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누가 감히 성도윤에게 이렇게 무례하게 굴줄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성도윤의 가운은 흠뻑 젖었고 머리카락도 흠뻑 젖었는데 또렷한 이목구비는 쓰라리고 초라해 보였다.그러나 남자는 전혀 화를 내지 않았고 오히려 웃음을 지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은 햇빛 아래서 더욱 차갑게 빛났다."당신의 복수가 겨우 이거야? 정말 유치하네.”"물론 이건 애피타이저일 뿐이야. 앞으로는 놀랄만한 만찬이 더 많으니 딱 기다려.”차설아는 독설을 내뱉은 뒤 호스를 뿌리치고는 미친 듯이 연회장을 박살 내고서야 호텔을 나섰다.호텔 관계자가 달려들어 따지려 하자 성도윤이 제지했다.남자는 차갑게 말했다.“마음대로 하게 내둬요, 비용은 제가 대신 내죠.”서은아는 차설아가 멀어지자 그제야 수영장에서 뭍으로 올라와서는 성도윤에게 다가왔다. "이렇게 반응이 클 줄 몰랐는데 내가 따라가서 설명해야 하나?”"네가 진심으로 해명하려 했다면 오늘의 모든 일이 없었을 것 아니야?”남자의 차가운 말에는 털끝만큼의 감정도 없었는데 예전의 '형제' 정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도윤아, 지금 날 탓하는 거지, 그렇지?”"아버지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내가 얼마나 큰 노력을 했는지 알아? 난 단지 네가 나와 3개월 동안 연애하기를 바랐을 뿐이야. 3개월 후에 성가와 서가의 원한이 모두 사라지면 그때 너는 여전히 너의 아내를 찾아 돌아갈 수 있어. 이게 너한테 이렇게 큰 희생이야?”"성가와 서가는 결국 전쟁이 일어날 거야. 내가 3개월 타협한다고 해서 이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뜻이야. 내가 너와 3개월을 연애하기로 한 것은 단지 너희들이 설아는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기를 바랄 뿐이야.”성도윤은 위협적인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3개월 후 네 손에 있는 것을 깨끗이 없애지 않으면 서씨 집안의 모든 사람이 다 같이 그 대가를 치를 거야.”이 말에 서은아는 격노했고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그 여자를 그렇게 사랑해? 네 평생의 앞길과 가문의 이익을 걸어서라도 상관 없는
차설아는 그 말에 즉시 폭주를 멈추고 성진의 우산을 낚아채고는 고개를 들고 가슴을 쭉 피고는 아무렇지 않다는 모습을 보였다.그녀는 아무리 슬퍼도 혼자 슬퍼할 뿐 절대로 쓰레기 같은 남자 앞에서 그녀의 슬픈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다...몇 분 동안이나 쇼를 했는데도 사람이나 차가 오지 않자 그녀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저 쓰레기는 어디 있지?”“푸하하하!”성진은 참지 못하고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형수는 정말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귀엽고 도도한 여자야...”“???”"그럴 필요 없어, 거짓말이야. 지금쯤 따뜻한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서은아랑 꽁냥대고 있을 텐데 언제 폭우 속에서 뛰어다니겠어.”“야 이 나쁜 놈아, 감히 나를 가지고 놀다니!”차설아는 원래 화가 난 데다가 지금 성진에게 이렇게 놀림까지 당하니 화가 나서 그를 잡고 한바탕 때리며 말했다."성가의 남자들은 모두 한패가 되어 나를 괴롭히는 거 같단 말이지. 내 편이 없으니 죽도록 나를 괴롭히고... 때려 죽일거야 진짜!”그녀의 솜씨는 원래 최상급이었는데 게다가 화까지 난 지금 성진은 그야말로 인육 샌드백이나 다름없었는데 설상가상 비까지 내리니 그 모습이 참혹하기 그지없었다.빗물이 두 사람의 옷을 흠뻑 적셨고 성진은 아예 바닥에 대자로 뻗어 죽을 각오를 하고 말했다."때려라 때려, 이렇게 하는 게 형수를 편안하게 해줄 수만 있다면 마음껏 나를 때려요...”"자, 내가 귀하게 컸다고 불쌍해하지 말고 때려요.”남자의 말은 차설아로 하여 온몸에 소름이 돋게 했는데 순간 때릴 생각이 사라졌다.그리고 그녀는 바람 빠진 공처럼 주저앉았는데 빨간 우산은 거꾸로 옆에 내동댕이쳐져 있는 모습이 빗물에 씻긴 장미처럼 아름답고 연약했다.“흑흑!”차설아는 끝내 참지 못하고 두 다리를 끌어안고 빗속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폭우는 그녀의 울음소리와 눈물을 잘 가렸다..."됐어, 됐어, 너도 충분히 때렸어. 우리 다시 차에 타자. 계속 맞으면 우리 둘 다 감기에
