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예쁜 여자애가 룸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아빠, 어떤 여우년한테 홀렸다면서요. 도대체 누가 이렇게 뻔뻔한지 한 번 봐야겠어요. 감히 클라우드 리조트에서 이런 짓을 하다니요.”남희진은 리미티드 에디션인 가방을 들고 검은색 부츠를 신은 채 또각또각 걸어왔다. 호들갑에 온갖 건방을 떨었는데 영락없이 버릇없는 아가씨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녀는 바로 남해진 맞은편에 있는 차설아를 발견했다. 그리고 안색이 어두워졌다.“너였어? 도윤 오빠가 4년 동안이나 내쫓았는데도 버티고 있는 그 여자잖아.”남희진은 어금니를 깨물며 말했다.차설아를 향한 그녀의 눈빛에는 경멸과 질투, 그리고 적대심이 깃들어 있었다.차설아가 담담하게 웃더니 남희진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남희진 씨, 안녕하세요. 절 기억해 주셔서 감사하네요.”그녀는 남희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남희진은 성도윤의 열성팬이었는데 남해진의 예쁨을 듬뿍 받고 있었기에 제멋대로 행동하곤 했다.차설아는 될수록 이런 사람들을 피하기 마련인데 아마 이번에는 피하지 못할 듯했다...남희진은 차설아에게 거침없이 욕설을 퍼부었다.“이런 뻔뻔한 년, 도윤 오빠 몰래 우리 아빠를 꼬시려고 해? 지금 바로 도윤 오빠한테 전화해서 이를 거야! 제대로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지?”“희진아, 가만있어!”남해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귀염둥이 딸에게 모처럼 심각한 얼굴을 보였다.“차설아 씨는 일적으로 나 만나러 온 거야. 나가서 날 기다리고 있어!”“전업주부 주제에 무슨 사업 얘기를 한다고요. 아빠 설마 진짜 저년한테 홀린 거예요? 죽은 엄마한테 미안하지도 않아요?”남희진은 발을 동동 구르며 난리를 부렸다.“엉엉엉, 아빠가 그럴 줄 알았어요. 엄마를 하나도 사랑하지 않고 나도 전혀 사랑하지 않잖아요. 아빠랑 인연 끊을 거예요!”“희진아, 왜 또 시작이야...”남해진은 어쩔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남희진이 억지를 부릴수록 그는 죽은 큰딸 추희영을 더 그리워하곤 했다. 동시에 추희영에게 미안한 마음이
미가연은 해안시에서 내로라하는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많은 비즈니스맨들이 이곳에서 사업 얘기를 하곤 했다.이때, 규모가 제일 큰 홍연정에서 성도윤은 절대적인 핵심 인물로 메인테이블에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의 비위를 맞추느라 힘쓰고 있었다.“온 해안시에서도 성 대표님보다 더 대단하신 분은 없죠. 성대 그룹을 이끌어 승승장구하고 계시니 정말 부럽습니다!”사람들이 잇따라 술을 따라주며 아부를 떨면서 성도윤에게 잘 보이려고 했다.다른 사람이었으면 이미 기분이 들떠있었겠는데 성도윤은 그들의 아부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싸늘한 얼굴, 알 수 없는 표정, 그리고 엄청난 카리스마를 풍기면서 속세에 찌든 상인들과는 아예 다르게 보였다.이때 어디선가 젊은이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이 대단하시긴 하나 지금 한창 떠오르고 있는 라이징 스타들도 많지 않아요? 배씨 집안의 늦둥이 배경수 씨가 경영하고 있는 천신 그룹도 대세잖아요.”성도윤에게 아부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의 말은 유난히 거슬리게 들렸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비난과 조롱을 퍼부었다.“자네가 뭘 안다고 그래? 배경수 씨는 바람둥이일 뿐이잖아. 맨날 여자 꼬시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고. 그런 사람을 감히 성 대표님과 비교를 해?”성도윤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천신 그룹?”젊은이가 곧이어 대답했다.“네. 성 대표님, 저희 집안에서 벤처 기업을 운영하고 있어서 이 회사에 대해 전문적인 연구를 했었습니다...”“천신 그룹은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또 규모도 그렇게 큰 편은 아닌데 아주 빠르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부잣집 자제가 여자 꼬시기 위해 그냥 만든 회사는 절대 아니에요. 미래를 충분히 기대해 볼 만합니다!”사람들이 반박하려고 하자 성도윤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계속 말해봐요.”젊은이가 말을 이었다.“천신 그룹의 미래를 기대해 볼 만하다고 한 건 절대 근거가 없는 말이 아닙니다... 혹시 천신 그룹의
