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만남이 민경하에게는 연애보다는 직장 상사가 분부한 업무를 보는 것에 더 가까웠다. 그러니 결혼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었던 것이다. 민경하가 무리하게 맞추려 한다는 말은 오히려 강한서가 꽤 에둘러 표현해 준 것이었다. 민경하 역시 그 일을 본인의 희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도 민경하의 희생을 바라지 않았다. 단지 민경하 본인이 무의식적으로 강민서와는 다른 본인의 신분을 신경 쓰면서 괜한 자존심을 부린 탓에 솔직한 마음으로 강민서를 대할 수 없었던 것뿐이었다. 강한서의 말에 깨달음을 얻은 민경하는 부끄러운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건 본인에게 무책임했을 뿐만 아니라 강민서를 전혀 존중하지 않은 생각이었다. “그럼 어떡해요? 회장님께서 이미 저희 어머니께 연락하셨을 것 같은데.”민경하가 나지막이 강한서에게 도움을 청했다. “민 실장이 그걸 나한테 물으면 난 누구한테 물어볼까요?”어이가 없다는 듯 불퉁하게 대답하던 강한서가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민 실장이 직접 민서에게 잘 얘기해요. 민서에게 이성으로써의 감정이 없어서 약혼하고 싶지 않다고요. 먼저 민서 마음을 끊어내고 나서 다시 할머니께 잘 말씀드려요.”민경하가 조금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렇게 직접적으로요?”강한서가 냉소 지었다. “왜요, 민서 어장 관리라도 하게요?”민경하: ...사무실에서 쫓겨난 민경하는 한참 동안 고민을 거듭한 후 결국 강민서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강민서의 사무실 문이 비스듬히 열려있었다. 누군가와 통화 중이던 강민서의 목소리가 문틈 사이로 한 글자도 빠짐없이 민경하의 귀에 흘러들었다. “아마 이번 달이면 약혼할 것 같아. 할머니가 어떤 날로 잡을지 봐야겠지. 그럼, 당연하지. 날 정해지면 너희들한테 제일 먼저 얘기해줄게.”“외모는 그럭저럭 생겼어. 우리 오빠 정도는 아니지만 봐줄 만해.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닌데 일할 땐 말이 엄청 많아. 아줌마처럼 이것저것 다 신경 쓴다니까. 처음엔 귀찮았는데 지내다 보니
완전히 몰입해 설명하고 있던 민경하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강한서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강한서를 똑똑히 본 강민서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민경하가 바로 뒤에 있다는 사실을 깜박한 강민서는 그대로 머리를 민경하의 턱에 부딪혔고 그 탓에 혀를 씹은 민경하는 고통의 신음을 내뱉었다. 강민서는 허둥지둥거리며 뻘쭘한 듯 강한서를 채근하며 다친 민경하를 살폈다. “오빠, 왜 노크도 안 하는 거야!”아직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강한서가 생각했다. ‘민서에게 얘기한 거야? 그렇다기엔 민서가 너무 얌전한데.’“노크했어. 네가 못 들은 거지.”강한서가 태연하게 대답하며 민경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얘기 잘 끝났어?”민경하는 턱을 움켜쥔 채 어쩐지 마음에 찔려 시선을 돌렸다. 강한서: ?민경하가 괜찮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강민서는 강한서에게 물었다. “오빠, 왜 왔어?”만약 조금 전엔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면 지금은 상황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따도남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 비서 성격상, 아마 강민서에게 파혼하자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강한서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너 말고, 민 실장 찾으러 온 거야.”말하며 그는 민경하를 째려보았다. “안 나와요? 업무시간에 누가 마음대로 자리 비우래요?”민경하가 턱을 움켜쥔 채로 다급히 사무실을 나섰다. 강민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오빠가 민 실장님에게 업무 가르쳐주라고 했잖아. 이게 어떻게 함부로 자리를 비운 거야. 오빠 갑질하지 마.”‘내가 갑질이라고?’강민서의 머리를 열어 정신 차리라고 뺨이라도 때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 강한서는 그럴 수 없는 현실의 무력함에 빠져들었다. 역시 눈에 씐 콩깍지는 쉽게 벗겨지지는 않는 법이었다. 강한서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이제껏 가르쳐줘도 네가 아직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걸 보면 사수가 능력 미달인 거야. 정 아닌 것 같으면 사수 바꿔줄게.”“민 실장님이 뭐가 능력 미달이라는 거야
