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누가 감히 성도윤에게 이렇게 무례하게 굴줄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성도윤의 가운은 흠뻑 젖었고 머리카락도 흠뻑 젖었는데 또렷한 이목구비는 쓰라리고 초라해 보였다.그러나 남자는 전혀 화를 내지 않았고 오히려 웃음을 지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은 햇빛 아래서 더욱 차갑게 빛났다."당신의 복수가 겨우 이거야? 정말 유치하네.”"물론 이건 애피타이저일 뿐이야. 앞으로는 놀랄만한 만찬이 더 많으니 딱 기다려.”차설아는 독설을 내뱉은 뒤 호스를 뿌리치고는 미친 듯이 연회장을 박살 내고서야 호텔을 나섰다.호텔 관계자가 달려들어 따지려 하자 성도윤이 제지했다.남자는 차갑게 말했다.“마음대로 하게 내둬요, 비용은 제가 대신 내죠.”서은아는 차설아가 멀어지자 그제야 수영장에서 뭍으로 올라와서는 성도윤에게 다가왔다. "이렇게 반응이 클 줄 몰랐는데 내가 따라가서 설명해야 하나?”"네가 진심으로 해명하려 했다면 오늘의 모든 일이 없었을 것 아니야?”남자의 차가운 말에는 털끝만큼의 감정도 없었는데 예전의 '형제' 정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도윤아, 지금 날 탓하는 거지, 그렇지?”"아버지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내가 얼마나 큰 노력을 했는지 알아? 난 단지 네가 나와 3개월 동안 연애하기를 바랐을 뿐이야. 3개월 후에 성가와 서가의 원한이 모두 사라지면 그때 너는 여전히 너의 아내를 찾아 돌아갈 수 있어. 이게 너한테 이렇게 큰 희생이야?”"성가와 서가는 결국 전쟁이 일어날 거야. 내가 3개월 타협한다고 해서 이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뜻이야. 내가 너와 3개월을 연애하기로 한 것은 단지 너희들이 설아는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기를 바랄 뿐이야.”성도윤은 위협적인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3개월 후 네 손에 있는 것을 깨끗이 없애지 않으면 서씨 집안의 모든 사람이 다 같이 그 대가를 치를 거야.”이 말에 서은아는 격노했고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그 여자를 그렇게 사랑해? 네 평생의 앞길과 가문의 이익을 걸어서라도 상관 없는
차설아는 그 말에 즉시 폭주를 멈추고 성진의 우산을 낚아채고는 고개를 들고 가슴을 쭉 피고는 아무렇지 않다는 모습을 보였다.그녀는 아무리 슬퍼도 혼자 슬퍼할 뿐 절대로 쓰레기 같은 남자 앞에서 그녀의 슬픈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다...몇 분 동안이나 쇼를 했는데도 사람이나 차가 오지 않자 그녀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저 쓰레기는 어디 있지?”“푸하하하!”성진은 참지 못하고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형수는 정말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귀엽고 도도한 여자야...”“???”"그럴 필요 없어, 거짓말이야. 지금쯤 따뜻한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서은아랑 꽁냥대고 있을 텐데 언제 폭우 속에서 뛰어다니겠어.”“야 이 나쁜 놈아, 감히 나를 가지고 놀다니!”차설아는 원래 화가 난 데다가 지금 성진에게 이렇게 놀림까지 당하니 화가 나서 그를 잡고 한바탕 때리며 말했다."성가의 남자들은 모두 한패가 되어 나를 괴롭히는 거 같단 말이지. 내 편이 없으니 죽도록 나를 괴롭히고... 때려 죽일거야 진짜!”그녀의 솜씨는 원래 최상급이었는데 게다가 화까지 난 지금 성진은 그야말로 인육 샌드백이나 다름없었는데 설상가상 비까지 내리니 그 모습이 참혹하기 그지없었다.빗물이 두 사람의 옷을 흠뻑 적셨고 성진은 아예 바닥에 대자로 뻗어 죽을 각오를 하고 말했다."때려라 때려, 이렇게 하는 게 형수를 편안하게 해줄 수만 있다면 마음껏 나를 때려요...”"자, 내가 귀하게 컸다고 불쌍해하지 말고 때려요.”남자의 말은 차설아로 하여 온몸에 소름이 돋게 했는데 순간 때릴 생각이 사라졌다.그리고 그녀는 바람 빠진 공처럼 주저앉았는데 빨간 우산은 거꾸로 옆에 내동댕이쳐져 있는 모습이 빗물에 씻긴 장미처럼 아름답고 연약했다.“흑흑!”차설아는 끝내 참지 못하고 두 다리를 끌어안고 빗속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폭우는 그녀의 울음소리와 눈물을 잘 가렸다..."됐어, 됐어, 너도 충분히 때렸어. 우리 다시 차에 타자. 계속 맞으면 우리 둘 다 감기에
몸을 닦을 때 그녀는 약간 난처해하며 우물쭈물했는데 시종 옷을 걷어내고 닦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걱정하지 마, 난 아무것도 안 보여요.”그렇게 말하면서 성진은 백미러를 닫고 두 손을 들며 말했다.남자가 자신을 등지고 백미러까지 닫자 차설아는 한결 편하게 꼼꼼하게 몸을 닦기 시작했다.한편 성진은 아예 상의를 벗어 조수석으로 던졌고 완벽한 근육 라인이 차설아 앞에 드러났다.솔직히 말해서 그의 사촌 형 성도윤보다 못하지 않았다."콜록콜록!"차설아는 이에 헛기침하며 얼른 눈을 돌렸다."하하, 형수님, 도윤이랑 아이 둘을 낳았는데도 이렇게 수줍음이 많으시다니. 당신네 부부간의 즐거움은 매우 보수적인가 보군요!”"입 닥쳐!"차설아는 남자의 등에 주먹을 날리며 경고를 날렸다."