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서는 달콤한 한현진의 말에 사정없이 무너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켰다. “나 달래려고 일부러 이렇게 말하는 거지?”한현진의 눈빛에 속상함이 스쳤다. 그녀는 손을 내리며 나긋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날 못 믿겠으면 과일 파시는 아주머니께 데려다줄게. 아주머니께 여쭤봐. 어떤 한라봉이 더 단지. 그러면 알 수 있잖아. 내가 널 속인 건지 아닌지.”강한서는 얼른 한현진의 손을 잡아 한라봉 조각을 입에 넣으며 웅얼거렸다. “안 믿는다고 안 했어.”한현진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그녀의 말처럼 한라봉은 달콤했다. 마치 꿀을 먹은 것처럼, 달달한 향이 마음까지 스몄다. 한현진이 활짝 웃으며 한라봉을 마저 까 강한서에게 건넸다. 화가 쉽게 풀리는 건 강한서 최대의 우점이었다. 큰 게 맛있는지, 아니면 작은게 맛있는지는 사실 한현진도 잘 몰랐다. 과일 파는 사람이야 당연히 모두 맛있다고 할 테였다. 하지만 그녀의 말재간만 있다면 오늘 누가 어느 한라봉을 가지든 한현진은 어떻게든 모두가 원하는 방향으로 상황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다만 강한서는 이것을 사탕발린 말이라고 표현했고 한현진은 그 평가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이런 능력을 “대화의 기술”이라고 불렀다. 한라봉을 다 먹은 강한서가 휴대폰을 꺼내 인터넷에 검색했다는 건 한현진이 모르는 또 다른 에피소드였다. 인터넷을 뒤지던 강한서는 드디어 마케팅 피드 하나를 발견했다. 그 피드엔 꽤 “전문”적인 용어로 작은 한라봉이 큰 한라봉보다 맛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했다. 강한서는 그 피드를 캡쳐한 후 송민준에게 메시지를 전송했다. 지고는 못 사는 한주 남자들이었다. ——한현진의 부탁을 받고 쓰기 시작한 차미주의 대본은 이미 7, 80% 정도 완성 되었다. 차미주는 한현진에게 첫 피드백을 받고 이런저런 디테일을 추가한 후 대본의 완성도를 높여야 했다. 수년간의 보조 작가로써의 경력은 괜히 쌓은 것이 아니었다. 요즘 따라 인터넷엔 재벌가의 원한을 주제로
강한서가 생선 가시를 바르며 말했다. “우리가 아무 것도 안 한 건 아니잖아. 현진이가 돈 드렸잖아.”한성우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그 돈은 나랑 형수님이 만든 판에서 네 삼촌이 전부 토해냈잖아. 그걸 줬다고 할 수 있는 거야?’한현진은 애초부터 통쾌하게 돈을 줄 생각이 없었다. 한성우는 강한서가 그것도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현장에서 두 사람을 검거했으니 한성우는 강한서가 한현진과 싸울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양시은 딸의 약혼식에서 있었던 일이 강한서에게는 큰 상처였던 모양이었다. 그는 정말 두 번 다시 신씨 가문의 일에 개입할 생각이 없었다. “넌 그저 지켜본다고 해도 민서가 그러겠어? 만약 민서가 나섰다고 형수님이 너에게 화풀이하면 어떡해?”차미주와 수다를 떨고 있던 한현진이 갑자기 틈을 내 한성우의 말에 대답했다. “이간질 하려고 하지 마요.”‘스토리 의논하던 거 아니었어? 이렇게까지 목소리를 낮췄는데도 들린다고?’한성우가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강한서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들었지? 이간질하지 마.”차미주도 한성우를 노려보았다. “수다쟁이 같은 인간아. 가는 곳마다 말이 많지, 하여튼.”“...”‘몸까지 줬는데, 지금은 내가 남이 된 거야?’‘좋네, 좋아, 아주.’점식 식사는 2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그 사이 차미주는 드디어 전체 줄거리를 확정했다. 대본은 완성도는 물론 구성도 논리적으로 잘 짜여 있어 강한서조차도 잘 썼다고 칭찬할 정도였다. 친구와 애인에게 칭찬을 받은 차미주는 자신감에 가득 찼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최우수 작가상을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싶었다.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신난 차미주를 보는 한성우의 마음도 사르르 녹아내렸다. 사실 차미주는 대본을 쓰는데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업계가 그랬다. 어린 작가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그저 돈 몇 푼 벌려고 실력은 없지만 노이즈 마케팅에 강한 쓰레기들의