약 10분 후, 한복을 입은 종업원은 남희진을 데리고 홍연정 앞에 도착했다.“도윤 오빠, 드디어 만나게 되었네. 지금은 날 더 피하지 않겠지?”그녀는 성도윤의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원래 성도윤의 옆에 앉아있던 사람은 눈치껏 자리를 피해줬다.해안시의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었다.남해진은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남씨 집안의 아가씨이자 남우 그룹을 상속받을 후계자였다. 그런 그녀는 성도윤을 미치게 사랑하고 있었다.성대 그룹은 또 남우 그룹의 오랜 사업 파트너였고, 또 두 사람은 나이도 비슷하고 집안 형편도 비슷하니 사람들은 모두 두 사람의 결혼을 예상했었다.하지만 나락 간 집안 출신의 차설아가 나타난 바람에 이 모든 게 바뀌었다...“도윤 오빠, 오랜만이야. 더 잘생겨졌네?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 줄 알아? 꿈도 오빠 꿈을 꿨다고...”남희진은 룸에 들어서자마자 성도윤에게 단 한 시라도 눈을 뗀 적이 없었다.그녀는 남자의 팔을 꽉 끌어안고는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그동안 왜 그렇게 매정하게 굴었어? 우리 그래도 죽마고우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결혼한 후에 날 한 번도 찾지 않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성도윤은 싸늘한 얼굴로 룸 안에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고는 불쾌한 말투로 말했다.“사적인 자리에 누가 얘를 부른 거예요?”사람들은 고개를 푹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남희진은 체면이 깎인 것 같아 분노에 얼굴이 새빨개졌다.“도윤 오빠, 꼭 이래야겠어? 내가 무슨 맹수도 아니고 왜 그렇게 피하는 건데?”그러더니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빠만 그렇게 선을 지켜서 무슨 소용 있어? 단정하기로 소문난 오빠 아내도 그런 줄 알아? 오늘 직접 시인하지 않았으면 그렇게 사람이 오픈 마인드일 줄도 몰랐어. 정말 놀랍더라고. 다른 한편으로는 오빠가 참으로 안타까워 보였어.”성도윤이 한껏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뭘 시인했는데?”“그건...”남희진은 사람들을 쓱 훑어보더니 난감한 얼굴을 보였다.사람들도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
클라우드 리조트에서.무성한 숲으로 뒤덮인 클라우드 리조트는 낮에 부자들이 휴가를 즐기는 곳이긴 했지만 저녁에는 굉장히 위험했다. 날짐승과 포악한 맹수들이 오고 갔기에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숲 한가운데에는 밀폐된 작은 지하실이 있었다. 주위에는 가시덤불밖에 없는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마치 도깨비불이 존재하듯이 푸른빛을 발하곤 했다.차설아는 구덩이에 앉아 있었는데 습한 공기에서 곰팡이 냄새가 풍겼다. 가끔 가다가 쥐나 바퀴벌레가 그녀의 옆을 기어다녔는데 차설아는 무서운 표정 하나 없이 덤덤했다.‘흥, 남희진도 참 멍청해. 날 이 방공호에 가두면 내가 무서워할 줄 알아? 난 아주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한테서 야생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기술을 배웠다고.’만약 다른 사람이 이런 지옥 같은 환경에 처해있었으면 무서워서 벌벌 떨었겠지만 차설아는 아니었다. 그녀는 일말의 무서운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사실 차설아에게는 탈출할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이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곧 죽을 사람처럼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차설아는 돌로 바닥을 문질러 불을 피운 후 그 불빛을 빌려 벽에 뭔가를 슥슥 적어내려갔다.“10, 9, 8, 7...”그녀는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처음 약속한 대로라면 배경수는 아마 남해진의 사람을 이끌고 지금 그녀를 ‘구하러’ 이곳으로 오고 있는 중일 것이다.차설아는 행여나 비참해 보이지 않을까 봐 또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고는 바닥에서 먼지를 한 줌 쥐어 얼굴에 벅벅 문질렀다.아니나 다를까, 차설아는 곧 전력질주하는 오프로드 카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져왔다.그녀는 재빨리 불을 끄고 ‘비참한 모습’으로 바닥에 누워있었다...고요한 어둠 속에서, ‘철컥’ 소리와 함께 방공호의 철문은 확 열렸다.달빛으로 차설아는 커다란 몸집의 누군가가 위에서 뛰어내려온 걸 볼 수 있었다.그녀는 목을 가다듬고는 비참한 목소리로 구해달라며 애원하려고 했는데 곧이어
