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이 물에 빠지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뚝 끊겼다. 휴대폰을 옆에 놓는 강한서를 보며 민경하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강한서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아마 뒷담화 당사자에게 들킨 것 같아요.”민경하: ...‘어쩐지 좋아하시는 것 같은 건 착각인가?’“주씨 가문은 요즘 어때요?”강한서가 민경하에게 물었다. 민경하는 곧바로 강한서는 주강운에 관해 묻는 것임을 알아차리고 대답했다. “주 변호사님은 얼마 전 장씨 가문 따님과 맞선을 보셨어요.”멈칫한 강한서가 물었다. “장준이 외동아들 아니었어요?”민경하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실은 사모님 조카분이세요. 부모님 두 분 다 돌아가셔서 한 달 전 장준 씨의 본가로 호적을 옮기셨어요. 아마 그분을 이용해 정략결혼을 맺을 생각인 것 같아요. 양쪽 가문에서 모두 적극적으로 두 분의 만남을 추진하고 있어요.”그 말에 강한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강운이는 누구보다 장씨 가문의 작태를 싫어해요. 걔는 절대 그 인간들과 어떤 관계로도 엮이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입술을 짓이기던 민경하가 나지막이 말했다. “대표님. 납치 사건의 모든 디테일까지 신경 쓴 사람이에요. 무서울 정도로 치밀한 사람이라고요. 정말 그런 사람에 관한 대표님의 판단이 정확할 거라고 생각하세요?”멍해진 강한서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강한서는 민경하가 하려는 말이 뭔지, 잘 알고 있었다. 전엔 줄곧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납치범은 강한서를 주강운으로 착각을 한 걸까. 그러다 기억을 회복한 강한서는 강으로 뛰어내리기 직전까지 내몰던 납치범이 귓가에 속삭이던 말을 떠올렸다. “내 탓 하지 마. 그러게 누가 너더러 이 정장을 입으래?”강한서도 처음엔 정장과 납치가 대체 무슨 상관인 건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그날 강한서가 입은 화이트 정장은 한현진이 선물한 것이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강한서는 한현진에게 직접 왜 그날 그 슈트를 입으라고 한 건지 물었다. 그러자 한현진도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손주며느리에 대한 애정을 잔뜩 드러내고 나서야 정인월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한서야, 내가 법사님에게 민 실장과 민서 사주팔자를 봐달라고 했어. 연말쯤이 두 사람이 결혼하기 제일 좋은 시기라고 하는데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해서 마음이 불안하구나.”눈을 파르르 떨던 강민서가 무의식적으로 민경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민경하는 강민서를 향해 씩 웃어 보였고 저도 모르게 빨갛게 귓불을 물들인 강민서는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강한서가 웃으며 물었다. “할머니가 왜 불안하세요.”정인월이 말했다. “민 실장처럼 좋은 애가 민서 성격에 못 이겨 도망갈까 봐 그러지. 두 사람이 금방 서로를 알아가면서 민서가 조금이라도 본성을 드러내지 않고 착한 척할 때 아예 결혼을 시켜버리려고 그랬지. 나중에라도 본성이 드러난다고 해도 이미 결혼을 한 이상 민 실장이 후회해도 소용없잖아. 하지만 길일이 되려면 아직도 멀었으니 차라리 약혼이라도 해서 일단 임자가 있다고 못이라도 박아서 못 가게 하면 어떨까, 생각 중이야.”강한서: ...강민서가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할머니! 할머니한텐 제가 얼마나 눈엣가시 같아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거예요!”휴대폰 너머로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곧 어색한 정인월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민서야, 네 오빠 곁에 있었니? 밀 실장과 데이트 안 갔어?”민경하가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아뇨, 아직 퇴근 전이라서요.”정인월: ...“하하, 다 같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시끌벅적하네. 하하.”정인월이 바득, 이를 갈았다. ‘이 요망한 손자 놈이, 정말! 할머니를 이렇게 놀려먹어!’어차피 모두 들었다고 하니 정인월은 아예 대놓고 얘기를 꺼내기로 했다. “민 실장, 약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할 생각 있어?”강민서가 주먹을 꽉 움켜쥐고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잠시 침묵하던 민경하가 입을 열었다. “아가... 민서 씨가 원한다면요. 전 상관없어요.”강민서의 심장이 세차게 뜀밖질했다. 쿵쾅쿵쾅. 마치 주변은 온통 자신의 심