웹 드라마 대본의 판권은 사실 돈이 되지 않았다. 400만 원에서 600만 원 사이가 일반적인 저작권료였다. 흥행한 작품이 있는 작가라면 2000만 원 이상의 저작권료를 요구할 수 있었다. 혹은 마음씨 좋은 제작사를 만난다면 드라마로 벌어들인 수익의 일부분을 나눌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400~600만 원을 받고 판권을 넘겨야 했다. 한성우가 웃으며 말했다. “너에게 이 정도 돈을 주고 사온 판권으로 내가 100배 이상의 수익을 낼 수 있다면 믿을 거야?”“그래도 시세에 따라야지.”한성우의 말을 믿긴 했지만 공과 사는 구분해야 했다. “현진이 부부가 우리를 이렇게 믿고 한 번에 이렇게 많은 돈을 투자했는데 우리 욕심만 채우면 안 되잖아. 내가 2000만 원만 받을게. 너무 많이 받으며 내가 현진이 앞에서 당당하게 허리를 펼 수 없어. 얼른 계약서 수정해.”한성우는 정직한 차미주의 모습이 귀여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가 장난스레 말했다. “난 매번 이런 식으로 강한서에게서 돈을 뜯었어.”차미주가 한성우를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언제든 강한서와 너와 절교하려고 한대도 넌 억울할 거 없어. 난 절대 돈 때문에 현진이와 갈등을 빚지 않을 거야. 이럴 거면 현진이에게 돈 다시 받아서 다른 제작사 찾으라고 할 거야.”한성우가 얼른 차미주를 잡았다. “그러지 마. 내가 장난한 거야. 수정할게. 수정하면 되잖아.”계약서를 수정한 후 사인에 날인까지 마친 차미주의 계좌엔 1600만 원이 넘는 계약금이 먼저 입금되었다. 세금을 뗀 후의 저작권료였다. 곧이어 차미주는 또 268억을 송금 받았다. 돈을 보낸 사람은 한성우였다. 잠시 멍해졌던 차미주가 곧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너 설마 곧 파산해? 그래서 재산을 빼돌리는 거야?”한성우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파산은 무슨 파산. 이건 내가 너한테 주는 결혼 예물이라고!”그 말에 차미주가 멍해졌다. 발꿈치를 들고 한성우의 얼굴을 손으로 감싼 차미주가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더니 한참만
차미주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한성우를 때리려고 하자 한성우는 그런 차미주의 손을 잡아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사실 그날, 네가 거짓말을 하고 도망친 후 조준 씨가 네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네가 날 속이고 있다는 걸 알았어. 난 널 전혀 몰랐거든. 하지만 그때의 난 뜨고 싶어 안달이 난 한 연예인이 날 꼬시는 신박한 수단이라고 생각했어. 아무래도 난 이렇게 잘생기고 돈도 많은 사람이잖아. 날 탐내는 사람이 너무 많았거든.”차미주는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자뻑왕.”한성우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수작 부리는 여자를 많이 봤었지만 만나자마자 품에 안겨 날 오빠라고 부르는 건 또 처음이었거든. 그래서 난 외모가 별로라 특이한 수단으로 내 주의를 끄는 거라 생각했었어.”차미주는 “외모가 별로”라는 말에 조금 기분이 언짢아졌다. 하지만 한성우에게 자신의 첫인상이 어땠었는지 너무 궁금하기도 했기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우고 그의 말에 집중했다. “넌 확실히 내 시선을 사로잡았어. 네가 날 꼬시려고 대체 어떤 수작을 부릴지 지켜봐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인파 속에서 널 한참을 찾았고 널 발견했을 때 넌 푸아그라를 가지러 손에 접시를 든 채 줄을 서고 있었어.”셰프가 직접 푸아그라를 구워줬다. 그 탓에 줄은 아주 늦은 속도로 줄어들었다. 그날 파티에 참석한 사람 또한 많았고 메인 셰프 역시 이 바닥에서 이름 꽤나 날린 유명 인사였다. 차미주는 그 셰프의 솜씨를 맛보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려왔다. 그리고 그 한 입을 맛보기 위해 기다린 사람은 그녀 한 명뿐이 아니었다. 차미주 앞엔 이미 7, 8명이 줄을 서고 있었다.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곧 차미주의 순서가 다가왔다. 셰프는 3인분 밖에 남지 않았다며 이젠 더는 줄을 서지 말라고 말했다. 그리고 차미주는 마침 그 세 번째 사람이었다. 차미주 뒤에 줄을 섰던 사람이 하나둘 흩어지고 차미주도 제일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는 맛있게 익어가는 푸아그라를 보며 셰프에게 연하게 구
