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진은 수건을 손에 들고 강한서 얼굴에 묻은 거품을 꼼꼼하게 닦아주며 나지막이 말했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마. 넌 신제품 발표회만 잘 마무리 하면 돼. 내가 곁에 있을게.”강한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여 한현진의 콧등을 문질렀다. 그는 자신의 손을 이미 볼록하게 튀어나온 한현진의 아랫배에 올리곤 나지막이 말했다. “너희만 있으면 난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아.”한현진이 강한서의 얼굴에 입 맞췄다. “우리 여보가 최고야.”강한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부드러운 표정으로 한현진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엔 다정함뿐이었다. 한현진은 직접 강한서의 수트를 골라줬다. 그녀가 고른 넥타이는 자신이 입을 재킷과 같은 색이었다. 두 사람이 방에서 내려와 밥을 먹을 때, 강민서는 자꾸 강한서를 힐끔힐끔 쳐다보았지만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강한서의 표정이 평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어 강민서도 감히 물어볼 수가 없었다.민경하가 그들을 데리고 발표회 현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기사들이 현장을 잔뜩 메우고 있어 난리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실검을 본 후 사실 확인을 통해 조회수를 높일 목적으로 찾아 온 사람도 적지 않았다. 강한서는 그저 현장을 힐끔 쳐다본 후 바로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민경하에게 말했다. “잠시 후 현장에 보안요원을 더 파견해서 질서 유지해요. 오늘은 사람이 많아서 그 어떤 안전사고도 일어나선 안 돼요.”민경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연락하겠습니다.”강민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오빠, 아니면 발표회를 미루는 게 어때? 이 사람들 말도 안 되는 그 기사 때문에 온 게 분명해.”강한서는 강민서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덤덤하게 말했다. “발표회가 갑자기 진행된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이 이 발표회를 위해 일부러 한주까지 왔어. 아무 이유 없이 발표회를 미루면 대중들에겐 뭐라고 설명할 거야? 고작 그까짓 가정사 때문이라고 할래? 발표회는 내 개인 무대가 아니야. 한성 그룹 3년 간의 노력의 성과를 보여주는 자리야. 아무도
미세하게 표정이 변한 강단해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사실이 뭔지 중요한 게 아니야. 여론이 중요한 거지! 밖에 수많은 기자들 중 발표회를 취재하러 온 사람이 많을 것 같아, 아니면 네 스캔들 때문에 몰려 온 기자가 많을 것 같아? 이런 타이밍에 네가 무대에 오르면 대체 오늘 이 자리는 한성의 신제품 발표회인 거야가, 아니면 네 개인 기자회견장인 거야?”“삼촌, 발표회의 입장권은 이미 2주일에 전부 매진되었어요. 삼촌 말대로라면 오늘 오신 손님들은 예지 능력이라도 있어서 일부러 티켓까지 구매해 절 비난하러 온다는 건가요?”강한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삼촌, 다들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요. 저도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 아니고요. 신제품 발표를 누가 하든 아무 상관없어요. 하지만 저에게 발표 원고가 없는 건 거짓말이 아녜요. 성능 매개 변수, 연구 개발 과정, 기술 혁신까지.”강한서가 길고 가느다란 손을 올려 식지로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렸다. “전부 여기에 있거든요. 삼촌께 전부 읊어드릴 수 있지만 연세가 있으시니 기억하지 못하실까 봐 그러죠. 괜히 무대에 올라 웃음거리가 되면 어떡해요.”“너— 어른은 안중에도 없구나.”노골적인 멸시에 강단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강한서가 몸을 일으켜 강단해 앞으로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갔다. 강단해의 어깨까지 오던 장례식의 어린 소년이 점차 늘 자신을 아이처럼 대하던 자신의 우월하던 큰형과 조금씩 겹쳐보였다. 하지만 강한서는 그보다 더 날카로운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훤칠하게 큰 키는 이미 자신을 추월했고 이젠 은근히 자신을 압박하는 아우라도 풍기고 있었다. 강한서는 강단해와 30cm 정도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시선을 올려 강단해를 빤히 쳐다보았다. “삼촌. 이번 발표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굳이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알고 계시죠. 아랫사람 관리, 잘해 주시죠.”그리고 잠시 침묵을 지키던 강한서가 말을 이었다. “삼촌. 