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서는 달콤한 한현진의 말에 사정없이 무너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켰다. “나 달래려고 일부러 이렇게 말하는 거지?”한현진의 눈빛에 속상함이 스쳤다. 그녀는 손을 내리며 나긋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날 못 믿겠으면 과일 파시는 아주머니께 데려다줄게. 아주머니께 여쭤봐. 어떤 한라봉이 더 단지. 그러면 알 수 있잖아. 내가 널 속인 건지 아닌지.”강한서는 얼른 한현진의 손을 잡아 한라봉 조각을 입에 넣으며 웅얼거렸다. “안 믿는다고 안 했어.”한현진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그녀의 말처럼 한라봉은 달콤했다. 마치 꿀을 먹은 것처럼, 달달한 향이 마음까지 스몄다. 한현진이 활짝 웃으며 한라봉을 마저 까 강한서에게 건넸다. 화가 쉽게 풀리는 건 강한서 최대의 우점이었다. 큰 게 맛있는지, 아니면 작은게 맛있는지는 사실 한현진도 잘 몰랐다. 과일 파는 사람이야 당연히 모두 맛있다고 할 테였다. 하지만 그녀의 말재간만 있다면 오늘 누가 어느 한라봉을 가지든 한현진은 어떻게든 모두가 원하는 방향으로 상황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다만 강한서는 이것을 사탕발린 말이라고 표현했고 한현진은 그 평가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이런 능력을 “대화의 기술”이라고 불렀다. 한라봉을 다 먹은 강한서가 휴대폰을 꺼내 인터넷에 검색했다는 건 한현진이 모르는 또 다른 에피소드였다. 인터넷을 뒤지던 강한서는 드디어 마케팅 피드 하나를 발견했다. 그 피드엔 꽤 “전문”적인 용어로 작은 한라봉이 큰 한라봉보다 맛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했다. 강한서는 그 피드를 캡쳐한 후 송민준에게 메시지를 전송했다. 지고는 못 사는 한주 남자들이었다. ——한현진의 부탁을 받고 쓰기 시작한 차미주의 대본은 이미 7, 80% 정도 완성 되었다. 차미주는 한현진에게 첫 피드백을 받고 이런저런 디테일을 추가한 후 대본의 완성도를 높여야 했다. 수년간의 보조 작가로써의 경력은 괜히 쌓은 것이 아니었다. 요즘 따라 인터넷엔 재벌가의 원한을 주제로
강한서가 생선 가시를 바르며 말했다. “우리가 아무 것도 안 한 건 아니잖아. 현진이가 돈 드렸잖아.”한성우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그 돈은 나랑 형수님이 만든 판에서 네 삼촌이 전부 토해냈잖아. 그걸 줬다고 할 수 있는 거야?’한현진은 애초부터 통쾌하게 돈을 줄 생각이 없었다. 한성우는 강한서가 그것도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현장에서 두 사람을 검거했으니 한성우는 강한서가 한현진과 싸울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양시은 딸의 약혼식에서 있었던 일이 강한서에게는 큰 상처였던 모양이었다. 그는 정말 두 번 다시 신씨 가문의 일에 개입할 생각이 없었다. “넌 그저 지켜본다고 해도 민서가 그러겠어? 만약 민서가 나섰다고 형수님이 너에게 화풀이하면 어떡해?”차미주와 수다를 떨고 있던 한현진이 갑자기 틈을 내 한성우의 말에 대답했다. “이간질 하려고 하지 마요.”‘스토리 의논하던 거 아니었어? 이렇게까지 목소리를 낮췄는데도 들린다고?’한성우가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강한서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들었지? 이간질하지 마.”차미주도 한성우를 노려보았다. “수다쟁이 같은 인간아. 가는 곳마다 말이 많지, 하여튼.”“...”‘몸까지 줬는데, 지금은 내가 남이 된 거야?’‘좋네, 좋아, 아주.’점식 식사는 2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그 사이 차미주는 드디어 전체 줄거리를 확정했다. 대본은 완성도는 물론 구성도 논리적으로 잘 짜여 있어 강한서조차도 잘 썼다고 칭찬할 정도였다. 친구와 애인에게 칭찬을 받은 차미주는 자신감에 가득 찼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최우수 작가상을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싶었다.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신난 차미주를 보는 한성우의 마음도 사르르 녹아내렸다. 사실 차미주는 대본을 쓰는데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업계가 그랬다. 어린 작가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그저 돈 몇 푼 벌려고 실력은 없지만 노이즈 마케팅에 강한 쓰레기들의
