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한열은 복잡한 마음에 머리를 쥐어뜯고 싶을 지경이었다. ‘저 미친 여자가 왜 날 좋아해?’문자에 답장하는 신하리를 쳐다보던 한열은 고개를 들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재빨리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창에 비춘 심각할 정도로 잘생긴 얼굴에 멍해진 한열은 순간 어쩌면 신하리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씨 가문 유전자가 대단하긴 하니까. 그런 생각이 든 한열이 저도 모르게 몸을 바로하고 턱을 살짝 들었다. 신하리 쪽에서 보면 그의 옆라인은 완벽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화보를 찍고 수많은 무대에 오르면 그는 자신이 어떤 각도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 가장 멋지게 보이는지 잘 알고 있었다. 문자를 마친 신하리는 휴대폰을 한쪽에 놓고 고개를 돌려 한열을 쳐다보았다.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간 그를 본 신하리가 멈칫 하더니 물었다. “허리에 줄자라도 넣은 거야? 안 굽혀져?”윤명훈이 풉,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한열은 윤명훈보다 10살이나 어렸다. 그러니 윤명훈에게 한열은 그저 유치한 아이 같았다. 도도한 척 하고 허세를 부리는 건 그 또래 남자아이들에겐 너무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특히 한열처럼 잘생기기까지 한 사람이라면 나르시시즘이 있는 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윤명훈 역시 신하리처럼 한열에게 불평하고 싶을 때가 있긴 했었다. 하지만 누군가 이렇게 한열 앞에서 대놓고 면박을 줄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신하리 씨, 그야말로 용사시네요.’한열이 움찔하며 분노가 가득한 눈빛으로 신하리를 노려보았다. “연예계에 이렇게 오래 몸담고 있으면서 신하리 씨를 때린 사람이 없었어요?”신하리가 전혀 타격 없는 미소를 지었다. “지금 너 대신 맞았잖아.”그 말 한 마디는 또다시 한열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그는 입을 꾹 닫고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한열을 신하리를 데리고 자신의 담당 주치의에게 찾아갔다. 주치의의 이름은 서동훈이었다. 그는 신하리를 데리고 온 한열을 의외라는
한열은 신하리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열애를 인정했을 당시, 신하리는 할 얘기가 있어 한열을 찾아갔고 우연히 그의 가족들과 마주쳤다. 한현진과 송민준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은 한열과 신하리의 연애가 가짜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니 신하리를 만난 그들은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기어코 함께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비록 신하리는 한열 앞에선 막무가내였지만 어른들 앞에서는 누구보다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친근한 호칭으로 어른들 마음에 꽃을 피웠다. 심지어 줄곧 연예인을 싫어하던 그의 아버지조차도 눈빛으로 얘기했다. ‘너 이 자식, 어디서 이렇게 예쁜 여자 친구를 만난 거야?’그날 신하리의 모습에 심지어 한열 스스로도 그동안 자신이 너무 복수심 어린 눈빛으로 신하리를 바라보고 있어 너무 극단적으로 사람을 판단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식사 자리가 끝난 후 차에 올라탄 신하리가 그에게 물었다. “마마보이인 줄은 몰랐네. 생선도 아주머니께서 일일이 가시를 발라줘야 하다니.”한열이 평생 제일 혐오하는 단어가 바로 마마보이였다. 그 일은 중학교 1학년이던 어느 날 아침, 그의 어머니가 학교에 우유를 가져다주면서 시작되었다.그날 아침 한열은 낮잠을 잔 탓에 아침도 먹지 못한 채 다급하게 등교해야 했다. 그의 어머니는 배고플 아들이 걱정되어 일부러 학교로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하연희는 160cm로 그리 큰 키는 아니었다. 남편인 한준웅이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어쩐지 아이의 키는 엄마의 유전자에 달린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런 이유로 하연희는 늘 한열이 키가 크지 않을까 걱정이었고 한열을 위해 준비한 식단 중 우유는 언제나 필수였다. 하지만 한열은 우유를 좋아하지 않았고 하연희는 한열이 우유를 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매번 그가 다 마실 때까지 옆에서 지켜보았다. 아침을 가져다 준 날도 마찬가지였다. 우유를 깨끗하게 비운 한열을 본 하연희는 습관처럼 아들을 품에 안았고 그 모습을 마침 입이 가벼운 친구가 보게 된 것이다.