사람이 죽었다고 증거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회사의 수익이 직원의 수입과 바로 직결되니 직원들의 원동력을 충분히 끌어올릴 수 있었다. 주식이 낳은 수입으로 인재를 회사에 묶어두고 그렇게 묶어둔 인재로 기술을 발전시켰다. 그 10여 년 동안 한성 그룹은 강단한 손에서 첫 전성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강단한이 사망하고 강단해가 그 자리에 앉으며 그 규정은 하나씩 변해갔다. 강단해는 몇 몇 대주주들과 상의하여 직원 손에 있던 주식을 꽤 많이 회수해왔다. 한 기업 대부분의 재부가 몇몇 임원 손에 들어갔으니 발전은 당연히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강단한이 그동안 회사를 탄탄하게 키워왔고 정인월이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회사에서 강단해를 누르고 있었기에 한성 그룹은 그렇게 오랜 세월을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10년 전, 강한서가 나타나기 전까지 쭉 지속되었다. 처음엔 아무도 강씨 가문의 장손을 취급해주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아직 졸업도 하지 못한 청년이 무슨 바람을 일으킬 수 있겠냐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강한서는 10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그들에게 젊은 피의 무서움을 증명했다. 강한서가 회자 자리에 오르는 걸 강단해가 꺼리는 이유는 강한서가 아버지의 못 다 이룬 꿈을 이어갈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주식이 여기저기 흩어지게 되면 수입은 줄어들 것이고 그렇다면 강단해는 더 이상 인심을 살 수 없게 된다. 전 직원이 회사의 주식을 갖도록 하는 것, 모든 회사의 대표가 이런 패기와 능력을 갖춘 건 아니었다. 한성 그룹은 국내에서도 랭킹 3위 안에 드는 회사였다. 하지만 지금의 강한서든 당시의 강단해든 단 한 번도 세계 부자 순위에 이름을 올린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직원 소유 제도를 실시하는 기업 중에서 한성은 단연 1위를 차지했다. 강한서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발전과 기술 혁신이었다. 그는 주식을 직원에게 나눠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자금을 기술 연구 개발에 투자했다. 돈은 그에게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강한서가 원하는 건 한성 그룹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것이었다.
인터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들 프로패셔널한 기자들이라 아무도 인터넷에 떠도는 기사에 대해선 질문하지 않았다. 강한서는 처음으로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많은 기자들은 오늘이 첫 만남이었다. 다들 한성 그룹의 핵심 부서를 이끄는 사람이 젊고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외모까지 출중하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연예계의 웬만한 연예인보다도 준수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가진 아우라는 연예인이 감히 비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차분하고 진중한 것은 물론 가벼운 유머감각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소문으로 듣던 인정사정없는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다. 전업적인 질문에도 강한서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이번 인터뷰는 전처럼 한성 그룹과의 사전 미팅을 거쳐 합의하에 진행된 것이 아니었다. 이번 인터뷰에서의 질문은 전부 기자들이 인터넷으로 모집한 것이었다. 신제품에 대한 전문가의 의문도 있었고 마니아층의 제품에 대한 기대 섞인 질문도 있었다. 강한서는 모든 질문에 성의 있고 또 그럴듯하게 대답했다. 인터뷰 도중 여자 스태프 한 명이 물을 가져오며 발을 삐끗했다. 그 여자는 그대로 강한서의 품으로 넘어졌고 그는 손을 들어 상대방을 부축했다. 여자의 얼굴을 마주한 강한서는 잠시 멍해졌다. 그러나 그는 곧 손을 떼고 대답을 이어갔다. 여자 스태프가 얼굴을 붉히며 불려나갔다. 대기실에 있는 한현진은 생방송을 통해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한현진은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강민서는 기가 막힌다는 듯 대놓고 한현진에게 물었다. “넌 눈이 멀었어?”한현진이 강민서를 힐끔 쳐다보았다. “맞고 싶어?”한현진을 노려보던 강민서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딱 봐도 저 여자가 일부러 오빠 몸 위로 쓰러진 거잖아. 평지에서 넘어지는 사람이 어디 있어?”한현진이 태연하게 말했다. “힐이 높아서 실수로 발목을 삐는 것도 흔히 있는 일이야. 오늘 발표회는 모든 일환이 다 너무 중요해. 이런 자리