강한서는 이번만큼은 민경하의 대답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가 코웃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기회는 이번뿐이에요. 오늘이 지나면 나중은 없어요. 아무리 억울하고 아무리 불만이어도 꾹 참고 얌전히 데릴사위가 되어야 할 거예요.”강한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모르는 번호였다. 통화 버튼을 누른 강한서가 날카로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누구시죠.”공격적인 말에 상대방이 멈칫했다. 그리고 곧 한현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래? 뭐 잘못 먹었어? 왜 이렇게 화가 많아?”멍해진 강한서가 곧 말투를 바꾸며 입을 열었다. “현진아, 네가 왜 다른 번호로... 누구 휴대폰이야?”한현진이 말했다. “휴대폰 가게 점장님 거야. 내가 연락이 안 돼서 네가 걱정할까 봐 전화했어. 그나저나 넌 왜 이렇게 화가 났어. 무슨 일 있었어?”“아냐.”강한서는 한시도 마음 놓을 수 없는 본인의 비서를 힐끔 쳐다보며 나가라고 손짓했다. 민경하는 큰 은혜라도 입은 사람처럼 곧바로 사무실을 나서며 문을 닫았다. 소파에 앉은 강한서가 넥타이를 끌어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뭐겠어. 민 실장이랑 민서 일 때문에 그러지.”“두 사람이 왜?”“할머니께서 두 사람에게 약혼하라고 하셨는데 민 실장은 민서를 좋아하지는 않나 봐. 좋아하지 않는 건 그렇다 쳐, 그런데도 약혼하겠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민서에게 가서 똑바로 얘기하라고 했더니 얘기는커녕 민서랑 데이트 약속을 잡은 거야. 저렇게 우유부단한데 내가 화가 안 나?”강한서의 얘기를 들은 한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강한서, 너 정말 연애 경험이 전혀 없네. 민 실장님은 전혀 우유부단한 사람이 아니야. 그런 민 실장님이 주저한다는 건 네 동생에게 전혀 마음이 없는 건 아니란 얘기잖아.”강한서는 자신의 편에 서지 않는 아내에게 불만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넌 왜 민 실장 편을 들어?”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넌 민서 오빠야. 아빠가 아니라고. 네가 모든 일에 개입할
강한서가 한현진의 말을 바로잡았다. “두 사람 사귄 적 없어. 네 오빠의 짝사랑이었지.”한현진이 말했다. “만약 오늘 만나지 않았다면 네 말을 믿었을 거야. 하지만 채영 언니 모습을 보면 오빠에게 전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야.”문채영은 서해금이 스카우트한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약속 장소에 갈 때만 해도 한현진은 문채영이 자신을 떠보거나 일부러 가까워지려고 그러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었다. 하지만 문채영은 일 얘기는 아예 꺼내지도 않은 채 한현진과 송민준의 어린 시절 얘기를 나눴다. 그중에서도 대부분은 요절한 줄 알았던 여동생에 관한 이야기였다. 송민준은 두 눈으로 직접 분만실에서 안겨나오며 울음을 터뜨리던 동생을 봤었다. 하지만 결국은 차가운 시체로 변한 동생은 그에게는 내려놓을 수 없는 마음의 짐과도 같았다.그는 늘 동생이 살아있는 것만 같았고 죽은 그 아이는 동생이 아니라고 얘기했었다. 하지만 당시의 송민준은 너무도 어렸고 아버지나 다른 가족들은 아내와 딸을 잃은 슬픔에 빠져 아무도 5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부정당하는 회수가 많아질수록 확고하던 그의 확신도 점점 흔들렸다. 등의 모반은 단지 그의 꿈속 상상이었던 걸까?비록 점차 자신의 생각을 의심하긴 했어도 여동생 말이 나올 때마다 송민준은 늘 말했었다. “만약 그게 꿈이 아니라면, 만약 여전히 살아있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만나는 날, 난 바로 그 애를 알아볼 수 있을 거야.”문채영은 한현진을 보며 감개무량한 듯 말했다. “민준이는 틀리지 않았어. 걔는 정말 한눈에 널 알아봤어.”한현진은 송민준이 자신을 얼마나 아끼는지, 그동안의 빈자리를 얼마나 채워주고 싶어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문채영 입에서 그런 얘기를 들으니, 어쩐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문채영은 마치 송민준이 왜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한현진을 찾은 건지, 대신 변명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한현진이 송민준에게 불만을 품기라도 할까, 걱정인 사람처럼. 강