몸을 닦을 때 그녀는 약간 난처해하며 우물쭈물했는데 시종 옷을 걷어내고 닦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걱정하지 마, 난 아무것도 안 보여요.”그렇게 말하면서 성진은 백미러를 닫고 두 손을 들며 말했다.남자가 자신을 등지고 백미러까지 닫자 차설아는 한결 편하게 꼼꼼하게 몸을 닦기 시작했다.한편 성진은 아예 상의를 벗어 조수석으로 던졌고 완벽한 근육 라인이 차설아 앞에 드러났다.솔직히 말해서 그의 사촌 형 성도윤보다 못하지 않았다."콜록콜록!"차설아는 이에 헛기침하며 얼른 눈을 돌렸다."하하, 형수님, 도윤이랑 아이 둘을 낳았는데도 이렇게 수줍음이 많으시다니. 당신네 부부간의 즐거움은 매우 보수적인가 보군요!”"입 닥쳐!"차설아는 남자의 등에 주먹을 날리며 경고를 날렸다."내가 네 차에 탔다고 네가 헛소리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또 이렇게 분별없이 굴면 내려.”"미안해요. 내가 이런 거 처음 아는 것도 아니고. 최대한 진지하려고 노력할게요.”하지만 성진은 차설아에게 맞는 걸 즐겼고 그와 차설아가 이렇게 애매한 분위기 속에 단둘이 있는 시간이 너무 소중했는데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차 안의 온풍은 따뜻했고 두 사람은 더 이상 축축한 상태가 아니어서 기분이 조금은 풀렸다.성진은 스피커를 틀었고 차 안은 경쾌한 곡들로 둘러싸였는데 그녀와 그가 모두 좋아하는 라이트 록 음악이 흘러나왔다."우왕좌왕하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지하철을 탔는데 바로 8시 30분. 바쁜 사람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헤드셋을 끼고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지...”이런 리듬은 창밖 빗방울과도 잘 어울렸는데 차설아도 한때 밴드의 보컬이었던 만큼 음악에 민감했고 이내 빽빽한 기타와 드럼 비트 소리에 맞춰 머리를 흔들었다.성진은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그래, 이게 바로 내가 아는 차설아지, 멋지고 제멋대로고 만사에 해탈하고. 배신자 때문에 너무 슬퍼할 필요 없어.”"헛소리 작작 해.”"그럼 아까 빗속에서 폭주하고 울면서 무고한 행인을 폭행한 사람은 누구지?”
성진은 의자에 엎드려 뒷자리에 앉은 차설아를 향해 손짓했다. "귀 이리 대봐요, 내가 말해줄게.”차설아는 천진난만해 기대에 섞인 얼굴로 다가갔다. 피부에 달라붙은 민소매 꽃무늬 드레스는 옷깃이 살짝 컸는데 어깨에서 비스듬히 흘러내려 새하얀 어깨를 드러냈다.성진은 이 장면을 잠깐 흘겼는데 무의식적으로 침을 삼켰다."나와 결혼하고 성대 그룹을 가져요. 그럼 성도윤이 화가 나 죽을걸.”“???”성도윤은 열에 둘째 치고 차설아가 이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너 정말 죽고 싶구나, 아직 덜 맞았지? 또 나를 놀려!”차설아가 또 펀치를 날리는 것을 보고 성진은 얼른 손을 들어 용서를 빌었다."일단 화내지 말아요, 내 말을 끝까지 들어보라고요...”"무슨 할 말이 더 있어? 네 입에서 무슨 좋은 말이 나오겠어.”"내가 결혼하라는 건 진짜 결혼하자는 게 아니고 그냥 이 기회를 빌려 화풀이나 하라는 거죠...”성진은 정색을 하며 말을 이었다."생각해봐, 성도윤은 성대 그룹을 지키기 위해 너를 배신하고 서가와의 정략결혼을 선택했어. 만약 결국 네가 성대 그룹을 얻고 나처럼 네 말을 고분고분 듣는 꽃미남까지 얻으면 그의 체면을 구기는 데 충분하지 않을까?”“성대 그룹을 얻는다고?”이 말은 오히려 차설아의 마음을 조금 움직였다.지금 그녀의 손에 있는 천신 그룹도 새 출발을 기다리고 있는데 만약 정말 업계 선두인 성대 그룹을 손에 넣는다면 천신 그룹의 앞날은 물론 지금은 망한 차가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다.예전에는 성도윤을 생각해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지만 지금은... 한번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성진은 여자의 표정을 살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때, 나랑 한번 해보지 않을래요?”차설아는 성급하게 물어보는 성진의 표정을 보며 냉소를 지었다."이 자식 이거 정말 야망이 큰 것 좀 봐. 지난번 일이 망하고 성도윤에게 개처럼 쫓겨난 지가 얼만데 다시 또 이런 짓을 꾸며? 너는 정말 성도윤이 너를 뿌리째 뽑아버릴
"부끄러워하지 마. 난 엄청 개방적인 사람인걸?”"상상력이 어떻게 이렇게 풍부할 수가 있지? 혹시 전생에 책을 썼나?”"아니, 아니, 솔직히 말해 난 책도 썼었어. 나는 잘나가는 소설을 썼었는데 영화로도 만들어졌었지!”차설아는 사뭇 자랑스럽게 말했다.그해 화제가 됐던 '차성윤설'은 그녀가 처음 써서 후에 성도윤이 후속작을 썼는데 나중에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었다.차설아는 손을 비비며 신이 나서 말했다."괜찮다면 내가 당신과 성도윤을 원본으로 한 소설을 맞춤 제작할 수도 있어. 아마 핫뜨 사이트에 발표될 거야. 네티진들 사랑 엄청 많이 받을걸?”성진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어색해하며 되도록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말했다."고마워요. 하지만 당분간은 필요 없을 것 같네요.”"푸하하하, 부끄러워서 그래?”차설아는 점점 더 두 사람의 관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너랑 성도윤이면 대체 누가 탑일까? 