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라도 경찰서에 가 상황을 설명하면 될 거예요. 차용증이 없어도 계좌 이체한 내역이 있잖아요. 가족도, 그렇게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으니 증여로 보긴 어려울 거예요. 언니가 고소해요. 그 여자는 한성 그룹의 주식을 갖고 있으니 주식을 처분한다면 40억 정도는 무조건 돌려받을 수 있을 거예요.”송가람이 한현진의 손을 쳐내며 차갑게 말했다. “이게 네가 날 보러 온 진짜 목적인 거지? 내가 아줌마를 고소해 한서 오빠가 날 미워하게 되면 네가 오빠와 재혼이라도 하려고? 이제야 네가 왜 나와 아줌마를 마주치게 했는지 이해가 되네. 이걸 노리고 있었던 거잖아.”송가람의 반응을 진작 예상하고 있던 한현진은 송가람이 자신의 손을 내치는 순간 한라봉 조각을 쥔 손에 힘을 실었다. 그덕에 한라봉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한현진은 웃는 얼굴로 송가람을 쳐다보며 쯧, 혀를 차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들켰네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언니가 고소 안 한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다쳤으니 아주머니는 가만히 계시려고 하진 않으시겠죠.”송가람의 낯빛이 순간 어두워졌다. 한현진이 씩 웃으며 한라봉 조각 하나를 입에 넣었다. 입안에서 톡 터지는 과즙의 달달함이 마음을 녹였다. “아주머니께서 어젯밤 그 여자와 크게 싸우셨어요. 보아하니 치를 떠시는 것 같더라고요. 아마 그 쪽과 사돈을 맺으려고 하시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살짝 언질만 준 한현진이 손에 들고 있던 한라봉을 다 먹고는 몸을 일으켰다. “치료 잘 받아요. 쾌차하길 바라요.”말하며 걸음을 옮기던 한현진이 또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송가람은 경계의 눈빛으로 한현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야.’송가람의 걱정과는 달리 한현진은 그저 책상 곁으로 걸어가 자신이 가져온 과일 바구니에서 한라봉 두개를 꺼냈다. 그녀는 손에 들린 한라봉 두 개를 흔들며 말했다. “꽤 맛있더라고요. 두 개만 가져갈게요.”말을 마친 한현진이 한라봉을 들고 병실을 나섰다. 화가 치민 송가람은 책상 위에
잠시 멍해졌던 주혁이 곧 인사를 건넸다. “대표님, 병원엔 어쩐 일이세요?”한현진과 송민준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전 병문안 왔어요.”말하며 주혁 손에 들린 과일 바구니와 꽃을 본 한현진이 물었다. “기사님도 병문안 오셨어요?”주혁이 대답했다. “네. 친구가 수술을 해서 보러 왔어요.”송민준은 눈앞에 서 있는 수수한 옷차림의 중년 남성을 보며 한현지에게 물었다.“현진아, 이분은 누구야?”“오빠, 이분이 바로 제가 저번에 말했던 주혁 기사님이세요.”한현진은 곧바로 주혁에게 시선을 돌려 송민준을 소개했다. “기사님, 여긴 제 오빠인 송민준 씨예요.”주혁이 조심스럽게 송민준을 향해 목례했다. “송 대표님, 처음 뵙겠습니다.”주혁은 등을 살짝 구부렸다. 그 탓에 수척한 몸이 더욱 왜소해 보였다. 송민준의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향하며 주혁을 훑었다. 그리곤 그는 주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뵐게요, 주 기사님.”허리를 숙여 송민준과 악수를 나눈 주혁이 곧 손을 놓았다. 송민준이 미소 지으며 한현진에게 장난스레 말했다. “내가 무섭게 생겼어? 기사님이 날 보지도 않으시네.”움찔한 주혁이 다급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전... 그게 아니라...”“기사님이 낯을 많이 가리셔서 그래요. 기사님 그만 놀려요.”송민준이 한현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농담 좀 한 거야. 자기 사람이라고 감싸기는.”말을 마친 송민준이 주혁에게 말했다. “주 기사님, 안전 운전 부탁드릴게요. 저에겐 하나뿐인 동생이에요. 현진이가 안전하기만 하다면 보너스는 섭섭지 않게 드릴게요.”한현진이 송민준을 툭 쳤다. 갑질하는 부잣집 도련님이나 할 것 같은 그런 말은 넣어두라는 의미였다. 한현진이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 “기사님, 엘리베이터 안 타세요?”시선을 돌린 주혁이 대답했다. “어느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는지 몰라서요. 조금 헷갈리네요.”한주병원의 종합 병동엔 엘리베이터만 6개였다. 한현진이 물었다. “어느 과로 가세요? 제가 봐드릴