내가 네 차에 탔다고 네가 헛소리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또 이렇게 분별없이 굴면 내려.”"미안해요. 내가 이런 거 처음 아는 것도 아니고. 최대한 진지하려고 노력할게요.”하지만 성진은 차설아에게 맞는 걸 즐겼고 그와 차설아가 이렇게 애매한 분위기 속에 단둘이 있는 시간이 너무 소중했는데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차 안의 온풍은 따뜻했고 두 사람은 더 이상 축축한 상태가 아니어서 기분이 조금은 풀렸다.성진은 스피커를 틀었고 차 안은 경쾌한 곡들로 둘러싸였는데 그녀와 그가 모두 좋아하는 라이트 록 음악이 흘러나왔다."우왕좌왕하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지하철을 탔는데 바로 8시 30분. 바쁜 사람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헤드셋을 끼고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지...”이런 리듬은 창밖 빗방울과도 잘 어울렸는데 차설아도 한때 밴드의 보컬이었던 만큼 음악에 민감했고 이내 빽빽한 기타와 드럼 비트 소리에 맞춰 머리를 흔들었다.성진은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그래, 이게 바로 내가 아는 차설아지, 멋지고 제멋대로고 만사에 해탈하고. 배신자 때문에 너무 슬퍼할 필요 없어.”"헛소리 작작 해.”"그럼 아까 빗속에서 폭주하고 울면서 무고한 행인을 폭행한 사람은 누구지?”
성진은 의자에 엎드려 뒷자리에 앉은 차설아를 향해 손짓했다. "귀 이리 대봐요, 내가 말해줄게.”차설아는 천진난만해 기대에 섞인 얼굴로 다가갔다. 피부에 달라붙은 민소매 꽃무늬 드레스는 옷깃이 살짝 컸는데 어깨에서 비스듬히 흘러내려 새하얀 어깨를 드러냈다.성진은 이 장면을 잠깐 흘겼는데 무의식적으로 침을 삼켰다."나와 결혼하고 성대 그룹을 가져요. 그럼 성도윤이 화가 나 죽을걸.”“???”성도윤은 열에 둘째 치고 차설아가 이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너 정말 죽고 싶구나, 아직 덜 맞았지? 또 나를 놀려!”차설아가 또 펀치를 날리는 것을 보고 성진은 얼른 손을 들어 용서를 빌었다."일단 화내지 말아요, 내 말을 끝까지 들어보라고요...”"무슨 할 말이 더 있어? 네 입에서 무슨 좋은 말이 나오겠어.”"내가 결혼하라는 건 진짜 결혼하자는 게 아니고 그냥 이 기회를 빌려 화풀이나 하라는 거죠...”성진은 정색을 하며 말을 이었다."생각해봐, 성도윤은 성대 그룹을 지키기 위해 너를 배신하고 서가와의 정략결혼을 선택했어. 만약 결국 네가 성대 그룹을 얻고 나처럼 네 말을 고분고분 듣는 꽃미남까지 얻으면 그의 체면을 구기는 데 충분하지 않을까?”“성대 그룹을 얻는다고?”이 말은 오히려 차설아의 마음을 조금 움직였다.지금 그녀의 손에 있는 천신 그룹도 새 출발을 기다리고 있는데 만약 정말 업계 선두인 성대 그룹을 손에 넣는다면 천신 그룹의 앞날은 물론 지금은 망한 차가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다.예전에는 성도윤을 생각해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지만 지금은... 한번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성진은 여자의 표정을 살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때, 나랑 한번 해보지 않을래요?”차설아는 성급하게 물어보는 성진의 표정을 보며 냉소를 지었다."이 자식 이거 정말 야망이 큰 것 좀 봐. 지난번 일이 망하고 성도윤에게 개처럼 쫓겨난 지가 얼만데 다시 또 이런 짓을 꾸며? 너는 정말 성도윤이 너를 뿌리째 뽑아버릴
"부끄러워하지 마. 난 엄청 개방적인 사람인걸?”"상상력이 어떻게 이렇게 풍부할 수가 있지? 혹시 전생에 책을 썼나?”"아니, 아니, 솔직히 말해 난 책도 썼었어. 나는 잘나가는 소설을 썼었는데 영화로도 만들어졌었지!”차설아는 사뭇 자랑스럽게 말했다.그해 화제가 됐던 '차성윤설'은 그녀가 처음 써서 후에 성도윤이 후속작을 썼는데 나중에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었다.차설아는 손을 비비며 신이 나서 말했다."괜찮다면 내가 당신과 성도윤을 원본으로 한 소설을 맞춤 제작할 수도 있어. 아마 핫뜨 사이트에 발표될 거야. 네티진들 사랑 엄청 많이 받을걸?”성진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어색해하며 되도록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말했다."고마워요. 하지만 당분간은 필요 없을 것 같네요.”"푸하하하, 부끄러워서 그래?”차설아는 점점 더 두 사람의 관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너랑 성도윤이면 대체 누가 탑일까? 아니면 네가 해, 미친 탑이랑 냉정한 바텀, 너무 재밌을 것 같지 않아? 네가 성도윤 혼 좀 낼 수 있고 얼마나 좋아!”성진:"...”차설아:"항상 네 사촌 형을 죽이겠다고 소리쳤잖아, 이번에는 내가 너를 만족시켜 줄게.”성진: "...”차설아는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은 탓에 창작욕이 폭발했는데 그 자리에서 컴퓨터를 꺼내 키보드를 두드릴 충동이 일었다.성진은 들으면 들을수록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는데 어느새 차설아의 소설 속에서는 두 사람이 해외로 나가 혼인신고까지 했다니?"그만!"그는 참다못해 손을 뻗어 여자의 작은 입을 막은 다음 그녀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그의 오뚝한 콧날은 그녀의 희고 깨끗한 뺨에 닿았고 그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당신의 추측 말이야, 하나는 맞았어. 내가 탐나는 게 하나 있긴 해...예를 들면, 너.”이상한 기운이 차 안을 채웠고 야릇한 감정이 두 사람을 감쌌다.성진은 차설아의 입술을 보며 침을 삼켰는데 목젖의 움직임이 선명했고 그는 참지 않고 눈을 감고는 차설아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어떻게 하면 눈앞의