한현진이 수수료를 얘기하자 머릿속으로 잠시 계산기를 두드리던 한성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좋아요. 나중에 두 개 구매할게요.”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약속한 거예요. 이따 발표회 끝나면 계약서에 사인하러 가요.”말을 마친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고여정을 쳐다보았다. “여정 씨, AI 로봇 좋아해요...?”한성우가 눈을 씰룩였다. ‘아주 현모양처 납셨네. 발표회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주변 친구들에게 예매부터 받다니.’현장의 불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리고 곧 무대 위의 스크린이 켜지며 한성 그룹의 로고가 나타났다. 사면팔방에 위치한 스피커에서는 전형적인 아나운서 톤으로 발표회의 시작을 알리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한성 그룹은 오프닝 공연으로 국립교향악단을 초청해 한성 그룹 소비자 브랜드의 주제곡인 [꿈을 좇는 사람들] 라이브를 선보였다. 웅장한 기세의 합창은 현장의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신제품 발표회의 개박을 장식했다. 강한서 부양 포기, 한성 보이콧 등 단어가 난무하던 발표회의 라이브 방송 댓글은 전 국민에게 익숙한 선율이 울려 퍼지자 점차 [어나더레벨 한성 발표회]라는 단어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한성 그룹은 국내 스마트 기기 산업 개발의 선두에 서 있는 회사로 가입된 사용자만 수천만 명에 달했다. 한성의 제품은 가전제품부터 자동차, AI 집사까지 이미 국민 생활의 곳곳에 스며들었다. 게다가 끊임없이 기술을 업그레이드하면서 새로운 혁신을 이끌어왔기에 한성은 수많은 충실한 유저를 보유하고 있었다.그들은 한성이 한 발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도록 독촉할 뿐만 아니라 한성이 3년 동안 누적하다 제출한 성과에 큰 기대를 갖고 있었다. 강한서가 말했듯이 사람들은 그의 사생활에 관심을 가질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다. 진심으로 오늘의 이 발표회를 기다려온 사람들은 결코 댓글로 보이콧이나 외쳐대는 인간이 아니었다. 격앙된 대합창은 순간 관중들의 마음을 벅차오르게 했고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랐다. 마지막 음이 공기 중에 흩어졌
시작부터 이번 신제품 발표회의 히든카드를 내던졌으니 뒤이어 공개될 제품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치는 당연히 한껏 끌어올려졌다. 한성 그룹은 심지어 연예계에서 오스카 공로상 수상으로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명망 높은 배우를 홍보모델로 내세웠고 발표회에 초청했다. 전자제품과 드론의 전시를 마치자 예정되었던 발표회의 시간은 벌써 절반이 지났다. 하지만 현장의 열기는 여전히 식지 않았다. 심지어 누군가 사람들을 대동하여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AI 집사! AI 집사!”그 모습에 강한서가 씩, 미소 지었다. 안 그래도 잘생긴 얼굴의 그가 웃기까지 하자 무대의 조명마저도 부드러워지는 것 같았다. 자리에 앉아 무대 위의 명석하고 재치까지 넘치는 남자를 보고 있는 한현진의 심장은 쿵쾅쿵쾅 뛰었다. 그녀의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무대 위에서 빛나는 저 남자가 바로 내 남편이라니.’자긍심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끓어올랐다. 그녀는 순간 사람들이 왜 무대로 뛰어올라가 공개 프러포즈를 하는지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내 남자라고 선언하지 못하는 것이 한탄스러울 뿐이었다. 사랑에 정신줄을 놓은 이성을 가다잡고 한현진은 다시 발표회에 몰입했다. 강한서가 말했다. “사실 오늘 이 제품을 공개할 계획은 없었어요. 하지만 이건 여러분과의 오래된 약속이니까요. 또 이 제품은 이번 신제품 중 제일 기대되는 제품 1위에 선정된 아이이기도 해요. 자, 올라요.”무대의 조명이 출구 쪽을 비추었고 관객들은 숨을 죽이고 이목을 집중했다. 잠시 후, 베이백스와 비슷한 체형이지만 커다란 눈을 가진 로봇이 무대 뒤에서 미끄러지며 다가왔다. 바퀴 달린 로봇의 등장에 사람들의 얼굴에는 순간 실망의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계단 앞에 도착한 루나는 로봇 다리를 내딛어 스스로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걸어서 내려와.”루나는 어린 아이 같은 목소리로 불쌍하게 입을 열었다. “아빠, 걷는 건 배터리 소모가 많아요.”루나의