한현진은 말했다. “오빠가 강한서 눈치만 안 주면 돼요. 오빠는 한서의 처남인 동시에 친구이기도 하잖아요. 어젯밤 오빠가 날린 주먹 때문에 한서는 속상해서 밤새 잠도 못 잤어요. 오늘 아침에도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온 채로 출근했다고요.”송병천 쪽은 한현진이 따로 생각해둔 방법이 있었다. 송민준이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내가 걔한테 그 정도라고?”“그러니까 말이예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사람이 자신을 믿지 못하니 안 속상하겠어요?”송민준이 잠시 침묵했다. 한현진이 이젠 그가 속아 넘어갔을 것이라 생각할 때쯤, 송민준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계속 속상하라고 해. 날 속이고 싶으면 몇 년은 더 갈고 닦아야 할 거야.”“...”‘어쩐지 강한서가 계속 오빠를 여우같은 놈이라고 하더라니. 눈치가 너무 빠르잖아.’서해금이 통화를 한 짧은 사이에 송가람은 신미정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며 마음을 바꿨다. 그런 송가람의 말에 서해금이 얼마나 화가 났을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두 모녀는 병실에서 다투기 시작했다. 서해금의 얼굴이 분노로 파랗게 질려있었다. “넌 네가 신미정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면 강한서가 너와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꿈도 야무지지. 네가 쓰러지고 지금까지 그 자식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어. 걔 마음을 아직도 몰라?”송가람은 멍청할 정도로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한서 오빠가 가운데서 얼마나 난처하겠어요. 게다가 이건 모두 한현진이 꾸민 계략이에요. 제가 아줌마를 고소하게 하려는 수작이라고요. 한현진 뜻대로 되게 놔두진 않을 거예요.”“그게 한현진 계략이라고 해도 그렇지. 신미정은 한현진에게 돈을 빌리러 간건데 왜 네가 나서서 돈을 줘? 이 일에서 넌 빠져. 내가 알아서 처리할 거야.”송가람이 막 입을 열려는 데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서해금이 분노를 가라앉히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병실문을 연 순간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송가람이 고개를 내밀자 그녀의
강한서의 말에 한현진은 멍해졌다. 화가 났지만 불쌍한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순간 참지 못하고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 단순히 삐졌을 뿐이었던 강한서는 한현진의 웃음소리에 욱, 화가 치밀었다. 그건 분명 조롱이 섞인 비웃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안 먹겠다는 이유가 웃겨? 웃긴 뭘 웃어.’한현진은 그저 삐진 강한서의 모습이 귀여웠을 뿐이었다. 예전의 강한서는 한현진의 어떤 행동 때문에 기분이 나빠도 절대 그 일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는 늘 뭐든 마음속으로 꾹 참으며 한현진이 추측하게 했다. 하지만 그녀는 강한서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없으니 당연히 그의 마음을 맞출 수가 없었다. 한현진이 강한서의 그런 문제점을 대놓고 얘기한 후, 그는 바뀌기 시작했다. 기분이 나쁠 땐 전처럼 입을 꾹 닫고 혼자 삭히지 않았다. 그러니 화가 죽을 것 같은데 한현진은 그가 화가 난 줄도 모르는 일도 더는 없었다. 지금의 강한서는 화가 나면 직접적으로 마음을 표현했다. 그리곤 “얼른 와서 달래줘”라는 표정으로 한현진이 말을 걸어주길 기다렸다. 강한서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웃긴 뭘 웃어. 좋은 건 네 오빠에게 주고나서야 날 생각했잖아. 내 순위가 아버님보다, 아이보다 심지어 돈보다 뒤여도 인정할 수 있어. 하지만 대체 내 순위가 왜 송민준에게도 밀려야 하는 거야? 걘 심지어 날 때리기까지 했는데 넌 더 좋은 걸 주면서 그 녀석 마음을 달래준 거야?”한현진은 그제야 강한서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질투심만 큰게 아니라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욕심도 강했다. 일일이 따져가며 한현진 마음속 순위를 하나하나 매겼다. 3위 안에 들지 않는 것까진 그렇다 치더라도 4위마저도 자신이 아니라는 건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쉴새없이 웃기만 하던 한현진이 곧 뭔가를 떠올리고는 강한서에게 물었다. “넌 내가 오빠에게 큰 걸 준 건 어떻게 안 거야?”그 일을 떠올리니 강한서의 마음은 더 아파왔다. 10여 분 전, 송민준은 차단을 풀고 강한서에게 사진