성도윤은 차설아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줄 알아 아예 그녀의 말을 무시해 버렸다.하지만 잇따라 발목 쪽에서 극심한 고통이 몰려왔다.고개를 숙이니 손가락 두 마디 정도로 굵은 흑뱀이 목을 빳빳하게 세우고는 혀를 날름거리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젠장!”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리고 발목 쪽의 근육이 점점 저려와 오롯이 서 있기도 힘들었다.그는 재빨리 차설아를 뒤에 감싸고는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저 뱀을 끌어낼 테니 당신은 타이밍 보고 이곳을 벗어나!”“도윤 씨 물렸어?”차설아가 주먹을 꽉 쥐고는 잔뜩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무늬로 봐선 이 뱀은 우산뱀이야. 주로 이런 습한 환경에서 서식하고 있지. 독성이 워낙 강하니까 움직이지 마, 아니면 뱀독이 더 퍼질 거야!”“살고 싶으면 입 닥쳐!”성도윤은 머리가 지끈거렸다.그에게 있어서 차설아의 말은 뱀을 자극하는 것 외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다.그는 뱀을 다뤘던 경험도 없었다.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뱀의 공격을 막기 위해 그는 어쩔 수 없이 나서려고 했다.성도윤은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꺼내고는 살짝 몸을 돌려 뒤쪽에 있는 차설아에게 말했다.“준비하고 있어. 셋까지 세면 당신은 밖으로 뛰는 거야!”차설아는 한숨을 푹 쉬고는 어쩔 수 없는 말투로 말했다.“이제 그만해. 이 뱀도 곧 갈 거야.”그녀의 경험에 따르면 사실 이런 뱀은 공격적이지 않다. 시력이 제한되어 있어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만 감지할 수 있기에 가장 안전한 방법은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그리고 뱀은 그들이 위협적이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는 혼자 자리를 뜰 것이다.하지만 성도윤은 자기만의 생각이 있었고, 차설아의 말도 믿지 않을 듯했다.“하나, 둘, 셋, 뛰어!”성도윤은 셋까지 세고는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뱀 앞에서 흔들거리며 뱀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려고 했다. 그래야 차설아가 도망갈 수 있으니까 말이다!차설아는 머리가 지끈거렸다.“망했어, 다 망했어!”흑뱀은 바로 흥분한 채로 빛을
“웁...”남자의 입술은 용암처럼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차설아는 머리가 새하얘진 채로 성도윤에게 그대로 당하고 있었다.성도윤이 그녀에게 키스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하지만 이렇게 격정적인 키스를 나누는 건 처음이라 그녀조차도 상황에 푹 빠져있어 저도 모르게 반응하기 시작했다...키스가 한참 진행되었고, 차설아는 눈을 뜨고서 몰래 성도윤이 키스할 때의 표정을 지켜봤다.남자는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긴 속눈썹과 뚜렷한 이목구비는 정말이지 하느님이 만들어낸 걸작과도 같았다.그윽한 눈매와 오뚝한 콧날, 완벽한 턱선, 그리고 얇고 섹시한 입술을 보고 있자니 차설아는 미칠 지경이었다.4년 전에도 그녀는 이 잘생긴 얼굴에 현혹되었었다.하지만 4년 뒤에도 그녀는 이 얼굴에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혀 홀리게 되었다니!“에헴!”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어색하게 목을 가다듬었다.“보스, 이젠 키스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나랑 남 비서님이 꽤 오래 기다렸단 말이야.”배경수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조용히 말했다.“젠장!”도둑이 제 발 저린 차설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성도윤을 확 밀쳐냈다.성도윤은 방금 호르몬이 과도하게 분비된 나머지 뱀독은 더 빨리 퍼지게 되었다.그는 곧 의식을 잃더니 바닥에 쓰러졌다.“성 대표님!”남해진의 비서인 남영수가 이를 보자 마치 하늘이 무너진 듯 성도윤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어떡하지, 성대 그룹의 대표인 성도윤이 아가씨의 장난 때문에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게 되면 남씨 집안은 백배사죄해도 모자를 판이 되잖아.’“도윤 씨는 뱀독에 중독되었어요, 당장 병원으로 옮겨야 해요!”차설아는 남영수 앞에서 미리 준비해둔 고육지책을 펼칠 새도 없었다.그녀는 오로지 성도윤이 무사하길 바랐다.병원에서.그래도 재빠르게 조치를 취하였고, 또 독뱀의 혈청까지 있었기에 성도윤은 아직 혼수상태에 빠져있었지만 생명의 위험에서는 벗어났다.“정말 다행이야, 하느님, 정말 감사합니다!”차설아가 안도의 한숨을 푹 쉬었다.
