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다 어른이 되었으니 저도 고생 끝에 낙이 오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결혼을 하더니 저와 점점 멀어졌죠.]신미정은 송씨 가문의 눈에 날까 두려웠던 것인지 며느리에 관해선 그저 스치듯 짧게 얘기했다. 그녀는 또 긴 편폭을 들여 자신과 신표의 관계를 설명했다. 신표는 어린 시절의 강한서를 구해 준 적이 있었고 신미정은 배은망덕한 인간처럼 그런 동생을 모른 척 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신미정은 그것이 잘못된 방법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이젠 신씨 가문 일에 손을 뗐다며 지금은 그저 아들과 잘 지내고 싶은 마음뿐이라고 했다.신미정은 아마 실력 있는 사람을 찾아 도움을 받은 것 같았다.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다투고 나서야 그녀는 비로소 강한서와의 사이가 틀어지는 것은 그녀에게 그 어떤 좋은 점도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오히려 이 일을 빌어 강한서를 가스라이팅하여 본인이 계속 강씨 가문 사모님이로서의 모든 권한을 누리는 것이 신미종의 목적인 것 같았다. 신표는 이미 신미정에게서 등을 돌렸고 강단해는 아내와 아들이 있었기에 모든 걸 버리며 신미정을 거둘 수도 없었다. 그러니 지금 신미정에게 강한서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언제든 뒤에서 칼을 꽂을 수 있는 사람을 한현진은 강한서 곁에 둘 수 없었다. 신미정이 페이스북에 올린 장문의 피드에 달린 댓글은 두 패로 나뉘었다. 신미정을 이해한다는 여론은 싱글맘의 힘든 처지를 이해하며 아무런 이유 없이 도박하는 동생을 도운 것도 아니고 아들을 구해준 적이 있으니 당연히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반대 여론은 그저 신미정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태도였다. 아픈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고, 아이를 보살피는 건 엄마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왜 신미정에겐 그것이 아이를 가스라이팅하는 이유가 된 것일까?강한서가 신표의 도박 빚을 갚아주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심지어 10년 동안 신표를 도와주는 신미정을 묵인해줬다. 강한서는 10년을 참고 나서야 더는 돈을 주지 않기로 마음을 먹은 것
[사람들은 늘 모성애를 노래해요. 엄마의 사랑이라는 게 위대하긴 하죠. 하지만 모든 엄마에게 모성애가 있는 건 아녜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를 옭아매고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엄마에게 아이가 반항을 했다고 해서 그게 불효가 되는 건가요?한서는 졸업 후 지금까지 몇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매년 학교에 기부하고 있어요. 학교에 장학금 재단까지 설립해 성적이 우수하고 생활이 어려운 아이들을 돕고 있고요. 작년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전할 편지를 적어달라고 했어요. 저희는 한서가 아이들에게 열심히 공부해서 나중에 유능한 인재가 되길 바란다는 내용을 쓸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한서는 아무런 고민과 걱정 없이 행복하게 자라기를 바란다고 적었더라고요. 한서는 늘 자기 마음속에 있는 어린 꼬마를 안고 살았던 거예요. 한서가 졸업한지 이젠 10여 년이 흘렀어요. 저희도 그동안 자주 연락하지는 않았고요. 그러다 2년 전 제 남편이 수술을 받게 되었고 해외 유학 중인 아이 때문도 저도 양쪽을 오가며 몇 년 사이 체력이 많이 떨어져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어요. 하지만 한서는 어디서 그 소식을 들은 것인지 사람을 보내 제 남편의 입원 수속을 도와줬어요. 한서는 누구보다 훌륭한 학생이었어요. 저희 반 학생이 한서 한 명이 아니었고 선생님으로써 아이들 한 명 한 명, 전부 똑같이 마음을 써야 했어요. 그래서 제가 한서에게 특별히 더 잘해준 것도 아니었어요. 전 그저 한서의 담임을 맡았던 평범한 교사였죠. 게다가 지금은 이미 퇴직했고 한서의 사업에도 그 어떤 도움이 되지 않아요. 그럼에도 한서는 담임이었던 저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아준 아이예요. 그런 아이가 또 어떻게 친어머니를 버리는 짓을 할 수 있었겠어요?불과 몇 분 전,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를 보며 아들이 올리지 말라고 설득하더군요. 지금 여론이 그리 긍정적이지는 않으니 제가 쓴 글 때문에 괜히 저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다고 말이예요. 하지만 전 무섭지 않아요. 누구 보다 한서가 어떤 아이인지 잘 알고 있는 제가 조용히