강한서는 달콤한 한현진의 말에 사정없이 무너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켰다. “나 달래려고 일부러 이렇게 말하는 거지?”한현진의 눈빛에 속상함이 스쳤다. 그녀는 손을 내리며 나긋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날 못 믿겠으면 과일 파시는 아주머니께 데려다줄게. 아주머니께 여쭤봐. 어떤 한라봉이 더 단지. 그러면 알 수 있잖아. 내가 널 속인 건지 아닌지.”강한서는 얼른 한현진의 손을 잡아 한라봉 조각을 입에 넣으며 웅얼거렸다. “안 믿는다고 안 했어.”한현진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그녀의 말처럼 한라봉은 달콤했다. 마치 꿀을 먹은 것처럼, 달달한 향이 마음까지 스몄다. 한현진이 활짝 웃으며 한라봉을 마저 까 강한서에게 건넸다. 화가 쉽게 풀리는 건 강한서 최대의 우점이었다. 큰 게 맛있는지, 아니면 작은게 맛있는지는 사실 한현진도 잘 몰랐다. 과일 파는 사람이야 당연히 모두 맛있다고 할 테였다. 하지만 그녀의 말재간만 있다면 오늘 누가 어느 한라봉을 가지든 한현진은 어떻게든 모두가 원하는 방향으로 상황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다만 강한서는 이것을 사탕발린 말이라고 표현했고 한현진은 그 평가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이런 능력을 “대화의 기술”이라고 불렀다. 한라봉을 다 먹은 강한서가 휴대폰을 꺼내 인터넷에 검색했다는 건 한현진이 모르는 또 다른 에피소드였다. 인터넷을 뒤지던 강한서는 드디어 마케팅 피드 하나를 발견했다. 그 피드엔 꽤 “전문”적인 용어로 작은 한라봉이 큰 한라봉보다 맛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했다. 강한서는 그 피드를 캡쳐한 후 송민준에게 메시지를 전송했다. 지고는 못 사는 한주 남자들이었다. ——한현진의 부탁을 받고 쓰기 시작한 차미주의 대본은 이미 7, 80% 정도 완성 되었다. 차미주는 한현진에게 첫 피드백을 받고 이런저런 디테일을 추가한 후 대본의 완성도를 높여야 했다. 수년간의 보조 작가로써의 경력은 괜히 쌓은 것이 아니었다. 요즘 따라 인터넷엔 재벌가의 원한을 주제로
강한서가 생선 가시를 바르며 말했다. “우리가 아무 것도 안 한 건 아니잖아. 현진이가 돈 드렸잖아.”한성우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그 돈은 나랑 형수님이 만든 판에서 네 삼촌이 전부 토해냈잖아. 그걸 줬다고 할 수 있는 거야?’한현진은 애초부터 통쾌하게 돈을 줄 생각이 없었다. 한성우는 강한서가 그것도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현장에서 두 사람을 검거했으니 한성우는 강한서가 한현진과 싸울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양시은 딸의 약혼식에서 있었던 일이 강한서에게는 큰 상처였던 모양이었다. 그는 정말 두 번 다시 신씨 가문의 일에 개입할 생각이 없었다. “넌 그저 지켜본다고 해도 민서가 그러겠어? 만약 민서가 나섰다고 형수님이 너에게 화풀이하면 어떡해?”차미주와 수다를 떨고 있던 한현진이 갑자기 틈을 내 한성우의 말에 대답했다. “이간질 하려고 하지 마요.”‘스토리 의논하던 거 아니었어? 이렇게까지 목소리를 낮췄는데도 들린다고?’한성우가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강한서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들었지? 이간질하지 마.”차미주도 한성우를 노려보았다. “수다쟁이 같은 인간아. 가는 곳마다 말이 많지, 하여튼.”“...”‘몸까지 줬는데, 지금은 내가 남이 된 거야?’‘좋네, 좋아, 아주.’점식 식사는 2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그 사이 차미주는 드디어 전체 줄거리를 확정했다. 대본은 완성도는 물론 구성도 논리적으로 잘 짜여 있어 강한서조차도 잘 썼다고 칭찬할 정도였다. 친구와 애인에게 칭찬을 받은 차미주는 자신감에 가득 찼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최우수 작가상을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싶었다.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신난 차미주를 보는 한성우의 마음도 사르르 녹아내렸다. 사실 차미주는 대본을 쓰는데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업계가 그랬다. 어린 작가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그저 돈 몇 푼 벌려고 실력은 없지만 노이즈 마케팅에 강한 쓰레기들의
웹 드라마 대본의 판권은 사실 돈이 되지 않았다. 400만 원에서 600만 원 사이가 일반적인 저작권료였다. 흥행한 작품이 있는 작가라면 2000만 원 이상의 저작권료를 요구할 수 있었다. 혹은 마음씨 좋은 제작사를 만난다면 드라마로 벌어들인 수익의 일부분을 나눌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400~600만 원을 받고 판권을 넘겨야 했다. 한성우가 웃으며 말했다. “너에게 이 정도 돈을 주고 사온 판권으로 내가 100배 이상의 수익을 낼 수 있다면 믿을 거야?”“그래도 시세에 따라야지.”한성우의 말을 믿긴 했지만 공과 사는 구분해야 했다. “현진이 부부가 우리를 이렇게 믿고 한 번에 이렇게 많은 돈을 투자했는데 우리 욕심만 채우면 안 되잖아. 내가 2000만 원만 받을게. 너무 많이 받으며 내가 현진이 앞에서 당당하게 허리를 펼 수 없어. 얼른 계약서 수정해.”