매년 열리는 전 세계 전자기술 산업 서밋이 해안 산타피아 호텔에서 개최된다. 초대된 인원들은 모두 세계 최고의 기술 회사의 대표들로 성대 그룹과 KCL 그룹은 당연히 그중 가장 실력이 막강한 두 회사였기에 기사들의 주목을 받아 왔다.다만 최근 성대 그룹에 일이 생기고 성대 그룹과 KCL 그룹의 합작이 확정되지 않고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최대 규모인 G6 칩 핸드폰 사업이 반년 가까이 지체되면서 주요 생산라인과 판매라인이 멈춰서는 등 사태로 실적이 2분기 연속 하락하는 큰 손실을 보았다.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서가를 비롯한 투자회사들이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투자금 철회를 제기하면서 성대 그룹의 최고 에이스인 연구개발(R&D)팀도 뿔뿔이 흩어지는 등 그룹 전체가 암울한 조짐을 보이고 있다.따라서 오늘 이 글로벌 전자기술산업 회의는 성대 그룹에게 매우 중요하며 향후 10년 동안 해안 및 전 세계 전자기술 분야의 산업 구조를 결정한다고도 할 수 있었다.“서가네 투자회사가 진짜 성대 그룹에 대한 투자를 철회할까?”“성대 그룹이 과연 KCL과 협력할 수 있을까?”“성대 그룹이 위기를 잘 넘기고 1위 자리를 굳건히 유지할 수 있을까.”이 모든 궁금증이 이 회담에서 해답을 얻을 것이다.이른 아침부터 호텔 입구에는 기자들이 몰려들어 회의를 생중계하고 싶어 안달이었다.하지만 회의 입장 요구가 많아 전자기술 분야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아니면 입장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고 설사 유명 언론 매체라도 호텔 외연에서 기다려야만 했다.주차장에는 꽃과 레드카펫이 깔렸고 여러 유명인사가 하나둘씩 등장했다.그러다 길쭉한 링컨 한 대가 들어서자 기자들은 일제히 셔터를 누르며 흥분했고 구경꾼들은 수다를 떨었다."서 씨네 차인 것 같은데... 이번 회의 이후에도 서가가 성대 그룹과 계속 협력할 수 있을까요?”"계속 협력하겠죠. 얼마 전에는 두 대가족이 정력 결혼에 대해 의논을 했다던데 왜 또 추진이 안 되는지 모르겠어요...”"계속 협력할지는 서가네 딸 한마디로 결정 날 일이
"마음대로 해. 성가네가 망해도 난 상관없어.”성도윤은 이미 이 모든 것에 싫증이 났고 상인들이 서로 속이고 속이는 더러운 짓거리들을 싫어했다.세상 사람들이 쫓는 명예를 그는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었는데도 그는 이런 데서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먼저 얘기하고 있어요. 나 바람 좀 쐬고 올게요.”남자는 고개를 약간 끄덕이며 손에 든 샴페인 잔을 내려놓고는 몰려든 군중 속에서 몸을 빼내어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자리를 떴다.산타피아 호텔 2층. 커다란 테라스에는 푸르고 무성한 열대 식물이 심겨 있었고 그 위에는 작은 불빛이 반짝이는 것이 작은 별처럼 보였다.이곳은 조용하고 아늑하며 때로는 날아다니는 새와 나비가 있었는데 사람들의 발길이 드물었다.성도윤 역시 우연히 이곳을 찾았는데 그러다 겹겹이 늘어선 나무꽃밭을 지나 테라스 통나무 난간에 기대어 있는 매혹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상반신이 타이트하고 하체가 펄럭이는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등은 완전히 드러난 디자인으로 눈처럼 희고 섬세한 등 라인을 자랑해 눈길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산들한 바람이 스쳐 지나가 그녀의 불규칙한 붉은색 치맛자락과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 머리카락도 따라 휘날렸는데 말할 수 없는 정취가 넘쳤다.'차설아?'성도윤은 손가락을 오므리며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여자는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지으며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귀밑으로 넘겼다.“왔어?”그녀는 마치 오랫동안 기회를 노린 사냥꾼처럼 그녀의 사냥감이 제 발로 집까지 걸어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성대 그룹 대표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어?”차설아는 레드 와인 한 잔을 손에 들고 살랑살랑 흔들며 말했다.'이럴 때 아래에 있는 유명 인사들과 산업의 미래를 담론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이런 곳에서 이러고 있어?”성도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여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물었다."당신은 여긴 왜 왔어? 옷은 이게 또 뭐고?”"옷이 뭐가 어때서?”차설아는 술잔을 내려놓고 치맛자락을 들고 빙글빙글 돌며 남자의 눈을