앞장선 사람은 바로 차설아가 온밤 동안 기다린 남해진이었다.“차설아 씨, 제 못난 딸이 경우가 없었죠. 이미 한 달 동안 집 밖을 나가지 못하게 벌했습니다. 그러니 부디 차설아 씨께서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남해진이 진심으로 사과하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미안한 감정이 가득했다.“저야 운이 좋아서 무사할 수 있었지만 제 남편은 저를 구하기 위해...”차설아는 성도윤이 있는 병실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성도윤은 생명의 위험에서 벗어났지만 독소가 몸에 고여 나중에 후유증이 생길지도 모른다.그래서 차설아는 걱정되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책감을 느끼기도 했다.만약 그녀가 남우 그룹과의 합작을 위해 고육지책을 펼치지 않았더라면 성도윤도 뱀에 물리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그녀는 이 기회를 빌려 남해진에게 비즈니스 합작 제안을 할 수 있었지만,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하지만 배경수는 차설아처럼 주저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사과해서 모든 일이 다 해결된다면 세상에 왜 경찰이라는 존재가 있겠어요? 사장님은 워낙 현명하신 분이시니 따님께서 친 사고를 사과 몇 마디만으로 넘기시려는 건 아니겠죠?”남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자세히 생각해 봤는데 만약 차설아 씨가 더는 이 일을 추궁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남우 그룹이 천신 그룹과 합작할지 아니면 성대 그룹과 합작할지에 대해서 차설아 씨가 결정하는 거로 하죠.”“역시 남 사장님은 다르네요, 참 시원시원한 분이시네요.”배경수는 이 모든 일이 이렇게 순조롭게 풀릴 줄은 몰랐다.차설아는 역시 차설아였다. 남해진 같은 늙은 여우를 하루 만에 해결하다니, 그는 차설아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하잖아요. 혹시 사장님께서 시간 괜찮으시다면 지금 바로 계약하는 건 어떻습니까?”배경수는 혹시나 변고가 생기는 걸 대비해 이미 계약서를 준비해뒀다. 이제는 두 회사에서 계약할 일만 남았다.하지만 차설아가 예상 밖의 대답을 했다.“너무 서두
차설아는 미간을 구긴 채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의사를 보며 말했다.“말씀하세요.”“뱀독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성 대표님의 중추신경을 교란시킬 수 있어요. 성 대표님에게는 사지가 마비되고 잘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반신불수가 되는 건 절대 아니니 사모님과 대표님께서 너무 당황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뱀독이 완전히 제거되면 곧 회복하실 겁니다.”“사지가 마비된다고요?”차설아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하지만 이때, 병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꺼져. 다 꺼지라고! 나 건드리지 마!”성도윤은 이미 깬 듯하다.그의 격앙된 목소리는 복도를 울렸다.차설아와 의사는 다급하게 병실로 향했는데 곧이어 안으로 들어서지도 못하고 병실 문 앞에 굳어 선 젊은 간호사들의 모습을 발견했다.“왜 여기들 서 있는 거야? 환자분이 깨셨으면 들어가서 살펴봐야지. 일 그만두고 싶어?”의사가 엄숙한 표정으로 그들을 혼냈다.안에 누워있는 사람은 성대 그룹의 대표인 성도윤이었다. 자칫하면 이 병원이 문 닫게 생겼는데 말이다.수간호사가 벌벌 떨며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선생님, 저희가 안 살펴보려는 게 아니고요, 성 대표님께서... 성 대표님께서 너무 화를 내셔서 차마 가까이 갈 수 없었어요. 자기를 건드리면 가만히 안 두겠다고 으름장을 놓으셔서 저희... 저희도 감히 그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어요!”“뭐?”의사는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일찍이 성도윤이 쉽지 않은 상대인 걸 알았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차설아가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제가 가서 한 번 볼게요.”그녀는 살며시 문을 열었는데 바로 짜증이 가득 섞인 성도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다 꺼지라고 했잖아, 내 말 안 들려?”“도윤 씨는 어쩜 입원하고 있는데도 그렇게 버럭버럭 화를 잘 내. 이 병원에 있는 사람들을 다 깨울 셈이야?”차설아가 성도윤의 병상 옆으로 가면서 그를 놀렸다.성도윤은 계속 반듯하게 누워있었기에 그제야 차설아의 얼굴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당신