한성우는 정직한 차미주의 모습이 귀여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가 장난스레 말했다. “난 매번 이런 식으로 강한서에게서 돈을 뜯었어.”차미주가 한성우를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언제든 강한서와 너와 절교하려고 한대도 넌 억울할 거 없어. 난 절대 돈 때문에 현진이와 갈등을 빚지 않을 거야. 이럴 거면 현진이에게 돈 다시 받아서 다른 제작사 찾으라고 할 거야.”한성우가 얼른 차미주를 잡았다. “그러지 마. 내가 장난한 거야. 수정할게. 수정하면 되잖아.”계약서를 수정한 후 사인에 날인까지 마친 차미주의 계좌엔 1600만 원이 넘는 계약금이 먼저 입금되었다. 세금을 뗀 후의 저작권료였다. 곧이어 차미주는 또 268억을 송금 받았다. 돈을 보낸 사람은 한성우였다. 잠시 멍해졌던 차미주가 곧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너 설마 곧 파산해? 그래서 재산을 빼돌리는 거야?”한성우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파산은 무슨 파산. 이건 내가 너한테 주는 결혼 예물이라고!”그 말에 차미주가 멍해졌다. 발꿈치를 들고 한성우의 얼굴을 손으로 감싼 차미주가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더니 한참만
차미주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한성우를 때리려고 하자 한성우는 그런 차미주의 손을 잡아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사실 그날, 네가 거짓말을 하고 도망친 후 조준 씨가 네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네가 날 속이고 있다는 걸 알았어. 난 널 전혀 몰랐거든. 하지만 그때의 난 뜨고 싶어 안달이 난 한 연예인이 날 꼬시는 신박한 수단이라고 생각했어. 아무래도 난 이렇게 잘생기고 돈도 많은 사람이잖아. 날 탐내는 사람이 너무 많았거든.”차미주는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자뻑왕.”한성우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수작 부리는 여자를 많이 봤었지만 만나자마자 품에 안겨 날 오빠라고 부르는 건 또 처음이었거든. 그래서 난 외모가 별로라 특이한 수단으로 내 주의를 끄는 거라 생각했었어.”차미주는 “외모가 별로”라는 말에 조금 기분이 언짢아졌다. 하지만 한성우에게 자신의 첫인상이 어땠었는지 너무 궁금하기도 했기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우고 그의 말에 집중했다. “넌 확실히 내 시선을 사로잡았어. 네가 날 꼬시려고 대체 어떤 수작을 부릴지 지켜봐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인파 속에서 널 한참을 찾았고 널 발견했을 때 넌 푸아그라를 가지러 손에 접시를 든 채 줄을 서고 있었어.”셰프가 직접 푸아그라를 구워줬다. 그 탓에 줄은 아주 늦은 속도로 줄어들었다. 그날 파티에 참석한 사람 또한 많았고 메인 셰프 역시 이 바닥에서 이름 꽤나 날린 유명 인사였다. 차미주는 그 셰프의 솜씨를 맛보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려왔다. 그리고 그 한 입을 맛보기 위해 기다린 사람은 그녀 한 명뿐이 아니었다. 차미주 앞엔 이미 7, 8명이 줄을 서고 있었다.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곧 차미주의 순서가 다가왔다. 셰프는 3인분 밖에 남지 않았다며 이젠 더는 줄을 서지 말라고 말했다. 그리고 차미주는 마침 그 세 번째 사람이었다. 차미주 뒤에 줄을 섰던 사람이 하나둘 흩어지고 차미주도 제일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는 맛있게 익어가는 푸아그라를 보며 셰프에게 연하게 구
주현의 생각은 성월과 달랐다. 송가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의 사랑을 바랐지만 주현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를 애초부터 매우 명확했다. 주현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노렸다. 그건 20년, 30년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주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현은 성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성월은 반평생을 야심으로 가득 찬 서해금 곁을 지키며 진작 서해금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성월에게 신분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거였고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기회를 잡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해금 역시 자신의 두 손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송병천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서민 출신에 남편을 잃고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 무슨 수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웃기지 말라 그래.’