웹 드라마 대본의 판권은 사실 돈이 되지 않았다. 400만 원에서 600만 원 사이가 일반적인 저작권료였다. 흥행한 작품이 있는 작가라면 2000만 원 이상의 저작권료를 요구할 수 있었다. 혹은 마음씨 좋은 제작사를 만난다면 드라마로 벌어들인 수익의 일부분을 나눌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400~600만 원을 받고 판권을 넘겨야 했다. 한성우가 웃으며 말했다. “너에게 이 정도 돈을 주고 사온 판권으로 내가 100배 이상의 수익을 낼 수 있다면 믿을 거야?”“그래도 시세에 따라야지.”한성우의 말을 믿긴 했지만 공과 사는 구분해야 했다. “현진이 부부가 우리를 이렇게 믿고 한 번에 이렇게 많은 돈을 투자했는데 우리 욕심만 채우면 안 되잖아. 내가 2000만 원만 받을게. 너무 많이 받으며 내가 현진이 앞에서 당당하게 허리를 펼 수 없어. 얼른 계약서 수정해.”한성우는 정직한 차미주의 모습이 귀여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가 장난스레 말했다. “난 매번 이런 식으로 강한서에게서 돈을 뜯었어.”차미주가 한성우를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언제든 강한서와 너와 절교하려고 한대도 넌 억울할 거 없어. 난 절대 돈 때문에 현진이와 갈등을 빚지 않을 거야. 이럴 거면 현진이에게 돈 다시 받아서 다른 제작사 찾으라고 할 거야.”한성우가 얼른 차미주를 잡았다. “그러지 마. 내가 장난한 거야. 수정할게. 수정하면 되잖아.”계약서를 수정한 후 사인에 날인까지 마친 차미주의 계좌엔 1600만 원이 넘는 계약금이 먼저 입금되었다. 세금을 뗀 후의 저작권료였다. 곧이어 차미주는 또 268억을 송금 받았다. 돈을 보낸 사람은 한성우였다. 잠시 멍해졌던 차미주가 곧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너 설마 곧 파산해? 그래서 재산을 빼돌리는 거야?”한성우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파산은 무슨 파산. 이건 내가 너한테 주는 결혼 예물이라고!”그 말에 차미주가 멍해졌다. 발꿈치를 들고 한성우의 얼굴을 손으로 감싼 차미주가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더니 한참만
차미주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한성우를 때리려고 하자 한성우는 그런 차미주의 손을 잡아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사실 그날, 네가 거짓말을 하고 도망친 후 조준 씨가 네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네가 날 속이고 있다는 걸 알았어. 난 널 전혀 몰랐거든. 하지만 그때의 난 뜨고 싶어 안달이 난 한 연예인이 날 꼬시는 신박한 수단이라고 생각했어. 아무래도 난 이렇게 잘생기고 돈도 많은 사람이잖아. 날 탐내는 사람이 너무 많았거든.”차미주는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자뻑왕.”한성우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수작 부리는 여자를 많이 봤었지만 만나자마자 품에 안겨 날 오빠라고 부르는 건 또 처음이었거든. 그래서 난 외모가 별로라 특이한 수단으로 내 주의를 끄는 거라 생각했었어.”차미주는 “외모가 별로”라는 말에 조금 기분이 언짢아졌다. 하지만 한성우에게 자신의 첫인상이 어땠었는지 너무 궁금하기도 했기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우고 그의 말에 집중했다. “넌 확실히 내 시선을 사로잡았어. 네가 날 꼬시려고 대체 어떤 수작을 부릴지 지켜봐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인파 속에서 널 한참을 찾았고 널 발견했을 때 넌 푸아그라를 가지러 손에 접시를 든 채 줄을 서고 있었어.”셰프가 직접 푸아그라를 구워줬다. 그 탓에 줄은 아주 늦은 속도로 줄어들었다. 그날 파티에 참석한 사람 또한 많았고 메인 셰프 역시 이 바닥에서 이름 꽤나 날린 유명 인사였다. 차미주는 그 셰프의 솜씨를 맛보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려왔다. 그리고 그 한 입을 맛보기 위해 기다린 사람은 그녀 한 명뿐이 아니었다. 차미주 앞엔 이미 7, 8명이 줄을 서고 있었다.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곧 차미주의 순서가 다가왔다. 셰프는 3인분 밖에 남지 않았다며 이젠 더는 줄을 서지 말라고 말했다. 그리고 차미주는 마침 그 세 번째 사람이었다. 차미주 뒤에 줄을 섰던 사람이 하나둘 흩어지고 차미주도 제일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는 맛있게 익어가는 푸아그라를 보며 셰프에게 연하게 구
화를 이기지 못한 차미주는 한밤중에 음식을 전부 뜯어 집에서 기르던 황구에게 먹였다. 그러면 그녀의 할머니는 아까운 마음에 허벅지를 치며 악독한 계집애라고 차미주에게 삿대질했다. 여자 아이다운 면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며 시집가긴 글렀다며 욕을 해댔다. 매번 밥을 먹을 때면 차미주의 사촌 오빠는 어른들이 젓가락을 들기도 전에 접시를 마구 뒤적거렸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런 사촌 오빠를 한 번도 나무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차미주가 딱 한 번, 접시에 담긴 닭다리를 건드리자 할머니는 그녀의 귀를 잡아당기며 아버지 앞에 데려가서는 “굶어죽은 귀신”이 붙은 계집애라며 욕했다. 아버지는 차미주를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넌 왜 이렇게 버릇이 없어? 어른들이 젓가락을 들지도 않았는데 누가 너더러 음식을 집으래? 배가 고프면 얼마나 고프다고 그것도 못 참는 거야? 머릿속에 먹는 것밖에 없으니 커가 뭐가 되려고 이래? 이래서 네 엄마 곁에서 크면 안 된다니까.”차미주는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가 밉다고 느껴졌다. 