아니면 네가 해, 미친 탑이랑 냉정한 바텀, 너무 재밌을 것 같지 않아? 네가 성도윤 혼 좀 낼 수 있고 얼마나 좋아!”성진:"...”차설아:"항상 네 사촌 형을 죽이겠다고 소리쳤잖아, 이번에는 내가 너를 만족시켜 줄게.”성진: "...”차설아는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은 탓에 창작욕이 폭발했는데 그 자리에서 컴퓨터를 꺼내 키보드를 두드릴 충동이 일었다.성진은 들으면 들을수록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는데 어느새 차설아의 소설 속에서는 두 사람이 해외로 나가 혼인신고까지 했다니?"그만!"그는 참다못해 손을 뻗어 여자의 작은 입을 막은 다음 그녀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그의 오뚝한 콧날은 그녀의 희고 깨끗한 뺨에 닿았고 그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당신의 추측 말이야, 하나는 맞았어. 내가 탐나는 게 하나 있긴 해...예를 들면, 너.”이상한 기운이 차 안을 채웠고 야릇한 감정이 두 사람을 감쌌다.성진은 차설아의 입술을 보며 침을 삼켰는데 목젖의 움직임이 선명했고 그는 참지 않고 눈을 감고는 차설아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어떻게 하면 눈앞의
매년 열리는 전 세계 전자기술 산업 서밋이 해안 산타피아 호텔에서 개최된다. 초대된 인원들은 모두 세계 최고의 기술 회사의 대표들로 성대 그룹과 KCL 그룹은 당연히 그중 가장 실력이 막강한 두 회사였기에 기사들의 주목을 받아 왔다.다만 최근 성대 그룹에 일이 생기고 성대 그룹과 KCL 그룹의 합작이 확정되지 않고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최대 규모인 G6 칩 핸드폰 사업이 반년 가까이 지체되면서 주요 생산라인과 판매라인이 멈춰서는 등 사태로 실적이 2분기 연속 하락하는 큰 손실을 보았다.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서가를 비롯한 투자회사들이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투자금 철회를 제기하면서 성대 그룹의 최고 에이스인 연구개발(R&D)팀도 뿔뿔이 흩어지는 등 그룹 전체가 암울한 조짐을 보이고 있다.따라서 오늘 이 글로벌 전자기술산업 회의는 성대 그룹에게 매우 중요하며 향후 10년 동안 해안 및 전 세계 전자기술 분야의 산업 구조를 결정한다고도 할 수 있었다.“서가네 투자회사가 진짜 성대 그룹에 대한 투자를 철회할까?”“성대 그룹이 과연 KCL과 협력할 수 있을까?”“성대 그룹이 위기를 잘 넘기고 1위 자리를 굳건히 유지할 수 있을까.”이 모든 궁금증이 이 회담에서 해답을 얻을 것이다.이른 아침부터 호텔 입구에는 기자들이 몰려들어 회의를 생중계하고 싶어 안달이었다.하지만 회의 입장 요구가 많아 전자기술 분야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아니면 입장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고 설사 유명 언론 매체라도 호텔 외연에서 기다려야만 했다.주차장에는 꽃과 레드카펫이 깔렸고 여러 유명인사가 하나둘씩 등장했다.그러다 길쭉한 링컨 한 대가 들어서자 기자들은 일제히 셔터를 누르며 흥분했고 구경꾼들은 수다를 떨었다."서 씨네 차인 것 같은데... 이번 회의 이후에도 서가가 성대 그룹과 계속 협력할 수 있을까요?”"계속 협력하겠죠. 얼마 전에는 두 대가족이 정력 결혼에 대해 의논을 했다던데 왜 또 추진이 안 되는지 모르겠어요...”"계속 협력할지는 서가네 딸 한마디로 결정 날 일이
"마음대로 해. 성가네가 망해도 난 상관없어.”성도윤은 이미 이 모든 것에 싫증이 났고 상인들이 서로 속이고 속이는 더러운 짓거리들을 싫어했다.세상 사람들이 쫓는 명예를 그는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었는데도 그는 이런 데서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먼저 얘기하고 있어요. 나 바람 좀 쐬고 올게요.”남자는 고개를 약간 끄덕이며 손에 든 샴페인 잔을 내려놓고는 몰려든 군중 속에서 몸을 빼내어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자리를 떴다.산타피아 호텔 2층. 커다란 테라스에는 푸르고 무성한 열대 식물이 심겨 있었고 그 위에는 작은 불빛이 반짝이는 것이 작은 별처럼 보였다.이곳은 조용하고 아늑하며 때로는 날아다니는 새와 나비가 있었는데 사람들의 발길이 드물었다.성도윤 역시 우연히 이곳을 찾았는데 그러다 겹겹이 늘어선 나무꽃밭을 지나 테라스 통나무 난간에 기대어 있는 매혹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상반신이 타이트하고 하체가 펄럭이는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등은 완전히 드러난 디자인으로 눈처럼 희고 섬세한 등 라인을 자랑해 눈길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산들한 바람이 스쳐 지나가 그녀의 불규칙한 붉은색 치맛자락과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 머리카락도 따라 휘날렸는데 말할 수 없는 정취가 넘쳤다.'