한 때는 재벌가 사모님 모임의 중심이었던 여자가 결국은 모든 사람들의 경멸과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그녀는 이젠 더 이상 이 바닥에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강한서의 페이스북은 점차 새로운 댓글이 달리며 악플을 덮어갔다. 실시간 검색어도 점차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했다. 그중 순위가 제일 높은 검색어는 [강한서 수능 성적]이었다. 발표회가 시작하기 전, 많은 사람은 강한서의 일반적인 재벌 2세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굳이 다른 점을 얘기하자면 강한서는 그동안 특별한 스캔들도 없이 조용하게 지낸 편이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잠잠하게 지내 온 재벌 2세든, 한껏 존재감을 드러낸 재벌 2세든 네티즌에게는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들에게 재벌 2세는 그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재부로 손쉽게 좋은 환경과 기회를 누리며 살아온, 아무리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일반인은 누리지도 못할 사회적 지위와 재부를 손에 쥘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누군가 강한서의 수능 성적을 공개했을 때,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수능 만점???][이게 무슨 어나더레벌의 엄친이야?]특례가 있었던 것은 아닐지 의문이 들었지만 강한서는 단순히 본인의 실력으로 수능 만점을 맞았다. 그리고 곧 고등학교 시절 강한서의 성적도 어쩐 일인지 전부 공개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네티즌들은 현재 한성의 핵심팀을 이끄는 사람 역시 강한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팀은 강한서 본인을 포함해 많은 상을 수상한 전적이 있는 팀이었다. 강한서가 대학원 시절 제출한 논문도 주목을 끌었다. 그리고 곧 많은 대학원생들은 그 논문은 바로 전업 저널에서 읽었었던 논문이며 심지어 자신의 논문에도 인용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 전문가는 강한서의 논문은 박사 이상의 학벌을 가진 사람이 쓸 수 있는 수준의 논문이라고 말했다...그렇게 많은 사실이 공개되자 사람들은 순간 한성 그룹의 젊은 대표야말로 진정한 천재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강한서 본인은 그 어떤 인터
웨이터는 조금 전까지 한현진이 서 있던 곳에 그대로 넘어졌다. 그는 넘어지며 테이블에 부딪혔고 위에 놓였던 술잔과 그릇들이 와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유리조각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튀었다. 놀란 마음을 진정하지 못한 한현진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얼굴도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지 마요. 괜찮아요.”정신을 차린 한현진이 멍하니 자신을 잡아 준 주강운을 쳐다보며 숨을 들이켰다. 한현진은 주강운의 손에서 팔목을 빼며 나지막이 말했다. “고마워요.”주강운의 눈가에 걱정 어린 눈빛이 스쳤다. 하지만 주강운은 그 마음을 꾹 누르며 앞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그는 그저 조금 전까지 한현진을 잡고 있던 손을 꽉 움켜쥐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으면 됐어요.”이때, 강한서는 이미 굳은 얼굴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한현진은 그가 주강운에게 주먹을 날리기 전에 먼저 앞으로 다가가 강한서의 손을 잡았다. “얼른 사람 불러서 여기 정리해. 손님들 놀라게 하지 말고.”한현진에게 잡힌 강한서의 손이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한현진은 힘을 실어 강한서를 꼭 잡았다. 그녀는 그에게 자기는 괜찮으니 티 내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 한현진은 아이들이 뒤에서 뛰어다니다 웨이터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걸 직접 보았다. 이건 그저 우연한 사고였다. 하지만 강한서가 이 일로 화를 낸다면 그가 주강운 앞에서 했던 연기는 전부 물거품이 될 것이다. 강한서는 한현진의 타이름에 점차 진정했다. 그는 분노를 꾹 억누르며 놀라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민경하에게 사람을 불러 이곳을 수습하라고 지시했다. 옆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던 한성우는 큰 소란에 놀라 다가와 무슨 일이냐며 물었다.주강운이 말했다. “아이들이 뛰어 놀다가 웨이터를 넘어뜨려서 하마터면 현진 씨에게 부딪힐 뻔했어.”한성우가 놀란 숨을 들이켰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한현진의 배를 힐끔 쳐다보았다. 막 말을 꺼내려던 한성우를 강한서가 노려보았다. 한성우는 순간 마음