하지만 차설아는 현이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오후가 되자 김정민이 두 아이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리고 현이는 퇴근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그녀는 가방을 메고 텅 빈 거리를 걸었다. 마음이 무겁고 복잡해서인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걸음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거의 집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한 그림자가 나타나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내가 시킨 일은 제대로 했어?”검은 옷을 입고 커다란 모자로 얼굴을 반쯤 가린 여자였다. 얼굴에는 깊은 흉터가 새겨져 있었고 눈빛은 싸늘했다.“말씀하신 대로 다 했어요. 제발 엄마를 놓아주세요.”현이는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애원했다.“계속해. 열흘 뒤에야 풀어줄 거야.”여자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며 현이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었다.“헛짓거리할 생각은 마. 날 속이거나, 하루라도 늦거나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네 엄마는 죽는 거야. 알아?”“네, 알겠어요.”현이는 침을 꿀꺽 삼키며 몸을 살짝 떨었다. 감히 반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그제야 그 여자는 현이를 놓아주고 뒤돌아서 걸어가기 시작했다.그 순간, 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 세웠다.“잠깐만요!”그 여자는 걸음을 멈췄다.“뭔데?”“그냥 궁금해서요. 설아 씨랑 무슨 원한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설아 씨는 정말 착한 분이에요. 앞도 보지 못하는 상황이라 이미 충분히 힘들어하시는데...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 거죠?”현이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그녀는 이 여자에게 조종당해 차설아를 해치는 일이 너무 괴로웠다. 그런데 만약 이유조차 모르고 있으면 그녀는 언젠가 그 죄책감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질 것만 같았다.그러자 그 모자를 쓴 여자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착하다고?”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모자 아래서 반짝이는 두 눈은 마치 독을 품은 뱀과도 같았다.“차설아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나 해? 그 여자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그 여자가 누굴 해쳤는지 너는 상상도 못 할걸?”“그럴
“현이 씨?”차설아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이 시간대에 집에 있는 사람이라면 현이 뿐이었으니 말이다.하지만 현이는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차설아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그녀는 즉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그쪽... 현이 씨 아니죠?”“설아 씨, 저 맞아요.”현이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의 활기차고 상냥한 말투와 달랐다.차설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라도 있어요?”“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집에 일이 좀 있어서요.”현이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얼버무렸다. 그리고는 최대한 평소처럼 행동하려 애썼다.“설아 씨, 아까 뭐라고 하셨어요?”“아, 옷 좀 가져다 달라고 했어요. 옷장 맨 왼쪽에 있는 니트 한 벌이면 돼요.”차설아가 또렷하게 말했다.“알겠습니다.”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옷장으로 가 그녀가 원하는 옷을 꺼냈다. 니트를 받아 든 차설아는 능숙하게 옷을 입기 시작했다.비록 그녀는 앞을 볼 수는 없었지만 자립심이 강했기에 일상생활에는 큰 불편이 없었다.오히려 현이 입장에서는 여느 고용인들보다 차설아를 돌보는 게 훨씬 수월했다. 그래서 그녀는 진심으로 차설아를 좋아했다.하지만...아름답고 따뜻한 그녀의 모습을 보며 현이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아침 식사 시간이 되자 현이는 평소처럼 우유 한 잔에 통밀 토스트, 그리고 과일 몇 조각을 준비했다.차설아는 식탁에 앉아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 토스트를 씹으며 현이에게 말했다.“혹시 집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어려운 일이라도 있으면 말해요. 제가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요.”“아, 아니에요.”현이는 입술을 꼭 깨물며 망설였다.“그냥... 가족끼리 또 싸웠을 뿐이에요. 사실 맨날 싸워서 이제 익숙하지만요. 그래도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뭘 그렇게까지 격식을 차려요? 앞을 못 보고 나서 지금까지 현이 씨가 절 도와주고 있잖아요. 오히려 제가 현이 씨한테 고마워해야 하는데...”차