화를 이기지 못한 차미주는 한밤중에 음식을 전부 뜯어 집에서 기르던 황구에게 먹였다. 그러면 그녀의 할머니는 아까운 마음에 허벅지를 치며 악독한 계집애라고 차미주에게 삿대질했다. 여자 아이다운 면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며 시집가긴 글렀다며 욕을 해댔다. 매번 밥을 먹을 때면 차미주의 사촌 오빠는 어른들이 젓가락을 들기도 전에 접시를 마구 뒤적거렸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런 사촌 오빠를 한 번도 나무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차미주가 딱 한 번, 접시에 담긴 닭다리를 건드리자 할머니는 그녀의 귀를 잡아당기며 아버지 앞에 데려가서는 “굶어죽은 귀신”이 붙은 계집애라며 욕했다. 아버지는 차미주를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넌 왜 이렇게 버릇이 없어? 어른들이 젓가락을 들지도 않았는데 누가 너더러 음식을 집으래? 배가 고프면 얼마나 고프다고 그것도 못 참는 거야? 머릿속에 먹는 것밖에 없으니 커가 뭐가 되려고 이래? 이래서 네 엄마 곁에서 크면 안 된다니까.”차미주는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가 밉다고 느껴졌다. 그 닭다리는 사실 아버지를 주려고 차미주가 먼저 집은 것이었다. 만약 차미주가 건드리지 않았다면 할머니는 닭다리 두 개를 전부 사촌 오빠에게 주었을 것이다. 김경선은 늘 차미주에게 아빠는 공부하느라 힘드시니까 영양이 듬뿍든 음식을 많이 먹어야 한다고 얘기했었다. 영양이 무슨 뜻인지 몰랐던 차미주가 오빠에게 묻자 오빠는 닭다리 하나를 차미주에게 쥐어주며 말했다. “닭다리에 영양이 많아. 이걸 먹으면 나처럼 키도 크고 똑똑해질 거야.”차미주는 식탐이 많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차미주가 식탐을 부린다고 했고 그렇게 식탐은 죄가 되어갔다. 하지만 어린 아이와 푸아그라를 나누어 먹는 차미주를 본 한성우는 식탐 부리는 녀석이 무슨 꿍꿍이가 있을 수 있겠냐고 생각했다고 한다. 사람은 이토록 서로 다른 기준과 생각이 있었다. “도둑아, 너 왜 그래?”한성우가 차미주를 불렀다. 붉어진 눈시울의 차미주를 본 한성우의 목소리에 걱정이 담겼다. 추억
그 실검의 모 플랫폼에서 수백만 명의 팔로워를 보유한 과학 기술 콘텐츠를 다루는 산군의 바람 계정에 달린 한 네티즌의 댓글에서 시작되었다. 네티즌: [내일이면 한성의 신제품 발표회네요. 이번인 기술 혁신을 이뤄냈다고 하던데 한성 신제품 리뷰는 언제 업로드하실 거예요?]산군의 바람: [리뷰 안 할 겁니다.]네티즌: [왜요?]모두가 알다시피 산군의 바람은 한성의 제품을 리뷰하면서 인기를 얻었다. 당시엔 한성에서 신제품을 출시할 때마다 리뷰 영상을 올렸고 페이스북에 제품의 장단점을 나열했다. 또 자주 강한서의 계정을 태그하기도 했고 심지어 강한서는 그의 피드에 좋아요를 누르기도 했다. 산군의 바람 본인도 자신을 한성 그룹의 무료 프로모터라고 장난스레 말하기도 했었다. 그러니 산군의 바람이 한성 그룹의 신제품 리뷰를 하지 않을 거라는 댓글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 결고 산군의 바람이 네티즌의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댓글을 달았다. [생모도 버리고 부양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이 만든 제품은 아무리 좋아도 다시는 사용하지 않을 겁니다. 과학 기술엔 도덕적 기준이 없지만 사용자에겐 지키고 싶은 선이라는 게 있으니까요.]그 댓글은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각 마케팅 계정은 하나둘 그 댓글을 리트윗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일부 내부 사정을 알고 있다는 사람들이 마케팅 계정에 강한서가 여자를 위해 생모와 결렬하고 어머니를 집에서 쫓아내고는 아는 체도 하지 않는다는 정보를 공유했다. 곧이어 의료진이라 자칭하는 사람이 계정에 피드를 업로드 했다. 그 사람은 강한서의 모친이 자신이 근무 중인 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고 2주일 동안 입원을 했었지만 강한서를 본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한성 그룹의 “전 직원”도 자신이 직접 강한서가 어머니를 회사에서 쫓아내고 일부러 만나주지 않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고 했다. 신미정의 “친구”도 일부러 계정을 개설하여 페이스북을 통해 강한서의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하면서 늑대 소굴 같은 강씨 가문에서 강한서를 힘들게
한현진은 수건을 손에 들고 강한서 얼굴에 묻은 거품을 꼼꼼하게 닦아주며 나지막이 말했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마. 넌 신제품 발표회만 잘 마무리 하면 돼. 내가 곁에 있을게.”강한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여 한현진의 콧등을 문질렀다. 그는 자신의 손을 이미 볼록하게 튀어나온 한현진의 아랫배에 올리곤 나지막이 말했다. “너희만 있으면 난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아.”한현진이 강한서의 얼굴에 입 맞췄다. “우리 여보가 최고야.”강한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부드러운 표정으로 한현진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엔 다정함뿐이었다. 한현진은 직접 강한서의 수트를 골라줬다. 그녀가 고른 넥타이는 자신이 입을 재킷과 같은 색이었다. 