왜 굳이 이미 취한 강한서를 방까지 데려다줬을까? 차라리 로비에서 기다리는 편이 더 나았을 텐데 말이다. 설사 강한서를 편히 쉬게 하려던 의도였다고 해도, 강한서와 함께 방에서 기다리면 될 것을 왜 굳이 로비에서 자신을 기다렸던 걸까? 방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는 두 개밖에 없었다. 한현진이 헷갈려 다른 엘리베이터를 탈 리가 없었다. 강한서는 줄곧 유씨 가문 사람들을 혐오했었다. 그러니 그는 멀쩡한 정신엔 유현아가 가까이 다가올 수 있는 그 어떤 기회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유현아도 아주 멍청이는 아니었다. 만약 유현아에게 강한서를 유혹할 능력이 있었다면 진작 그를 손에 넣었을 것이다. 그렇게 오래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당시 주강운이 물을 마신 건 두통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현진이 강한서가 바람피우는 현장을 덮칠 수 있도록 시간을 끌기 위한 행동이었던 걸까?그때의 일을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한현진의 마음은 점점 더 서늘해졌다. 주강운은 대체 어떤 마음으로 자기 첫사랑을 치어 죽인 사람을 도왔던 걸까?“현진 씨?”창백해진 얼굴로 한참을 말이 없는 한현진을 본 주강운이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한현진의 손가락이 움찔 떨렸다. 그녀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며 마음을 다잡았다. 손을 뻗어 주강운이 내민 잔을 받으며 말했다. “고마워요.”생기 있는 얼굴이었지만 낯빛이 어두웠다. 이마에도 땀이 송글 맺혀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놀란 모양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았지만 정작 입을 여니 그 모든 마음은 그저 한 마디의 가벼운 인사로 흘러나왔다. “요즘 잘 지냈어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지냈어요.”잠시 말이 없던 한현진이 말을 이었다. “얼마 전 저녁에 누군가 강운 씨 휴대폰으로 저에게 전화를 했었어요. 강운 씨 취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날 몸이 안 좋아서 안 갔는데, 집에 잘 들어갔어요?”한현진은 조심스레 그 얘기를 꺼냈다. 마치 주강운이 왜 오지 않았냐고 따질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그렇게 선을 긋
주강운이 엄지로 컵을 쓸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웃으며 덤덤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어쩌면 지금도 보고 있겠죠. 또 어쩌면 그저 장난으로 한 얘기였을 수도 있고요.”시선을 내린 한현진은 더는 말이 없었다. 주강운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아이들을 보며 갑자기 물었다. “전에 장례식에 있었던 꼬마 아가씨는 아직도 한서가 돌보고 있어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한서가 아름드리로 데려왔어요.”주강운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아이 가족에게 보내지 않았어요?”한현진이 말했다. “민 실장님 말로는 아이는 직계 가족이 없다고 하던데요. 다른 가족들도 아이를 키우겠다고 하는 사람이 없어서 고아원에 보내자니 강한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냥 잠시 자기 옆에 두고 보살피기로 했어요.”주강운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개인 입양은 안 알아봤어요?”한현진이 웃으며 말했다. “저야 그러고 싶죠. 전에 강한서에게 그 얘기를 꺼냈다가 한바탕 싸웠어요. 저더러 아이에게 아량을 베풀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그 아이와 강한서 유전자 검사를 하지 않았다면 강한서 아이가 아닐까, 의심하고도 남았을 거예요. 어찌나 친자식처럼 아끼는지. 됐어요. 그저 어린 아이 일뿐인걸요. 착하고 말도 예쁘게 하는 애예요. 키우고 싶다면 키우죠, 뭐.”주강운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긍정적이네요.”한현진이 눈웃음 지었다. 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서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서도 가끔 이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자신을 “감시”하는 사람을 쳐다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사실 강한서가 사고를 당하기 전 그 아이에 관해 얘기를 꺼낸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때 전 그 아이를 만난 적이 없었어요. 강한서가 저에게 알려준 이름도 은서가 아니라 문샤론이었어요. 그 이름은 은서 엄마가 지은 거라고 했어요. 은서 부모님이 무궁화가 예쁘게 폈을 때 만났대요.”한현진은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낭만적인 러브스토리겠죠. 아쉽게도 그 끝이 안 좋긴 했지만 말이예요.”주강운
한현진은 조금 전 대화 내용은 간략하게 강한서에게 알려주었다. 강한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문샤론? 그런 생각은 어떻게 하는 거야?”이야기는 전부 한현진이 즉흥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하지만 전부 그럴 듯하게 짜임새가 있는 스토리였다. ‘역시 대단한 여자야.’한현진이 말했다. “간민혜 씨는 죽기 직전까지도 강운 씨에게 한 마디 말도 남기지 않았어. 대체 그 이유가 뭔지, 우린 모르지만 어쩌면 강운 씨라면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사실 난 줄곧 강운 씨 집안에서 누군가 이 일에—”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바닥을 꾹꾹 누르며 조용히 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멈칫하던 한현진은 강한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정설희, 아니. 