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진은 송민준과 함께 송가람이 입원한 병실로 향했다. 그녀는 슈퍼에서 19800원 짜리 과일 바구니까지 샀다. 병실을 문을 열고 송가람을 본 한현진을 깜짝 놀랐다. 송가람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얼굴의 양 옆과 목엔 크고 작은 빨간 손톱자국으로 가득했고 이마엔 멍자국이 선명했다. 메이크업을 지운 송가람의 얼굴엔 초췌한 기색이 역력해 생기라고는 전혀 없었다. 송민준을 보자마자 송가람은 미소를 지었다. 송민준을 부르는 오빠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그녀는 송민준 뒤에 서 있는 한현진을 발견하고는 꿀꺽, 말을 삼켰다. 그리고 송가람이 하려던 말은 곧 날카로운 소리로 변해 흘러나왔다. “현진 씨는 여기 왜 왔어요? 내가 어떤 꼴인지 구경이라도 하러 온 거예요?”‘쯧. 굳이 몰라도 되는 순간엔 눈치가 빠르단 말이야. 내 의도를 바로 알아차리다니.’송민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가람아, 현진이는 네가 다쳤다는 말에 어젯밤에도 왔었어. 오늘엔 네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 일찍 과일까지 사서 너 보러 온 건데 왜 말을 그렇게 해?”“쟨 그냥 내가 어떤 꼴인지 구경하러 온 거야!”송가람이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오빠, 쟤가 아줌마를 회사로 끌어들인 거야. 그래서 내가 아줌마에게 속은 거라고.”송민준이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 “그럼 돈도 현진이가 빌려주라고 해서 아주머니께 빌려준 거야? 네가 무슨 목적으로 아주머니께 돈을 빌려줬는지, 굳이 내가 얘기해야 해?”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송가람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현진 씨는 이미 한서 오빠와 이혼했어. 난 한서 오빠를 좋아하는 것도 안 된다는 거야? 현진 씨가 오빠 친동생이면, 20여 년을 함께한 우리는 전부 거짓이 되는 거야? 어떻게 이정도로 편애할 수가 있어?”송민준은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예전이었다면 송민준은 어쩌면 송가람의 말에 마음이 약해져 흔들렸을 수도 있었다. 아이를 바꾼 건 서해금이었다. 비록 송가람은 오만방자한 성격이긴 했지
“지금이라도 경찰서에 가 상황을 설명하면 될 거예요. 차용증이 없어도 계좌 이체한 내역이 있잖아요. 가족도, 그렇게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으니 증여로 보긴 어려울 거예요. 언니가 고소해요. 그 여자는 한성 그룹의 주식을 갖고 있으니 주식을 처분한다면 40억 정도는 무조건 돌려받을 수 있을 거예요.”송가람이 한현진의 손을 쳐내며 차갑게 말했다. “이게 네가 날 보러 온 진짜 목적인 거지? 내가 아줌마를 고소해 한서 오빠가 날 미워하게 되면 네가 오빠와 재혼이라도 하려고? 이제야 네가 왜 나와 아줌마를 마주치게 했는지 이해가 되네. 이걸 노리고 있었던 거잖아.”송가람의 반응을 진작 예상하고 있던 한현진은 송가람이 자신의 손을 내치는 순간 한라봉 조각을 쥔 손에 힘을 실었다. 그덕에 한라봉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한현진은 웃는 얼굴로 송가람을 쳐다보며 쯧, 혀를 차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들켰네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언니가 고소 안 한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다쳤으니 아주머니는 가만히 계시려고 하진 않으시겠죠.”송가람의 낯빛이 순간 어두워졌다. 한현진이 씩 웃으며 한라봉 조각 하나를 입에 넣었다. 입안에서 톡 터지는 과즙의 달달함이 마음을 녹였다. “아주머니께서 어젯밤 그 여자와 크게 싸우셨어요. 보아하니 치를 떠시는 것 같더라고요. 아마 그 쪽과 사돈을 맺으려고 하시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살짝 언질만 준 한현진이 손에 들고 있던 한라봉을 다 먹고는 몸을 일으켰다. “치료 잘 받아요. 쾌차하길 바라요.”말하며 걸음을 옮기던 한현진이 또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송가람은 경계의 눈빛으로 한현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야.’송가람의 걱정과는 달리 한현진은 그저 책상 곁으로 걸어가 자신이 가져온 과일 바구니에서 한라봉 두개를 꺼냈다. 그녀는 손에 들린 한라봉 두 개를 흔들며 말했다. “꽤 맛있더라고요. 두 개만 가져갈게요.”말을 마친 한현진이 한라봉을 들고 병실을 나섰다. 화가 치민 송가람은 책상 위에