두 사람이 방에서 내려와 밥을 먹을 때, 강민서는 자꾸 강한서를 힐끔힐끔 쳐다보았지만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강한서의 표정이 평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어 강민서도 감히 물어볼 수가 없었다.민경하가 그들을 데리고 발표회 현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기사들이 현장을 잔뜩 메우고 있어 난리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실검을 본 후 사실 확인을 통해 조회수를 높일 목적으로 찾아 온 사람도 적지 않았다. 강한서는 그저 현장을 힐끔 쳐다본 후 바로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민경하에게 말했다. “잠시 후 현장에 보안요원을 더 파견해서 질서 유지해요. 오늘은 사람이 많아서 그 어떤 안전사고도 일어나선 안 돼요.”민경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연락하겠습니다.”강민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오빠, 아니면 발표회를 미루는 게 어때? 이 사람들 말도 안 되는 그 기사 때문에 온 게 분명해.”강한서는 강민서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덤덤하게 말했다. “발표회가 갑자기 진행된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이 이 발표회를 위해 일부러 한주까지 왔어. 아무 이유 없이 발표회를 미루면 대중들에겐 뭐라고 설명할 거야? 고작 그까짓 가정사 때문이라고 할래? 발표회는 내 개인 무대가 아니야. 한성 그룹 3년 간의 노력의 성과를 보여주는 자리야. 아무도
미세하게 표정이 변한 강단해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사실이 뭔지 중요한 게 아니야. 여론이 중요한 거지! 밖에 수많은 기자들 중 발표회를 취재하러 온 사람이 많을 것 같아, 아니면 네 스캔들 때문에 몰려 온 기자가 많을 것 같아? 이런 타이밍에 네가 무대에 오르면 대체 오늘 이 자리는 한성의 신제품 발표회인 거야가, 아니면 네 개인 기자회견장인 거야?”“삼촌, 발표회의 입장권은 이미 2주일에 전부 매진되었어요. 삼촌 말대로라면 오늘 오신 손님들은 예지 능력이라도 있어서 일부러 티켓까지 구매해 절 비난하러 온다는 건가요?”강한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삼촌, 다들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요. 저도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 아니고요. 신제품 발표를 누가 하든 아무 상관없어요. 하지만 저에게 발표 원고가 없는 건 거짓말이 아녜요. 성능 매개 변수, 연구 개발 과정, 기술 혁신까지.”강한서가 길고 가느다란 손을 올려 식지로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렸다. “전부 여기에 있거든요. 삼촌께 전부 읊어드릴 수 있지만 연세가 있으시니 기억하지 못하실까 봐 그러죠. 괜히 무대에 올라 웃음거리가 되면 어떡해요.”“너— 어른은 안중에도 없구나.”노골적인 멸시에 강단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강한서가 몸을 일으켜 강단해 앞으로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갔다. 강단해의 어깨까지 오던 장례식의 어린 소년이 점차 늘 자신을 아이처럼 대하던 자신의 우월하던 큰형과 조금씩 겹쳐보였다. 하지만 강한서는 그보다 더 날카로운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훤칠하게 큰 키는 이미 자신을 추월했고 이젠 은근히 자신을 압박하는 아우라도 풍기고 있었다. 강한서는 강단해와 30cm 정도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시선을 올려 강단해를 빤히 쳐다보았다. “삼촌. 이번 발표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굳이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알고 계시죠. 아랫사람 관리, 잘해 주시죠.”그리고 잠시 침묵을 지키던 강한서가 말을 이었다. “삼촌. 사람이 죽었다고 증거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한현진의 말에 강한서가 조용해졌다. 그녀는 손을 뻗어 강한서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눈물이 손바닥을 가득 적셨다. 발표회가 무사히 마무리된 그날 밤, 가여운 두 영혼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안방 밖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강민서는 결국 그 방문을 열 용기를 내지 못했다. 강민서의 휴대폰은 끊임없이 진동이 울렸다. 