한성우가 뭔가를 알아차린 듯 눈을 번뜩였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아주머니를 강한서 인생에서 없애버릴 계획이었던 거예요?”한현진이 태연하게 말했다. “강한서가 그 여자의 노후자금을 주는 건 말릴 생각이 없어요. 하지만 그 여자가 그깟 혈연관계를 빌미로 강한서를 진흙탕에 끌어들이려 한다면 전 그런 기회조차도 줄 생각이 없어요.”말하며 한현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신씨 가문이 파산했으니 잘 됐네요.”가족마저 등을 돌리고 아무 것도 남지 않은데다 명성까지 전부 잃었으니 이제 신미정은 그 어떤 파장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한현진의 눈에 갑자기 앞줄에 앉아 있는 강단해의 모습이 들어왔다. 강단해를 본 한현진이 조용해졌다. ‘저 아저씨도 있었지, 참. 작은어머니는 저 시동생과 형수 사이의 일을 전혀 모르시는 건가?’한성 그룹의 발표회는 인공지능 전기차를 피날레로 끝을 맺었다. 클래식 음악이 다시 울려 퍼지고 발표회장의 불빛이 밝아졌다. 한성 그룹의 임원들이 차례로 무대에 올라 수많은 취재진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가 끝난 후에는 피로연도 준비되어 있었다. 이 인터뷰는 신제품 관련 질문을 받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도 스캔들이나 캐려는 기레기는 존재했다. 다른 사람과는 정상적인 질문으로 인터뷰를 진행하던 기자들이 강한서의 차례가 오자 질문의 노선을 바꿨다. “강 대표님, 요즘 [산군의 바람]이라는 유명 페이스북 계정에서 언급한 강한서 대표님의 생모 부양권 포기 발언이 사실인가요?”“강 대표님, 인터넷에 떠도는 대표님 관련 스캔들이 이번 신제품의 매출에 영향이 있을 것 같나요?”“강 대표님께서 생모를 버리셨다는 얘기가 인터넷에서 큰 이슈를 얻고 있습니다. 네티즌들이 댓글에 한성 제품 보이콧을 외치고 있는데, 이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기레기들은 마치 개떼처럼 모여들어 강한서를 에워쌌다. 그들은 마이크를 강한서의 코앞까지 들이밀었다. 그야말로 꼴불견이었다. 강한서는 연예인도 아니었던지라
그 키워드들은 하나씩 검색어 순위에 올랐다. 게다가 관련 피드의 내용은 [산군의 바람]의 한 마디에 아무런 실질적인 증거 없는 단순한 언변으로 여론 몰이를 한 계정의 피드와는 전혀 달랐다. 관련 피드에는 모든 증거가 차례대로 나열되어 있었다. 신미정이 직접 서명하고 손도장까지 찍은 부양 포기 각서, 계좌 이체 기록, 신표가 도박했다는 증거와 신미정이 신표를 대신해 도박 빚을 갚은 영수증까지 전부. 네티즌들은 그 증거들은 한데 모아 간단하게 정리했다. 증거로 올라온 캡쳐본만으로도 신미정이 400억에 가까운 돈을 가져갔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돈은 신미정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데 사용된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전부 친정집 동생들을 도와주는 곳에 쓰였다. 인터넷은 순간 토론의 열기로 뜨거워졌다. [부동산 매매도 없이 1년 사이 400억이라니. 역시 재벌은 우리 같은 서민이 상상할 수 있는 삶이 아니야.][한 달에 20억이 넘는 부양비라... 저희 엄마가 이 기사를 못 보게 해주세요. 제가 드리는 20만 원은 엄마에 대한 모욕이라 오해하실까 봐 걱정이에요.][아들은 다리 밑에서 주워온 자식이고, 동생은 친동생네. 감정 완료.] [여론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네요. 한성 홍보팀 정말 대단한데요. 몇 시간 사이 신제품 인기도 급상승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쉽게 강한서 대표의 결백을 주장하다니. 생각들 좀 해봐요. 벼랑 끝에 몰린게 아니라면, 어떤 엄마가 이런 가정사를 인터넷에 폭로하겠어요? 본인 친동생에게 주머니까지 탈탈 털어 주는 사람이 아들에겐 왜 이렇게 각박하게 굴겠어요? 진위를 떠나서, 강한서 대표는 정말 아무 잘못이 없을까요?][사건의 진위를 따지지 않으면 뭘 따지겠다는 거야?][역시 세상은 넓고 미친 X는 많네. 엄마가 강한서 대표 돈으로 삼촌 도박 빚을 갚아줬는데 그 사실을 안 강한서 대표가 자금 지원을 끊었다는 이유로 엄마는 모자 관계를 끊고 심지어 인터넷에 버림받았다는 루머까지 퍼뜨렸는데, 이와중에 강한서 대표는 자기가 뭘 잘못했는
한성우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형수님도 양심은 없으시네요. 아무리 그대로 강운이가 형수님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잖아요. 이렇게 이용하시면 마음에 안 찔리세요?”한성우의 말에 한현진의 말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좋아하면 강한서를 자극하기 위해 절 간민혜 씨 모습으로 분장시킬 수 있어요? 저와 주 변호사님은 그저 지인 딱 그 정도예요. 말 할 거예요, 말 거예요? 말 안 할 거면 됐어요.”‘강한서에게 덫을 놓은 건 내가 평생 기억하고 있을 거야.’말을 잘못 꺼냈음을 인지한 한성우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얘기하면 되잖아요. 왜 화를 내고 그래요. 하지만 제가 얘기한다고 해서 강운이가 나설 거란 보장은 저도 못해요.”한현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할 거예요.”주강운이라는 사람의 모든 면을 잘 안다고 할 수 없었지만 한현진은 변호사로서의 그의 능력은 의심한 적이 없었다. 정서희의 의뢰를 받고 정설희 사건을 조사하고 있으니 당연히 장준도 눈여겨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제 발로 찾아온 기회는 주강운은 거절할 리가 없었다. 주강운에게 전화해 안부를 묻던 한성우는 돌고 돌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불법 레이싱 교통사고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대. 전부 이제 갓 20살이 된 어린 애들이던데 안타깝게 됐어. 학교나 열심히 다닐 것이지 레이싱은 대체 왜 한 거야. 목숨이 아깝지도 않나 봐.”커피를 한 모금이 마신 주강운이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이젠 사회 뉴스도 봐?”“아니, 그냥 우연하게 본 건데 놀라워서 그러지. 바로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잖아. 부상자 중에 진수 그룹 막내아들도 있었고. 탄식이 절로 나오더라니까.”물을 한 모금 마신 한성우가 툭 던지듯 물었다. “넌 이런 뉴스 안 봐?”주강운이 말했다. “봤는데 자세히는 안 봤어.”“사건 관련 기사는 아무것도 아니야. 숨겨진 뒷이야기가 더 충격적이야. 그러니까...”“잠깐만.”주강운이 한성우의 말을 잘랐다. “나 할 일이 있어서 나중에 끝