민경하가 멍한 얼굴로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저도 모르겠어요.”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본인 마음을 모르겠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일할 땐 누구보다 확실한 사람이 인생의 중요한 선택 앞에서 모르겠다고요?”민경하가 손을 올려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난감할 때 나오는 그만의 습관이었다. 강한서는 민경하를 다그치는 대신 그저 조용히 그가 대답하기를 기다렸다. 한참 만에야 민경하가 입을 열었다. “대표님은 민서 씨 오빠시니까 화가 나실 수 있겠지만 전 정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전 단지 약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고 생각해요. 저와 아가씨는 사이가 나쁜 건 아니지만 사실 설레는 감정은 그리 많지 않아요. 저도 아가씨와의 만남이 싫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아직은 대표님이 사모님을 대하시는 것처럼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그 정도는 아니에요.”강한서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럼 할머니께서 물어보실 때 왜 거절하지 않았어요?”민경하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회장님 건강이 옛날 같지 않으신데 그렇다고 큰 사모님을 믿을 수는 없으니 본인이 조금이라도 건강하실 때 민서 씨가 의지할 만한 사람을 찾아주고 싶으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사람으로 절 선택하셨으니 저도 그 마음을 받들어 회장님이 마음 놓으실 수 있게 민서 씨를 잘 보살피고 싶어요.”“마음을 놓긴 개뿔!”강한서가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못 찾으면 못 찾는 거지, 한성이 민서 하나 먹여 살리지 못할까 봐 그래요?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거절하지 않는 건, 일단 결혼했다가 이혼이라도 하려고 그러는 거예요?”민경하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사랑까지는 아니라는 얘기죠. 그리고 저도 이혼할 생각은 없어요. 민서 씨가 강력하게 이혼을 요구하지만 않는다면요.”민경하는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풋풋한 청년이 아니었다. 그도 이제 곧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그러니 어린아이들처럼 열렬하고 뜨겁게 사랑하는 연애가 아닌
이런 만남이 민경하에게는 연애보다는 직장 상사가 분부한 업무를 보는 것에 더 가까웠다. 그러니 결혼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었던 것이다. 민경하가 무리하게 맞추려 한다는 말은 오히려 강한서가 꽤 에둘러 표현해 준 것이었다. 민경하 역시 그 일을 본인의 희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도 민경하의 희생을 바라지 않았다. 단지 민경하 본인이 무의식적으로 강민서와는 다른 본인의 신분을 신경 쓰면서 괜한 자존심을 부린 탓에 솔직한 마음으로 강민서를 대할 수 없었던 것뿐이었다. 강한서의 말에 깨달음을 얻은 민경하는 부끄러운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건 본인에게 무책임했을 뿐만 아니라 강민서를 전혀 존중하지 않은 생각이었다. “그럼 어떡해요? 회장님께서 이미 저희 어머니께 연락하셨을 것 같은데.”민경하가 나지막이 강한서에게 도움을 청했다. “민 실장이 그걸 나한테 물으면 난 누구한테 물어볼까요?”어이가 없다는 듯 불퉁하게 대답하던 강한서가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민 실장이 직접 민서에게 잘 얘기해요. 민서에게 이성으로써의 감정이 없어서 약혼하고 싶지 않다고요. 먼저 민서 마음을 끊어내고 나서 다시 할머니께 잘 말씀드려요.”민경하가 조금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렇게 직접적으로요?”강한서가 냉소 지었다. “왜요, 민서 어장 관리라도 하게요?”민경하: ...사무실에서 쫓겨난 민경하는 한참 동안 고민을 거듭한 후 결국 강민서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강민서의 사무실 문이 비스듬히 열려있었다. 누군가와 통화 중이던 강민서의 목소리가 문틈 사이로 한 글자도 빠짐없이 민경하의 귀에 흘러들었다. “아마 이번 달이면 약혼할 것 같아. 할머니가 어떤 날로 잡을지 봐야겠지. 그럼, 당연하지. 날 정해지면 너희들한테 제일 먼저 얘기해줄게.”“외모는 그럭저럭 생겼어. 우리 오빠 정도는 아니지만 봐줄 만해.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닌데 일할 땐 말이 엄청 많아. 아줌마처럼 이것저것 다 신경 쓴다니까. 처음엔 귀찮았는데 지내다 보니