그 닭다리는 사실 아버지를 주려고 차미주가 먼저 집은 것이었다. 만약 차미주가 건드리지 않았다면 할머니는 닭다리 두 개를 전부 사촌 오빠에게 주었을 것이다. 김경선은 늘 차미주에게 아빠는 공부하느라 힘드시니까 영양이 듬뿍든 음식을 많이 먹어야 한다고 얘기했었다. 영양이 무슨 뜻인지 몰랐던 차미주가 오빠에게 묻자 오빠는 닭다리 하나를 차미주에게 쥐어주며 말했다. “닭다리에 영양이 많아. 이걸 먹으면 나처럼 키도 크고 똑똑해질 거야.”차미주는 식탐이 많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차미주가 식탐을 부린다고 했고 그렇게 식탐은 죄가 되어갔다. 하지만 어린 아이와 푸아그라를 나누어 먹는 차미주를 본 한성우는 식탐 부리는 녀석이 무슨 꿍꿍이가 있을 수 있겠냐고 생각했다고 한다. 사람은 이토록 서로 다른 기준과 생각이 있었다. “도둑아, 너 왜 그래?”한성우가 차미주를 불렀다. 붉어진 눈시울의 차미주를 본 한성우의 목소리에 걱정이 담겼다. 추억
그 실검의 모 플랫폼에서 수백만 명의 팔로워를 보유한 과학 기술 콘텐츠를 다루는 산군의 바람 계정에 달린 한 네티즌의 댓글에서 시작되었다. 네티즌: [내일이면 한성의 신제품 발표회네요. 이번인 기술 혁신을 이뤄냈다고 하던데 한성 신제품 리뷰는 언제 업로드하실 거예요?]산군의 바람: [리뷰 안 할 겁니다.]네티즌: [왜요?]모두가 알다시피 산군의 바람은 한성의 제품을 리뷰하면서 인기를 얻었다. 당시엔 한성에서 신제품을 출시할 때마다 리뷰 영상을 올렸고 페이스북에 제품의 장단점을 나열했다. 또 자주 강한서의 계정을 태그하기도 했고 심지어 강한서는 그의 피드에 좋아요를 누르기도 했다. 산군의 바람 본인도 자신을 한성 그룹의 무료 프로모터라고 장난스레 말하기도 했었다. 그러니 산군의 바람이 한성 그룹의 신제품 리뷰를 하지 않을 거라는 댓글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 결고 산군의 바람이 네티즌의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댓글을 달았다. [생모도 버리고 부양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이 만든 제품은 아무리 좋아도 다시는 사용하지 않을 겁니다. 과학 기술엔 도덕적 기준이 없지만 사용자에겐 지키고 싶은 선이라는 게 있으니까요.]그 댓글은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각 마케팅 계정은 하나둘 그 댓글을 리트윗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일부 내부 사정을 알고 있다는 사람들이 마케팅 계정에 강한서가 여자를 위해 생모와 결렬하고 어머니를 집에서 쫓아내고는 아는 체도 하지 않는다는 정보를 공유했다. 곧이어 의료진이라 자칭하는 사람이 계정에 피드를 업로드 했다. 그 사람은 강한서의 모친이 자신이 근무 중인 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고 2주일 동안 입원을 했었지만 강한서를 본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한성 그룹의 “전 직원”도 자신이 직접 강한서가 어머니를 회사에서 쫓아내고 일부러 만나주지 않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고 했다. 신미정의 “친구”도 일부러 계정을 개설하여 페이스북을 통해 강한서의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하면서 늑대 소굴 같은 강씨 가문에서 강한서를 힘들게
한현진은 수건을 손에 들고 강한서 얼굴에 묻은 거품을 꼼꼼하게 닦아주며 나지막이 말했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마. 넌 신제품 발표회만 잘 마무리 하면 돼. 내가 곁에 있을게.”강한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여 한현진의 콧등을 문질렀다. 그는 자신의 손을 이미 볼록하게 튀어나온 한현진의 아랫배에 올리곤 나지막이 말했다. “너희만 있으면 난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아.”한현진이 강한서의 얼굴에 입 맞췄다. “우리 여보가 최고야.”강한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부드러운 표정으로 한현진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엔 다정함뿐이었다. 한현진은 직접 강한서의 수트를 골라줬다. 그녀가 고른 넥타이는 자신이 입을 재킷과 같은 색이었다. 두 사람이 방에서 내려와 밥을 먹을 때, 강민서는 자꾸 강한서를 힐끔힐끔 쳐다보았지만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강한서의 표정이 평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어 강민서도 감히 물어볼 수가 없었다.민경하가 그들을 데리고 발표회 현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기사들이 현장을 잔뜩 메우고 있어 난리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실검을 본 후 사실 확인을 통해 조회수를 높일 목적으로 찾아 온 사람도 적지 않았다. 강한서는 그저 현장을 힐끔 쳐다본 후 바로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민경하에게 말했다. “잠시 후 현장에 보안요원을 더 파견해서 질서 유지해요. 오늘은 사람이 많아서 그 어떤 안전사고도 일어나선 안 돼요.”민경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연락하겠습니다.”강민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오빠, 아니면 발표회를 미루는 게 어때? 이 사람들 말도 안 되는 그 기사 때문에 온 게 분명해.”강한서는 강민서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덤덤하게 말했다. “발표회가 갑자기 진행된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이 이 발표회를 위해 일부러 한주까지 왔어. 아무 이유 없이 발표회를 미루면 대중들에겐 뭐라고 설명할 거야? 고작 그까짓 가정사 때문이라고 할래? 발표회는 내 개인 무대가 아니야. 한성 그룹 3년 간의 노력의 성과를 보여주는 자리야. 아무도