성도윤은 남자로서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것도, 눈물을 흘리는 것도 싫어했었다. 하지만 차설아는 그로 하여금 닭살 돋는 말을 하게 만들었고 눈물도 흘리게 했다.그녀를 만난 순간부터 그는 평생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된 기분이었다.“알면 됐어요. 제가 얼마나 좋은 아내인데요! 그러니까 평생 저만 사랑해 주세요.”차설아는 그렇게 말하며 성도윤의 목을 감싸안고 입을 맞췄다.술이란 참 좋은 것이었다. 완전히 긴장을 풀어 주고 가장 솔직한 자신을 드러내게 해 줬으니 말이다.사실 차설아는 오래전부터 성도윤과 진하게 키스하고 싶었다. 그저 자존심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었다.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녀는 술기운을 빌려 그동안 부족했던 만큼 한꺼번에 채울 생각이었다.“너, 너... 취한 거 아냐?”성도윤은 갑자기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차설아를 보고 당황했다. 평소에 그녀가 이러는 건 꿈이거나 아니면 술에 취했을 때뿐이었으니 말이다.그는 어찌할 바 몰랐다. 괜히 진하게 키스했다가 그녀를 놀라게 할까 봐 조심스러웠다.“취했든 안 취했든 상관없어요. 오늘은 그냥 키스하고 싶을 뿐이에요.”그녀는 두 손으로 성도윤의 얼굴을 감싸 쥐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입술을 포갰다. 차설아가 워낙 격렬하게 덤벼드는 바람에 두 사람은 그대로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아니면... 위층으로 올라갈까?”성도윤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살짝 쉬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그것도 괜찮은 선택인 것 같은데요?”그녀는 장난스럽게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그를 자기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위층으로 가면 단순히 키스만 하는 게 아닐 텐데 괜찮아요?”“상관없어. 오늘 밤, 난 주인님의 말씀만 잘 따를 테니까.”그렇게 말한 성도윤은 차설아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는 긴 다리로 망설임 없이 계단을 올랐고 단숨에 침실까지 도착했다.아이들이 캠프를 떠난 타이밍이 이렇게 절묘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이토록 완벽한 둘만의 시간을 두 사람은 너무 오래
성도윤의 반응에 차설아는 깜짝 놀랐다. 그녀도 자신의 말이 지나쳤다는 걸 깨달았다.“미안해요. 저는 그냥 도윤 씨가 나중에 후회하지 않았으면 해서...”차설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아는 성도윤은 아주 대단한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먹이 사슬의 최고점에 서 있는 존재였다. 그런 그가 사소한 감정에 휘둘려 무너져 버리면 그녀는 가슴이 너무 아플 것 같았다.무엇보다도 성도윤이 가장 후회할 거라는 것을 아는 차설아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녀는 그 순간을 보고 싶지 않았다.“후회할지 말지는 내 선택이야. 나는 이제 어른이고 나한테 진짜 중요한 게 뭔지 잘 알아.”성도윤은 불만을 억누르려 애쓰며 크고 따뜻한 손으로 차설아의 손을 덮었다.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우리의 관계는 진짜 유리 조각인 것 같아. 햇빛 아래에서 보면 맑고 아름답지만 쉽게 깨지는... 그래서 우리 둘이 함께 지켜나가야 해. 나는 우리가 힘들게 찾은 이 행복이 산산조각 나는 걸 원하지 않아. 그러니까 날 믿어주면 안 돼?”“더 이상 뭐라 하지 않을게요. 무슨 일이 생기든 함께 맞서면 되니까요.”차설아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성도윤을 다독이는 듯했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었다.사실 가장 힘든 건 성도윤이 아니라 차설아였다. 만약 예전처럼 멀쩡한 두 눈을 가지고 있었다면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도윤이 큰 위기에 처하더라도 자기가 든든한 버팀목으로 되어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하지만 지금 차설아는 성도윤에게 그저 짐일 뿐이었다. 그를 도와줄 힘도 없으면서 부담만 늘려 가는 것 같아서 그녀는 너무 괴로웠다. 그래서 자꾸 포기하고 싶어졌던 것이다.“네가 뭘 두려워하는지 알지만 걱정하지 마. 그런 날이 오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니까.”성도윤은 차설아를 품에 안으며 그녀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그러다가 성도윤은 깊은숨을 내쉬고 차설아를 바라보며 말했다.“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뭔데