완전히 몰입해 설명하고 있던 민경하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강한서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강한서를 똑똑히 본 강민서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민경하가 바로 뒤에 있다는 사실을 깜박한 강민서는 그대로 머리를 민경하의 턱에 부딪혔고 그 탓에 혀를 씹은 민경하는 고통의 신음을 내뱉었다. 강민서는 허둥지둥거리며 뻘쭘한 듯 강한서를 채근하며 다친 민경하를 살폈다. “오빠, 왜 노크도 안 하는 거야!”아직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강한서가 생각했다. ‘민서에게 얘기한 거야? 그렇다기엔 민서가 너무 얌전한데.’“노크했어. 네가 못 들은 거지.”강한서가 태연하게 대답하며 민경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얘기 잘 끝났어?”민경하는 턱을 움켜쥔 채 어쩐지 마음에 찔려 시선을 돌렸다. 강한서: ?민경하가 괜찮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강민서는 강한서에게 물었다. “오빠, 왜 왔어?”만약 조금 전엔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면 지금은 상황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따도남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 비서 성격상, 아마 강민서에게 파혼하자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강한서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너 말고, 민 실장 찾으러 온 거야.”말하며 그는 민경하를 째려보았다. “안 나와요? 업무시간에 누가 마음대로 자리 비우래요?”민경하가 턱을 움켜쥔 채로 다급히 사무실을 나섰다. 강민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오빠가 민 실장님에게 업무 가르쳐주라고 했잖아. 이게 어떻게 함부로 자리를 비운 거야. 오빠 갑질하지 마.”‘내가 갑질이라고?’강민서의 머리를 열어 정신 차리라고 뺨이라도 때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 강한서는 그럴 수 없는 현실의 무력함에 빠져들었다. 역시 눈에 씐 콩깍지는 쉽게 벗겨지지는 않는 법이었다. 강한서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이제껏 가르쳐줘도 네가 아직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걸 보면 사수가 능력 미달인 거야. 정 아닌 것 같으면 사수 바꿔줄게.”“민 실장님이 뭐가 능력 미달이라는 거야
강한서는 이번만큼은 민경하의 대답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가 코웃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기회는 이번뿐이에요. 오늘이 지나면 나중은 없어요. 아무리 억울하고 아무리 불만이어도 꾹 참고 얌전히 데릴사위가 되어야 할 거예요.”강한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모르는 번호였다. 통화 버튼을 누른 강한서가 날카로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누구시죠.”공격적인 말에 상대방이 멈칫했다. 그리고 곧 한현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래? 뭐 잘못 먹었어? 왜 이렇게 화가 많아?”멍해진 강한서가 곧 말투를 바꾸며 입을 열었다. “현진아, 네가 왜 다른 번호로... 누구 휴대폰이야?”한현진이 말했다. “휴대폰 가게 점장님 거야. 내가 연락이 안 돼서 네가 걱정할까 봐 전화했어. 그나저나 넌 왜 이렇게 화가 났어. 무슨 일 있었어?”“아냐.”강한서는 한시도 마음 놓을 수 없는 본인의 비서를 힐끔 쳐다보며 나가라고 손짓했다. 민경하는 큰 은혜라도 입은 사람처럼 곧바로 사무실을 나서며 문을 닫았다. 소파에 앉은 강한서가 넥타이를 끌어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뭐겠어. 민 실장이랑 민서 일 때문에 그러지.”“두 사람이 왜?”“할머니께서 두 사람에게 약혼하라고 하셨는데 민 실장은 민서를 좋아하지는 않나 봐. 좋아하지 않는 건 그렇다 쳐, 그런데도 약혼하겠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민서에게 가서 똑바로 얘기하라고 했더니 얘기는커녕 민서랑 데이트 약속을 잡은 거야. 저렇게 우유부단한데 내가 화가 안 나?”강한서의 얘기를 들은 한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강한서, 너 정말 연애 경험이 전혀 없네. 민 실장님은 전혀 우유부단한 사람이 아니야. 그런 민 실장님이 주저한다는 건 네 동생에게 전혀 마음이 없는 건 아니란 얘기잖아.”강한서는 자신의 편에 서지 않는 아내에게 불만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넌 왜 민 실장 편을 들어?”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넌 민서 오빠야. 아빠가 아니라고. 네가 모든 일에 개입할