하지만 그 말을 주현은 감히 성월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주현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이모, 도와줘요. 신씨 가문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저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송가람 씨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일로 부탁해요. 활동이든 파티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자리로요. 그래야 신씨 가문에 호감을 살 수 있죠.”성월의 학창 시절, 그녀의 집안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주현의 부모님이 빌려주신 돈으로 급한 불을 끈 덕에 성월은 늘 주현의 집안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주현의 애교에 견디지 못한 성월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송가람 씨 비서로 전근 보내볼게. 너, 네 남자친구한테 기본적인 건 잘 가르쳐. 묻는 말에 아무 것도 대답 못하면 안 돼.”주현이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월에게 팔짱을 끼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 역시 이모가 날 제일 예뻐할 줄 알았어. 주말에 집에 와서 식사해요. 안 가신지 꽤 됐잖아요...”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한현진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어제 바로 세정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냉정하다니, 한현진 답지 않아.”성월이 말했다. “사실 전 그렇게 냉담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일을 깨뜨린 것도 주혁 씨였고 몰래 부업을 하다 한 대표님 얼굴에 먹칠한 것도 주혁 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인사팀에 잠깐 다녀와요. 일단 주혁을 가람이 운전기사로 전근시켜요.”성월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가람 아가씨에게 운전기사를 붙일 생각이시면 제가 다른 기사님을 찾을게요. 회사에는 지금 마침 새로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들이 많아요. 어리고 건강하고 운전 경력도 전부 5년이 넘었어요. 주혁 씨는 한현진 곁에서 한동안 일을 하신 분인데, 가람 아가씨 운전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전근시키라고 하면 시켜요. 제가 이렇게 하는 덴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성 비서는 나서지 말아요.”성월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성월이 사무실을 나서자 주현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모, 어떻게 됐어요? 대표님께 말씀 드렸어요?”성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표님께서 이미 송가람 씨에게 다른 운전기사를 붙이셨어. 이미 결정된 일이야.”순간 주현은 조바심이 났다. “왜 갑자기 결정 난 거예요? 회사에서 요즘 새로 신입사원 모집했잖아요. 보안팀은 싫어할 거란 말이에요.”성월이 말했다. “대표님께서 주혁을 송가람 씨 운전기사로 전근시켰어. 지금 인사팀에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 해.”그 말을 들은 주현이 투덜거렸다. “한현진 밑에 있던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본인 상사를 배신까지 했고요.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을 딸 운전기사로 쓰시겠다는 거예요?”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월이 주현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성월은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주혁의 팔을 내치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너 미쳤어? 여긴 회사야. 여기서 집인 줄 알고 그렇게 큰 소리로 대표님 뒷담화를 하는 거야?