하지만 만약 한현진과의 세력 다툼은 그저 재산 이전을 위해 주의력을 분산시키려는 허상에 불과하다면?“너 회사 재무에 접근할 수 있어?”그 말에 한현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말도 마. 재무팀은 아예 철벽통이야. 전부 아주머니 사람이라 입사 초기 가져간 선물도 은서하 씨를 제외하면 가진 사람도 없었어.”“그럼 네가 말한 그 은서하라는 사람은? 그 사람은 너에게 주 기사님을 조심하라고 귀띔하기도 했잖아.”한현진이 말했다. “솔직히 얘기하면 난 은서하 씨를 너무 믿지 못하겠어. 서하 씨는 아주머니 돈을 받았어. 집에서 아픈 할머니도 계시고. 약점이 있는 사람은 너무 나약해. 작은 압력만 넣어도 무너지니까. 서하 씨를 이용했다가 아주머니 꼬투리를 잡기도 전에 먼저 내 밑바닥까지 전부 아주머니한테 이르진 않을까 걱정이야.”말하던 한현진이 잠시 멈칫했다. “아, 맞다. 네가 준비한다던 주혁 씨 몽타주는 어떻게 됐어.”“몽타주는 완성됐지만 없는 사람이라고 나와.”실망하던 한현진은 곧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강한서, 아주머니와 관련된 사람들부터 하나씩 조사해 봐.”잠시 멍해진 강한서가 물었다. “뭐라도 발견한 거야?”“사실 아직 알아낸 건 없어. 기사님은 손을 다친 후 송가람의 기사로 전근됐어. 그러다 갑자기 내가 맨 처음 기사님을 전근시킨 것도 송가람이 날 어떡해보려다 마지막엔 기사님이 나서서 본인이 깨뜨린 거라고 얘기한 거였잖아. 그래서 어쩐지 절묘한 우연이라고 생각했었어. 조사해 봐. 만약 아주머니 주변 사람이 아니라면 내 의심도 하나 풀 수 있는 거니까.”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쪽으로 알아볼게. 아주머니 해외 자산도 내가 알아볼게. 회사는 어떡할 생각이야?”한현진이 씩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엔 아무런 온도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향 대회 우승이라는 타이틀로 해외 진출을 노리는 거라면 절대 뜻대로 되게 놔두진 않을 거야.”하지만 문채영의 등장은 한현진을 속수무책으로 만들었다. 2년 연속 우승을 거머쥔 문채영의 도움
서해금이 멈칫했다. “도 씨라고요? 한주 재벌가에 그런 사람이 있었나요?”성월이 말했다. “교포세요. 고향은 한주라고 하셨어요. 퇴직 후 귀국하셔서 잠깐 지내시는 것 같았어요.”“클라이언트 신상정보 가져와요.”성월은 곧바로 도일준이 남긴 신상정보를 서해금에게 보여주었다. 빠른 속도로 자료를 훑은 서해금은 직업란에 적힌 의사라는 단어에 멈칫했다. “언제 오신다고 했죠?”“오후 3시요.”서해금이 서류를 덮으며 말했다. “좋은 차도 준비하고 미팅 준비 잘해요. 그리고 한현진에게 오후 3시 30분에 저와 함께 VIP와 미팅에 참석해야 한다고 전해요.”성월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대표님, 줄곧 M 국 시장에 진출하고 싶어 하셨잖아요. 이분은 현지의 유명한 의사세요. 그쪽에 아는 분도 많으실 텐데 이렇게 중요한 클라이언트와의 미팅을 한현진 씨도 참석시키시려고요?”서해금이 태연하게 말했다. “같은 회사에서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차라리 당당하게 행동해야 다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을 거예요.”더 설득하려는 성월에게 서해금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만하고 나가봐요.”성월은 어쩔 수 없이 목 끝까지 올라왔던 의문을 꿀꺽 삼키고 사무실을 나서야했다. 서해금과 함께 VIP의 미팅에 요청 받은 한현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서해금이 좋은 마음으로 고객을 공유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갑자기 쿨한 척한다는 것은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한현진은 감동이라도 받은 척 연기하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지금 바로 준비할게요. 서 대표님께서 또 다른 말씀은 없으셨어요?”성월이 태연하게 말했다. “아뇨. 오후 3시 30분, 시간 맞춰 도착하시면 돼요.”도일준이 성월의 안내로 미팅룸에 들어왔을 때 서해금은 이미 테이블 앞에 앉아 차를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보라색 주전자를 들고 새끼손가락을 살짝 들어 올린 채 우아한 자세로 차를 붓고 있었다. 서해금의 손가락은 가늘고 길었다. 손목의
상대방에게 손을 보여준 도일준은 다시 장갑을 끼며 태연하게 말했다. “손을 좀 다쳐서요. 놀라실까 봐.”서해금이 곧바로 의심스러운 눈빛을 거두며 말했다. “아뇨, 제가 무례를 범했어요. 너그러이 이해해 주셨으면 해요.”서해금이 안타깝다는 듯 말을 이었다. “직업이 의사시라고 들었는데, 너무 안타깝네요.”도일준이 태연하게 웃었다. “안타까울 것까지야. 비록 더는 수술대에 오를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 덕에 의료 분쟁을 피해 갈 수 있었어요. 다행히 목숨을 건졌으니 그 정도면 전화위복이라고 할 수 있겠죠.”서해금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러네요. 세상의 많은 일들은 진작 운명이 정해져 있는 법이니까요. 순리를 따라야죠.”말을 마친 서해금이 도일준에게 자리를 안내했다. 그녀는 성급히 향수 제조에 관한 업무를 확정 짓는 대신 도일준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서해금이 차를 건네며 말했다. “교포시라고 들었어요. M 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셨다고 하던데 국어가 꽤 유창하시네요. 심지어 국내 문화에 관해서도 많이 알고 계시고요. 정말 놀랍네요.”찻잔을 건네받은 도일준을 차 한 모금을 음미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젊었을 때 아버지를 따라 국내에서 연수를 한 적이 있었어요. 5년 가까이 지내다 M 국으로 돌아가 한 대학교에서 의사로 있었죠. 당시 학교가 한인 타운 근처라 유학생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어요. 게다가 제 아내도 교포예요. 