잠시 멍해졌던 주혁이 곧 인사를 건넸다. “대표님, 병원엔 어쩐 일이세요?”한현진과 송민준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전 병문안 왔어요.”말하며 주혁 손에 들린 과일 바구니와 꽃을 본 한현진이 물었다. “기사님도 병문안 오셨어요?”주혁이 대답했다. “네. 친구가 수술을 해서 보러 왔어요.”송민준은 눈앞에 서 있는 수수한 옷차림의 중년 남성을 보며 한현지에게 물었다.“현진아, 이분은 누구야?”“오빠, 이분이 바로 제가 저번에 말했던 주혁 기사님이세요.”한현진은 곧바로 주혁에게 시선을 돌려 송민준을 소개했다. “기사님, 여긴 제 오빠인 송민준 씨예요.”주혁이 조심스럽게 송민준을 향해 목례했다. “송 대표님, 처음 뵙겠습니다.”주혁은 등을 살짝 구부렸다. 그 탓에 수척한 몸이 더욱 왜소해 보였다. 송민준의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향하며 주혁을 훑었다. 그리곤 그는 주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뵐게요, 주 기사님.”허리를 숙여 송민준과 악수를 나눈 주혁이 곧 손을 놓았다. 송민준이 미소 지으며 한현진에게 장난스레 말했다. “내가 무섭게 생겼어? 기사님이 날 보지도 않으시네.”움찔한 주혁이 다급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전... 그게 아니라...”“기사님이 낯을 많이 가리셔서 그래요. 기사님 그만 놀려요.”송민준이 한현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농담 좀 한 거야. 자기 사람이라고 감싸기는.”말을 마친 송민준이 주혁에게 말했다. “주 기사님, 안전 운전 부탁드릴게요. 저에겐 하나뿐인 동생이에요. 현진이가 안전하기만 하다면 보너스는 섭섭지 않게 드릴게요.”한현진이 송민준을 툭 쳤다. 갑질하는 부잣집 도련님이나 할 것 같은 그런 말은 넣어두라는 의미였다. 한현진이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 “기사님, 엘리베이터 안 타세요?”시선을 돌린 주혁이 대답했다. “어느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는지 몰라서요. 조금 헷갈리네요.”한주병원의 종합 병동엔 엘리베이터만 6개였다. 한현진이 물었다. “어느 과로 가세요? 제가 봐드릴
한현진은 말했다. “오빠가 강한서 눈치만 안 주면 돼요. 오빠는 한서의 처남인 동시에 친구이기도 하잖아요. 어젯밤 오빠가 날린 주먹 때문에 한서는 속상해서 밤새 잠도 못 잤어요. 오늘 아침에도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온 채로 출근했다고요.”송병천 쪽은 한현진이 따로 생각해둔 방법이 있었다. 송민준이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내가 걔한테 그 정도라고?”“그러니까 말이예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사람이 자신을 믿지 못하니 안 속상하겠어요?”송민준이 잠시 침묵했다. 한현진이 이젠 그가 속아 넘어갔을 것이라 생각할 때쯤, 송민준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계속 속상하라고 해. 날 속이고 싶으면 몇 년은 더 갈고 닦아야 할 거야.”“...”‘어쩐지 강한서가 계속 오빠를 여우같은 놈이라고 하더라니. 눈치가 너무 빠르잖아.’서해금이 통화를 한 짧은 사이에 송가람은 신미정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며 마음을 바꿨다. 그런 송가람의 말에 서해금이 얼마나 화가 났을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두 모녀는 병실에서 다투기 시작했다. 서해금의 얼굴이 분노로 파랗게 질려있었다. “넌 네가 신미정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면 강한서가 너와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꿈도 야무지지. 네가 쓰러지고 지금까지 그 자식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어. 걔 마음을 아직도 몰라?”송가람은 멍청할 정도로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한서 오빠가 가운데서 얼마나 난처하겠어요. 게다가 이건 모두 한현진이 꾸민 계략이에요. 제가 아줌마를 고소하게 하려는 수작이라고요. 한현진 뜻대로 되게 놔두진 않을 거예요.”“그게 한현진 계략이라고 해도 그렇지. 신미정은 한현진에게 돈을 빌리러 간건데 왜 네가 나서서 돈을 줘? 이 일에서 넌 빠져. 내가 알아서 처리할 거야.”송가람이 막 입을 열려는 데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서해금이 분노를 가라앉히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병실문을 연 순간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송가람이 고개를 내밀자 그녀의
강한서의 말에 한현진은 멍해졌다. 화가 났지만 불쌍한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순간 참지 못하고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 단순히 삐졌을 뿐이었던 강한서는 한현진의 웃음소리에 욱, 화가 치밀었다. 그건 분명 조롱이 섞인 비웃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안 먹겠다는 이유가 웃겨? 웃긴 뭘 웃어.’한현진은 그저 삐진 강한서의 모습이 귀여웠을 뿐이었다. 예전의 강한서는 한현진의 어떤 행동 때문에 기분이 나빠도 절대 그 일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는 늘 뭐든 마음속으로 꾹 참으며 한현진이 추측하게 했다. 하지만 그녀는 강한서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없으니 당연히 그의 마음을 맞출 수가 없었다. 