직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회사의 조치가 꽤 인간적이라며 칭찬했고 또 어떤 직원은 아무리 화장실 청소라도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세제를 쓰진 말았어야 했다며 안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회사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청소 직원이 화상을 입은 것으로 그쳤지만 만약 누군가 범행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부식성이 강한 세정제는 범죄자에게 칼을 준비해준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꼴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던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실언했다는 것을 인지한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전 회사에서 조치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요. 단지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저도 모르게 제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본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위험 요소요?”그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못... 못 들으셨어요?”“죄송해요.”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친구 문자에 답장하느라 못 들었어요.”직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얼른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며칠 동안 청소하시는 직원분들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 일 때문에 다들 마음이 뒤숭숭해요.”한현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직원이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대표님. 다치신 분 중에 대표님이 아는 사람도 있어요. 전에 대표님 운전 기사셨던 주혁 기사님이요. 그 분이 제일 심하게 다치셨어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사님이요? 확실해요? 어제 볼 일 보러 갔다가 기사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언제 다치신 거예요?”한현진의 말에 직원이 멍해졌다.“그럴 리가요. 며칠 전에 이미 다치셨어요. 대표님과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내셨어요.”한현진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날 제가 급한 일 때문에 길게 얘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손에 붕대 같은 건 본 기억도 없고 기사님께서도 저한테 그런 얘기는 없으셨는데... 심하게 다치셨어
막 전화를 끊으려던 그 순간, 박안수가 다시 불렀다.“아, 그리고...”“뭔데?”“오늘 경찰서에서 한현진과 마주쳤어.”서해금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한현진이 경찰서엔 왜?”“나도 자세한 건 안 물어 봐서 잘 몰라.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 혼자가 아니라 6, 7살 쯤 되는 어린 아이와 함께 왔었어.”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서해금이 또 물었다. “한현진이랑 얘기했어? 무슨 얘기했는데?”“괜히 의심할까봐 내가 경찰서에 간 이유를 사실대로 얘기했어. 한현진도 더 묻지 않았고.”우물 쭈물거리며 숨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당하게 대답하는 편이 오히려 의심을 덜 사는 방법이었다. “그게 다야?”“응.”생각의 잠겼던 해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한테 손에 상처는 뭐라고 얘기했는데?”“회사에서 청소하다가 부식성 제품에 다친 거라고 했어.”서해금이 원망하듯 말했다. “왜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어. 회사에서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을 쓸 리가 없잖아.”“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할 순 없잖아. 집에는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는데. 조사 협조 요청을 나한테만 하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그 두 사람은 거짓말을 아예 못 해. 만약 경찰이 내 손에 관해 묻기라도 한다면 바로 들켜 버리는 거잖아.”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자는 미쳤고 애는 귀가 먹었는데, 그런 병X도 제대로 통제 못 해?”순간 얼굴을 찡그린 박안수가 말했다. “말 그렇게 하지 마. 두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야.”“뭐가 불쌍해. 도박쟁이 가정폭력범을 성실하고 부지런한데다 박학다식한 남편으로 바꿔줬는데. 우리한테 고마워해도 모자라.”서해금의 말에 박안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너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 서해금이 당부하며 말했다. “이만 끊어. 가람이한테 당신을 기사로 쓰라고 얘기하러 갈 거야. 소식 기다려.”박안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전화를 끊은 서해금은 아무리 생