미세하게 표정이 변한 강단해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사실이 뭔지 중요한 게 아니야. 여론이 중요한 거지! 밖에 수많은 기자들 중 발표회를 취재하러 온 사람이 많을 것 같아, 아니면 네 스캔들 때문에 몰려 온 기자가 많을 것 같아? 이런 타이밍에 네가 무대에 오르면 대체 오늘 이 자리는 한성의 신제품 발표회인 거야가, 아니면 네 개인 기자회견장인 거야?”“삼촌, 발표회의 입장권은 이미 2주일에 전부 매진되었어요. 삼촌 말대로라면 오늘 오신 손님들은 예지 능력이라도 있어서 일부러 티켓까지 구매해 절 비난하러 온다는 건가요?”강한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삼촌, 다들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요. 저도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 아니고요. 신제품 발표를 누가 하든 아무 상관없어요. 하지만 저에게 발표 원고가 없는 건 거짓말이 아녜요. 성능 매개 변수, 연구 개발 과정, 기술 혁신까지.”강한서가 길고 가느다란 손을 올려 식지로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렸다. “전부 여기에 있거든요. 삼촌께 전부 읊어드릴 수 있지만 연세가 있으시니 기억하지 못하실까 봐 그러죠. 괜히 무대에 올라 웃음거리가 되면 어떡해요.”“너— 어른은 안중에도 없구나.”노골적인 멸시에 강단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강한서가 몸을 일으켜 강단해 앞으로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갔다. 강단해의 어깨까지 오던 장례식의 어린 소년이 점차 늘 자신을 아이처럼 대하던 자신의 우월하던 큰형과 조금씩 겹쳐보였다. 하지만 강한서는 그보다 더 날카로운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훤칠하게 큰 키는 이미 자신을 추월했고 이젠 은근히 자신을 압박하는 아우라도 풍기고 있었다. 강한서는 강단해와 30cm 정도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시선을 올려 강단해를 빤히 쳐다보았다. “삼촌. 이번 발표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굳이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알고 계시죠. 아랫사람 관리, 잘해 주시죠.”그리고 잠시 침묵을 지키던 강한서가 말을 이었다. “삼촌. 사람이 죽었다고 증거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한성우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형수님도 양심은 없으시네요. 아무리 그대로 강운이가 형수님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잖아요. 이렇게 이용하시면 마음에 안 찔리세요?”한성우의 말에 한현진의 말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좋아하면 강한서를 자극하기 위해 절 간민혜 씨 모습으로 분장시킬 수 있어요? 저와 주 변호사님은 그저 지인 딱 그 정도예요. 말 할 거예요, 말 거예요? 말 안 할 거면 됐어요.”‘강한서에게 덫을 놓은 건 내가 평생 기억하고 있을 거야.’말을 잘못 꺼냈음을 인지한 한성우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얘기하면 되잖아요. 왜 화를 내고 그래요. 하지만 제가 얘기한다고 해서 강운이가 나설 거란 보장은 저도 못해요.”한현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할 거예요.”주강운이라는 사람의 모든 면을 잘 안다고 할 수 없었지만 한현진은 변호사로서의 그의 능력은 의심한 적이 없었다. 정서희의 의뢰를 받고 정설희 사건을 조사하고 있으니 당연히 장준도 눈여겨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제 발로 찾아온 기회는 주강운은 거절할 리가 없었다. 주강운에게 전화해 안부를 묻던 한성우는 돌고 돌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불법 레이싱 교통사고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대. 전부 이제 갓 20살이 된 어린 애들이던데 안타깝게 됐어. 학교나 열심히 다닐 것이지 레이싱은 대체 왜 한 거야. 목숨이 아깝지도 않나 봐.”커피를 한 모금이 마신 주강운이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이젠 사회 뉴스도 봐?”“아니, 그냥 우연하게 본 건데 놀라워서 그러지. 바로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잖아. 부상자 중에 진수 그룹 막내아들도 있었고. 탄식이 절로 나오더라니까.”물을 한 모금 마신 한성우가 툭 던지듯 물었다. “넌 이런 뉴스 안 봐?”주강운이 말했다. “봤는데 자세히는 안 봤어.”“사건 관련 기사는 아무것도 아니야. 숨겨진 뒷이야기가 더 충격적이야. 그러니까...”“잠깐만.”주강운이 한성우의 말을 잘랐다. “나 할 일이 있어서 나중에 끝