아마 언어 환경 때문에 점점 더 국어에 적응한 것 같아요.”“그렇군요. 귀국하실 때 사모님은 함께 오지 않으신 건가요?”그 말에 도일준의 눈빛이 슬픔으로 물들었다. 그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멀리 떠났어요.”멈칫한 서해금이 다급히 말했다. “마음 아픈 얘기 꺼내서 죄송해요.”도일준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또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는 온몸으로 외로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마 세상을 떠난 아내를 떠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비워진 도일준의 찻잔을 채운 서해금이 또다시 물었다. “도일준 씨
그 순간, 한현진의 눈이 놀라움에 커다래졌다. 그러나 그녀는 곧 재빨리 문을 닫는 핑계로 고개를 돌렸다. 충격은 쉬이 가시질 않았다. ‘도일준 씨가 왜 회사까지 온 거야? 성 비서님이 말한 클라이언트가 바로 도일준 씨라는 거야? 대체 왜 서해금을 찾아온 거야? 무슨 생각인 거지?’서해금이 아무 이유 없이 중요한 고객을 한현진에게 소개해 줄 리가 없었다. 도일준이 한현진을 불러달라고 한 걸까, 아니면 뭔가를 떠보려는 서해금의 수단일까?그 짧은 시간 사이 한현진의 머릿속은 수만 가지 의혹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눈을 꼭 감고 복잡하게 끓어오르는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몸을 돌린 한현진의 얼굴엔 이미 환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녀는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제가 늦었네요.”서해금이 한현진의 표정을 살폈다. 격식 차린 미소를 짓는 한현진은 관찰하는 눈빛으로 도일준을 훑었다. 별다른 반응은 없는 것 같았다. 서해금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우리도 조금 전에 도착했어요.”말하며 서해금이 한현진에게 손짓했다. “한 대표, 여기 와서 앉아요.”한현진이 다가가 서해금 곁에 앉았다. 도일준을 쳐다보던 한현진은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도일준이 회사에 온 목적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말을 걸었다가 만약 아는 사이라는 것을 서해금이 눈치챈다면 도일준의 뒷조사를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그들의 계획을 알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도일준은 한현진과 진희연의 유도로 이미 남편의 죽음이 당시 신생아 사건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그가 만났던 사람은 서해금이 아니라 또 다른 남자였다. 그러니 그 남자만 찾아낸다면 모든 증거들이 사슬처럼 이어질 수 있었다. 그래야만 서해금을 법의 심판대로 올릴 수 있었다. 사건의 키 포인트는 그 남자에게 있었다. 이런 타이밍에 도일준이 서해금의 가시범위 안으로 들어오는 건 절대 좋은 일이 아니었다. 서해금은 포장된 예쁜 인형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의
한성우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형수님도 양심은 없으시네요. 아무리 그대로 강운이가 형수님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잖아요. 이렇게 이용하시면 마음에 안 찔리세요?”한성우의 말에 한현진의 말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좋아하면 강한서를 자극하기 위해 절 간민혜 씨 모습으로 분장시킬 수 있어요? 저와 주 변호사님은 그저 지인 딱 그 정도예요. 말 할 거예요, 말 거예요? 말 안 할 거면 됐어요.”‘강한서에게 덫을 놓은 건 내가 평생 기억하고 있을 거야.’말을 잘못 꺼냈음을 인지한 한성우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얘기하면 되잖아요. 왜 화를 내고 그래요. 하지만 제가 얘기한다고 해서 강운이가 나설 거란 보장은 저도 못해요.”한현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할 거예요.”주강운이라는 사람의 모든 면을 잘 안다고 할 수 없었지만 한현진은 변호사로서의 그의 능력은 의심한 적이 없었다. 정서희의 의뢰를 받고 정설희 사건을 조사하고 있으니 당연히 장준도 눈여겨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제 발로 찾아온 기회는 주강운은 거절할 리가 없었다. 주강운에게 전화해 안부를 묻던 한성우는 돌고 돌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불법 레이싱 교통사고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대. 전부 이제 갓 20살이 된 어린 애들이던데 안타깝게 됐어. 학교나 열심히 다닐 것이지 레이싱은 대체 왜 한 거야. 목숨이 아깝지도 않나 봐.”커피를 한 모금이 마신 주강운이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이젠 사회 뉴스도 봐?”“아니, 그냥 우연하게 본 건데 놀라워서 그러지. 바로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잖아. 부상자 중에 진수 그룹 막내아들도 있었고. 탄식이 절로 나오더라니까.”물을 한 모금 마신 한성우가 툭 던지듯 물었다. “넌 이런 뉴스 안 봐?”주강운이 말했다. “봤는데 자세히는 안 봤어.”“사건 관련 기사는 아무것도 아니야. 숨겨진 뒷이야기가 더 충격적이야. 그러니까...”“잠깐만.”주강운이 한성우의 말을 잘랐다. “나 할 일이 있어서 나중에 끝