강한서가 한현진의 말을 바로잡았다. “두 사람 사귄 적 없어. 네 오빠의 짝사랑이었지.”한현진이 말했다. “만약 오늘 만나지 않았다면 네 말을 믿었을 거야. 하지만 채영 언니 모습을 보면 오빠에게 전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야.”문채영은 서해금이 스카우트한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약속 장소에 갈 때만 해도 한현진은 문채영이 자신을 떠보거나 일부러 가까워지려고 그러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었다. 하지만 문채영은 일 얘기는 아예 꺼내지도 않은 채 한현진과 송민준의 어린 시절 얘기를 나눴다. 그중에서도 대부분은 요절한 줄 알았던 여동생에 관한 이야기였다. 송민준은 두 눈으로 직접 분만실에서 안겨나오며 울음을 터뜨리던 동생을 봤었다. 하지만 결국은 차가운 시체로 변한 동생은 그에게는 내려놓을 수 없는 마음의 짐과도 같았다.그는 늘 동생이 살아있는 것만 같았고 죽은 그 아이는 동생이 아니라고 얘기했었다. 하지만 당시의 송민준은 너무도 어렸고 아버지나 다른 가족들은 아내와 딸을 잃은 슬픔에 빠져 아무도 5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부정당하는 회수가 많아질수록 확고하던 그의 확신도 점점 흔들렸다. 등의 모반은 단지 그의 꿈속 상상이었던 걸까?비록 점차 자신의 생각을 의심하긴 했어도 여동생 말이 나올 때마다 송민준은 늘 말했었다. “만약 그게 꿈이 아니라면, 만약 여전히 살아있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만나는 날, 난 바로 그 애를 알아볼 수 있을 거야.”문채영은 한현진을 보며 감개무량한 듯 말했다. “민준이는 틀리지 않았어. 걔는 정말 한눈에 널 알아봤어.”한현진은 송민준이 자신을 얼마나 아끼는지, 그동안의 빈자리를 얼마나 채워주고 싶어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문채영 입에서 그런 얘기를 들으니, 어쩐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문채영은 마치 송민준이 왜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한현진을 찾은 건지, 대신 변명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한현진이 송민준에게 불만을 품기라도 할까, 걱정인 사람처럼. 강
하지만 만약 한현진과의 세력 다툼은 그저 재산 이전을 위해 주의력을 분산시키려는 허상에 불과하다면?“너 회사 재무에 접근할 수 있어?”그 말에 한현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말도 마. 재무팀은 아예 철벽통이야. 전부 아주머니 사람이라 입사 초기 가져간 선물도 은서하 씨를 제외하면 가진 사람도 없었어.”“그럼 네가 말한 그 은서하라는 사람은? 그 사람은 너에게 주 기사님을 조심하라고 귀띔하기도 했잖아.”한현진이 말했다. “솔직히 얘기하면 난 은서하 씨를 너무 믿지 못하겠어. 서하 씨는 아주머니 돈을 받았어. 집에서 아픈 할머니도 계시고. 약점이 있는 사람은 너무 나약해. 작은 압력만 넣어도 무너지니까. 서하 씨를 이용했다가 아주머니 꼬투리를 잡기도 전에 먼저 내 밑바닥까지 전부 아주머니한테 이르진 않을까 걱정이야.”말하던 한현진이 잠시 멈칫했다. “아, 맞다. 네가 준비한다던 주혁 씨 몽타주는 어떻게 됐어.”“몽타주는 완성됐지만 없는 사람이라고 나와.”실망하던 한현진은 곧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강한서, 아주머니와 관련된 사람들부터 하나씩 조사해 봐.”잠시 멍해진 강한서가 물었다. “뭐라도 발견한 거야?”“사실 아직 알아낸 건 없어. 기사님은 손을 다친 후 송가람의 기사로 전근됐어. 그러다 갑자기 내가 맨 처음 기사님을 전근시킨 것도 송가람이 날 어떡해보려다 마지막엔 기사님이 나서서 본인이 깨뜨린 거라고 얘기한 거였잖아. 그래서 어쩐지 절묘한 우연이라고 생각했었어. 조사해 봐. 만약 아주머니 주변 사람이 아니라면 내 의심도 하나 풀 수 있는 거니까.”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쪽으로 알아볼게. 아주머니 해외 자산도 내가 알아볼게. 회사는 어떡할 생각이야?”한현진이 씩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엔 아무런 온도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향 대회 우승이라는 타이틀로 해외 진출을 노리는 거라면 절대 뜻대로 되게 놔두진 않을 거야.”하지만 문채영의 등장은 한현진을 속수무책으로 만들었다. 2년 연속 우승을 거머쥔 문채영의 도움
한성우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형수님도 양심은 없으시네요. 아무리 그대로 강운이가 형수님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잖아요. 이렇게 이용하시면 마음에 안 찔리세요?”한성우의 말에 한현진의 말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좋아하면 강한서를 자극하기 위해 절 간민혜 씨 모습으로 분장시킬 수 있어요? 저와 주 변호사님은 그저 지인 딱 그 정도예요. 말 할 거예요, 말 거예요? 말 안 할 거면 됐어요.”‘강한서에게 덫을 놓은 건 내가 평생 기억하고 있을 거야.’말을 잘못 꺼냈음을 인지한 한성우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얘기하면 되잖아요. 왜 화를 내고 그래요. 하지만 제가 얘기한다고 해서 강운이가 나설 거란 보장은 저도 못해요.”한현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할 거예요.”주강운이라는 사람의 모든 면을 잘 안다고 할 수 없었지만 한현진은 변호사로서의 그의 능력은 의심한 적이 없었다. 정서희의 의뢰를 받고 정설희 사건을 조사하고 있으니 당연히 장준도 눈여겨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제 발로 찾아온 기회는 주강운은 거절할 리가 없었다. 주강운에게 전화해 안부를 묻던 한성우는 돌고 돌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불법 레이싱 교통사고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대. 전부 이제 갓 20살이 된 어린 애들이던데 안타깝게 됐어. 학교나 열심히 다닐 것이지 레이싱은 대체 왜 한 거야. 목숨이 아깝지도 않나 봐.”커피를 한 모금이 마신 주강운이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이젠 사회 뉴스도 봐?”“아니, 그냥 우연하게 본 건데 놀라워서 그러지. 바로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잖아. 부상자 중에 진수 그룹 막내아들도 있었고. 탄식이 절로 나오더라니까.”물을 한 모금 마신 한성우가 툭 던지듯 물었다. “넌 이런 뉴스 안 봐?”주강운이 말했다. “봤는데 자세히는 안 봤어.”“사건 관련 기사는 아무것도 아니야. 숨겨진 뒷이야기가 더 충격적이야. 그러니까...”“잠깐만.”주강운이 한성우의 말을 잘랐다. “나 할 일이 있어서 나중에 끝