한열은 신하리가 그 의사를 회사에서 보낸 사람이라 오해하고 있음에도 굳이 해명하지 않았다.알려줄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아니, 어쩌면 마음 한구석에서는 하리가 그 의사가 어머니가 보낸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상처받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 앞에서 빛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과도 같았다. 어딘지 모르게 비도덕적이고,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이야기처럼 여겨졌다.상처를 치료하던 중, 한현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그녀는 한열의 상황을 걱정하며 계속 라이브 방송을 지켜보다가 하리가 다친 걸 보곤 놀라 몇 번이나 문자를 보냈지만, 답이 없자 직접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큰 걱정 안 하셔도 돼요.”한열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같이 응급처치 중이에요.”“넌 다친 데 없지? 진짜 괜찮은 거야?”“네,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한현진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안심하지 못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 “외숙모께서 나한테 전화하셨어. 너 걱정하시느라 많이 물어보시지도 못하고, 나더러 가서 너 좀 보라고 하시더라. 지금 어디야? 강한서랑 같이 갈게.”“아니에요, 누나. 정말 괜찮아요.” 한열은 급히 말을 막았다. 누나는 지금 만삭인데, 여기저기 뛰어다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 책임은 자신이 전부 감당해야 할 것이 뻔했다. 게다가 그녀의 남편과 사촌 형이 그를 가만두지 않을 게 뻔했다.“원래 걱정이 많으신 분이잖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따로 전화할게요.”하지만 한현진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했다. “너희 집 앞에 기자들이 잔뜩 몰려 있다더라. 오늘 밤 머물 곳은 있니? 없다면 내가 사람을 보낼게. 며칠 우리 집에서 지내는 게 어때?”그 순간, 한열은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누나, 한주시에 호텔이 얼마나 많은데요. 제가 잘 데가 없을까 봐요? 걱정하지 말고 편히 쉬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현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 때문에 너까지 고생하
한열은 한동안 말없이 침묵했다.“생각나는 사람 없어?” 한현진이 물었다.“그런 게 아니고요…” 한열이 마른기침을 하며 말했다. “너무 많아서요.”한현진은 무어라 말을 잇지 못했다.얼마 전, 한열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업계에서 꽤 영향력을 가진 진행자와 언쟁을 벌였다. 상대가 먼저 무례한 발언을 했고, 한열은 지지 않고 받아쳤다. 대중들은 통쾌하다며 칭찬했지만, 그는 이제 막 신인으로 데뷔한 상황이었고, 상대는 연예계에서 발이 넓은 베테랑이었다. 그 일로 인해 한열은 몇몇 일자리를 잃었고, 그 후로도 적잖은 견제를 받으며 고생해야 했다.워낙 성격이 곧고 정의감이 강한 사람인지라, 누군가의 비열한 행태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지난 몇 해 동안 그는 적을 꽤 많이 만들었다. 이번 사건도 그 적들 중 누군가가 자신을 짓밟으려 벌인 짓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스쳤다.원래 연예계는 열 놈이 죽 한 사발을 먹는 격으로 한정된 자원을 놓고 다투는 전쟁터나 마찬가지였다. 연예인들이 90% 이상의 자원을 독식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찌꺼기라도 차지하려 발버둥 친다. 만약 한열을 무너뜨려 그의 자리를 빼앗는다면, 수십 명의 배우들이 그 혜택을 나눠 가질 수 있을 터였다. 한열이 이런저런 예를 들어보자, 한현진이 그의 말을 끊었다. “그 정도 작은 갈등으로 누가 이렇게까지 하겠어? 혹시 네가 완전히 망하거나, 업계를 떠나기를 바랄 정도로 큰 원한을 가진 사람은 없어?”한열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없어요.”그가 다른 사람들과 얽힌 문제 대부분은 그의 다혈질 성격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깊은 원한을 가진 사람은 없을 터였다.혹시 내가 너무 예민하게 생각한 걸까?한현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알았어. 그러면 며칠 동안은 집 밖에 나가지 마. 네 매니저가 지금 변호사랑 같이 있으니까 곧 해결될 거야. 넌 그저 안전한 곳에서 너 자신을 잘 지키면 돼. 외삼촌, 외숙모도 걱정하시지 않게 말이야.”한열은 낮은 목소리로 알겠