차설아?'성도윤은 손가락을 오므리며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여자는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지으며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귀밑으로 넘겼다.“왔어?”그녀는 마치 오랫동안 기회를 노린 사냥꾼처럼 그녀의 사냥감이 제 발로 집까지 걸어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성대 그룹 대표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어?”차설아는 레드 와인 한 잔을 손에 들고 살랑살랑 흔들며 말했다.'이럴 때 아래에 있는 유명 인사들과 산업의 미래를 담론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이런 곳에서 이러고 있어?”성도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여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물었다."당신은 여긴 왜 왔어? 옷은 이게 또 뭐고?”"옷이 뭐가 어때서?”차설아는 술잔을 내려놓고 치맛자락을 들고 빙글빙글 돌며 남자의 눈을
“글쎄요?”차설아는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 여우처럼 신비롭고 요염한 웃음을 날리며 종잡을 수 없게 했다.그녀는 부드럽고 가느다란 손을 뻗어 남자의 완벽한 뺨을 어루만졌다. 약간 까칠한 수염과 얼굴의 냉기는 너무나 익숙했다. 옛날의 금슬이 아직도 눈에 선하지만 두 사람은 마치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당신이 무슨 목적으로 왔든 당장 나가. 여긴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니야.”성도윤은 애써 냉혹한 모습을 보이며 차설아가 떠나게 하려 했다.그는 차설아가 갑작스레 나타나서 그가 힘들게 쌓아 온 노력을 깨뜨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마지막 순간에 차설아 때문에 마음이 약해질까 봐 두렵기도 했다.만약 마음이 약해지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나를 급히 쫓아내는 건 당신이 찔리는 것이 있기 때문이죠?”차설아는 정곡을 찔렀다.“...”성도윤은 차설아를 외면한 채 그의 손을 놓으며 안전거리를 유지하려 했다.성도윤은 자신의 약점을 잘 알고 있다. 보기엔 새침한 뇌섹남이지만 실제로는 사랑밖에 모르는 단세포 동물이었다. 차설아와 가까이할수록 이성은 더욱 흐려졌다.하필이면 차설아는 청개구리처럼 말을 듣지 않았고 거리를 두려 하면 오히려 더 껴안으며 달라붙었다. 어깨를 껴안고 뜨거운 입술을 얼굴에 대며 유혹했다. “오늘 밤 당신을 되찾기 위해 올 거야. 나 믿지?”“그만 좀 해!”성도윤은 차설아가 이렇게 주동적일 줄 생각지도 못했으며 내심 기뻐했으나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차갑게 대했다.“당신은 나와 헤어질 준비를 다 했다고 하지 않았어? 난 그저 당신의 백업일 뿐 내가 없어도 여전히 눈부실 거라고 했지. 헤어질 날이 되니 도리어 당신이 손을 떼지 못하네.”“당신도 헤어지는 날까지 라고 했어. 하지만 우린 아직 그 정도는 아니잖아.”차설아는 고양이처럼 자신의 머리를 성도윤의 어깨에 기대며 애교를 부렸다. “나는 당신이 아직도 나를 사랑한다고 믿어. 분명히 고민 탓에 별수 없었을 거야. 여기에 다른 사람이 없고 오직 나와 당신뿐이야. 내가 기회를
“꼬마야, 이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부모님은 어디에 계셔? 당장 돌아가.”키가 훤칠한 보디가드는 무기를 들고 인상을 찌푸린 채 원이를 노려보았다. 소영금은 병실과 엘리베이터 앞, 병원 내부 곳곳에 보디가드를 배정해 두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많은 인력을 투입한 것이다. 원이는 순리롭게 병원 내부로 들어갔지만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멈춰 섰다.“성도윤이 저의 보호자예요. 얼른 만나게 해주세요. 믿지 못하겠으면 저를 데리고 가주세요.”원이는 덩치가 몇십 배 더 큰 보디가드 앞에서 주눅이 들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네 장난에 내가 속을 줄 알아? 감히 성대 그룹의 성도윤 대표님을 만나려고 해? 꼬마야, 장난칠 거면 집으로 돌아가.”보디가드는 원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경계하더니 말을 이었다.“이제는 어린아이까지 동원해서 대표님을 해치려고 하는구나.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누구의 지시를 받고 여기까지 온 거지? 말하지 않으면 내가 직접 죽여줄게.”보디가드는 어느 가문에서 성씨 가문에 복수하기 위해 어린아이를 보낸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고는 원이의 어깨를 꽉 붙잡고 허공에 들어 올렸다.