신미정이 쉴새없이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민서야, 오빠에게 얘기했어?][엄마는 네 삼촌에게 속은 거야. 누가 더 중요한지 엄마가 모르겠니? 엄만 그저 외할아버지가 남긴 회사가 이렇게 무너지는 게 안타까워서 그럴 뿐이야.][엄만 한서와 모자의 인연을 끊을 생각이 없었다. 한서는 내 아들이야. 내가 설마 걔를 버리겠니? 한현진이 날 속여서 그 각서를 쓰게 한 거야. 난 그 각서는 법적 효력이 없다는 걸 알고 사인한 건데 그 X가 이런 식으로 날 X 먹일 줄 어떻게 알았겠니.][민서야, 인터넷에 떠도는 헛소리는 보지도 마. 한서도 내 아들이야. 내가 어떻게 한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다만 한서는 너무 오랫동안 네 할머니 곁에서 자랐잖니. 할머니는 날 좋아하지 않으시고. 그러니 나도 네 오빠가 날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 가끔은 한서를 멀리했던 거야. 하지만 한서도 내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한서가 힘들면 당연히 엄마도 더 힘들지.]강민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강민서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신미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마 줄곧 휴대폰만 쳐다보고 있었던 듯, 신미정은 연결음이 들리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민서야, 우리 딸. 엄마가 부탁한 건 어떻게 됐어? 오빠한테 전부 얘기했어?”강민서가 갑자기 물었다. “엄마, 다음 주 수요일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신미정은 순간 강민서의 질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얘는, 갑자기 왜 그런 걸 묻고 그래. 엄마는 이제 나이도 많은데 그런 걸 어떻게 기억하겠니. 힌트라도 줘.”강민서가 말했다. “다음 주 수요일은 오빠 생일이잖아요, 엄마. 다른 댁 사모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송병천의 답장을 확인한 한현진은 다행이면서도 안타까운 감정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송병천의 답장에 마음이 놓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최소한 지금의 송병천은 비록 화가 나긴 했지만 아예 마음을 돌릴 수도 없는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주문 제작이야, 장인어른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해내야만 했다. 송병천에게 답장을 한 한현진은 고개를 돌려 침대에 누워있는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수트는 방금 민경하의 도움으로 벗길 수 있었다. 강한서 스스로 끌어내린 넥타이는 느슨하게 풀린 채 가슴 앞에 걸려있었다. 풀린 단추 사이로 붉게 물든 가슴이 보였다. 강한서의 안경은 여전히 그의 콧등에 걸려있었다. 날카로운 이목구비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상하리만치 부드러워 보였다. 한현진이 강한서의 옆에 누워 그의 몸에 기댄채 귓가에 속삭였다. “강한서, 강한서. 여보...”강한서는 조금 시끄러운 듯 머리에 힘을 실어 베개에 푹 파묻혔다. 위로 솟은 목 때문에 그의 목젖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강한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한현진을 유혹하고 있었다. 한현진이 손을 뻗어 강한서의 안경을 벗겼다. 그녀는 그의 이마를 살며시 쓸었다. “여보, 샤워하고 자. 나 너 못 일으켜.”강한서가 흐리멍텅한 눈빛으로 눈을 떴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흐릿한 인영에 갑자기 손을 뻗어 한현진을 끌어안고는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현진아, 현진아...”강한서가 웅얼거리며 한현진의 이름을 불렀다. 한현진의 그의 부름이 일일이 대답하며 단추를 풀렀다. “나 여기 있어.”한현진의 이름을 부르던 강한서가 또 바보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의 진지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그저 한없이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강한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현진아, 내가 해냈어. 내가 해냈어, 현진아. 현진아...”십년이었다...강한서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한성을 지지하는 모든 고객에게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내놓기까지 걸린 시간이.