하리는 기분이 언짢아진 듯 말했다. “애송이가 뭘 안다고 그래? 내가 별로면, 누가 예쁘다는 거야?”한열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저희 사촌 누나요.”하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래… 그건 사실이었다. 한현진은 정말 눈부신 미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동안 숱한 미인들을 봐왔던 하리조차 그녀의 얼굴은 단연코 세 손가락 안에 든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현진은 카메라 속에서도 아름다웠지만, 현실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빛났다. 종종 미인들은 카메라 앞에서는 돋보이지만, 실제로는 마른 종잇장 같은 느낌을 줄 때가 많았다.게다가 한현진은 얼굴뿐만 아니라 몸매와 분위기까지 부드럽고도 시원시원한 조화를 이루며 보는 이에게 편안함을 주는 사람이었다. 결국, 하리는 속으로 패배를 인정했다. 하지만 한열이 “내 말이 맞지? 어디 한번 반박해 보시지.”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 묘하게 이가 갈렸다. “네 누나가 아무리 예쁘다 해도 네 여자친구는 나잖아. 다른 사람이 물어보면 당연히 내가 제일 예쁘다고 해야지.”한열은 그녀를 힐끔 쳐다보고는 툭 내뱉었다. “그냥 연애를 할 뿐이지 저도 눈이 있어요.”“그렇게 말하면 지나가는 개도 네가 모쏠이라고 생각하겠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사랑하면 마맛자국도 보조개로 보인다는 말 몰라?”한열은 잠시 멈칫했다. 뭐, 일리가 있긴 했다. 그는 하리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녀가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건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별로예요.”하리의 표정이 단단히 굳었다. 그녀는 순간 발을 들어 그의 발등을 밟으려 했다. 하지만 지난번 교훈을 기억한 한열은 재빠르게 피했다. 발은 피했지만, 그의 셔츠 깃은 하리의 손에 잡혀버리고 말았다.하리는 생각보다 힘이 셌다. 셔츠 깃이 당겨지자 한열은 숨이 약간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손으로 그녀를 떼어내려던 순간, 하리가 손등으로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그녀의 동작은 느릿했고, 손길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그녀에게서 은은한 향기가 풍겨왔다.
한열은 문득 지난 기자회견에서 소란을 피운 여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 여자는 신하리가 자기 오빠를 유혹했다고 말했다.그 ‘오빠’라는 사람이 설마 이 사람을 말하는 걸까?신하리는 그의 생각을 꿰뚫어 본 듯, 잔잔히 웃으며 말했다. “난 그 사람 안 좋아해. 앞으로도 그럴 일 없을 거야. 내가 훨씬 아깝거든.”그 말에 한열의 눈꺼풀이 흠칫 떨렸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참, 뻔뻔하네요.”보통은 자신이 상대에게 과분하다고 생각해 움츠러드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당당히, 상대가 자기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자뻑이 심한 매니저 형이라 할지라도 이 여자 앞에서는 한참이나 모라잤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신하리의 집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녀의 집 주변에는 이미 수많은 기자들이 몰려들어 있었다.매니저 명훈은 차를 멈추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핸들을 돌렸다.한열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대체 어떻게 집 주소가 노출된 거예요?”“나도 모르겠어.” 신하리도 당황한 듯했다. 예전에 한열이랑 공개 연애를 발표했을 때도 그녀의 집 주소를 아무도 알아내지 못했는데 이번엔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그녀도 의문이었다.“럼 오늘 어디서 머물 거예요?” 한열이 물었다.신하리는 태연히 대답했다. “나 네 여자친구잖아? 너네 집에서 머무르지 뭐.”한열은 단호히 선을 그었다. “꿈 깨요!”신하리는 “쯧.”하며 혀를 찼다. “그럼, 일단 너네 집에 잠깐만 있다 갈게. 지금은 사방에 카메라가 있어서 아무 데도 못 가겠어. 날이 어두워지면 그때 나갈게.”한열은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차라리 호텔로 데려다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신하리는 그의 속내를 눈치채고 미리 경고했다. “날 여기 버리고 가면 바로 SNS에 글 올릴 거야. 네가 여자 갖고 놀다가 버렸다고.”그 말에 한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신하리는 정말 그럴 만한 사람이었다. 결국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기로 했다.그들은