“어떤 무기를 갖고 왔는지 당장 말해! 내놓으란 말이야! 이번에는 독약인가?”“이것 좀 놓으세요. 나를 괴롭힌 걸 엄마가 알게 되면 당신들은 무사하지 못할 거예요! 이 손 놓으라고요.”원이는 허공에서 발버둥 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 생겨도 늘 침착하던 원이는 일을 크게 벌이기 위해 일부러 소란을 피웠다.성도윤이 원이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조용히 하지 못해? 이 자리에서 당장 죽여줄 수도 있어. 그 입 당장 다물어! 어린놈이 목소리는 왜 이렇게 큰 거야?”보디가드는 다른 환자들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원이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고 심장이 벌렁거렸다.‘보디가드 경력만 10년이 넘는데 꼬맹이 때문에 벌벌 떠는 꼴이라니... 우스운 모습을 보였어. 이러면 내 체면이 뭐가
하지만 이미 늦가을로 접어든 시기라 쌀쌀해진 날씨와 빨리 지는 해 때문에 이 시간에는 산책로에 사람도 거의 없었다.그런 길을 원이를 데리고 걷던 서은아는 자연스레 발걸음을 늦추며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꼬맹이, 넌 왜 혼자 온 거야? 엄마는? 너 혼자 나가는 데 걱정도 안 해?”“엄마가 사라져서 엄마 좀 찾아달라고 유전학적 아빠 찾아온 거예요.”성도윤이 병원에 입원해있다는 것도 차설아가 성진의 별장에 있다는 걸 알아낸 원이는 어린아이의 몸으로 그 먼 산까지 가서 엄마를 데려오는 건 비현실적일 것 같아 자신의 지원군을 얻기 위해 성도윤이 입원해있는 병원으로 온 것이다.“그런데 네 엄마 아빠는 이미 헤어진 사이잖아. 네 아빠가 엄마를 찾아줄 이유는 없는데 자꾸 이런 일로 아빠 귀찮게 하면...”“당신이 뭔데 의무가 있다 없다 에요, 우리 아빠도 아니면서. 그쪽이랑은 상관없는 사람이잖아요?”“내가 네 아빠랑 무슨 사인지 너도 잘 알잖아.”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서서 원이를 내려다보던 서은아의 눈빛이 점점 더 차가워져 갔다.“난 네 아빠랑 곧 결혼할 사람이야. 네 아빠는 네 엄마를 버리고 나랑 결혼하기로 했다고. 그런데도 내가 상관없는 사람이야?”“내연녀라는 말을 뭐 그렇게 거창하게 해요? 아줌마 입으로도 직접 말했잖아요, 곧 결혼할 사이라고. 그럼 아직은 상관없는 사람 맞네요.”어른들보다 더 분명한 사리로 서은아를 상대한 원이는 여전히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물론 원이도 제 엄마를 버린 아빠를 뼛속 깊이 원망하고 있지만 그래도 내연녀 앞에서만은 밀릴 수가 없었다.아빠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않은 이상, 엄마에 관한 일을 책임질 사람은 여전히 아빠였다.“넌 이렇게 똑똑하고 용감한데... 네 엄마는 너무 바보 같아. 이 사회가 얼마나 무서운지도 모르고 이렇게 널 혼자 내보냈으니 말이야. 가장 복잡한 게 인간의 마음인데, 오늘 날 만난 걸 다행으로 여겨. 내가 친절히 가르쳐줄게.”말을 마친 서은아는 순간 눈을 번뜩이더니 원이의 어깨를 잡고 그를
잘생긴 원이의 얼굴을 한참 뜯어보던 간호사는 성도윤과 묘하게 닮은듯한 이목구비에 가십거리를 알아낸 듯 익살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아, 너 대표님 아들이지?! 엄청 똑같게 생겼다!”성도윤의 아들이라는 말을 아주 싫어했던 원이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애어른 같은 말투로 말했다.“저는 그분 아들이 아니에요. 그분도 제 아빠가 아니시고요. 그냥 유전자로 엮여있는 것뿐이에요. 자기 아들도 못 알아보는 아빠는 세상에 없잖아요?”“어...”원이의 말에 간호사가 어쩔 줄 몰라 할 때 서씨 집안에서 보내온 영양제를 잔뜩 챙겨 들고 성도윤을 보러 온 서은아가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성도윤이 깨어났다는 소식만 들었지 그가 차설아를 기억해냈는지에 대해서는 들은 게 전혀 없었기에 서은아는 당장이라도 병실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소영금이 앞뒤로 경호원만 열댓 명을 붙여놓은 탓에 어떻게 들어가야 할지 몰라 답답해하고 있던 와중에 간호사와 얘기 중이던 원이가 그녀의 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그제야 방법이 떠오른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아이에게로 다가가 물었다.“꼬마야, 너 나 알아?”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서은아를 힐끗 본 원이는 표정을 찌푸리며 말했다.“알죠, 내 유전학적 아빠한테 들러붙는 여우 아줌마잖아요!”그 말에 화가 치밀어올랐지만 차마 화를 낼 수는 없었던 서은아는 주먹만 꼭 쥐며 말했다.“날 안다니 다행이네, 그럼 잘됐다. 너 아빠 보러 가고 싶은 거지? 아줌마랑 같이 가자.”“싫어요.”똑똑한 원이는 서은아가 이상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걸 바로 눈치채고는 단칼에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여우 아줌마는 나 갖다 팔 수도 있는 사람이잖아요. 나한테서 떨어져요!”그 말에 서은아는 당장이라도 아이의 뺨을 때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공공장소라 안간힘을 쓰며 참아냈다.“간호사 누나, 나 빨리 유전학적 아빠한테 데려다주세요.”서은아에게 한마디 하고 난 원이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고개를 들고 간호사를 보며 말했다.“그래, 나 따라와 아가야.”그런데