한현진이 강한서의 그런 문제점을 대놓고 얘기한 후, 그는 바뀌기 시작했다. 기분이 나쁠 땐 전처럼 입을 꾹 닫고 혼자 삭히지 않았다. 그러니 화가 죽을 것 같은데 한현진은 그가 화가 난 줄도 모르는 일도 더는 없었다. 지금의 강한서는 화가 나면 직접적으로 마음을 표현했다. 그리곤 “얼른 와서 달래줘”라는 표정으로 한현진이 말을 걸어주길 기다렸다. 강한서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웃긴 뭘 웃어. 좋은 건 네 오빠에게 주고나서야 날 생각했잖아. 내 순위가 아버님보다, 아이보다 심지어 돈보다 뒤여도 인정할 수 있어. 하지만 대체 내 순위가 왜 송민준에게도 밀려야 하는 거야? 걘 심지어 날 때리기까지 했는데 넌 더 좋은 걸 주면서 그 녀석 마음을 달래준 거야?”한현진은 그제야 강한서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질투심만 큰게 아니라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욕심도 강했다. 일일이 따져가며 한현진 마음속 순위를 하나하나 매겼다. 3위 안에 들지 않는 것까진 그렇다 치더라도 4위마저도 자신이 아니라는 건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쉴새없이 웃기만 하던 한현진이 곧 뭔가를 떠올리고는 강한서에게 물었다. “넌 내가 오빠에게 큰 걸 준 건 어떻게 안 거야?”그 일을 떠올리니 강한서의 마음은 더 아파왔다. 10여 분 전, 송민준은 차단을 풀고 강한서에게 사진
강한서는 달콤한 한현진의 말에 사정없이 무너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켰다. “나 달래려고 일부러 이렇게 말하는 거지?”한현진의 눈빛에 속상함이 스쳤다. 그녀는 손을 내리며 나긋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날 못 믿겠으면 과일 파시는 아주머니께 데려다줄게. 아주머니께 여쭤봐. 어떤 한라봉이 더 단지. 그러면 알 수 있잖아. 내가 널 속인 건지 아닌지.”강한서는 얼른 한현진의 손을 잡아 한라봉 조각을 입에 넣으며 웅얼거렸다. “안 믿는다고 안 했어.”한현진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그녀의 말처럼 한라봉은 달콤했다. 마치 꿀을 먹은 것처럼, 달달한 향이 마음까지 스몄다. 한현진이 활짝 웃으며 한라봉을 마저 까 강한서에게 건넸다. 화가 쉽게 풀리는 건 강한서 최대의 우점이었다. 큰 게 맛있는지, 아니면 작은게 맛있는지는 사실 한현진도 잘 몰랐다. 과일 파는 사람이야 당연히 모두 맛있다고 할 테였다. 하지만 그녀의 말재간만 있다면 오늘 누가 어느 한라봉을 가지든 한현진은 어떻게든 모두가 원하는 방향으로 상황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다만 강한서는 이것을 사탕발린 말이라고 표현했고 한현진은 그 평가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이런 능력을 “대화의 기술”이라고 불렀다. 한라봉을 다 먹은 강한서가 휴대폰을 꺼내 인터넷에 검색했다는 건 한현진이 모르는 또 다른 에피소드였다. 인터넷을 뒤지던 강한서는 드디어 마케팅 피드 하나를 발견했다. 그 피드엔 꽤 “전문”적인 용어로 작은 한라봉이 큰 한라봉보다 맛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했다. 강한서는 그 피드를 캡쳐한 후 송민준에게 메시지를 전송했다. 지고는 못 사는 한주 남자들이었다. ——한현진의 부탁을 받고 쓰기 시작한 차미주의 대본은 이미 7, 80% 정도 완성 되었다. 차미주는 한현진에게 첫 피드백을 받고 이런저런 디테일을 추가한 후 대본의 완성도를 높여야 했다. 수년간의 보조 작가로써의 경력은 괜히 쌓은 것이 아니었다. 요즘 따라 인터넷엔 재벌가의 원한을 주제로
강한서가 생선 가시를 바르며 말했다. “우리가 아무 것도 안 한 건 아니잖아. 현진이가 돈 드렸잖아.”한성우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그 돈은 나랑 형수님이 만든 판에서 네 삼촌이 전부 토해냈잖아. 그걸 줬다고 할 수 있는 거야?’한현진은 애초부터 통쾌하게 돈을 줄 생각이 없었다. 한성우는 강한서가 그것도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현장에서 두 사람을 검거했으니 한성우는 강한서가 한현진과 싸울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양시은 딸의 약혼식에서 있었던 일이 강한서에게는 큰 상처였던 모양이었다. 그는 정말 두 번 다시 신씨 가문의 일에 개입할 생각이 없었다. “넌 그저 지켜본다고 해도 민서가 그러겠어? 만약 민서가 나섰다고 형수님이 너에게 화풀이하면 어떡해?”차미주와 수다를 떨고 있던 한현진이 갑자기 틈을 내 한성우의 말에 대답했다. “이간질 하려고 하지 마요.”‘스토리 의논하던 거 아니었어? 이렇게까지 목소리를 낮췄는데도 들린다고?’한성우가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강한서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들었지? 이간질하지 마.”차미주도 한성우를 노려보았다. “수다쟁이 같은 인간아. 가는 곳마다 말이 많지, 하여튼.”“...”‘몸까지 줬는데, 지금은 내가 남이 된 거야?’‘좋네, 좋아, 아주.’점식 식사는 2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그 사이 차미주는 드디어 전체 줄거리를 확정했다. 