한열은 외쳤다. “도둑놈이네요!”신하리도 목소리를 높였다. “도둑놈!”두 사람은 드물게도 같은 의견에 도달했다.올해 서른네 살인 명훈이 스물한 살의 여자친구를 사귀고 있다는 사실은, 두 사람 모두에게 충격과 분노를 동시에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나이 차이만 놓고 보더라도, 그저 지나가는 웃음거리로 치부할 수는 없었다.명훈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변명했다. “그때 게임을 할 땐 나한테 스물일곱이라고 했어요! 사진도 안 보여줬고요. 솔직히 누가 자기 나이를 실제보다 더 많게 말하겠어요? 그땐 정말 철석같이 믿었단 말이에요!”알고 보니, 정말 자기 나이를 속이는 사람이 있었다.한열은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 “그럼 나이를 알고 나서는 왜 거절 안 했어요?”명훈은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들며 한열을 노려보았다. “거절했어! 연락처도 바로 삭제했다고!”그 말을 들은 신하리가 흥미로운 듯 물었다. “근데 어떻게 다시 연락이 닿은 거예요?”명훈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 후로 게임 계정을 몇 달 동안 안 들어갔어요. 그런데 어느 날 계정을 다시 켰더니, 걔가 바로 메시지를 보내더라고요. 울면서 왜 차단했냐고 묻길래, 나이 차이가 너무 크니까 그냥 오빠-동생으로 지내자고 했어요.”“걔도 그러자고 했죠. 그런데 며칠 뒤,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하더라고요. 가해자는 도망가고, 낯선 도시에 혼자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해서… 제가 갔어요.”신하리는 명훈의 어색한 표정을 흥미롭게 살피며 천천히 말했다. “결국 교통사고는 거짓말이었고, 매니저님을 만나고 싶었던 게 진짜였던 거네요. 역시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결국 매니저님을 꼬시는 데 성공했네요.”명훈은 말을 잇지 못했다.신하리의 말이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었다.명훈은 침을 삼키며 겨우 말을 꺼냈다. “처음부터 그렇게 어린 줄 알았다면, 애초에 게임 친구로도 추가하지 않았을 거야!”한열은 고개를 저으며 비웃었다. “안 믿어요.”명훈은 포기하지 않고
한열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십 분 남짓 흘렀을까, 차가 마침내 멈췄다.도착한 곳은 외곽의 한적한 별장이었다. 이곳은 한때 개발사의 파산으로 미완성 상태로 방치되었던 지역이었다. 몇 해 전 새로운 개발사가 인수하여 마침내 공사가 마무리되었고, 비로소 주인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하지만 이곳은 도심과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바로 근처에 화장터가 있어 집값이 크게 떨어져 있었다. 매물은 넘쳐났고 가격은 터무니없이 저렴했다. 별장을 구입하는 사람들은 대개 금전적으로 여유가 많은 편이라 풍수지리가 나쁜 이곳을 선호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이곳에 정착한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별장은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하늘은 잔뜩 흐렸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어둑해진 저녁이었다. 차창 밖으로 드리운 어둠 속에서, 흐릿한 가로등 불빛 아래 버드나무 가지가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한열의 시야를 파고들었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한열은 이유 모를 섬뜩함에 사로잡혔다.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기분에 창밖에서 시선을 돌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차가 멈춘 곳은 까맣게 불 꺼진 별장 앞이었다. 신하리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도착했으니 내리렴.”한열은 가볍게 대답한 뒤, 차 문을 열고 내렸다.한열은 문득, 여벌 옷을 챙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는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어 가져다 달라고 할 참이었다. 그런데 돌아보니 매니저는 이미 차를 몰고 황급히 달아나고 있었다. 작별 인사조차 없었다.한열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굳어버렸다.한열은 신하리를 따라 발길을 옮겼다. 속으로는 온갖 욕으로 퍼붓고 있었다. 윤명훈, 이 개자식! 말도 없이 도망가다니! 나이도 많은 게 저렇게 비겁해서야 원! 한열은 명훈의 여자친구 앞에서 그의 겁쟁이 짓을 낱낱이 폭로하겠다는 결심을 했다.신하리는 별장 문 앞에 서서 비밀번호를 눌렀다. 도어락이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문을 열기 전, 신하리는 무언가 떠오른 듯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네 지문도 등록해 둬.
