 안 됐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