정서희가 보였다. 그녀는 장준과 손을 잡고 피로연 현장에 나타났다. 지금의 정서희는 예전의 정설희와 같은 스타일의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다. 눈웃음을 짓는 눈가엔 은근한 색기가 흘렀다. 아름다운 이목구비와 화려한 옷차림은 자심이 병원에서 만났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완전히 똑같은 사람인 것 같았다. 함께 등장한 정서희와 장준은 스킨십이 제법 자연스러웠고 꽤 친근한 모습이었다. “강 대표님, 발표회 무사히 마치신 거 축하드려요.”잔을 들고 다가온 장준이 웃으며 강한서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한현진은 순간 약쟁이였던 장준의 상태가 지난번 결혼식보다 너무 많이 나은 것을 발견했다. 광대뼈도 예전처럼 선명하게 튀어나오지 않았고 눈빛에도 생기가 돌았다. 여전히 삐쩍 마른 몸이었지만 정장을 입으니 제법 봐줄만 했다. 아무도 이런 모습의 장준을 보고 약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강한서가 손을 들어 장준과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고마워요.”장준의 시선이 한현진을 향했다. 깊은 눈매에는 나른한 기색이 묻어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정서희를 보며 물었다. “두 사람 동창이라고 하지 않았어? 현진 씨는 당신을 보고도 왜 이렇게 냉담한
멈칫한 한현진과 강한서가 홱 고개를 돌려 뒤에서 중얼거리는 한성우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에 깜짝 놀란 한성우가 말했다. “왜 날 그렇게 노려봐?”한현진이 다급하게 물었다. “무슨 소문이요? 성우 씨는 뭘 알고 있는 거예요?”한성우가 눈을 깜빡였다. “소문에 장준이 첫사랑 대타와 사랑에 빠졌다고 하더라고요. 그 대타가 사라진 1년 동안 장준은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것처럼 지냈대요. 그리고 대타가 돌아오자 바로 활기가 넘쳐흐른다고 하더라고요. 그 모습에 빈정 상한 첫사랑이 매일 대타를 괴롭히고 있고.”한현진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강한서는 그런 한현진보다 더 놀란 눈치였다. 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장준은 술, 여자, 도박, 약 안 좋은 건 전부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 인간에게도 첫사랑이 있어요?”“형수님은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세요. 병신에게도 청춘은 있어요. 게다가 장씨 가문 정도면 명문가에서는 싫다고 할지 몰라도 조건이 조금 떨어진 집안마저도 거절하겠어요?”그리고 한성우는 두 사람에게 끝장판 막장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장준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첫사랑이 있었다. 그 여자는 장준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던 사람의 딸이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며 감정을 쌓아왔다. 두 사람에게 사랑이 싹 트던 초창기, 장준의 가족들은 두 사람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단순히 장준이 그 여자를 가지고 놀다 질리면 그만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생각보다 꽤 수완이 좋았던 것인지 장준은 그 여자의 일이라면 죽자고 달려들었다. 그저 장난감에 불과한 여자였다. 곁에 두고 노는 건 상관없었지만 그 여자가 장준의 안방까지 차지하려고 한다면, 장씨 가문에서는 절대 가만히 놔둘 수는 없었다. 그러니 장씨 가문에서는 돈을 주고 수작을 부려 그 여자를 내쫓았다. 하지만 여자가 사라지자 장준은 미친X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그 여자가 떠나며 남긴 편지 때문이었다. [이번 생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아. 다
한성우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형수님도 양심은 없으시네요. 아무리 그대로 강운이가 형수님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잖아요. 이렇게 이용하시면 마음에 안 찔리세요?”한성우의 말에 한현진의 말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좋아하면 강한서를 자극하기 위해 절 간민혜 씨 모습으로 분장시킬 수 있어요? 저와 주 변호사님은 그저 지인 딱 그 정도예요. 말 할 거예요, 말 거예요? 말 안 할 거면 됐어요.”‘강한서에게 덫을 놓은 건 내가 평생 기억하고 있을 거야.’말을 잘못 꺼냈음을 인지한 한성우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얘기하면 되잖아요. 왜 화를 내고 그래요. 하지만 제가 얘기한다고 해서 강운이가 나설 거란 보장은 저도 못해요.”한현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할 거예요.”주강운이라는 사람의 모든 면을 잘 안다고 할 수 없었지만 한현진은 변호사로서의 그의 능력은 의심한 적이 없었다. 정서희의 의뢰를 받고 정설희 사건을 조사하고 있으니 당연히 장준도 눈여겨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제 발로 찾아온 기회는 주강운은 거절할 리가 없었다. 