한성우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형수님도 양심은 없으시네요. 아무리 그대로 강운이가 형수님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잖아요. 이렇게 이용하시면 마음에 안 찔리세요?”한성우의 말에 한현진의 말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좋아하면 강한서를 자극하기 위해 절 간민혜 씨 모습으로 분장시킬 수 있어요? 저와 주 변호사님은 그저 지인 딱 그 정도예요. 말 할 거예요, 말 거예요? 말 안 할 거면 됐어요.”‘강한서에게 덫을 놓은 건 내가 평생 기억하고 있을 거야.’말을 잘못 꺼냈음을 인지한 한성우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얘기하면 되잖아요. 왜 화를 내고 그래요. 하지만 제가 얘기한다고 해서 강운이가 나설 거란 보장은 저도 못해요.”한현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할 거예요.”주강운이라는 사람의 모든 면을 잘 안다고 할 수 없었지만 한현진은 변호사로서의 그의 능력은 의심한 적이 없었다. 정서희의 의뢰를 받고 정설희 사건을 조사하고 있으니 당연히 장준도 눈여겨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제 발로 찾아온 기회는 주강운은 거절할 리가 없었다. 주강운에게 전화해 안부를 묻던 한성우는 돌고 돌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불법 레이싱 교통사고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대. 전부 이제 갓 20살이 된 어린 애들이던데 안타깝게 됐어. 학교나 열심히 다닐 것이지 레이싱은 대체 왜 한 거야. 목숨이 아깝지도 않나 봐.”커피를 한 모금이 마신 주강운이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이젠 사회 뉴스도 봐?”“아니, 그냥 우연하게 본 건데 놀라워서 그러지. 바로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잖아. 부상자 중에 진수 그룹 막내아들도 있었고. 탄식이 절로 나오더라니까.”물을 한 모금 마신 한성우가 툭 던지듯 물었다. “넌 이런 뉴스 안 봐?”주강운이 말했다. “봤는데 자세히는 안 봤어.”“사건 관련 기사는 아무것도 아니야. 숨겨진 뒷이야기가 더 충격적이야. 그러니까...”“잠깐만.”주강운이 한성우의 말을 잘랐다. “나 할 일이 있어서 나중에 끝
[아니, 지금 중요한 건 사고 원인을 밝히는 거 아녜요? 대체 왜 부상자 신상정보나 캐고 있는 거예요? 일부러 여론 몰이 하려는 거 아녜요?][그러니까요. 이렇게 큰 교통사고면 한 사람만의 문제는 아닐 텐데, 이 경기의 주최 측에 문제점을 둬야하는 거잖아요.][속도 제한 구간에서 불법 레이싱을 하다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뭐 더 할 말 있어요? 위에 댓글 혹시 진수 그룹 알바 아니세요?][그래서 진모 씨는 경기에 참가하지 않은 건가요? 피해자라도 된대요? 피해자는 그 인간들 차에 치인 사람이에요. 논리적인 척 하는 거 웃기네요. 쓰레기 같은 인간 때문에 목숨을 잃은 피해자는 나 몰라라 하면서 그것도 인간이라고 신상정보가 털리는 게 안타까워요?][진윤. 남. 서화 대학 전기정보공학과 2학년. 주민등록 번호: XXXX. 전화번호: XXXX.]진윤의 신상정보가 인터넷에 전부 폭로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정보를 공유했다. 심지어 진윤의 수능성적을 폭로하며 그의 성적으로는 서화 대학에 입학할 수 없다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불법 레이싱으로 인한 교통사고로 한 사람을 향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고 여론은 이미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여론 몰이가 필요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그 대상이 진윤이 될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 진윤을 이용해 사건의 요점을 흐리려는 의도이거나 이번 일을 계기로 진수 그룹에 타격을 주려는 것이 분명했다.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한현진이 한성우에게 연락했다. 진윤의 일로 전화했다는 것을 안 한성우가 말했다. “이번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녜요. 일단 불법 레이싱도 문제이긴 하지만 제일 중요하건 레이싱에 참가한 사람 중 마약을 한 인간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이번 사고가 일어난 제일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고요.”“지금 그 인간을 숨기기 위해 인터넷에서는 이 사건의 모든 화살을 진윤 씨에게 돌리고 있어요. 형수님과 한서는 이번 일에 끼어들지 말아요.”한현진이 멈칫하며 물었다. “그
한현진은 어쩔 수 없이 민경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약혼식 준비를 하는 민경하를 위해 강한서는 특별 휴가를 지급했다. 그러니 민경하도 지금은 강한서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아주머니 말로는 아침 여섯 시부터 급하게 나갔다고 해요.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요.”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야겠어요.”“잠깐만요, 사모님.”갑자기 한현진을 부른 민경하가 나지막이 물었다. “오늘 아침 뉴스 보셨어요?”“아직요. 왜요?”민경하가 말했다. “어젯밤 남서신길에서 레이싱 경기가 있었는데 큰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해요. 남서신길 쪽에 저희 자회사에서 시공을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어요.”