[아니, 지금 중요한 건 사고 원인을 밝히는 거 아녜요? 대체 왜 부상자 신상정보나 캐고 있는 거예요? 일부러 여론 몰이 하려는 거 아녜요?][그러니까요. 이렇게 큰 교통사고면 한 사람만의 문제는 아닐 텐데, 이 경기의 주최 측에 문제점을 둬야하는 거잖아요.][속도 제한 구간에서 불법 레이싱을 하다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뭐 더 할 말 있어요? 위에 댓글 혹시 진수 그룹 알바 아니세요?][그래서 진모 씨는 경기에 참가하지 않은 건가요? 피해자라도 된대요? 피해자는 그 인간들 차에 치인 사람이에요. 논리적인 척 하는 거 웃기네요. 쓰레기 같은 인간 때문에 목숨을 잃은 피해자는 나 몰라라 하면서 그것도 인간이라고 신상정보가 털리는 게 안타까워요?][진윤. 남. 서화 대학 전기정보공학과 2학년. 주민등록 번호: XXXX. 전화번호: XXXX.]진윤의 신상정보가 인터넷에 전부 폭로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정보를 공유했다. 심지어 진윤의 수능성적을 폭로하며 그의 성적으로는 서화 대학에 입학할 수 없다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불법 레이싱으로 인한 교통사고로 한 사람을 향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고 여론은 이미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여론 몰이가 필요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그 대상이 진윤이 될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 진윤을 이용해 사건의 요점을 흐리려는 의도이거나 이번 일을 계기로 진수 그룹에 타격을 주려는 것이 분명했다.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한현진이 한성우에게 연락했다. 진윤의 일로 전화했다는 것을 안 한성우가 말했다. “이번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녜요. 일단 불법 레이싱도 문제이긴 하지만 제일 중요하건 레이싱에 참가한 사람 중 마약을 한 인간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이번 사고가 일어난 제일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고요.”“지금 그 인간을 숨기기 위해 인터넷에서는 이 사건의 모든 화살을 진윤 씨에게 돌리고 있어요. 형수님과 한서는 이번 일에 끼어들지 말아요.”한현진이 멈칫하며 물었다. “그
한현진은 어쩔 수 없이 민경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약혼식 준비를 하는 민경하를 위해 강한서는 특별 휴가를 지급했다. 그러니 민경하도 지금은 강한서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아주머니 말로는 아침 여섯 시부터 급하게 나갔다고 해요.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요.”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야겠어요.”“잠깐만요, 사모님.”갑자기 한현진을 부른 민경하가 나지막이 물었다. “오늘 아침 뉴스 보셨어요?”“아직요. 왜요?”민경하가 말했다. “어젯밤 남서신길에서 레이싱 경기가 있었는데 큰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해요. 남서신길 쪽에 저희 자회사에서 시공을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어요.”“오늘 아침 6시쯤에 뉴스가 터진 거니까 대표님께서 급히 나간 게 그 일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남서신길이요?”잠깐 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움찔 몸을 떨었다. ‘진윤 씨가 전에 참가하겠다고 고집 부리던 경기잖아?’한현진이 곧바로 진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뿐만 아니라 홍혜림도 연락을 받지 않았다. 비록 진씨 가문과 연이 깊은 것도 아니었고 진윤에게 다가간 것도 홍혜림에게 물어볼 것이 있기 때문이었지만 혹시라도 사고를 당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이 자식! 분명 강한서와 더는 그런 위험한 경기엔 참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서. 대체 왜 이렇게 말을 듣지 않는 거야.’아무도 연락을 받지 않자 한현진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한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하리에게 물어봐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진윤의 사촌누나이니 어쩌면 남인 그들보다 먼저 소식을 들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열이 말했다. “진윤 씨도 다쳐서 아직 깨어나지 못했대요. 신하리 씨도 아까 공항으로 가서 아마 지금쯤 그쪽으로 출발했을 거예요. 아직 사람을 보지도 못했으니 신하리 씨도 상황은 잘 모르고 있을 거예요.”제일 염려했던 일이 결국은 일어나고 말았다. 진윤도 그 사고 현장에 있었다. 그