대본은 완성도는 물론 구성도 논리적으로 잘 짜여 있어 강한서조차도 잘 썼다고 칭찬할 정도였다. 친구와 애인에게 칭찬을 받은 차미주는 자신감에 가득 찼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최우수 작가상을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싶었다.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신난 차미주를 보는 한성우의 마음도 사르르 녹아내렸다. 사실 차미주는 대본을 쓰는데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업계가 그랬다. 어린 작가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그저 돈 몇 푼 벌려고 실력은 없지만 노이즈 마케팅에 강한 쓰레기들의
웹 드라마 대본의 판권은 사실 돈이 되지 않았다. 400만 원에서 600만 원 사이가 일반적인 저작권료였다. 흥행한 작품이 있는 작가라면 2000만 원 이상의 저작권료를 요구할 수 있었다. 혹은 마음씨 좋은 제작사를 만난다면 드라마로 벌어들인 수익의 일부분을 나눌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400~600만 원을 받고 판권을 넘겨야 했다. 한성우가 웃으며 말했다. “너에게 이 정도 돈을 주고 사온 판권으로 내가 100배 이상의 수익을 낼 수 있다면 믿을 거야?”“그래도 시세에 따라야지.”한성우의 말을 믿긴 했지만 공과 사는 구분해야 했다. “현진이 부부가 우리를 이렇게 믿고 한 번에 이렇게 많은 돈을 투자했는데 우리 욕심만 채우면 안 되잖아. 내가 2000만 원만 받을게. 너무 많이 받으며 내가 현진이 앞에서 당당하게 허리를 펼 수 없어. 얼른 계약서 수정해.”한성우는 정직한 차미주의 모습이 귀여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가 장난스레 말했다. “난 매번 이런 식으로 강한서에게서 돈을 뜯었어.”차미주가 한성우를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언제든 강한서와 너와 절교하려고 한대도 넌 억울할 거 없어. 난 절대 돈 때문에 현진이와 갈등을 빚지 않을 거야. 이럴 거면 현진이에게 돈 다시 받아서 다른 제작사 찾으라고 할 거야.”한성우가 얼른 차미주를 잡았다. “그러지 마. 내가 장난한 거야. 수정할게. 수정하면 되잖아.”계약서를 수정한 후 사인에 날인까지 마친 차미주의 계좌엔 1600만 원이 넘는 계약금이 먼저 입금되었다. 세금을 뗀 후의 저작권료였다. 곧이어 차미주는 또 268억을 송금 받았다. 돈을 보낸 사람은 한성우였다. 잠시 멍해졌던 차미주가 곧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너 설마 곧 파산해? 그래서 재산을 빼돌리는 거야?”한성우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파산은 무슨 파산. 이건 내가 너한테 주는 결혼 예물이라고!”그 말에 차미주가 멍해졌다. 발꿈치를 들고 한성우의 얼굴을 손으로 감싼 차미주가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더니 한참만
한성우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형수님도 양심은 없으시네요. 아무리 그대로 강운이가 형수님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잖아요. 이렇게 이용하시면 마음에 안 찔리세요?”한성우의 말에 한현진의 말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좋아하면 강한서를 자극하기 위해 절 간민혜 씨 모습으로 분장시킬 수 있어요? 저와 주 변호사님은 그저 지인 딱 그 정도예요. 말 할 거예요, 말 거예요? 말 안 할 거면 됐어요.”‘강한서에게 덫을 놓은 건 내가 평생 기억하고 있을 거야.’말을 잘못 꺼냈음을 인지한 한성우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얘기하면 되잖아요. 왜 화를 내고 그래요. 하지만 제가 얘기한다고 해서 강운이가 나설 거란 보장은 저도 못해요.”한현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할 거예요.”주강운이라는 사람의 모든 면을 잘 안다고 할 수 없었지만 한현진은 변호사로서의 그의 능력은 의심한 적이 없었다. 정서희의 의뢰를 받고 정설희 사건을 조사하고 있으니 당연히 장준도 눈여겨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제 발로 찾아온 기회는 주강운은 거절할 리가 없었다. 주강운에게 전화해 안부를 묻던 한성우는 돌고 돌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불법 레이싱 교통사고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대. 전부 이제 갓 20살이 된 어린 애들이던데 안타깝게 됐어. 학교나 열심히 다닐 것이지 레이싱은 대체 왜 한 거야. 목숨이 아깝지도 않나 봐.”커피를 한 모금이 마신 주강운이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이젠 사회 뉴스도 봐?”“아니, 그냥 우연하게 본 건데 놀라워서 그러지. 바로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잖아. 부상자 중에 진수 그룹 막내아들도 있었고. 탄식이 절로 나오더라니까.”물을 한 모금 마신 한성우가 툭 던지듯 물었다. “넌 이런 뉴스 안 봐?”주강운이 말했다. “봤는데 자세히는 안 봤어.”“사건 관련 기사는 아무것도 아니야. 숨겨진 뒷이야기가 더 충격적이야. 그러니까...”“잠깐만.”주강운이 한성우의 말을 잘랐다. “나 할 일이 있어서 나중에 끝