드디어 한시름 놓은 차설아가 묻자 달이는 천진한 표정으로 답했다.“그야 오빠가 괜히 어른들 걱정시킨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까요.”“걱정할 걸 알았으면 혼자 나가질 말았어야지.”차설아는 화낼 새도 없이 김정민을 향해 말했다.“이모, 얼른 원이한테 연락해서 어딨는지 물어봐 줘요.”“전화하고 있는데... 안 받아요.”“위치추적은 돼요?”“워치가 꺼져있어서 그것도 안 돼요.”“괜찮아요, 저한테 방법이 있으니까 노트북 좀 줘보세요.”달이랑 원이를 잃어버렸을 때를 대비해 차설아는 전에 아이들의 워치에 위치추적 어플을 깔아둔 적이 있었다. 그건 핸드폰이 꺼졌거나 배터리가 없을 때도 위치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어플이었기에 차설아는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마지막 로딩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화면에 원이 위치가 뜰 텐데, 보여요?”“내, 보여요!”눈을 감고도 키보드를 치는 차설아에 놀란 것도 잠시,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그녀에 김정민은 다급히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며 답했다.“지금... 재원 병원에 있다고 나오는데요?”“병원이요?”원이의 코딩기술 정도라면 자신의 위치를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기에 지금쯤 성진의 별장에 있을 거라 예상했던 차설아는 뜬금없는 위치에 미간을 찌푸렸다.어쩌다가... 재원 병원까지 간 거지?---한편 재원 병원 앞에 서서 몇 번이나 병원 이름을 읽어보던 원이는 틀림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작지만 당찬 아이가 씩씩하게 걸어들어오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지나치던 간호사 하나가 참지 못하고 아이에게 말을 걸어왔다.“아가야, 너 혼자 온 거야? 부모님은 어디 계셔?”“사람 좀 찾으러 왔는데요.”원이는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간호사를 보며 말했다.“예쁜 누나, 혹시 성도윤이라는 환자분 어느 병실에 입원해있는지 아세요?”“성 대표님 찾아온 거야?”간호사는 아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웃으며 알려주었다.“그럼 사람 잘 찾았네. 대표님 며칠 전에 뇌수술 마치고 입원해계신 데 내가 담당
“오빠는 볼일 있다고 나갔는데 민이 이모가 오빠 걱정된다고 아까 찾으러 나갔어요.”제 오빠가 집 밖을 나가는 건 자주 있는 일이라 달이는 차분하게 엄마의 질문에 답했다.달이한테 오빠는 자신이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는 천재였기에 그녀는 오빠가 매일 같이 나가도 한 번도 걱정한 적이 없었다.“뭐? 또 어디 간 거야?”하지만 엄마인 차설아는 잠깐이라도 한눈만 팔면 그 틈을 타 밖으로 나가버리는 원이 때문에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하지만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이 상황에 나가서 아이를 찾을 수도 없었기에 초조해하고 있는데 그때 김정민이 집으로 들어왔다.“아가씨, 오셨어요? 원이 도련님이 또 집을 나가셨어요! 어떡해요? 동네를 한 바퀴 다 돌았는데 어딨는지도 모르겠고...”밥을 하는 사이에 나가버린 원이 때문에 김정민은 아직도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원이가 나가기 전에 무슨 이상한 말을 했다거나 요즘 이상한 행동을 했다거나 한 적은 없었어요?”“별말은 하지 않고 그냥 몰래 나간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 아가씨가 영상통화 안 해준다고 아가씨한테 무슨 일이 난 것 같다면서 구하러 가겠다는 말을 한 적은 있어요. 저는 그냥 애니메이션 보고하는 말인 줄 알고 별로 신경을 안 썼었고요.”미간을 찌푸리며 묻는 차설아 김정민은 한숨을 앞세우며 답했다.“다 제 불찰이에요. 원이 도련님은 지능이 남달라서 보통 아이처럼 대하면 안 됐던 건데... 구하러 간다는 말이 장난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아마 그때부터 계획하고 있었을지도 몰라요...”손을 휘적이며 김정민에게로 다가간 차설아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이모 잘못 아니니까 자책하지 마세요. 따지면 제 잘못이죠. 제가 제대로 설명을 안 해서 모두를 걱정시켰어요.”차설아의 반응이 자신의 예상과 달라 이상하다고 느낀 김정민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자세히 보며 물었다.“아가씨, 이 밤에... 왜 선글라스를 끼고 계세요?”“그냥 산 타다가 눈을 좀 다쳐서 시력이 안 좋아졌어요. 병원 가봤는데