염색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잘생긴 포즈로 거울 셀카를 찍은 진윤이 강한서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다시 시작.]강한서는 사진 속 검은 머리에 순해 보이는 젊은이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읽던 책을 내려놓은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왜?”강한서가 진윤의 셀카를 한현진에게 보여주었다. 한현진 역시 사진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금발에 눈썹도 살짝 밀어버리는 스타일을 고집하더라니. 눈썹 피어싱까지 빼니까 그냥 아기였네. 너무 귀엽게 생겼잖아. 훈이보다 어려 보여.”강한서도 한현진을 따라 웃었다. “선배도 그렇잖아. 50살도 넘은 분이 아직도 30대처럼 보이니까. 성우가 처음 선배를 봤을 때 형이라고 불렀다가 예의 없다고 혼났어. 그러다 다른 애들도 형이라고 하니까 말이 없더라고.”그 장면을 상상한 한현진은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역시 동안이 좋아. 50대가 되어서도 얼굴 하나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살 수 있잖아. 난 왜 동안이 아닐까?”그 말에 멈칫한 강한서가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누구 마음을 사려고?”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강 대표님, 몇 십 년 후의 일도 미리 질투하실 거예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는 아냐.”한현진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정말?”강한서가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안 해, 질투.”예상 밖의 대답에 호기심이 불타오른 한현진이 물었다. 몇 십 년 후엔 사랑보다 정으로 사는 거라 신경 쓰지 않는 거야?”강한서가 대답했다. “그건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어.”“뭔데?”강한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대들은 그저 첩에 불과해.”멍해졌던 한현진이 폭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강한서를 품에 안고 뽀뽀 세례를 날렸다. “진지한 얼굴로 실없는 농담을 던질 때 정말 귀여워 죽겠다니까.”강한서가 힐끔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이런 걸 바로 조강지처의 자신감이라고 하는 거야.”한
순간 불쾌한 기분에 빠진 진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아마추어 경기는 사석에서 주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전문적인 레이싱 경기도 아니었다. 오직 속도에서 주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경기였다. 상금이 높은 만큼 위험부담도 컸다. 하지만 진윤이 경기에 참가한 것은 상금 때문이 아니었다. 돈 걱정 없이 산 진윤이 목숨 건 돈에 욕심낼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지 경기의 주최 측에 F1 레전드 인물도 있다는 소식에 우승을 하면 그 사람과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참가한 것이었다. 진윤은 그의 팀원들 역시 레이싱에 대한 열정으로 함께 지금까지 뭉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을 무시하는 친구의 말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진윤처럼 레이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프로 선수가 되길 꿈꾸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이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레이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는 상금이라는 거대한 유혹일 수도 있었다. 팀원 중 위험한 내기 경기에 참석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진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경주마처럼 미친 듯이 산길을 휘저었다. 목숨을 내걸고 재벌들의 도박판에서 기꺼이 주사위가 되었다. 아차 하는 사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경기에서 이기면 그만큼 어마어마한 상금이 주어졌다. 