[아니, 지금 중요한 건 사고 원인을 밝히는 거 아녜요? 대체 왜 부상자 신상정보나 캐고 있는 거예요? 일부러 여론 몰이 하려는 거 아녜요?][그러니까요. 이렇게 큰 교통사고면 한 사람만의 문제는 아닐 텐데, 이 경기의 주최 측에 문제점을 둬야하는 거잖아요.][속도 제한 구간에서 불법 레이싱을 하다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뭐 더 할 말 있어요? 위에 댓글 혹시 진수 그룹 알바 아니세요?][그래서 진모 씨는 경기에 참가하지 않은 건가요? 피해자라도 된대요? 피해자는 그 인간들 차에 치인 사람이에요. 논리적인 척 하는 거 웃기네요. 쓰레기 같은 인간 때문에 목숨을 잃은 피해자는 나 몰라라 하면서 그것도 인간이라고 신상정보가 털리는 게 안타까워요?][진윤. 남. 서화 대학 전기정보공학과 2학년. 주민등록 번호: XXXX. 전화번호: XXXX.]진윤의 신상정보가 인터넷에 전부 폭로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정보를 공유했다. 심지어 진윤의 수능성적을 폭로하며 그의 성적으로는 서화 대학에 입학할 수 없다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불법 레이싱으로 인한 교통사고로 한 사람을 향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고 여론은 이미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여론 몰이가 필요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그 대상이 진윤이 될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 진윤을 이용해 사건의 요점을 흐리려는 의도이거나 이번 일을 계기로 진수 그룹에 타격을 주려는 것이 분명했다.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한현진이 한성우에게 연락했다. 진윤의 일로 전화했다는 것을 안 한성우가 말했다. “이번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녜요. 일단 불법 레이싱도 문제이긴 하지만 제일 중요하건 레이싱에 참가한 사람 중 마약을 한 인간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이번 사고가 일어난 제일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고요.”“지금 그 인간을 숨기기 위해 인터넷에서는 이 사건의 모든 화살을 진윤 씨에게 돌리고 있어요. 형수님과 한서는 이번 일에 끼어들지 말아요.”한현진이 멈칫하며 물었다. “그
한현진은 어쩔 수 없이 민경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약혼식 준비를 하는 민경하를 위해 강한서는 특별 휴가를 지급했다. 그러니 민경하도 지금은 강한서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아주머니 말로는 아침 여섯 시부터 급하게 나갔다고 해요.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요.”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야겠어요.”“잠깐만요, 사모님.”갑자기 한현진을 부른 민경하가 나지막이 물었다. “오늘 아침 뉴스 보셨어요?”“아직요. 왜요?”민경하가 말했다. “어젯밤 남서신길에서 레이싱 경기가 있었는데 큰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해요. 남서신길 쪽에 저희 자회사에서 시공을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어요.”“오늘 아침 6시쯤에 뉴스가 터진 거니까 대표님께서 급히 나간 게 그 일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남서신길이요?”잠깐 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움찔 몸을 떨었다. ‘진윤 씨가 전에 참가하겠다고 고집 부리던 경기잖아?’한현진이 곧바로 진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뿐만 아니라 홍혜림도 연락을 받지 않았다. 비록 진씨 가문과 연이 깊은 것도 아니었고 진윤에게 다가간 것도 홍혜림에게 물어볼 것이 있기 때문이었지만 혹시라도 사고를 당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이 자식! 분명 강한서와 더는 그런 위험한 경기엔 참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서. 대체 왜 이렇게 말을 듣지 않는 거야.’아무도 연락을 받지 않자 한현진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한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하리에게 물어봐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진윤의 사촌누나이니 어쩌면 남인 그들보다 먼저 소식을 들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열이 말했다. “진윤 씨도 다쳐서 아직 깨어나지 못했대요. 신하리 씨도 아까 공항으로 가서 아마 지금쯤 그쪽으로 출발했을 거예요. 아직 사람을 보지도 못했으니 신하리 씨도 상황은 잘 모르고 있을 거예요.”제일 염려했던 일이 결국은 일어나고 말았다. 진윤도 그 사고 현장에 있었다. 그