“어릴 때부터 지내던 곳이라 이곳 구조는 이미 몸에 익었어요. 눈 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이니까 걱정 마요.”자신이 정말 갈 수 있는 길이기도 했고 또 현이를 걱정시키고 싶지도 않았기에 차설아는 웃으며 말했다.“그, 그럼 조심하세요.”“네, 이제 그만 가봐요.”현이를 향해 손을 저어주던 차설아는 그녀가 떠났음을 확인하고서야 난간을 더듬으며 현관문을 찾아 비밀번호를 입력했다.전부터 감지력과 관찰력이 뛰어났던 차설아는 현이에게 한 말대로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집안으로 정확히 걸어가 문을 열고 오랜만에 익숙한 아이들의 이름을 소리높이 외쳐봤다.“원아, 달아!”“엄마!”차설아의 부름에 2층에 있던 달이는 서둘러 1층으로 뛰어가 그녀의 품에 폭 안겼다.“엄마! 왜 이제야 왔어요! 너무 보고 싶었다고요.”자신에게 애교를 부려오는 예쁜 딸의 머리를 쓰다듬던 차설아는 웃으며 물었다.“엄마 없을 때 떼 안 쓰고 잘 있었어?”“당연하죠. 나 이제 은하수 어떻게 그리는지도 아는데, 얼른 가요! 내가 보여줄게요!”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인 달이는 엄마의 이상함도 눈치채지 못하고 신나서 방방 뛰며 차설아의 팔을 잡고 계단을 올랐다.차설아는 몇 번이나 턱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서도 달이를 놀래키지 않으려 힘겹게 아이의 방까지 걸어갔다.발 빠르게 며칠 전에 그렸던 그림들을 꺼내온 달이는 칭찬을 바라는듯한 얼굴로 환히 웃어 보였다.“엄마, 이거 내가 그린 은하수예요. 반고흐 할아버지 거랑 비슷하죠? 오빠는 내가 그린 게 더 예쁘다고도 했어요!”“예쁘지, 너무 예쁘다. 우리 달이는 진짜 그림 천잰가 봐.”아무것도 볼 수 없던 차설아는 선글라스를 낀 채로 맞장구를 쳐주고 있었지만 앞으로는 이렇게 환하게 웃는 아이들의 모습도, 아이들이 그린 거, 만든 거 그 어느 것 하나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점차 저릿해졌다.“엄마는 저녁에 왜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요? 내가 여기에 색깔도 여러 개 섞어놨는데, 선글라스 끼고 있으면 잘 안 보이지 않아요?”천진난만
박서영의 말에 별 의심 없이 약을 받아 마신 성진은 눈이 아픔에도 박서영이 전화를 거는 모습을 보려고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그렇게 점차 의식이 흐려져 가던 성진이 쓰러질 때, 박서영은 수화기 너머의 현이를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현아, 빨리 차설아 씨 모셔와!”의사가 처방해준 약은 눈을 푹 쉬게 하라는 의미에서 수면제의 효과도 같이 내는 약이었는데 그래서 잠시 기절한 것뿐이었다.떠나기 전 성진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다던 차설아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박서영이 때마침 성진에게 약을 건넨 것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현이와 함께 방으로 들어온 차설아가 박서영을 향해 물었다.“어때요? 시력은 회복한 거예요? 배척반응은 없고요?”상처가 아직 다 아물지 않아 선글라스를 낀 탓인지 차설아는 전보다도 더 도도해 보여 전혀 실명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강인해 보이려고 애쓸수록 현이와 박서영은 점점 더 마음이 아팠고 그들의 죄책감도 깊어져 갔다.“회복은 잘 됐는데 오랜만에 눈을 뜨는 거라 눈이 아플 수는 있대요...”침대에 기절한 채 누워있는 성진을 보던 박서영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문제가 하나 생기긴 했는데... 도련님이 워낙 똑똑하셔서 눈만 보고도 차설아 씨 눈이란 걸 알아차리신 것 같아요. 저한테 당장 대학생 찾아오라고 하셔서 급한 대로 일단 약부터 먹인 거예요. 이 약 아니었으면 오늘 진짜 경을 쳤을 거예요.”“그건 내가 미리 대처하라고 했었잖아요. 나랑 눈 비슷한 대학생 찾아두라고. 아직 못 찾은 거예요?”“아니요, 찾긴 찾았는데... 그러면 또 수많은 거짓말을 해야 하니까... 그럴 거면 아예...”박서영은 자신이 내뱉는 말이 터무니없다는 걸 알면서도 입술을 깨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도련님한테 사실대로 말씀드리고 앞으로 도련님더러 차설아 씨를 보살피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절대 안 돼요!”차설아는 역시나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진이 성격은 서영 씨가 나보다도 더 잘 알잖아요. 내가 눈을 준 걸 알게 되