[아니, 지금 중요한 건 사고 원인을 밝히는 거 아녜요? 대체 왜 부상자 신상정보나 캐고 있는 거예요? 일부러 여론 몰이 하려는 거 아녜요?][그러니까요. 이렇게 큰 교통사고면 한 사람만의 문제는 아닐 텐데, 이 경기의 주최 측에 문제점을 둬야하는 거잖아요.][속도 제한 구간에서 불법 레이싱을 하다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뭐 더 할 말 있어요? 위에 댓글 혹시 진수 그룹 알바 아니세요?][그래서 진모 씨는 경기에 참가하지 않은 건가요? 피해자라도 된대요? 피해자는 그 인간들 차에 치인 사람이에요. 논리적인 척 하는 거 웃기네요. 쓰레기 같은 인간 때문에 목숨을 잃은 피해자는 나 몰라라 하면서 그것도 인간이라고 신상정보가 털리는 게 안타까워요?][진윤. 남. 서화 대학 전기정보공학과 2학년. 주민등록 번호: XXXX. 전화번호: XXXX.]진윤의 신상정보가 인터넷에 전부 폭로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정보를 공유했다. 심지어 진윤의 수능성적을 폭로하며 그의 성적으로는 서화 대학에 입학할 수 없다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불법 레이싱으로 인한 교통사고로 한 사람을 향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고 여론은 이미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여론 몰이가 필요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그 대상이 진윤이 될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 진윤을 이용해 사건의 요점을 흐리려는 의도이거나 이번 일을 계기로 진수 그룹에 타격을 주려는 것이 분명했다.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한현진이 한성우에게 연락했다. 진윤의 일로 전화했다는 것을 안 한성우가 말했다. “이번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녜요. 일단 불법 레이싱도 문제이긴 하지만 제일 중요하건 레이싱에 참가한 사람 중 마약을 한 인간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이번 사고가 일어난 제일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고요.”“지금 그 인간을 숨기기 위해 인터넷에서는 이 사건의 모든 화살을 진윤 씨에게 돌리고 있어요. 형수님과 한서는 이번 일에 끼어들지 말아요.”한현진이 멈칫하며 물었다. “그
한현진은 어쩔 수 없이 민경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약혼식 준비를 하는 민경하를 위해 강한서는 특별 휴가를 지급했다. 그러니 민경하도 지금은 강한서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아주머니 말로는 아침 여섯 시부터 급하게 나갔다고 해요.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요.”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야겠어요.”“잠깐만요, 사모님.”갑자기 한현진을 부른 민경하가 나지막이 물었다. “오늘 아침 뉴스 보셨어요?”“아직요. 왜요?”민경하가 말했다. “어젯밤 남서신길에서 레이싱 경기가 있었는데 큰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해요. 남서신길 쪽에 저희 자회사에서 시공을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어요.”“오늘 아침 6시쯤에 뉴스가 터진 거니까 대표님께서 급히 나간 게 그 일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남서신길이요?”잠깐 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움찔 몸을 떨었다. ‘진윤 씨가 전에 참가하겠다고 고집 부리던 경기잖아?’한현진이 곧바로 진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뿐만 아니라 홍혜림도 연락을 받지 않았다. 비록 진씨 가문과 연이 깊은 것도 아니었고 진윤에게 다가간 것도 홍혜림에게 물어볼 것이 있기 때문이었지만 혹시라도 사고를 당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이 자식! 분명 강한서와 더는 그런 위험한 경기엔 참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서. 대체 왜 이렇게 말을 듣지 않는 거야.’아무도 연락을 받지 않자 한현진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한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하리에게 물어봐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진윤의 사촌누나이니 어쩌면 남인 그들보다 먼저 소식을 들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열이 말했다. “진윤 씨도 다쳐서 아직 깨어나지 못했대요. 신하리 씨도 아까 공항으로 가서 아마 지금쯤 그쪽으로 출발했을 거예요. 아직 사람을 보지도 못했으니 신하리 씨도 상황은 잘 모르고 있을 거예요.”제일 염려했던 일이 결국은 일어나고 말았다. 진윤도 그 사고 현장에 있었다. 그