불행히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고 해도 그의 가족들은 놀라운 액수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으니 위험을 감수하고 뛰어드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처음으로 팀원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의 진윤은 충격에 빠졌었다. 하지만 팀원들은 마치 일상적이 대화를 하듯 당연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의 진윤은 그저 그들이 비슷한 일을 너무 많이 들은 탓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들은 그렇게 위험 부담마저도 부러웠었던 같았다. 팀원 중 대부분의 사람에게 레이싱은 그저 짧은 시간 사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도구에 불과했다. 뜬 눈으로 꿈을 꾸고 있는 진윤이야말로 그들에겐 이상한 인간
“아들. 네가 공부가 하고 싶다면 복수 전공이 아니라 10개 전공을 배우겠다고 해도 엄마는 찬성이야. 엄마 지금 너무 기뻐. 만약 농담하는 거라면 지금 당장 거짓말이었다고 얘기해. 안 그럼 엄마는 진심으로 받아들일 거야.”진윤이 웃으며 홍혜림의 팔을 끌어안았다. “엄마. 저도 형처럼 엄마의 자랑이면 안 돼요?”홍혜림이 진윤의 금발을 어루만졌다. “너도 예전엔 엄마의 자랑이었지. 금발로 염색한 후로는 자랑이 아니게 되었지만.”진윤: ...“그럼 다시 염색할게요.”홍혜림이 얼른 헤어숍 VIP카드를 건네며 말했다. “얼른 가. 여긴 새벽 12시가 되어야 영업이 끝나는 곳이야. 지금 가면 아직 시간 있어.”진윤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홍혜림이 얼마나 진윤의 금발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네, 네, 네. 지금 갈게요.”외투를 챙겨주며 문앞까지 배웅 나온 홍혜림이 진윤에게 물었다. “아들. 조금 전에 누구한테 들은 말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잖아. 그 분 너희 교수님이셔?”“우리 교수님은 아녜요. 하지만 좋은 스승님이긴 해요.”‘사기꾼이기도 해. 하지만 꽤 능력 있는 사기꾼.’홍혜림이 호기심에 가득 찬 말투로 물었다. “그 분 한 마디에 바로 생각이 바뀐 거야? 내가 너한테 얼마나 많이 얘기했었는데, 그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진윤이 말했다. “절 데리고 20km를 뛰었어요. 자길 이기면 날 뉴벨리 팀에 입단시켜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나보다 10살이나 많아서 나이 많은 어르신한테 지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졌어요.”진윤이 창피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저보다 빨리 뛴 건 아니었어요. 제가 적을 만만하게 생각한 거죠. 하지만 무서운 사람이에요. 지독하게 강해서 무서운 사람. 그 사람은 못 해낼 일이 없는 것 같아요. 입단은 무슨, 그냥 그 기회를 벌어 저에게 설교를 하려던 것뿐이었어요.”“내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레이싱을 그만두게 하려고. 처음엔 엄마가 보낸 스파이인 줄 알았다니까요. 하지만
진윤에게 묻는 홍혜림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얘기해. 엄마 괜찮아. 파산이라도 하지, 뭐. 돈은 없으면 다시 벌 수 있어. 아빠가 안 된다고 하면 쫓아내면 돼.’처음으로 느끼는 죄책감에 진윤은 고개를 숙였다. 홍혜림이 비록 관리를 잘 하긴 했지만 귀밑머리는 이미 하얀 서리가 내려있었다. 큰형은 어려서부터 얌전하고 말을 잘 듣는 아이라 부모님의 속을 썩인 적이 없었다. 유독 진윤이 고집을 부리며 걸음마를 뗄 때부터 뒤에서 마음을 졸이게 했다. 진윤의 수능성적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 전공은 전부 부모님이 수많은 돈을 들여 기획한 결과였다. 하지만 진윤은 본인이 좋아하지 않는 전공이라는 이유로 자포자기하며 지냈다. 부모님이 통제욕이 강하다는 것은 그저 진윤이 그들에게 씌워놓은 프레임에 불과했다. 정말 부모님의 통제 속에서 살아가는 친구들은 매일 모든 스케줄, 심지어 먹는 음식까지 전부 부모님에게 보고해야 했다. 그런 사람에 비하면 그의 부모님은 그저 애교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레이싱을 좋아하는 진윤이 못마땅했지만 그럼에도 그저 설득하는 것이 전부였다. 홍혜림은 단 한 번도 진윤의 레이싱 장비를 부순 적이 없었다. 매번 더는 새 장비를 사주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다짐도 진윤의 애교 몇 번에 곧 무너지고 말았다. ‘언제까지 실망만 안겨드릴 순 없잖아. 나도 엄마의 자랑이 되어야지 않겠어?’“엄마. 저 복수 전공하고 싶어요. 전 레이싱이 좋아요. 도무지 포기가 안 돼요. 저 실력 그 정도 아닌 거 알아요. 하지만 자동차 관련한 전공을 배워보고 싶어요. 지금 전공은 절대, 두 번 다시는 F학점 받는 일 없을 거라 약속 드려요. 복수 전공하게 해주면 안 돼요?”홍혜림: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어?”진윤이 멍해졌다. “네?”홍혜림이 말했다. “네가 나에게 하려는 말이 그거야?”진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그게 아니면요?”홍혜림: “사람을 치거나, 교통사고를 낸 게 아니고?”