“아니.”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찰에겐 뭐라고 했어?”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대로 얘기했어.”“박안수!”서해금은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끓어올랐다. “지금이 농담할 때야?”“농담 아냐.”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그럼 내가 뭐라고 말할까? 네가 준 신분이니 난 당연히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할 수밖에. 그럼 내가 난 박안수라고 얘기했어야 해? 죽은지 27년도 더 된 사람이야. 박안수가 어떻게 돌아와?”그의 목소리엔 고통과 원망으로 가득 했다. 그 순간, 서해금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날 탓하는 거야?”말이 없던 상대방은 잠시 후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적 없어.”“박안수, 지금 날 탓하는 거잖아.”서해금이 공격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빚을 진 사람도 당신이고,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당신이었어. 당신이 가람이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거고, 당신이 가람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길 바랐고, 그래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사정한게 당신이었어.”“내가 당신한테 돈 안 줬어? 지금껏 내가 당신한테 준 돈이 얼만데. 당신은 얼마든지 해외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어. 굳이 한주에 남겠다고 한 건 당신이야. 내가 당신에게 그럴 듯한 신분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당신이 무슨 명분으로 가람이 앞에 나타날 건데? 당신이 이렇게 당당하게 가람이를 만날 수나 있었을 것 같아?”목이 메인 남자는 한참만에야 눈을 감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탓한 거 아냐. 난 그저 이렇게 조마조마 마음 졸이는 생활에 지쳤을 뿐이야. 난 집에서도 감히 옷을 못 벗어. 잠도 깊게 잘 수가 없어. 길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은 날 보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아는 척, 반가운 척 인사를 해야 해. 심지어 아무리 아파도 검사도 못 해. X발, 병원도 가질 못한다고!”남자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 볼 일 봐요. 회사로 복귀하면 다시 얘기하죠.”한현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차는 이미 회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은 곧바로 로비로 향했다. 회사의 프런트가 한현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짧게 인사를 받은 엘리베이터에 탄 한현진은 사무실이 아닌 2층을 눌렀다. 회사 건물은 2층부터 화장실이 있었기에 1층엔 화장실이 없었다. 한현진은 아예 2층부터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공교롭게도 2층에 도착한 한현진은 마친 청소 중인 직원과 마주쳤다. 근무 시간이 화장실엔 사람이 없었다. 직원은 바닥을 닦고 있었고 세면대와 멀지 않은 곳에 청소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엔 청소 용품으로 가득 했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청소 용품을 확인했다. 청소차엔 수많은 플라스틱 통과 병이 있었고 그 안엔 전부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굳이 뚜껑을 열지 않아도 소독제의 냄새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 제품들은 그 어떤 별다른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식성이 그렇게 강한 용액을 플라스틱 병에 담진 않았을 거 아냐.’“누구세요?”청소차를 관찰하는 한현진의 등 뒤로 사투리 억양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현진이 몸을 돌리니 청소 중이던 직원이 보였다. 그 직원은 아래층 청소를 도맡아 하는 분이라 한현진을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한현진이 화장실을 사용하려는 것이라 생각한 직원이 말했다. “아직 소독제를 쓰지 않았으니까 볼 일 보려면 얼른 봐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청소차의 물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주머니, 여쭤볼게 있어요. 화장실 청소를 하실 때 어느 브랜드의 농도가 얼마인 세정제를 사용하세요?”직원이 말했다. “도매 시장에서 파는 회색통이요. 커다란 거. 엄청 싸요.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사려고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이 항상 깨끗해서요. 저도 집에서 써보려고요.”청소 직원이 얼른 한현진을 말렸다. “절대 사지 마요. 변기의 때는 우리가 항상 솔로 조금씩 닦
또 다른 경찰이 물었다. “그래서 지장은 찍을 수 있어요?”“손이 그 지경인데 지장을 어떻게 찍어? 손을 보니까 지장은 무리인 것 같아서 포기했지. 어차피 지문도 완전히 회복하긴 힘들 것 같았어. 그래서 애들한테 홍채와 성문을 따라고 했어.”말을 마친 키 큰 형사가 한현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중에 회사에 가셔서 얘기 좀 하세요.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은 얼른 교체하라고요. 만약 누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고 그 제품으로 가해라도 하면 회사에서도 책임지셔야 해요.”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그 말에 얼른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경찰서에서 나온 한현진은 내내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은서가 본 것은 주혁의 태반이나 점이 아니라 청소 용액에 부식되어 생긴 상처였다. 어차피 납치 사건의 범인은 이미 잡혀 경찰서에 있는데,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해서 상처를 치료도 하지 않고 경찰서로 달려온 것일까?한현진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회사에선 그런 고농도의 부식성 제품을 구매했을 리가 없었다. 형사의 말처럼 그런 제품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한현진은 이시연의 연락처를 찾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음이 거의 끝나가도록 이시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곧이어 강한서에게 연락했다. 몇 초 후 통화가 연결되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강한서가 아닌 민경하였다. 강한서는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어 전화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민경하가 그의 휴대폰을 갖고 있었다. “사모님, 저예요. 대표님께서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시라 전화를 받기 힘든 상황이에요. 급한 일이시면 저에게 얘기하셔도 돼요. 급한 일이 아니면 회의가 끝나면 바로 전화 드리라고 대표님께 말씀 드릴게요.”“급한 건 아녜요. 제가 지금 급히 회사에 가봐야 하는데 아직 은서랑 같이 있어서요. 제가 조금 이따가 회사로 가는 길에 은서를 먼저 한