염색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잘생긴 포즈로 거울 셀카를 찍은 진윤이 강한서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다시 시작.]강한서는 사진 속 검은 머리에 순해 보이는 젊은이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읽던 책을 내려놓은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왜?”강한서가 진윤의 셀카를 한현진에게 보여주었다. 한현진 역시 사진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금발에 눈썹도 살짝 밀어버리는 스타일을 고집하더라니. 눈썹 피어싱까지 빼니까 그냥 아기였네. 너무 귀엽게 생겼잖아. 훈이보다 어려 보여.”강한서도 한현진을 따라 웃었다. “선배도 그렇잖아. 50살도 넘은 분이 아직도 30대처럼 보이니까. 성우가 처음 선배를 봤을 때 형이라고 불렀다가 예의 없다고 혼났어. 그러다 다른 애들도 형이라고 하니까 말이 없더라고.”그 장면을 상상한 한현진은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역시 동안이 좋아. 50대가 되어서도 얼굴 하나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살 수 있잖아. 난 왜 동안이 아닐까?”그 말에 멈칫한 강한서가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누구 마음을 사려고?”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강 대표님, 몇 십 년 후의 일도 미리 질투하실 거예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는 아냐.”한현진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정말?”강한서가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안 해, 질투.”예상 밖의 대답에 호기심이 불타오른 한현진이 물었다. 몇 십 년 후엔 사랑보다 정으로 사는 거라 신경 쓰지 않는 거야?”강한서가 대답했다. “그건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어.”“뭔데?”강한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대들은 그저 첩에 불과해.”멍해졌던 한현진이 폭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강한서를 품에 안고 뽀뽀 세례를 날렸다. “진지한 얼굴로 실없는 농담을 던질 때 정말 귀여워 죽겠다니까.”강한서가 힐끔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이런 걸 바로 조강지처의 자신감이라고 하는 거야.”한
순간 불쾌한 기분에 빠진 진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아마추어 경기는 사석에서 주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전문적인 레이싱 경기도 아니었다. 오직 속도에서 주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경기였다. 상금이 높은 만큼 위험부담도 컸다. 하지만 진윤이 경기에 참가한 것은 상금 때문이 아니었다. 돈 걱정 없이 산 진윤이 목숨 건 돈에 욕심낼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지 경기의 주최 측에 F1 레전드 인물도 있다는 소식에 우승을 하면 그 사람과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참가한 것이었다. 진윤은 그의 팀원들 역시 레이싱에 대한 열정으로 함께 지금까지 뭉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을 무시하는 친구의 말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진윤처럼 레이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프로 선수가 되길 꿈꾸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이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레이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는 상금이라는 거대한 유혹일 수도 있었다. 팀원 중 위험한 내기 경기에 참석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진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경주마처럼 미친 듯이 산길을 휘저었다. 목숨을 내걸고 재벌들의 도박판에서 기꺼이 주사위가 되었다. 아차 하는 사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경기에서 이기면 그만큼 어마어마한 상금이 주어졌다. 