주강운에게 전화해 안부를 묻던 한성우는 돌고 돌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불법 레이싱 교통사고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대. 전부 이제 갓 20살이 된 어린 애들이던데 안타깝게 됐어. 학교나 열심히 다닐 것이지 레이싱은 대체 왜 한 거야. 목숨이 아깝지도 않나 봐.”커피를 한 모금이 마신 주강운이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이젠 사회 뉴스도 봐?”“아니, 그냥 우연하게 본 건데 놀라워서 그러지. 바로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잖아. 부상자 중에 진수 그룹 막내아들도 있었고. 탄식이 절로 나오더라니까.”물을 한 모금 마신 한성우가 툭 던지듯 물었다. “넌 이런 뉴스 안 봐?”주강운이 말했다. “봤는데 자세히는 안 봤어.”“사건 관련 기사는 아무것도 아니야. 숨겨진 뒷이야기가 더 충격적이야. 그러니까...”“잠깐만.”주강운이 한성우의 말을 잘랐다. “나 할 일이 있어서 나중에 끝
[아니, 지금 중요한 건 사고 원인을 밝히는 거 아녜요? 대체 왜 부상자 신상정보나 캐고 있는 거예요? 일부러 여론 몰이 하려는 거 아녜요?][그러니까요. 이렇게 큰 교통사고면 한 사람만의 문제는 아닐 텐데, 이 경기의 주최 측에 문제점을 둬야하는 거잖아요.][속도 제한 구간에서 불법 레이싱을 하다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뭐 더 할 말 있어요? 위에 댓글 혹시 진수 그룹 알바 아니세요?][그래서 진모 씨는 경기에 참가하지 않은 건가요? 피해자라도 된대요? 피해자는 그 인간들 차에 치인 사람이에요. 논리적인 척 하는 거 웃기네요. 쓰레기 같은 인간 때문에 목숨을 잃은 피해자는 나 몰라라 하면서 그것도 인간이라고 신상정보가 털리는 게 안타까워요?][진윤. 남. 서화 대학 전기정보공학과 2학년. 주민등록 번호: XXXX. 전화번호: XXXX.]진윤의 신상정보가 인터넷에 전부 폭로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정보를 공유했다. 심지어 진윤의 수능성적을 폭로하며 그의 성적으로는 서화 대학에 입학할 수 없다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불법 레이싱으로 인한 교통사고로 한 사람을 향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고 여론은 이미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여론 몰이가 필요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그 대상이 진윤이 될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 진윤을 이용해 사건의 요점을 흐리려는 의도이거나 이번 일을 계기로 진수 그룹에 타격을 주려는 것이 분명했다.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한현진이 한성우에게 연락했다. 진윤의 일로 전화했다는 것을 안 한성우가 말했다. “이번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녜요. 일단 불법 레이싱도 문제이긴 하지만 제일 중요하건 레이싱에 참가한 사람 중 마약을 한 인간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이번 사고가 일어난 제일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고요.”“지금 그 인간을 숨기기 위해 인터넷에서는 이 사건의 모든 화살을 진윤 씨에게 돌리고 있어요. 형수님과 한서는 이번 일에 끼어들지 말아요.”한현진이 멈칫하며 물었다. “그
한현진은 어쩔 수 없이 민경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약혼식 준비를 하는 민경하를 위해 강한서는 특별 휴가를 지급했다. 그러니 민경하도 지금은 강한서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아주머니 말로는 아침 여섯 시부터 급하게 나갔다고 해요.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요.”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야겠어요.”“잠깐만요, 사모님.”갑자기 한현진을 부른 민경하가 나지막이 물었다. “오늘 아침 뉴스 보셨어요?”“아직요. 왜요?”민경하가 말했다. “어젯밤 남서신길에서 레이싱 경기가 있었는데 큰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해요. 남서신길 쪽에 저희 자회사에서 시공을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어요.”“오늘 아침 6시쯤에 뉴스가 터진 거니까 대표님께서 급히 나간 게 그 일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남서신길이요?”잠깐 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움찔 몸을 떨었다. ‘진윤 씨가 전에 참가하겠다고 고집 부리던 경기잖아?’한현진이 곧바로 진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뿐만 아니라 홍혜림도 연락을 받지 않았다. 비록 진씨 가문과 연이 깊은 것도 아니었고 진윤에게 다가간 것도 홍혜림에게 물어볼 것이 있기 때문이었지만 혹시라도 사고를 당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이 자식! 분명 강한서와 더는 그런 위험한 경기엔 참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서. 