[아니, 지금 중요한 건 사고 원인을 밝히는 거 아녜요? 대체 왜 부상자 신상정보나 캐고 있는 거예요? 일부러 여론 몰이 하려는 거 아녜요?][그러니까요. 이렇게 큰 교통사고면 한 사람만의 문제는 아닐 텐데, 이 경기의 주최 측에 문제점을 둬야하는 거잖아요.][속도 제한 구간에서 불법 레이싱을 하다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뭐 더 할 말 있어요? 위에 댓글 혹시 진수 그룹 알바 아니세요?][그래서 진모 씨는 경기에 참가하지 않은 건가요? 피해자라도 된대요? 피해자는 그 인간들 차에 치인 사람이에요. 논리적인 척 하는 거 웃기네요. 쓰레기 같은 인간 때문에 목숨을 잃은 피해자는 나 몰라라 하면서 그것도 인간이라고 신상정보가 털리는 게 안타까워요?][진윤. 남. 서화 대학 전기정보공학과 2학년. 주민등록 번호: XXXX. 전화번호: XXXX.]진윤의 신상정보가 인터넷에 전부 폭로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정보를 공유했다. 심지어 진윤의 수능성적을 폭로하며 그의 성적으로는 서화 대학에 입학할 수 없다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불법 레이싱으로 인한 교통사고로 한 사람을 향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고 여론은 이미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여론 몰이가 필요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그 대상이 진윤이 될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 진윤을 이용해 사건의 요점을 흐리려는 의도이거나 이번 일을 계기로 진수 그룹에 타격을 주려는 것이 분명했다.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한현진이 한성우에게 연락했다. 진윤의 일로 전화했다는 것을 안 한성우가 말했다. “이번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녜요. 일단 불법 레이싱도 문제이긴 하지만 제일 중요하건 레이싱에 참가한 사람 중 마약을 한 인간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이번 사고가 일어난 제일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고요.”“지금 그 인간을 숨기기 위해 인터넷에서는 이 사건의 모든 화살을 진윤 씨에게 돌리고 있어요. 형수님과 한서는 이번 일에 끼어들지 말아요.”한현진이 멈칫하며 물었다. “그
한현진은 어쩔 수 없이 민경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약혼식 준비를 하는 민경하를 위해 강한서는 특별 휴가를 지급했다. 그러니 민경하도 지금은 강한서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아주머니 말로는 아침 여섯 시부터 급하게 나갔다고 해요.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요.”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야겠어요.”“잠깐만요, 사모님.”갑자기 한현진을 부른 민경하가 나지막이 물었다. “오늘 아침 뉴스 보셨어요?”“아직요. 왜요?”민경하가 말했다. “어젯밤 남서신길에서 레이싱 경기가 있었는데 큰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해요. 남서신길 쪽에 저희 자회사에서 시공을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어요.”“오늘 아침 6시쯤에 뉴스가 터진 거니까 대표님께서 급히 나간 게 그 일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남서신길이요?”잠깐 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움찔 몸을 떨었다. ‘진윤 씨가 전에 참가하겠다고 고집 부리던 경기잖아?’한현진이 곧바로 진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뿐만 아니라 홍혜림도 연락을 받지 않았다. 비록 진씨 가문과 연이 깊은 것도 아니었고 진윤에게 다가간 것도 홍혜림에게 물어볼 것이 있기 때문이었지만 혹시라도 사고를 당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이 자식! 분명 강한서와 더는 그런 위험한 경기엔 참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서. 대체 왜 이렇게 말을 듣지 않는 거야.’아무도 연락을 받지 않자 한현진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한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하리에게 물어봐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진윤의 사촌누나이니 어쩌면 남인 그들보다 먼저 소식을 들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열이 말했다. “진윤 씨도 다쳐서 아직 깨어나지 못했대요. 신하리 씨도 아까 공항으로 가서 아마 지금쯤 그쪽으로 출발했을 거예요. 아직 사람을 보지도 못했으니 신하리 씨도 상황은 잘 모르고 있을 거예요.”제일 염려했던 일이 결국은 일어나고 말았다. 진윤도 그 사고 현장에 있었다. 그