차설아는 테이블 위에 놓인 꽃다발을 안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이거 장미예요? 향이 정말 좋아요. 분명 아주 생생하고 예쁠 거예요.”“지나가다가 너랑 참 잘 어울리는 장미가 보여서 샀어. 예쁘잖아.”성도윤은 아낌없이 달콤한 말을 건넸다.“도윤 씨 너무 많이 변한 거 아니에요? 열 마디 중 아홉 마디가 사랑 고백인데요? 예전 같았으면 이런 말은 일 년에 한 번도 안 했을걸요?”차설아는 부끄러운 듯 장난을 치면서 그를 놀렸다.성도윤은 전형적인 철벽남이었다. 잘 웃지도 않고 말수도 적었다. 달달한 말은커녕 대화도 하기 힘들 정도였다.지금까지 함께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면 두 사람 모두 참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차설아는 그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을 더없이 소중하게 여겼다.그녀가 스테이크 자르는 걸 불편해하자 성도윤은 아무 말 없이 고기를 작은 조각으로 잘라 그녀의 접시에 놓아 주었다.차설아는 고개를 숙이고 스테이크를 먹으며 무심한 듯 그에게 물었다.“오늘 회의 어땠어요? 많이 힘들었어요?”성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담담하게 말했다.“대표 자리에 있으면 편한 날이 없지. 익숙해.”“사람들이 도윤 씨를 곤란하게 했죠? 뉴스에도 나왔던데...”성대 그룹이 뭘 하든 기자들은 항상 과장해서 말했고 모두 기사로 보도되었다. 일부러 찾아보지 않은 차설아도 알게 될 정도였다.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큰 문제에 부딪혔다는 걸 말이다. 깊이 분석할 필요도 없었다.그런데도 성도윤은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고 모든 걸 혼자 감당하면서 그녀를 위해 저녁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그런 그의 마음이 차설아는 너무도 감동적이었다.“내가 누군데? 성대 그룹의 대표야. 그래서 주주들에게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어. 요즘 회사 실적이 좋지 않으니 견제를 당하는 것도 당연한 거지.”“너무 걱정하지는 마. 최악이라고 해도 내가 대표 자리에서 내려오면 그만이야. 어차피 돈은 넘쳐나니까. 너랑 아이들한테 쓸 돈은 충분해. 게다가 우리 아내도 한 재력
회의가 끝나자마자 성도윤은 마치 도망치듯 발걸음을 재촉하며 차설아네 집으로 돌아갔다.예전에는 밤늦게까지 일만 하고 야근도 밥 먹듯이 하던 워커홀릭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변해버렸다. 1분도 그녀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성도윤의 이런 태도는 직원들에게도 영향을 줬다. 그를 따라 항상 야근을 하던 회사 직원들도 야근을 줄이기 시작했고 덕분에 회사 분위기는 한층 더 좋아졌다.집으로 가는 길에 그는 꽃 한 다발 스테이크를 샀다. 오늘 저녁은 차설아와 함께 촛불을 켜고 오붓한 저녁 식사를 할 계획이었다.비록 반나절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그 시간이 성도윤에게는 몇 주일 같이 느껴졌다.게다가 달이와 원이도 이틀 동안 캠프에 참가하게 되는 바람에 집에는 차설아와 그녀를 돌봐주는 가정부 현이만이 남아 있었다.“대표님, 돌아오셨어요?”현이는 시급을 받는 가정부였기에 성도윤이 집에 돌아오자 짐을 챙겨 퇴근할 준비를 했다. 그는 거실과 집 안을 둘러보았지만 차설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성도윤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설아는 어디 있어?”“설아 씨는 좀 피곤하다고 하셔서 지금 침실에서 쉬고 계세요. 깨워드릴까요?”“아니, 그냥 퇴근해. 오늘 수고했어.”성도윤은 부드럽게 말했다.“그럼 대표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일 다시 올게요.”현이는 인사를 남기고 집을 나섰다.넓은 저택에는 성도윤과 차설아, 단둘만이 남았다. 그는 차설아를 깨우지 않았고 꽃을 내려놓은 후 바로 주방으로 가서 스테이크를 굽기 시작했다.오랜만에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순간이었기에 그는 그녀에게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팬 위에서 스테이크가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가 났다. 스테이크가 적당하게 익자 성도윤은 그 위에 후추 가루를 솔솔 뿌렸다. 그리고 최상급 레드와인을 꺼냈다.그때,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늘 왜 이렇게 로맨틱하게 구는 거죠?”그가 뒤를 돌아보자 차설아가 잠옷 차림으로 주방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왜 내려왔어? 아직 준비도 안 됐는데.