염색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잘생긴 포즈로 거울 셀카를 찍은 진윤이 강한서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다시 시작.]강한서는 사진 속 검은 머리에 순해 보이는 젊은이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읽던 책을 내려놓은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왜?”강한서가 진윤의 셀카를 한현진에게 보여주었다. 한현진 역시 사진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금발에 눈썹도 살짝 밀어버리는 스타일을 고집하더라니. 눈썹 피어싱까지 빼니까 그냥 아기였네. 너무 귀엽게 생겼잖아. 훈이보다 어려 보여.”강한서도 한현진을 따라 웃었다. “선배도 그렇잖아. 50살도 넘은 분이 아직도 30대처럼 보이니까. 성우가 처음 선배를 봤을 때 형이라고 불렀다가 예의 없다고 혼났어. 그러다 다른 애들도 형이라고 하니까 말이 없더라고.”그 장면을 상상한 한현진은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역시 동안이 좋아. 50대가 되어서도 얼굴 하나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살 수 있잖아. 난 왜 동안이 아닐까?”그 말에 멈칫한 강한서가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누구 마음을 사려고?”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강 대표님, 몇 십 년 후의 일도 미리 질투하실 거예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는 아냐.”한현진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정말?”강한서가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안 해, 질투.”예상 밖의 대답에 호기심이 불타오른 한현진이 물었다. 몇 십 년 후엔 사랑보다 정으로 사는 거라 신경 쓰지 않는 거야?”강한서가 대답했다. “그건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어.”“뭔데?”강한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대들은 그저 첩에 불과해.”멍해졌던 한현진이 폭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강한서를 품에 안고 뽀뽀 세례를 날렸다. “진지한 얼굴로 실없는 농담을 던질 때 정말 귀여워 죽겠다니까.”강한서가 힐끔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이런 걸 바로 조강지처의 자신감이라고 하는 거야.”한
순간 불쾌한 기분에 빠진 진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아마추어 경기는 사석에서 주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전문적인 레이싱 경기도 아니었다. 오직 속도에서 주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경기였다. 상금이 높은 만큼 위험부담도 컸다. 하지만 진윤이 경기에 참가한 것은 상금 때문이 아니었다. 돈 걱정 없이 산 진윤이 목숨 건 돈에 욕심낼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지 경기의 주최 측에 F1 레전드 인물도 있다는 소식에 우승을 하면 그 사람과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참가한 것이었다. 진윤은 그의 팀원들 역시 레이싱에 대한 열정으로 함께 지금까지 뭉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을 무시하는 친구의 말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진윤처럼 레이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프로 선수가 되길 꿈꾸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이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레이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는 상금이라는 거대한 유혹일 수도 있었다. 팀원 중 위험한 내기 경기에 참석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진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경주마처럼 미친 듯이 산길을 휘저었다. 목숨을 내걸고 재벌들의 도박판에서 기꺼이 주사위가 되었다. 아차 하는 사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경기에서 이기면 그만큼 어마어마한 상금이 주어졌다. 