염색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잘생긴 포즈로 거울 셀카를 찍은 진윤이 강한서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다시 시작.]강한서는 사진 속 검은 머리에 순해 보이는 젊은이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읽던 책을 내려놓은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왜?”강한서가 진윤의 셀카를 한현진에게 보여주었다. 한현진 역시 사진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금발에 눈썹도 살짝 밀어버리는 스타일을 고집하더라니. 눈썹 피어싱까지 빼니까 그냥 아기였네. 너무 귀엽게 생겼잖아. 훈이보다 어려 보여.”강한서도 한현진을 따라 웃었다. “선배도 그렇잖아. 50살도 넘은 분이 아직도 30대처럼 보이니까. 성우가 처음 선배를 봤을 때 형이라고 불렀다가 예의 없다고 혼났어. 그러다 다른 애들도 형이라고 하니까 말이 없더라고.”그 장면을 상상한 한현진은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역시 동안이 좋아. 50대가 되어서도 얼굴 하나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살 수 있잖아. 난 왜 동안이 아닐까?”그 말에 멈칫한 강한서가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누구 마음을 사려고?”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강 대표님, 몇 십 년 후의 일도 미리 질투하실 거예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는 아냐.”한현진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정말?”강한서가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안 해, 질투.”예상 밖의 대답에 호기심이 불타오른 한현진이 물었다. 몇 십 년 후엔 사랑보다 정으로 사는 거라 신경 쓰지 않는 거야?”강한서가 대답했다. “그건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어.”“뭔데?”강한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대들은 그저 첩에 불과해.”멍해졌던 한현진이 폭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강한서를 품에 안고 뽀뽀 세례를 날렸다. “진지한 얼굴로 실없는 농담을 던질 때 정말 귀여워 죽겠다니까.”강한서가 힐끔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이런 걸 바로 조강지처의 자신감이라고 하는 거야.”한
순간 불쾌한 기분에 빠진 진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아마추어 경기는 사석에서 주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전문적인 레이싱 경기도 아니었다. 오직 속도에서 주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경기였다. 상금이 높은 만큼 위험부담도 컸다. 하지만 진윤이 경기에 참가한 것은 상금 때문이 아니었다. 돈 걱정 없이 산 진윤이 목숨 건 돈에 욕심낼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지 경기의 주최 측에 F1 레전드 인물도 있다는 소식에 우승을 하면 그 사람과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참가한 것이었다. 진윤은 그의 팀원들 역시 레이싱에 대한 열정으로 함께 지금까지 뭉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을 무시하는 친구의 말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진윤처럼 레이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프로 선수가 되길 꿈꾸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이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레이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는 상금이라는 거대한 유혹일 수도 있었다. 팀원 중 위험한 내기 경기에 참석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진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경주마처럼 미친 듯이 산길을 휘저었다. 목숨을 내걸고 재벌들의 도박판에서 기꺼이 주사위가 되었다. 아차 하는 사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경기에서 이기면 그만큼 어마어마한 상금이 주어졌다. 