“글쎄요?”차설아는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 여우처럼 신비롭고 요염한 웃음을 날리며 종잡을 수 없게 했다.그녀는 부드럽고 가느다란 손을 뻗어 남자의 완벽한 뺨을 어루만졌다. 약간 까칠한 수염과 얼굴의 냉기는 너무나 익숙했다. 옛날의 금슬이 아직도 눈에 선하지만 두 사람은 마치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당신이 무슨 목적으로 왔든 당장 나가. 여긴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니야.”성도윤은 애써 냉혹한 모습을 보이며 차설아가 떠나게 하려 했다.그는 차설아가 갑작스레 나타나서 그가 힘들게 쌓아 온 노력을 깨뜨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마지막 순간에 차설아 때문에 마음이 약해질까 봐 두렵기도 했다.만약 마음이 약해지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나를 급히 쫓아내는 건 당신이 찔리는 것이 있기 때문이죠?”차설아는 정곡을 찔렀다.“...”성도윤은 차설아를 외면한 채 그의 손을 놓으며 안전거리를 유지하려 했다.성도윤은 자신의 약점을 잘 알고 있다. 보기엔 새침한 뇌섹남이지만 실제로는 사랑밖에 모르는 단세포 동물이었다. 차설아와 가까이할수록 이성은 더욱 흐려졌다.하필이면 차설아는 청개구리처럼 말을 듣지 않았고 거리를 두려 하면 오히려 더 껴안으며 달라붙었다. 어깨를 껴안고 뜨거운 입술을 얼굴에 대며 유혹했다. “오늘 밤 당신을 되찾기 위해 올 거야. 나 믿지?”“그만 좀 해!”성도윤은 차설아가 이렇게 주동적일 줄 생각지도 못했으며 내심 기뻐했으나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차갑게 대했다.“당신은 나와 헤어질 준비를 다 했다고 하지 않았어? 난 그저 당신의 백업일 뿐 내가 없어도 여전히 눈부실 거라고 했지. 헤어질 날이 되니 도리어 당신이 손을 떼지 못하네.”“당신도 헤어지는 날까지 라고 했어. 하지만 우린 아직 그 정도는 아니잖아.”차설아는 고양이처럼 자신의 머리를 성도윤의 어깨에 기대며 애교를 부렸다. “나는 당신이 아직도 나를 사랑한다고 믿어. 분명히 고민 탓에 별수 없었을 거야. 여기에 다른 사람이 없고 오직 나와 당신뿐이야. 내가 기회를
“누가 네 전 여자 친구라는 거야? 나는 너랑 모르는 사이야. 친한 척하지 마!”배경윤은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있었던 일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사도현한테 아주 실망했기에 다정하게 인사할 수가 없었다.“경윤아, 아무리 그래도 같은 침대에서 자던 사이였는데 너무 차가운 거 아니야? 우리가 어떻게 모르는 사이야.”사도현은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일부러 장난을 쳤다. 배경윤이 차갑게 구는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서 놀리고 싶었다.사도현은 앞으로 다가가서 허리를 숙이고는 배경윤과 눈을 마주쳤다.“다 잊어버려서 그런 거라면 이해할게. 내가 몇 번이고 너한테 말해주면 되거든.”“뭐, 뭐 어떻게 말해줄 건데?”배경윤은 갑자기 얼굴을 들이미는 사도현을 피하려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나의 전 여자 친구는 내가 벽에 밀치고 키스하는 걸 제일 좋아했어. 기억나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다시 알려줄 수도 있어.”사도현은 천천히 배경윤을 구석으로 몰아넣었고 자신감 넘치는 눈빛으로 배경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사도현, 너는 정말 나쁜 놈이야!”배경윤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민망해서 사도현의 뺨을 후려갈기려고 했다. 이때 사도현이 배경윤의 손목을 잡더니 품 안으로 끌어당기면서 속삭였다.“이제는 우리가 친한 사이였다는 걸 인정할 수 있겠어?”“나는...”배경윤은 거칠게 뛰는 심장 때문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래서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고는 입술을 깨물었다.“인정할 수 없어. 우리는 친한 사이가 아니야.”“모르면 함부로 말하지 마.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잖아.”사도현은 배경윤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손끝으로 배경윤의 코를 쓰다듬었다.배경윤은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고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 사도현이 미웠지만 제일 미운 건 자신이었다. 사도현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이 우스웠다.사도현이 적극적으로 들이대면 배경윤은 반격하지도 못하고 당하기만 했다.배경윤은 사랑의 싸움에서 사도현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사도현이 잡아당기면 끌려가고 밀