대체 왜 이렇게 말을 듣지 않는 거야.’아무도 연락을 받지 않자 한현진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한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하리에게 물어봐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진윤의 사촌누나이니 어쩌면 남인 그들보다 먼저 소식을 들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열이 말했다. “진윤 씨도 다쳐서 아직 깨어나지 못했대요. 신하리 씨도 아까 공항으로 가서 아마 지금쯤 그쪽으로 출발했을 거예요. 아직 사람을 보지도 못했으니 신하리 씨도 상황은 잘 모르고 있을 거예요.”제일 염려했던 일이 결국은 일어나고 말았다. 진윤도 그 사고 현장에 있었다. 그
염색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잘생긴 포즈로 거울 셀카를 찍은 진윤이 강한서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다시 시작.]강한서는 사진 속 검은 머리에 순해 보이는 젊은이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읽던 책을 내려놓은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왜?”강한서가 진윤의 셀카를 한현진에게 보여주었다. 한현진 역시 사진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금발에 눈썹도 살짝 밀어버리는 스타일을 고집하더라니. 눈썹 피어싱까지 빼니까 그냥 아기였네. 너무 귀엽게 생겼잖아. 훈이보다 어려 보여.”강한서도 한현진을 따라 웃었다. “선배도 그렇잖아. 50살도 넘은 분이 아직도 30대처럼 보이니까. 성우가 처음 선배를 봤을 때 형이라고 불렀다가 예의 없다고 혼났어. 그러다 다른 애들도 형이라고 하니까 말이 없더라고.”그 장면을 상상한 한현진은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역시 동안이 좋아. 50대가 되어서도 얼굴 하나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살 수 있잖아. 난 왜 동안이 아닐까?”그 말에 멈칫한 강한서가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누구 마음을 사려고?”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강 대표님, 몇 십 년 후의 일도 미리 질투하실 거예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는 아냐.”한현진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정말?”강한서가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안 해, 질투.”예상 밖의 대답에 호기심이 불타오른 한현진이 물었다. 몇 십 년 후엔 사랑보다 정으로 사는 거라 신경 쓰지 않는 거야?”강한서가 대답했다. “그건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어.”“뭔데?”강한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대들은 그저 첩에 불과해.”멍해졌던 한현진이 폭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강한서를 품에 안고 뽀뽀 세례를 날렸다. “진지한 얼굴로 실없는 농담을 던질 때 정말 귀여워 죽겠다니까.”강한서가 힐끔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이런 걸 바로 조강지처의 자신감이라고 하는 거야.”한
순간 불쾌한 기분에 빠진 진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아마추어 경기는 사석에서 주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전문적인 레이싱 경기도 아니었다. 오직 속도에서 주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경기였다. 상금이 높은 만큼 위험부담도 컸다. 하지만 진윤이 경기에 참가한 것은 상금 때문이 아니었다. 돈 걱정 없이 산 진윤이 목숨 건 돈에 욕심낼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지 경기의 주최 측에 F1 레전드 인물도 있다는 소식에 우승을 하면 그 사람과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참가한 것이었다. 진윤은 그의 팀원들 역시 레이싱에 대한 열정으로 함께 지금까지 뭉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을 무시하는 친구의 말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진윤처럼 레이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프로 선수가 되길 꿈꾸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이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레이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는 상금이라는 거대한 유혹일 수도 있었다. 팀원 중 위험한 내기 경기에 참석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진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경주마처럼 미친 듯이 산길을 휘저었다. 목숨을 내걸고 재벌들의 도박판에서 기꺼이 주사위가 되었다. 아차 하는 사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경기에서 이기면 그만큼 어마어마한 상금이 주어졌다. 