불행히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고 해도 그의 가족들은 놀라운 액수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으니 위험을 감수하고 뛰어드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처음으로 팀원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의 진윤은 충격에 빠졌었다. 하지만 팀원들은 마치 일상적이 대화를 하듯 당연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의 진윤은 그저 그들이 비슷한 일을 너무 많이 들은 탓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들은 그렇게 위험 부담마저도 부러웠었던 같았다. 팀원 중 대부분의 사람에게 레이싱은 그저 짧은 시간 사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도구에 불과했다. 뜬 눈으로 꿈을 꾸고 있는 진윤이야말로 그들에겐 이상한 인간
“아들. 네가 공부가 하고 싶다면 복수 전공이 아니라 10개 전공을 배우겠다고 해도 엄마는 찬성이야. 엄마 지금 너무 기뻐. 만약 농담하는 거라면 지금 당장 거짓말이었다고 얘기해. 안 그럼 엄마는 진심으로 받아들일 거야.”진윤이 웃으며 홍혜림의 팔을 끌어안았다. “엄마. 저도 형처럼 엄마의 자랑이면 안 돼요?”홍혜림이 진윤의 금발을 어루만졌다. “너도 예전엔 엄마의 자랑이었지. 금발로 염색한 후로는 자랑이 아니게 되었지만.”진윤: ...“그럼 다시 염색할게요.”홍혜림이 얼른 헤어숍 VIP카드를 건네며 말했다. “얼른 가. 여긴 새벽 12시가 되어야 영업이 끝나는 곳이야. 지금 가면 아직 시간 있어.”진윤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홍혜림이 얼마나 진윤의 금발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네, 네, 네. 지금 갈게요.”외투를 챙겨주며 문앞까지 배웅 나온 홍혜림이 진윤에게 물었다. “아들. 조금 전에 누구한테 들은 말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잖아. 그 분 너희 교수님이셔?”“우리 교수님은 아녜요. 하지만 좋은 스승님이긴 해요.”‘사기꾼이기도 해. 하지만 꽤 능력 있는 사기꾼.’홍혜림이 호기심에 가득 찬 말투로 물었다. “그 분 한 마디에 바로 생각이 바뀐 거야? 내가 너한테 얼마나 많이 얘기했었는데, 그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진윤이 말했다. “절 데리고 20km를 뛰었어요. 자길 이기면 날 뉴벨리 팀에 입단시켜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나보다 10살이나 많아서 나이 많은 어르신한테 지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졌어요.”진윤이 창피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저보다 빨리 뛴 건 아니었어요. 제가 적을 만만하게 생각한 거죠. 하지만 무서운 사람이에요. 지독하게 강해서 무서운 사람. 그 사람은 못 해낼 일이 없는 것 같아요. 입단은 무슨, 그냥 그 기회를 벌어 저에게 설교를 하려던 것뿐이었어요.”“내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레이싱을 그만두게 하려고. 처음엔 엄마가 보낸 스파이인 줄 알았다니까요. 하지만
진윤에게 묻는 홍혜림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얘기해. 엄마 괜찮아. 파산이라도 하지, 뭐. 돈은 없으면 다시 벌 수 있어. 아빠가 안 된다고 하면 쫓아내면 돼.’처음으로 느끼는 죄책감에 진윤은 고개를 숙였다. 홍혜림이 비록 관리를 잘 하긴 했지만 귀밑머리는 이미 하얀 서리가 내려있었다. 큰형은 어려서부터 얌전하고 말을 잘 듣는 아이라 부모님의 속을 썩인 적이 없었다. 유독 진윤이 고집을 부리며 걸음마를 뗄 때부터 뒤에서 마음을 졸이게 했다. 진윤의 수능성적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 전공은 전부 부모님이 수많은 돈을 들여 기획한 결과였다. 하지만 진윤은 본인이 좋아하지 않는 전공이라는 이유로 자포자기하며 지냈다. 부모님이 통제욕이 강하다는 것은 그저 진윤이 그들에게 씌워놓은 프레임에 불과했다. 정말 부모님의 통제 속에서 살아가는 친구들은 매일 모든 스케줄, 심지어 먹는 음식까지 전부 부모님에게 보고해야 했다. 그런 사람에 비하면 그의 부모님은 그저 애교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레이싱을 좋아하는 진윤이 못마땅했지만 그럼에도 그저 설득하는 것이 전부였다. 홍혜림은 단 한 번도 진윤의 레이싱 장비를 부순 적이 없었다. 매번 더는 새 장비를 사주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다짐도 진윤의 애교 몇 번에 곧 무너지고 말았다. ‘언제까지 실망만 안겨드릴 순 없잖아. 나도 엄마의 자랑이 되어야지 않겠어?’“엄마. 저 복수 전공하고 싶어요. 전 레이싱이 좋아요. 도무지 포기가 안 돼요. 저 실력 그 정도 아닌 거 알아요. 하지만 자동차 관련한 전공을 배워보고 싶어요. 지금 전공은 절대, 두 번 다시는 F학점 받는 일 없을 거라 약속 드려요. 복수 전공하게 해주면 안 돼요?”홍혜림: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어?”진윤이 멍해졌다. “네?”홍혜림이 말했다. “네가 나에게 하려는 말이 그거야?”진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그게 아니면요?”홍혜림: “사람을 치거나, 교통사고를 낸 게 아니고?”