차설아는 해바라기 꽃을 바라보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눈빛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옛 친구가 보낸 선물이야.”“어느 친구가 보낸 거야? 너의 취향을 잘 알고 있는 친구라면 내가 아는 사람일 텐데 말이야.”배경윤은 해바라기 꽃의 내음을 맡으면서 싱글벙글 웃었다.“네가 아는 사람이야.”차설아를 고개를 끄덕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때 갑자기 불안해 난 선우시원이 그 꽃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다급히 물었다.“설마 나도 아는 사람이야?”“네가 아는 사람일 수도 있어. 하지만 확신하지는 못하겠어.”차설아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선우시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소를 지었다.“그럼 적어도 성도윤은 아니라는 거네? 누가 꽃을 보냈는지 몰라도 참 좋은 친구인 것 같아. 성도윤만 아니면 돼.”“왜 성도윤만 아니면 된다는 건데?”차설아는 선우시원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성도윤이 보낸 것이 아니라면 누가 보냈든 상관없어. 나의 라이벌은 성도윤 한 명뿐이잖아.”차설아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평소에는 총명해 보였던 선우시원이 갑자기 엉뚱한 말을 해서 의외였다.만약 선우시원이 밤마다 성도윤이 찾아와서 차설아한테 디저트를 먹여준다는 것을 알게 되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댈 것이다.“누가 보낸 선물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설아가 좋아하는 꽃을 보냈으니 좋은 사람 같아.”배경윤은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차설아를 관심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만족감을 느꼈다. 배경윤이 전생에 차설아의 엄마였다고 해도 믿을 판이었다.“내 얘기는 그만하고 네 얘기나 해줘. 어떻게 되었어?”차설아는 배경윤이 걱정되어 계속해서 물었다.“그 사람이랑 화해한 거야? 나 때문에 괜히 너도 그 사람이랑 싸운 건 아니지?”“내가 그놈이랑 싸울 게 뭐가 있다고 그래. 더 이상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야.”배경윤은 다른 사람의 말을 할 때면 신이 났다가 자신의 감정사를 얘기하려고 하면 잔뜩 긴장했다. 배경윤은 말을 버벅거렸다.“나는
일주일 뒤, 병원에서 정밀 검사 결과를 알려주었다. 차설아의 허리가 심하게 다친 건 맞지만 치료를 제때 받고 푹 쉬어서 생각보다 빨리 나았다. 그러기에 반신불수가 될 거라는 의심을 거두어도 되었다.그 소식을 알게 된 뭇사람들은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복 받은 사람들은 내가 딱 알아본다고 했잖아. 우리 설아가 복 받아서 빨리 나은 거야.”배경윤은 차설아를 끌어안고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배경윤은 제대로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해서 살이 많이 빠졌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배경윤이 다친 줄 알 것이다.“앞으로 높은 곳에 올라가야 하는 운동은 절대 하면 안 돼! 암벽 등반, 등산은 절대 안 되고 계단을 오를 때는 꼭 옆에 누군가가 있어야 해.”차성철은 미간을 찌푸린 채 진지하게 말했다. 한 번 큰 사고를 당했기에 차설아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더 신경 쓰고 싶었다.“성철 형,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옆에 붙어있으면서 스파크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할게요.”선우시원은 차설아를 힐끗 쳐다보면서 사뭇 엄숙하게 말했다.“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한 달 정도 입원하면 거의 다 나을 거래. 병실에만 있어서 답답하겠지만 참아. 오빠가 병원에 퇴원 신청을 하면 예정일보다 더 빨리 퇴원해서 집에 데려갈 거야. 간병인을 미리 알아보았으니 너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차성철은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 차설아를 바라보면서 울상을 지었다.“그러지 않아도 돼.”차설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말을 이었다.“나는 병원에 있는 게 좋아. VIP 병실이라 편하게 지낼 수 있잖아. 미리 퇴원 신청을 하지 않아도 돼. 귀찮고 복잡한 건 딱 질색이야.”“설아야, 너를 위해서라면 귀찮은 일도 다 해줄 수 있어. 너는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 퇴원 예정일을 앞당기는 건 복잡한 절차도 아니야.”차성철은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말했다.“오빠가 다 해놓을 테니 그날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자. 설아야, 오빠 믿지?”“아...”차설아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차설아가