불행히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고 해도 그의 가족들은 놀라운 액수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으니 위험을 감수하고 뛰어드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처음으로 팀원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의 진윤은 충격에 빠졌었다. 하지만 팀원들은 마치 일상적이 대화를 하듯 당연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의 진윤은 그저 그들이 비슷한 일을 너무 많이 들은 탓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들은 그렇게 위험 부담마저도 부러웠었던 같았다. 팀원 중 대부분의 사람에게 레이싱은 그저 짧은 시간 사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도구에 불과했다. 뜬 눈으로 꿈을 꾸고 있는 진윤이야말로 그들에겐 이상한 인간
“아들. 네가 공부가 하고 싶다면 복수 전공이 아니라 10개 전공을 배우겠다고 해도 엄마는 찬성이야. 엄마 지금 너무 기뻐. 만약 농담하는 거라면 지금 당장 거짓말이었다고 얘기해. 안 그럼 엄마는 진심으로 받아들일 거야.”진윤이 웃으며 홍혜림의 팔을 끌어안았다. “엄마. 저도 형처럼 엄마의 자랑이면 안 돼요?”홍혜림이 진윤의 금발을 어루만졌다. “너도 예전엔 엄마의 자랑이었지. 금발로 염색한 후로는 자랑이 아니게 되었지만.”진윤: ...“그럼 다시 염색할게요.”홍혜림이 얼른 헤어숍 VIP카드를 건네며 말했다. “얼른 가. 여긴 새벽 12시가 되어야 영업이 끝나는 곳이야. 지금 가면 아직 시간 있어.”진윤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홍혜림이 얼마나 진윤의 금발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네, 네, 네. 지금 갈게요.”외투를 챙겨주며 문앞까지 배웅 나온 홍혜림이 진윤에게 물었다. “아들. 조금 전에 누구한테 들은 말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잖아. 그 분 너희 교수님이셔?”“우리 교수님은 아녜요. 하지만 좋은 스승님이긴 해요.”‘사기꾼이기도 해. 하지만 꽤 능력 있는 사기꾼.’홍혜림이 호기심에 가득 찬 말투로 물었다. “그 분 한 마디에 바로 생각이 바뀐 거야? 내가 너한테 얼마나 많이 얘기했었는데, 그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진윤이 말했다. “절 데리고 20km를 뛰었어요. 자길 이기면 날 뉴벨리 팀에 입단시켜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나보다 10살이나 많아서 나이 많은 어르신한테 지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졌어요.”진윤이 창피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저보다 빨리 뛴 건 아니었어요. 제가 적을 만만하게 생각한 거죠. 하지만 무서운 사람이에요. 지독하게 강해서 무서운 사람. 그 사람은 못 해낼 일이 없는 것 같아요. 입단은 무슨, 그냥 그 기회를 벌어 저에게 설교를 하려던 것뿐이었어요.”“내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레이싱을 그만두게 하려고. 처음엔 엄마가 보낸 스파이인 줄 알았다니까요. 하지만
진윤에게 묻는 홍혜림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얘기해. 엄마 괜찮아. 파산이라도 하지, 뭐. 돈은 없으면 다시 벌 수 있어. 아빠가 안 된다고 하면 쫓아내면 돼.’처음으로 느끼는 죄책감에 진윤은 고개를 숙였다. 홍혜림이 비록 관리를 잘 하긴 했지만 귀밑머리는 이미 하얀 서리가 내려있었다. 큰형은 어려서부터 얌전하고 말을 잘 듣는 아이라 부모님의 속을 썩인 적이 없었다. 유독 진윤이 고집을 부리며 걸음마를 뗄 때부터 뒤에서 마음을 졸이게 했다. 진윤의 수능성적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 전공은 전부 부모님이 수많은 돈을 들여 기획한 결과였다. 하지만 진윤은 본인이 좋아하지 않는 전공이라는 이유로 자포자기하며 지냈다. 부모님이 통제욕이 강하다는 것은 그저 진윤이 그들에게 씌워놓은 프레임에 불과했다. 정말 부모님의 통제 속에서 살아가는 친구들은 매일 모든 스케줄, 심지어 먹는 음식까지 전부 부모님에게 보고해야 했다. 그런 사람에 비하면 그의 부모님은 그저 애교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레이싱을 좋아하는 진윤이 못마땅했지만 그럼에도 그저 설득하는 것이 전부였다. 홍혜림은 단 한 번도 진윤의 레이싱 장비를 부순 적이 없었다. 매번 더는 새 장비를 사주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다짐도 진윤의 애교 몇 번에 곧 무너지고 말았다. ‘언제까지 실망만 안겨드릴 순 없잖아. 나도 엄마의 자랑이 되어야지 않겠어?’“엄마. 저 복수 전공하고 싶어요. 전 레이싱이 좋아요. 도무지 포기가 안 돼요. 저 실력 그 정도 아닌 거 알아요. 하지만 자동차 관련한 전공을 배워보고 싶어요. 지금 전공은 절대, 두 번 다시는 F학점 받는 일 없을 거라 약속 드려요. 복수 전공하게 해주면 안 돼요?”홍혜림: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어?”진윤이 멍해졌다. “네?”홍혜림이 말했다. “네가 나에게 하려는 말이 그거야?”진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그게 아니면요?”홍혜림: “사람을 치거나, 교통사고를 낸 게 아니고?”