[아니, 지금 중요한 건 사고 원인을 밝히는 거 아녜요? 대체 왜 부상자 신상정보나 캐고 있는 거예요? 일부러 여론 몰이 하려는 거 아녜요?][그러니까요. 이렇게 큰 교통사고면 한 사람만의 문제는 아닐 텐데, 이 경기의 주최 측에 문제점을 둬야하는 거잖아요.][속도 제한 구간에서 불법 레이싱을 하다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뭐 더 할 말 있어요? 위에 댓글 혹시 진수 그룹 알바 아니세요?][그래서 진모 씨는 경기에 참가하지 않은 건가요? 피해자라도 된대요? 피해자는 그 인간들 차에 치인 사람이에요. 논리적인 척 하는 거 웃기네요. 쓰레기 같은 인간 때문에 목숨을 잃은 피해자는 나 몰라라 하면서 그것도 인간이라고 신상정보가 털리는 게 안타까워요?][진윤. 남. 서화 대학 전기정보공학과 2학년. 주민등록 번호: XXXX. 전화번호: XXXX.]진윤의 신상정보가 인터넷에 전부 폭로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정보를 공유했다. 심지어 진윤의 수능성적을 폭로하며 그의 성적으로는 서화 대학에 입학할 수 없다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불법 레이싱으로 인한 교통사고로 한 사람을 향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고 여론은 이미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여론 몰이가 필요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그 대상이 진윤이 될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 진윤을 이용해 사건의 요점을 흐리려는 의도이거나 이번 일을 계기로 진수 그룹에 타격을 주려는 것이 분명했다.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한현진이 한성우에게 연락했다. 진윤의 일로 전화했다는 것을 안 한성우가 말했다. “이번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녜요. 일단 불법 레이싱도 문제이긴 하지만 제일 중요하건 레이싱에 참가한 사람 중 마약을 한 인간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이번 사고가 일어난 제일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고요.”“지금 그 인간을 숨기기 위해 인터넷에서는 이 사건의 모든 화살을 진윤 씨에게 돌리고 있어요. 형수님과 한서는 이번 일에 끼어들지 말아요.”한현진이 멈칫하며 물었다. “그
한현진은 어쩔 수 없이 민경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약혼식 준비를 하는 민경하를 위해 강한서는 특별 휴가를 지급했다. 그러니 민경하도 지금은 강한서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아주머니 말로는 아침 여섯 시부터 급하게 나갔다고 해요.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요.”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야겠어요.”“잠깐만요, 사모님.”갑자기 한현진을 부른 민경하가 나지막이 물었다. “오늘 아침 뉴스 보셨어요?”“아직요. 왜요?”민경하가 말했다. “어젯밤 남서신길에서 레이싱 경기가 있었는데 큰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해요. 남서신길 쪽에 저희 자회사에서 시공을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어요.”“오늘 아침 6시쯤에 뉴스가 터진 거니까 대표님께서 급히 나간 게 그 일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남서신길이요?”잠깐 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움찔 몸을 떨었다. ‘진윤 씨가 전에 참가하겠다고 고집 부리던 경기잖아?’한현진이 곧바로 진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뿐만 아니라 홍혜림도 연락을 받지 않았다. 비록 진씨 가문과 연이 깊은 것도 아니었고 진윤에게 다가간 것도 홍혜림에게 물어볼 것이 있기 때문이었지만 혹시라도 사고를 당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이 자식! 분명 강한서와 더는 그런 위험한 경기엔 참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서. 대체 왜 이렇게 말을 듣지 않는 거야.’아무도 연락을 받지 않자 한현진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한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하리에게 물어봐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진윤의 사촌누나이니 어쩌면 남인 그들보다 먼저 소식을 들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열이 말했다. “진윤 씨도 다쳐서 아직 깨어나지 못했대요. 신하리 씨도 아까 공항으로 가서 아마 지금쯤 그쪽으로 출발했을 거예요. 아직 사람을 보지도 못했으니 신하리 씨도 상황은 잘 모르고 있을 거예요.”제일 염려했던 일이 결국은 일어나고 말았다. 진윤도 그 사고 현장에 있었다. 그