사실 차성철은 최근 들어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고는 차설아의 병실에 긴급 신고 버튼을 설치해 주었다. 버튼만 누르면 병원의 긴급 벨이 울리면서 차성철이 배치한 보디가드가 병실로 달려올 것이다.차설아는 성도윤과 같이 있는 것이 좋아서 차성철한테 아무 일도 없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었다. 그런데 성도윤을 향한 마음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선을 지키지 못했다. 성도윤은 차설아를 떠보다가 결국 그 선을 넘어왔다.“나는 그저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게 행복할 뿐이야. 그래서 당신의 입도 닦아준 건데 싫으면 얘기해. 내일 밤부터 다시 오지 않을게. 케이크를 사던 가게의 파티시에를 스카우트해서 매일 케이크를 만들게 했지만 이제는 필요 없겠지...”성도윤은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말을 이었다.“내일 메뉴는 헤이즐넛 케이크라고 했어. 아쉽지만...”“잠시만요!”차설아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차설아가 제일 기대하던 메뉴가 바로 헤이즐넛 케이크였기에 성도윤을 내쫓을 수 없었다.“파티시에도 일하느라 고생했는데 어떻게 함부로 자르겠어요. 내일도 와주면 고맙겠지만 앞으로는 뭐가 묻어도 도와주지 말아요. 손은 멀쩡하니까 내가 직접 닦을게요.”“그래. 당신이 이토록 애원하니 한 번 고려해 볼게.”성도윤은 피식 웃으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 눈빛은 여우처럼 교활하기 그지없었다.“휴...”차설아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후회하기 시작했다. 성도윤은 예전처럼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다. 차설아를 부드럽게 다가가면 마음을 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맛있는 케이크로 경계심을 무너뜨렸다.성도윤의 존재가 습관 되어갈 때쯤 차설아는 이미 함정에 빠진 것이다.성도윤은 시계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 오늘 밤의 성과는 그 무엇보다도 만족스러웠다.“이제는 병실로 돌아갈 테니 푹 쉬어. 내일 밤에도 올 테니까 기다려. 잘자.”차설아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자는 척했다. 머릿속은 두 사람이 뜨겁게 키스를 퍼붓던 화면으로 가득 차서 얼굴이 화끈
차설아는 병실 침대에 누워 꼼짝하지도 못했다. 그러기에 성도윤이 늦은 밤에 가져다주는 야식이 유일한 낙이었다. 차설아는 누워서 입을 벌리고 성도윤이 주는 대로 다 받아먹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애틋한 커플 같아서 오글거렸지만 케이크를 먹기 위해 꾹 참았다.“역시 다크 초콜릿 케이크는 정말 맛있어요. 어떻게 이런 맛을...”크림과 초콜릿이 조화를 이루어서 입안에 가득 퍼졌다. 차설아는 케이크를 먹으면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졌다.“내일도 가져올 테니까 천천히 먹어. 체하면 어쩌려고 그래.”성도윤은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말하면서 허겁지겁 먹는 차설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차설아는 성도윤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정신없이 먹다가 의도치 않게 성도윤의 손가락을 물게 되었다.긴 손가락이 차설아의 입에 들어가자 성도윤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찌릿했고 닭살이 돋았다.“어머. 정말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급하게 먹다보니...”차설아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면서 성도윤한테 사과했다.“더 먹을래?”성도윤은 뜨거운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면서 물었다.“아, 아니요! 안 먹어도 될 것 같아요.”차설아는 민망해서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성도윤을 쳐다볼 수가 없었고 더 이상 케이크를 먹을 분위기도 아니었다. 쥐구멍이라도 있었다면 당장 숨을 기세였다.“안 먹으면 입부터 닦아. 다 묻히고 먹었잖아.”성도윤은 낮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차설아한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차설아의 입가에 크림이 묻어있었는데 그 모습은 음식을 몰래 훔쳐먹은 고양이 같아서 더 귀여웠다.“그럼 티슈 좀 주세요. 입에 묻은 줄도 몰랐어요.”차설아는 혀로 입가를 날름거리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성도윤은 내가 며칠 굶은 줄 알겠어. 아, 손가락까지 물어버릴 생각은 없었는데 왜 그랬지?’“그럴 필요 없어.”성도윤이 덤덤하게 말했다.“뭐가 필요 없다는 말이에요?”“티슈 같은 건 필요 없다는 뜻이야.”“왜요? 다 썼어요?”“아니. 내가 닦아