송병천이 송민준을 재촉했다. 송민준은 제일 위에 있던 이모티콘을 삭제하곤 휴대폰을 송병천에게 돌려주었다. 이모티콘이 삭제된 것을 본 송병천이 순간 놀란 얼굴을 하며 물었다. “어떻게 사라진 거야?”송민준이 말했다. “인터넷 지연이 있었던 것 같아요.”송병천이 투덜거렸다. “업데이트를 하면 할수록 엉망이네.”송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송병천은 휴대폰을 들고 귀한 따님에게 답장을 보내며 송민준을 나무랐다. “너 이젠 나한테 이상한 이모티콘 보내지 마. 내가 실수로 이모티콘을 잘못 보내 네 동생이 보면 내 이미지가 깨지지 않겠어?”송민준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미지가 어떨진 모르겠지만 아빠 아이큐가 몇인지는 깨달았을 것 같네요.’송병천은 문자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는 한참 동안 어떻게 답장을 보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는 결국 오다 주운 것 같은 아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민준아, 내가 뭐라고 답장하면 현진이도 상처 안 받고 강한서에 대한 내 분노를 표현할 수 있을까?”송민준이 말했다. “엄마는 약을 주고, 아들은 술을 주네. 하나는 손자를 노리고 다른 하나는 아빠를 노리니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다 죽어야 끝나겠어, 라고 보내요.”송병천이 송민준을 걷어찼다. “X 놈의 자식!”송민준이 소파에 기대 앉아 웃음을 터뜨렸다. “대체 강한서를 사위로 받아들이시긴 할 거예요? 그럴 생각이 없으신 거면 대체 왜 강한서 체면 따위를 생각해주시는 거예요? 바로 현진이를 데려와서 평생 못 만나게 하면 그만이잖아요.”송병천이 송민준을 노려보았다.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뭐가 달라져? 네 동생이 좋다고 하잖아. 뱃속의 아이에게도 아빠는 필요해.”“그러지 마시라니까요. 아빠가 마음에 안 드시면 마지못해 사위로 받아들이셨다고 해도 결국 마음에 넘지 못한 산이 생길 거예요. 저라면 차라리 받아들이지 않겠어요. 현진이에게 다른 남자를 찾아주면 되죠. 현진이도 한서 외모에 반한 거잖아요. 우리 회사에 잘생긴 애
한성우의 말에 한현진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이런 애정 표현을 안 하면 죽기라도 하는 거야?’한현진이 한성우의 말에 대답하려는데 강한서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운이 좋긴 하지. 만약 우리처럼 1000분의 5에 가까운 확률로 쌍둥이까지 임신한다면 더 좋겠지만 말이야.”“...”한현진은 입가에 맴돌던 면박을 주려던 말을 더는 할 면목이 없었다. 한성우가 입술을 씰룩였다. “강한서, 너 이 자식. 하루라도 자랑 안 하면 죽는 병이라도 걸렸어? 그런 거냐고!”강한서가 진지하게 말했다. “죽을 수 있어.”화가 난 한성우는 바득, 소리를 내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면서 그는 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 ‘꼭 딸을 낳아서 강한서 아들을 꼬셨다가 다시 차버리게 할 거야. 몇 번이고 차버리게 할 거라고! 꼭 저 개자식이 나이를 잔뜩 먹고도 손주도 못 안게 만들 거야. 그때도 이렇게 까불 수 있는지 한 번 지켜보자고.’자리를 비운 주강운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송가람은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탓에 오늘 발표회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송민준은 발표회가 끝난 후 바로 가버렸고 송병천은 아예 하루 종일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토라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한현진이 송병천에게 좋은 와인 사진을 몇 장 보냈다. [아빠, 강한서가 일부러 아빠를 위해 남겨둔 거예요.]송병천은 답장이 없었다. 하지만 한현진이 남긴 문자 옆의 1이 사라졌다. 한성우와 민경하가 술에 취한 강한서를 차까지 부축하고 나서야 송병천의 답장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한현진에게 하찮아 보이는 표정으로 읍하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그 이모티콘을 본 한현진은 어리둥절해졌다. 한현진이 그 이모티콘을 보낸 의미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송병천이 또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삭제된 메시지입니다.]한현진은 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송병천: [삭제된 메시지입니다.]1분 후.송병천: [삭제된 메시지입니다.]2분 후.송병천: [삭제된 메시
“빨리 뒷이야기를 마저 해봐요.”한현진이 다그치며 말했다. “뒷이야기는 더 막장이에요. 장준은 첫사랑도, 대타도 버릴 수 없었어요. 두 여자는 장준을 빼앗기 위해 피 터지도록 싸웠죠. 마지막엔 첫사랑이 대타가 마약을 했다고 신고를 했고 대타는 그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사라졌어요.”“대타가 사라지자 다들 장준은 이제 첫사랑만 볼 거라고 생각했어요. 전에 가족들과 그렇게 갈등을 빚은 것도 전부 첫사랑 때문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장준은 그저 조용하기만 했어요. 오히려 장씨 가문에서 장준의 첫사랑이 그의 집안에 발을 들이는 일은 없을 거라는 뜻으로 얘기했죠. 게다가 그 일이 있고 몇 개월 후 장씨 가문에서는 장준과 전고현의 선 자리를 마련했어요.”“장준이 몇 년 동안 죽도록 난리를 피운 덕에 집안에서는 장준에게 완전히 실망하고 진작 포기해버렸어요. 장준이 대를 이어 주면 그 아이를 후계자로 키울 생각이었지만 장준이 마약 때문에 몸을 완전히 망쳐버린 탓에 그럴 수도 없었죠. 