불행히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고 해도 그의 가족들은 놀라운 액수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으니 위험을 감수하고 뛰어드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처음으로 팀원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의 진윤은 충격에 빠졌었다. 하지만 팀원들은 마치 일상적이 대화를 하듯 당연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의 진윤은 그저 그들이 비슷한 일을 너무 많이 들은 탓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들은 그렇게 위험 부담마저도 부러웠었던 같았다. 팀원 중 대부분의 사람에게 레이싱은 그저 짧은 시간 사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도구에 불과했다. 뜬 눈으로 꿈을 꾸고 있는 진윤이야말로 그들에겐 이상한 인간
“아들. 네가 공부가 하고 싶다면 복수 전공이 아니라 10개 전공을 배우겠다고 해도 엄마는 찬성이야. 엄마 지금 너무 기뻐. 만약 농담하는 거라면 지금 당장 거짓말이었다고 얘기해. 안 그럼 엄마는 진심으로 받아들일 거야.”진윤이 웃으며 홍혜림의 팔을 끌어안았다. “엄마. 저도 형처럼 엄마의 자랑이면 안 돼요?”홍혜림이 진윤의 금발을 어루만졌다. “너도 예전엔 엄마의 자랑이었지. 금발로 염색한 후로는 자랑이 아니게 되었지만.”진윤: ...“그럼 다시 염색할게요.”홍혜림이 얼른 헤어숍 VIP카드를 건네며 말했다. “얼른 가. 여긴 새벽 12시가 되어야 영업이 끝나는 곳이야. 지금 가면 아직 시간 있어.”진윤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홍혜림이 얼마나 진윤의 금발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네, 네, 네. 지금 갈게요.”외투를 챙겨주며 문앞까지 배웅 나온 홍혜림이 진윤에게 물었다. “아들. 조금 전에 누구한테 들은 말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잖아. 그 분 너희 교수님이셔?”“우리 교수님은 아녜요. 하지만 좋은 스승님이긴 해요.”‘사기꾼이기도 해. 하지만 꽤 능력 있는 사기꾼.’홍혜림이 호기심에 가득 찬 말투로 물었다. “그 분 한 마디에 바로 생각이 바뀐 거야? 내가 너한테 얼마나 많이 얘기했었는데, 그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진윤이 말했다. “절 데리고 20km를 뛰었어요. 자길 이기면 날 뉴벨리 팀에 입단시켜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나보다 10살이나 많아서 나이 많은 어르신한테 지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졌어요.”진윤이 창피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저보다 빨리 뛴 건 아니었어요. 제가 적을 만만하게 생각한 거죠. 하지만 무서운 사람이에요. 지독하게 강해서 무서운 사람. 그 사람은 못 해낼 일이 없는 것 같아요. 입단은 무슨, 그냥 그 기회를 벌어 저에게 설교를 하려던 것뿐이었어요.”“내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레이싱을 그만두게 하려고. 처음엔 엄마가 보낸 스파이인 줄 알았다니까요. 하지만
진윤에게 묻는 홍혜림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얘기해. 엄마 괜찮아. 파산이라도 하지, 뭐. 돈은 없으면 다시 벌 수 있어. 아빠가 안 된다고 하면 쫓아내면 돼.’처음으로 느끼는 죄책감에 진윤은 고개를 숙였다. 홍혜림이 비록 관리를 잘 하긴 했지만 귀밑머리는 이미 하얀 서리가 내려있었다. 큰형은 어려서부터 얌전하고 말을 잘 듣는 아이라 부모님의 속을 썩인 적이 없었다. 유독 진윤이 고집을 부리며 걸음마를 뗄 때부터 뒤에서 마음을 졸이게 했다. 진윤의 수능성적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 전공은 전부 부모님이 수많은 돈을 들여 기획한 결과였다. 하지만 진윤은 본인이 좋아하지 않는 전공이라는 이유로 자포자기하며 지냈다. 부모님이 통제욕이 강하다는 것은 그저 진윤이 그들에게 씌워놓은 프레임에 불과했다. 정말 부모님의 통제 속에서 살아가는 친구들은 매일 모든 스케줄, 심지어 먹는 음식까지 전부 부모님에게 보고해야 했다. 그런 사람에 비하면 그의 부모님은 그저 애교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레이싱을 좋아하는 진윤이 못마땅했지만 그럼에도 그저 설득하는 것이 전부였다. 홍혜림은 단 한 번도 진윤의 레이싱 장비를 부순 적이 없었다. 매번 더는 새 장비를 사주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다짐도 진윤의 애교 몇 번에 곧 무너지고 말았다. ‘언제까지 실망만 안겨드릴 순 없잖아. 나도 엄마의 자랑이 되어야지 않겠어?’“엄마. 저 복수 전공하고 싶어요. 전 레이싱이 좋아요. 도무지 포기가 안 돼요. 저 실력 그 정도 아닌 거 알아요. 하지만 자동차 관련한 전공을 배워보고 싶어요. 지금 전공은 절대, 두 번 다시는 F학점 받는 일 없을 거라 약속 드려요. 복수 전공하게 해주면 안 돼요?”홍혜림: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어?”진윤이 멍해졌다. “네?”홍혜림이 말했다. “네가 나에게 하려는 말이 그거야?”진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그게 아니면요?”홍혜림: “사람을 치거나, 교통사고를 낸 게 아니고?”