주혁은 한현진보다 조금 더 먼저 경찰서에 도착한 것 같았다. 한현진이 도착했을 땐 주혁은 입구에서 통화 중이었다. 안색이 어두웠지만 그는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대화하고 있었다. 그를 먼저 발견한 한현진이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주혁이 곧 경계하듯 고개를 돌렸다. 한현진을 본 주혁이 멈칫하더니 곧 전화를 끊고 다가왔다. “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한현진이 말했다. “일이 좀 있어서요. 기사님도 일 보러 오셨어요?”짧게 대꾸한 주혁이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8년 전 제 아들을 납치한 마지막 용의자가 잡혔다고 해서요. 조사에 협조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왔어요.”한현진이 놀라운 듯 물었다. “아드님이 납치되었었어요?”주혁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8, 9년 전 일이죠. 납치된 동안 납치범에게 맞아 치료 시간을 놓쳐 청력도 잃게 된 거예요. 그 사건을 맡은 형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사건이 종결되면 배상금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요.”얘기하는 동안 주혁은 아래쪽에서 자신의 손을 지긋이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는 입술을 짓이기며 조용히 손바닥을 다리에 대고 말을 이었다. “곧 아이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주혁의 이야기가 한현진의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그녀는 예의상 더는 그 일에 관해 묻지 않았다. 한현진은 대화주제를 돌리며 주혁에게 물었다. “제가 전에 추천해준 의사 분께 가 보셨어요?”주혁이 멈칫하며 대답했다. “아직이요.”한현진에게는 꽤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주혁이 최대한 빨리 아이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가 인공 달팽이관을 제작할 것이라 여겼다. 아무래도 주혁은 규정을 어기고 부업을 할 만큼 누구보다 간절하게 수술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현진이 그에게 일반 병원보다 더 싼 가격에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의사를 추천해주었음에도 지금까지 검사조차 받지 않았다고 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즘 아내가 몸이 안 좋아서요. 전근된 곳이 전처럼
하온이는 적합한 골수를 기다리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에게는 골수를 의식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처음으로 하은이에게 기회가 찾아 왔을 때는 골수 의식의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하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의 집안은 이미 빚더미에 앉은 상황이라 아무리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도 수술비를 모을 수 없었다. 그러니 하온의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수술을 포기한 채 아득바득 돈을 모으며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하지만 곧 있을 줄 알았던 두 번째 기회는 그리 빨리 오지 않았다. 너무 오랜 기다림을 견뎌냈지만 하온의 몸은 이미 수술을 진행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하온은 하루하루 날이 다르게 시들어 가는 꽃 같았다. 은서는 낮엔 하온이와 놀다가도 저녁엔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렸다. 하온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은서는 강한서 품에 안겨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은서가 말했다. “삼촌, 저도 죽어요?”“삼촌, 우린 왜 이런 병에 걸린 거예요?”“삼촌 부자잖아요. 하온이 오빠가 수술할 수 있게 돈 빌려주시면 안 돼요? 제가 커서 돈 벌면서 갚을게요. 하온이 오빠 죽는거 싫어요.”강한서는 은서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은서는 아직 너무 어려서, 인생은 가끔 이렇게 운명의 장난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목숨으로 돈을 맞바꾸기는 쉬운 일이었지만 돈으로 목숨을 살 수는 없었다. 강한서는 은서가 아직까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의 은서는 고작 5살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한현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세상에는 가여운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니 혼자의 힘으로는 고작 얼마의 힘이나 보탤 수 있을까. 그렇다고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 기대하는 아이의 기대를 깨트릴 수도 없었다. 한현진은 정중하게 물었다. “정말 이거 전부 기부할 거야? 기부하면 은서에겐 아무 것도 없는 거야.”고개를 끄덕이던 은서가 곧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