염색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잘생긴 포즈로 거울 셀카를 찍은 진윤이 강한서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다시 시작.]강한서는 사진 속 검은 머리에 순해 보이는 젊은이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읽던 책을 내려놓은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왜?”강한서가 진윤의 셀카를 한현진에게 보여주었다. 한현진 역시 사진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금발에 눈썹도 살짝 밀어버리는 스타일을 고집하더라니. 눈썹 피어싱까지 빼니까 그냥 아기였네. 너무 귀엽게 생겼잖아. 훈이보다 어려 보여.”강한서도 한현진을 따라 웃었다. “선배도 그렇잖아. 50살도 넘은 분이 아직도 30대처럼 보이니까. 성우가 처음 선배를 봤을 때 형이라고 불렀다가 예의 없다고 혼났어. 그러다 다른 애들도 형이라고 하니까 말이 없더라고.”그 장면을 상상한 한현진은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역시 동안이 좋아. 50대가 되어서도 얼굴 하나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살 수 있잖아. 난 왜 동안이 아닐까?”그 말에 멈칫한 강한서가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누구 마음을 사려고?”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강 대표님, 몇 십 년 후의 일도 미리 질투하실 거예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는 아냐.”한현진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정말?”강한서가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안 해, 질투.”예상 밖의 대답에 호기심이 불타오른 한현진이 물었다. 몇 십 년 후엔 사랑보다 정으로 사는 거라 신경 쓰지 않는 거야?”강한서가 대답했다. “그건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어.”“뭔데?”강한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대들은 그저 첩에 불과해.”멍해졌던 한현진이 폭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강한서를 품에 안고 뽀뽀 세례를 날렸다. “진지한 얼굴로 실없는 농담을 던질 때 정말 귀여워 죽겠다니까.”강한서가 힐끔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이런 걸 바로 조강지처의 자신감이라고 하는 거야.”한
순간 불쾌한 기분에 빠진 진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아마추어 경기는 사석에서 주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전문적인 레이싱 경기도 아니었다. 오직 속도에서 주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경기였다. 상금이 높은 만큼 위험부담도 컸다. 하지만 진윤이 경기에 참가한 것은 상금 때문이 아니었다. 돈 걱정 없이 산 진윤이 목숨 건 돈에 욕심낼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지 경기의 주최 측에 F1 레전드 인물도 있다는 소식에 우승을 하면 그 사람과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참가한 것이었다. 진윤은 그의 팀원들 역시 레이싱에 대한 열정으로 함께 지금까지 뭉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을 무시하는 친구의 말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진윤처럼 레이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프로 선수가 되길 꿈꾸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이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레이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는 상금이라는 거대한 유혹일 수도 있었다. 팀원 중 위험한 내기 경기에 참석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진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경주마처럼 미친 듯이 산길을 휘저었다. 목숨을 내걸고 재벌들의 도박판에서 기꺼이 주사위가 되었다. 아차 하는 사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경기에서 이기면 그만큼 어마어마한 상금이 주어졌다. 