불행히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고 해도 그의 가족들은 놀라운 액수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으니 위험을 감수하고 뛰어드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처음으로 팀원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의 진윤은 충격에 빠졌었다. 하지만 팀원들은 마치 일상적이 대화를 하듯 당연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의 진윤은 그저 그들이 비슷한 일을 너무 많이 들은 탓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들은 그렇게 위험 부담마저도 부러웠었던 같았다. 팀원 중 대부분의 사람에게 레이싱은 그저 짧은 시간 사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도구에 불과했다. 뜬 눈으로 꿈을 꾸고 있는 진윤이야말로 그들에겐 이상한 인간
“아들. 네가 공부가 하고 싶다면 복수 전공이 아니라 10개 전공을 배우겠다고 해도 엄마는 찬성이야. 엄마 지금 너무 기뻐. 만약 농담하는 거라면 지금 당장 거짓말이었다고 얘기해. 안 그럼 엄마는 진심으로 받아들일 거야.”진윤이 웃으며 홍혜림의 팔을 끌어안았다. “엄마. 저도 형처럼 엄마의 자랑이면 안 돼요?”홍혜림이 진윤의 금발을 어루만졌다. “너도 예전엔 엄마의 자랑이었지. 금발로 염색한 후로는 자랑이 아니게 되었지만.”진윤: ...“그럼 다시 염색할게요.”홍혜림이 얼른 헤어숍 VIP카드를 건네며 말했다. “얼른 가. 여긴 새벽 12시가 되어야 영업이 끝나는 곳이야. 지금 가면 아직 시간 있어.”진윤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홍혜림이 얼마나 진윤의 금발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네, 네, 네. 지금 갈게요.”외투를 챙겨주며 문앞까지 배웅 나온 홍혜림이 진윤에게 물었다. “아들. 조금 전에 누구한테 들은 말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잖아. 그 분 너희 교수님이셔?”“우리 교수님은 아녜요. 하지만 좋은 스승님이긴 해요.”‘사기꾼이기도 해. 하지만 꽤 능력 있는 사기꾼.’홍혜림이 호기심에 가득 찬 말투로 물었다. “그 분 한 마디에 바로 생각이 바뀐 거야? 내가 너한테 얼마나 많이 얘기했었는데, 그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진윤이 말했다. “절 데리고 20km를 뛰었어요. 자길 이기면 날 뉴벨리 팀에 입단시켜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나보다 10살이나 많아서 나이 많은 어르신한테 지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졌어요.”진윤이 창피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저보다 빨리 뛴 건 아니었어요. 제가 적을 만만하게 생각한 거죠. 하지만 무서운 사람이에요. 지독하게 강해서 무서운 사람. 그 사람은 못 해낼 일이 없는 것 같아요. 입단은 무슨, 그냥 그 기회를 벌어 저에게 설교를 하려던 것뿐이었어요.”“내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레이싱을 그만두게 하려고. 처음엔 엄마가 보낸 스파이인 줄 알았다니까요. 하지만
진윤에게 묻는 홍혜림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얘기해. 엄마 괜찮아. 파산이라도 하지, 뭐. 돈은 없으면 다시 벌 수 있어. 아빠가 안 된다고 하면 쫓아내면 돼.’처음으로 느끼는 죄책감에 진윤은 고개를 숙였다. 홍혜림이 비록 관리를 잘 하긴 했지만 귀밑머리는 이미 하얀 서리가 내려있었다. 큰형은 어려서부터 얌전하고 말을 잘 듣는 아이라 부모님의 속을 썩인 적이 없었다. 유독 진윤이 고집을 부리며 걸음마를 뗄 때부터 뒤에서 마음을 졸이게 했다. 진윤의 수능성적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 전공은 전부 부모님이 수많은 돈을 들여 기획한 결과였다. 하지만 진윤은 본인이 좋아하지 않는 전공이라는 이유로 자포자기하며 지냈다. 부모님이 통제욕이 강하다는 것은 그저 진윤이 그들에게 씌워놓은 프레임에 불과했다. 정말 부모님의 통제 속에서 살아가는 친구들은 매일 모든 스케줄, 심지어 먹는 음식까지 전부 부모님에게 보고해야 했다. 그런 사람에 비하면 그의 부모님은 그저 애교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레이싱을 좋아하는 진윤이 못마땅했지만 그럼에도 그저 설득하는 것이 전부였다. 홍혜림은 단 한 번도 진윤의 레이싱 장비를 부순 적이 없었다. 매번 더는 새 장비를 사주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다짐도 진윤의 애교 몇 번에 곧 무너지고 말았다. ‘언제까지 실망만 안겨드릴 순 없잖아. 나도 엄마의 자랑이 되어야지 않겠어?’“엄마. 저 복수 전공하고 싶어요. 전 레이싱이 좋아요. 도무지 포기가 안 돼요. 저 실력 그 정도 아닌 거 알아요. 하지만 자동차 관련한 전공을 배워보고 싶어요. 지금 전공은 절대, 두 번 다시는 F학점 받는 일 없을 거라 약속 드려요. 복수 전공하게 해주면 안 돼요?”홍혜림: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어?”진윤이 멍해졌다. “네?”홍혜림이 말했다. “네가 나에게 하려는 말이 그거야?”진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그게 아니면요?”홍혜림: “사람을 치거나, 교통사고를 낸 게 아니고?”