하지만 성진은 차분하고도 사연 있어 보이는 이 두 눈이 자신의 평소 성격과는 너무나도 달라 적응이 되지 않은 건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너 아빠가 말하는데 대답도 안 하고 뭐 하니? 귀까지 이식해줘야겠어?”“금방 깨어난 애한테 그만 좀 해요. 애가 죽을 때까지 몰아붙이기만 할 거예요?”그때 아들이라면 끔찍이 아끼던 단사란이 성진을 나무라는 성주원을 말리며 아들의 상태를 살폈다.갓 깨어난 아들과 몇 마디 나누던 그녀는 성진이 쉴 수 있게 사람들을 데리고 이내 밖으로 나가 버렸다.마침내 조용해진 주위에 박서영은 조심스레 성진에게로 다가가 말했다.“도련님, 괜찮으세요? 눈은 안 아프세요? 힘드시면 얼른 누워서 쉬세요.”“거울 줘.”“네?”“거울 달라고.”한층 어두워진 표정에 무거운 말투까지 더해지자 박서영은 잔뜩 긴장한 채로 큰 거울 하나를 성진에게 건넸다.거울을 받아든 성진은 빠르게 자신의 눈동자를 바라봤는데 그걸 보자마자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이 눈...”자신이 출구도 찾지 못하고 빠져서 허우적대던 너무나도 익숙한 그녀의 눈이 제 얼굴에 박혀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도련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세요? 오랜만에 본인 모습을 보는 거라 익숙하지 않으실 수도 있지만 선생님이 그건 다 정상적인 반응이라고...”한숨을 쉬던 성진은 박서영의 말을 자르며 차갑게 물었다.“나한테 눈 기증해줬다던 그 여대생 어딨어, 내가 지금 봐야겠어.”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두 눈이 그녀의 눈과 너무나도 닮아있어서 성진은 제 생각인지 사실인지 아니면 그저 착각일 뿐인지 당장 확인해보고 싶었다.성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서영은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도련님, 그 여대생은 이미 해안시를 떠나서 지금 찾는 건 좀 힘들 것 같아요...”“뭐가 힘든데.”“지금 어딨는지만 알아내. 여기까지 오는 게 힘들다면 내가 가면 되니까. 바로 차 준비하라고 이르고.”“그... 그게...”강압적인 성진의 태도에 박서영은 어찌할 줄 몰라 식은땀만 흘리고 있었
이튿날, 성진이 다시 눈을 뜨는 역사적인 순간을 보기 위해 그의 부모님과 박서영을 비롯한 성대 그룹의 이사진들이 그의 방안에 빼곡히 둘러서 있었다.“이제 붕대 풀 건데 준비되셨어요?”“네.”하얀 가운을 걸친 의사가 진지하게 묻자 침대 끝에 걸터앉은 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는 주먹을 말아쥐었다.그에게 있어서 눈을 뜬다는 건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았기에 지금 그는 이 자리에 선 그 누구보다도 더 흥분하고 있었다.성진의 동의를 구하고 붕대를 풀던 의사는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을 덧붙었다.“오랜만에 빛을 보는 거라 처음에는 눈이 아프고 시야도 모호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건 다 정상적인 현상이니까 너무 당황하지는 마세요. 강한 빛은 막아주는 안경을 따로 맞춰뒀으니까 계속 끼고 계시면 도움 될 거에요.”의사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마지막 한 겹 남았던 붕대가 아래로 흘러내렸고 마침내 성진은 제 부모님과 다른 사람들의 인영을 볼 수 있게 되었다.“진아, 어때? 우리 보여?”“네, 엄마. 엄마가 보여요 이제.”눈물을 흘리는 엄마를 봐서 그런가, 그쪽으로 시선을 옮기던 성진은 자신이 전보다 더 부드럽고 온화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오만방자한 게 디폴트 값이었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제 아들의 변화를 눈치챈 성주원은 의사를 보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내 아들이 눈을 뜬 것뿐인데 왜 성격도 바뀐 것 같죠? 다 큰 성인이 엄마를 보고 울리기나 하고, 전혀 남자답지 않잖아요 지금은!”“이것도 정상입니다...”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는 성주원에 의사는 난처한 기색을 드러내며 공손한 태도로 설명을 해주었다.“도련님이 기증받으신 게 여성분의 눈이라서 여성 특유의 세포나 DNA가 묻어있어요. 그래서 쉽게 공감하시는 걸 겁니다.”“어쩐지 저 눈은 우리 아들 눈빛이 아닌 것 같더라니까요! 이럴 줄 알았으면 기증자를 좀 더 골라볼 걸, 성도윤 그 자식이랑 경영권 싸움을 해야 하는 사내자식 눈이 저래서 어떡해. 웃음거리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