눈에 띄게 변한 진윤의 모습을 홍혜림은 믿을 수가 없었다.집 바로 앞이 학교라 진윤은 기숙사 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집에 자주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집에서 레이싱 게임을 할 때마다 부모님의 잔소리가 끊이질 않아 진윤은 큰형 아파트에 몰래 숨어있는 것을 좋아했다. 진윤의 큰형은 일 때문에 그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9살이나 더 많은 그의 형은 가끔 부모님보다 더 진윤을 아끼기도 했다. 심지어 가끔은 진윤의 편을 들어 그의 비밀을 지켜주기도 했다. 큰형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러니 제발 눈치껏 본가로 들어오라고 홍혜림은 몇 번이고 진윤에게 얘기했었다. 사실 예비 며느리는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진윤을 본가로 불러들이는 이유는 진윤이 곁에 없으니 도무지 관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윤은 그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매번 홍혜림이 같은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그는 두 귀를 닫고 못 듣는 척 연기했다. 하지만 이번엔 홍혜림이 먼저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진윤 스스로 본가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진윤에 홍혜림은 혹시 형제가 싸우기라도 한 걸까 전화를 했지만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에 홍혜림은 생각했다. ‘이 자식 또 무슨 사고라도 치고 돌아와서 얌전한 척 연기하는 거 아냐?’‘교통사고라도 내서 배상해 줘야 하는 건가? 아니면 레이싱 카가 망가져서 새 차를 살 돈이 필요한 건가?’‘설마 사람을 친 건 아니겠지?’진윤이 집에서 열심히 공부할수록 홍혜림은 점점 더 사람을 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매일 밤 아무 일도 없는 척 진윤의 방 앞을 서성이며 생각했다. ‘먼저 잘못을 인정하면 요즘 얌전하게 지냈던 걸 정상참작해서 욕을 좀 덜해야겠어.’하지만 3일이 지나도록 진윤은 홍혜림을 부르지 않았다. ‘이상해.’‘너무 이상하잖아!’‘설마 사람을 친 것보다 더 큰 사고는 아니겠지?’‘대체 얼마를 배상해야 하는 거야?’1 주일이 지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홍혜림은 진윤의
진윤: ...강한서가 진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싫다면서 현 상황을 바꿔보려고 하지도 않은 거야?”진윤: ...‘왜 선생님께 혼나는 기분이 드는 거지? 진지하게 핵심만 꼬집고 있잖아.’입을 달싹이던 진윤은 변명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진윤은 그동안 어떻게 반항해야할지,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강한서가 말했다. “네 인생은 네 거야. 네가 열심히 살든, 대충 살든 네 하루하루는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어. 네 태도에 따라 싫었던 그 경험들이 사라지지 않아. 단지 네가 싫다는 이유로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않고 대충 흘려보냈을 뿐 그것들은 계속 존재해.”“대충 공부해서 대충 졸업하면 또 대충 취직이나 하겠지. 아니면 아예 너희 회사로 입사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다음에? 그렇게 평생을 대충 흘려보낼 거야? 그게 네가 원하는 인생이야?”멍하니 강한서를 쳐다보던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아뇨.”부모님이 선택해준 전공이 싫어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얼른 졸업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강한서의 말처럼 졸업 후엔? 전공에 맞는 직업을 찾아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갈까, 아니면 부모님 회사에 입사해 되는대로 살아갈까. 어떤 선택이든 그건 진윤이 원하는 인생은 아니었다. 4년이란 시간을 허무히 흘러 보내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전 이미 3학년이에요. 전과를 하기엔 늦었잖아요. 이젠 뭘 하려고 너무 늦은 것 같아요.”속상한 듯 대답하는 진윤의 말에 한현진이 말했다. “진윤 씨는 완전 MZ세대잖아요. 이제 갓 이십 대 초반인데 뭘 해도 늦지 않은 나이예요. 너무 빨리 본인의 가능성을 단정 짓지 말아요. 60세에 대학생이 됐다는 기사 못 봤어요?”“진윤 씨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도 늦었다고 생각 안 하는데, 진윤 씨가 왜 겁을 내요?”“전...”입술을 달싹이던 진윤이 한참이 지나서야 한숨을 내뱉었다. “두 사람 문제아 갱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