눈에 띄게 변한 진윤의 모습을 홍혜림은 믿을 수가 없었다.집 바로 앞이 학교라 진윤은 기숙사 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집에 자주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집에서 레이싱 게임을 할 때마다 부모님의 잔소리가 끊이질 않아 진윤은 큰형 아파트에 몰래 숨어있는 것을 좋아했다. 진윤의 큰형은 일 때문에 그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9살이나 더 많은 그의 형은 가끔 부모님보다 더 진윤을 아끼기도 했다. 심지어 가끔은 진윤의 편을 들어 그의 비밀을 지켜주기도 했다. 큰형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러니 제발 눈치껏 본가로 들어오라고 홍혜림은 몇 번이고 진윤에게 얘기했었다. 사실 예비 며느리는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진윤을 본가로 불러들이는 이유는 진윤이 곁에 없으니 도무지 관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윤은 그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매번 홍혜림이 같은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그는 두 귀를 닫고 못 듣는 척 연기했다. 하지만 이번엔 홍혜림이 먼저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진윤 스스로 본가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진윤에 홍혜림은 혹시 형제가 싸우기라도 한 걸까 전화를 했지만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에 홍혜림은 생각했다. ‘이 자식 또 무슨 사고라도 치고 돌아와서 얌전한 척 연기하는 거 아냐?’‘교통사고라도 내서 배상해 줘야 하는 건가? 아니면 레이싱 카가 망가져서 새 차를 살 돈이 필요한 건가?’‘설마 사람을 친 건 아니겠지?’진윤이 집에서 열심히 공부할수록 홍혜림은 점점 더 사람을 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매일 밤 아무 일도 없는 척 진윤의 방 앞을 서성이며 생각했다. ‘먼저 잘못을 인정하면 요즘 얌전하게 지냈던 걸 정상참작해서 욕을 좀 덜해야겠어.’하지만 3일이 지나도록 진윤은 홍혜림을 부르지 않았다. ‘이상해.’‘너무 이상하잖아!’‘설마 사람을 친 것보다 더 큰 사고는 아니겠지?’‘대체 얼마를 배상해야 하는 거야?’1 주일이 지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홍혜림은 진윤의
진윤: ...강한서가 진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싫다면서 현 상황을 바꿔보려고 하지도 않은 거야?”진윤: ...‘왜 선생님께 혼나는 기분이 드는 거지? 진지하게 핵심만 꼬집고 있잖아.’입을 달싹이던 진윤은 변명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진윤은 그동안 어떻게 반항해야할지,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강한서가 말했다. “네 인생은 네 거야. 네가 열심히 살든, 대충 살든 네 하루하루는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어. 네 태도에 따라 싫었던 그 경험들이 사라지지 않아. 단지 네가 싫다는 이유로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않고 대충 흘려보냈을 뿐 그것들은 계속 존재해.”“대충 공부해서 대충 졸업하면 또 대충 취직이나 하겠지. 아니면 아예 너희 회사로 입사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다음에? 그렇게 평생을 대충 흘려보낼 거야? 그게 네가 원하는 인생이야?”멍하니 강한서를 쳐다보던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아뇨.”부모님이 선택해준 전공이 싫어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얼른 졸업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강한서의 말처럼 졸업 후엔? 전공에 맞는 직업을 찾아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갈까, 아니면 부모님 회사에 입사해 되는대로 살아갈까. 어떤 선택이든 그건 진윤이 원하는 인생은 아니었다. 4년이란 시간을 허무히 흘러 보내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전 이미 3학년이에요. 전과를 하기엔 늦었잖아요. 이젠 뭘 하려고 너무 늦은 것 같아요.”속상한 듯 대답하는 진윤의 말에 한현진이 말했다. “진윤 씨는 완전 MZ세대잖아요. 이제 갓 이십 대 초반인데 뭘 해도 늦지 않은 나이예요. 너무 빨리 본인의 가능성을 단정 짓지 말아요. 60세에 대학생이 됐다는 기사 못 봤어요?”“진윤 씨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도 늦었다고 생각 안 하는데, 진윤 씨가 왜 겁을 내요?”“전...”입술을 달싹이던 진윤이 한참이 지나서야 한숨을 내뱉었다. “두 사람 문제아 갱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