성진은 격양된 목소리로 다그쳤다.분명 이 싸움에서 이긴 건 그였지만 이상하게도 철저하게 패배한 기분이었다.성도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책상을 정리하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차설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는 순간, 그의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설아야, 오늘 어땠어?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퇴근하고 가서 만들어 줄게.”전화 너머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성도윤은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전화를 끊을 때까지도 달달한 그 분위기는 옆에서 듣는 사람한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성진은 아무 말 없이 그의 곁에 서서 두 사람이 통화하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너무 우스워 보였다.성도윤이 사무실을 떠나려 하자 성진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형, 설아랑 다시 잘 지낸다며? 다 잊어버린 거 아니었어? 근데 이렇게 빨리 화해했다고? 설마 또 한 번 상처 주려고 그러는 거야?”성진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최악으로 끝난 사이인 줄 알았으니 말이다. 완전히 남남이 되어 다시는 엮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겨우 한두 달 만에 원래 사이로 돌아간 데다가 오히려 예전보다 더 서로를 소중하게 여겼다.눈동자까지 희생해 가면서 이루고 싶었던 삶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렸다는 사실에 성진은 절망스러웠다. 성도윤은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쉽게 그 모든 걸 손에 넣었다는 생각에 그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인정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 이상 성도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할 수 없었다.“내가 설아랑 어떻게 지내는지 너한테 보고해야 돼?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성도윤은 담담하게 말했다.“부러우면 너도 마음에 드는 여자 찾아서 결혼하면 되잖아. 따뜻한 가정을 꾸려서 행복을 누리면 되잖아. 다만...”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회의실을 둘러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지금 너한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잖아. 이런 사소한 일에 마음을 빼앗길 여유가 있을까?”성도윤의 말투는 누가
성진의 말에 성도윤은 할 말을 잃었다.그는 나중에야 자신이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성진 덕분이라는 걸 알게 되었었다. 그에게 놓고 말하면 성진이 생명의 은인인 것이나 다름없었다.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말싸움을 하는 건 아무 의미도 없었다.“그렇다면 일단 부대표님 뜻대로 진행하죠. 일단 한 분기를 기준으로 삼아서 시도해 보세요. 지켜보겠습니다.”성도윤의 냉정한 목소리에는 위엄이 있었고 이는 곧 성대 그룹의 미래를 결정짓는 말이었다. 회의에 참석한 모든 주주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뿐, 아무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역시 형은 마음이 넓은 사람이야. 회사를 위해서 헌신할 줄 아는...”성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내 방식대로 진행해 보고 나서 성대 그룹의 이익이 빠른 속도로 상승하면 어떡할 건데?”“넌 내가 어떤 결정을 했으면 좋겠어?”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며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는 듯했다. 성도윤을 지지하는 세력과 성진을 지지하는 세력 사이에서도 말이다.그때, 오준현이 입을 열었다.“성 대표님은 항상 회사를 위해서 생각해 주시는 분입니다. 만약 부대표님께서 정말 그룹에 좋은 방향으로 이끈다면 성 대표님도 기꺼이 자리를 양보하시겠죠, 그렇지 않습니까?”그러자 박지훈이 책상을 쾅 하고 내리치며 오준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오준현 씨, 회사의 대표 자리는 인간성과 능력을 겸비한 사람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회사에 수천 명의 직원이 있어도 성 대표님 외에는 아무도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습니다.”“인간성이요? 그게 수익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주주인 저희의 관심사는 오직 이익뿐이라고요. 누가 우리에게 더 많은 돈을 벌어다 줄 수 있느냐, 그게 바로 우리가 대표를 선택하는 기준입니다.”두 파벌은 서로 다른 의견을 두고 대립해서 싸우기 시작했다.보다 못한 성도윤이 손을 들어 올리며 차가운 목소
“제 비서 뜻이 곧 제 뜻입니다. 지금은 성대 그룹을 안정시키는 게 최우선이에요. 확장은 신중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성도윤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성 대표님, 언제 이렇게 변하셨습니까? 너무 보수적인 거 아닙니까? 이 작은 규모만 지키려다가 무너지고 싶으세요?”장기준이 가감 없이 성도윤에게 의문을 제기했다.“다들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저는 형이 왜 이렇게 보수적으로 변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성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희 형은 지난 반년 동안 큰 충격을 겪었어요. 건강도 많이 나빠졌죠. 그로 인해서 성격까지 바뀐 겁니다. 좀 더 신중해진 거죠.”“그리고 여러분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더 있어요. 형은 뇌 수술을 두 차례나 받았거든요. 그 충격이 얼마나 클지 짐작 가세요? 석현아, 주주님들께 보여 드려.”“네, 부대표님.”석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리 준비해 둔 성도윤의 건강 검진 보고서를 주주들에게 하나씩 전달했다. 그러자 진무열이 분노하며 성진에게 소리쳤다.“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성 대표님의 건강 검진 결과는 개인 정보예요! 함부로 유포해도 된다고 생각해요?”“진 비서님, 진정하세요. 형을 생각해서라면 건강 검진 결과는 당연히 비밀로 할 수도 있죠. 하지만 지금 형은 성대 그룹의 대표님이잖아요. 이 회사를 이끄는 사람이에요. 형의 건강 상태도 곧 성대 그룹의 미래와 이어진다는 겁니다. 다들 성대 그룹의 수익이 감소한 원인을 찾고 있지 않나요? 전 이 검진 결과가 그 원인을 충분히 설명해 줄 거라 생각해요.”성진은 미소를 지으며 느긋한 태도로 말했다. 오늘을 위해 철저히 준비해 온 듯했다.주주들은 검진 결과를 확인한 후, 믿기 어렵다는 듯 표정을 굳혔다.“이럴 수가! 성 대표님의 건강이 이렇게 악화되었을 줄은...”“뇌를 다친 데다가 기억 상실증까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경영 방식이 전과 너무 다르더라니... 그 원인이 여기 있었군요.”“성대 그룹이 갑자기 변한 건 대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