눈에 띄게 변한 진윤의 모습을 홍혜림은 믿을 수가 없었다.집 바로 앞이 학교라 진윤은 기숙사 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집에 자주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집에서 레이싱 게임을 할 때마다 부모님의 잔소리가 끊이질 않아 진윤은 큰형 아파트에 몰래 숨어있는 것을 좋아했다. 진윤의 큰형은 일 때문에 그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9살이나 더 많은 그의 형은 가끔 부모님보다 더 진윤을 아끼기도 했다. 심지어 가끔은 진윤의 편을 들어 그의 비밀을 지켜주기도 했다. 큰형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러니 제발 눈치껏 본가로 들어오라고 홍혜림은 몇 번이고 진윤에게 얘기했었다. 사실 예비 며느리는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진윤을 본가로 불러들이는 이유는 진윤이 곁에 없으니 도무지 관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윤은 그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매번 홍혜림이 같은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그는 두 귀를 닫고 못 듣는 척 연기했다. 하지만 이번엔 홍혜림이 먼저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진윤 스스로 본가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진윤에 홍혜림은 혹시 형제가 싸우기라도 한 걸까 전화를 했지만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에 홍혜림은 생각했다. ‘이 자식 또 무슨 사고라도 치고 돌아와서 얌전한 척 연기하는 거 아냐?’‘교통사고라도 내서 배상해 줘야 하는 건가? 아니면 레이싱 카가 망가져서 새 차를 살 돈이 필요한 건가?’‘설마 사람을 친 건 아니겠지?’진윤이 집에서 열심히 공부할수록 홍혜림은 점점 더 사람을 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매일 밤 아무 일도 없는 척 진윤의 방 앞을 서성이며 생각했다. ‘먼저 잘못을 인정하면 요즘 얌전하게 지냈던 걸 정상참작해서 욕을 좀 덜해야겠어.’하지만 3일이 지나도록 진윤은 홍혜림을 부르지 않았다. ‘이상해.’‘너무 이상하잖아!’‘설마 사람을 친 것보다 더 큰 사고는 아니겠지?’‘대체 얼마를 배상해야 하는 거야?’1 주일이 지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홍혜림은 진윤의
진윤: ...강한서가 진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싫다면서 현 상황을 바꿔보려고 하지도 않은 거야?”진윤: ...‘왜 선생님께 혼나는 기분이 드는 거지? 진지하게 핵심만 꼬집고 있잖아.’입을 달싹이던 진윤은 변명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진윤은 그동안 어떻게 반항해야할지,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강한서가 말했다. “네 인생은 네 거야. 네가 열심히 살든, 대충 살든 네 하루하루는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어. 네 태도에 따라 싫었던 그 경험들이 사라지지 않아. 단지 네가 싫다는 이유로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않고 대충 흘려보냈을 뿐 그것들은 계속 존재해.”“대충 공부해서 대충 졸업하면 또 대충 취직이나 하겠지. 아니면 아예 너희 회사로 입사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다음에? 그렇게 평생을 대충 흘려보낼 거야? 그게 네가 원하는 인생이야?”멍하니 강한서를 쳐다보던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아뇨.”부모님이 선택해준 전공이 싫어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얼른 졸업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강한서의 말처럼 졸업 후엔? 전공에 맞는 직업을 찾아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갈까, 아니면 부모님 회사에 입사해 되는대로 살아갈까. 어떤 선택이든 그건 진윤이 원하는 인생은 아니었다. 4년이란 시간을 허무히 흘러 보내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전 이미 3학년이에요. 전과를 하기엔 늦었잖아요. 이젠 뭘 하려고 너무 늦은 것 같아요.”속상한 듯 대답하는 진윤의 말에 한현진이 말했다. “진윤 씨는 완전 MZ세대잖아요. 이제 갓 이십 대 초반인데 뭘 해도 늦지 않은 나이예요. 너무 빨리 본인의 가능성을 단정 짓지 말아요. 60세에 대학생이 됐다는 기사 못 봤어요?”“진윤 씨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도 늦었다고 생각 안 하는데, 진윤 씨가 왜 겁을 내요?”“전...”입술을 달싹이던 진윤이 한참이 지나서야 한숨을 내뱉었다. “두 사람 문제아 갱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