“오늘 아침 6시쯤에 뉴스가 터진 거니까 대표님께서 급히 나간 게 그 일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남서신길이요?”잠깐 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움찔 몸을 떨었다. ‘진윤 씨가 전에 참가하겠다고 고집 부리던 경기잖아?’한현진이 곧바로 진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뿐만 아니라 홍혜림도 연락을 받지 않았다. 비록 진씨 가문과 연이 깊은 것도 아니었고 진윤에게 다가간 것도 홍혜림에게 물어볼 것이 있기 때문이었지만 혹시라도 사고를 당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이 자식! 분명 강한서와 더는 그런 위험한 경기엔 참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서. 대체 왜 이렇게 말을 듣지 않는 거야.’아무도 연락을 받지 않자 한현진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한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하리에게 물어봐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진윤의 사촌누나이니 어쩌면 남인 그들보다 먼저 소식을 들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열이 말했다. “진윤 씨도 다쳐서 아직 깨어나지 못했대요. 신하리 씨도 아까 공항으로 가서 아마 지금쯤 그쪽으로 출발했을 거예요. 아직 사람을 보지도 못했으니 신하리 씨도 상황은 잘 모르고 있을 거예요.”제일 염려했던 일이 결국은 일어나고 말았다. 진윤도 그 사고 현장에 있었다. 그
염색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잘생긴 포즈로 거울 셀카를 찍은 진윤이 강한서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다시 시작.]강한서는 사진 속 검은 머리에 순해 보이는 젊은이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읽던 책을 내려놓은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왜?”강한서가 진윤의 셀카를 한현진에게 보여주었다. 한현진 역시 사진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금발에 눈썹도 살짝 밀어버리는 스타일을 고집하더라니. 눈썹 피어싱까지 빼니까 그냥 아기였네. 너무 귀엽게 생겼잖아. 훈이보다 어려 보여.”강한서도 한현진을 따라 웃었다. “선배도 그렇잖아. 50살도 넘은 분이 아직도 30대처럼 보이니까. 성우가 처음 선배를 봤을 때 형이라고 불렀다가 예의 없다고 혼났어. 그러다 다른 애들도 형이라고 하니까 말이 없더라고.”그 장면을 상상한 한현진은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역시 동안이 좋아. 50대가 되어서도 얼굴 하나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살 수 있잖아. 난 왜 동안이 아닐까?”그 말에 멈칫한 강한서가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누구 마음을 사려고?”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강 대표님, 몇 십 년 후의 일도 미리 질투하실 거예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는 아냐.”한현진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정말?”강한서가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안 해, 질투.”예상 밖의 대답에 호기심이 불타오른 한현진이 물었다. 몇 십 년 후엔 사랑보다 정으로 사는 거라 신경 쓰지 않는 거야?”강한서가 대답했다. “그건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어.”“뭔데?”강한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대들은 그저 첩에 불과해.”멍해졌던 한현진이 폭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강한서를 품에 안고 뽀뽀 세례를 날렸다. “진지한 얼굴로 실없는 농담을 던질 때 정말 귀여워 죽겠다니까.”강한서가 힐끔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이런 걸 바로 조강지처의 자신감이라고 하는 거야.”한
순간 불쾌한 기분에 빠진 진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아마추어 경기는 사석에서 주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전문적인 레이싱 경기도 아니었다. 오직 속도에서 주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경기였다. 상금이 높은 만큼 위험부담도 컸다. 하지만 진윤이 경기에 참가한 것은 상금 때문이 아니었다. 돈 걱정 없이 산 진윤이 목숨 건 돈에 욕심낼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지 경기의 주최 측에 F1 레전드 인물도 있다는 소식에 우승을 하면 그 사람과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참가한 것이었다. 진윤은 그의 팀원들 역시 레이싱에 대한 열정으로 함께 지금까지 뭉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을 무시하는 친구의 말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진윤처럼 레이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프로 선수가 되길 꿈꾸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이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레이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는 상금이라는 거대한 유혹일 수도 있었다. 