눈에 띄게 변한 진윤의 모습을 홍혜림은 믿을 수가 없었다.집 바로 앞이 학교라 진윤은 기숙사 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집에 자주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집에서 레이싱 게임을 할 때마다 부모님의 잔소리가 끊이질 않아 진윤은 큰형 아파트에 몰래 숨어있는 것을 좋아했다. 진윤의 큰형은 일 때문에 그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9살이나 더 많은 그의 형은 가끔 부모님보다 더 진윤을 아끼기도 했다. 심지어 가끔은 진윤의 편을 들어 그의 비밀을 지켜주기도 했다. 큰형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러니 제발 눈치껏 본가로 들어오라고 홍혜림은 몇 번이고 진윤에게 얘기했었다. 사실 예비 며느리는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진윤을 본가로 불러들이는 이유는 진윤이 곁에 없으니 도무지 관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윤은 그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매번 홍혜림이 같은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그는 두 귀를 닫고 못 듣는 척 연기했다. 하지만 이번엔 홍혜림이 먼저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진윤 스스로 본가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진윤에 홍혜림은 혹시 형제가 싸우기라도 한 걸까 전화를 했지만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에 홍혜림은 생각했다. ‘이 자식 또 무슨 사고라도 치고 돌아와서 얌전한 척 연기하는 거 아냐?’‘교통사고라도 내서 배상해 줘야 하는 건가? 아니면 레이싱 카가 망가져서 새 차를 살 돈이 필요한 건가?’‘설마 사람을 친 건 아니겠지?’진윤이 집에서 열심히 공부할수록 홍혜림은 점점 더 사람을 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매일 밤 아무 일도 없는 척 진윤의 방 앞을 서성이며 생각했다. ‘먼저 잘못을 인정하면 요즘 얌전하게 지냈던 걸 정상참작해서 욕을 좀 덜해야겠어.’하지만 3일이 지나도록 진윤은 홍혜림을 부르지 않았다. ‘이상해.’‘너무 이상하잖아!’‘설마 사람을 친 것보다 더 큰 사고는 아니겠지?’‘대체 얼마를 배상해야 하는 거야?’1 주일이 지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홍혜림은 진윤의
진윤: ...강한서가 진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싫다면서 현 상황을 바꿔보려고 하지도 않은 거야?”진윤: ...‘왜 선생님께 혼나는 기분이 드는 거지? 진지하게 핵심만 꼬집고 있잖아.’입을 달싹이던 진윤은 변명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진윤은 그동안 어떻게 반항해야할지,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강한서가 말했다. “네 인생은 네 거야. 네가 열심히 살든, 대충 살든 네 하루하루는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어. 네 태도에 따라 싫었던 그 경험들이 사라지지 않아. 단지 네가 싫다는 이유로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않고 대충 흘려보냈을 뿐 그것들은 계속 존재해.”“대충 공부해서 대충 졸업하면 또 대충 취직이나 하겠지. 아니면 아예 너희 회사로 입사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다음에? 그렇게 평생을 대충 흘려보낼 거야? 그게 네가 원하는 인생이야?”멍하니 강한서를 쳐다보던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아뇨.”부모님이 선택해준 전공이 싫어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얼른 졸업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강한서의 말처럼 졸업 후엔? 전공에 맞는 직업을 찾아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갈까, 아니면 부모님 회사에 입사해 되는대로 살아갈까. 어떤 선택이든 그건 진윤이 원하는 인생은 아니었다. 4년이란 시간을 허무히 흘러 보내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전 이미 3학년이에요. 전과를 하기엔 늦었잖아요. 이젠 뭘 하려고 너무 늦은 것 같아요.”속상한 듯 대답하는 진윤의 말에 한현진이 말했다. “진윤 씨는 완전 MZ세대잖아요. 이제 갓 이십 대 초반인데 뭘 해도 늦지 않은 나이예요. 너무 빨리 본인의 가능성을 단정 짓지 말아요. 60세에 대학생이 됐다는 기사 못 봤어요?”“진윤 씨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도 늦었다고 생각 안 하는데, 진윤 씨가 왜 겁을 내요?”“전...”입술을 달싹이던 진윤이 한참이 지나서야 한숨을 내뱉었다. “두 사람 문제아 갱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