눈에 띄게 변한 진윤의 모습을 홍혜림은 믿을 수가 없었다.집 바로 앞이 학교라 진윤은 기숙사 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집에 자주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집에서 레이싱 게임을 할 때마다 부모님의 잔소리가 끊이질 않아 진윤은 큰형 아파트에 몰래 숨어있는 것을 좋아했다. 진윤의 큰형은 일 때문에 그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9살이나 더 많은 그의 형은 가끔 부모님보다 더 진윤을 아끼기도 했다. 심지어 가끔은 진윤의 편을 들어 그의 비밀을 지켜주기도 했다. 큰형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러니 제발 눈치껏 본가로 들어오라고 홍혜림은 몇 번이고 진윤에게 얘기했었다. 사실 예비 며느리는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진윤을 본가로 불러들이는 이유는 진윤이 곁에 없으니 도무지 관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윤은 그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매번 홍혜림이 같은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그는 두 귀를 닫고 못 듣는 척 연기했다. 하지만 이번엔 홍혜림이 먼저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진윤 스스로 본가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진윤에 홍혜림은 혹시 형제가 싸우기라도 한 걸까 전화를 했지만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에 홍혜림은 생각했다. ‘이 자식 또 무슨 사고라도 치고 돌아와서 얌전한 척 연기하는 거 아냐?’‘교통사고라도 내서 배상해 줘야 하는 건가? 아니면 레이싱 카가 망가져서 새 차를 살 돈이 필요한 건가?’‘설마 사람을 친 건 아니겠지?’진윤이 집에서 열심히 공부할수록 홍혜림은 점점 더 사람을 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매일 밤 아무 일도 없는 척 진윤의 방 앞을 서성이며 생각했다. ‘먼저 잘못을 인정하면 요즘 얌전하게 지냈던 걸 정상참작해서 욕을 좀 덜해야겠어.’하지만 3일이 지나도록 진윤은 홍혜림을 부르지 않았다. ‘이상해.’‘너무 이상하잖아!’‘설마 사람을 친 것보다 더 큰 사고는 아니겠지?’‘대체 얼마를 배상해야 하는 거야?’1 주일이 지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홍혜림은 진윤의
진윤: ...강한서가 진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싫다면서 현 상황을 바꿔보려고 하지도 않은 거야?”진윤: ...‘왜 선생님께 혼나는 기분이 드는 거지? 진지하게 핵심만 꼬집고 있잖아.’입을 달싹이던 진윤은 변명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진윤은 그동안 어떻게 반항해야할지,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강한서가 말했다. “네 인생은 네 거야. 네가 열심히 살든, 대충 살든 네 하루하루는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어. 네 태도에 따라 싫었던 그 경험들이 사라지지 않아. 단지 네가 싫다는 이유로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않고 대충 흘려보냈을 뿐 그것들은 계속 존재해.”“대충 공부해서 대충 졸업하면 또 대충 취직이나 하겠지. 아니면 아예 너희 회사로 입사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다음에? 그렇게 평생을 대충 흘려보낼 거야? 그게 네가 원하는 인생이야?”멍하니 강한서를 쳐다보던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아뇨.”부모님이 선택해준 전공이 싫어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얼른 졸업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강한서의 말처럼 졸업 후엔? 전공에 맞는 직업을 찾아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갈까, 아니면 부모님 회사에 입사해 되는대로 살아갈까. 어떤 선택이든 그건 진윤이 원하는 인생은 아니었다. 4년이란 시간을 허무히 흘러 보내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전 이미 3학년이에요. 전과를 하기엔 늦었잖아요. 이젠 뭘 하려고 너무 늦은 것 같아요.”속상한 듯 대답하는 진윤의 말에 한현진이 말했다. “진윤 씨는 완전 MZ세대잖아요. 이제 갓 이십 대 초반인데 뭘 해도 늦지 않은 나이예요. 너무 빨리 본인의 가능성을 단정 짓지 말아요. 60세에 대학생이 됐다는 기사 못 봤어요?”“진윤 씨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도 늦었다고 생각 안 하는데, 진윤 씨가 왜 겁을 내요?”“전...”입술을 달싹이던 진윤이 한참이 지나서야 한숨을 내뱉었다. “두 사람 문제아 갱생