팀원 중 위험한 내기 경기에 참석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진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경주마처럼 미친 듯이 산길을 휘저었다. 목숨을 내걸고 재벌들의 도박판에서 기꺼이 주사위가 되었다. 아차 하는 사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경기에서 이기면 그만큼 어마어마한 상금이 주어졌다. 불행히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고 해도 그의 가족들은 놀라운 액수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으니 위험을 감수하고 뛰어드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처음으로 팀원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의 진윤은 충격에 빠졌었다. 하지만 팀원들은 마치 일상적이 대화를 하듯 당연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의 진윤은 그저 그들이 비슷한 일을 너무 많이 들은 탓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들은 그렇게 위험 부담마저도 부러웠었던 같았다. 팀원 중 대부분의 사람에게 레이싱은 그저 짧은 시간 사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도구에 불과했다. 뜬 눈으로 꿈을 꾸고 있는 진윤이야말로 그들에겐 이상한 인간
“아들. 네가 공부가 하고 싶다면 복수 전공이 아니라 10개 전공을 배우겠다고 해도 엄마는 찬성이야. 엄마 지금 너무 기뻐. 만약 농담하는 거라면 지금 당장 거짓말이었다고 얘기해. 안 그럼 엄마는 진심으로 받아들일 거야.”진윤이 웃으며 홍혜림의 팔을 끌어안았다. “엄마. 저도 형처럼 엄마의 자랑이면 안 돼요?”홍혜림이 진윤의 금발을 어루만졌다. “너도 예전엔 엄마의 자랑이었지. 금발로 염색한 후로는 자랑이 아니게 되었지만.”진윤: ...“그럼 다시 염색할게요.”홍혜림이 얼른 헤어숍 VIP카드를 건네며 말했다. “얼른 가. 여긴 새벽 12시가 되어야 영업이 끝나는 곳이야. 지금 가면 아직 시간 있어.”진윤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홍혜림이 얼마나 진윤의 금발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네, 네, 네. 지금 갈게요.”외투를 챙겨주며 문앞까지 배웅 나온 홍혜림이 진윤에게 물었다. “아들. 조금 전에 누구한테 들은 말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잖아. 그 분 너희 교수님이셔?”“우리 교수님은 아녜요. 하지만 좋은 스승님이긴 해요.”‘사기꾼이기도 해. 하지만 꽤 능력 있는 사기꾼.’홍혜림이 호기심에 가득 찬 말투로 물었다. “그 분 한 마디에 바로 생각이 바뀐 거야? 내가 너한테 얼마나 많이 얘기했었는데, 그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진윤이 말했다. “절 데리고 20km를 뛰었어요. 자길 이기면 날 뉴벨리 팀에 입단시켜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나보다 10살이나 많아서 나이 많은 어르신한테 지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졌어요.”진윤이 창피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저보다 빨리 뛴 건 아니었어요. 제가 적을 만만하게 생각한 거죠. 하지만 무서운 사람이에요. 지독하게 강해서 무서운 사람. 그 사람은 못 해낼 일이 없는 것 같아요. 입단은 무슨, 그냥 그 기회를 벌어 저에게 설교를 하려던 것뿐이었어요.”“내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레이싱을 그만두게 하려고. 처음엔 엄마가 보낸 스파이인 줄 알았다니까요. 하지만
진윤에게 묻는 홍혜림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얘기해. 엄마 괜찮아. 파산이라도 하지, 뭐. 돈은 없으면 다시 벌 수 있어. 아빠가 안 된다고 하면 쫓아내면 돼.’처음으로 느끼는 죄책감에 진윤은 고개를 숙였다. 홍혜림이 비록 관리를 잘 하긴 했지만 귀밑머리는 이미 하얀 서리가 내려있었다. 큰형은 어려서부터 얌전하고 말을 잘 듣는 아이라 부모님의 속을 썩인 적이 없었다. 유독 진윤이 고집을 부리며 걸음마를 뗄 때부터 뒤에서 마음을 졸이게 했다. 진윤의 수능성적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 전공은 전부 부모님이 수많은 돈을 들여 기획한 결과였다. 하지만 진윤은 본인이 좋아하지 않는 전공이라는 이유로 자포자기하며 지냈다. 부모님이 통제욕이 강하다는 것은 그저 진윤이 그들에게 씌워놓은 프레임에 불과했다. 정말 부모님의 통제 속에서 살아가는 친구들은 매일 모든 스케줄, 심지어 먹는 음식까지 전부 부모님에게 보고해야 했다. 그런 사람에 비하면 그의 부모님은 그저 애교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레이싱을 좋아하는 진윤이 못마땅했지만 그럼에도 그저 설득하는 것이 전부였다. 홍혜림은 단 한 번도 진윤의 레이싱 장비를 부순 적이 없었다. 매번 더는 새 장비를 사주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다짐도 진윤의 애교 몇 번에 곧 무너지고 말았다. ‘언제까지 실망만 안겨드릴 순 없잖아. 나도 엄마의 자랑이 되어야지 않겠어?’“엄마. 저 복수 전공하고 싶어요. 전 레이싱이 좋아요. 도무지 포기가 안 돼요. 저 실력 그 정도 아닌 거 알아요. 하지만 자동차 관련한 전공을 배워보고 싶어요. 지금 전공은 절대, 두 번 다시는 F학점 받는 일 없을 거라 약속 드려요. 복수 전공하게 해주면 안 돼요?”홍혜림: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어?”진윤이 멍해졌다. “네?”홍혜림이 말했다. “네가 나에게 하려는 말이 그거야?”진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그게 아니면요?”홍혜림: “사람을 치거나, 교통사고를 낸 게 아니고?”