병원에 가서 검사를 전부 생식 능력이 전혀 없었어요. 장준이 아이를 낳지 못하니 아버지라도 나서야 했던 거죠. 그러다 진씨 가문에 그런 일이 생기면 결국 그 혼사도 무산되었지만요.”“하지만 이젠 장준의 대타가 돌아왔어요. 타락했던 예전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는 걸 보면 대타에게 마음을 줬다는 소문이 사실이긴 한가 봐요. 만약 제가 그 첫사랑이었으면 아마 화가 나서 죽어버렸을지도 몰라요. 얼마나 오랜 시간을 들인 계획인데, 결국엔 내 손을 떠나 다른 사람 좋은 노릇만 했잖아요.”이야기를 들은 한현진과 강한서는 조금 멍해졌다. 한현진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성우 씨는 어떻게 이렇게 자세하게 알고 있는 거예요?”한현진은 비록 이 일엔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그럼에도 사람을 시켜 장준의 일을 조사하도록 했다. 그러나 장준의 첫사랑에 관한 이런 막장 스토리는 전혀 전해들은 바가 없었다. “에이, 뭐 이런 것쯤이야.”말하는 한성우는 어쩐지 눈을 피하는 것 같았다. “예전에 술 마
멈칫한 한현진과 강한서가 홱 고개를 돌려 뒤에서 중얼거리는 한성우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에 깜짝 놀란 한성우가 말했다. “왜 날 그렇게 노려봐?”한현진이 다급하게 물었다. “무슨 소문이요? 성우 씨는 뭘 알고 있는 거예요?”한성우가 눈을 깜빡였다. “소문에 장준이 첫사랑 대타와 사랑에 빠졌다고 하더라고요. 그 대타가 사라진 1년 동안 장준은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것처럼 지냈대요. 그리고 대타가 돌아오자 바로 활기가 넘쳐흐른다고 하더라고요. 그 모습에 빈정 상한 첫사랑이 매일 대타를 괴롭히고 있고.”한현진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강한서는 그런 한현진보다 더 놀란 눈치였다. 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장준은 술, 여자, 도박, 약 안 좋은 건 전부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 인간에게도 첫사랑이 있어요?”“형수님은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세요. 병신에게도 청춘은 있어요. 게다가 장씨 가문 정도면 명문가에서는 싫다고 할지 몰라도 조건이 조금 떨어진 집안마저도 거절하겠어요?”그리고 한성우는 두 사람에게 끝장판 막장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장준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첫사랑이 있었다. 그 여자는 장준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던 사람의 딸이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며 감정을 쌓아왔다. 두 사람에게 사랑이 싹 트던 초창기, 장준의 가족들은 두 사람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단순히 장준이 그 여자를 가지고 놀다 질리면 그만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생각보다 꽤 수완이 좋았던 것인지 장준은 그 여자의 일이라면 죽자고 달려들었다. 그저 장난감에 불과한 여자였다. 곁에 두고 노는 건 상관없었지만 그 여자가 장준의 안방까지 차지하려고 한다면, 장씨 가문에서는 절대 가만히 놔둘 수는 없었다. 그러니 장씨 가문에서는 돈을 주고 수작을 부려 그 여자를 내쫓았다. 하지만 여자가 사라지자 장준은 미친X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그 여자가 떠나며 남긴 편지 때문이었다. [이번 생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아. 다
한현진은 조금 전 대화 내용은 간략하게 강한서에게 알려주었다. 강한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문샤론? 그런 생각은 어떻게 하는 거야?”이야기는 전부 한현진이 즉흥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하지만 전부 그럴 듯하게 짜임새가 있는 스토리였다. ‘역시 대단한 여자야.’한현진이 말했다. “간민혜 씨는 죽기 직전까지도 강운 씨에게 한 마디 말도 남기지 않았어. 대체 그 이유가 뭔지, 우린 모르지만 어쩌면 강운 씨라면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사실 난 줄곧 강운 씨 집안에서 누군가 이 일에—”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바닥을 꾹꾹 누르며 조용히 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멈칫하던 한현진은 강한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정설희, 아니. 정서희가 보였다. 그녀는 장준과 손을 잡고 피로연 현장에 나타났다. 지금의 정서희는 예전의 정설희와 같은 스타일의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다. 눈웃음을 짓는 눈가엔 은근한 색기가 흘렀다. 아름다운 이목구비와 화려한 옷차림은 자심이 병원에서 만났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완전히 똑같은 사람인 것 같았다. 함께 등장한 정서희와 장준은 스킨십이 제법 자연스러웠고 꽤 친근한 모습이었다. “강 대표님, 발표회 무사히 마치신 거 축하드려요.”잔을 들고 다가온 장준이 웃으며 강한서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한현진은 순간 약쟁이였던 장준의 상태가 지난번 결혼식보다 너무 많이 나은 것을 발견했다. 광대뼈도 예전처럼 선명하게 튀어나오지 않았고 눈빛에도 생기가 돌았다. 여전히 삐쩍 마른 몸이었지만 정장을 입으니 제법 봐줄만 했다. 아무도 이런 모습의 장준을 보고 약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강한서가 손을 들어 장준과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고마워요.”장준의 시선이 한현진을 향했다. 깊은 눈매에는 나른한 기색이 묻어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정서희를 보며 물었다. “두 사람 동창이라고 하지 않았어? 현진 씨는 당신을 보고도 왜 이렇게 냉담한