불행히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고 해도 그의 가족들은 놀라운 액수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으니 위험을 감수하고 뛰어드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처음으로 팀원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의 진윤은 충격에 빠졌었다. 하지만 팀원들은 마치 일상적이 대화를 하듯 당연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의 진윤은 그저 그들이 비슷한 일을 너무 많이 들은 탓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들은 그렇게 위험 부담마저도 부러웠었던 같았다. 팀원 중 대부분의 사람에게 레이싱은 그저 짧은 시간 사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도구에 불과했다. 뜬 눈으로 꿈을 꾸고 있는 진윤이야말로 그들에겐 이상한 인간
“아들. 네가 공부가 하고 싶다면 복수 전공이 아니라 10개 전공을 배우겠다고 해도 엄마는 찬성이야. 엄마 지금 너무 기뻐. 만약 농담하는 거라면 지금 당장 거짓말이었다고 얘기해. 안 그럼 엄마는 진심으로 받아들일 거야.”진윤이 웃으며 홍혜림의 팔을 끌어안았다. “엄마. 저도 형처럼 엄마의 자랑이면 안 돼요?”홍혜림이 진윤의 금발을 어루만졌다. “너도 예전엔 엄마의 자랑이었지. 금발로 염색한 후로는 자랑이 아니게 되었지만.”진윤: ...“그럼 다시 염색할게요.”홍혜림이 얼른 헤어숍 VIP카드를 건네며 말했다. “얼른 가. 여긴 새벽 12시가 되어야 영업이 끝나는 곳이야. 지금 가면 아직 시간 있어.”진윤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홍혜림이 얼마나 진윤의 금발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네, 네, 네. 지금 갈게요.”외투를 챙겨주며 문앞까지 배웅 나온 홍혜림이 진윤에게 물었다. “아들. 조금 전에 누구한테 들은 말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잖아. 그 분 너희 교수님이셔?”“우리 교수님은 아녜요. 하지만 좋은 스승님이긴 해요.”‘사기꾼이기도 해. 하지만 꽤 능력 있는 사기꾼.’홍혜림이 호기심에 가득 찬 말투로 물었다. “그 분 한 마디에 바로 생각이 바뀐 거야? 내가 너한테 얼마나 많이 얘기했었는데, 그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진윤이 말했다. “절 데리고 20km를 뛰었어요. 자길 이기면 날 뉴벨리 팀에 입단시켜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나보다 10살이나 많아서 나이 많은 어르신한테 지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졌어요.”진윤이 창피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저보다 빨리 뛴 건 아니었어요. 제가 적을 만만하게 생각한 거죠. 하지만 무서운 사람이에요. 지독하게 강해서 무서운 사람. 그 사람은 못 해낼 일이 없는 것 같아요. 입단은 무슨, 그냥 그 기회를 벌어 저에게 설교를 하려던 것뿐이었어요.”“내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레이싱을 그만두게 하려고. 처음엔 엄마가 보낸 스파이인 줄 알았다니까요. 하지만
진윤에게 묻는 홍혜림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얘기해. 엄마 괜찮아. 파산이라도 하지, 뭐. 돈은 없으면 다시 벌 수 있어. 아빠가 안 된다고 하면 쫓아내면 돼.’처음으로 느끼는 죄책감에 진윤은 고개를 숙였다. 홍혜림이 비록 관리를 잘 하긴 했지만 귀밑머리는 이미 하얀 서리가 내려있었다. 큰형은 어려서부터 얌전하고 말을 잘 듣는 아이라 부모님의 속을 썩인 적이 없었다. 유독 진윤이 고집을 부리며 걸음마를 뗄 때부터 뒤에서 마음을 졸이게 했다. 진윤의 수능성적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 전공은 전부 부모님이 수많은 돈을 들여 기획한 결과였다. 하지만 진윤은 본인이 좋아하지 않는 전공이라는 이유로 자포자기하며 지냈다. 부모님이 통제욕이 강하다는 것은 그저 진윤이 그들에게 씌워놓은 프레임에 불과했다. 정말 부모님의 통제 속에서 살아가는 친구들은 매일 모든 스케줄, 심지어 먹는 음식까지 전부 부모님에게 보고해야 했다. 그런 사람에 비하면 그의 부모님은 그저 애교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레이싱을 좋아하는 진윤이 못마땅했지만 그럼에도 그저 설득하는 것이 전부였다. 홍혜림은 단 한 번도 진윤의 레이싱 장비를 부순 적이 없었다. 매번 더는 새 장비를 사주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다짐도 진윤의 애교 몇 번에 곧 무너지고 말았다. ‘언제까지 실망만 안겨드릴 순 없잖아. 나도 엄마의 자랑이 되어야지 않겠어?’“엄마. 저 복수 전공하고 싶어요. 전 레이싱이 좋아요. 도무지 포기가 안 돼요. 저 실력 그 정도 아닌 거 알아요. 하지만 자동차 관련한 전공을 배워보고 싶어요. 지금 전공은 절대, 두 번 다시는 F학점 받는 일 없을 거라 약속 드려요. 복수 전공하게 해주면 안 돼요?”홍혜림: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어?”진윤이 멍해졌다. “네?”홍혜림이 말했다. “네가 나에게 하려는 말이 그거야?”진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그게 아니면요?”홍혜림: “사람을 치거나, 교통사고를 낸 게 아니고?”