눈에 띄게 변한 진윤의 모습을 홍혜림은 믿을 수가 없었다.집 바로 앞이 학교라 진윤은 기숙사 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집에 자주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집에서 레이싱 게임을 할 때마다 부모님의 잔소리가 끊이질 않아 진윤은 큰형 아파트에 몰래 숨어있는 것을 좋아했다. 진윤의 큰형은 일 때문에 그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9살이나 더 많은 그의 형은 가끔 부모님보다 더 진윤을 아끼기도 했다. 심지어 가끔은 진윤의 편을 들어 그의 비밀을 지켜주기도 했다. 큰형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러니 제발 눈치껏 본가로 들어오라고 홍혜림은 몇 번이고 진윤에게 얘기했었다. 사실 예비 며느리는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진윤을 본가로 불러들이는 이유는 진윤이 곁에 없으니 도무지 관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윤은 그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매번 홍혜림이 같은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그는 두 귀를 닫고 못 듣는 척 연기했다. 하지만 이번엔 홍혜림이 먼저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진윤 스스로 본가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진윤에 홍혜림은 혹시 형제가 싸우기라도 한 걸까 전화를 했지만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에 홍혜림은 생각했다. ‘이 자식 또 무슨 사고라도 치고 돌아와서 얌전한 척 연기하는 거 아냐?’‘교통사고라도 내서 배상해 줘야 하는 건가? 아니면 레이싱 카가 망가져서 새 차를 살 돈이 필요한 건가?’‘설마 사람을 친 건 아니겠지?’진윤이 집에서 열심히 공부할수록 홍혜림은 점점 더 사람을 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매일 밤 아무 일도 없는 척 진윤의 방 앞을 서성이며 생각했다. ‘먼저 잘못을 인정하면 요즘 얌전하게 지냈던 걸 정상참작해서 욕을 좀 덜해야겠어.’하지만 3일이 지나도록 진윤은 홍혜림을 부르지 않았다. ‘이상해.’‘너무 이상하잖아!’‘설마 사람을 친 것보다 더 큰 사고는 아니겠지?’‘대체 얼마를 배상해야 하는 거야?’1 주일이 지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홍혜림은 진윤의
진윤: ...강한서가 진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싫다면서 현 상황을 바꿔보려고 하지도 않은 거야?”진윤: ...‘왜 선생님께 혼나는 기분이 드는 거지? 진지하게 핵심만 꼬집고 있잖아.’입을 달싹이던 진윤은 변명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진윤은 그동안 어떻게 반항해야할지,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강한서가 말했다. “네 인생은 네 거야. 네가 열심히 살든, 대충 살든 네 하루하루는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어. 네 태도에 따라 싫었던 그 경험들이 사라지지 않아. 단지 네가 싫다는 이유로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않고 대충 흘려보냈을 뿐 그것들은 계속 존재해.”“대충 공부해서 대충 졸업하면 또 대충 취직이나 하겠지. 아니면 아예 너희 회사로 입사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다음에? 그렇게 평생을 대충 흘려보낼 거야? 그게 네가 원하는 인생이야?”멍하니 강한서를 쳐다보던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아뇨.”부모님이 선택해준 전공이 싫어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얼른 졸업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강한서의 말처럼 졸업 후엔? 전공에 맞는 직업을 찾아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갈까, 아니면 부모님 회사에 입사해 되는대로 살아갈까. 어떤 선택이든 그건 진윤이 원하는 인생은 아니었다. 4년이란 시간을 허무히 흘러 보내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전 이미 3학년이에요. 전과를 하기엔 늦었잖아요. 이젠 뭘 하려고 너무 늦은 것 같아요.”속상한 듯 대답하는 진윤의 말에 한현진이 말했다. “진윤 씨는 완전 MZ세대잖아요. 이제 갓 이십 대 초반인데 뭘 해도 늦지 않은 나이예요. 너무 빨리 본인의 가능성을 단정 짓지 말아요. 60세에 대학생이 됐다는 기사 못 봤어요?”“진윤 씨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도 늦었다고 생각 안 하는데, 진윤 씨가 왜 겁을 내요?”“전...”입술을 달싹이던 진윤이 한참이 지나서야 한숨을 내뱉었다. “두 사람 문제아 갱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