박서영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뉴스에서 차설아 씨가 허리를 다쳤다고 했어요...”성진의 심장은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성진은 심호흡하고는 진지하게 말했다.“지금 당장 그 병원으로 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봐. 정확히 어쩌다가 다쳤고 상황이 어떤지 알아내서 보고해.”“하지만 제가 성진 도련님의 곁을 떠나면 혼자서 괜찮으시겠어요? 걱정이 되어서 그래요.”“나는 신경 쓰지 말고 일단 설아한테 가봐. 설아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나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 거야.”성진은 잔뜩 긴장한 채 박서영을 재촉했다.“알겠어요. 준비하고 바로 갈게요.”박서영이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성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가기 전에 뒷마당에 있는 해바라기 꽃을 가져가. 해바라기 꽃을 보면 설아도 좋아할 거야.”“네. 그렇게 할게요.”박서영은 성진을 바라보면서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고 눈물을 훔쳤다. 사람은 감정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동물이었다. 이득을 얻기 위해 사람을 죽여도 눈 깜빡이지 않던 성진은 완전히 달라졌다.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여자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순애보가 되어있었다.한편, 병원.성도윤은 늦은 시간마다 차설아의 병실에 들어가서 앉아 있었다. 때로는 의견이 맞지 않아 싸우기도 했고 때로는 얘기를 나누면서 웃기도 했다.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두 사람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성도윤의 존재가 습관이 된 차설아는 점점 마음이 편해졌다. 가끔 성도윤을 만나기 위해 차성철 혹은 병문안을 온 사람들을 일부러 내보내기도 했다.성도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싶다던 차설아는 어쩐지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성도윤이 찾아오면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내가 허리를 다치지 않았다면 당신을 제일 먼저 내쫓았을 거예요.”어느 조용한 밤, 차설아는 성도윤이 몰래 가져온 다크 초콜릿 케이크를 먹으면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러자 성도윤은 차갑게 대꾸했다.“말로만 그러지 말고 직접 날 내쫓아 봐. 얼른 나아서 나를 내쫓기를 바랄게.”“딱
“그럴 필요 없어!”성진이 부르짖는 소리가 어둠 속을 뚫고 울려 퍼졌다. 귀신 같은 몰골로 도저히 차설아를 만나러 갈 수가 없었다. 성진은 긴 한숨을 내어 쉬고는 덤덤하게 말했다.“내가 차설아를 두고 떠난 건 자유롭게 살아가기를 바라서였어. 나의 선택을 후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뜻이야.”성진은 차설아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차설아한테 평생 책임지라고 말하면 차설아는 주저 없이 승낙하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다.그렇지 않으면 반년 전에 어렵게 상봉한 차성철과 귀여운 아이들, 겨우 이어가고 있던 사업을 내팽개치고 성진과 함께 멀리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차설아는 반년 동안 성진을 아기처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고 힘들다고 투정 부린 적이 없었다. 성진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다.두 눈과 피를 기부함으로써 사랑하는 여자와 반년 동안 같이 살았기에 이번 생에 여한이 없었다. 성진은 평생 그 나날들을 기억할 것이고 더는 바랄 것이 없었다.하지만 박서영은 성진을 이해하지 못했다. 총명하고 이득을 위해 기회를 쟁취하던 성진이 도대체 왜 소극적으로 변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성진 도련님, 차설아 씨를 잊지 못했으면서 왜 만나러 가지 않는 거예요? 성진 도련님을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이때 갑자기 나타나면 감동해서 성진 도련님과 결혼하려고 할 수도 있어요.”박서영은 굳은 표정을 하고 앉아 있는 성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설아가 그러자고 해도 내가 거절할 거야.”성진은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자존심이 있는 남자라면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할 거야. 밥을 먹고 옷을 갈아입는 것조차 스스로 하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감히...”성진은 고상한 품격을 지닌 사람이 아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음험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성진은 좋은 사람이 되기를 포기했지만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성진 도련님, 다른 사람들이 도련님을 나쁘고 간사한 사람이라고 욕하지만 저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서은아는 심호흡하고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과감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여겼다. 