주강운이 엄지로 컵을 쓸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웃으며 덤덤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어쩌면 지금도 보고 있겠죠. 또 어쩌면 그저 장난으로 한 얘기였을 수도 있고요.”시선을 내린 한현진은 더는 말이 없었다. 주강운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아이들을 보며 갑자기 물었다. “전에 장례식에 있었던 꼬마 아가씨는 아직도 한서가 돌보고 있어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한서가 아름드리로 데려왔어요.”주강운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아이 가족에게 보내지 않았어요?”한현진이 말했다. “민 실장님 말로는 아이는 직계 가족이 없다고 하던데요. 다른 가족들도 아이를 키우겠다고 하는 사람이 없어서 고아원에 보내자니 강한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냥 잠시 자기 옆에 두고 보살피기로 했어요.”주강운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개인 입양은 안 알아봤어요?”한현진이 웃으며 말했다. “저야 그러고 싶죠. 전에 강한서에게 그 얘기를 꺼냈다가 한바탕 싸웠어요. 저더러 아이에게 아량을 베풀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그 아이와 강한서 유전자 검사를 하지 않았다면 강한서 아이가 아닐까, 의심하고도 남았을 거예요. 어찌나 친자식처럼 아끼는지. 됐어요. 그저 어린 아이 일뿐인걸요. 착하고 말도 예쁘게 하는 애예요. 키우고 싶다면 키우죠, 뭐.”주강운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긍정적이네요.”한현진이 눈웃음 지었다. 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서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서도 가끔 이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자신을 “감시”하는 사람을 쳐다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사실 강한서가 사고를 당하기 전 그 아이에 관해 얘기를 꺼낸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때 전 그 아이를 만난 적이 없었어요. 강한서가 저에게 알려준 이름도 은서가 아니라 문샤론이었어요. 그 이름은 은서 엄마가 지은 거라고 했어요. 은서 부모님이 무궁화가 예쁘게 폈을 때 만났대요.”한현진은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낭만적인 러브스토리겠죠. 아쉽게도 그 끝이 안 좋긴 했지만 말이예요.”주강운
왜 굳이 이미 취한 강한서를 방까지 데려다줬을까? 차라리 로비에서 기다리는 편이 더 나았을 텐데 말이다. 설사 강한서를 편히 쉬게 하려던 의도였다고 해도, 강한서와 함께 방에서 기다리면 될 것을 왜 굳이 로비에서 자신을 기다렸던 걸까? 방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는 두 개밖에 없었다. 한현진이 헷갈려 다른 엘리베이터를 탈 리가 없었다. 강한서는 줄곧 유씨 가문 사람들을 혐오했었다. 그러니 그는 멀쩡한 정신엔 유현아가 가까이 다가올 수 있는 그 어떤 기회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유현아도 아주 멍청이는 아니었다. 만약 유현아에게 강한서를 유혹할 능력이 있었다면 진작 그를 손에 넣었을 것이다. 그렇게 오래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당시 주강운이 물을 마신 건 두통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현진이 강한서가 바람피우는 현장을 덮칠 수 있도록 시간을 끌기 위한 행동이었던 걸까?그때의 일을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한현진의 마음은 점점 더 서늘해졌다. 주강운은 대체 어떤 마음으로 자기 첫사랑을 치어 죽인 사람을 도왔던 걸까?“현진 씨?”창백해진 얼굴로 한참을 말이 없는 한현진을 본 주강운이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한현진의 손가락이 움찔 떨렸다. 그녀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며 마음을 다잡았다. 손을 뻗어 주강운이 내민 잔을 받으며 말했다. “고마워요.”생기 있는 얼굴이었지만 낯빛이 어두웠다. 이마에도 땀이 송글 맺혀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놀란 모양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았지만 정작 입을 여니 그 모든 마음은 그저 한 마디의 가벼운 인사로 흘러나왔다. “요즘 잘 지냈어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지냈어요.”잠시 말이 없던 한현진이 말을 이었다. “얼마 전 저녁에 누군가 강운 씨 휴대폰으로 저에게 전화를 했었어요. 강운 씨 취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날 몸이 안 좋아서 안 갔는데, 집에 잘 들어갔어요?”한현진은 조심스레 그 얘기를 꺼냈다. 마치 주강운이 왜 오지 않았냐고 따질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그렇게 선을 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