눈에 띄게 변한 진윤의 모습을 홍혜림은 믿을 수가 없었다.집 바로 앞이 학교라 진윤은 기숙사 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집에 자주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집에서 레이싱 게임을 할 때마다 부모님의 잔소리가 끊이질 않아 진윤은 큰형 아파트에 몰래 숨어있는 것을 좋아했다. 진윤의 큰형은 일 때문에 그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9살이나 더 많은 그의 형은 가끔 부모님보다 더 진윤을 아끼기도 했다. 심지어 가끔은 진윤의 편을 들어 그의 비밀을 지켜주기도 했다. 큰형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러니 제발 눈치껏 본가로 들어오라고 홍혜림은 몇 번이고 진윤에게 얘기했었다. 사실 예비 며느리는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진윤을 본가로 불러들이는 이유는 진윤이 곁에 없으니 도무지 관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윤은 그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매번 홍혜림이 같은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그는 두 귀를 닫고 못 듣는 척 연기했다. 하지만 이번엔 홍혜림이 먼저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진윤 스스로 본가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진윤에 홍혜림은 혹시 형제가 싸우기라도 한 걸까 전화를 했지만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에 홍혜림은 생각했다. ‘이 자식 또 무슨 사고라도 치고 돌아와서 얌전한 척 연기하는 거 아냐?’‘교통사고라도 내서 배상해 줘야 하는 건가? 아니면 레이싱 카가 망가져서 새 차를 살 돈이 필요한 건가?’‘설마 사람을 친 건 아니겠지?’진윤이 집에서 열심히 공부할수록 홍혜림은 점점 더 사람을 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매일 밤 아무 일도 없는 척 진윤의 방 앞을 서성이며 생각했다. ‘먼저 잘못을 인정하면 요즘 얌전하게 지냈던 걸 정상참작해서 욕을 좀 덜해야겠어.’하지만 3일이 지나도록 진윤은 홍혜림을 부르지 않았다. ‘이상해.’‘너무 이상하잖아!’‘설마 사람을 친 것보다 더 큰 사고는 아니겠지?’‘대체 얼마를 배상해야 하는 거야?’1 주일이 지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홍혜림은 진윤의
진윤: ...강한서가 진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싫다면서 현 상황을 바꿔보려고 하지도 않은 거야?”진윤: ...‘왜 선생님께 혼나는 기분이 드는 거지? 진지하게 핵심만 꼬집고 있잖아.’입을 달싹이던 진윤은 변명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진윤은 그동안 어떻게 반항해야할지,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강한서가 말했다. “네 인생은 네 거야. 네가 열심히 살든, 대충 살든 네 하루하루는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어. 네 태도에 따라 싫었던 그 경험들이 사라지지 않아. 단지 네가 싫다는 이유로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않고 대충 흘려보냈을 뿐 그것들은 계속 존재해.”“대충 공부해서 대충 졸업하면 또 대충 취직이나 하겠지. 아니면 아예 너희 회사로 입사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다음에? 그렇게 평생을 대충 흘려보낼 거야? 그게 네가 원하는 인생이야?”멍하니 강한서를 쳐다보던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아뇨.”부모님이 선택해준 전공이 싫어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얼른 졸업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강한서의 말처럼 졸업 후엔? 전공에 맞는 직업을 찾아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갈까, 아니면 부모님 회사에 입사해 되는대로 살아갈까. 어떤 선택이든 그건 진윤이 원하는 인생은 아니었다. 4년이란 시간을 허무히 흘러 보내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전 이미 3학년이에요. 전과를 하기엔 늦었잖아요. 이젠 뭘 하려고 너무 늦은 것 같아요.”속상한 듯 대답하는 진윤의 말에 한현진이 말했다. “진윤 씨는 완전 MZ세대잖아요. 이제 갓 이십 대 초반인데 뭘 해도 늦지 않은 나이예요. 너무 빨리 본인의 가능성을 단정 짓지 말아요. 60세에 대학생이 됐다는 기사 못 봤어요?”“진윤 씨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도 늦었다고 생각 안 하는데, 진윤 씨가 왜 겁을 내요?”“전...”입술을 달싹이던 진윤이 한참이 지나서야 한숨을 내뱉었다. “두 사람 문제아 갱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