성진이 전화를 끊으려고 하자 궁금해 난 서은아는 천천히 물었다.“요즘 어디로 갔기에 도통 보이지 않는 거야? 차설아를 데리고 해안시를 떠나겠다고 약속했었잖아. 그런데 차설아가 왜 아직도 내 눈앞에서 알짱대는지 설명해 봐. 네가 나타나지 않으면 차설아는 또 성도윤한테 달라붙어 있을 거야. 그럼 네 눈과 피를 성도윤한테 준 건 뭐가 되는데?”성진의 희생은 차설아뿐만 아니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서은아도 놀라게 했다.멀쩡하던 사람이 좋아하는 여자가 마음에 두고 있는 남자를 위해서 자신의 눈과 피를 기부했다. 그로 인해 성진은 어둠 속에서 살고 있었다.이 세상에서 가장 헌신적인 순애보는 성진일 것이다. 서은아는 성도윤을 위해 이 정도로 희생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성진은 큰 희생으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차설아는 반년 동안 성진과 가까이 지내다가 자신만의 삶을 위해 떠났다. 성진의 노력은 전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뭐가 되든 네가 알 바 아니야. 나는 너랑 달라. 설아를 많이 사랑하고 설아가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라. 하지만 너는 성도윤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결국 너를 위해서 수술을 막으려는 거잖아. 너는 성도윤이 아니라 너 자신을 사랑하는 거야.”성진이 직설적으로 말하자 서은아는 허를 찔려 제대로 반박할 수가 없었다. 서은아는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이제 와서 그런 말이 다 무슨 소용이야? 차설아를 사랑하는 순애보가 이런 끔찍한 일을 꾸며냈다는 걸 누가 알았겠어... 나는 그저 네 말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일 뿐이야. 성도윤을 이렇게 만든 것도 전부 너라고!”“여기서 멈추라고 하면 멈출 거야? 너는 나의 꼭두각시라고 했잖아.”“뭐? 뭘 멈추라는 건데?”서은아는 주먹을 꽉 쥐고는 차갑게 물었다.“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묻잖아.”“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뜻이야. 성도윤이 수술을 받게 내버려둬. 잊었던 기억을 찾고 나서 너한테 따지면 내가 꾸민 일이라고 말해. 너는
긴 연결음만 이어질 뿐,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이 개같은 놈!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설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제발 좀 받아. 할 얘기가 있단 말이야.”서은아는 서태원이 방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전화를 걸었다. 여러 통 걸었지만 상대는 전화를 계속 받지 않았다. 서은아의 전화번호를 진작에 스팸 번호로 설정했거나 전화번호를 아예 바꾸었을 수도 있었다.“하, 정말 짜증 나! 아직 살아있다면 전화라도 좀 받으라고! 정말 속 터져.”서은아는 방에 놓여있던 화분을 전부 바닥에 던지면서 씩씩거렸다. 서은아가 절망스러워서 힘없이 주저앉자 갑자기 조용하던 전화가 울렸다.“무슨 일로 전화했어?”전화를 건 사람은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서은아와 말을 섞기 싫은 모양이었다.“성진, 이 개자식아! 도대체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내가 몇 번이나 전화를 건 줄 알아?”서은아는 휴대폰을 꽉 잡고 울분을 토해냈다. 긴급상황이 아니었다면 서은아는 절대 이런 나쁜 놈과 엮이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니까 무슨 일인데?”성진의 목소리는 더 차가워졌다.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러자 서은아는 잔뜩 겁을 먹어서 목소리를 낮추었다.“성도윤이 벌써 의심하고 있어. 대단한 신경외과 의사를 찾았다고 하면서 뇌수술을 다시 받겠다고 했단 말이야. 만약 성도윤이 뇌수술을 받으면 지난 기억도 다 떠오를 거고 우리가 한 짓이 들통날 것 같아. 우리 이제 어떡해?”“그럼 어쩔 수 없어. 나의 실력은 예전과 달리 많이 녹쓸었지만 성도윤이 복수하고 싶다면 기다리고 있어야지.”“나쁜 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서은아는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나한테 부탁할 때와 말이 다르잖아. 들통나면 너는 성도윤한테 좀 맞으면 되겠지만 나는 어떡해? 성도윤이 알게 되면 나뿐만 아니라 서씨 가문, 우리 부모님까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너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니라서 연락한 거야.”“그러니까 네 말은 성도윤이 뇌수술을 받으면 안 된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